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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계획 - B.B.워필드

에반젤(복음) 2020. 2. 22. 16:13



B.B.워필드의 구원의 계획

 

 

 

제1장 개념의 차이


1. 자연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간의 쟁점


 벤자민 B. 워필드(BENJAMIN B. WARFIELD)는 구원에 있어서 자연주의자와 초자연주의자들간의 쟁점을 먼저 다룬다. 그는 이들간의 차이가 “아주 단순하지만, 아주 절대적인 문제”임을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이 스스로 구원 받느냐, 아니면 하나님이 그를 구원하시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연주의자들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스스로 구원하도록 계획하셨다고 본 반면, 초자연주의자들은 “하나님 자신이 개입해서 그들을 구원하기로 계획하셨다”고 보았다.


 “교리사에서 철저하게 자연주의적인 구원 계획은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로 알려진다. 순수한 펠라기우스주의는, 인간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은 본래부터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이에 비해 초자연주의자들의 고백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여 선언한다.” 하지만 이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는다. “영혼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단언한다. 즉, 구원하는 과정에 있어서 인간이 어떠한 부분을 담당하든지간에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결과이며,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는 이는 하나님, 오로지 하나님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능력의 일부나 대부분이 아닌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2. 초자연주의자들의 견해차(사제주의자, 복음주의자)


 초자연주의자들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 행사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에 일치한다. 그러나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떤 방법으로 영혼에게 미치게 되는지 그 방법에 관한 개념에 있어서 다르다.” 즉, 하나님께서 직접 인간에게 당신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구원하시는가, 아니면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운 도구의 중재로 구원하시는가라는 문제이다.


사제주의의 입장: “사제주의의 전형적인 형태는 로마 교회의 가르침에 의해 공급된다. 로마교회에서 가르치기를, 교회는 구원의 도구이며, 오직 교회를 통해서만이 구원이 인간들에게 전달된다고 한다. 교회와 교회 의식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은혜는 교회의 직무에 의해서, 그리고 교회의 직무를 통해서 전달되면, 그 외의 방법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이 계신다는 사실”과, 교회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지며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의 방편이 “필수적인 방편”으로 제시되며, “엄격한 의미에서 방편이 없이는 구원도 없으며, 방편은 구원의 실제적인 출처”가 되는 것이다.


복음주의의 입장: “복음주의는 오직 철저한 초자연주의라고 생각되는 것을 보존하려고 애쓰면서, 영혼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모든 중재적인 요소를 일소하고, 구원을 위해 영혼으로 하여금 오로지 하나님께만 의존하게 하여, 하나님이 당신의 직접적인 은혜로써 역사하시게 한다. 복음주의자가 은혜를 기다리는 것은 은혜의 방편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해서다. 그러므로 성령이 역사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원하시는 장소와 시간과 방법에 있어서 실제로 유효하다고  선포한다.” 복음주의는 “사제주의 입장”과 같이 방편이 “필수적인 방편”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영혼과 구원의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 사이에 있는 어떠한 중재적인 요소들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3. 복음주의자들의 견해차(보편 구원론자들과 제한 구원론자)

    

“모든 복음주의자들은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이 구원하는 능력이 영혼에게 직접적으로 베풀어진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 구원하는 능력을 동등하게 또는 최소한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실제로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든간에-베푸시느냐, 아니면 단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말하자면 실제로 구원 받는 사람들에게만 그 능력이 베푸시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표명한다. 여기서 구분점은, 하나님이 당신의 전능하시고 반드시 효력 있는 은혜로써 인간들을 구원하시기로 실제로 작성하셨다고 생각되는가, 아니면 실제로 구원에 대한 보장이 없이 그들이 구원받도록 단지 당신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부어주셔서 제한적으로만 그들이 구원받도록 작정하셨는가 하는 문제다.”


보편 구원론자들의 입장: “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고, 이 능력은 직접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혼에게 행사되지만, 인간의 구원을 바라시면서 하나님이 모든 인간을 위해 그리고 그들에게 베푸시는 모든 사역에는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며 “당신의 구원의 은혜 안에서 영혼에 직접 역사하심으로써 그 영혼을 구원하신다면, 그리고 또한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구원의 은혜 가운데서 모든 영혼들에게 똑같이 역사하신다면, 분명히 불가피하게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강하게 주장한 “열정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때때로 나타났다. 이들은 나타나서,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으며, 하나님은 전능하시며,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전능하신 은혜로써 모든 인간들 안에서 구원을 행하시므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증거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복음주의적 보편 구원론자들은, 실제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명백하고도 강경한 성경의 선포에 의해 강요를 받아, 이 철저한 보편 구원론으로부터 언제나 물러났다.” 보편 구원론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일관성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다른 복음주의자들의 입장: 보편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복음주의 자들은 “구원의 과정 문제에 관련되는 제한 구원론은,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과정 그 자체에 속하는 것”이라고 본다.…“이들은 하나님은 구원의 전 과정을 통하여 집단으로서의 인간을 다루지 않으시고, 일 대 일로 개개의 인간들을 다루시며, 당신의 은혜를 이들 각자에게 베푸시고, 또한 당신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들 각각을 구원으로 인도하신다고 주장한다. 인간들을 구원하시는 이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인간들의 마음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심으로써 그들을 구원하시고, 또한 당신의 구원의 은혜는 반드시 구원이라는 결과를 초래하는 전능하신 능력이므로, 인간들은 각각 그리고 모두의 경우에 자신이 구원받은 영광을 단지 보편적인 구원의 기회에 돌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하는 것이다.”


4. 제한 구원론자들의 견해자


 제한주의자들(Particularists) 사이에도 의견의 차이가 있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과 제한 구원론자들의 의견이 다른 것이다. 이들의 차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실제로 인간들을 구원하느냐, 아니면 단지 이들에게 구원의 가능성만을 열어 주느냐 하는 문제”이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의 입장: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인간들에게 차별 없이 적용 되지만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구체적인 구속 사역으로 돌리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의 가능성을 마련해 준 것이며, 인간들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준 것이며, 인간들이 구원받는 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해 준 것이며, 또는 그와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습관적으로 늘 말한다.”


철저한 제한 구원론자들의 입장: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 사역은 그 자체적으로 실제로 구원하는 구원의 행위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예정된 자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가정적인 보편 구원론자들과 철저한 제한 구원론자들의 문제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실제로 인간을 구원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벤자민 B. 워필드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자들은 반드시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입장에 서 있다.“만일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인간들을 실제로 구원한다고 하면, 단지 우리가 보편 구원론의 모든 제시를 따르지 않기로 준비되어 있으며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다고 선포하지 않는다는 조건 안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사역을 베푸시는 모든 사람들은 구원받게 될 것이며, 제한 구원론은 바로 이러한 성격 안에서 제시되는 것이다.…영혼을 구원함에 있어서 발휘되는 모든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 진리는 또한, 그리스도의 구속의 범위는 실제로 구원받는 총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으며, 틀림없이 오직 유일한 사역(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며 인간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제한 구원론자들은 구원의 원천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과정에서도 제한주의를 주장할 뿐만 아니라, 구원의 모든 과정에 있어서도 똑같이 제한주의가 옹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하시는 이는 주 하나님이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시는 모든 사역에 있어서도 모든 자들에게 차별 없이 역사하지 않으시고 다만 일부 인간들만을, 말하자면 그가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들만을 위해서 역사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릴 수 있으며, 구원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만 돌려 드릴 수 있게 된다.”


5. 타락 전 선택설과 타락 후 선택설


 이들의 차이점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주관하심에 있어서 단지 인간으로 다루셨는가 아니면 죄인들로 다루셨는가 하는, 즉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하는 문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선택과 유기의 작정은 단지 아직 범죄하지 않은 인간들에 관계된 것인가, 아니면 이미 죄를 범한 인간들, 곧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들로서 여겨진 인간들에 관계된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일부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자들은,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구별의 작정을 앞에 두며, 심지어 창조의 작정보다도 앞에 위치시킨다. 그리고 타락 전 선택설을 주장하는 모든 자들은,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간 구별의 작정을 타락의 작정 앞에 둔다.” 즉 하나님께서 타락 전 인간들을 구원받을 자들과 유기할 자들을 미리 작정하시고 죄를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한된 사람들만을 따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존재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태초에 창조된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워필드는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단지 제한된 사람들만이 창조되거나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게 창조되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가 태초에 창조되고 모든 인간은 동일하다. 단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타락이 허용된 것이다.

 

 

 

제2장 자력 구원설

(AUTOSOTERISM)


단 두가지의 구원 교리가 존재한다. 첫째는‘구원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교리로서 기독교의 공통된 교리이며, 둘째는 구원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주장으로서 보편적인 이방 종교의 교리이다.’


1. 펠라기우주의


 교회 안에서 가르쳐진 최초의 조직화된 자력 구원 체계는 펠라기우스주의이다. “자력 구원의 체계는 최초의 인간이 빠진“타락”을 일체 부인하고, 따라서 그것이 죄든 아니면 단순한 연약함이든, 과거 역사로부터 내려오는 어떠한 악의 전가(轉嫁)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 자기 체계를 보호하였다. 모든 인간은 아담이 창조된 것과 같은 상태로 태어난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와 같은 상태에서 삶을 지속한다. 아담은 타락함으로써 기껏해야 우리에게 나쁜 본보기를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본보기를 선택하지 않는 한 우리가 따라갈 걱정은 없다. 물론 우리는 우리의 옛 죄에 대해 책임을 요구받고 그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 옛 죄에 대해 책임을 요구받고 그에 대한 공정한 심판을 감내해야 하지만, 그 옛 죄가 어느 면으로나 의로운 것을 행할 수 있는 우리의 본래적인 능력을 빼앗거나 축소시키지는 못한다. 펠라기우스는 선포하기를, “나는 말한다. 인간은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준수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모든 의를 이루는 완전한 능력에 대한 이와 같은 단호한 주장을 보존하기 위해 이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도움이라는 의미에서의 모든“은혜”를 부정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러한 도움은 인간에게 필요치도 않으며 실제로 주어지지도 않는다. 반면, 모든 인간은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의 구원을 스스로 성취한다.”


 펠라기우스주의 교리의 특징은“하나님은 인간에게 빼앗을 수 없는 자유 의지를 부여하셨고, 이 자유 의지로 말미암아 인간은 자신에게 요구되는 모든 것을 완전히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큰 은사에 하나님은 율법과 복음의 은사를 더하여 주셔서 의의 길을 비추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길을 가도록 하셨으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까지 주셔서 과거의 죄를 속죄하시고 앞으로 의를 행할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마련해 주셨으며, 특별히 선한 모범을 세워 주셨다는 거다. 이러한 장려하에서, 그리고 자기들의 뿌리 깊은 자유의 능력 가운데서 자기들의 죄에서 돌아서서 의를 행하는 자들은 의로우신 하나님에게 영접받을 것이며, 자기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받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바로 이것이 최초에 교회 안에서 공표된 자력 구원의 순수 교리였으며, 아울러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승된 모든 자력 구원의 전형이다.”


2. 은혜와 자유 의지간의 커다란 충돌


 자력 구원론의 교리는 결국 5세기 초에 어거스틴으로 인하여 충돌이 일어나게 된다. 어거스틴의 교리 핵심은, “오직 은혜”였다. “인간 안에 있는 모든 선의 유일한 기원은 은혜라는 주장이며, 이러한 주장은 모든 의를 행할 수 있는 인간의 독자적인 의지의 절대적인 능력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의 교리만큼이나 철저하게 한 가지만을 고집한다.……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각각의 단일한 행위에 있어서 의로운 것을 알 뿐 아니라 또한 행하며, 따라서 우리는 은혜 없이는 경건에 속한 어떠한 것도 가지거나,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펠라기우스는 “모든 것이 인간에게 속하였으며”, 은혜 교리의 대변자인 어거스틴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 돌려졌다.……하나는 믿음의 종교였고, 하나는 행위의 종교였다. 즉, 하나는 자신에 대해 실망하여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종교이며, 다른 종교는 자기를 완전히 신뢰하는 종교다.”


 이들간의 논쟁은 결국 어거스틴주의가 승리하게 되어 진다. “최종적으로 기독교는 하나의 종교, 곧 구원을 필요로 하는 죄악된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 남게 되었고, 단지 구원이 필요 없는 자들에게나 맞는 단순한 윤리적 교리로 썩어 버리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3. 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의 결과와 오렌지 회의로 인한 어거스틴주의의 교리 저지


 “펠라기우스주의자와의 논쟁의 결과는 은혜의 필요성이 인식되었고, 반펠라기우스주의와의 논쟁의 결과로는 은혜가 선행한다는 사실이 인식되었으나, 이러한 인식의 유효성은 오렌지 회의의 치명적인 절충안으로 말미암아 부정되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어거스틴주의의 승리의 행군은 저지당했고, 오직 은혜만으로 말미암는다고 하는 순수한 구원 고백은 교회의 이러한 특성 안에서는 영원히 불가능하게 되었다.”


4. 중세시대의 상황


 중세기는 행위 구원(a work-salvation)이 존재하여 율법주의가 판을 친 시대였다. “반펠라기우스주의안에서, 구원을 이루는 근본적인 행위가 구원을 전달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돌려지지 않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를 유효하게 만드는 인간 의지의 동의에 돌려진다.”결국 인간의 의지가 하나님의 은혜를 유효하게 만든다고 본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의 장려를 받는 가운데서도 자기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든 국면에서 자신들의 “선행”이 부족하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무섭게도 허구를 놓지 않았다.”


5. 마틴 루터의 등장으로 인한 종교 개혁


 하지만“마틴 루터가 출현함으로써 거짓은 사라졌다. 로마 교회 안에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어거스틴주의는 더 이상 억압당할 수 없었다. 교회는 자신을 속박하여 어거스틴주의를 수용할 수 없었다. 당시 교회 안에는 어거스틴주의를 위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어거스틴주의는 교회의 벽을 허물어 버리고 그 억압으로부터 빠져 나왔다. 그 폭발은 우리가 종교 개혁이라고 부르는 형태로 나타났다.” 종교 개혁자들의 근본 교리는 인간의 완전한 무능력과 하나님의 절대 은혜이며, 인간에게 선을 행할 수 있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6. 멜랑크톤의 사상


 “열정적으로 오직 하나님께만 구원의 공로를 돌린 어거스틴주의의 단체 안에서까지 멀지 않아 자력 구원의 옛 누룩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처럼 새롭게 “은혜로부터의 떨어짐”을 종교 개혁의 사상 안으로 주입시킨 인물은 다름 아닌 멜랑크톤이었다.”


 멜랑크톤의 교리의 발전을 세 시기로 분류할 수 있는데, “첫 번째 시기에서 멜랑크톤은 루터와 칼빈과 같이 순수한 어거스틴주의자였다.……1527년에 시작되는 두 번째 시기에, 멜랑크톤은 의지에 대한 자신의 전반적인 교리에 있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1532년부터 계속되는 세 번째 시기에서 멜랑크톤은, 비록 순전히 형식상의 능력이기는 하지만, 인간 의지에게 구원의 과정 중 일부 자리를 허용한다.……이것을 시발점으로 신인 협력설이 루터 교회 내에서 급속도로 형체”를 갖추게 되어 진다.


7. 하나님께서는 믿을 줄 미리 아신 자들을 예정하셨다는 사상의 등장


 ‘색슨(Saxon) 신학자들, 곧 호헤네그(Hoe van Hohenegg)와 레이서(Polycarp Leyser)는 1631년 봄 라이프찌히 회의에서 확신 있게 루터교의 교리로서 다음과 같이 선언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택하셨다. 그러나 이 선택은 한 인간이

       그리스도를 진실로 그리고 계속해서 믿을 줄 아시는 하나님의 예지에 따라 이루어

       진 것이다. 하나님은 믿을 줄을 미리 아신 자들을 복되게 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해

       예정하셨고 선택하셨다”


 이러한 사상은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아닌 인간 의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8. 결론


 벤자민 B. 워필드는 인간 의지에 달린 구원관을 배격한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그 어떠한 공로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해졌기에 의지의 능력이 없다. “어떻게 병든 의지가 치료를 해줄 수 있는가? 문제의 장소는 우리의 의지다,” 의지가 병들었기에 그 의지로는 우리를 치료해 줄 수 없는 것이다. 스펄전(Charles H. Spurgeon) 목사는 다음과 같이 외친다.


     “그리스도는 회개하는 자들을 구원하실 정도로 능력만 갖고 계신 것이 아니라 사람

       들을 회개시킬 수 있는 능력자이시다. 그리스도는 믿는 자들을 하늘로 데려가실 것

       이나, 더욱이 사람들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시고 그 새로운 마음 안에서 믿음의 역

       사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는 능력으로, 거룩함을 미워하는 사람으로 하여

       금 그것을 사랑하게 하시고, 그 이름을 경멸하는 자로 하여금 그 앞에 무릎을 꿇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의 모든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능력은 구원 이전과 마찬가지로 구원 이후에도 나타나기 때문이다……하나님은 자

       기 백성을 거룩하게 하신 후에, 하나님이 이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옮기실 때까지

       능력으로 그들을 계속해서 거룩하게 하시며, 경외와 사랑 안에 그들을 보존하신

       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i Deo Gloria)

 

 

 

 

제3장 사제주의


1. 사제주의란 무엇인가?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은 인간의 영혼에 직접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주장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세우신 기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역사하신다는 주장으로서, 이 기구를 수단으로 하여 당신의 구원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전달하신다는 것이다. 이 기구들이 집행을 위해 인간의 손에 위임되므로, 인간적인 요인이 하나님의 구원하는 은혜와 이 은혜의 인간 영혼들 안에서의 효과적인 사역 가운데 끼어들었다. 그리고 이 인간적인 요인은 참으로 구원에 있어서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체제는 적절하게 사제주의적 체계”라고 불려진다. “구원의 순수한 초자연주의를 위하여 모든 개신 교회는 주 하나님 자신이 직접 인간들의 영혼 위에 그의 은혜로써 역사하시며, 어느 한 사람의 구원이라도 같은 인간의 신실함이나 변덕스러움에 맡기지 아니하셨다고 주장했다.”이에 반해 개신교는 구원에 있어서 어떤 중간 매개체 없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있다고 주장한다.


2. 사제주의의 원리


 “사제주의 원리는, 철저하게 발전되고 논리적으로 잘 짜여진 로마 교회의 조직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 조직에 따르면, 주 하나님은 인간을 직접적으로 구원하기를 전혀 바라지 않으시며, 반대로 인간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모든 사역을 교회의 중재를 통하여 하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중재의 임무를 행하기에 적절한 능력들을 교회에 부여하신 후, 구원의 전 사역을 교회에 위임하였다”라는 것이다.


 사제주의는 구원에 있어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닌 “교회에게 자신들의 구원을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원의 직접적인 근거를 그리스도나 또는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지 않고 교회에 돌리는 것이다.”


3. 사제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신앙의 구분


 “사제주의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이가 주 하나님이신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능력으로 옷 입은 인간들에게 우리가 구원을 기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사제주의와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구분하는 쟁점이다.”


4. 사제주의의 특징


 “첫째, 사제주의적인 교리는 영혼으로 하여금 모든 은혜로운 사역들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하고, 그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그것은 영혼과 모든 은혜의 근원 사이에 일단의 기구들을 삽입하여 영혼으로 하여금 그 기구들을 의지하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은혜의 수단인 교회는 그리스도인의 사고 속에서 성령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복음주의적인 신앙은 “영혼이 직접 하나님을 의지하고, 구원을 위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교회의 기능을 높이 평가한다. “그가(성령) 원하시는 때,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법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일률적으로 그의 사역이 허락되는 곳에서 사역하는 마치 자연적인 세력인 양 취급한다. 사제주의는 교회를 “구원의 기구”(institute of salvation)라고 말하며, 또는 심지어 “구원의 창고”라고 말하는데, 이는 구원이 필요할 때마다 이용할 수 있도록 저장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말한다.


 셋째, 구원의 주도권은 성령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있다. “……교회와 성례, 곧 은혜의 수단들은 성령께서 구원을 이루시는 가운데 사용하시는 도구로 생각되어야 하는데도, 그 대신에 오히려 성령이 은혜의 수단인 교회가 구원을 이루는 가운데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 주도권은 은혜의 수단인 교회에 있으며, 성령은 은혜의 수단의 처리에 맡겨진다. ……근본에 있어서, 사제주의는 하나님의 사역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사용하는 인간의 처분에 맡겨진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해 인간을 사용하시는 분으로 사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어버린다.”

 

 

 

 

제4장 보편 구원론(UNIVERSALISM)


1. 보편 구원론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죄인의 구원을 원하시되, 개개인의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차별이 없이 똑같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고 주장한다.……표면상, 주 하나님 한 분께서 마음에 직접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구원을 행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모든 자를 똑같이 구원하신다면, 물론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외 없이 구원받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2.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구원 범위


 성경은 보편 구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구원하셔야만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즉 온 세상은 선택되었고 보편적인 예정은 보편적인 언약에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반박한다. 그리고 예정은 소수에 속하며, 제한적이며, 선택된 자의 숫자는 정해져 있으며, 이들의 명단은 이들의 머리카락 숫자까지 확장된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리로부터 하나님이 편파적이시며 차별 대우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은 전혀 나올 수 없다. ……성경은 분명하게, 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반대로 마지막 날에 구원받는 무리와 버림받는 무리의 두 부류가 있게 되며, 이들은 각기 자신에게 속한 영원한 운명으로 보내진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3.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견해


 보편 구원론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보편 구원론을 주장하게 되었다. “편협함과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 라는 비난으로부터 하나님을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이 모든 사람들을 구원에 선택하셨으며 하나님의 전능하신 은혜를 통해 그들 모두를 그 복된 목표로 인도하신다고 주장하게 된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4. 보편 구원론에 대한 반박


 “편협함과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라는 말은 하나님과 인간의 처지를 잘 인식하지 못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모든 자들을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다. 그러나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여기에서는 거룩한 재판장께서 죄인을 구원

하심에 놀라움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사랑이 줄어들었다고 항변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에게 도덕적인속성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 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가 빠져 있다.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5. 벤자민 B. 워필드의 결론


 “구원은 인간의 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고정시켜야 하지 않을까? 즉, 자신이 구원받는 기회는 어떠한 사람에게나 구원의 기회가 아니며, 만일 죄악된 혈통의 어떤 사람이 구원받는다고 하면 그것은 틀림없이 인간이 주장할 권리가 없는 전능하신 은혜의 기적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러한 것을 하나의 사실로 숙고하면서 그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탄복하는 경배로 가득 채워질 수 있는 사고가 우리 마음에 고정되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죄인들에게 자기들의 형벌을 피할 수 있는“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리고 모든 죄인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단지 바로 공의의 개념을 조롱하는 것이며 아울러 사랑의 개념을 조롱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제5장 칼빈주의


1. 구원에 관한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들이 모든 경우에 구원받는 개인들을 향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구원의 진행에 있어서 제한 구원론은 칼빈주의의 증표다.……칼빈주의자는 충분한 자각을 가지고, 주 하나님은 당신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전체적으로 크게 인류를 대하지 않으시고, 구체적으로 실제로 구원받는 개인들을 대하신다고 주장하는 자다.……제한 구원론을 부정하는 것은 해석상 구원하는 은혜의 직접성, 곧 복음주의와 구원의 초자연주의, 곧 기독교 자체에 대한 부정이라고 주장한다. 논리적으로 이 부정은 기독교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인 것이다.”


2. 서로 다른 다양함을 가진 칼빈주의


“칼빈주의의 서로 다른 다양함은 사상사(思想史)에 나타났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역에 있어서 제한 구원론을 어느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되며, 아울러 하나님의 작정의 순서에 있어서 선택의 작정을 어느 자리에 두느냐에 따라 서로 구별된다.”


1) 타락 전 선택론자들


 이들은 “선택”의 작정을 작정의 순서상 타락의 작정 이전에 둔다. “선택이 타락의 작정에 우선한다고 주장하며, 타락의 작정을 선택의 작정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2) 타락 후 선택론자들


 이들은 “선택의 작정이 논리적으로 타락의 작정 뒤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다. “선택이 타락의 작정을 전제한다(타락의 작정이 선택보다 우선함)고 생각하며, 따라서 일부 인간을 영생에 선택하는 데 있어서 하나님은 인류를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유념하신다.”


3) 구속 후 선택론자들


 “구속은 모든 인간들에게 동등한 관련을 가지며, 단지 이 구속이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내용에 있어서만 하나님은 사람들을 구별하시고, 이러한 의미에서 제한 구원론적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선택이 사고의 순서에 있어서 타락의 작정과 아울러 구속의 작정 다음에 설정되었다고 주장”한다.


4) 일치주의


 “이들은 우리가 중생이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구원에 관련하여 인간 의지를 “수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를 꺼리며, 구원 얻음을 그 의지 자체의 확고한 행위에 참으로 의존한 것으로 간주하기를 열렬히 원했다.”……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권고의 사역은 “성령의 무오한 지혜 가운데서 구원하기로 선택한 자들의 마음 상태에 적합한 사역이며, 이들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 곧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나아옴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붙드는 행위로 말미암아 확보하는 사역이라는 것이다.……이러한 사고의 원리는 은혜가 일치되게(적합하게)베풀어짐으로써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것인데, 이는 다시 말해서, 어떤 사람은 구원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는 은혜로운 설득을 행하시되 저들이 복음에 애착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 주의 깊게 그리고 무오하게 응하는 방식으로써 행사하시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와 같이 주의 깊은 방식으로 행사하지 않은 데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일치주의의 이러한 주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만일 내가 단지 스스로 행할 수 있도록 설득될 수 있다고 한다면, 구원받아야 할 자를 결정하는 이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는 사실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와같이 칼빈주의에는 타락 전 선택설, 타락 후 선택설, 구속 후 선택설, 일치주의등. 네 가지 유형을 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주의의 이 네 유형 모두는 유사하게 칼빈주의적일 뿐 아니라 동등하게 칼빈주의적이라고 요구할 수 있으며, 아울러 칼빈주의에 대한 각자의 해석에 있어서 각자가 허락한 입장과 그에 대한 강조에 따라 탁월한 순서에 배치되도록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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