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고전,후서 강해

현대교회의 거울, 고린도교회(장해경)

에반젤(복음) 2019. 12. 16. 05:35



            

신 약 성경에서 고린도전서는 현대 크리스천들에게 ‘뜨거운 감자’와 같다. 오늘날 교회를 갈라놓는 많은 논쟁의 주제들(분파와 분립, 성적 윤리, 결혼과 이혼, 여성의 사역, 성령의 은사 등)이 여기서 자세히 다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교회가 당면했던 문제들과 그에 대한 사도 바울의 교훈을 올바로 파악하고 적용할 때 우리의 믿음과 삶에서 엄청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이 편지에 담긴 사도 바울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은 그리 간단치 않으며, 그 메시지를 오늘날 공동체에 적용하는 일은 더욱 주의를 필요로 한다. 이 글은 고린도전서의 주해 설교를 위한 서론으로 그 편지의 역사적 정황과 신학적 배경을 간략하게 개관한다.

고린도 시(市)와 고린도교회의 배경
원 래 고린도(Corinth)는 B.C. 4세기부터 아가야(Achaia, 그리스 남부 지역)의 도시 국가로서 유명세에 있어선 아테네(Athens)를 능가했다. 그러나 B.C. 146년에 로마 군대가 이 도시를 공격해 그 중심부를 파괴했다. 그 후 1세기 동안 고린도는 별로 보잘 것 없는 작은 부락으로 남아 있다가, B.C. 44년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되었다. 북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 반도 사이의 지협에 위치한 고린도는 에게해 쪽의 겐그레아(Cenchreae)와 아드리아해 쪽의 레게움(Lechaeum)이라는 두 항구를 연결하며 동서의 해상 무역과 남북의 육로 교통을 관장했다. 이런 전략적 입지 조건 때문에 고린도 시는 다시금 신속하게 번영하고 B.C. 27년 로마 제국 아가야 주의 수도가 돼 인근 지역까지 포함해 약 10만의 주민을 갖게 되었다. 그 주민들은 인종과 문화와 종교에서 매우 다양했다.
고린도 국제 도시에서는 아테네의 올림픽에 버금가는 이스트미안(Isthmian) 경기가 2년마다 개최되었고(참조 고전 9:24~27), 1만 8,000석의 원형극장과 3,000석의 연주장에서 각종 연극과 공연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시가를 내려다보는 높은 언덕의 정상에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 신전이 우뚝 서 있었고, 그 외에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우스(asclepius),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항해의 이집트 여신 이시스(isis) 등의 사원들이 있었다. 고대의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1,000명의 여사제들이 상주하며 매춘 행위를 벌였다고 하는데(Strabo), 이런 분위기는 그 후에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참조 고전 5:1~2, 9~12, 6:9, 15~18, 7:2, 10:7~8). 한마디로 신약 시대의 고린도는 물질적으로 부유하고 문화가 개방적이며, 종교는 다원적이고 도덕적으로 문란했던 도성으로서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 사회와 가장 많은 특징들을 공유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이 제2차 선교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교회를 세우고 떠나는 과정은 사도행전 18장 1~18절에서 소상히 보도하고 있다. A.D. 50년 봄에 아테네를 거쳐 고린도에 도착한 사도 바울은 로마 시에서 거주하다가 ‘클라우디우스의 칙령’(Edict of Claudius, A.D. 49)으로 추방된 아굴라(Aquila)와 브리스길라(Priscilla=Prisca)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같은 생업 활동(천막 제작)을 하며 함께 지냈는데(행 18:2~3), 곧 복음 사역의 동역자 관계로 아름답게 결속돼 갔다(행 18:18, 26, 고전 16:19, 롬 16:3~5).
바 울은 고린도에서도 습관대로 먼저 유대교 회당을 찾아가 안식일마다 그리스도를 증언하다가 계속 거부당하자, 회당 옆의 이방인 가정으로 장소를 옮겨 주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일했다(행 18:4~7). 그 결과 유대인 회당장이 회심하여 그의 가족과 함께 성도가 되었고, 많은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았다(행 18:8). 박해로 인해 위협을 느끼던 바울에게 어느 날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나타나 안위하시고 고린도에 주님을 믿게 될 백성이 많으니 계속 머물러 일하라고 당부하신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물며 복음 사역에 힘썼다(행 18:9~11).
고린도교회의 성도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가정집에서 모였다면 50명 이상을 넘지 못했을 테지만, 여러 가정집에 나뉘어 모였을 가능성이 높다. 성도들 중에 소수의 유대인[그리스보와 그의 가족(행 18:8), 소스데네 등 (행 18:17)]과 유력한 인물들[가이오, 고린도 시의 재무관 에라스도(롬 16:23), 글로에(고전 1:11)]도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여러 지역 출신의 이방인들로서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간 및 하층 계급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행 18:7~17, 고전 1:26). 교회 안에 자유민으로 태어난 사람, 과거에 노예였다가 해방된 사람, 여전히 노예 신분인 사람들이 섞여 있었다(고전 7:20~22).
갈리오(Gallio)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재임할 당시(A.D. 51~52년)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여 그를 법정에 세웠으나, 갈리오는 바울에게서 로마법에 저촉된 어떤 부정이나 불의도 찾지 못하고 방면했다(행 18:12~17). 그 후 오래지 않아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함께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갔으며, 바울은 그들을 거기에 머물게 하고 자신은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갔다(행 18:18~22).

고린도전서의 집필 배경
사 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아볼로(Apollos)라고 하는 설교자가 고린도교회에 와서 매우 효과적인 전도 활동을 펼쳤다. 그는 본래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헬라 철학과 구약 성경에 능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배워 열심히 가르쳤다. 하지만 단지 초보 단계에 머물러 있다가 에베소(Ephesus)에서 만난 아굴라 부부로부터 복음의 진수를 정확히 배운 후에 고린도로 건너온 사람이었다(행 18:24~28). 그동안 바울은 제3차 선교 여행 과정에서 에베소를 거점으로 그곳에서 2년 이상 선교 사역을 전개했다(행 19:1~20, 특히 8, 10, 22절). 고린도전서 16장 5~9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에베소 체류 기간 중에 오순절을 앞둔 마지막 몇 주 또는 몇 달 전에 기록했다. 따라서 고린도전서는 대략 A.D. 55년 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바울이 교회를 세우기 위한 최초의 고린도 방문(행 18:1~18, A.D. 51~52년)을 마친 후부터 고린도전서를 집필(55년)하기 전까지 그는 고린도교회와 몇 차례 간접적인 접촉을 가졌다. 이런 사실이 사도행전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고린도전서 내의 여러 암시적 진술들에 의해 확인된다. 그러면 이 편지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는 몇 가지 상황들을 정리해 보자.
우선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써 보낸 첫 번째 편지가 아니었다. 고린도전서 5장 9절은 바울이 그전에 이미 한 통의 편지를 고린도교회에 보냈고, 고린도 성도들은 편지 내용을 오해했음을 암시하고 있다. “내가 너희에게 (이전에) 쓴 편지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참조 11절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라는 뜻이었다”). 그 편지의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바울은 성적으로 문란하게 행동하면서 회개치 않는 사람들과 교제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수신자들은 그 말을 불신자들과 사귀지 말라는 뜻으로 곡해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10~11절). 첫째 편지는 유실돼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고 있다.1
다음으로, 에베소에 있던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형편과 사정에 관하여 직접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두 차례 얻었다. 먼저 고린도교회에 잘 알려진 여인 ‘글로에(Chloe)의 집안 사람들’(가족 또는 노예)이 바울을 방문해 고린도교회 내에 ‘분파와 대립’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고전 1:11~12). 또 고린도로부터 바울을 찾아온 ‘스데바나’(Stephanas), ‘브드나도’(Fortunatus), ‘아가이고’(Achaicus)라는 세 사람은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만나지 못해서 생긴 아쉬움을 채워 주었다”(고전 16:17).2 바울이 고린도전서 5~6장에서 다루고 있는 교회 내의 ‘성적 방종’과 ‘법적 소송’ 문제들은 아마 이 방문자들의 보고를 통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는 사도를 방문한 위의 두 그룹 중에 어느 한 편이 가져왔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 내용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견해의 차이로 논쟁을 벌이던 일련의 주제들에 관한 것을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너희가 써 보낸 것들에 관하여 (말하자면)”라는 서두로 시작해 그들이 문의해 온 주제들을 7~16장에서 하나씩 다뤄나간다. 여기서 새로운 주제가 도입될 때마다 “이제 …에 관하여 (말하자면)”(peri de, now concerning…)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고전 7:1 “너희가 써 보낸 것들에 관하여”, 25 “처녀에 관하여”, 8:1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12:1 “영적인 것(=성령의 은사)들에 관하여”, 16:1 “성도를 위한 연보에 관하여”, 12 “형제 아볼로에 관하여”). 그러나 이런 도입구가 생략된 주제들도 있다(우상 숭배 10:14~22, 머리를 가리는 것 11:2~16, 성만찬의 오용 11:17~34, 몸의 부활 15:1~58 등).3
따라서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이다. 고린도에서 바울을 찾아온 두 차례의 방문객들은 그에게 고린도교회의 근황을 자세히 이야기해 주는 것과 동시에 고린도교회가 그에게 보낸 질문서도 전달해 주었다. 사도는 자신이 고린도에 처음 보낸 편지가 별로 효력이 없으며 오히려 교회의 사정은 이전보다 더욱 악화되고 혼란스러워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 바울은 마음 같아선 분명 에베소의 바쁜 일정을 잠시 미루고라도 고린도교회를 직접 방문해 그들을 책망하며 바로잡고 싶었을 것이다(고전 4:21 “…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4 하지만 바울은 현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부득이 또다시 서신(고린도전서)을 통해 교회의 당면 문제들을 처리하려고 결심한 것이다.

고린도전서의 주제들, 사회적 환경과 신학적 배경
바울 서신들 중에 고린도전서는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들을 가장 많이 취급하고 있지만, 편지의 구성과 내용 분해는 의외로 단순하다. 서두의 ‘인사와 감사’(1:1~9)가 끝난 다음에 시작되는 편지의 ‘몸통’ 부분(1:10~16:4)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그가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과 답변해야 할 문제들을 하나씩 다뤄 나간다. 몸통 부분은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눈다. 첫째 단락(1:10~6:20)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관해 ‘전해들은 소식’에 대한 응답으로서 (1)교회 내의 분파(1:10~4:21), (2)근친상간(5:1~13), (3)성도간의 법정 소송(6:1~11), (4)일반적인 음행(6:12~20) 등의 문제를 다룬다.
둘째 단락(7:1~16:4)은 바울이 고린도교회로부터 ‘전해 받은 편지’에 대한 응답으로서 (4)결혼과 독신에 관하여(7:1~40), (5)우상에게 바친 음식에 관하여(8:1~11:1), (6)머리에 쓰는 것에 관하여(11:2~16), (7)성만찬에 관하여(11:17~34), (8)성령의 은사들에 관하여(12:1~14:40),5 (9)부활에 관하여(15:1~58), (10)헌금에 관하여(16:1~4) 논설하고 있다. 마지막으로(16:5~24), 사도는 자신의 여행 계획과 동역자들(16:5~12)을 소개한 후 권면과 인사들(16:13~24)로 편지를 끝맺는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짧게 또는 상세하게 취급하고 있는 주제는 모두 10개에 달한다. 언뜻 보면 이 주제들은 본질적으로 서로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대다수의 문제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연관성은 무엇보다 고린도교회 내에 특별히 형성되었던 어떤 사회적 환경과 신학적 이해에 기인하고 있다.
첫째, 고린도교회의 어떤 문제들은 구성원들의 다양한 사회적 배경 차이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비록 그 교회 안에 “지혜롭고(교육받고) 능력 있고(재력과 영향력이 있고) 문벌(가문) 좋은 자가 많지 않았”(고전 1:26)으나, 적어도 소수의 신자들은 상당한 직위와 노예들을 소유하고 교회의 회중들을 후원하며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상류층이었음에 틀림없다. 바울 서신과 사도행전에서 이름이 거명되고 있는 고린도의 성도들 - 예를 들면 그리스보(Crispus, 바울에게서 회심한 유대인 회당장, 행 18:8, 고전 1:14), 에라스도(Erastus, 고린도 시의 재무관, 롬 16:23), 글로에(Chloe, 고전 1:11), 스데바나(Stephanas, 고전 1:16, 16:15~18), 가이오(Gaius, 고린도 성도들이 모이고 있던 집 주인, 롬 16:23), 디도 유스도(Titius Justus, 고린도 성도들이 모인 최초의 집 주인, 행 18:7) 등이 상류층에 속했을 것이다.
고린도에서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은 가이오가 ‘전체 교회’(hole he ekklesia, the whole church)를 접대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롬 16:23), 이 말은 교회 내의 작은 그룹들이 여러 가정들에서 모이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 가정들은 다수의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큰 집을 가진 부유한 성도들이었을 것이다. 교회가 그룹으로 나뉘어 계속 모이는 상황에서 그룹들 사이의 차이점이 쉽게 대두돼 분파로 이어질 위험성이 훨씬 높아진다. 이 경우에 각 그룹 구성원들의 배경과 성향, 후원자들의 성격, 교회에 영향을 미친 여러 지도자들(바울, 아볼로, 게바)과의 개인적 관계 등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열 현상(고전 1:10~4:21)과 파당적 대립 및 다툼 현상(6:1~11, 8:1~13, 11:17~34, 12:14~27)은 분명히 이런 사회적 요인들이 교회 구성원들의 영적 미성숙과 결합해 빚어낸 불행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6
둘째,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많은 문제들은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고린도인들이 기독교 복음의 메시지와 성령의 역사를 그르게 이해한 데서 파생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를 무엇보다 ‘영광의 주’(2:8)로 보았고, 구원 사건으로서 예수의 십자가에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자로서 특별한 ‘지혜’를 받아 하나님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참조 4:10, 8:2). 이것을 그들이 현재 ‘영광의 승리’ 가운데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다’는 증표로 간주한 것 같다(4:8). 어떤(혹은 대다수의) 성도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기 때문에 ‘옳고 그른’ 것이나 ‘도덕적이고 부도덕적인’ 행동을 구분하는 것에 대해 더 이상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 거리낌 없이 음행에 몸을 내맡겼다(5:1~2, 9~13, 6:9, 12~18).
바울은 그들의 태도에 대해 ‘모든 것이 나에게 가능하다’라고 표현했다(6:12, 10:23). 그러나 또 다른 성도들은 정반대의 견해를 취해, 자신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세상과 연루된 육체적인 삶을 멀리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결혼을 하고도 금욕을 실행했다(7:1~5). 바울은 ‘남자가 여자와 성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좋다’는 그들의 표어를 인용했다(7:1b). 이렇듯 상반된 두 가지 행동 방식은 사실상 하나의 동일한 관념 - 즉 몸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므로 영구적인 의미나 가치가 없다 - 에서 비롯된 것이다.7
다시 말해, 고린도 사람들은 몸으로 무슨 일을 하든지 전혀 상관없다고 생각해 방종으로 흐르거나, 반대로 몸의 욕구를 악하고 저급한 것으로 여기고 거부했다. 육체를 영혼과 대비해 경시한 태도는 특별히 영지주의적(Gnostic)인 것이라기보다8 고전 시대 후로 광범위하게 퍼진 헬라 사상에 근거한 것이다.9 부활에 관한 바울의 논증(15장)도 그런 사상적 배경에서 이해해야 한다. 헬라 철학의 이원론에 따라 영혼의 불멸을 믿었지만, 몸의 부활을 부정했던 고린도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부활이 ‘죽은 자들로부터’의 부활(15:1~26)인 동시에 ‘몸의 부활’(bodily resurrection)이었음을 강조했다(15:35~58).
또 한 고린도 성도들은 열광적으로 성령을 체험하면서 소위 ‘지나치게 실현된’(overrealized) 종말론을 갖게 되었다(비교 딤후 2:17~18). 즉 그들은 종말에 가서야 얻게 될 완전함을 이미 획득한 것으로 오해했다. 그들은 세례를 통해 성령을 받음으로써(12:13) 그리스도와 연합해 불멸성을 획득하고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참여하게 되었으며(4:8), 그들의 영혼이 천상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믿었다(4:10, 7:3~5). 특히 무아경에서 말하는 방언의 은사는 곧 현세를 벗어나 신령한 세계로 들어간 증표로 간주되었기 때문에(13:1) 모든 성도들이 열렬히 추구한 것이다(14장).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통치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이생의 삶 후에 소망할 것이 남아 있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15:12~19).

맺음말
신 약성경 가운데 고린도전서는 특별히 다원화된 세속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거울로 삼을 편지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들은 온갖 언변과 지식과 성령의 은사가 풍족하였음에도 불구하고(1:5~7) 유난히 많은 문제와 말썽으로 바울 사도에게 큰 근심과 고통을 안겨 주었다. 그들이 처했던 사회·문화적 환경은 오늘 우리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고, 그들을 어지럽혔던 많은 문제들(분파, 근친상간, 성도 간의 법정소송, 음행, 결혼과 독신 문제, 우상제물의 문제, 사도권에 대한 도전, 공예배의 질서, 성령의 은사, 부활에 대한 불신 등)은 여전히 우리 피부에 밀착되어 있다. 초대교회 중에 이런 지역교회가 있었기 때문에 현대교회는 오히려 공감과 위로를 느끼고 변화와 성숙에로의 도전도 받게 된다.
이 귀중한 거울에다 날마다 우리의 모습과 당면 문제들을 비추어 보자. 현실의 다양한 문제들을 “십자가의 말씀”(1:18)에 따라 신학적으로 깊이 분석하며 실제적으로 치료하는 사도의 영감 있는 목소리에 귀 기울이자. 부도덕과 승리주의로 가득 찬 교만한 무리를 아비 같이 꾸짖고 사랑과 온유로 호소하는 목회자의 뜨거운 가슴을 느끼자(4:14~21).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았던 바울의 삶을 본받자(10:31~11:1). 그리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들”로 서자(1:8).

주(註)

1. 어떤 학자들은 첫째 편지가 고린도후서 6장 14절-7장 1절에 삽입돼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J. C. Hurd, Jr., The Origin of 1 Corinthians(London, SPCK, 1965), 235-39. 그들은 이 단락의 본문이 고린도후서의 전후 문맥과 어울리지 않으며, 첫 번째 편지와 동일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견해에 대한 증거는 빈약하다. V. P. Furnish, II Corinthians, AB 32A(Garden City, NY, Doubleday, 1984), 379-80을 보라.
2. 세 사람은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과 동일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1장 11절에 언급된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은 1장 16절에 등장하는 ‘스데바나’와 확연히 구별돼 있기 때문이다.
3. 어떤 주석가들은 고린도전서 7-16장에서 ‘이제 …에 관하여’(peri de, now concerning…)라는 형식으로 도입되는 주제들만이 바울이 받았던 편지에서 나온 것이며, 나머지 주제들은 사도가 만난 사람들에게서 유래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제 …에 관하여’라는 형식은 바울이 어떤 주제의 출처를 밝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기보다 단지 새 주제를 도입하는 여러 방식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M. M. Mitchell, “Concerning PERI DE in 1Corinthians”, NovT 31, 1989, 229-56을 보라).
4.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보낸 후에도 그 교회의 형편이 달라지지 않자, 실제로 고린도를 직접 방문하게 된다. 사도행전에 보도되지 않은 바울의 제2차 고린도 방문은 고린도후서 12장 14절(“보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준비하였으나…”)과 13장 1절(“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에 암시돼 있다. 또한 이 짧은 방문은 고린도후서 2장 1절(“내가 다시 근심으로 너희에게 나아가지 않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다”)에 의하면, 바울에게 ‘근심’과 ‘고통’을 수반한 것이다.
5. 이 중에 ‘머리에 쓰는 것’(11:2-16), ‘성만찬’(11:17-34), ‘성령의 은사들’(12:1-14:40)은 모두 ‘공중 예배’에 관련된 주제들이다.
6. 이에 관해 G. Theissen, The Social Setting of Pauline Christianity: Essays on Corinth(Philadelphia, Fortress, 1982); C. Blomberg, 1 Corinthians, NIVAC(Grand Rapids, Zondervan, 1994), 23-24를 참조하라.
7. W. Lutgert, Freiheitspredigt und Schwarmgeister in Korinth, BFchTh 12/3(Gutersloh, Gerd Mohn, 1908), 126; J. H. Wilson, “The Corinthians who say There is no Resurrection of the Dead”, ZNW 59(1968), 90-107: 99.
8. W. Schmithals, Die Gnosis in Korinth: Eine Untersuchung zu den Korintherbriefen, FRLANT 66(Gottingen, Vandenhoeck & Ruprecht, 1956)는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바울의 적대자를 영지주의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그의 논증은 2-3세기 후대 문헌에 나타난 영지주의의 특징을 바울 시대로 소급해 적용시킬 뿐 아니라, 고린도전·후서 본문들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해 유사점을 비교하므로 많은 비판을 받아 왔다. 예를 들어, W. Schrage, Der erste Brief an die Korinther I, EKK VII/1 (Neukirchen-Vluyn, Neukirchener, 1991), 51-53; E. M. Yamauchi, Art. “Gnosis, Gnosticism”, in: G. F. Hawthorne, et. al. (eds.), Dictionary of Paul and His Letters(Downers Grove/Leicester, InterVarsityPress, 1993), 350-54, 특히 352를 보라.
9. 이에 관해 E. Schweizer, Art. sw"ma ktl., ThWNT VII(1964), 1035-39; A. Dihle, Art. yuchv ktl., ThWNT IX(1973), 607f, 613f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