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고 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자세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점과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실용적인 서신이라는 데 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인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사회 구조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지키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교훈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분쟁과 분파 문제,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문제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 린도전서는 원칙적으로는 1세기 신약시대의 고린도 교회를 위해 쓰여졌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교회들과 설교자들에게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현재 우리 교회들의 거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든지 그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고린도전후서에 기록되어진 대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서신은 오늘 우리 교회들이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도 주의깊게 읽어야 할 서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바울이 수많은 문제에 봉착했던 고린도교회에게 어떤 충고를 주었는가를 우리가 자세히 살피고, 이를 교훈삼아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바울을 통해 설립된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하여 그토록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는지, 당시 교회의 상황과 그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이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살핌으로써 오늘의 설교자들이 고린도전서를 바르게 설교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고린도의 역사적 상황
고 대 역사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주전 8세기부터 도시국가를 형성했던 고린도는 헬라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2km 지점에 레헤움 항구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7kn 지점에 겐그레아 항구(롬 16:1)가 있었다. 이곳은 희랍의 목을 쥐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위치였으며, 남북으로는 육로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고린도는 자연히 군사적으로나상업적으로 크게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Lucius Mummius)에 의해 점령되어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약 1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주전 44년에 로마 황제 시이저(Julius Caesar)의 칙령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주전 27년부터는 로마의 총독이 부임함으로써 고린도는 마케도니아 남쪽의 헬라 전 지역을 포함하는 아가야(Achaia) 지역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
이렇게 재건된 1세기 신약시대의 고린도는 과거의 고대 고린도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성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헬라인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각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는 약 3만명의 유대인들도 섞여 있었다.
이처럼 당시 고린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여러 종족들이 모이는 항구도시였기에 이들이 가져온 혼합주의가 성행했었고, 오늘날 항구도시들이 그러하듯이 온갖 범죄와 타락한 모습이 만연한 도시였다. 또한 마치 인종 전시장과 같았던 이 도시에는, 그 주민들의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신전들이 신상들의 박물관처럼 세워져 있어 종교혼합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고린도에 세워져 있던 12개 이상의 신전 중,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를 섬기는 신전에서는 성창(性娼)이 번성하였다. 이 신전에는 ‘성스러운 노예들’이라 하는, 매춘부 역할을 하는 여사제가 천 명 이상이나 거하고 있었고, 이들과 더불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예배의 한 순서일 정도로 성적인 타락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자연히 고린도인들을 방탕한 자들로 만들었고, 성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처럼 산다"(Korinthiazes-thai)는 말은 고대사에서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격언이 되다시피 했다.
반 면 이러한 성적․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부유한 도시로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하여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학교들이 번성하였다. 고린도의 시민들은 지적인 자부심이 있었고,특히 수사학에 큰 가치를 두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것을 매우 가치있게 생각하였다. "고린도인들처럼 산다" 라는 격언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인들의 말” 이라는 표현은 매우 설득력 있고 달콤하게 수사학적으로 말을 한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신약시대 당시의 고린도는, 로마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섞이면서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였고, 종교적 의식이 매우 타락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도시에 바울의 선교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1:1)가 세워지게 된다.
2. 고린도 교회의 설립 배경
고린도에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 49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황제의 칙령-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하는-에 의해 로마로부터 고린도에 와서 정착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세례받은 사람이 바울을 통해 세례받은 스데바나와그의 가족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전 1:16, 16:15).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과정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2차선교여행중인 주후50-51년 겨울에고런도에 도착해서 1년반청도머물며 복음을 친하고교회를 개척했다. 바울은천막사엄을 했던 아굴라와브리스길라의 집에 취직脚하여 자기 손으로 밥벌이를 해가먼서 유대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그후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와합세하자 더욱 힘있게 복음을 증거하였다.바을은 방방과 음란이 만연되어 있는 이고런도에서 아덴에서처럼 철학적 변론이나인간의 지혜를사용하지 않고(행 17:16-34)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평이한 말로 "예수 그리스도와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만을전하였다(고전 2:1-2).바울은 고런도에서오직 하나의 터만을랄았는데,그터는곧예수 그리스도였다(3:10,11).이러한 전파를통해 바울은상당수의 유대인들과하나넘을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얻게 되었다.그러나 이와같은성공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 유스도라는 이의 집에서만복음을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교회는 시작되었고, 한곳에 결코 오래 머무르는법이 없었던 바울은예외적으로이곳에서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선교 시씩을 하였다.그러다가52년 봄쯤 아굴라부부와 함께 에베소를거쳐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떠나는데,이때부터 아볼로가후임 사역자로서 고린도신자들을 굳게 세웠다(행 18:27-28),
3. 고린도 교회의 구성
고 린도 교회는 아마도 구성원의 대부분이 하층 노예 출신 이방인들이었던 듯하다(1:26-29).그러나 더러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또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이들 여러 계층간의 위화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좋은 예는 고린도전서 10장 27절이나 11장 17-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성만찬을 행할때 공동체의 한 부류인 부자들은 많은 음식을 가져와서 잔뜩 먹고 깊이 술에 취해 있었던 반면, 다른 부류인 노예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술취해 있는 부자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따라서 예배가 혼란케 되었고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계층간의 위화감!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나뉘어진 고린도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을 내세워 파당을 짓기도 했고(1:11, 12),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교회의 모임에서 사회자가 필요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면도 있었고, 심지어 기부금을 수집하는 회계조차 없었던 것 등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모습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고린도 교회의 구성체제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많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출발하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성격
바 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아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올바로 해석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흔히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했던 여러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이 문제들이 서로 전혀 관계없는 독립적인 것이라고 이해하여 올바르게 설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면 알겠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문제들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면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 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 등의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이교도적 사회 환경과 시대 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휩쓸려 침몰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고린도의 이방적인 환경과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적 과거는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성 도덕의 문란, 우상 숭배, 불신자들간의 교류 문제, 지혜와 지식 자랑, 윤리 문제, 그리고 성령 열광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과 세속적인 헬라의 지혜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결과,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 모두에서 급속히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1) 문제 발생의 근본적 원인
: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로 대체
그 렇다면 고린도 교회에서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들이 수없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져버리고 세상 지혜를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이들이 바울의 가르침 중 세상 지혜와 혼동하여 결정적으로 오해한 것은 구원론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이었다.
① 구원론과 성령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이들이 복음을 믿었을 때 받았던 구원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헬라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자신들의 세속적인 영육이원론으로 재해석하여 오해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바 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구원이 "첫 열매" 로 그에게 주어지는데 (롬 8:23), 그것은 끝이 아니라 "보증금"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고후 1:22, 5:5)구원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점이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신자의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가지 시제를모두사용하는이유이다.그리고바울은성령에 대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 구원의 첫 열매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동시에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한 보증이다” 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종말 구원의 첫 맛을 이미 보았고, 그리고 미래에 그 구원이 완성될 것을 보장 받았다는 말이다.
굳이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 일을 시작하신 칭의의 주체도 그리스도시며, 성화의 주체 또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완성도 그가 친히 이루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덧붙이자면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구원의 보증을 받은 신자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신분과 그 상태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완성의 날까지 여전히 육신과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죄악과 싸워 이기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자에 비유하고, 푯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삶이라고 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조로 생각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와 같은 종말론적 이원론-지금은 이 세대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그리스도 재림 때에 그 완성을 받는다는 시간적인 이원론-을 당시 세속적인 헬라적 영육이원론으로 잘못 생각했다.
그 결과.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구원의 의미를 세상 지혜인 헬라의 이원론으로 잘못 해석했다.
그 리하여 그들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완전히 얻은 것으로 상상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바로 이와 같은 자신들의 견해를 확인해주는 증표(sign)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벌써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제약을 다 초월한,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죄와는 상관이 없는 "영적인 존재" 로 변화되어 이미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다 얻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따라서 영적인 만족감과 풍요로움 속에 젖어있었다(고전 3:20).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소위 "고린도 열광주의" 라고 부르는 성령 열광주의이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바로 안다면 왜 고린도 교회에 지혜의 문제나 분파문제, 또는 은사의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더 나아가 부활의 문제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 리고 당시의 시대정신인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무시하는 이원론이 얼마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안다면 성적인 문란 같은 방종주의나 또는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음식에 관한 금욕주의의 문제가 대두되게 된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의 구원론과 성령 이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세상 지혜로 말미암은 대표적 현상들
: 성령 열광주의와 금욕주의
이제 이러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영향은 고린도 교회에서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대조적 인 행동 결과를 초래한다. 한편으로는 성령 열광주의자들의 자유 방종주의를 낳았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였다.
① 성령 열광주의
고 린도 교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 아무짓이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고린도의 문란한 성도덕에 같이 휩쓸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짓까지 하면서도, 그런 행동들이 죄악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영혼구원을 더 과시한다고 합리화했다. 이런 현상들을 학자들은 ‘열광주의’(Enthu-siasm)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들을 구원받은 증거 라고 생각하면서 그 은사들을 과시하고 부도덕에 이르는 영적 상태를 열광주의라 하고, 이런 자들을 열광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열광주의자들에 의해 발생된 고린도 교회 문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 제물에 관한 것이었다. 고린도 교인들 중 바울이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한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론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우상이나 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우상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꺼리는 일단의 사람들, 즉 ‘믿음이 약한 자들’ 에게 상처를 주어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나타나게 된다. 교회가 너무나 지적인 정통 교리에만 집중하게 되면, 항상 성령파들이나 은사파들의 카리스마운동이 열광주의로 흘러서 도덕성이 약화되게 된다. 이 점은 우리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은사가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시켜준다고 생각하여 그것만을 중시하고 삶은 따르지 못하게 되면, 도덕적으로는 상당히 문란한 상태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게된다. 하여튼 고린도인들이 그러한 모습의 전형적인 예였다.
② 극단적 금욕주의
반 면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영과 육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영혼의 구원만이 중요한 것이지 육체는 전혀 무익한 것이므로 영의 구원을 가능한 한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육체의 정욕을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흘렀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부인하고,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는 것을 피했으며, 율법을 여자적으로 지키려고 힘썼다.
만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열광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간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혜와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는 열광주의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을 "약한자들" 이라고 무시했고, 금욕주의자들은 열광주의자들을 "육신적인 방탕자들" 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대립이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3) 세부적 문제
① 분파 문제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도 이러한 이원론적 영향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우리가고린도 교회의 구성에서부터 살펴본대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이 공동체는 추구하는성향에 따라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문제는 특히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먼저 아볼로파가 생겨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철학과 수사학을 숭상하는 고린도의 전통에 찌들어 있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성경 해석의 능력과 수사적 기술을 가진 아볼로에 대해서 굉장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의 본고장인 알랙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에 대한 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은사를 높이 평가하던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아볼로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높이 게 되었다.
반면에 금욕주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율법적인 계율을 가르치는 베드로를 더 선호하게 되었고 베드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삼게 되었다.
그러자 이 두 그룹에 대항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원래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자고 하면서 스스로를 ‘바울파’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결국 세 개의 파가 되었다.
이들 세 파는 아볼로가 주는 지혜가 더 나은가, 아니면 베드로가 더욱 지혜로운 가에 대해 논쟁하는 등, 사도들의 가르침을 여러 헬라학파들의 지혜 정도로 여겼고 서로를 무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렇게 되자 또 한 부류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아마도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로서 이른바 그리스도파였던 것 같다. 학자들간에는 “진짜 그리스도파가 있었겠는가”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실지로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 보고, 아마도 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파를 무시한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분파의 문제도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부활의 문제
고린도 교회에서 왜 부활이 문제가 되었을까?
영 혼의 구원만이 중요하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몸의 부할 이 일어난다는 사상은 이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이원론적인 사상 배경 아래에서는 ‘몸 부활’ 사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지로 자신들의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몸의 부활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고린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견해는 정확히 무엇인가? 바울은 어떤 견해를 지금 반박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아직도 불분명하고 많은 논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를 부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몸의 부할’을 부인했을 것이라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그들이 헬라 이원론에 근거하여 영혼의 부활만을 믿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이미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다시 부활했기에 더 이상 부활이 없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③ 은사의 문제
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은 미래의 부활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 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소유한 구원의 징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저하게 겉으로 드러난 은사들, 예를 들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런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과시하는 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자연히 경쟁과 질시와 교만과 상호 무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예배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서로 과시하면서 자신이 구원을 받고 남보다 더 높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일대의 혼란이 벌어졌음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알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성령 열광주의, 이교 사회의 혼합주의적 풍토, 그리고 이원론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심각한 위기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이 교회를 설립한 바울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5. 고린도전서의 기록 동기 및 목적
고린도전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바울의 조언을 구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답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기 록 배경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바울은 여러 사람들, 특히 글로에의 집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들어 이미 그 대강을 알고 있었다(고전 1:11).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한 자들이나 악한자들, 우상 숭배하는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던 편지- "전에 쓴 편지" 혹은 "이전 편지"(The previous letter)라고도 부르는데, 고린도전서 5장 9-11절을 보면 이 편지는 완전히 유실된 듯하다-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등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이 무렵에 바울은 교회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을 맞았다. 이 대표단은 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전 16:17). 그들이 갖고 온 질문들은 첫째 결혼에 대한 것(고전 7:1-40). 그리고 우상 제사의 고기에 대한 것(고전 8:1-9), 예배 때의 혼란문제(고전 11:2-34) 성령의 은사(고전 12:6-14:4)에 대한 것, 부활에 관한 것(고전 15:5-5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관한 것들이었다.
바울은 일단의 사람들을 통해, 혹은 편지를 통해 접하게 된 이 문제들에 대하여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에베소에서 기록한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구원의 증표로 생각하고 “자신들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하다”라고 말하며 교만에 빠져 있던 성령주의자들을 향해 예리한 역설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고전 4:8).
“너희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도달해서 왕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와 같이 왕노릇하는 데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이 어서 바울은, 아직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신분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워주는 삶의 정신과 절제있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성령 열광주의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즉 참된 영성은 도덕성을 반드시 동반해야 함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의 지혜나 분파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이웃들에게 올바른 삶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자유의 성격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 자유의 성격을 다루면서 교회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문제, 이른바 강한 자와 약한 자간의 대립의 문제를 다룬다. 복음의 본질을 알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되 그 자유가 방종주의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강한 자들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의미하는지 모르고 금욕적인 율법주의 집단으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약한 자들!
이런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항상 있는데, 소위 본질 추구자와 형식에 얽매인 자들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바 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주는 구체적인 충고들은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바울의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어떻게 고린도전서를 바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바울의 교훈
(1)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
고 린도 교회를보면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의문점은 ‘고린도 교회에서 왜 이토록 비윤리적이고 부도덕적인 문제들이 발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설교자는 그 문제의 원인이 윤리의 부재나 도덕의 타락, 그 자체에 있었다고 범위를 제한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모든 문제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져버리고 세상 지혜를 받아들인 복음의 변질에 있다고 밝힌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전서에는 초반부터 "하나님의 지혜" 와 "세상의 지혜" 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20,2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세상 지혜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이 세상 지혜에 기초하여 십자가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 으로 거부하였다. 세상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1
:18, 2:8, 3:18-20), 겉보기에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2:4). 그러나 실상 그 속에는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지혜와 판단을 앞세우는 불신앙이 숨어있는 것이다.
혹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 보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게 보이는 그 방식으로 타락한 인류들을 죄악에서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1:18, 24).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논리적 설득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리낌과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자신도 바로 이러한 겸손과 자기 비하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우지 않기 위해, 말의 화려함이나 논리적 설득력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만 의존하겠다고 선언한다(1:17,2:3-4). 이는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만을 바로 전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지로 바울 사도는 평생 동안 이 십자가만을 전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십자가가,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이요 전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과는 달리 세상 지혜를 끌어들여 스스로 만족하였고 지혜로운 척 했다.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그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 그리고 부도덕한 삶이 팽배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끌어들인 결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속화의 길로 나간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여러 문제들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고로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변질에서 비롯된 것이지, 비윤리나 부도덕에 서기 인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윤리 문제를 그 자체로 해석하여 설교하려 한다면, 그는 고린도전서를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렇다면 고린도전서가 오늘날 현대 교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교회들이 당시 고린도 교회처럼 십자가복음의 부재 현상을 겪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 대신 인간 중심의 ‘영광의 신학’을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교회 내에서,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과 섬김과 겸손으로 살기보다는 명예나 물질이나 권력에 대한 추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분만이 높임을 받는 대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가치관이 여과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에서도 십자가 대신에 다른 세상적인 어떤것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가? 교회가 주님을 붙드는 대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은사와 축복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의 지혜와 섞었을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야말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정체성의 참된 표준인 것을 기억하여, 이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런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윤리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
우리가 고린도전서 뿐 아니라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깊이 살펴보면,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관한 바울의 명확한 태도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구원 문제에 관해서는 칼로 끓듯이 명확하고 한치의 양보도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그 러나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 윤리의 큰 특징은 ‘비형식적’ 이고 ‘비계율적’ 이라는 데 있다. 먼저 비형식적이란, 어떠한 형식이나 종교 의식 그 자체에 매이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깊은 내용과 본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계율적이란 "꼭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계율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즉 믿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가변적이고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애매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이것만이 절대로 옳다. 틀리다” 라고 함부로 단정짓지 말고, 여유 있게 대하라는 것이다. 실지로 우상 제물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바울은 “우상 제물은 먹어도 좋고 먹지 않아도 좋다” 라고 한다. 도대체 이런 대답이 어디 있는가? 분명 한 대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한 대답을 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바울이 보기에는 절대 함부로 주장할 수 없는 가변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바울의 태도를 잘못 받아들이면 “우리의 믿음만 허락한다면 무슨일이든지 다 해도 된다” 는 오해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윤리 문제에 관한 바울 교훈의 핵심인 것이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가능성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만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이타적인 자세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신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가하나 모든 것이 다 덕스러운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라." 이것이 윤리문제에 관한 바울의 결론적인 권면이다.
성도들의 윤리 문제에 관한 바울의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이 가르침은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우리 한국 교회에 가장 절실한 가르침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설교자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이, 구원 문제와는 상관없는 윤리 문제를 가지고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하며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
이 지면에서 그 구체적인 문제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윤리 원칙한 가지만은 강조하고 싶다.
조 금은 자기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바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 설교자들이 마음을 열고 귀담아 들어야 하지 많을까? 그래서 덜 중요한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말 강조해야 할 복음의 핵심을 놓치는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7.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그 발생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논의의 끝에서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명확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고린도전서를 바로 설교하기 원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어떤 설교자도 이 서신을바로 설교할 수 없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모르거나 별 관심이 없는 설교자에게는, 어쩌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문제들이 별개의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입을 빌어 오늘의 강단에서 그대로 설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게 될 것이다.
그 러나 이 서신을 설교하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이 서신 중 한 부분이나 한 구절을 전체적 맥락에서 마음대로 떼어내어 설교할 수 없다. 이쯤되면 이 글을 읽는 설교자들은 왜 이토록 필자가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강조를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1세기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처했던 상황과 그 문제들의 원인은 서로 별개가 아닌 하나의 줄기에 매달린 열매와 같아서 하나의 큰 맥락속에서 해석해내야 한다. 더 나아가 설교자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문제들을 반드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고, 그 해석의 끝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발견하여 이를 바로 현실의 삶에 적용하고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론
이천 년 전 바울 사도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설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이적을 요구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그런 기적을 행한다면 자신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겠다고 하는 태도였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바울에게 신비한 지혜나 철학적 지식을 요구했다. 영원한 진리를 얻게 하고, 삶의 비밀과 미래에 관한 일들을 일러줄 수 있다면 그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의 말을 빌자면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바울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며 타협하기보다는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다.
21 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한국 교회 교인들도 이제 십자가보다는 더 많은 다른 것을 교회로부터 얻기를 기대한다. 교회 안에서 과거와는 다른 것을 보고 싶어하고 다른 것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다양한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정말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고, 그들의 맺힌 마음을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외침은 그리 틀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기독교가 허물어지거나 교회가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신앙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 한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과학 문명이 더 발달하더라도,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이 좋아하고 얻고 싶어하고 필요로 하는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십자가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는 과거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리하였고, 지난 이 천년 기독교 역사 동안에도 그리하였듯이 오늘날이 한국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 안에 용저와 구원의 길이 있다. 그것은 21세기에도 동일하게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제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는 모든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고, 십자가만을 힘있게 외침으로써 과거 고린도 교회와 동일한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를 다시 십자가 위에 힘있게 세웠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고 린도전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처럼 교리서신도 아니며, 디모데전후서나 디도서처럼 목회의 자세나 지침을 가르치는 서신도 아니다. 이 서신의 특징은 그리스도인들이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문제점과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실용적인 서신이라는 데 있다. 바울은 이 편지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에 존재하고 있는 문제인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사회 구조 속에서 부딪히는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거룩함을 지키며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교훈한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고린도교회 안에서 일어났던 분쟁과 분파 문제, 교인들간의 법적 소송, 결혼 문제, 영적 은사의 남용, 성만찬,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부활에 대한 불신문제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 린도전서는 원칙적으로는 1세기 신약시대의 고린도 교회를 위해 쓰여졌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당시의 고린도 교회처럼 많은 문제들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의 우리 교회들과 설교자들에게 매우 적절하고 필요한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실제로 고린도 교회는 현재 우리 교회들의 거울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느 시대이든지 그 시대를 막론하고 교회의 문제들은 대부분 고린도전후서에 기록되어진 대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서신은 오늘 우리 교회들이 바울의 다른 어떤 서신보다도 주의깊게 읽어야 할 서신이 아닌가 생각된다. 만일, 바울이 수많은 문제에 봉착했던 고린도교회에게 어떤 충고를 주었는가를 우리가 자세히 살피고, 이를 교훈삼아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면 많은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글은 바울을 통해 설립된 고린도 교회가 어떻게 하여 그토록 수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는지, 당시 교회의 상황과 그 문제들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이에 대한 바울의 교훈을 살핌으로써 오늘의 설교자들이 고린도전서를 바르게 설교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
1. 고린도의 역사적 상황
고 대 역사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주전 8세기부터 도시국가를 형성했던 고린도는 헬라본토와 펠로폰네소스를 연결하는 지협에 위치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2km 지점에 레헤움 항구가 있었고, 동쪽으로는 7kn 지점에 겐그레아 항구(롬 16:1)가 있었다. 이곳은 희랍의 목을 쥐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중요한 위치였으며, 남북으로는 육로를 연결하고 동서로는 해로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고린도는 자연히 군사적으로나상업적으로 크게 번창한 도시가 되었다.
그러나 고린도는 주전 146년 로마의 장군 뭄미우스(Lucius Mummius)에 의해 점령되어 시민들은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팔려갔다. 그 후 약 100년 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주전 44년에 로마 황제 시이저(Julius Caesar)의 칙령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주전 27년부터는 로마의 총독이 부임함으로써 고린도는 마케도니아 남쪽의 헬라 전 지역을 포함하는 아가야(Achaia) 지역의 행정 수도가 되었다.
이렇게 재건된 1세기 신약시대의 고린도는 과거의 고대 고린도가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다시금 국제적인 상업 도시로 번성하게 되었다. 주민들은 헬라인뿐 아니라 로마 제국의 각 지역으로부터 이주해 온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에는 약 3만명의 유대인들도 섞여 있었다.
이처럼 당시 고린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의 여러 종족들이 모이는 항구도시였기에 이들이 가져온 혼합주의가 성행했었고, 오늘날 항구도시들이 그러하듯이 온갖 범죄와 타락한 모습이 만연한 도시였다. 또한 마치 인종 전시장과 같았던 이 도시에는, 그 주민들의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신전들이 신상들의 박물관처럼 세워져 있어 종교혼합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고린도에 세워져 있던 12개 이상의 신전 중, 사랑의 여신인 아프로디테(Aphro-dite)를 섬기는 신전에서는 성창(性娼)이 번성하였다. 이 신전에는 ‘성스러운 노예들’이라 하는, 매춘부 역할을 하는 여사제가 천 명 이상이나 거하고 있었고, 이들과 더불어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 예배의 한 순서일 정도로 성적인 타락이 극심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환경은 자연히 고린도인들을 방탕한 자들로 만들었고, 성적으로 부패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고린도인들처럼 산다"(Korinthiazes-thai)는 말은 고대사에서 ‘성적으로 아주 문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격언이 되다시피 했다.
반 면 이러한 성적․도덕적 타락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부유한 도시로서 철학과 수사학이 발달하여 많은 학자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중심으로 한 학교들이 번성하였다. 고린도의 시민들은 지적인 자부심이 있었고,특히 수사학에 큰 가치를 두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아름답게 말하는 것을 매우 가치있게 생각하였다. "고린도인들처럼 산다" 라는 격언과 마찬가지로, “고린도인들의 말” 이라는 표현은 매우 설득력 있고 달콤하게 수사학적으로 말을 한다는 뜻이었다. 이처럼 신약시대 당시의 고린도는, 로마인들과 헬라인들 그리고 동방에서 온 사람들이 서로 섞이면서 종교적 혼합주의가 성행하였고, 종교적 의식이 매우 타락한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러한 도시에 바울의 선교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1:1)가 세워지게 된다.
2. 고린도 교회의 설립 배경
고린도에 최초로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주후 49년 로마의 클라우디우스(Claudius)황제의 칙령-유대인들을 로마시에서 추방하는-에 의해 로마로부터 고린도에 와서 정착한 유대인 부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에 의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바울에게서 세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이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었지만 독자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고린도에서 처음으로 세례받은 사람이 바울을 통해 세례받은 스데바나와그의 가족이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고전 1:16, 16:15).
고린도 교회의 설립 과정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울은2차선교여행중인 주후50-51년 겨울에고런도에 도착해서 1년반청도머물며 복음을 친하고교회를 개척했다. 바울은천막사엄을 했던 아굴라와브리스길라의 집에 취직脚하여 자기 손으로 밥벌이를 해가먼서 유대회당에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그후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로부터 내려와합세하자 더욱 힘있게 복음을 증거하였다.바을은 방방과 음란이 만연되어 있는 이고런도에서 아덴에서처럼 철학적 변론이나인간의 지혜를사용하지 않고(행 17:16-34)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평이한 말로 "예수 그리스도와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만을전하였다(고전 2:1-2).바울은 고런도에서오직 하나의 터만을랄았는데,그터는곧예수 그리스도였다(3:10,11).이러한 전파를통해 바울은상당수의 유대인들과하나넘을경외하는 이방인들을 얻게 되었다.그러나 이와같은성공은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 유스도라는 이의 집에서만복음을전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고린도교회는 시작되었고, 한곳에 결코 오래 머무르는법이 없었던 바울은예외적으로이곳에서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선교 시씩을 하였다.그러다가52년 봄쯤 아굴라부부와 함께 에베소를거쳐 수리아의 안디옥으로떠나는데,이때부터 아볼로가후임 사역자로서 고린도신자들을 굳게 세웠다(행 18:27-28),
3. 고린도 교회의 구성
고 린도 교회는 아마도 구성원의 대부분이 하층 노예 출신 이방인들이었던 듯하다(1:26-29).그러나 더러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있었고, 또 부유하고 사회적으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이들 여러 계층간의 위화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좋은 예는 고린도전서 10장 27절이나 11장 17-절에서 볼 수 있는데, 이들이 성만찬을 행할때 공동체의 한 부류인 부자들은 많은 음식을 가져와서 잔뜩 먹고 깊이 술에 취해 있었던 반면, 다른 부류인 노예들은 허기진 배를 채우지 못한 채 술취해 있는 부자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것이다. 따라서 예배가 혼란케 되었고 위화감이 조성되었다.
계층간의 위화감!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였다. 이렇게 나뉘어진 고린도교회는 교회 지도자들의 이름을 내세워 파당을 짓기도 했고(1:11, 12), 교회 안에서 무슨 일이 발생할 때마다 서로의 이익에 따라 편 가르기를 하기도 했다. 물론 교회의 모임에서 사회자가 필요 없을 만큼 서로 밀접하게 결합된 면도 있었고, 심지어 기부금을 수집하는 회계조차 없었던 것 등으로 보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표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는 모습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과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졌던 고린도 교회의 구성체제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많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출발하였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4.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성격
바 울 당시의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아는 것은 고린도전서를 올바로 해석하는 데 있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흔히 고린도전서를 해석하는 설교자들은 고린도 교회에서 발생했던 여러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이 문제들이 서로 전혀 관계없는 독립적인 것이라고 이해하여 올바르게 설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우리가 살펴보면 알겠지만,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여러 종류의 다양한 문제들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서로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그러면 당시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살펴보도록 하자.
고 린도 교회는 바울과 아볼로 등의 유능한 지도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타락한 이교도적 사회 환경과 시대 정신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기에 휩쓸려 침몰할 위기에 놓이게 된다. 고린도의 이방적인 환경과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적 과거는 고린도 교회에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켰다.
성 도덕의 문란, 우상 숭배, 불신자들간의 교류 문제, 지혜와 지식 자랑, 윤리 문제, 그리고 성령 열광주의 등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특히 그들은 기독교의 구원의 복음과 세속적인 헬라의 지혜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결과, 교리적인 면과 윤리적인 면 모두에서 급속히 세속화의 길을 걷게 되고 말았다.
(1) 문제 발생의 근본적 원인
: 하나님의 지혜를 세상 지혜로 대체
그 렇다면 고린도 교회에서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문제들이 수없이 발생한 근본적인 원인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이 모든 문제들의 뿌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지적한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져버리고 세상 지혜를 받아들인 데서 기인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특히 이들이 바울의 가르침 중 세상 지혜와 혼동하여 결정적으로 오해한 것은 구원론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것이었다.
① 구원론과 성령에 대한 오해
그렇다면 이들이 복음을 믿었을 때 받았던 구원과 성령의 은사에 대한 오해가 왜 발생하게 되었는가? 그 이유는, 헬라 영지주의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의 종말론적인 이원론을 자신들의 세속적인 영육이원론으로 재해석하여 오해하였기 때문인 듯 하다.
바 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받은 구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를 자신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구원이 "첫 열매" 로 그에게 주어지는데 (롬 8:23), 그것은 끝이 아니라 "보증금"의 성격을 지닌 것이며 (고후 1:22, 5:5)구원의 완성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바로 이점이 바울이 자신의 서신에서 신자의 구원에 대해 설명할 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세가지 시제를모두사용하는이유이다.그리고바울은성령에 대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내주하시는 ‘성령’은 이 구원의 첫 열매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선물이요, 동시에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주어질 구원의 완성에 대한 보증이다” 라고 가르쳤다. 다시 말하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종말 구원의 첫 맛을 이미 보았고, 그리고 미래에 그 구원이 완성될 것을 보장 받았다는 말이다.
굳이 신학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이 일을 시작하신 칭의의 주체도 그리스도시며, 성화의 주체 또한 주님이시기 때문에 그 완성도 그가 친히 이루실 것이라는 선언이다. 덧붙이자면 구원의 현재적인 측면과 미래적인 측면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구원의 보증을 받은 신자들이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은, 구원받은 신자들의 신분과 그 상태에 대한 이해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완성의 날까지 여전히 육신과죄에 노출되어 있고, 죄의 세력이 남아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죄악과 싸워 이기면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가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주자에 비유하고, 푯대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삶이라고 했던 이유이다.
그러나 영과 육의 이원론적 구조로 생각하도록 오랫동안 길들여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의 이와 같은 종말론적 이원론-지금은 이 세대 구원의 첫 열매를 받고, 그리스도 재림 때에 그 완성을 받는다는 시간적인 이원론-을 당시 세속적인 헬라적 영육이원론으로 잘못 생각했다.
그 결과. 그들은 바울이 자신들에게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 구원의 의미를 세상 지혜인 헬라의 이원론으로 잘못 해석했다.
그 리하여 그들의 영혼이 "지금"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완전히 얻은 것으로 상상하고, 성령의 은사들을 바로 이와 같은 자신들의 견해를 확인해주는 증표(sign)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고린도 교인들은 벌써 자신들이 세상의 모든 제약을 다 초월한, 그래서 어떤 일을 해도 죄와는 상관이 없는 "영적인 존재" 로 변화되어 이미 종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된 구원을 다 얻고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였다. 따라서 영적인 만족감과 풍요로움 속에 젖어있었다(고전 3:20). 이렇게 해서 고린도 교회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 소위 "고린도 열광주의" 라고 부르는 성령 열광주의이다.
우리가 만일 고린도 교회의 이러한 상황을 바로 안다면 왜 고린도 교회에 지혜의 문제나 분파문제, 또는 은사의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는지, 더 나아가 부활의 문제가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좀더 근본적인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그 리고 당시의 시대정신인 영혼을 중시하고 육체를 무시하는 이원론이 얼마나 고린도 교인들에게 깊게 자리잡고 있었고, 그것이 기독교의 복음을 오해하게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안다면 성적인 문란 같은 방종주의나 또는 우상 제물에 관한 문제, 음식에 관한 금욕주의의 문제가 대두되게 된 원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결코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바울의 구원론과 성령 이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문제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2) 세상 지혜로 말미암은 대표적 현상들
: 성령 열광주의와 금욕주의
이제 이러한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영향은 고린도 교회에서 대체적으로 두 가지의 대조적 인 행동 결과를 초래한다. 한편으로는 성령 열광주의자들의 자유 방종주의를 낳았고, 다른 하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였다.
① 성령 열광주의
고 린도 교인들은 이미 “자신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었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의 몸으로 아무짓이나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일부 교인들은 고린도의 문란한 성도덕에 같이 휩쓸렸다.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이방인들이 하지 않는 짓까지 하면서도, 그런 행동들이 죄악이기보다는 오히려 자신들의 영혼구원을 더 과시한다고 합리화했다. 이런 현상들을 학자들은 ‘열광주의’(Enthu-siasm)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은사들을 구원받은 증거 라고 생각하면서 그 은사들을 과시하고 부도덕에 이르는 영적 상태를 열광주의라 하고, 이런 자들을 열광주의라고 부른다.
이러한 열광주의자들에 의해 발생된 고린도 교회 문제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우상 제물에 관한 것이었다. 고린도 교인들 중 바울이 ‘믿음이 강한 자’라고 표현한 한 부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성령론을 통하여 얻은 지식으로 우상이나 그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즉 고린도의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들은 실체가 없는 존재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여 우상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고,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전혀 꺼려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꺼리는 일단의 사람들, 즉 ‘믿음이 약한 자들’ 에게 상처를 주어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고린도 교회뿐 아니라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나타나게 된다. 교회가 너무나 지적인 정통 교리에만 집중하게 되면, 항상 성령파들이나 은사파들의 카리스마운동이 열광주의로 흘러서 도덕성이 약화되게 된다. 이 점은 우리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성령의 은사가 자신들의 구원을 확인시켜준다고 생각하여 그것만을 중시하고 삶은 따르지 못하게 되면, 도덕적으로는 상당히 문란한 상태에 빠져들어가는 것을 보게된다. 하여튼 고린도인들이 그러한 모습의 전형적인 예였다.
② 극단적 금욕주의
반 면에 고린도 교인들 중 일부는 영과 육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영혼의 구원만이 중요한 것이지 육체는 전혀 무익한 것이므로 영의 구원을 가능한 한 순수하고 거룩한 상태로 유지해야 하고, 이를 위해 육체의 정욕을 될 수 있으면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극단적인 금욕주의로 흘렀다. 그래서 이들은 결혼을 부인하고,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먹는 것을 피했으며, 율법을 여자적으로 지키려고 힘썼다.
만일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고 하면, 열광주의자들과 금욕주의자들간에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사실이다. 지혜와 지식과 자유를 자랑하는 열광주의자들은 금욕주의자들을 "약한자들" 이라고 무시했고, 금욕주의자들은 열광주의자들을 "육신적인 방탕자들" 이라고 비판하면서 자신들이 그들보다 영적으로 우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의 대립이 고린도 교회의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3) 세부적 문제
① 분파 문제
고린도 교회의 분파 문제도 이러한 이원론적 영향 때문에 생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우리가고린도 교회의 구성에서부터 살펴본대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모인 이 공동체는 추구하는성향에 따라 여러 분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 문제는 특히 아볼로와 베드로가 고린도를 방문하면서 더욱 심각하게 되었다.
먼저 아볼로파가 생겨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철학과 수사학을 숭상하는 고린도의 전통에 찌들어 있던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은, 엄청난 성경 해석의 능력과 수사적 기술을 가진 아볼로에 대해서 굉장한 신뢰감을 갖게 되었다. 사도행전 18장을 보면 알레고리적 해석의 본고장인 알랙산드리아에서 온 아볼로에 대한 평이 나오고 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은사를 높이 평가하던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아볼로를 자신들의 선생으로 높이 게 되었다.
반면에 금욕주의적인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도들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율법적인 계율을 가르치는 베드로를 더 선호하게 되었고 베드로를 자신들의 사도로 삼게 되었다.
그러자 이 두 그룹에 대항하는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원래 사도인 바울에게 충실하자고 하면서 스스로를 ‘바울파’라고 주장하게 되었고, 결국 세 개의 파가 되었다.
이들 세 파는 아볼로가 주는 지혜가 더 나은가, 아니면 베드로가 더욱 지혜로운 가에 대해 논쟁하는 등, 사도들의 가르침을 여러 헬라학파들의 지혜 정도로 여겼고 서로를 무시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렇게 되자 또 한 부류가 생겨났는데, 이들은 아마도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로서 이른바 그리스도파였던 것 같다. 학자들간에는 “진짜 그리스도파가 있었겠는가”에 관한 논란이 있지만,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실지로 “그리스도파가 있었다”고 보고, 아마도 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와 직접 교류한다고 주장하며 다른 파를 무시한 극단적인 열광주의자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분파의 문제도 우리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② 부활의 문제
고린도 교회에서 왜 부활이 문제가 되었을까?
영 혼의 구원만이 중요하다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몸의 부할 이 일어난다는 사상은 이상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이원론적인 사상 배경 아래에서는 ‘몸 부활’ 사상이 있을 수 없는 것이고, 실지로 자신들의 영혼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에 몸의 부활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이미 영적으로 부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도대체 고린도인들의 부활에 대한 견해는 정확히 무엇인가? 바울은 어떤 견해를 지금 반박하고 있는가? 이 문제는 아직도 불분명하고 많은 논의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자체를 부인했다기보다는 그리스도인의 ‘몸의 부할’을 부인했을 것이라 한다. 이러한 주장의 근거는, 그들이 헬라 이원론에 근거하여 영혼의 부활만을 믿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이미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죽고 다시 부활했기에 더 이상 부활이 없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③ 은사의 문제
이런 이유로 고린도 교인들은 미래의 부활을 중시하기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 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소유한 구원의 징조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저하게 겉으로 드러난 은사들, 예를 들면 방언을 하고, 예언을하고, 이적을 행하는 것들에 관심을 집중시켰으며, 이런 은사들을 가지고 서로 과시하는 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자연히 경쟁과 질시와 교만과 상호 무시의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예배 때에는 겉으로 드러나는 은사를 서로 과시하면서 자신이 구원을 받고 남보다 더 높은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랑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한 일대의 혼란이 벌어졌음을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알수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상황과 문제들을 개략적으로 살펴보았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분명히 알게 되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성령 열광주의, 이교 사회의 혼합주의적 풍토, 그리고 이원론적 영향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정도의 심각한 위기에 이르게 되었고, 따라서 이 교회를 설립한 바울은 이를 바로잡기 위해 고린도전서를 기록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던 것이다.
5. 고린도전서의 기록 동기 및 목적
고린도전서는 한마디로 말해서,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당면한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 바울의 조언을 구하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답을 주기 위해 기록한 것이다.
기 록 배경을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바울은 여러 사람들, 특히 글로에의 집사람들로부터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의 소식을 들어 이미 그 대강을 알고 있었다(고전 1:11).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 고린도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회 안의 부도덕한 자들이나 악한자들, 우상 숭배하는자들과 어울리지 말라고 경고했던 편지- "전에 쓴 편지" 혹은 "이전 편지"(The previous letter)라고도 부르는데, 고린도전서 5장 9-11절을 보면 이 편지는 완전히 유실된 듯하다-를 오해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고린도 교회가 바울파, 아볼로파, 베드로파, 그리고 그리스도파등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한 이 무렵에 바울은 교회의 몇 가지 문제들에 대해 조언을 구하는 편지를 가지고 온 고린도 교회의 대표단을 맞았다. 이 대표단은 스데바나, 보드나도, 아가이고 등 세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었다(고전 16:17). 그들이 갖고 온 질문들은 첫째 결혼에 대한 것(고전 7:1-40). 그리고 우상 제사의 고기에 대한 것(고전 8:1-9), 예배 때의 혼란문제(고전 11:2-34) 성령의 은사(고전 12:6-14:4)에 대한 것, 부활에 관한 것(고전 15:5-58),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한 헌금에 관한 것들이었다.
바울은 일단의 사람들을 통해, 혹은 편지를 통해 접하게 된 이 문제들에 대하여 고린도전서에서 가르침을 주고 있다. 에베소에서 기록한 이 편지에서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구원의 증표로 생각하고 “자신들은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하다”라고 말하며 교만에 빠져 있던 성령주의자들을 향해 예리한 역설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한다(고전 4:8).
“너희가 이미 하나님 나라에 도달해서 왕이 되어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 사실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랬으면 우리도 너희와 같이 왕노릇하는 데 동참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냉소적으로 말한다.
이 어서 바울은, 아직 지상에서 육신과 죄에 노출되어 있는 이들의 신분을 상기시키고 교회의 교제를 북돋워주는 삶의 정신과 절제있는 생활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성령 열광주의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즉 참된 영성은 도덕성을 반드시 동반해야 함을 상기시키면서, 이들의 지혜나 분파 문제들을 다룸으로써 이웃들에게 올바른 삶을 유도하고 있다.
또한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분명한 자유의 성격을 다루고 있다. 바울은 이 자유의 성격을 다루면서 교회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문제, 이른바 강한 자와 약한 자간의 대립의 문제를 다룬다. 복음의 본질을 알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되 그 자유가 방종주의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강한 자들과, 복음이 근본적으로 자유를 의미하는지 모르고 금욕적인 율법주의 집단으로 흐를 위험을 늘 갖고 있는 약한 자들!
이런 문제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항상 있는데, 소위 본질 추구자와 형식에 얽매인 자들 사이의 차이라고나 할까?
바 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주는 구체적인 충고들은 많지만,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윤리적인 문제에 관한 것이다. 고린도전서 전체를 통해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바울의 이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 설교자들이 어떻게 고린도전서를 바로 해석하고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6. 바울의 교훈
(1) 교리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
고 린도 교회를보면서 우리가 가지게 되는 의문점은 ‘고린도 교회에서 왜 이토록 비윤리적이고 부도덕적인 문제들이 발생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떤 설교자는 그 문제의 원인이 윤리의 부재나 도덕의 타락, 그 자체에 있었다고 범위를 제한하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모든 문제의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원인은, 고린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져버리고 세상 지혜를 받아들인 복음의 변질에 있다고 밝힌다. 이런 이유로 고린도전서에는 초반부터 "하나님의 지혜" 와 "세상의 지혜" 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1:20,21).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바울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죄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 교인들은 이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세상 지혜의 일종으로 오해하고, 이 세상 지혜에 기초하여 십자가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 으로 거부하였다. 세상 지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탄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1
:18, 2:8, 3:18-20), 겉보기에는 논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2:4). 그러나 실상 그 속에는 하나님 대신에 인간의 지혜와 판단을 앞세우는 불신앙이 숨어있는 것이다.
혹 십자가의 복음이 인간의 지식과 논리로 보면 어리석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련하게 보이는 그 방식으로 타락한 인류들을 죄악에서 구원하기로 결정하셨기 때문에 그속에는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다(1:18, 24).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의 지혜와 논리적 설득력에 있지 않고 오히려 세상 사람들의 눈에 거리낌과 어리석음으로 보이는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 자신도 바로 이러한 겸손과 자기 비하의 길을 가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우지 않기 위해, 말의 화려함이나 논리적 설득력에 의지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에만 의존하겠다고 선언한다(1:17,2:3-4). 이는 하나님의 능력은 오직 십자가만을 바로 전할 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지로 바울 사도는 평생 동안 이 십자가만을 전했다고 고백한다. 사람들이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생각하는 십자가가, 바울에 의하면 기독교의 본질이요 전체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이러한 바울의 가르침과는 달리 세상 지혜를 끌어들여 스스로 만족하였고 지혜로운 척 했다. 그러한 행동의 결과로 그들 사이에 시기와 분쟁, 그리고 부도덕한 삶이 팽배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고린도 교회는 세상의 지혜를 끌어들인 결과, 거룩한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세속화의 길로 나간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 여러 문제들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이었다.
고로 모든 문제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변질에서 비롯된 것이지, 비윤리나 부도덕에 서기 인한 것은 아니다. 이를 바로 알지 못하고 윤리 문제를 그 자체로 해석하여 설교하려 한다면, 그는 고린도전서를 바르게 설교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 렇다면 고린도전서가 오늘날 현대 교회들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 교회들이 당시 고린도 교회처럼 십자가복음의 부재 현상을 겪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신학’ 대신 인간 중심의 ‘영광의 신학’을 오늘날 우리 교회가 추구하고 있지는 않은가?교회 내에서, 하나님보다는 사람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과 섬김과 겸손으로 살기보다는 명예나 물질이나 권력에 대한 추구가 교회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분만이 높임을 받는 대신 인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가? 세상의 가치관이 여과없이 교회 안에 들어와 교회에서도 십자가 대신에 다른 세상적인 어떤것을 주려고 하지는 않는가? 교회가 주님을 붙드는 대신 주님께서 주신 선물인 은사와 축복에만 너무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 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교회가 십자가의 복음을 세상의 지혜와 섞었을 때 모든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야말로 교회가 교회답게 되는 정체성의 참된 표준인 것을 기억하여, 이 십자가의 복음만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그런 설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윤리 문제에 대한 바울의 교훈
우리가 고린도전서 뿐 아니라 바울의 다른 서신들을 깊이 살펴보면, 신자들의 신앙과 삶에 관한 바울의 명확한 태도 두가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구원 문제에 관해서는 칼로 끓듯이 명확하고 한치의 양보도 없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말한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그 러나 윤리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를 말하지 않는다. 바울 윤리의 큰 특징은 ‘비형식적’ 이고 ‘비계율적’ 이라는 데 있다. 먼저 비형식적이란, 어떠한 형식이나 종교 의식 그 자체에 매이기보다는 그것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리고자 하는 깊은 내용과 본질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비계율적이란 "꼭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는 계율을 앞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즉 믿음이 허락하지 않으면 하지 말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바울은, 가변적이고 시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애매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우리 스스로 “이것만이 절대로 옳다. 틀리다” 라고 함부로 단정짓지 말고, 여유 있게 대하라는 것이다. 실지로 우상 제물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바울은 “우상 제물은 먹어도 좋고 먹지 않아도 좋다” 라고 한다. 도대체 이런 대답이 어디 있는가? 분명 한 대답을 구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애매모호하고 무책임한 대답을 줄 수 있는가? 왜냐하면 이런 문제는 바울이 보기에는 절대 함부로 주장할 수 없는 가변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런 바울의 태도를 잘못 받아들이면 “우리의 믿음만 허락한다면 무슨일이든지 다 해도 된다” 는 오해를 갖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이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제시해 주고 있다. 즉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24)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윤리 문제에 관한 바울 교훈의 핵심인 것이다.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가능성 문제가 아니라, “해야 하느냐 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문제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나만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적인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덕을 세우는 이타적인 자세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신자의 삶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가하나 모든 것이 다 덕스러운 것은 아니니, 그러므로 모든 것을 덕스럽게 하라." 이것이 윤리문제에 관한 바울의 결론적인 권면이다.
성도들의 윤리 문제에 관한 바울의 이 원칙은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본다. 아니, 이 가르침은 세계 어느 교회보다도 우리 한국 교회에 가장 절실한 가르침이 아닐까? 얼마나 많은 설교자와 그들의 영향을 받은 성도들이, 구원 문제와는 상관없는 윤리 문제를 가지고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하며 상처를 입히고 있는가?
이 지면에서 그 구체적인 문제들을 일일이 다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윤리 원칙한 가지만은 강조하고 싶다.
조 금은 자기 모순적인 성격을 지닌 바울의 가르침을, 자신의 견해를 절대화시키려고 하는 오늘의 우리 설교자들이 마음을 열고 귀담아 들어야 하지 많을까? 그래서 덜 중요한 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느라 정말 강조해야 할 복음의 핵심을 놓치는 실수를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안될 것이다.
7.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지금까지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문제와 그 발생 원인, 그리고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러한 논의의 끝에서 ‘그렇다면 고린도전서를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도 명확해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한 마디로, 고린도전서를 바로 설교하기 원하는 설교자는 무엇보다도 당시 고린도 교회가 처했던 상황을 바로 알아야 한다. 이것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어떤 설교자도 이 서신을바로 설교할 수 없을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상황을 모르거나 별 관심이 없는 설교자에게는, 어쩌면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문제들이 별개의 것으로 보일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설교자는 자기가 하고싶은 말을 고린도전서에 기록된 바울의 입을 빌어 오늘의 강단에서 그대로 설교하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게 될 것이다.
그 러나 이 서신을 설교하는 사람이면 어느 누구라도, 이 서신 중 한 부분이나 한 구절을 전체적 맥락에서 마음대로 떼어내어 설교할 수 없다. 이쯤되면 이 글을 읽는 설교자들은 왜 이토록 필자가 고린도 교회의 상황에 대해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강조를 하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이미 우리가 확인했지만, 1세기 당시의 고린도 교회가 처했던 상황과 그 문제들의 원인은 서로 별개가 아닌 하나의 줄기에 매달린 열매와 같아서 하나의 큰 맥락속에서 해석해내야 한다. 더 나아가 설교자는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문제들을 반드시 당시의 상황을 고려해서 해석해야 하고, 그 해석의 끝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보편적인 메시지를 발견하여 이를 바로 현실의 삶에 적용하고 전해야만 하는 것이다.
결론
이천 년 전 바울 사도를 만났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에게 두 가지를 요구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가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 설교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에게 이적을 요구했다. 보통 사람은 도저히 할 수 없는그런 기적을 행한다면 자신도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겠다고 하는 태도였다.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바울에게 신비한 지혜나 철학적 지식을 요구했다. 영원한 진리를 얻게 하고, 삶의 비밀과 미래에 관한 일들을 일러줄 수 있다면 그를 하나님이 보낸 사람으로 인정하겠다는 태도였다. 이러한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울의 말을 빌자면 “유대인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식을 구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바울은 이들의 요구에 응하며 타협하기보다는 오직 십자가만을 전했다.
21 세기를 살아가는 많은 한국 교회 교인들도 이제 십자가보다는 더 많은 다른 것을 교회로부터 얻기를 기대한다. 교회 안에서 과거와는 다른 것을 보고 싶어하고 다른 것을 얻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가 사람들에게 다양한 것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교회는 사람들이 정말 쉼을 얻을 수 있는 공간이 되어야 하고, 사람들에게 여유를 주고, 그들의 맺힌 마음을 풀어줄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외침은 그리 틀린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많은 목회자들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들의 요구를 들어준다고 해서 기독교가 허물어지거나 교회가 자취를 감추는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신앙도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 한가지만은 분명히 기억해 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우리 사회가 더 복잡해지고 과학 문명이 더 발달하더라도, 기독교의 진리는 우리 인간이 좋아하고 얻고 싶어하고 필요로 하는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곳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필요하다고 선언하신 것을 사람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십자가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는 과거 고린도 교회에서도 그리하였고, 지난 이 천년 기독교 역사 동안에도 그리하였듯이 오늘날이 한국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인 것이다. 그 안에 용저와 구원의 길이 있다. 그것은 21세기에도 동일하게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
이제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는 모든 한국 교회의 설교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다시 한번 새롭게 인식하고, 십자가만을 힘있게 외침으로써 과거 고린도 교회와 동일한 세속화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 한국 교회를 다시 십자가 위에 힘있게 세웠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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