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예레미야 강해

[스크랩] 예레미야서 --- [핵심성경연구-위어스비]

에반젤(복음) 2019. 12. 28. 10:34


         

예레미야 서론과 개요

예레미야-서론과 개요-

 

예레미야 서론

 

저자: "예레미야"란 이름은 "여호와께서 지명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임명이 없이는 이 선지자가 사역을 충실하게 지속해갈 수없었을 것이다. 그는 제사장의 혈통에서 태어나, 아나돗이라는 제사장의 성읍에서 살았다. 그가 부동산을 살 수 있었고 서기관을 고용할 수 있었던 점으로 보아 그는 개인적인 재산을 소유한 부자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린 아이"(1:4-6)였을 때 사역에 임하도록 부름을 받았는데, 그 때가 10대였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주전 627년의 일이었다.

 

시대: 예레미야는 유다 역사의 마지막 40년 동안에 사역을 하였으며 요시야왕의 즉위 13년(주전 627년)에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이후(주전 587년)까지 사역하였다. 그는 1장 1-3절에서 이전에 번영했던 유다왕국의 지도자들의 이름을 나열하고 있다. 요시야는 경건한 왕이었고 주전 608년에 죽었는데, 그의 통치 기간에 율법이 발견되었고 성전 예배가 회복되었다. 여호아하스가 그 뒤를 이었으나, 불과 석달 간 다스렸을 뿐이었으므로 그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 다음의 여호야김(주전 608-597)은 불경건한 왕으로서, 예레미야를 박해하는 데 온 힘을 다하였고, 예레미야 36장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기록한 문서를 불태운 왕이었다. 여호야긴은 그 다음 왕이었으나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기 전의 석달 동안 통치하였다. 마지막 왕은 시드기야(주전 597-586)였으며 나라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의 함락을 초래케 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예레미야는 그가 사랑하는 민족이 죄에 빠지고, 전쟁을 치르며, 심판을 받는 것을 보며 살았으나 이 모든 일을 거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데 충실하였다.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하였을 때 앗수르가 세계의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애굽과 바벨론이 급진적으로 세

 

력을 뻗치고 있었으며, 주전 607년에는 바벨론이 니느웨를 점령하여 앗수르의 세력을 무찔렀다. 그러자 바벨론은 유다를 향하였고, 유다의 "정치가들"은 애굽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왕에게 권하였다. 예레미야는 언제나 애굽과의 동맹을 반대하였다. 그는 유다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여호와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다의 죄가 너무도 컸으므로 이 민족은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기게 되었다. 마침내 바벨론은 유다를 쳐서 예루살렘을 점령하였다(주전 606-586). 예레미야는 거룩한 성의 죽음을 기념하기 위하여 "애가"를 썼다.

 

전언(멧세지)" 예레미야의 임무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민족을 위하여 죽음의 종소리를 울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첫 부분은 예루살렘에서 행한 그의 설교 몇 편을 수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백성들과 제사장들, 치리자들의 죄, 특히 우상 숭배하는 죄를 탄핵한다. 25장에서 그는 이 민족이 70년 동안 유배를 당하게 되며 그 후 왕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돌아오게 될 것임을 알린다. 31장에서 그는 여호와와 그의 백성 사이에 "새 언약"을 맺게 될 것을 예언한다. 이것은 돌에 새겨진 율법이나 행위의 언약이 아니라 마음에 씌어진 사랑과 믿음의 언약이다. 마지막 장에서 예레미야는 유다 주위에 있는 이방 나라들을 다루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이 책에 나오는 핵심 단어는 타락이다. 이 민족은 여호와께 등을 돌렸으며, 그들을 우상 숭배로 인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추종하였다(2:19/3:6/3:8/4:1-12/4:22/5:6/8:5/14:7). 이 선지자는 회개하라는 말을 열 한번 사용하였으나, 이 민족은 회개하지 않았다. 우리는 예레미야가 울고 있는 것을 읽는다. 따라서 그는 이 타락한 민족에 대하여 대단히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9:1/13:17/14:17/15:17-18/애 1:2/애 2:11/애 2:18). 포로될 것을 예언하여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왕들에게 말했기 때문에 예레미야는 반역자로 불리웠으며, 백성들에게 박해를 당하였다(1:12-33/1:20/1:26/1:28-29/38장). 구약 예언자들 중에서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처럼 많은 박해를 받아야 했던 사람은 예레미야외에는 없었다(2:8/2:26/4:3/6:14/14:13-16/18:18/ 23:9-40/26:8-19/27:9-16/28-29 장). 유다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향하였더라면 하나님은 그들을 바벨론에서 구원하셨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의 죄 가운데서 고집스러웠기 때문에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회복시켜 주실 것을 약속하셨다.

 

예레미야는 자기의 멧세지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샘들과 웅덩이(2:13), 약(8:22), 아무 소용없는 띠(13:1-11), 토기(18-19장), 멍에(27장), 강에 던지운 책(51:59-64) 등의 극적인 예화들을 많이 사용하였다.

 

예레미야와 그리스도: 예레미야와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점들은 살펴볼 만하다. 둘 다 결혼을 하지 않았으며(16:1), 자기의 출신지에서 거절을 당하였다(11:21/12:6/눅 4:16-30). 예레미야는 바벨론의 위협이라는 그늘 아래서 사역을 하였으며 예수께서는 로마의 그늘 아래서 사역하였다. 이들은 둘 다 자기 백성들에게서 반역자라는 말을 들었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당대의 거짓 선생들로부터 악의적인 반대를 받았다. 둘 다 예루살렘성을 바라보고 울었으며, 이 성의 파멸을 예언하였다. 예레미야는 소수의 제자들을 모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도 얼마 되지 않았으며 그들 중의 더러는 그가 가장 어두움에 처해 있을 때 그를 남겨 두고 떠났다. 둘 다 거짓되게 체포되어 박해를 받았으며, 외적인 형식과 의식의 아닌 마음의 종교를 강조하였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시며 제사장들에게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을 때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신 것이었다. 둘 다 마음의 "새 언약"을 강조하였다(렘 31:37/히 8:7- 이하). 설교를 통하여 감동적인 예화들과 비유들을 사용했으며, 동정심이 많고 온유한 마음을 보여 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이 민족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마음이 상하였다. 결국 둘 다 생애와 사역에 있어서 실패한 것처럼 보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높이셨으며 그들의 사역을 성공적으로 만드셨다.

 

예레미야애가: 우리는 이 책을 요약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파괴를 기록한 일련의 "장례식 시들"이다. 이 시들은 각 행의 첫자와 끝자를 맞추는 방식으로 쓰여졌다. 1, 2, 4, 5장의 22절씩은 히브리 알파벳순으로 되어 있고, 3장에서는 각 문자마다 3절씩 배정하고 있다.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 책보다 더 잘 표현한 책은 성경에 달리 없다(렘 13:17/마 23:36-38).

 

예레미야 개요

 

서론: 선지자로서의 소명 /1장

 

 

1. 민족적인 내용:유다에 대한 멧세지 / 2-33장

 

정죄 / 2-24장

(1)민족 전반에 대한 정죄/2-20장

(2)특히 지도자들에 대한 정죄 /21-24장

포로됨 /25-29장

회복됨 / 30-33장

 

2. 개인적인 내용: 예레미야의 고난/34-45장

 

예루살렘 포위 공격 이전/ 34-39장

포위 공격 이후, 남은 자들과 함께 함/ 40-45장

 

3. 국제적인 내용: 나라들에 대한 멧세지 / 46-51장

 

애굽/46장

블레셋 /47장

모압/48장

암몬/49장 1-6절

에돔/49장 7-22절

수리아, 게달, 엘람/49장 23-39절

바벨론/ 50-51장(168번 언급됨)

 

결론: 선지자의 사로잡힘과 해방/51장"

 

 

렘 1-35

예레미야의 사역-예레미야 1-35장-

 

예레미야 18-19장은 토기장이와 진흙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레미야가 유다에게 한 사역을 연구함에 있어 이 장들을 사용할 것이다. 18장에서 선지자가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하여 진흙으로 빚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 주목하자. 19장에서 그는 완성된 그릇을 가져다가 힌놈 골짜기에서 부숴 뜨린다. 첫 사건은 하나님의 은혜를 비유하며, 두번째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예증한다. 토기장이와 진흙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애의 모습과,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비유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각 물체마다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1. 하나님은 토기장이시다

 

인격-우리의 삶은 어떤 보이지 않는 힘이나 맹목적인 "운명"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한 인격자, 즉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우리의 삶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는 토기장이시다(사 64:8 참조).

 

능력-진흙은 스스로 빚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안내하는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들 위에 절대 주권을 행사하신다(6-10절). 우리는 그와 논쟁을 하거나 무슨 일을 하시는지를 문의할 수 없다(롬 9:20-24 참조). 물론, 이 말은 하나님께 인간들의 죄나 민족들의 실패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계획-토기장이는 진흙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는 이미 완성된 생산품을 그의 마음에서 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대한 완전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롬 12:1-2/엡 2:10/빌 1:6). 우리는 그 완성된 생산품을 볼 수 없으나 하나님은 그 생애가 놀라울 것을 약속하신다(고전 2:9).

 

 

인내-토기장이는 인내심을 가지고 진흙으로 일을 하며 부드럽게 모양을 빚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지시하심에 있어서 인내하시며 그의 뜻을 성취하고자 하신다. 때때로 그는 부모, 교사, 동료 그리스도인, 우리를 박해하는 사람들의 손을 빌려 우리의 모양을 빚는 일을 도우신다. 가치있는 생산품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하나님은 즐겨 기다리신다.

 

2. 인간은 진흙이다

 

물론 예레미야의 멧세지에서 진흙은 이스라엘 민족을 나타낸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의 삶에 개인적으로 적용한다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의 보물들을 담도록 하나님이 빚으시는 하나님의 그릇들이다(딤후 2:19-21/고후 4:7/행 3:15). 인간은 진흙으로 지어졌는데, 진흙이란 흙을 물과 섞은 것이다. 우리는 흙으로 되어 있다(시 103:14).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물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부어 주셨다. 진흙은 그 자체로는 그다지 큰 가치가 없다. 그러나 바른 목적을 위해 올바른 손으로 빚어질 때 위대한 것이 될 수 있다. 개인의 생활에 잠재해 있는 놀라운 가능성을 계산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진흙의 가장 중요한 자질은 그 고분고분함에 있다. 만일 토기장이의 손에서 고분고분하지 못한다면 작품을 망쳐 놓게 될 것이다. 진흙은 스스로 빚을 수가 없으며 토기장이가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스스로 만들어진"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다.

 

3. 인생은 녹로(회전대)이다

 

녹로(회전대)는 토기장이로 말미암아 신속히 돌아간다. 그리고 속도를 조절하는 이도 토기장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삶은 우연이나 행운에 의해 조절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조절을 받는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환경들을 배정하시며, 그 환경은 또한 우리들을 빚게 된다. 어린 요셉을 애굽으로 가게 하여 왕과 같이 빚어지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생의 환경들에 대하여 이상히 여기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불친절하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로마서 8장 28절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며,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었다는 것에 동의하게 될 것이다. 녹로에 관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크기가 아니라(어떤 사람들의 생은 다른 사람들의 생애보다 짧다) 그 중심이다. 녹로가 "중심이 잘 잡혀 있으면" 모든 것에 균형이 유지된다. 헌신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있어서 중심이 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마 6:33).

 

4. 불순종은 망하게 하는 것이다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언제나 순복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일 것이지만 일이 언제나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선지자는 망쳐진 그릇을 보았다! 토기장이는 그 진흙을 던져 버리고 새로운 덩어리로 시작하려 할 것인가? 아니다. 그는 그 진흙으로 다시 만든다! 이것은 인간의 반역과, 은혜로 회복되는 것을 상징한다. 망쳐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자기 자신의 방법을 유지하려고 할 때이다(18:11-12).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뜻 밖에서 우리 자신의 계획을 세움으로써 우리의 인생을 망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완성된 생산품만을 볼 수 있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결코 불순종해서는 안될 것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인생에 대해 하나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데에 은혜로우시며 "우리를 다시 만드시는 데에" 자비로우시다. 어떤 때는 우리를 굴복하게(고분고분하게)하시기 위하여 격렬한 징계를 사용하셔야만 하기도 한다. 그는 야곱의 삶에서 20년을 소비하셨으나 결국은 여호와께 유용한 그릇이 되었고, 하나님은 다윗에게 또다른 기회를 주셨다. 진흙이 반항을 한다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럼으로써 시간과 아름다움을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빚으시지만, 우리는 결코 전과 똑같을 수 없는 것이다. 요한일서 1장 9절은 용서에 관한 놀라운 약속이지만, 불순종해도 된다는 핑계가 될 수는 없다.

 

5. 시련은 용광로(토기장이의 가마)이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의 용광로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으나 거기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어떠한 그릇이라도 용광로

 를 통과하기 전에는 아무 쓸모가 없다. 열이 그릇에 힘과 미를 주며 유용성과 가치를 높인다. 인생은 반드시 용광로를 가지기 마련이다. 욥은 고통의 용광로를 거쳤으며(욥 23:10), 베드로전서 4장 12절 이하는 박해의 용광로에 대해서 말해 준다. 충성된 세 명의 히브리 청년들은 용광로를 통과하였으며 토기장이가 그들과 함께 불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단 3:19-25)! 하나님은 그 용광로를 얼마나 뜨겁게 하셔야 하는지 알고 계시며, 우리가 견딜 수 있는 시련의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알고 계신다(고전 10:13). 하나님의 용광로를 벗어나서 피하는 삶을 살아 온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꺼이 고난을 감수해 온 사람들 만큼 하나님의 은혜의 축복을 알지 못한다. 우리의 길에 시련이 닥칠 때 우리는 토기장이에게 굴복하여야만 하며 그분이 그분의 방법을 사용하시도록 해야 한다.

 

6. 깨뜨림은 곧 심판이다.

 

19장 1-13절에서 예레미야는 유대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헌신하였던 장소인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를 향하여 갔다. 유대 역사에 있어서 가장 악한 죄들이 이 장소에서 범하여졌다(7:31). "힌놈의 아들"이란 이름은 히브리 말로는 "게힌놈"인데, 결국 헬라어의 "게헨나"가 되었고, 이 말은 신약에서 지옥을 나타내는 말이다. 요시야왕은 이 우상의 산당을 예루살렘의 쓰레기 하치장으로 바꾸어 버렸다(왕하 23:10)!이제 선지자는 완성된 토기를 가지고 가서 그 땅의 장로들 앞에 펼쳐 보이며 심판에 대해 설교한다! "너희는 하나님을 버렸으며 여기서 우상을 예배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죄를 범하였다. 그러나 이 골짜기가 도벳(불탐, 또는 오물)이라고 불리지 않고 학살의 골짜기라고 불리울 날이 곧 올 것이다. 심판이 유다에 임하고 있다!" 말을 마친 후 그는 그 토기를 깨뜨렸다. 이제 그 토기는 다시는 고쳐 쓸 수가 없게 되었다(10-11절).

 

민족이나 개인의 생활은 "돌아설 수 없는 지점"에까지 도달할 수가 있다. 진흙이 굳어지면 더이상 빚지 못한다. 생의 초기에 그리스도께 굴복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삼손은 굴복하기를 거절하였으므로 하나님은 그릇을 부숴야만 하셨다.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요일 5:16)

하나님은 우리가 그릇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릇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담고 받아들이며 나누어 준다. 우리는 그의 축복들을 받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가 유용하고 정결하며 비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죄에서 분리되어 있으라고 경고하였다(딤후 2:19-21 참조). 우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가 없다. 주께서 우리가 높임을 받는 그릇이 되도록 도와 주시며, 주인의 용도에 적합하게 해 주시기를 빈다."

 

 

렘 36

성경의 영감-예레미야 36장-

 

극적인 본 장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 어디서 왔으며 무슨 일을 하고, 인간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다룬다. 예레미야는 지난 20년 동안 설교를 해왔었다. 애굽이 막 바벨론에게 멸망을 당하였고 여호야김왕의 대외정책은 파탄하였다. 그러나 선지자는 바벨론이 어느 날엔가 유다를 포로로 잡아갈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다만 그의 백성이 회개하는 것을 보게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상황이 낙심스러워 보일 때라도 경건한 사람은 계속해서 사역을 하게 된다.

 

1. 말씀의 영감(1-4절)

 

지금까지 예레미야의 사역은 구두로 하는 것으로서 성전 뜰에서 설교를 했었고 타락한 민족을 일깨우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가 멧세지를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로 기록하기를 원하셨다. 17-18절에서 우리는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본다. 예레미야가 비서격인 바룩에게 말을 하면 그가 그것을 기록하였다. 바룩이 쓴 것은 하나님의 계시였으며 그 누구도 혼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진리들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시는 계시이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그 안에 들어 있는 진리들을 결코 발견할 수가 없다. 구약에는 거의 4,000번이나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말이 나온다.

 

 

영감(inspiration)은 성경이 어떻게 기록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단어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라고 디모데후서 3장 16절은 말한다. 이 말은 성경이 "하나님께서 입김을 불어 넣으신" 책이란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정신에서 제조된 생산품이 아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말씀하신 것이다(벧후 1:21). 인간들은 위대한 작가들에 대하여 "영감받은" 작품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다. 세익스피어는 인간적인 감각으로 보아 그 위대함에 있어서 영감받은 작가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성경처럼 하나님께 영감받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개성을 무시하거나 그들을 "로보트"로 만드신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각 성경의 저자들은 그 자신의 개성을 그 저작 속에 나타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쓴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최종적이고 완전하며 권위를 갖춘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경을 신뢰할 수 있다.

 

2. 말씀의 선포(5-10절)

 

1절과 9절을 비교할 때 이 책을 기록하는 데 최소한 일 년은 걸렸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대항하여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특별 금식 기간을 둘 것을 요청하였다. 왕은 그의 말년의 사건들에서 하나님이나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지만 이 요청을 수락하였다. 그 왕은 국가적인 "종교의식"은 따라 행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은 거절하는 오늘날의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같았다. 바룩은 성전에 있는 금식하는 백성들에게 이 책을 읽어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예레미야는 갇혔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갇히지 않았다(딤후 2:9/살후 3:1-2 참조). 바룩이 이 일을 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였다. 왜냐하면 예레미야는 인기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이 전파되고 가르쳐짐으로 인하여 퍼져나가도록 규정하였다. 성경 문헌과 배본을 위한 직분이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축복하시는 일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인간들이 죄를 깨우치도록 하는 데 사용하시며 정직한 회개로 그들을 인도하는 데, 또한 구원의 확신을 주시는 데 사용하신다(3절). 바룩은 하나님의 자비로부터 도망하려는 유다를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이미 사람들에게 임해 있기 때문에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요 3:36).

 

3. 말씀의 보존(11-32절)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모습이 각기 다른 것을 보는 일은 흥미롭다. 바룩이 서기관 그마랴의 방 앞쪽 성전에서 말씀을 읽을 때 그마랴의 아들인 미가야가 참석하고 있었다. 미가야는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아 즉시로 나라의 지도자들과 이 말씀을 나누었다. 이들은 바룩을 데려오게 하였으며 그는 두 번째로 말씀을 읽었다. 지도자들은 이제 두려워하였으며(16절), 누군가 왕에게 전해야만 하였다!

여호야김은 애굽에게 무릎을 꿇어 왕좌를 받은 불경건한 사람이었다(왕하 23:31-24:7). 그는 하나님의 한 선지자 우리야를 벌써 죽인 터였다(렘 26:20-24). 그는 물론 예레미야에게도 호의적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겨울 궁전에서 편안히 앉아 읽는 소리를 듣는 일에는 동의하였다. 그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겸손히 하여 성전에 있어야만 하였다. 그에게 말씀이 필요한 때에 그에게 말씀을 가져다 주시는 하나님은 참으로 은혜로우시다. 그러나 여후디가 책을 읽자 왕은 부주의하게도 그것을 조각내어 그의 화로에 연료로 사용하였다. 그의 눈에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빛이 없었다. 지도자들 중의 세 명이 간원하였으나(25절) 왕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말씀에 굴복하는 대신 그는 말씀에 항거하였으며, 예레미야와 바룩을 체포하여 죽이려 하였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세기를 거쳐 내려오며 성경을 공격했었다. 그러나 아직도 성경은 든든히 서 있다. 예레미야는 다시 그와 같은 것을 썼다. 우리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으나 여호야김 왕은 흙으로 변한 지 오래이다. 죄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을 미워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인간의 죄를 드러내며 다가올 진노를 경고하기 때문이다. 주후 303년에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본들을 찾아내어 불태웠으며 그 기념비에 "그리스도인의 이름은 멸절된다!"고 새겨 놓았다. 20년 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공식적인 종교로 삼았으며 성경을 다시 사람들의 손에 돌려 주었다. 진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은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다고 하여 위클리프를 박해하였으며, 틴들(W. Tyndale)은 화형을 당하였지만 성경은 여전히 여기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보존하신다. "오 주여, 당신의 말씀은 영원토록 하늘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 24:35). 성경 위에 삶을 세우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 곳에 세우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7).

 

예레미야는 새로운 사본을 썼으며 왕에 대한 특별한 심판을 첨부하였다. 여호야김은 말씀을 파괴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말씀이 그를 파괴하였다! 그는 비참한 죽음을 당할 것이며 보좌를 주장할 상속자를 남겨 두지 못할 것이었다(30절/ 렘 22:18-19). 그의 아들 여호야긴은 아버지가 죽자 보좌를 차지하였으나 바벨론으로 포획되기 전 3개월간만 지속되었다(왕하 24:6-12). 바벨론은 유다를 사로잡으러 왔으며 예레미야가 예언한 그대로였다. 예언의 성취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데에 대한 가장 큰 증거들 중의 하나이다."

 

렘 45

4. 말씀의 위로(45장)

 

이 장에서는 36장에 있었던 사건에 대한 바룩의 반응을 기록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데 참여하였었으나 자기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숨을 곳을 찾아가야 했다. 그의 충성심으로 인하여 높임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박해를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얼마나 실망이 컸겠는가!

의심할 나위없이 그는 재능있는 서기관이었으므로 왕을 보필하는 사람들 중의 누군가가 바룩에게 왕의 관리가 되도록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였을 것이다. "왕의 인기있는 서기관이 될 수 있을 텐데 예레미야와 같이 미움받는 설교자와 한 패가 되는가?" 이것은 굉장한 유혹이다!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아셨으며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이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너는 너를 위하여 대사를 경영하느냐?"라고 하나님은 바룩에게 물으셨다. "그것들을 구하지 말라! 유다의 땅은 미래가 없다. 바벨론이 와서 성읍과 땅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바룩이 왕과 함께 있을 "평안한 위치"를 얻고자 예레미야와 말씀을 버렸다면 모든 것을 잃었을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고 주님을 섬기는 일에 그를 사용하셨다.

 

오늘날과 같이 반대와 박해의 시대에 말씀의 편에 참되게 서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갔고"(딤후 4:10). 예레미야와 바룩같이 바울은 말씀으로 인하여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으나(딤후 2:8-9) 그는 생명의 종말에 이르러 "내가 믿음을 지켜"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당신은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선반에 두는가(36:20)? 성경의 "현대 비평가들"처럼 조각조각 찢고 있는가? 당신은 성경을 폐지하려하고 있는가? 아니면 성경에 머리를 숙이고 그 진리에 순종하고 있는가? "내가 범사에 주의 법도를 바르게 여기고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나이다"(시 119: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