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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믿음;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는 유일한 수단 (손재익 목사/한길교회)

에반젤(복음) 2020. 2. 22. 16:27



<제7회 종교개혁 신앙강좌, 2017년 10월 8-9일>

<고신총회 종교개혁 500주년 준비위원회>


오직 믿음Sola Fide; 의롭다 칭함을 얻게 되는 유일한 수단


손재익 목사

(한길교회)


서론


   종교개혁을 통해 강조된 다섯 가지 오직(Sola)은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 없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 중요한 것을 딱 하나 꼽으라면 단연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오직 믿음”은 다른 나머지 오직을 이끄는 계기가 되었고,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오직 믿음”이라는 주제는 “죄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마르틴 루터의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1) 루터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는 당시의 가르침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는 시편과 로마서 말씀을 통해 회심한 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강조했다. 이 교리는 후대에 칭의론(稱義論, Doctrine of Justification)이라는 형태로 더욱 굳건해 졌으며, 루터는 이 교리를 가리켜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 교리”(articulus iustificationis est 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라고 했다.2) 그는 천지와 만물이 다 파괴되더라도, 이 교리에 관한 것은 단 하나도 포기되거나 타협될 수 없다고 했다.3)

   “오직 믿음”(Sola Fide)은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alone) 중 “오직 믿음으로써”(by faith alone)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칭의론을 다룰 수밖에 없다.4) 그렇기에 여기서는 칭의론의 일부 내용도 함께 다룰 수밖에 없으나 가급적이면 주로 “오직 믿음”과 관련해서만 다루려고 한다.



본론


I. 성경과 신조의 가르침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

   하나님께는 여러 속성이 있다. 그 중에 공의와 거룩이 있다(신 32:4; 레 11:44-45; 19:2; 20:26; 사 47:4; 벧전 1:15-16). 하나님은 완전히 의로우시며, 완전히 거룩하시다(계 16:5,7). 하나님께는 불의가 전혀 없다(롬 9:14).


의롭게 되기 위해서 필요한 율법의 요구와 순종

   공의로우시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인이 의롭게 되려면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한다. 로마서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신다.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는 죄인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은 율법을 완전히 행할 수 없다. 갈라디아서 3: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에 의하면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로마서 3:20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다. 로마서 3:10-18에 의하면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고, 몸과 영혼의 모든 기능이 타락하여 의를 행할 수 없게 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 제2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25문답). 로마서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한다.

   이러한 이유로 루터는 “죄 많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다. 이런 점에서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주제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과 분리할 수 없다.5)

   사람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고 우리의 어떤 행동으로도 의로워질 수 없다. 개인적인 자질이나 공로는 아무런 근거가 될 수 없다(시 14:3; 130:3; 143:2; 롬 3:10; 빌 3:4-5).6)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대체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이유로 비참하기만 한 것인가? 감사하게도 율법을 행함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를 대신할 다른 방법을 마련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의를 획득하는 것이다(벧전 3:18).

   죄인 된 사람은 율법을 행할 수 없지만, 완전한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지키셨고, 나아가 고난당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죽으셨다(WCF 제8장 제4절). 이를 통해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속죄를 이루셨고, 성자 하나님의 공의를 충분히 만족시키셨다(WCF 제8장 제5절; WLC 제57, 70-71문답). 이를 통해 하나님의 의가 되셨다. 이 사실을 다음에서 언급한다. 예레미야 23:5-6 “(5)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6)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야 33:15-16 “(15)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라 (16)그 날에 유다가 구원을 받겠고 예루살렘이 안전히 살 것이며 이 성은 여호와는 우리의 의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고린도전서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는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얻어야 할 의를 우리 대신 획득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얻으신 ‘하나님의 의’를 달리 표현하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a righteousness from God)라고 할 수 있는데,7)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속죄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셨다. 이를 통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을 다른 방법을 마련해 주셨다. 이 사실은 사도들의 복음 전파에도 포함되었다. 사도행전 13:38-39 “(38)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39)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얻음

   이제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를 어떻게 죄인 된 우리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답이 바로 ‘오직 믿음’이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의 것으로 만든다. 이 때 믿음이라는 방법과 그 외에 다른 방법도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다.

   그리스도께서 획득하신 의를 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 믿음을 통해서라는 사실은 성경 곳곳(창 15:6; 시 32:1-2; 렘 23:6; 합 2:4; 슥 3:1-5; 눅 18:9-14; 롬 1:17; 3:21-31; 4:1-25; 5:1-2; 10:4-6; 고후 5:18-21; 갈 2:16; 3:6,11; 3:24; 빌 3:9; 히 10:38)에서 다루고 있지만, 특히 로마서 3:19-31이 가장 잘 요약적으로 보여준다.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27절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30절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또한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 구절들은 ‘믿음’이 그것을 가능케 한다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인정함을 받는 방법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행위가 아닌 믿음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기 위한 방법이 믿음이라고 할 때,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는 안 될까? 혹은 믿음과 함께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하지는 않는가? 그렇지 않다.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며, 오직 믿음으로 충분하다. 이 사실은 다음의 성경구절들이 강조한다.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왜 행위로는 불가능한가?

   왜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가? 타락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3문답).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5문답).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2문답).


오직 믿음으로

   믿음은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수단이라는 말은 도구, 방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사실을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시편과 로마서)에서 발견했고, “이신칭의”(以信稱義, justification by faith alone)라는 가르침으로 요약했다.


개혁주의 고백문서의 가르침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개혁주의 고백문서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2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61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제2절,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0문답은 “오직 믿음”을 고백한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2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우리의 칭의

Our Justific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게obtain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a true faith을 일으켜 주셨음kindles을 믿습니다.1)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공로merits와 함께 받아들이고embraces, 그분을 우리 자신의 소유own로 만들고, 그분 외에besides Him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seek 않는 것입니다.2)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반드시 따라와야 하기must necessarily follow 때문입니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besides Him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a terrible blasphemy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반쪽짜리 구주only half a Savior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느니라we are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faith apart from works of law(롬 3:28)고 분명하게 말합니다.4) 동시에 엄격히 말하자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5)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받아들이는데embrace 사용된 수단일 뿐only the instrument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공로merits로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많은 거룩한 사역들works을 우리에게 전가하셨습니다imputes.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our righteousness이고, 믿음은 우리가 그분의 모든 혜택들benefits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게 하는 수단instrument입니다. 이 혜택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 그것들은 우리의 죄를 면해 주기acquit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 요 16:14; 고전 2:12; 엡 1:17-18   2) 요 14:6; 행 4:12; 갈 2:21   3) 시 32:1; 마 1:21; 눅 1:77; 행 13:38-39; 롬 8:1   4) 롬 3:19-4:8; 10:4-11; 갈 2:16; 빌 3:9; 딛 3:5   5) 고전 4:7   6) 렘 23:6; 마 20:28; 롬 8:33; 고전 1:30-31; 고후 5:21; 요일 4:10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0문: 당신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됩니까?

  답: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믿음으로만only by true faith 됩니다.2) 비록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크게 어겼고 단 하나도 지키지 않았으며3) 여전히 모든 악으로 향하는 성향이 있다고4) 나의 양심conscience이 고소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공로가 전혀 없이 순전히sheer 은혜로5) 그리스도의 온전히 만족케 하심satsfaction과 의로움righteousness과 거룩함holiness을 선물로 주십니다.6) 하나님께서는 마치 나에게 죄가 전혀 없고 또한 내가 죄를 짓지 않은 것처럼, 실로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obedient을 내가 직접 이룬 것처럼 여겨 주십니다.7) 오직 믿는 마음a believing heart으로만 나는 이 선물을 받습니다accept.8)


2) 롬 3:21-26; 5:1-2; 갈 2:16; 엡 2:8-9;  빌3:9   3) 롬 3:9-12; 약 2:10-11   4) 롬 7:23   5) 신 9:6; 겔 36:22; 롬 3:24; 엡 2:8; 딛 3:5   6) 롬 4:24-25; 고후 5:21; 요일 2:1-2   7) 롬 4:4-8; 고후 5:19   8) 요 3:18; 롬 3:22  


61문: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by faith alone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9)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righteousness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10)


9) 고전 1:30; 2:2   10) 롬 10:10; 요일 5: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칭의(稱義)-의롭다 하심-에 관하여

Of Justification


2.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 의지하게 하는receiving and resting on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the alone instrument of justification.4) 그러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에게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모든 구원하는 은혜들을 수반하니,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한다.5)


4) 요 1:12; 롬 3:28; 5:1   5) 약 2:17,22,26; 갈 5:6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3문: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란 무엇입니까?

  답: 칭의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act로서, 그분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pardoneth,1) 그분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우리를 받아 주시는 것accepteth입니다.2)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the righteousness of Christ를 우리에게 돌려주시는 일이며imputed to us,3) 우리는 오직 믿음faith alone으로 그 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4)


1) 롬 3:24-25; 4:6-8   2) 고후 5:19,21   3) 롬 5:17-19   4) 갈 2:16; 빌 3:9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0문: 칭의(稱義) -의롭다 하심- justification란 무엇입니까?

  답: 칭의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행위로서,1) 그분이 그들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그분이 보시기에 의로운 자로 받아주시고 간주하시는accepts and accounts 것입니다.2)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이 행한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3)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전가하셨고imputed,4) 오직 믿음으로 받는,5)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과 충분한 속죄satisfaction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1) 롬 3:22,24-25; 4:5   2) 고후 5:19,21; 롬 3:22,24-25,27-28   3) 딛 3:5,7; 엡 1:7   4) 롬 5:17-19; 4:6-8   5) 행 10:43; 갈 2:16; 빌 3:9


두 가지 유의점

   “오직 믿음”을 강조할 때 두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 하나는 믿음 그 자체가 의롭게 하는 근거라는 오해다. 다른 하나는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오해다.


믿음이 아닌 그리스도

   첫 번째 오해를 살펴보자.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때 믿음 그 자체가 의롭게 하는 근거인가? 아니다.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다. 믿음은 칭의의 수단(도구)일 뿐이다. 다시 말해 ‘믿음으로’라는 말을 ‘믿음 덕분에’라고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믿음은 그 자체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지 않는다.

   믿음이 수단이라는 사실은 로마서 3:22, 31에 사용된 “믿음으로”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 피스데우스(dia. pi,stewj)를 통해 알 수 있다.


   22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dia. pi,stewj)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1절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dia. th/j pi,stewj)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위 말씀에 사용된 디아(dia)는 속격과 함께 쓰일 때 수단 내지 방편을 뜻한다. 이처럼 믿음은 그 자체에 어떤 능력을 가진 것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말에서 “믿음으로”라는 말의 한글 표현은 자칫 오해를 하게 만든다. 믿음이 의롭다 함을 얻는 직접적인 효력(효력 있게 하는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믿음으로’라는 말은 영어로 표현하면 by faith이며 혹은 through faith다. 믿음은 직접적인 원인이 아닌 도구적 원인(instrumental cause)이다.

   믿음이 단지 수단이라면 칭의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다.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propter fidem)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의롭게 되는 것’(propter Chirstum)이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토록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이에 대해서는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2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제1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3문답이 잘 설명하고 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2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한 우리의 칭의

Our Justification Through Faith in Christ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 위대한 신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얻게obtain 하기 위해서 우리 마음속에 참된 믿음a true faith을 일으켜 주셨음kindles을 믿습니다.1) 이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모든 공로merits와 함께 받아들이고embraces, 그분을 우리 자신의 소유own로 만들고, 그분 외에besides Him 다른 어떤 것도 구하지seek 않는 것입니다.2)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없거나 아니면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어서, 믿음을 통하여through faith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한 사람은 완전한 구원을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 반드시 따라와야 하기must necessarily follow 때문입니다.3) 그러므로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분 외에besides Him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엄청난 불경죄a terrible blasphemy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반쪽짜리 구주only half a Savior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함께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되느니라we are justified by faith alone, or by faith apart from works of law(롬 3:28)고 분명하게 말합니다.4) 동시에 엄격히 말하자면 믿음 그 자체가 우리를 의롭게 해 준다는 뜻은 아닙니다.5) 왜냐하면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의로 받아들이는데embrace 사용된 수단일 뿐only the instrument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공로merits로 당신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많은 거룩한 사역들works을 우리에게 전가하셨습니다imputes.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our righteousness이고, 믿음은 우리가 그분의 모든 혜택들benefits 안에서 그분과 교제하게 하는 수단instrument입니다. 이 혜택들이 우리의 것이 될 때에, 그것들은 우리의 죄를 면해 주기acquit에 충분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1) 요 16:14; 고전 2:12; 엡 1:17-18   2) 요 14:6; 행 4:12; 갈 2:21   3) 시 32:1; 마 1:21; 눅 1:77; 행 13:38-39; 롬 8:1   4) 롬 3:19-4:8; 10:4-11; 갈 2:16; 빌 3:9; 딛 3:5   5) 고전 4:7   6) 렘 23:6; 마 20:28; 롬 8:33; 고전 1:30-31; 고후 5:21; 요일 4: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칭의(稱義)-의롭다 하심-에 관하여

Of Justification


1. 하나님께서 효력 있게 부르신 자들을 값없이freely 의롭다 칭하시니justifieth1) 그들 속에 의righteousness를 주입함으로써가 아니라not by infusing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by pardoning 그들의 인격을 의로 간주하여 받아주심으로by accounting and accepting 하신다. 그들 안에서 이루어진 어떤 것이나 그들이 행한 어떤 것으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 하셨다but for Christ’s sake alone. 믿음 자체faith itself나 믿는 행위the act of believing나 어떤 복음적인 순종을 그들의 의로 여겨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순종과 속죄satisfaction를 그들에게 전가함으로써by imputing 하신다.2) 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 의지하며, 이 믿음은 그들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3)


1) 롬 8:30; 3:24   2) 롬 4:5-8; 고후 5:19,21; 롬 3:22,24-25,27-28; 딛 3:5,7; 엡 1:7; 렘 23:6; 고전 1:30-31; 롬 5:17-19   3) 행 10:44; 갈 2:16; 빌 3:9; 행 13:38-39; 엡 2:7-8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3문: 믿음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in the sight of God 의롭게 합니까justify?

  답: 믿음이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에 항상 수반하는 다른 은혜들이나 믿음의 열매인 선행good works 때문이 아니며,1) 믿음의 은혜나 믿음에서 난 그 어떤 행위가 칭의를 위해서 죄인에게 전가되기 때문도 아닙니다.2)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수단instrument이기 때문입니다.3)


1) 갈 3:11; 롬 3:28   2) 롬 4:5; 10:10   3) 요 1:12; 빌 3:9; 갈 2:16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이유는 ‘믿음에 근거한 칭의’(justification based upon faith)가 아니라 ‘믿음을 통한 칭의’(justification by faith)다.8) 믿음은 칭의의 근거가 아니라 칭의의 수단(혹은 방편, 도구)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제2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3문답). 칭의의 근거는 오직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이며, 믿음도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주권적 은혜의 선물(엡 2:8-10, 빌 1:29)이기에 믿음이 칭의를 받을 수 있는 근거와 공로가 될 수 없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것이 됨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의가 곧 칭의의 근거요, “오직 믿음”(Sola Fide)은 “오직 그리스도”(Solas Christus)와 분리될 수 없다.

   오직 믿음과 오직 그리스도의 관련성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1, 61문답이 잘 설명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21문: 참된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답: 참된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모든 것이 진리라고 여기는 확실한 지식a knowledge and conviction이며,3) 동시에 성령께서4) 복음으로써5) 내 마음속에 일으키신 굳은 신뢰assurance입니다.6) 곧 순전히 은혜sheer grace로,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 때문에 하나님께서 죄 사함과 영원한 의로움과 구원을7)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나에게도 주심을8) 믿는 것입니다.9)


3) 요 17:3; 롬 4:20-21; 히 11:1,3; 약 1:6   4) 마 16:17; 요 3:5; 행 16:14; 고후 4:13; 빌 1:19   5) 막 16:15; 행 10:44; 16:14; 롬 1:16; 10:17; 고전 1:21   6) 시 9:10; 롬 4:16-21; 5:1; 10:10; 엡 3:12; 히 4:16   7) 눅 1:77-78; 요 20:31; 행 10:43; 롬 3:24; 5:19; 갈 2:16; 엡 2:8; 히 10:10   8) 딤후 4:8   9) 합 2:4; 롬 1:17; 갈 3:11; 히 10:38  



61문: 당신은 왜 오직 믿음으로만by faith alone 의롭게 된다고 말합니까?

  답: 나의 믿음에 어떤 가치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나를 받으실 만한 것은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의 만족케 하심과 의로움과 거룩함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의가 됩니다.9) 오직 믿음으로만 이 의righteousness를 받아들여 나의 것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10)


9) 고전 1:30; 2:2   10) 롬 10:10; 요일 5:10



전가, 그리스도의 의를 받는 방법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의는 어떻게 믿음을 통해 나의 것이 되는가? 믿음은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轉嫁, imputation)하는 일에 있어서 수단이 된다. ‘전가’(轉嫁, imputation)란 옮긴다, 떠넘긴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로움이신데, 그 의로움이 우리의 의로움이 되기 위해서 ‘전가’된다. 우리에게 옮겨진다. 우리의 것으로 돌려진다. 우리가 의로움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의로움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한 것도 아닌데 이제 우리의 것이 된다. 마치 우리가 한 것처럼 간주된다(account).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dikaiosu,nh qeou/)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죄인 사이의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9)이 이루어진다.


행위는 불필요한가?

   두 번째 오해를 살펴보자.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할 때 주의할 것은 행위가 불필요하다는 오해다. 믿음이 의롭게 하니, 믿음만 있으면 되고 행함은 없어도 되는가? 그렇지 않다. “행함이 아닌 믿음”이라고 할 때 행함의 불필요함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신자는 선행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해야 한다. 참된 믿음이란 선한 삶을 살게 만들어 준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오직 은혜로 주어지는 것인데, 그 믿음은 우리를 의롭다 칭해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나아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을 살게 해주는 근원이 된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약 2:17) “(20)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0-26)라고 했다.

   오직 믿음은 행함의 불필요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데 있어서 행위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의롭다 칭함을 받는 도구와 수단에 있어서 믿음만이 유일하다는 것이지, 신자의 구원에 있어서 믿음 외에 다른 것은 불필요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행함은 무엇인가? 행함은 칭의의 수단이 아니라 믿음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선한 일을 하는 것은 구원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의 필연적인 결과와 열매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믿음은 반드시 행함을 수반한다. 그러면서도 행함은 공로가 될 수 없다. 행함은 믿음의 결과와 열매일 뿐이다.10) 이 사실을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4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4문답,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제2절,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3문답이 잘 설명하고 있다.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4조 우리의 성화와 선행

Our Sanctification and Good Works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hearing과 성령님의 역사하심the operation of the Holy Spirit으로 말미암아,1) 사람 안에 생기는 이 참된 믿음this true faith이 그 사람을 중생하게 하여 새 사람으로 만든다는 것을 믿습니다.2) 이 참된 믿음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살게 하며 죄의 노예 됨the slavery of sin에서 자유롭게 해 줍니다.3) 그러므로 이 의롭게 하는 믿음this justifying faith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선하고 거룩한 삶을 사는데 무관심하게indifferent 만든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4) 오히려 의롭게 하는 믿음이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5) 다만 자기 사랑이나 정죄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어떤 일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믿음이 사람 안에서 작용하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헛된 믿음an empty faith에 대해 말하지 않고 성경이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faith working through love(갈 5:6)이라 일컫는 것에 대해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에서 명령하신 행위들을 자신에게 적용시키도록 사람을 권유하는induce 것입니다. 믿음의 선한 뿌리로부터 나온 이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행위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거룩하게sanctified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우리의 칭의에 이바지하지count 않습니다. 왜냐하면 심지어 우리가 어떤 선도 행하기 전에,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는 의롭게 되기 때문입니다.6) 그렇지 않으면 나무 그 자체가 선하지 않고서 그 나무의 열매가 선할 수 없는 것 이상으로 그 행위들이 선한 것일 수 없습니다.7)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하지만, 공로merit로 삼기 위해서 행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공로로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행하는 선행에 대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빚지고 있다기보다 차라리 우리가 하나님께 빚지고 있습니다.8)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빌 2:13). 우리가 다음과 같이 기록된 말씀에 유의합시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10).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행을 보상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9)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물들을 주시는 것은 당신의 은혜에 의한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할지라도, 우리는 그 선행에 우리의 구원의 근거base를 두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육체flesh로 더럽혀지지 않고 마땅히 형벌을 받지 않는 단 하나의 행위도 할 수 없습니다.10) 설령 우리가 한 가지 선행을 보여줄 수 있다하더라도, 한 가지 죄에 대한 기억만으로도 하나님께서 그 선행을 거절하시기에 충분합니다.11) 따라서 우리가 우리 구주의 고난passion과 죽음의 공로the merit of the death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항상 의심에 가득차서 어떤 확신도 갖지 못한 채 방황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가련한 양심poor consciences은 끊임없이 괴로워할 것입니다.12)


1) 행 16:14; 롬 10:17; 고전 12:3   2) 겔 36:26-27; 요 1:12-13; 3:5; 엡 2:4-6; 딛 3:5; 벧전 1:23   3) 요 5:24; 8:36; 롬 6:4-6; 요일 3:9   4) 갈 5:22; 딛 2:12   5) 요 15:5; 롬 14:23; 딤전 1:5; 히 11:4,6   6) 롬 4:5   7) 마 7:17   8) 고전 1:30-31; 4:7; 엡 2:10   9) 롬 2:6-7; 고전 3:14; 요이 8; 계 2:23   10) 롬 7:21   11) 약 2:10   12) 합 2:4; 마 11:28; 롬 10:1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64문: 이러한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무관심하고 사악하게 되지 않겠습니까?5)

  답: 아닙니다.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사람들이 감사의 열매fruits of gratitude를 맺지 않는 것은 불가능합니다.6)


5) 롬 3:8   6) 시 92:12-15; 마 7:18; 눅 6:43-45; 요 15:5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 칭의(稱義)-의롭다 하심-에 관하여

Of Justification


2. 그러므로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 의지하게 하는receiving and resting on 칭의의 유일한 수단이다the alone instrument of justification.4) 그러나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에게 믿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다른 모든 구원하는 은혜들을 수반하니, 그것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사랑으로 역사한다.5)


4) 요 1:12; 롬 3:28; 5:1   5) 약 2:17,22,26; 갈 5:6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73문: 믿음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in the sight of God 의롭게 합니까justify?

  답: 믿음이 죄인을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하는 것은 믿음에 항상 수반하는 다른 은혜들이나 믿음의 열매인 선행good works 때문이 아니며,1) 믿음의 은혜나 믿음에서 난 그 어떤 행위가 칭의를 위해서 죄인에게 전가되기 때문도 아닙니다.2) 다만 그리스도와 그분의 의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수단instrument이기 때문입니다.3)


1) 갈 3:11; 롬 3:28   2) 롬 4:5; 10:10   3) 요 1:12; 빌 3:9; 갈 2:16



II. 교회 역사의 가르침


   “오직 믿음으로”라는 주제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역사를 통해 논쟁되기 전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11) 교부들은 기독론과 삼위일체론 논쟁에 몰두하느라 이신칭의(以信稱義, iustificatio per fidem) 교리를 깊이 탐구하지 못했다. 그들의 구원에 대한 논의는 죄 사함과 영생의 선물에 초점이 있었다.12) 칭의에 대한 최초의 진지한 논의는 4세기에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주의자들과의 논쟁 과정에서 전개됐고,13) 교회의 진지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다.14)


로마가톨릭교회의 오해와 루터의 발견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자신들의 유일한 공식 번역 성경인 라틴어 번역 성경 벌게이트(Vulgate)에서 성경 원문의 헬라어 “의롭게 하다”(dikaio,w, 롬 3:28)를 법정적 의미를 지닌 “의롭다고 선언하다”로 번역하지 않고 “의롭게 만들다”(justificare)로 잘못 번역하였다.15) justificare는 ‘의로운’이라는 뜻의 justus와 ‘만들다’라는 뜻의 facere의 합성어다.16) 이 단어에서 의화(化)라는 말이 나왔다.

   justificare라는 단어로 인해 로마 가톨릭은 칭의를 오해했으니 그들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법정에서의 선언적 행위가 아니라, 인간 편의 선한 행위와 성화의 노력에 의해 점진적으로 완성되어 가는, 즉 인간 자신을 의롭게 만들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용어도 칭의(稱義) 대신 의화(化)라고 했다.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영향을 받아 인간은 은혜의 도움으로 의로운 행동을 하게 되고, 이 의는 다음 은혜를 받게 되는 전제 조건이 된다고 보았다. 토마스는 교회의 신부가 행하는 성례에 참예함으로써 은혜의 주입(gratia infusa)을 받게 되는데, 이 은혜는 그 안에 있는 의의 소질을 깨워 의로운 행동을 하게 만든다고 보았으며, 이런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우리 안에 의의 습성(habitus)이 생겨나고, 우리는 의인이 되어가며, 마지막 의인 판정은 이 땅에서 되지 않고 하늘나라에서 가능하다고 말한다.17)

   이러한 이유 때문에 중세는 행함을 강조했다. 사람이 의로워지려면 열심히 수행(修行)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중세를 살았던 루터는 회심하기 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딱딱한 바닥에서 잠을 자고, 금식하면서 로마에 있는 성베드로교회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름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노력을 했다. 또한 수도원 생활, 경건 훈련, 고해성사, 미사, 고행, 선행 등을 했다. 그렇게 해야만 의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는 벨기에 신앙고백서 제23조에 암시된 대로 시편과 로마서를 통해 칭의론을 깨달았다.18) 시편 32편과 로마서 1:17을 통해 중세 로마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그가 깨달은 바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의가 아닌 외부적 의를 통해 의롭다 칭해 주신다. 바울에 의하면 죄인은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내려주시는 낯선 의(iustitia aliena)를 믿음으로(ex fide) 의롭게 된다. 의의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자신 안에 습성이 된 고유한 의(iustitia propria)를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낯선 의를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이다.19)

   루터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하여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라는 말씀에 “오직”(독일어로 allein)이라는 단어를 덧붙였다.20) 루터가 부사 하나를 덧붙인 것은 번역을 잘못한 것이 아니라 본문의 의미를 더 분명히 살린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표현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21)

   루터가 믿음을 강조했지만, 그가 행위를 배제한 것은 결코 아니다. 루터는 당시 오직 믿음을 주장한 것으로 인해 로마가톨릭으로부터 율법폐지론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는데, 그는 믿음은 행위를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행의 열매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22)

   루터는 바울이 헐려고 한 것은 ‘율법의 행위’(opera legis)이지 결코 행위 자체는 아니라고 보았으며, 바울이 도리어 ‘신앙의 행위’(opera fidei)를 세우려 했다고 주장한다. 루터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는 신앙과 은혜 밖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며, 두려움을 주어 강요하는 율법을 통해 이루어진 행위이며, 일시적인 약속을 통해 자극되어 하는 행위일 뿐이다.23)

   루터는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하는 것이다. 악행이 악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사람이 악행을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24)


로마가톨릭교회의 계속되는 오해

   로마가톨릭은 트렌트 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칭의론에 대해 이단으로 정죄했다. 1547년 1월 13일 여섯 번째 회기에서 “칭의에 대한 포고”(Decretum de iustificatione)를 발표한다. 그들은 칭의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16장에 걸쳐 설명하고 33개항의 법규를 통해 칭의에 대한 잘못된 의견들을 정죄한다.25) 공의회는 믿음이 선행과 협력해서 칭의를 크게 하고, 이것은 칭의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말한다(6.10.). 칭의는 부분적으로 인간의 행위를 토대로 한다고 본다. 만일 누구든지 죄인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받고 칭의의 은혜를 획득하기 위한 아무 협력도 사람 편에 요구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사람이 자신의 의지의 활동을 하는 것이 필요 없다고 말한다면 그는 저주를 받는다고 한다(6.11).


개혁주의 구원론에 있어서의 핵심되는 교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믿음은 루터 이후 개혁주의 구원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뤄진다.

   루터의 제자인 멜랑흐톤이 1530년에 작성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Augsburg Confession)에서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능력과 공로와 행위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칭의 교리(Article IV: Of Justification)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칼뱅은 칭의를 신앙의 요점이라고 했고,26) 칭의 교리를 중점적으로 다뤘다.27) 칼뱅의 영향을 받은 프랑스 신앙고백서는 제18조에서, 그 영향을 받은 벨기에 신앙고백서는 제22-23조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교리에 대해 다룬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제60-61문답에서 오직 믿음을 다룬다.28)

   청교도 신학자들 역시 그러했으니 존 오웬은 칭의 교리에 대한 방대한 책을 썼고,29) 제임스 뷰캐넌 등이 칭의 교리를 잘 정리했다.3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11장과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0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답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다룬다.



III. 2017년 현대 교회에서 칭의 교리의 의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진리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개신교회를 붙들어왔다. 하지만, 교회 역사 상 늘 그러했듯이 성경적이고 전통적인 칭의론을 흔드는 이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있다.31) 그렇기에 “오직 믿음으로”라는 교리는 2017년 현재 매우 중요하다.32) 오늘날 우리를 위협하는 칭의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다.


오늘날의 로마가톨릭교회

   로마가톨릭교회의 칭의론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한다. 물론 1500년대의 로마가톨릭과 2017년의 로마가톨릭은 다르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33) 1999년 10월 31일,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이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문』(Joint Declaration o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the Lutheran World Federation and the Catholic Church)을 발표 한 것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란은 있지만,34)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 있어서 조금의 변화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이 선언문을 통해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고 선언하고 있다(16, 25, 26항).

   그러면서도 로마가톨릭은 분명히 칭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으니 199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가 반포한 『가톨릭 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 1992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1989조 ...의화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성화와 내적 인간의 쇄신도 내포한다.”

1992조 의화는 신앙의 성사인 세례로 주어진다. 의화는 당신 자비의 능력으로 우리를 내적으로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우리를 부합하게 한다....


   그들은 교리서를 통해 칭의(稱義) 대신 의화(化)라고 하며,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는다. 칭의가 오직 믿음이 아닌 세례로 주어진다고 본다.

   로마가톨릭의 공식적인 입장은 『칭의에 관한 공동선언문』이 아니라 『가톨릭 교회 교리서』라는 점을 볼 때, 그들의 칭의론은 중세 때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벗어나 있다.


새 관점 학파

   20세기 말 21세기 초반에 “오직 믿음으로”와 관련하여 가장 위협적인 것은 새 관점 학파의 주장이다. 새 관점 학파란 바울에 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 약칭으로 NPP)을 주장하는 학파다. 제임스 던(James D. G. Dunn), 톰 라이트(Nicholas. T. Wright) 등이 대표적이다.35) 새 관점은 칭의와 관련하여 다양한 신학적 특이점이 있지만(특히 전가 교리에 관하여), 여기서는 “오직 믿음”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만 지적하고자 한다.

   그들은 루터가 바울 신학의 중심을 칭의론으로 본 것은 잘못이며 루터가 칭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1세기 유대교 문헌에 근거하여, 로마서 3:20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로마서 3:28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에 나오는 “율법의 행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했던 율법규정이라고 주장한다.36) 바울이 염두에 둔 율법의 행위란 할례, 안식일, 음식법, 정결법 같은 유대교의 율법 문제라고 본다.37) 바울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를 비판했다고 본다.38)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한 이유는 유대교가 행위를 중요하게 여긴 종교라서가 아니라, 이방인을 배제한 채 유대인 자신들만을 우월한 민족으로 여긴 민족적 배타주의 때문이라고 본다.39)

   또한 톰 라이트의 경우 칭의를 현재 칭의(the Present Justification)와 미래 칭의(the Final Justification)로 구분하고,40) 미래 칭의가 신자의 삶 전체에 근거해 공개적으로 확증할 내용을 현재 칭의가 믿음에 기초해 지금 확증해 준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죄인들 안에서의 변화에 근거하여 죄인을 의롭게 여기신다고 믿는다.41) 그는 특히 로마서 2: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라는 말씀을 매우 강조한다.

   새 관점 학파의 주장은 믿음보다 행함을 강조하고, 행함이 없이는 칭의를 받을 수 없다는 식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성경과 신조의 가르침에 크게 벗어난다. 바울은 분명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비판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강조했으며, 삶의 방식이나 행위는 절대로 칭의의 근거나 수단이 될 수 없다.

   새 관점 학파의 잘못된 주장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동의하기도 한다. 한국교회에 톰 라이트 열풍이 불어 그의 신학을 동경하는 신학자와 목회자, 성도들이 점차 늘고 있다.42)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43)



IV. 한국교회가 기억해야 할 “오직 믿음”


   한국교회만큼 “믿음”을 강조하는 교회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의 의미를 잘못 적용하고 있다. 믿음을 단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수단으로, 혹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여부를 판단하는데 사용한다. 믿음 그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믿음은 복을 받기 위한 수단도,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기 위한 수단도 아니다. 믿음이 필요한 이유는 의롭다 칭함을 받는 유일한 수단(the alone instrument of justification)이기 때문이다(WCF 11:2).

   한국교회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또 한편으로는 행함을 등한히 하는 경향으로 이어진다. 믿기만 하면 된다는 가르침을 통해 행하지 않아도 될 것처럼 여긴다.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오직 믿음은 행함의 불필요함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다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데 있어서 행위가 아무런 기여를 하지 못한다는 의미에서 오직 믿음이다. 이는 성경이 분명히 가르치고 있고, 종교개혁자들도 분명히 한 점이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행위는 철저하게 배격하면서도, 구원받은 자의 삶에 반드시 동반되는 것이 그 열매로서의 선행이라고 가르쳐 온 것이 종교개혁사상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우리의 선행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선행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하나님께 감사를 나타내는 중요한 방편이고, 이웃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된다. 종교개혁자들은 선행을 결코 부차적인 것으로 다루지 않았다. 선행은 분명 참된 믿음의 열매다(WCF 11:2; 16:2; WLC 73). 다만 선행을 칭의와 연결시키지 않았을 뿐이다.

   “믿음”(Fide)이라는 단어 앞에 “오직”(Sola)이 나오게 된 배경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강조를 나타내는 것일 뿐, 행함이 필요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 말해 행함이 칭의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강조일 뿐, 행함이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살아 역사하는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행위를 수반한다. “오직 믿음으로”를 잘못 이해하여, 행함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결론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이 오직 믿음(Sola Fide)을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사실은 철저히 성경 본문에 근거한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에 근거한다. 믿음은 그 자체로 의의 근거가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 받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근거한다. 믿음은 사람의 행위나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은 오직 은혜(Sola Gratia)다. 이 모든 것에 사람이 한 것은 하나도 없고 오직 하나님께서 하셨다. 그렇기에 오직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이 있음을 고백한다.




1) Coram Deo란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죄인인 인간의 모습을 표현한 루터의 말이다. J. T. Bakker, Coram Deo: Bijdrage tot het onderzoek naar de structuur van Luthers Theologie (Kampen: Kok, 1956), 16.




2) Martin Luther, Werke (약칭 WA), Kritische Gesamtausgabe. Weimarer Ausgabe. Weimar Weimar-Köln-Tübingen: Böhlau. 40/III, 335, 352; 39/I, 205; Martin Luther, What Luther Say: An Anthology, ed. Ewald M. Plass, 3 vols (St. Louis: Concordia. 1959). 2:704 n.5.




3) WA, 50, 199,




4) 믿음은 구원의 서정 중 칭의만 아니라 회심(믿음과 회개)과도 관련된다. “오직 믿음”은 둘 중 칭의 교리와 관련된다.




5) 개혁파 신앙고백들은 한결같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기에 앞서 죄의 심각성을 먼저 고백한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해무, “믿음에 대한 개혁 신조들의 고백,” 『오직 믿음으로: 루터의 믿음과 신학』(서울: 성약, 2011), 84.




6)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은 ‘칭의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8), 153, 류호준 역,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CLC, 1990), 251, 이용중 옮김,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219.




7) NIV는 로마서 3:22를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a righteousness from God)라고 번역함으로써 22절에서 말하는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획득된 의”라는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 있다.




8) 유해무, “믿음에 대한 개혁 신조들의 고백,” 96.




9) 놀라운 교환이라는 표현은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신”에 처음 나타난다. Brandon Crowe, “Oh Sweet Exchange!: The Soteriological Significance of Incarnation in the Epistle to Diognetus,” ZNW 102 (2011): 96-109의 것을 Thomas R. Schreiner, Faith Alone (Grand Rapids: Zondervan, 2015), 박문재 옮김, 『오직 믿음』(서울: 부흥과개혁사, 2017), 42-43에서 재인용.




10) Institutes, III. xiiii. 8, 17-20; III. xvi. 1-2; III. xvii. 12.




11) 심지어 교부들이 칭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에 대해서는 Thomas C. Oden, The Justification Reader (Grand Rapids: Eerdmans, 2002), 19-23를 보라. 벌코프도 교부들 중 다수가 이신칭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본다. Louis Berkhof, Systematic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41), 511. 반면 니드햄은 오직 믿음이라는 개념이 몇몇 교부들 특히 크리소스토무스에게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Nick Needham, “Justification in the Early Church Fathers,” Justification in Perspective: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Challenges (ed. Bruce L. McCormack; Grand Rapids: Baker, 2006), 38-42. 초대교회가 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Schreiner, 『오직 믿음』, 29-57을 보라.




12) Bruce Demarest, The Cross and salvation: The Doctrine of Salvation (Wheaton: Crossway Books, 1997), 이용중 옮김, 『십자가와 구원』(서울: 부흥과 개혁사, 2006), 532.




13) Demarest, 『십자가와 구원』, 532.




14) Robert Letham, The Work of Christ (Leicester: IVP, 1993), 황영철 옮김, 『그리스도의 사역』(서울: IVP, 2000), 190.




15) 그러나 디카이오오(dikaio,w)는 법정적 의미를 갖는다(마 12:37; 롬 3:4,24; 4:5; 5:9; 8:30,33‘ 고전 6:11; 갈 2:16; 3:11; 5:4; 딤전 3:16; 딛 3:7; 약 2:24).




16) 이 번역어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온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칭의에 대해 바르게 이해하고 있었다. 비록 오늘날과 같이 정교한 형태의 지식으로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오직 믿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루터와 칼뱅도 아우구스티누스를 자주 인용한다. 그럼에도 그가 잘못된 단어를 사용한 것은 헬라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일 뿐 칭의교리를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17)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서울: 좋은씨앗, 2017), 56-57.




18) 흔히 로마서 1:17을 통해 처음 깨달은 것으로 오해하지만, 사실은 루터는 이미 시편을 강의하면서(1513-1515년) 칭의 교리를 깨달았다. 이후 로마서 강의를 통해 칭의론을 발전시켰으며, 로마가톨릭 신학자들과의 논쟁을 통해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19)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57-58.




20) Thomas R. Schreiner, Romans, BECNT (Grand Rapids: Baker, 1998), p.203, n.5.




21) 한글성경의 경우 로마서 3:27의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에 “오직”이 나온다(개역개정, 개역한글, 현대인의 성경 등에는 있고, 공동번역, 표준새번역에는 없다). 이것 역시 헬라어 원어와 영어 번역 성경에는 없는 표현으로 아마도 한글성경 번역자들이 덧붙인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갈라디아서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eva.n mh.)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와 빌립보서 3: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eva.n mh.)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를 말씀하고 있다. 오직에 해당하는 eva.n mh.의 해석에 대한 논의는 Thomas R. Schreiner, Galatians, ZECNT (Grand Rapids: Zondervan, 2010), 김석근 옮김, 『강해로 푸는 갈라디아서』(서울: 디모데, 2017), 168-169를 보라.



22)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78; 유해무, “오직 믿음으로-루터가 이해한 ‘믿음’,” 『오직 믿음으로: 루터의 믿음과 신학』(서울: 성약, 2011), 71-76.




23)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58-59.




24) De Liverate Christiana/Von der Freiheit eines Christen Menschen, Studien, Ausgabe, Bd 2. 288을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99에서 재인용.




25)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150.




26) Institutes, III. iii. 1; III. xi. 1.




27) 칼뱅은 칭의와 죄 용서의 관계를 Institutes, III. xi. 21-23에서 다룬다.




28) 앤서니 후크마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60문답이야 말로 칭의에 대한 서술 중 가장 감동적인 것(heart-warming) 중 하나라고 한다. Anthony A. Hoekema, Saved by G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8), 170, 류호준 역,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CLC, 1990), 278, 이용중 옮김, 『개혁주의 구원론』(서울: 부흥과개혁사, 2012), 242.




29) John Owe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the Imputation of the Righteousness of Christ: Explained, Confirmed, and Vindicated,” The Works of John Owen, vol 5. William H. Goold, ed., (Carlisle: Banner of Truth, 1965), 2-400.




30) James Buchanan, The Doctrine of Justification: An Outline of Its History in the Church and Its Exposition from Scripture (Reprint; London: Banner of Truth, 1961), 신호섭 옮김, 『칭의 교리의 진수』(서울: 지평서원, 2002)




31) 칭의 교리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잘 소개하고 정리한 책으로는 James K. Beilby and Paul R. Eddy, eds., Justification: Five Views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11)와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서울: 부흥과개혁사, 2016)를 보라.




32) 대다수의 경건한 신자들은 전혀 그렇지 않은데, 학자들을 통해 전통 교리가 부인되고 있다는 사실은 신학이 학문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를 생각하게 한다.




33) Schreiner, 『오직 믿음』, 112.




34) 당시에 양쪽 교회의 지도자들 중 많은 사람이 이 선언문을 흡족해 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양쪽 진영은 이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조항에 대한 토론을 계속하고 있다. 김용주, 『칭의, 루터에게 묻다』, 20; Schreiner, 『오직 믿음』, 379, 382.




35)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 관점 학파의 칭의론에 대한 비판으로는 다음을 보라. 박영돈, 『톰 라이트 칭의론 다시 읽기』(서울: IVP, 2016); John Piper, The Future of Justification: A Response to N. T. Wright (Wheaton: Crossway, 2007); 이승구, 『톰 라이트에 대한 개혁신학적 반응』(수원: 합신대학원출판부, 2013); Guy Prentiss Waters(가이 프렌티스 워터스), Justification and the New Perspectives on Paul (Phillipsburg: P&R, 2004), 배종열 옮김, 『바울에 관한 새관점: 기원, 역사, 비판』(서울: P&R, 2012); Schreiner, 『오직 믿음』, 168-191, 421-462.




36) N. T. Wright, Paul and the Faithfulness of God, 2 vols., Christian Origins and the Question of God (Minneapolis: Fortress, 2013), 184-187.




37) James D. G. Dunn, Jesus, Paul and the Law: Studies in Mark and Galatians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Press, 1990), 191-192.




38) N. T. Wright, The Climax of the Covenant: Christ and the Law in Pauline Theology (Edinburgh: T&T Clark, 1991), 240; Schreiner, 『오직 믿음』, 169.




39) 본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는 율법이 명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유대인의 민족주의라고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로 Schreiner, 『오직 믿음』, 169-191와 Schreiner가 쓴 갈라디아서 주석(ZECNT)인 『강해로 푸는 갈라디아서』(서울: 디모데, 2017), 164-167을 보라.




40) N. T. Wright, Justification: God’s Plan & Paul’s Vision (Downers Grove: IVP Academic, 2009), x.




41) N. T. Wright, What Saint Paul Really Said: Was Paul of Tarsus the Real Founder of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1997), 129; Wright, Justification, 86, 251.




42) “에클레시아북스”라는 출판사에서 톰 라이트를 비롯한 새 관점 학파의 책을 많이 번역하고 보급하고 있다.




43) 박재은, 『칭의, 균형 있게 이해하기』,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