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철학과 수사학은 열정적인 추구의 대상이었다. 유명한 소피스트(sophist)들과 수사학자들은 크게 존경을 받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제자가 되기를 원했다. 당시 부모들의 관심도 자연히 자기 아들들을 위해 최고의 선생을 찾는 일이었다.1 학생들의 사회적 지위는 자기 스승들의 명성과 직접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종종 다른 학파의 학생들과 스승들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논쟁했다.2 이런 풍토 속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자신들에 대해 세상적인 관점으로 인식하고, 영적 지도자들을 당시 철학과 수사학의 기준으로 서로 비교하며 불화를 일으켰다.
구체적으로 말해, 고린도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가식 없는 복음 선포보다 인간의 현란한 지혜를 더 가치 있게 평가했고, 바울의 단순한 접근보다 아볼로의 웅변을 선호했다(cf. 4:6).3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인사와 감사(1:1~9)
고린도전서는 고대 편지의 양식을 따라 인사(1:1~3)로 시작된다. 1장 1절에서 바울은 저자인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나 선생이 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또한 그들이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하나된 것을 강조한다(1:2).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분파적인 고린도인들이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4
바울은 고린도교회 위에 복을 선언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3). 여기서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평강’은 인간의 온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혜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장 4~9절은 감사 부분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한다(1:4). 감사의 내용은 고린도 성도들이 특별히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는 것이다(1:5). ‘말’은 모든 종류의 영적인 말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방언’, ‘예언’ 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지식’은 아마 예언적 계시와 관련된 특별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전 13:2, 8, 14:6).5
하 나님께서 부어주심으로써, 고린도 성도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1:7). 하지만 그들은 그 많은 은사들로 인해,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왕 노릇하였다”(4:8).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다(1:8). 아무리 은사가 풍성해도, 주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1:9). 여기서 ‘교제’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바울 서신에서 ‘코이노니아’의 지배적인 의미는 ‘참여’(sharing, participation)이다.6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분의 모든 것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7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롬 6:8), 현재 성령님을 통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며(고후 4:10~11), 마지막에 반드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롬 8:17, 빌 3:10).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1:10~17)
인사와 감사 다음에 1장 10절에서 바울은 즉각적으로 핵심적인 권면을 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열(scivsmata)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게 된 것은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e[ride")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1:11).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고린도 성도들은 각각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각각 주장한다는 것이다(1:12).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은 참으로 어리석고 유치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는 결코 나눠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시다.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처럼 대속의 죽음을 행할 수 없고, 자기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다(1: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충성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실제로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였다(1:14). 또한 바울은 스데바나 집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그들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세례를 준 적이 없다(1:16).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아무도 자기 이름으로 분파를 만들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15).
바울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본래 사명을 밝힌다. 이는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1:17a).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ejn sofiva lovgou)로 하지 않았다(1:17b). ‘말의 지혜’란 그리스-로마의 수사학과 관련된 용어로, 연설에 동원된 수사학적 기술을 가리킨다.8 수사학이 꽃을 피웠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지혜’는 웅변술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1:17c).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1:18~31)
바 울의 핵심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선포될 때,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즉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1:18). 하나님의 진노나 구원은 십자가의 선포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시고 멸하신다(1:19). 세상 지혜자를 대표하는 유대의 율법 학자들과 헬라의 변론가(sophist)들이 설 땅은 없다(1:20).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1:21a). 세상의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스스로 깨닫고 영광을 돌리게 못한다(cf. 롬 1:21).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는 우상 숭배라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케리그마’라는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신다(1:21b). ‘케리그마’는 바울의 설교에 대한 내용과 형식을 모두 포함한다.9 곧 십자가를 단순하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1:22a). 이것은 유대인의 메시아적 기대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는 표적 곧 출애굽 사건 때 나타난 것보다 더 장엄한 표적으로 압도당하기를 원한다(cf. 막 8:11, 눅 11:16, 요 6:30).
한편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1:22b). 그들은 고상한 삶을 추구하며 철학적인 지혜를 구한다.
그 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한다”(1:23a). 유대인은 신명기 21장 23절에 근거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간주했다(1:23b). 유대인들이 볼 때 메시아는 능력, 승리, 장엄을 뜻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연약함, 수치, 패배를 의미한다.10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는 유대인들에게 기름에 튀긴 얼음과 같은 모순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다(1:23b). 한편,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1:23c).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자기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신(god)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로 미친 것이다(1:23c).11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죄인을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1:24).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1:25).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분명 어리석음이고 수치스러운 패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셨다.
1 장 26~31절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하나의 실례를 제시한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에 속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1:26a). 그들 중에 교육을 많이 받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으며,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1:26b). 물론 고린도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천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 가는 해방 노예나 노예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기 백성들로 삼으셨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신다(1:27~28).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만든다.12
여기에 목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시고”(1:29), 또한 주님을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1:31).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1:30a).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되사,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구속하셨다(1:30b, cf. 고후 6:11).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 설교와 성령님의 능력(2:1~5)
2 장 1~5절에 또 하나의 실례가 등장한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설교 사역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당시 웅변가들은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 도시에 대해 화려한 말로 찬양하고 또 자신들의 업적과 지혜를 자랑했다. 이는 자신들의 명성을 알리고 재정적인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13 ‘훌륭한 말이나 지혜’14로 하지 않았다(2:1). 바울은 1장 17절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곧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바울이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수사학적 기술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대신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기로 미리 작정했다(2:2).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겐 걸림돌이요, 헬라인들에겐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당시 유랑 웅변가들과 분명히 구별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아첨하는 자들이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었다(cf. 살전 2:1~10).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 가든 항상 십자가만을 선포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여러 구원 행위 중에 하나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전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핵심이다.15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2:3).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인정한 것처럼, 바울의 말 주변은 시원치 않았다. 수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능숙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가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힘을 숭배하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하나님의 연약함(곧 십자가의 이야기)을 선포한다는 것은 배척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바울은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선포에 놀랍게도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는 설교할 때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거룩한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ajpovdeixi")16으로” 했다(2:4). 그래서 많은 고린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변화되었다. 인간 말의 기술(수사학)로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해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데 목적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2:5). 믿음은 인간의 수사학이나 인간의 지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님의 계시(2:6~16)
2장 6~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지혜는 공허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자들’(oJ tevleio")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고 수용한다(2:6a). 여기서 ‘온전한 자’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대(aijwvn)의 지혜’나 ‘이 세대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전적으로 다르다(2:6b). ‘이 세대’는 종말론적 용어로서 ‘오는 세대’와 대조되는 말이다. ‘이 세대의 지도자들’은 ‘폐하여져 가고 있는(katargoumevnwn) 자들’인데,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와 로마의 권세자들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과 지혜자들을 포함한다.
하 나님의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려고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감춰졌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이다(2:7). 이 세상의 지도자들 중에 이 지혜를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토록 높으신 ‘영광의 주’를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수 있었겠는가(2:8)? 참으로, 그리스도의 연약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kardiva)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2:9).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인간의 자연적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 비밀이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ajpekavluyen, 2:10a).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살피신다(2:10b). 마치 인간의 영이 인간의 깊은 생각을 알듯이,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2:11).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2:12).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의 지혜의 말(수사학적 말의 기술)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복음에 합당한 말)로 한다(2:13).
그런데 자연인(yuciko;" a[nqrwpo")17은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자로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배척한다. 성령이 없는 자들의 시각은 처음부터 철저히 왜곡돼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일들은 지혜롭게 보이지만, 성령의 일들은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령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성령의 일들은 성령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2:14).
그러나 신령한 자는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관한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이해한다. 또한 그는 죄에 매여 있는 자연인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의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2:15, cf. 4:3~4).
이것은 부모가 어린 아이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지만, 어린 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인은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마음(nou"")을 소유하고 있다(2:16).
적용
고린도전서 1~2장은 무엇보다 설교에 대해 대단히 소중한 가르침들을 준다.
첫 째, 설교자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기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요, 구원 역사의 전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일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들을 전한다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개종은 발생하지 않는다.
둘 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겐 거리낌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과 구원의 길을 상의하셨다면, 인간은 십자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단 한마디도 상의하시지 않고, 어리석고 연약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택하셔서 제시하셨다. 이제 인간은 모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믿고 구원받든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를 고집하다가 멸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셋째, 십자가의 복음은 직선적으로 선포돼야 한다. 아볼로는 설교할 때 고대 수사학적 화술을 멋지게 활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를 단순하게 선포했다. 십자가는 그 단순함과 투명함 속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수사학적 화술로 전한다면, 그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에 방해로 작용한다. 설교자는 청중을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적당한 종교 생활을 중단하고 운명의 결단을 하게 된다.
넷째, 십자가를 선포하는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는 수사학의 다이내믹을 교묘하게 사용해 청중을 설득하려 해선 안 된다. 대신에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스스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님으로만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註)
1. B. W.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The Influence of Secular Ethics and Social Change(Grand Rapids, Eerdmans, 2001), pp.32-36을 보라.
2.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pp.38-40을 보라.
3.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pp.40-43을 보라.
4. Cf.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Grand Rapids, Eerdmans, 1987), p.33.
5.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p.39.
6. J. Y. Campbell, “Koinwniva and its Cognates in the NT”, JBL 51(1932), pp.352-80.
7. 「고린도전서」(김지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75.
8. “바울과 설교,” 「기독신학저널 7」(홍인규, 2004), p.92.
9. D. Litfin, St Paul"s Theology of Proclamation 1 Cor. 1-4 and Greco-Roman Rhetoric(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8; R. F. Collins, First Corinthians(SP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9), 105.
10. 초기 유대교는 이사야서 53장에 대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11. M. Hengel, Crucifixion(ET; London, SCM, 1977), 1이하.
12. 「고린도전서」(김지철), p.118.
13. ‘하나님의 비밀’이란 표현은 Nestle-Aland 27판과 UBS 4판에서 취한 본문이다. 그러나 다른 고대 사본들에 ‘하나님의 증거’라는 본문이 채택돼 있다. 한글 번역 중에서 표준새번역은 전자(하나님의 비밀)를, 개역 성경은 후자(하나님의 증거)를 취하고 있다.
14. Cf. 개역 성경,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15. Cf. 「고린도전서」(김지철), p.132.
16. Cf. 개역 성경,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17. Cf. 개역 성경, “육에 속한 사람.”
구체적으로 말해, 고린도 성도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가식 없는 복음 선포보다 인간의 현란한 지혜를 더 가치 있게 평가했고, 바울의 단순한 접근보다 아볼로의 웅변을 선호했다(cf. 4:6).3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나온 행위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하나님의 지혜인 십자가에 대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인사와 감사(1:1~9)
고린도전서는 고대 편지의 양식을 따라 인사(1:1~3)로 시작된다. 1장 1절에서 바울은 저자인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이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도록 권위를 부여받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 것이다. 그는 스스로 복음을 전하는 자나 선생이 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독자들이 세상으로부터 구별돼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이라는 것을 상기시키며, 또한 그들이 “각처에서…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과 하나된 것을 강조한다(1:2).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으로, 분파적인 고린도인들이 우주적 교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4
바울은 고린도교회 위에 복을 선언한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1:3). 여기서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말이다. ‘평강’은 인간의 온 존재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혜택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1장 4~9절은 감사 부분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를 하나님께 감사한다(1:4). 감사의 내용은 고린도 성도들이 특별히 “모든 말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다”는 것이다(1:5). ‘말’은 모든 종류의 영적인 말을 의미하는데, 특별히 고린도전서 12~14장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방언’, ‘예언’ 등을 가리키는 것 같다. ‘지식’은 아마 예언적 계시와 관련된 특별한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전 13:2, 8, 14:6).5
하 나님께서 부어주심으로써, 고린도 성도들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다(1:7). 하지만 그들은 그 많은 은사들로 인해,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왕 노릇하였다”(4:8).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교회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는 분은 주님이심을 상기시키고 있다(1:8). 아무리 은사가 풍성해도, 주님께서 끝까지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
바울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1:9). 여기서 ‘교제’라고 번역된 말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인데, 바울 서신에서 ‘코이노니아’의 지배적인 의미는 ‘참여’(sharing, participation)이다.6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그분의 모든 것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한다.7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롬 6:8), 현재 성령님을 통해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며(고후 4:10~11), 마지막에 반드시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롬 8:17, 빌 3:10).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1:10~17)
인사와 감사 다음에 1장 10절에서 바울은 즉각적으로 핵심적인 권면을 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열(scivsmata)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이 이런 권면을 하게 된 것은 ‘글로에의 집안 사람들’로부터 고린도교회 안에 ‘분쟁’(e[ride")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1:11). 그들의 보고에 따르면, 고린도 성도들은 각각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고 각각 주장한다는 것이다(1:12).
바울이 볼 때, 고린도교회 안의 분쟁은 참으로 어리석고 유치한 것이다. 우리의 구원자 그리스도는 결코 나눠질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시다. 어떤 인간도 그리스도처럼 대속의 죽음을 행할 수 없고, 자기 이름으로 세례를 줄 수도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존재다(1: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헌신과 충성의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교회에서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세례를 주었다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실제로 바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보와 가이오였다(1:14). 또한 바울은 스데바나 집 사람들에게도 세례를 베푼 적이 있음을 기억해 낸다. 그러나 그들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세례를 준 적이 없다(1:16).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하는 목적은 아무도 자기 이름으로 분파를 만들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1:15).
바울은 그리스도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본래 사명을 밝힌다. 이는 세례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1:17a). 바울은 복음을 전하되, ‘말의 지혜’(ejn sofiva lovgou)로 하지 않았다(1:17b). ‘말의 지혜’란 그리스-로마의 수사학과 관련된 용어로, 연설에 동원된 수사학적 기술을 가리킨다.8 수사학이 꽃을 피웠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지혜’는 웅변술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선포할 때,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았다. 그 목적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다”(1:17c).
하나님의 지혜와 인간의 지혜(1:18~31)
바 울의 핵심 사역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십자가가 선포될 때, 두 가지 극단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 즉 십자가는 ‘멸망하는 자들’에겐 미련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구원을 얻는 자들’에겐 하나님의 능력이다(1:18). 하나님의 진노나 구원은 십자가의 선포에 대해 인간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혜와 총명을 폐하시고 멸하신다(1:19). 세상 지혜자를 대표하는 유대의 율법 학자들과 헬라의 변론가(sophist)들이 설 땅은 없다(1:20). 그 이유는 분명하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1:21a). 세상의 지혜는 인간으로 하여금 창조주 하나님을 스스로 깨닫고 영광을 돌리게 못한다(cf. 롬 1:21).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의 형상으로 바꾸는 우상 숭배라는 어리석음의 극치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케리그마’라는 ‘어리석은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신다(1:21b). ‘케리그마’는 바울의 설교에 대한 내용과 형식을 모두 포함한다.9 곧 십자가를 단순하게 선포하는 것을 의미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한다”(1:22a). 이것은 유대인의 메시아적 기대를 반영하는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는 표적 곧 출애굽 사건 때 나타난 것보다 더 장엄한 표적으로 압도당하기를 원한다(cf. 막 8:11, 눅 11:16, 요 6:30).
한편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다”(1:22b). 그들은 고상한 삶을 추구하며 철학적인 지혜를 구한다.
그 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한다”(1:23a). 유대인은 신명기 21장 23절에 근거해,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의 상징으로 간주했다(1:23b). 유대인들이 볼 때 메시아는 능력, 승리, 장엄을 뜻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연약함, 수치, 패배를 의미한다.10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메시아’는 유대인들에게 기름에 튀긴 얼음과 같은 모순이요, 걸려 넘어지게 하는 돌이다(1:23b). 한편, 이방인에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다(1:23c).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이 볼 때, 자기 원수들에게 사로잡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신(god)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로 미친 것이다(1:23c).11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죄인을 죄와 죽음의 세력에서 구원한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이다”(1:24).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1:25).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십자가는 분명 어리석음이고 수치스러운 패배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셨다.
1 장 26~31절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하나의 실례를 제시한다. 먼저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사회적으로 어떤 신분에 속하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라고 요구한다(1:26a). 그들 중에 교육을 많이 받고, 정치적으로 영향력이 있으며, 훌륭한 가문의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1:26b). 물론 고린도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유력한 사람들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천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해 가는 해방 노예나 노예들로 구성돼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약한 것들과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존귀한 자기 백성들로 삼으셨다. 그래서 지혜 있는 자들과 강한 것들과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폐하신다(1:27~28).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만든다.12
여기에 목적이 있다. 그것은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시고”(1:29), 또한 주님을 자랑하게 하시려는 것이다(1:31). 그리스도인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1:30a).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지혜가 되사, 우리를 의롭게 여기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구속하셨다(1:30b, cf. 고후 6:11). 그러므로 자랑하는 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한다.
십자가 설교와 성령님의 능력(2:1~5)
2 장 1~5절에 또 하나의 실례가 등장한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설교 사역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입증하기 위함이다. 당시 웅변가들은 어떤 도시를 방문했을 때, 그 도시에 대해 화려한 말로 찬양하고 또 자신들의 업적과 지혜를 자랑했다. 이는 자신들의 명성을 알리고 재정적인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13 ‘훌륭한 말이나 지혜’14로 하지 않았다(2:1). 바울은 1장 17절에서도 비슷한 말을 한 바 있다. 곧 복음을 전할 때, ‘말의 지혜’로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이, 바울이 청중을 설득하기 위해 수사학적 기술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대신 바울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에게만 모든 초점을 맞추기로 미리 작정했다(2:2).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겐 걸림돌이요, 헬라인들에겐 어리석은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기로 작정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당시 유랑 웅변가들과 분명히 구별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그들은 아첨하는 자들이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이었다(cf. 살전 2:1~10). 그러나 바울은 어디에 가든 항상 십자가만을 선포했다. 십자가는 단순히 하나님의 여러 구원 행위 중에 하나가 아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 전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핵심이다.15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할 때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다”(2:3). 고린도후서 10장 10절에서 인정한 것처럼, 바울의 말 주변은 시원치 않았다. 수사학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능숙하고 설득력 있는 연설가가 아니었다. 바울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힘을 숭배하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하나님의 연약함(곧 십자가의 이야기)을 선포한다는 것은 배척 받을 가능성이 많았다. 따라서 바울은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런데 바울의 복음 선포에 놀랍게도 성령님의 능력이 나타났다. 그는 설교할 때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거룩한 성령의 능력과 나타남(ajpovdeixi")16으로” 했다(2:4). 그래서 많은 고린도인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변화되었다. 인간 말의 기술(수사학)로는 결코 하나님을 경험해 알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서 이렇게 역사하시는 데 목적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는 것이다”(2:5). 믿음은 인간의 수사학이나 인간의 지혜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 곧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성령님의 계시(2:6~16)
2장 6~16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선포하는 십자가의 복음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것은 오로지 성령님에 의해서만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지혜는 공허한 것이다. 그것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온전한 자들’(oJ tevleio")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고 수용한다(2:6a). 여기서 ‘온전한 자’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세대(aijwvn)의 지혜’나 ‘이 세대의 지도자들의 지혜’와 전적으로 다르다(2:6b). ‘이 세대’는 종말론적 용어로서 ‘오는 세대’와 대조되는 말이다. ‘이 세대의 지도자들’은 ‘폐하여져 가고 있는(katargoumevnwn) 자들’인데, 일차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와 로마의 권세자들을 가리키고 넓은 의미로 세상의 모든 지도자들과 지혜자들을 포함한다.
하 나님의 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케 하려고 영원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이전에 감춰졌다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의 역사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이다(2:7). 이 세상의 지도자들 중에 이 지혜를 안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만약 알았더라면, 어떻게 그토록 높으신 ‘영광의 주’를 가장 처참한 십자가에 못 박게 할 수 있었겠는가(2:8)? 참으로, 그리스도의 연약한 십자가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kardiva)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2:9).
그러니까 하나님의 십자가의 구원은 인간의 자연적 인식을 넘어서는 초월적 비밀이었다.
그 러나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ajpekavluyen, 2:10a). 오직 성령만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살피신다(2:10b). 마치 인간의 영이 인간의 깊은 생각을 알듯이,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의 깊은 생각까지 알고 계신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2:11).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을 이해하게 하려는 것이다(2:12). 그러므로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인간의 지혜의 말(수사학적 말의 기술)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복음에 합당한 말)로 한다(2:13).
그런데 자연인(yuciko;" a[nqrwpo")17은 성령을 소유하지 못한 자로서, 성령의 일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의도적으로 배척한다. 성령이 없는 자들의 시각은 처음부터 철저히 왜곡돼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일들은 지혜롭게 보이지만, 성령의 일들은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령의 일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성령의 일들은 성령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2:14).
그러나 신령한 자는 성령을 소유한 자로서,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에 관한 모든 것들을 분별하여 이해한다. 또한 그는 죄에 매여 있는 자연인의 마음까지 꿰뚫어 본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성령의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2:15, cf. 4:3~4).
이것은 부모가 어린 아이의 마음을 훤히 알고 있지만, 어린 아이는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자연인은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마음(nou"")을 소유하고 있다(2:16).
적용
고린도전서 1~2장은 무엇보다 설교에 대해 대단히 소중한 가르침들을 준다.
첫 째, 설교자는 십자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를 자기 선포의 중심 내용으로 삼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서 지나가는 과정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절정이요, 구원 역사의 전체를 통합하고 해석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일시적인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십자가 복음 외에 다른 것들을 전한다면 복음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개종은 발생하지 않는다.
둘 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겐 거리낌이요,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에겐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십자가를 통해 죄와 죽음의 세력을 정복하시고 믿는 자들을 구원하셨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과 구원의 길을 상의하셨다면, 인간은 십자가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방법을 제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단 한마디도 상의하시지 않고, 어리석고 연약하게 보이는 십자가를 택하셔서 제시하셨다. 이제 인간은 모험적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을 믿고 구원받든지, 아니면 자신의 지혜를 고집하다가 멸망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셋째, 십자가의 복음은 직선적으로 선포돼야 한다. 아볼로는 설교할 때 고대 수사학적 화술을 멋지게 활용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지혜를 의지하지 않고, 십자가를 단순하게 선포했다. 십자가는 그 단순함과 투명함 속에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를 수사학적 화술로 전한다면, 그 안에 있는 인간적인 요소가 십자가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에 방해로 작용한다. 설교자는 청중을 십자가 앞에 세워야 한다. 그래야 인간은 적당한 종교 생활을 중단하고 운명의 결단을 하게 된다.
넷째, 십자가를 선포하는 설교자는 성령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한다. 설교자는 수사학의 다이내믹을 교묘하게 사용해 청중을 설득하려 해선 안 된다. 대신에 성령님께서 설교를 통해 스스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성령님으로만 깨달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註)
1. B. W.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The Influence of Secular Ethics and Social Change(Grand Rapids, Eerdmans, 2001), pp.32-36을 보라.
2.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pp.38-40을 보라.
3. Winter, After Paul Left Corinth, pp.40-43을 보라.
4. Cf. G. D.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Grand Rapids, Eerdmans, 1987), p.33.
5. Fee, The First Epistle to the Corinthians, p.39.
6. J. Y. Campbell, “Koinwniva and its Cognates in the NT”, JBL 51(1932), pp.352-80.
7. 「고린도전서」(김지철,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99), p.75.
8. “바울과 설교,” 「기독신학저널 7」(홍인규, 2004), p.92.
9. D. Litfin, St Paul"s Theology of Proclamation 1 Cor. 1-4 and Greco-Roman Rhetoric(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4), 198; R. F. Collins, First Corinthians(SPS; Collegeville, The Liturgical Press, 1999), 105.
10. 초기 유대교는 이사야서 53장에 대해 메시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았다.
11. M. Hengel, Crucifixion(ET; London, SCM, 1977), 1이하.
12. 「고린도전서」(김지철), p.118.
13. ‘하나님의 비밀’이란 표현은 Nestle-Aland 27판과 UBS 4판에서 취한 본문이다. 그러나 다른 고대 사본들에 ‘하나님의 증거’라는 본문이 채택돼 있다. 한글 번역 중에서 표준새번역은 전자(하나님의 비밀)를, 개역 성경은 후자(하나님의 증거)를 취하고 있다.
14. Cf. 개역 성경,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15. Cf. 「고린도전서」(김지철), p.132.
16. Cf. 개역 성경,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17. Cf. 개역 성경, “육에 속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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