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은혜로서의 구원의 서정
(The Order of Salvaition) 김병혁 목사(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
구원에 순서가 있다? 없다?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에서 구원을 제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기독교 신학의 근간이 되는 조직신학에서도 구원론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실제로 구원론은 기독교 신학의 중심이다. 그리스도인 중에 이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구원을 얻는데 순서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점이다. 혹자들은 구원을 얻으려면 어떤 도식적인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다른 사람들은 한번 구원 받은 사람은 과정적 단계가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의는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많은 논란이 있어 왔다. 구원의 순서라는 것이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성경에서 고정된 구원의 서정을 추출할 수 없다는 주장이 맞서 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먼저 확인해야 할 것은 구원의 순서라는 것이 성경적인 개념인가 하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거의 대부분의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흔히 신학적으로 구원의 서정이라는 용어로 사용되는 구원의 순서라는 개념은 지극히 ‘성경적이다’라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 혹은구원의 순서를 지지하는 대표적인 성경구절을 찾아보자.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종교개혁자 칼빈도 그의 명저(名著)『기독교 강요』에서 구원의 순서에 대해 분명히 밝히고 있다.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다음과 단계적으로 완성하시는 것이 틀림없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긍휼히 여기심으로써만 자신의 생명 안에 받아들이신다. 그러나 그들이 생명을 소유하게 될때까지 정하신 순서에 따라 그들 안에서 자신의 구원 사업을 완수하시기 위해서 선행의 경주를 통해서 그것을소유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신다”((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 ⅩⅩ-ⅩⅩⅠ)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일반적으로 구원의 순서는 ‘있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럼에도 벌카우워(Berkouwer)와 같은 정통 개혁주의 신학자는 구원의 순서는 ‘없다’고 주장한다.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과 상반된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이 말은 구원의 서정으로서의 구원의 순서 자체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순서가 마치 A→B→C 처럼 기계적인 도식적 단계로서의 순서는 아니라는 의미에서 구원의 순서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서정은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방식의 순서도 아니다.
예를 들어, 성화는 구원받은 이후 마침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지속되어진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순서는 단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날까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따라서 구원의 순서를 어떤 관점에서 이해하느냐에 따라 ‘있다’ 혹은 ‘없다’는 표현이 가능할 수 있다.
왜 구원의 서정이 중요한가?
구원의 서정은 개혁신학의 구원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구원의 서정이라는 말은 개혁주의를 선호하는 지역(나라)에 따라 약간의 강조점의 차이가 있다 .독일어권에서는 ‘구원의 획득’(Heilsaneignung), 화란에서는 ‘구원의 수단’(Heilsweg) 또는 ‘구원의 순서'(Orde des Heils), 영어권에서는 '구원의 방법'(Way of Salvation), 한국에서는 '구원의 서정’(序程)이라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단지 번역상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의미에서는 전혀 차이가 없다.
구원의 서정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해진 구원의 사역이 죄인들의 마음과 생활에 주관적으로 실현(적용)되는 과정을 서술하는 용어이다. 구원의 서정은 구속 사역의 적용에 있어서 성령의 다양한 활동들을 논리적으로 순서로 또한 이들을 상호 연관하에 서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루이스 벌콥, 『조직신학』(하), p.660). 전통적으로 개혁주의자들의 구원의 서정에 대한 강조점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획득하는데,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 혹은 ‘무엇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점이 아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구원을 계획하시고 친히 이루시는데 있어서 이를 ‘어떻게 적용하고 계시며’, ‘어떠한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가’하는 점을 규명하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개혁주의자들은 구원의 서정과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연관성을 매우 강조한다. 물론 구원은 삼위하나님의 공동의 사역이다. 한편 성경은 성도에게 정하신 구원이 적용되는 일에 있어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주(主)가 되어짐을 말한다.
성경에 구원의 근거로서 제시되는 ‘은혜’라는 말은, 특히 신약성경 대부분의 구절에서는 인간의 심령 안에서 성령을 매개로 하여 일어나는 하나님의 무상(無償)적 사역을 표현해 주는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다. 히브리서 10:29에서는 성령을 가리켜, ‘은혜의 성령(영)’이라고까지 지칭한다. 즉 성령은 하나님의 실제적인 은혜의 전달자요, 그 은혜를 효과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이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구원의 서정을 성령의 ‘구원의 시혜’, ‘구원의 분배’,또는 ‘구원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성경적인 구원론을 논할 때에, 반드시 성경적인 성령론을 전제로 한다. 즉 구원론과 성령론은 땔래야 땔 수 없는 주제이다. 이 말은 성도의 구원의 전 과정은 곧 성령의 주권적인 개입으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칼빈 역시 구원론을 다루는 『기독교 강요』제3권의 표제 제목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 어떤 은덕들이 여기로부터 우리에게 오며, 어떤 결과들이 따르는가”고 하면서 오직 성령을 통해서만 구원의 약속들이 성도의 마음을 장악하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다. 즉 구원론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 역사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성령론과 구원론의 관계를 왜곡 혹은 오도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중세 교회는 성령론을 성례론에만 제한하였는가 하면, 알미니안주의자들은 성령론을 구원론 중에서 신앙과 회심과 중생의 영역에만 국한시켰다. 이에 비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론을 비논리적이면서 신비적인 구원론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였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구원의 서정이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은혜의 역사적 진전, 즉 인간에게 나타나는 말씀과 성령의 적용에 관한 것이다. 물론 그 정확한 순서를 우리가 규명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풍요성을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소유되는 그 길, 그 과정을 묘사하려는 것이다(유해무, 『개혁교의학』,p.430).
구원의 서정의 항목과 특징
유명한 칼빈주의 청교도 학자인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 1558-1602)는 구원의 서정을 ‘황금사슬’(Golden Chaine)이라고 명명했다. 왜냐하면 구원의 서정이란 평면적인 도식처럼 이해해서는 안 되는 성격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서정은 어떤 논리성을 가지고 있다. 이 점에 관해 장로교회의 표준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만큼 정당하게 취급하고 있는 문서를 발견할 수 없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구원의 서정을 설명하는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고백서 10장-18장, 대요리 65-90문답, 소요리 29-38문답). 따라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언급된 구원의 서정을 바르게 이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구원을 받을 자들을 선택하심과 동시에 그 성취 방법도 예정하셨으니, 그것은 그의 영원하시고 지극히 자유로우신 뜻대로 하신 것이다. 본래 택함 받은 자들이 아담 안에서 타락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과정에 있어서, 적당한 시기에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안에서효과적 부르심을 받으며, 바로 그들이 의롭다 하심이 되고, 양자로 삼으신 바 되고, 성화되고, 구원이 완성되기까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의 영적 생활이 보호를 받는다. 택함받지 못한 자들에게는 위와 같은 일이없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3장 6절)
위에 언급된 내용을 중심으로 구원의 서정의 구체적인 항목들과 그 특징들을 정리해보자.
1. 예정
성경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인간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인 예정에서 비롯됨을 강조한다. 예정의 원인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엡 1:5), 예정의 근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다(출 33:19). 이 예정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영생이 예정되었으나 택함을 받지 못한 자들은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었다. 선택은 오직 하나님의 값없으신 자비와 선하심을 나타낸다. 인간의 가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깨닫기까지 우리의 구원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결코 충분히 또한 분명히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만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으며, 이 사실을 성령께서 확증해 주신다. 그로써 하나님은 선택한 백성을 구원의 완성까지 이끌어주신다.
2. 소명
일반적으로 부르심이란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제공된 구원을 받도록 초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위라고 정의한다. 이 소명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있다. 외적인 부르심이란 죄의 용서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하는 일방적인 권고로서 죄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제시하는 복음의 선포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는 초청과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다. 이 외적인 부르심은 택한 자뿐만 아니라 유기된 자까지 복음을 듣는 모든 이에게 미치는 우주적인 것이다. 반면 내적인 부르심이란 성령의 역사로 외적 부르심을 효과 있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이 부르심을 가리켜 유효적 부르심(Effectual Calling)이라고도 부른다. 이 내적 부르심은 항상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죄인들에게 이르며 구원을 유효 있게 만드는 능력 있는 부르심으로, 거기에는 후회나 변경이나 취소가 없다(요 6:40,44,45).
3. 중생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소명 뒤에 바로 칭의를 다룬다. 하지만 칼빈을 위시한 종교개혁자들은 이 사이에 소명과 관련된 구원의 서정을 언급한다. 내적 소명 곧 효과적 부르심은 중생과 믿음을 가져온다. 중생은 회심과 성화를 포함하는 인간 갱신의 전 과정을 묘사한다. 진정한 중생은 죄인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시초가 되며, 성령으로 심령이 새로워지는 재창조를 가리킨다. 즉 중생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따라서 회개와 성화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 회복이 완성을 향해 발전해 나가야 한다. 칼빈은 중생이후에 나타나는 구원의 서정에 관해 중생은 하나님의 직접적이고도 은밀하게 이루시는 사건으로 과거적인데 반해, 회개와 성화는 평생토록 지속되는 현재적 사건으로 보았다. 그러나 알미니안주의는 중생은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 관계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한편 로마교회는 중생은 칭의와 사죄를 포함하는 것으로 성례(특히 세례)시에 효력이 발생한다
고 주장한다. 그러나 중생을 일으키는 수단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며, 중생을 효력있게 하시는 분은 오직 성령이시다.
4. 믿음
믿음은 중생의 결과이다. 믿음이 있어야 중생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한 이는 믿음을 갖게 된다. 여기서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과 사랑을 알고 자신의 죄와 비참을 아는 놀라운 지식이며 그리스도를 알고 영접하는 구원론적 믿음을 가리킨다.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앎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이 확실하고 효력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과 신뢰이다. 믿음의 근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다. 성령의 조명을 통하여 택한 자의 눈을 열어 주신다. 즉 성령은 선택함을 받은 사람의 마음속에 믿음을 불러일으키실 뿐 아니라 점진적으로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우신다. 믿음은 우리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꺼이 우리를 위해 무상으로 제공하시는 것이다. 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거니와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를 찾는 자들에게 상을 베푸신다는 사실조차 깨달을 수 없다(히 11:6). 믿음은 성도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5. 칭의
칭의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근거로 하여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법적 행위이다. 칭의라는 말 속에는 죄의 면제(remission of sins)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이라는 개념이 동반되어진다. 피고인은 죄인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에 의해서 고소됨을 면하게 된 것은 인간이 실제로 의롭기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인해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여져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칭의는 회개를 통한 성화를 전제하지 않는다. 신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인간이 성취한 그 어떤 의를 조건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칭의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단번에 이루어진 일이다(롬 3:24). 율법의 행위나 인간의 노력으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다(롬 3:28; 갈 2:16). 우리는 이러한 칭의의 의미를 믿음으로서만 알게 된다. 따라서 믿음은 칭의를 효과적으로 알게 하는 도구이며, 칭의는 성령께서 믿음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인 동시에 고리가 된다.
6. 회개
회개란 우리 자신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향하여 이전의 죄악 된 마음을 벗어버리고 새 마음을 입는다는 뜻이다.곧 회개는 하나님께로 향한 참된 삶의 전향이다. 진정한 회개는 현상적으로만 파악될 수 없다. 마음의 변화를 받지 않고도 일시적인 회심에 이르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마 13:20,21; 행 8:9). 진정한 회개는 먼저 자신의 육적 본성을 부정하며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에게 회개가 요청되는 이유는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죄의 유혹과 시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중생을 경험하여 하나님의 의를 회복하였지만 아직도 우리 안에는 원죄의 세력이 남아 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 안에 잔존해 있는 죄악의 본성과 성령의 도우심으로 평생 싸워야 한다. 회개는 평생토록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중요한 방편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회개는 성도의 매일의 삶 속에서 드러나야 할 신앙고백이다.
7. 양자됨
양자는 그 용어가 말하듯이 외부의 사람을 하나님 자신의 가족으로 옮기는 행위이다. 의롭다 칭함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이 양자의 은혜에 참여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상상할 수 없이 놀라운 영적 특권을 누리게 된다. 먼저 죄악의 종 된 상태로부터 해방되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되며,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성령의 내주함으로서 긍휼히 여김과 보호를 받으며,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 결코 버림 받지 않는다. 나아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아 영원한 구원의 상속자로서 자격을 누린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2장). 양자됨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특전이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것임을 증거한다. 하지만 양자는 칭의와 마찬가지로 법정적 행위이다. 신분과 지위의 수여이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성향이나 특성이 아니다. 또한 중생하지 않은 자는 결코 하나님의 양자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중생은 양자됨의 선행 요건이며, 양자됨은 중생의 결과이다.
8. 성화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하여 양자로 택정함을 얻은 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동참하게 된다. 칭의와 양자됨이 단번에 일어난 법정적 행위라면 성화는 점진적으로 심령과 삶에서 그리스도를 점점 더 닮아가고 하나님께 헌신되어 가는 과정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에 의하여 우리를 자신과 화해시키며, 죄를 거저 사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하나님의 이 은혜(칭의)는 큰 자비와 연결되는데, 이 자비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계시며 그 힘으로 우리의 정욕을 날로 더 죽이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성결한 삶을 살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그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성화는 칭의와 여러 점에서 비교된다. 칭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법적으로 사면한 것이라면 성화는 도덕적으로 죄적 요소를 없게 하는 것이다. 칭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단번에 완성되었지만, 성화는 성령의 계속적 사역에 의하여 평생 동안 진행된다. 구속의 날까지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성화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다.
9. 견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성도의 견인은 하나님께서 중생시키며 은혜의 신분으로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이 그 신분에서 완전히 혹은 궁극적으로 타락하지 않고 은혜의 신분으로 끝까지 견디어 내어 영원히 구원받게 될 것이라는 교리이다. 견인 역시 심령 안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이 지속되고 완성에 이르게 하는 성도 안에서의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의 열매이다. 견인 교리는 성도의 구원의 근거와 목적이 누구의 손에 의해 주도되는가를 잘 설명해 준다. 펠라기우스주의나 알미니안주의는 오직 성령에 의해 완성되는 견인을 부정하였다. 중생한 사람이라도 구원을 상실할 수 있기에 그들은 구원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절대적인 노력이 요청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성경과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행위나 의지와는 상관없는 철저한 성도의 견인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견인에 대한 보증이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기인한 성령 하나님의 의지와 능력에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10. 영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서는 이 주제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다른 여타의 곳에서 이 의미를 해석하고 있다. 영화는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 성령의 적용의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마지막 단계라는 의미보다는 예정과 소명으로 시작한 전 구속과정의 완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영화는 하나님의 선택이 성부의 영원하신 목적 가운데 예정된 바 그 목적 달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보장된 구속의 완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존 머레이,『Redemption Accomplished and Applied』, p.231).
이생의 삶은 죽음으로서 중대한 일단락을 맺게 된다. 육신의 죽음은 성도의 싸움의 종국을 의미한다. 한편 영화는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을 소망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완전한 심판을 고대 하게 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영화를 경험한다.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화로움에 참여하게 된다. 물론 완전히 만족할만한 완성된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영원하고 완전한 영화를 소망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직 주의 날, 하나님이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날에 성도는 우주의 모든 피조물과 함께 썩지 않는 신령한 몸을 입어 하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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