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고전,후서 강해

음란과 소송에 대한 바울의 권고(고린도전서5~6장 주해와 적용) 스티브 장

에반젤(복음) 2019. 12. 16. 05:42



   고 린도전서는 글로에 가문이 고린도교회 내 분파들에 대해 보낸 보고에 대한 답신이다(1:11). 여기의 세부적인 내용들은 매우 바울을 근심시키는 것이라서, 그는 이 주된 문제를 설명하는 데 편지의 첫 6장을 사용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이 문제를 설명하려고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후에는 고린도교회의 다른 문제,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서도 답신에서 설명하려 했다(7:1). 고린도전서 5~6장은 구전보고에 대해 설명하는 첫 부분의 마지막에 해당한다. 이 두 장은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가장 놀라운 문제들을 담고 있으며, 이것들은 다른 어떤 문제들보다 사회적인 것이다.

고린도교인의 음란에 대한 권고
(고전 5:1~13)
우 선 부도덕한 형제의 문제는 여러 가지로 바울을 괴롭게 했다. 첫째로, 바울은 성도들 중의 성적 부정에 대한 암시들로 언짢아하고 있다. 사실, 음행은 이후 6장의 마지막에서 다시 다루는 문제이다. 거기에서 바울은 기준을 명확하게 밝힌다. “몸은 음란을 위하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며 주는 몸을 위하시느니라”(6:13b). 그의 최종적인 명령은 “음행을 피하라”(6:18)이다. 틀림없이 성적 죄악에 대해서, 바울은 형제의 부도덕을 허락하지 않았다.
둘째로, 바울은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부도덕성에 대해 교회가 머뭇거리는 것을 근심했다. 바울이 원한 적절한 반응은 5장 13절에서 발견된다. “이 악한 사람은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이 말씀은 언약 공동체에 “너희 가운데 악을 제하라” 명령된 신명기의 몇몇 구절들을 의미한다. 바울이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헌신은 충분히 진지하지 않았다.
셋째로, 더 모욕을 주자면, 고린도교인들은 소심할 뿐 아니라, 또한 교만했다. “너희는 교만하도다.” 바울은 큰 호통을 하며 이렇게 썼다. 이 비난은 이제 우리가 돌아보려는 1세기 고린도 세계의 사회적 역학에 대한 적절한 그림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고린도교회 내 개인의 음란은 분명 유죄였는데, 어떤 것은 깜짝 놀랄 만큼 뻔뻔하기도 했다. 바울은 그저 “아비의 아내를 취한 자”라고 적고 있다. 이것은 생모와 관계를 가진 것이 아니라 계모와 관계를 가진 것이 분명한데도, 바울은 그냥 ‘근친상간’으로 표현한다.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남자가 과부가 된 계모와 결혼한 상황임을 짐작케 된다.
한 명의 여성과 육체관계를 가진 아버지와 그의 아들은 구약율법을 범한 동시에 유대인의 정서에도 매우 혐오스러운 일을 한 것이다.
신 명기 27장 20절에 나오는 열 두 개의 저주 중 하나는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이다. 이는 왜 압살롬이 다윗왕의 후궁들과 지붕에서 벌인 행동이 악취를 풍기는 것이었는지 보여준다(삼하 16:21~22). 이는 분명히 돌에 맞을 일이며,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이와 같은 행동을 한 자를 저주하실 것이라 믿었다. 그리스뼴罐?시대에 대한 연구는 바울의 판단뼞걋肩?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뼽?본질적으로 옳음을 보여준다. 로마의 법과 사회규범에서 이런 관계의 허용은 보이지 않는다.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기원전 1세기 당시 그의 생각에 최고 역겨움을 말하기를, “장모가 사위와 결혼하는 것이다. … 오! 여자의 죄를 생각하는 것은, 믿을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인이 범한 행동은, 후에 “기독교”라 확인받는 유대종교(행 15:20)와 사회적 규범 양쪽 모두 참을 수 없는 범죄였던 것이다. 대체 어떤 부류의 사람이 그딴 짓을 한단 말인가?
종교적으로 보면, 남자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간단하다. 그는 믿음 없는 불경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거룩함이나 경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5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회적 관점에서 이 사람을 평가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보면, 그 남자는 사회가 말하는 것에 무관심한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아니면 사회의 규칙을 초월해 있는 엘리트였음이 틀림없다.
그는 고린도 신앙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것으로 보이고, 또한 교회가 그를 쫓아내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 사회적 엘리트 쪽이란 주장이 훨씬 그럴듯해 보인다. 그는 그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의 법을 무시할 만큼 부유했고 힘이 있었다. 그의 재산은 또한 부도덕한 행위에 동기를 부여했다. 로마법에 따르면 만약 그의 아버지가 부자로 죽었다면, 유산의 대부분은 부인이 상속받고 아들에게는 적은 몫만이 남겨진다.
사실상 아버지의 재산은 일차적으로 계모와 그녀의 아버지 또는 새 남편에게 가게 된다. 따라서 이 근친상간한 남자는 커다란 재정적 동기부여 때문에 계모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의 부유한 아버지가 남긴 전재산은 이제 혼자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 사람이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남자란 사실은 다른 증거에 비춰봐서도 잘 알 수 있다. 첫째로, 왜 교회가 그를 쫓아내는 것을 망설였는가 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그는 교회의 명사(名士)로, 또한 그리스뼴罐?세계의 다른 단체들의 기준으로 보건대 아마도 교회공동체의 후원자로 존재했을 것이다. 예컨대, 그는 고린도교회 내의 몇몇 극빈가정들의 생계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교회소유 노예들의 주인이었을 수도 있다. 당시에 지주나 주인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는 것은 아주 말도 안 되는 얘기였다.
둘째로, 왜 고린도교회가 그토록 교만했는지 부유한 권세자를 보면 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우리는 고린도교회의 주된 문제가 사실 논쟁보다는 교만의 문제인 것에 주목했었다. 바울은 문제를 간결하게 정리했다. “이는 다름 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1:12). 다른 말로 하면, 고린도교회의 분파는 그들에게 가장 인상적인 리더들에 대한 자긍심과 자랑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경고하기를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1:31), 그리고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3:21)고 하였다.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이 문제들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이 말에서 절정에 달했다.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5:6). 고린도교회는 그들의 공동체에 있는 이 근친상간한 형제가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그가 부유했건, 정치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했건 간에 그는 세속 고린도 사회에서 높은 질적 가치를 나타내는 높은 사회적 지위에 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때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상황이었다면, 바울은 범죄한 형제가 얼마나 부유하거나 권력을 가졌던가에 상관없이 추방했을지도 모른다. 바울은 세 가지 이유로 이것을 요구했다.
첫 째, 그는 그리스도께서 희생의 대가로 사신 교회의 순수성을 보전하기 원했다. 죄 된 구성원의 추방은 하나의 방법이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5:6) 바울의 신학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은, 신자들의 속죄를 성취하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이었고, 이는 “누룩 없는 새 덩어리”로 성취되었다. 이는 개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 차원에서의 중요한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는 흠이 없어야 한다.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진실한 회개가 있는 죄는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며, 교회의 일반적 관점에서 회개치 않은 죄는 남아있어선 안된다. 죄는 제거되어야만 한다.
둘째로,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의 구원이 유지되기를 원했다. 5절이 이를 명확히 보여준다.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어라”를 얼핏 보면 무척 가혹하며 소망이 단념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절은 5장의 다른 명령들의 조명의 빛 가운데서 읽어야 한다. 즉 “이 악한 자를 너희 중에서 내어 쫓으라.” 그 남자를 사단에게 넘겨주라는 것은 그를 사단의 구류 가운데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글자 그대로 “육신은 멸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바울이 그 남자의 육체적 죽음을 바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음행의 배후에 그런 죄의 원인인 육신이 있으며(갈 5:19), 절제하는 새로운 삶을 위하여 육체는 멸해져야 한다는 것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예수 안에서, 이 육신은 십자가를 통해 멸하여진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육신)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그러나 만약 성도가 이 진리를 거부하고 계속 죄를 짓는다면, 유일하게 남은 대안은 멸망을 수확하는 것이 될 것이다(갈 6:8).
5절의 뒷부분은 보다 긍정적인 면을 그린다. 바울의 깊은 의도는 그 사람의 영이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이다. 구원이 사단에게 구류되었다가 통과함으로 성취된다는 것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육신이나 죄성의 종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아가 그 남자가 구원과 같은 영적인 문제들에 있어서 더욱 확실히 회복케 되는 더 위대한 목표가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형제들의 영적인 구원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 남자는 영혼이 잘 되었을 것이다.
바 울이 그 남자가 추방되기를 바랐던 세 번째 이유는 공정한 심판의 시행 때문이었다. 12절은 바울이 줄곧 이런 견해를 염두에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바울은 “외인들을 판단하는데 내게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마는 교중 사람들이야 너희가 판단치 아니하랴”라고 썼다. 후에, 6장에서, 이런 견해는 성도와 교회간의 소송이라는 더 큰 문제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의 공동체를 하나님께서 심판하실까 근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교회에 부여한 의무와 권위(마 16:18)를 바울은 믿었다. 그래서 13절은 세상 안의 죄는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므로 남아 있어도 된다. 그러나 교회 안의 죄는 즉시 주님이 주신 권위로 처리해야 한다는 원칙의 적용을 보여준다.
고린도전서 5장 안의 가르침을 적용하는 것은 오늘날의 교회 상황에서 매우 민감한 사항이다. 교회 몸 된 지체의 순수함은 심각한 문제이며, 모든 성도들의 일치 다음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솔직히 말하기를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라”(5:11).
게다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에 따라 이렇게 할 권위를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오늘날의 교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교회 내에서 시행해야 하는 책임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동시에, 오늘날 세상과 세상 죄에 대한 심판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손에 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의 죄들을 먼저 돌아보아야 한다.

고린도교회의 분쟁과 소송에 대한 권고
(고전 6:1~11)
고린도전서 6장은 성도와 고린도교회 사이의 고소사건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다시, 로마시대의 고린도에 대한 바른 사회적 지식은 바울의 낙심, 가르침 등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고린도전서 5장 12~13절의 사건은 고린도교회에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으며 또한 설명한다. 한 성도가 고소함으로 다른 한 교회 성도를 분쟁을 중재할 세속법정 앞에 세웠다.
바 울이 이 일을 “지극히 작은 일”라 부른 사실은 이 논쟁이 본질상 중요치 않은, 아마도 재정적 이유이거나 또는 손해배상보다는 미납된 채무에 대한 것일 수 있음을 말해준다. 바울은 형사사건은 국가의 영역권 안에 있으며, 이런 경우에 대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수행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라고 성경의 다른 곳에서 주장하고 있다(롬 13:1~4).
본 상황이 일차적으로 재정문제에 관한 것이란 견해는 7~8절에 근거한다. “불의”는 재정문제라기보다는 기타 다른 상해를 포함할지 모르는 반면에, “속임(사기)”은 일차적으로 상업적 용어이다. 이 논쟁은 돈에 관련된 것이다.
로 마 법제도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법정들은 빈민들이나 심지어는 평민들도 쉽게 갈만한 곳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낮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가 세속법정에서 판결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로마 통치 하의 고린도에서, 보통 법정은 아고라라고 불리는 시장의 중심부에 있었으며, 치안판사가 재판석에 앉아 있곤 하였다(고후 5:10).
두 교회 사람들 사이에 법적 소송이 벌어지면 말 그대로 공공장소, 다시 말해 “믿지 않는 자들 앞에서(고후 6:6b)” 마을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니, 바울의 분노가 이해될 만도 하다.
로 마제국 시대의 사회규범에 따르면, 오직 부자와 권력자들만이 상대방을 법정에 세울 수 있었다. 하층계급의 사람들이 그의 상위계급 사람들을 상대로 고소했다는 얘기는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들을 상대로 고소하는 자들은 항상 그들보다 사회적으로 계급이 더 높은 부자나 권력자들이었다.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분노는 보편적인 그러나 사악한 사회적 불의에 대해서 일수도 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대항할 수 없는 법적 우위를 점했다. 그래야 7절에 나오는 바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있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교회 안의 부유한 교인들은 탐욕에 따라 행동했고, 가난한 교인들에게 해를 입혔다. 그러나 더 부유한 자들은 분명히 어느 정도의 돈을 손해 볼 여력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9절에서 “불의”라고 말한다. 4~5절에 제기된 바처럼,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자들이 문제였다. 바울은 빈정대며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는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경히 여김을 받는 자”와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란 말은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자신들을 현명하고 집안 좋은 이들로 여기고 있음을 암시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잘 난 사람들이다.
문제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신학적으로 세 원칙에 기초를 삼고 있다. 첫째로 신자들은 미래에 세상을 심판할 재판관이 될 것이고(6:2), 심지어 천사들에게도 그리할 것이다(6:3).
그러므로, 교회에서 소소한 경우를 심판하는 것은 성도들에겐 능력 발휘 이전의 단순한 목표연습에 불과하다. 이 진리는 신자들이 이런 상황을 교회 내부 안에서도 재판할 수 있을 만큼 현명하다는 것 이상을 말한다.
둘 째로, 잠재적으로 교회의 증거의 문제이다. 5절에 나타난 바울의 분개는 아마도 방해물 없이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보고픈 그의 열망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고전 9:12). 실제로, 그는 마음과 생각의 전투를 위해, 그리고 죄와 사단에 대한 싸움으로써 교회의 증거를 경험했다. 그는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6:7b)하며 탄식하였다.
셋째로, 교회 내 악한 자들의 이런 행동들은 신자들의 지위와 모순된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은 자들은 음행과 탐욕, 또는 다른 죄들로 나타내어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와 성령으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6:11b). 이는 보다 인상적인 신학적 진리이다. 실질적으로 바울은 그의 전형적인 방식대로 말하길, “거룩하여졌으니 그렇게 살라.” 신학과 행동을 따르는 것이 윤리학이라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이란 사실과 윤리는 틀림없이 일치해야 한다.
오늘날 사회에 대한 교회의 증거는 복음을 전하는 것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수준에서 심각함이 틀림없다. 우리는 절대로 우리 성도들이 오늘날 소송의 광기에 동참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소송에 두 명의 성도가 결부되어 있을 때는, 이는 중차대한 죄이며 비성경적이다.
교회는 교회됨의 증거를 위해 반드시 교회 내부 안에서 이런 논쟁들을 중재해야 할 것이다. 오늘의 교회는 또한 교회질서 유지와 제자도의 영역 안에서 권징에 대해 더욱 긍정적인 평가를 해야 한다. 규제 없는 편파주의가 횡행하는 이 세상에서 모든 사회계층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한 옳은 재판을 시행하는 것은 오직 교회 공동체의 소임임에 틀림없다.

고린도교인의 음란에 대해 기준을 제시함(고전 6:12~20)
고 린도전서 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은 성적 죄악과 성적 죄악을 일으키는 원인에 대해서 다시 다룬다. 6장 9절의 악한 것들에 대한 언급은 같은 주제에 대한 지속적인 설교이다. 더구나 이것들은 명백히 고린도 교회에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문제였다. 거기에는 성 매매가 있었고 신전 매음은 일상적이었다. 한 때는 고린도교회가 천명 이상의 매춘부들을 고용한 것으로 악명 높았었고, 로마 사회에서는 매춘부와 자는 것이 성욕 해소를 위해 용인되는 행위였다. 따라서 고린도교회 회심자들의 큰 어려움은 정기적으로 갖아온 매춘부와의 관계를 끊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 문제를 앞선 편지(5:9)에서 이미 설명했었고 고린도전서 6장이 이 문제를 마지막으로 다룬 것은 아니다(10:8; 고후 6:15; 12:21).
그러나 바로 이 죄악의 문제는 더 깊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6:12)는 고린도에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던 표어였다. 이것이 심한 자유주의거나 율법에서의 자유함을 남용하는 것이거나 개인의 자유를 향유하라고 지나치게 지지하는 세속적인 철학이거나 간에 바울은 그 실행을 강하게 반대했다.
이런 자유는 그 자체로 나쁘다기보다는 죄악과 중독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다. 바울은 주장한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아무에게든지 제재를 받지 아니하리라”
바 울은 또 다시 성적 죄악이 믿는 자들에게 통용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믿는 자들의 육체는 죽음과 부활 때에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이고(6:14) 또한, 믿는 자들의 육체는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것이다(6:15). 전자인 그리스도의 몸처럼 변화될 것이라는 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후자인 각각 신자의 몸이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라는 것은 어쩐지 특별한 언급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몸은 단지 영적인 실제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17절의 빛을 통해 볼 때 물질적인 의미를 너무 강조해도 안 된다. 두 번째로,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된다(6:17). 그리고 믿는 자들의 육체는 이 영적인 실제를 반영해야 한다. 세 번째로, 믿는 자들의 몸은 죄를 지으면 안 되고 불결해져서도 안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는 몸을 소중한 보물을 다루듯이 보호해야 한다는 것이다(6:18). 네 번째로, 믿는 자들의 몸은 성령의 전이기(6:19) 때문에 몸은 순결하고 거룩하게 지켜져야 한다. 다섯 번째로, 믿는 자들의 몸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게 되었다. 따라서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재산인 몸을 함부로 할 수 없고 주인이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써 몸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성은 매매의 대상이고 성적 순결을 지키는 것은 지지되기보다는 우습게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성에 대해 강력한 기준을 가져야 하고 성적 죄악이 교회 울타리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바울 신학은 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보여준다. 여기서 각각의 관점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된 몸이라는 기초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교인들과 특별히 젊은이들에게 몸은 신성한 것이고 예배를 위한 구별된 도구이며 주님이 값 주고 사셨고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기독교인들은 성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