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예레미야 강해

[스크랩] 성경공부 - 예레미야서

에반젤(복음) 2019. 12. 28. 10:37


               

예레미야서

라틴어 Prophetia Jeremiae / 영어 Book of Jeremia


만일 성서에 이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유다이즘과 그리스도교는 그 종교적 본질을 아주 달리 했을 것이다. 예레미야(Jere-mias, 기원전 650∼588)가 마음과 인격의 종교를 주창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 이사야보다 1세기 뒤에, 그러니까 기원전 650년경 예루살렘 근교의 어느 사제가문에서 출생하였다. 성서는 예레미야의 생애와 성격을 그 어느 예언자들 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예레미야를 3인칭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들[傳記]이 성서에 다수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예레미야서의 다음 장(章)들을 직접 읽어보기 바란다. 예레미야서 19:1∼20:6과 26.36.45.28-29.51-59-64, 34:8-22.37-44 (이 본문들은 시대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또 다음의 구절들은 `예레미야의 고백록’이라 부를 수 있으니, 예언자가 체험한 내적인 갈등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야서 11:18-12:16, 15:10-21, 17:4-18, 18:18-23, 20:7-18. 이 `고백록’은 예언자의 은밀한 체험에서 터져나온 외침으로서 시편의 탄원시의 문체와도 비슷하다.


예레미야는 기원전 626년 그러니까 요시야왕 치세 제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젊은 예언자로 나섰다(예레 1:2). 그는 유대왕국의 멸망이 예견되었고 드디어는 예루살렘의 몰락을 초래한 비극적 시대를 살고 있었다. 요시야왕의 종교개혁과 주권회복은 유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불행하게도 609년에 그 왕이 므기토에서 전사하게 됨으로써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고대종동의 세계는 또다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으니 아시리아의 수도 니느웨 612년에 함락됨으로써 바빌론제국이 세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바빌론왕 느브갓네살은 팔레스티나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집트는 유대왕국을 사주하여 바빌론의 지배에 항거하도록 하였으니, 느브갓네살은 597년에 예루살렘을 함락하였고 주민의 일부를 유배지로 끌고 갔다. 이집트의 조종에 끝내 놀아난 유대는 또다시 바빌론 세력에 항거하였다. 587년에 바빌론군대는 한 번 더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하였고 저항세력의 지도자들을 또다시 유형지로 끌고 갔다.


예레미야는 이 어두운 시대의 역사적 비극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가 이 비극을 좌시한 것은 아니었다. 예언자는 지도자와 백성에게 하나님 말씀의 대변자로 나서서 맹렬히 설교했고 위협했으며 왕국의 몰락을 예고했던 것이다.


다윗의 왕좌를 차지했던 유대의 왕들은 예언자의 이 불칼 같은 경고를 아예 무시했으며 또 군인들은 예레미야가 패배주의를 선동한다고 비난하며 그를 박해하고 고문하며 투옥시키기까지 하였다. 드디어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


예레미야는 바빌론 강기슭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시편137)에게서 희망을 보았지만 망명하는 것을 끝내 거부하고 고국 땅 팔레스티나에 머무르기로 하였다. 그의 보호자는 바빌론인들이 임명한 총독 게달리야였다. 하지만 유태인의 한 무리가 총독을 암살하기에 이르렀으니, 그들은 바빌론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예레미야를 인질로 삼아 이집트로 망명하였다. 아마도 예레미야는 이집트에서 소리없이 죽어간 것 같다.


이 험난한 운명의 사이의 드라마는 단순히 사건들만을 반영하고 있지는 않다. 예언자 예레미야의 전생애가 일종의 비극이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끝까지 그 말씀에 충실하다 보니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고독한 예언자’가 되고만 것이다.


그는 성품이 온순했고 사랑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야훼는 그에게 `무너뜨리고 파괴하며 전복하고 없애버리는’사명(1:10)을 주셨다. 그의 예언은 끝없는 불행만을 예고하였다(20:8). 예레미야는 평화를 원했건만 자기 가족과 왕들과 사제들, 그리고 거짓 예언자들과 모든 백성을 반대하여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말로 예레미야는 "온 나라 안에서 싸움과 불화의 사나이로 통한 것"이다(15:10). 그가 이 같은 사명을 수행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선택할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예레미야는 말씀에 의해 완전히 가루가 될 뻔 했다고 고백하고 있다(20:9).


하나님과의 내적인 대화는 온통 고통의 외침이었다. "무엇 때문에 나의 고통은 끝이 없나이까?!"(15:18) 욥의 저주를 예고한 예레미야의 그 외침은 고백론의 절정이다. "내가 태어난 그날은 저주받을지어다!"(20:14이하). 하지만 이 고통은 예레미야의 영혼을 정화시켰으니 하나님과의 내밀한 친교를 가능케 하였다. 우리에게 이 예언자가 그토록 귀중하고 가까운 인물로 나타나는 것은 새로운 계약을 성문화시켜 예고하기에 앞서(31:31-34) 자신이 먼저 마음의 종교와 내적인 종교를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인격적 종교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종교의 가르침을 심화시켰다. 하나님은 마음과 콩팥을 꿰뚫어 보시는 분(11:20)이요, 각자의 행실대로 갚아주시는 분이다(31:29-30). 하나님과의 우정은 인간의 거짓스러운 마음의 소산인 죄에 의해 끊어진다. 거짓말이 모든 죄의 뿌리란 것을 예레미야만큼이나 강조한 사람은 없다(4:4, 17:9, 18:12). 이 점에 관한 한 예레미야는 호세아 예언자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 같다.


율법은 그에 의해 내면화되었으며 또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마음의 소산임을 그가 밝혔기 때문이다. 예레미야가 인간의 개인적 인격에 큰 관심을 둔 것으로 보아 신명기(申命記)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물론 그가 신명기에 바탕을 둔 요시야왕의 개혁을 처음에는 환영하였으나 마음의 회개가 없는 제도적 개혁이 무능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백성의 윤리적 종교적 삶을 변혁시키기 위하여 내적 인간의 개조 없이는 불가능함을 예레미야가 간파하였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의 사명은 살아 생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채 실패로 끝났으나 죽은 뒤의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만 갔다. 마음의 종교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계약의 사상’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유다이즘의 아버지가 되게 하였다. 우리는 에제키엘서와 제2이사야서(40-55)와 시편들에서도 그의 영향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마카베오 시대의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민족의 수호자들 중의 한사람으로 꼽았다(2마카 2:1-8, 15:12-16).


예레미야는 힘과 물질보다는 영성적 가치를 더 중대시하였고 또한 영혼이 하나님과 맺은 내밀한 관계를 밝혔다 하여 이 예언자는 그리스도교의 새 계약을 준비한 인물로 통한다. 말씀에 대한 정열적인 사랑과 말씀 때문에 당한 그의 고통은 이사야서 53장의 야훼의 종의 모습을 예고하였으니, 예레미야는 그리스도의 형상(形象)을 앞질러 보여 준 것이다.


예레미야의 영향은 막대하였으니,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의 말씀을 읽고 명상하며 또 해석하였다. 하여 그의 책, 예레미야서는 단번에 쓰여진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서는 시문(時文)으로 쓰여진 신탁(神託)과 전기적 이야기들 뿐 아니라 신명기와도 비슷한 문체로 쓰여진 산문(散文)의 연설들도 많이 수록하고 있다. 그중의 어떤 본문들은 예레미야의 친저(親著)가 아니라 유배 이후의 신명기적 경향을 띤 편집자들의 작품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 모든 작품들이 예레미야의 신학과 설교의 사상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니, 신명기를 알고 있던 예레미야의 제자들과 청중들이 수집한 예언자의 전언(傳言)임이 확실하다. 문제는 예레미야적 전승이 하나의 형태로 전수되지 아니 했다는 것이다.


성서의 그리스역본은 마소라 본문보다는 8분의 1가량 짧게 예언자의 말씀을 수록하고 있으니 그 세부묘사도 서로 차이가 있다. 쿰란(Qumran)의 발견은 원래 예레미야서의 두 가지 대본이 히브리말로 쓰여졌음을 전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역본은 25:13의 뒤에 수록된 민족들에 대한 신탁들을 히브리성서의 순서와는 달리 예레미야서의 끝부분 곧 46∼51장으로 옮겨 배치시키고 있다.


이 예언들이 처음에 특수한 문집(文集) 안에 수록된 것 같다. 어떻든 그 문집의 전체가 예레미야의 전승 안에서 연유한 것이라 볼 수가 없다. 가령 모압과 에돔에 관한 신탁들은 해석의 흔적이 매우 뚜럿하며, 또 바빌론에 대한 긴 신탁, 50∼51장은 유배시대의 끝에 가서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 52장은 2 열왕기(列王記) 24:18-25:30 에 병행하는 내용으로서 일종의 역사적 부록이다. 그 밖에 여러 가지 작은 문헌들이 예레미야서에 삽입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바빌론에 유배가 있던 사람들과 새로 탄생한 유다이즘의 공동체들이 얼마나 예레미야를 존중했는가를 입증하고 있다. 편집자들은 여러 가지 사건과 예언을 이중적으로 수록하고 있다.예레미야서는 시대에 대한 지시사항을 많이 기록하고 있지만 엄격한 의미로 연대기의 순서에 따라 그 본문들을 정리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 책의 무질서한 배치는 오랜 시간 동안의 편집작업이 낳은 결과이다. 또 그 편집과정을 역사적으로 세밀하게 밝히 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36장은 매우 중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605년 예레미야는 비서 바룩을 시켜 자신의 소명 초기부터(626년) 발설한 신탁들을 받아 적게 하였다(36:2). 이 신탁들이 적힌 두루마리를 여호야킴왕이 불태웠기 때문이다. 예언자는 불타버린 신탁들을 다시 보완하여 썼다(36:32). 이 문집의 내용을 파악하는 것은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 그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아마도 그 문집은 25:1-12을 서문으로 삼고 1∼18 장 안에 들어 있는 605년 이전의 신탁들을 묶었을 것이다. 36:2에 따르면 예의 문집은 25:13-38이 암시하고 있듯이 민족들에 대한 옛 신탁들도 포함시키고 있는 것 같다. 또 보충문헌들이 문집에 첨가되었으니 그 내용은 605년 이후의 문헌과 민족들에 관한 다른 신탁들이다. 또 거기에 `고백론’이 삽입된 것 같다. 그 다음에 따로 수집한 문헌으로서 왕들과 (21:11-23:8) 예언자들(23:9-40)에 관한 소책자가 거기에 삽입되었다.


예레미야서는 다음의 장들로 구분시켜 볼 수가 있다.

제1부 : 1∼20장.

제 1부는 전반적으로 시대순서를 따르고 있으며 25:1-13로 연장된다.

    이 연장부분은 1∼20장의 결론이다.

    20장과 25장 사이에, 21:1-10과 24장은 왕들과(21:11-23:8)

     예언자들에 관한 소책자(23:9-40) 들을 끼어들게 하고 있다.


제2부는 25:13-38에서 시작되는 민족들에 관한 신탁들을 수록하고 있다.

       제2부는 46∼49장에 와서 다시 연장되며, 또 여기에 바빌론에 관한 신탁(50-51:58)이 첨가되었고,

         또 다시 전기(傳記)의 소단위 (51:59-64)가 부연되었다.


제3부는 편집자가 `구원의 약속’으로 간주한 본문들(26-35)을 순서 없이 수록한 것이다.


제4부는 전기적(傳記的)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본문은 36∼45장에 이른다.

       45장은 전기에 대한 예레미야의 비서 바룩의 결론이다.

       52장은 예레미야서의 부록에 해당하며 기원전 587∼586년의 참변을

       묘사하고 있으며 또 여호야 킴왕의 출감을 보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