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고전,후서 강해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해석

에반젤(복음) 2019. 12. 15. 20:16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성령 해석

김 재 성(한국신학연구소 연구교수)


머리말

헬레니즘적 영(pneu'ma) 이해의 특징은, 무역사적이며 비인격적이라는 점에 있다. 사람이 신령해지면 질수록 현실의 역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내면적 심령적 구원에 몰두하게 된다고 보는 점에서, 그것은 무역사적이다. 영을 사물과 같은 것으로 여겨서, 소유의 대상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삼는 점에서, 그것은 비인격적이다.
이와는 반대로, 바울의 성령 해석은 역사적이며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사람이 성령에 사로잡히면 잡힐수록 더욱더 현실의 역사와 그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 책임적이 된다고 보는 점에서, 그것은 역사적이다. 성령의 역사(役事)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보는 점에서, 그것은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바울의 성령 해석이 이러한 특징을 갖는 것은, 그가, 선교 현장과 동떨어져 있는 어떤 신령한 존재의 정체나 의미를 추구하지 않고, 선교 현장에서 일어나는 현실의 문제와 씨름하는 가운데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고,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그럴 듯한 말로 하지 않고 성령과 권능의 나타남으로 하였다고 한다(고전 2:4). 그는 고린도전 후서에서 성령과 능력을 밀접히 연관시키며,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였음을 강조한다. 이것은, 그가 복음을 전한 것이 성령의 능력 있는 역사(役事) 가운데서 이루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였으며, 그 공동체는 그러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세워졌다. 그들이 경험한 성령의 역사는, 사회적 상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개개인의 어떤 심령적 내면적인 황홀경의 체험이 아니라, 그들이 처한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관련된 공동체적 경험이다. 따라서, 바울의 성령 해석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그가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고, 성령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그 사회적 상황을 밝혀야 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 그 사회적 상황을 살펴 보고, 다음으로, 그렇게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시작한 교회가 어떻게 분열되고 붕괴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는지 살펴 보고, 끝으로, 그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바울이 제시하는 성령 해석은 어떤 것인지 살펴 보려고 한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의 역사를 경험한 사회적 상황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논할 때 학자들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구절은 고전 1:26∼28이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에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구절(26절)이 중요한데, 이것을 해석하는 데서 학자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나타낸다.
첫째로, 이 구절들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그 사회의 가장 낮은 계층 사람들로 보는 사람들이 있다. 카우츠키(Karl Kautsky)는, 고전 1:26-28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매우 다양한 종류의 가난한 계급들이 이룬 운동이며, 그들을 일반 용어로 '프롤레타리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다이쓰만(Adolf issmann)도, 이와 비슷하게, 고전 1:26 이하를 근거로 하여, "신약성서가 나타내는 비문학적 성격"을 볼 때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사람들은 당시 사회의 하층민들임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구절들만을 가지고,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아'와 같은 어떤 단일한 계층으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소박한 판단이라고 하겠다. 고린도전서에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을 부유하다고 서술하는 구절들도 있다(4:8.10).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헌금에 참여할 것을 권한 것도 그들이 최소한의 재산은 갖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후 8:7; 9:14).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갈등(11:17-22; 8:1-13)은 그 교회가 단일한 계층으로 구성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많지 않다'(1:26)는 표현에 주목하면서,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 다수는 하류 계층에 속하였지만 적어도 소수는 상류 계층에 속하였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타이센(Gerd Theissen)은, 상류 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소수이기는 하지만 그 공동체 안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는 소수'라고 본다. 그는, 고린도교회는 하류 계층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운동이나 상류 계층의 어떤 움직임이 아니라, 다양한 계층을 포괄하는 어떤 공동체였다고 본다. 헹엘(Martin Hengel)이나 스미스(Robert H. Smith)도 이와 비슷한 견해를 나타낸다. 이러한 연구들은, 고린도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사회적 신분을 밝히려고 한 점에서, 이전의 단일 계층론의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앞 뒤의 문맥을 살펴보면, 26절의 강조점은, 고린도교회에 지혜 있는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음'을 말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음'을 말하는 데 있다. 그들 가운데, 소수의 지배 집단이 있어서 다수를 넘어서는 영향력을 발휘했다면, 하나님이 다수의 하층민을 택하신 일이 어떻게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며,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며,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없애는 일(27-28절)이 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이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29절)이 될 수 있겠는가?
고전 1:26에서 나오는, 육신의 기준으로 보아서 '지혜 있는 사람'은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기술이나 철학적 지식을 습득한 사람을, '권력 있는 사람'은 정부의 고위 관리나 이방 종교의 지도자를, '훌륭한 가문'은 귀족의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많지 않았다는 것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 사회의 낮은 계층의 사람들이었음을 말한다. 그런데도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 부유한 사람이어느 정도 있었을 뿐 아니라 이미 그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보여 주는 구절들이 고린도전서에 적지 않게 나오는 것은, 다른 측면에서 설명을 해야 한다. 바울은 그들의 신분을 설명하기 직전에,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은 것을 생각하여 보십시오"(26a절) 하고 말을 시작한다. 이 말은 바로 다음에 나오는 설명이, 그가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의 상황이 아니라, 고린도교회가 세워지던 당시의 상황을 묘사한 것임을 의미할 수 있다. 즉,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교회 사람들에 대한 엇갈린 서술이 나오는 것은, 그 교회가 세워지던 때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까지 몇 년 사이에, 그들의 삶의 처지가 변하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의 변화
갈릴리의 예수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단일한 민족과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고린도교회 초창기에는 예수 운동의 이런 성격이 어느 정도 유지된 것으로 보이며, 26절은 이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며,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1:2.24.26)이라는 의식을 가진 점에서, 단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일성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에 고린도는 사회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로마의 식민정책 때문이다. 시이저(Julius Caesar)는, 고린도를 로마의 식민지로 건설하면서, 주로 노예 신분에서 해방된 자유민들을 그곳으로 이주시키고, 그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는 방식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고린도에서는 로마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났고, 고린도는 그것의 전통에서 어떤 연속성도 갖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고린도의 경제는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고린도는 무역과 금융뿐만 아니라, 상업과 공업, 그리고 정치적 행정의 중심지였다. 기원전 27년부터 고린도에는 아가야(Achaia) 지방 총독의 관저가 있었으며, 그것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그 도시로 모이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빈부격차와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사회적 갈등을 겪었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점들에 비추어서,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사회적 신분의 변화와,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식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을 지나치게 강조해서는 안된다. 고린도교회가 세워진 때부터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때까지 기간은 길어야 3∼4년에 불과한데, 그 정도 기간에 고대 사회에서
어떤 결정적인 변화가 일어났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변화는 이전의 신도들과 사회적, 경제적 신분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새로운 회원으로 들어온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처음에는 유대 사람 중심의 선교를 하다가, 나중에는 이방 사람을 중심으로, 특히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선교한 것(행 18:6b-7)은 이러한 상황과 관계 있는 것일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선교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을 중시하였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하거나 할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유대교의 신앙과 도덕적 원리에 동조적인 이방 사람들이다. 디디우 유스도를 비롯하여 그들 가운데는 재산을 가진 사람들이 제법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고넬료, 루디아 등이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으로 거론되는데, 고넬료는 이탈리아 부대라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었으며(행 10:1-2), 루디아는 자색 옷감 장수였다(행 16:14-15). 사회적 고위층의 비율은, 대체로 노예와 같은 가장 낮은 계층 출신의 사람들인 개종자들 가운데서보다, 헬레니즘의 유대인 디아스포라 안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훨씬 더 높게 나타났다. 고린도교회의 부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26절에서 언급된, '지혜도 권력도 없고, 가문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은,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에도 교회 신도들의 대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교회를 설립할 당시에는 낮은 계층에 속하였지만 지금은 이전보다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밖에, 고린도교회 사람들 가운데는 노예도 있었다(7:21; 1:11). 바울이 편지를 쓰고 있는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미 민족이나 계층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동질성을 갖는 집단은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곧 고린도교회의 전체적 성격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교회는 아무런 원칙이나 목표도 없이 우연하게 구성된 어떤 혼합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신분은 이러한 사회적 신분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면이 있다.

'성령의 기준'에 따른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신분
26절에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설명하면서 그것 '육신의 기준'(kata; sarkav) 따른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그들의 신분을 설명하는 데는 '육신의 기준'과는 다른 어떤 기준이 또 있음을 함축한다. 그것은 '육신의 기준'과 대조를 이루는 점에서 '성령의 기준'(kata; pneu'ma)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육신의 기준'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기준이라면, '성령의 기준'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를 때에 사용한 것이다. 이 기준에 따라서 택함을 받은 사람들을 바울은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또는 '주님께 속한 자유민'이라고 한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파하면서 사람들에게 제시한 것은, 어떤 사회적 자격이나 조건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다(1:23a). 그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은 특정한 민족이나, 지혜나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은 그를 배척하였고, 지혜도 능력도 없고 가문도 훌륭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였다. 바울은 그와 같이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민족과 계층과 출신성분을 불문하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부른다(1:2, 9, 24, 26; 7:18, 20-22, 24).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박은, 어리석음으로 여기는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세상의 지혜로는 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사람에게 가능하며(1:24),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하심으로써 가능하다(2:10).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어떤 민족적, 계층적 동질성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동
질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같은 구원의 현실에 참여한 사람들이 갖는 동질성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민족적, 계층적 동질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문제시하지 않지만,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동질성을 깨뜨릴 때는 엄하게 견책한다(1:13; 3:3; 8:12; 10:21-22; 11:22).출신 민족과, 계층이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동질성을 유지하면서 구원 공동체를 이룩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타이센(Gerd Theissen)은 이러한 점을 사회학적으로 설명해보려고 한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그는, 바울이 상류 계층 사람들과 하류 계층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타협을 시도하였다고 보며, 이것을 '사랑의 가부장주의'라는 표현으로써 설명을 한다. 그에 따르면, '사랑의 가부장주의'는 바울 윤리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그것은, 바울이 사회 질서에서
일어나는 분열에 직면하였을 때에, 종교적 차원에서 통합을 추구한 윤리이다. 바울은 사회적 차원의 문제는 그대로 두고 종교 영역에서 어떤 절충을 하려고 하였다. 사회적 기준에서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스스로 도우려고 할 이유가 없지만, 교회에서는 '사랑의 가부장주의' 정신으로, 곧 가정에서 인자한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는 것 같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헹엘(Martin Hengel)도 이와 비슷한 입장이다. 이와 같은 '사랑의 가부장주의'는 상류 계층 사람들에게 어떤 윤리적 삶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부자들에게서 그런 윤리적 사랑을 기대하였는지는 의문이다. 고린도교회에 나타난 분열의 모습과 그것을 꾸짖는 바울의 말들을 볼 때에, 그 상황은 그렇게 낙관적인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을 상류 계층 사람들의 윤리적 결단에 따라서 좌우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설명하지 않았다.티드볼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어떤 다른 위치를 얻으려고 갈망하지 말고 지금의 신분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촉구하였다. 바울은 이러한 사회적 신분의 구별을 폐지할 것을 주장한 것이 아니
라, 그러한 구별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비추어서 그러한 구별을 재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 지도권은 중간 계층과 엘리트 층에게로 돌아갔는데, 그것은 그들이 사회적, 교육적 기능만이 아니라 교회 모임을 열 수 있을 만한 재산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의 지도권을 인정하였으며, 그들을 지지하였지만, 그들이 취한 태도나 행동에 대해서는 불만을 나타냈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그들이 자신들의 결점을 극복하고 자신들의 세상적 자만심을 버릴 것을 권고한다. 그리하여 바울은, 교회는 일반 사회와는 다른 원칙에서 움직이며 완전히 새로운 인간 관계를 누리는 어떤 '대안 사회'(alternative soceity)임을 주장하였다는 것이다. 그가 교회를 세상과는 다른 원칙에서 움직이는 '대안 사회'로 본 것은 옳다. 그러나 그것이, 사회에는 실질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면서 공동체 안에서 사람들의 자만심이나 마음의 완악함을 극복하게 해 주는 것이라면, 진정한 의미에서 '대안 사회'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성령의 기준'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이룩한 고린도교회는, 그와 같은 사회적 타협이나, 개개인의 자제를 바탕으로 해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아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구원의 현실에 기초한 것이다. 그 구원의 현실, 또는 사람들이 그것에 참여한 과정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것에 참여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그리스도로 전하고,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곧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다(1:22-25). 그들은 '육신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이며, '세상의 약한 것'이며, '세상에서 비천한 것과 멸시받는 것'이며,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택하시고 부르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택함과 부르심 때문에 세상의 기준에서 볼 때 '지혜 있는 자', '강한 자'는 부끄럽게 되고, '잘났다고 하는 것들'은 존재도 없게 된다(1:27-28). 사람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알고, 예수를 '영광의 주'로 영접하게 되는 것은, 오직 성령을 받음으로써 가능하다(2:6-12). 그리하여 바울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에, '지혜에서 나온 그럴 듯한 말', 곧 타협이나 자제의 지혜를 모색하는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이 보여 준 증거로' 하였다(2:4-5). 그러므로 고린도교회는, 부유한 계층의 자제나 양보로써 이루어진 어떤 타협이나 가부장제적 사랑으로써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사회에서 소외되고 천시받던 사람들이 더 이상 소외되지 않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구원의 현실을 경험한 데서, 그리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

주님께 속한 자유민
바울을 타협주의자로 보는 사람들은 흔히 고전 7:17-24을 그 증거로 제시한다. 그들은,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때의 처지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라는 말(7:20)을, 어떠한 변화도 추구하지 고 그대로 현상 유지를 하라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키는 데는 관심을 갖지 않고, 다만 공동체 안에서 갖게 될 새로운 신분을 약속한 것이 된다. 이 구절들에서 바울은 세 번이나 거듭하여 '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대로 살아가라'고 촉구한다(17, 20, 24절). 그런데, 같은 구절들에 나오는, 각 사람에게 주는 권고들에는 어디에도 그들의 처지나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이 권고들은, 직역하면,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살아가시오'(17절), '그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안에서 머무시오'(20절), '그가 부르심을 받은 사실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시오'(24절)이다. 이 구절들에서 강조점은,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처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구원의 현실'에 있다. 이와 비슷한 표현이 고전 1:26에도 나오는데, 여기에서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들이 부르심을 받을 당시의 처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 그들이 참여한 '구원의 현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1:26과 7:20은 '부르 '(klh'si")이라는 단어를 공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점에서, 위의 세 구절들을 1:26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이 해석할 때에, 위의 세 구절의 의미는, '각 사람은 변화를 추구하지 말고 현상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타협주의적 말이 아니라, '각 사람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라'는 뜻이 된다. 그것은 '타협주의'와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7:22은, 노예와 자유인의 첨예한 대립을 무효화시키고, 그리스도 안에서는 자유인도 노예도 없다고 하는 타협주의적 주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서, 자유인과 노예의 구을 없애거나, 주 안에서는 그러한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어떤 타협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은 다음에 나오는 23절과 관련하여 보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신분을 규정하고 있다. 그들은 단순히 노예가 되거나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노예는 주님께 속한 자유민(ajpeleuvqero": freedman)이며, 그와 같이, 자유인(ejleuvqero": free man)으로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노예이다(22절). 이 구절에 따르면,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노예가 되거나 자유민jpeleuvqero")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능력 안에서 세상의 신분과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신분을 얻었지만, '부르신 분' 앞에서는 종이거나 자유민(ajpeleuvqero")일 수밖에 없다.
바울이 성령을 새롭게 해석하게 된 상황
그러나 고린도교회는 새로운 회원들이 들어옴에 따라서 내부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 것으로 보인다. 전에는 없던,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지식을 가진 사람과 지식이 없는 사람 사이에서 갈등이 표출되어, 공동체가 분열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영(pneu'ma) 이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성령 이해를 교란시켰을 뿐 아니라, 이러한 분열을 조장하고 또 가속화시켰다.

공동체의 분열
가진 사람들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성만찬과 관련한 공동식사에서 가진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무시한 일을 두고 바울은 가진 사람들을 견책하였다(11:17-22). 그들은, '먹고 마실 집'이 있고, 잔뜩 먹고 취할 수 있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할 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무시를 당한 사람들은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22절) 곧 가난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만찬 시간에 맞춰서 올 만한 시간적 여유도, 만찬에서 먹을 것을 준비할 경제적 여유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직업은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해야 하는 날품팔이나 부두 노동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람들이 공동식사 자리에 아직 도착하기도 전에,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먼저 잔뜩 먹고 취한 일을 두고,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20절).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친교'를 깨뜨리고,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들이 공동식사를 하려고 모일 때에는 서로 기다리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으라고 권고한다(11:33-34절). 타이센은 이러한 권고가 어떤 타협안을 제시한 것이라고 본다. 그에 따르면,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는 말은, 부자에게 자기 집에서는 자기 형편에 따라서 먹어도 되지만, 주님의 만찬에서는 교회의 규범에 따르라고 제안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타협은, 한편으로는 공동체 안에서의 계급의 특유한 차이들을 인정하는 것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그러한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도록 하라'는 권고(34a절)를 어떤 타협안을 제시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왜냐 하면, 바로 다음에 '그것은, 여러분이 모이는 일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는 설명이 나오기 때문이다(34b절). 집에서 먹으라고 한 것은 실제로 집에서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공동식사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심판을 받을 일임을 강조하는 데 초점이 있다. 줄곧 그들을 '여러분'이라고 부르다가 갑자기 '배가 고픈 사람은' 하고 부른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은 배가 고픈 사람은 집에서 먹으라고 실제로 제안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렇게도 배가 고프면 ' 하고 넌지시 책망하는 것이라 하겠다.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는 지식을 가진 사람들과 지식이 없는 사람들 사이의 문제이다(8:1-13).
바울은 지식이 없는 사람을 '약한 사람' 또는 '양심이 약한 사람'이라고 부른다(8:7, 10, 11). 그들은 한 때 우상을 섬기던 이방인들이며, 지금까지도 우상을 섬기는 습관에 젖어 있어서,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때에는 자기들이 먹는 고기가 참으로 우상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양심이 약하여, 그 음식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더러워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8:7).
'약한 사람'과 대조를 이루는 '강한 사람'은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8:1). 그들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를 두고, 우상이란 것은 아무것도 아니니 그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지적이며, 개인적 자유도 누릴 줄 아는 사람들이다(8:4). 개인의 자유에 대한 사고에서 그들은,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고 하는, 극단적인 단계에까지 나간 사람들이다(8:8; 10:23).
그들은, 시장에서 고기를 사서 먹을 수 있고, 사람들을 초대하여 고기를 대접할 만한 사람들과 사귀는 점에서, 부유한 사람들인 것으로 보인다(10:25-27). 당시에,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고기를 먹지 못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승전 기념 행사, 큰 종교 축제, 의식이나 제의, 신전에로의 사적인 초청 등에서인데, 이러한 기회는 자주 다가오지 않았다. 그들에게서,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고기를 먹고 안 먹고 하는 식성의 문제나,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어떻게 대할 것이냐 하는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여 함부로 행동한 데서 일어난 '교만'의 문제이며(8:1), 사람들을 서로 갈라지게 하는 분열의 문제이다.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였기에 바울은, '강한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지식으로 '약한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그리스도는 그 '약한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그것은 그 형제들에게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엄하게 견책한 것이다(8:11-12).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
공동체의 이와 같은 분열 현상은 열광주의자들의 등장과 함께 노골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들의 헬레니즘적인 영/성령 이해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의 성령 이해와 생활 전반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고린도교회의 초기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1:2, 26)이 갖고 있던 성령 이해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나타난다. 바울은, 자신의 선포가 성령의 능력에 힘입은 것이며, 그 핵심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라고 한다(2:1-5).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세상의 영이 아니라 성령을 받았으며(2:12), 그 결정적 증거는 이 세상의 통치자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영광의 주'로 고백하는 데 있다고 한다(6-12). 이런 점에서, 그 당시에 고린도교회에 널리 퍼진 성령 이해는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그 시기를 '내가 여러분에게로 갔을 때'라고 하는데(2:3), 이는 그가 고린도에 가서 복음을 전하던 시기, 곧 고린도교회가 세워지던 시기이다. 그 시기에 고린도교회 사람들은 대부분, 지혜도 없고, 권력도 없고, 가문도 변변치 않은, 그 사회의 낮은 계층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부르심을 받았다(1:26-28).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요 그리스 사람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다(1:23-24).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성령을 받은 사람'은 이 세상이 거부하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점에서 똑같다. 고린도교회 사람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그들이 그 사회의 낮은 계층에 속하였을 때에,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그들의 그러한 사회적 신분과는 상관없이 성도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役事)에 참여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들의 성령 이해는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열광주의자들의 성령 이해는 이와는 아주 다르다. 그들은 성령을, '신자에게 전달되는, 또는 신자가 그 안으로 이식되는, 어떤 이로운 실체'로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영을 소유하였다고 생각하였으며(7:40), 스스로를 '신령한 사람'(pneumatikov")으로 생각하였다(14:37). 그들은 신령한 것에 참여하는 데 몰두하여 현실의 삶을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겼다. "모든 것이 다 허용된다"든지(6:12; 10:23), "우리 모두는 지식이 있다"든지(8:1), "죽은 사람들의 부활은 없다"든지(15:12) 하는 구호들은 그들이 즐겨 사용한 것들이다. 이러한 지적인 구호들은 그들의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를 잘 나타
내 주는 것들이다. 그들은 신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으며(6:12-20), 방종주의적이거나 금욕적인 결혼 윤리에 빠졌으며(7:1-40), 자유에 대한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졌으며(10:23-11:1), 개인의 은사를 성령을 받은 표시로서 강조하였으며(14:1-40), 이미 지금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하고 있다는 생각에서 종말론적 소망도, 죽은 사람의 부활도 부정하였다
(15:12-58). 이와 같은 성령 이해는, 현실의 삶을 도외시한 채 개인의 심령적 구원만을 강조하는 점에서,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무역사적 성령 이해이다.바울은 이러한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가 공동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한다. 그는 고린도교회 사람들에게, 그들이 처음에 성령의 능력 가운데서 부르심을 받고, 그리스도의 구원 역사(役事)에 참여한 것을 기억하여,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를 확립함으로써,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를 극복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제, 바울이 제시하는 이러한 성령 이해의 논점을,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성령'에 대한 그의 해석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바울의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성령
고린도교회 열광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친 종교나 사상은 무엇이며, 그것은 공동체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이론이 분분하다. 그것이 무엇이든간에, 그들의 성령이해가 당시의 헬레니즘적 프뉴마(영/성령) 이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헬레니즘적 프뉴마 개념의 특징은, 그것이 사람이 어떠한 형태로든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라는 데 있다. 이와 같은 프뉴마 이해는 2세기 영지주의자들에게 와서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들은 예수의 선교 목적을 사람들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는 것으로 보았다. 성령은 구원 그 자체이며, 예수는 영적인 것을 나누어 준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는, 프뉴마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 보는 점과, 그리스도의 위치를 강조하지 않는 점에서,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와 비슷하다.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이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과 같은 사람들일 수는 없지만, 이미 바울 시대에 초기 영지주의의 싹이 자라고 있었으므로, 그들이 그와 같은 경향의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의 직접적 또는 간접적 영향 아래에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바울이 열광주의자들의 성령 이해를 문제 삼은 것은, 그들이 이러한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의 영향을 받아서 성령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실체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들의 그러한 성령 이해를 물리치고, 성령은 사람이 소유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려고 한다.

구상화 할 수 없는 성령
프뉴마를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물질적 실체로 보는 사고의 특징은, 프뉴마를 어떻게든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구상화하는 것이다. 후기 영지주의에서는 프뉴마를 '빛'이라는 표상으로 표현하였으며, 철저히 내재주의적인 스토아 철학에서는 사물의 모습들 속에서 그 속에 깃들인 프뉴마를 보았다. 영을 볼 수 있다고 하는 사고는, 1세기의 헬레니즘적 유대교, 스토아 철학자들, 플루타크 등에서 일반화된 현상이다.신약성서 기자 가운데는 누가 기자가 헬레니즘적 요소에 친숙하다. 그는 오직 힘을 실체의 형식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 점에서 헬라주의자이다. 그렇지만 그의 실제 관심은 다른 데 있다. 헬라주의자와는 달리, 그는 성령이 '어떻게' 사람에게 침입하느냐 하는 것을 묘사하지 않는다. 그가 관심하는 것은, 성령의 나타남은 눈에 보이는 것이며 확인할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면,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을 묘사하는 데서, 누가 기자는 성령의 활동을 어떻게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표현하려고 하였다.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와 대조하여 보면, 누가 기자는 성령이 '형체를 가지고' 내린다는 내용을 첨가하였다(눅 3:22). 이것은 그 사건이 단지 예수가 본 어떤 환상이 아니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객관적 사건임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을 묘사하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성령을, 세차게 불면서 소리를 내기도 하고 공간을 가득 채우기도 하는 바람으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불같은 혀들'로 구상화한다(행 2:1-3). 나아가서 그는 집이 흔들리는 것으로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도 한다(행 4:31).
누가 기자는 성령의 임재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에게 '성령이 채워진다'거나 '성령을 부어 준다'(행 2:33)는 표현을 사용한다. 성령이 어떤 액체와 같이 사람을 채운다는 사고는 그리스 세계에서는 잘 알려진 것이다. 누가 기자는 '채워진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pivmplhmi라는 동사의 단순과거 수동태인 plhsqh'nai를 자주 사용하며, 이와 비슷한 의미의 형용사 plhvrh"(행 7:55)나 동사 plhrou'n을 사용하기도 한다(행 13:52). plhsqh'nai라는 단어는 우리말로는 흔히 '충만하다'로 번역된
다. 이 단어는 신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표현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서 기자 가운데서 성령과 관련하여 plhsqh'nai를 사용한 사람은 누가 기자뿐이다(눅 1:15; 1:41; 1:67; 행 2:4; 4:8; 4:31; 9:17; 13:9). 누가 기자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이 곧 그가 헬레니즘적 프뉴마 이해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하는 것
은 아니다. 그가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것은, 헬레니즘 세계의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도록 그들의 언어로 해석하려는 것이며, 성령의 역사(役事)를 개인의 내면적 환상이 아닌 객관적인 사건으로 드러내려는 것이다.
고린도교회 열광주의자들도 사람들 속에서의 성령의 임재를 어떻게든 드러내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가운데서 일어난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자신들 개개인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음을 겉으로 드러내려고 한 점에서, 누가 기자와는 결정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그들이 성령의 여러 가지 은사 가운데서도, 성령이 어떤 개인에게 역사함을 남에게 드러내 보여줄 수 있는, 방언이나, 기적 행하는 은사, 병고치는 은사를 선호한 데서 잘 나타난다.그러나 바울은 성령을 구상화하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는 성령을 어떤 소리나 형체로 표현하지 않으며, 성령이 사람을 채운다거나 사람에게 성령을 붓는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도, 어느 은사나 다 '한 분이신 같은 성령'이 주시는 것이라고 함으로써(고전 12:11), 은사에 차등을 두고 남에게 드러내 보일 수 있는 특정 은사만을 선호하는 것에 쐐기를 박았다. 대신에 그는 '남을 돕는 일'과 '관리하는 일'(12:28), 그리고 '섬기는 일', '나누어주는 일', '지도하는 일', '자선을 베푸는 일'(롬 12:7-8) 등, 곧 성령의 임재를 겉으로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 것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켰다. 이러한 것들을 은사 목록에 포함시키는 것은 바울에게서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남
성령은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하려고 하는 바울의 노력은 그가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을, '주다'(divdonai)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도 나타난다.
누가 기자의 경우에는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다(눅 11:13; 행 5:32; 8:18; 15:8). 그는 파루지아에 대한 기대가 그다지 간절하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서는 선교의 역사가 파루지아를 대신한다.
그는, 요엘이 말한 '마지막 날에 모든 사람에게 부어질 영'(행 2:17)이 오순절 사건과 선교 역사에서 이미 사람들에게 부어졌다고 보았다. 그가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것은, 종말이 지연된 선교 현장에서의 성령의 현재적 역사를 강조하려는 것이지, 사람이 성령을 소유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경우에는 아예 한 번도 '성령'을 '주다'라는 동사의 직접 목적어로 사용한 적이 없다. 두 단어를 나란히 사용한 경우는 고린도전서에서 두 번, 그리고 고린도전서 이외의 바울서신에서 두 번 나온다. 먼저 고린도전서 이외의 경우를 보면, 한 번은 '성령'이 현재 분사(didovnta)의 목적어로 되어 있고(살전 4:8), 또 한 번은 과거 수동태 분사(doqevnto")의 한정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롬 5:5). 어느 경우에서나 그 분사는, 성령을 사람에게 '소유하도록 주는 것'이 아니라, 사
람들이 성결하고도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려고(살전 4:3-7),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과 인내와 소망을 일으키려고(롬 5:4-5),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의 경우(12:7·8), 바울은, 독자들이 그 두 단어를 연관시켜서 성령을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으로 오해하는일이 없게 하려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고전 12:7을 직역하면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각 사람에게(eJkavstw/) 성령의 나타나심이(hJ fanevrwsi" tou' uvmato") 주어진다(divdotai)"이다. 이는 성령이 각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나 성령이 개인에게 주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성령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사람들 가운데 나타나는 것, 곧 성령의 은사이다. 바울은 '주어지다'(divdotai)라는 동사의 주어를 '성령'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으로 함으로써, 사람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는 있지만 성령을 소유할 수는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이어서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지혜의 말씀을 주시고(divdotai),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지식의 말씀을 주신다"고 하는데(8절), 여기에서 '성령으로'(dia; tou' pneuvmato")는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라는 의미이고, '같은 성령으로'(kata; to; aujto; pneu'ma)는 '같은 성령을 따라서'라는 의미이다. 즉, 성령의 역사(役事) 속에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 곧 은사가 사람들에게 나타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사람들게 주어지는 것은 성령의 은사이지 성령이 아니다.

성령을 받음
'받다'(lambavnein)라는 동사는, 그 목적어가 사물인 경우에는 '취함'을 의미하지만, 그 목적어가 '성령'일 때에는 '받음' 또는 '영접함'을 의미한다. 이것은 성령을 '소유함'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힘'이다.
바울서신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롬 8:15; 고전 2:12; 갈 3:2·14)을 살펴보면, 그 동사의 주어(성령을 받은 이)는 언제나 '우리'이거나 '여러분'이다. 이는 성령을 받은 주체를 개개인보다는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가운데 일어난 성령의 역사(役事)에 사람들이 사로잡힘을 의미한다. 곧,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시고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신 일(롬 8:15; 갈 4:6),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영광의 주'로 고백한 일(고전 2:6-12), 복음을 듣고 믿은
일(갈 3:2,14)이다. 이러한 일에 참여한 사람들이 곧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나타난 것은, 무슨 신비체험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 곧 기도이다(롬 8:15·26-27; 갈 4:6). 개개인이 성령을 받는 것은, 공동체적인 성령의 역사에 개개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지, 공동체와 관계없이 혼자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기자의 글에서 이 동사가 '성령'을 목적어로 취하는 경우들(행 2:38; 8:15.17.19; 10:47; 19:2)을 살펴보면, 바울서신의 경우들과는 다른 특징이 나타난다. 누가 기자는, '각 사람'(e{kasto")이 성령을 받을 것이라고도 하고(행 2:38, 참조: 행 2:3), 베드로와 요한이 사람들에게 손을 얹으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도 한다(행 8:17-19). 그는, 성령을 받기 위한 조건 같은 것으로 회개, 세례, 죄의 용서를 들기도 하고(행 2:38), 사도가 손을 얹는 것이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 매개로서 작
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행 8:17; 19:6).이런 것은 바울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마술사 시몬이 자기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해달라면서 사도들에게 돈을 내민 일(행 8:19)을 두고, 누가 기자는 그가 돈으로 하나님의 선물을 사려고 한 것을 문제 삼지만(행 8:20),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개개인에게 성령을 나누어주려고 한 것이 더 큰 문제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는 데는 어떠한 조건이나 중재도 필요하지 않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본다(갈 3:2·14).

공동체 안에 임하는 성령
'여러분 가운데'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성령이 개인에게 임함을 나타내는 구절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구절들에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예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예수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활동을 묘사하는 것들이다. 예수와 성령의 관계는 특별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구절들에서 바로 성령이 개인에게 임하는 예를 끌어낼 수는 없다. 누가복
음과 요한복음에서는, 다른 복음서에서와는 달리, 예수께 성령이 임한 경우 말고도 개인에게 성령이 임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울은 성령의 임재를 말할 때는 언제나, 성령이 개개인에게 임한다고 하지 않고, '여러분 가운데'(ejn uJmi'n) 임한다고 한다(롬 8:9; 8:11 고전 3:16; 6:19 갈 3:5). 이는 곧 성령이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임함을 말한다. '여러분 가운데'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집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라는 의미를 나타낼 때에는 '각 사람에게'(eJkavstw/)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다(롬 2:6; 12:3 고전 3:5; 4:5; 7:17; 12:7; 12:11;
15:38). 바울은 고전 12:7에서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이 주어진다고 하고 나서, 잠시 후에 다시 각 사람에게 은사가 주어진다고 한다(12:11). '각 사람에게'라는 표현을 이와 같이 두 번이나 거듭하여 사용한 것은 이례적인데, 그것은 그가 여기에서 성령의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의 나타나심' 또는 '성령의 은사'는 '각 사람에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지만, 성령 자체가 '각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지는 않는다.
성령이 '여러분 가운데' 임한다고 하는 것은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령의 임재는, 어떤 영적 실재가 하늘에서 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난 어떤 사건을 말한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나 헬레니즘의 프뉴마 이해에서 나타나는 프뉴마 임재의 특징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고대 그리스
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곧 프뉴마가 초월적 세계에서 인간에게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헬레니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가장 대표적인 예는 스토아 철학과 후기 영지주의의 프뉴마 이해에서 볼 수 있다. 스토아 철학에서 프뉴마의 임재는, 공기가 사람의 코로 들어와서 몸 속으로 녹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천상적인 실재가 사람의 몸 속에 스며드는
것을 의미한다. 영지주의에서 나타나는 '빛의 파편'으로서 프뉴마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하늘의 어떤 본질이 사람 속에 나누어진 것이며, 육체 속에 갇힌 것이다.
현실의 삶을 도외시하고 신령한 것에 몰두한, 고린도교회의 열광주의자들도 이런 식으로 성령의 임재를 이해하였다. 그들은 신령한 신적 본질이 '각 사람'의 내면 속으로 들어가서 '각 사람'을 신령하게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 가운데' 계시며, '각 사람'이 아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다(고전 3:16). 이는 하나님이 어떤 특정 장소나 건물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역사(役事)하는 곳에 계심을 말하며, 그곳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공동체임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성전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성전'(naov")을 단수로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개개인이 작은 성전을 이룸을 말하려 했다면 단수형 대신에 '성전들'(naoiv)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했을 것이다.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대한 바울의 대응은 고전 6:19에서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여러분은 성령의 전입니다'(3:16)라는 이전의 진술에다가 '몸'(sw'ma)이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여러분의 몸은 성령의 전입니다'(6:19)라고 한다. 이로써 신령한 삶이 내면적, 심령적 체험에서가 아니라 신체적 실존의 영역 안에서 나타나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바울이 "신령한 것이 먼저가 아니라 자연에 속한 것이 먼저"(15:46)라고 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와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여러분은 육신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습니다"(롬 8:9). 이 구절에서 잘 나타나는 바와 같이,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ejn uJmi'n) 임재하는 것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 사는 것은 동시적인 사건이며, 동일한 사건의 두 측면이다.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役事)할 때 그 현실에 참여한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사람들이다. '성령 안에서'는,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거의 다 예수와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이러한 경우는 주로 예수의 삶과 활동에서 나타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서신에서는 '성령 안에서'는 주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교회를 설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새로운 삶과 은사,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나타나는 구원의 현실을 특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는 열광주의자들에게서는 '신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져서'와 같은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은 '성령 안에서' 말한다고 하면서 예수를 저주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하나님의 영 안에서(ejn pneuvmati qeou')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예수는 저주를 받아라' 하고 말할 수 없고, 또 성령 안에서(ejn pneuvmati)가 아니고는 '예수는 주님이시다' 하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고전 12:3). 이 점에서도 바울의 성령 해석이 그리스도 중심적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된다.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은 바울이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데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롬 9:1; 고전 12:13과 갈 3:28). 고전 12:13과 갈 3:28은 둘 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차별이 없음을 말하지만, 전자는 '성령 안에서' 후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ejn Cristw'/)는 바울서신에서 주로 나오는 것인데, 그 의미는 전치사 ejn의 의미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것이 '장소'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 장소를 역사 안에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으로 봄으로써 신비적인 해석에 빠질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수단'을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활동을 어떤 기능적인 측면에서만 해석함으로써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인격적인 구원 활동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하는 점이다. 그것이 '관계'를 의미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전치사 ejn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나타낸다고 보는 것이다. 이 견해는, 그 '관계'를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형식적, 교리적 관계로 보지 않는 한에서 타당하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를 '성령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역동적 관계를 설명하려고 하였다. 그 결과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하나는, 정체도 모르는 영에 들려서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성령 안에' 있는 상태로 착각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물리치고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이해를 확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관계를 형식적 관계가 아닌 역동적 관계로 설명하게 된 것이다.


맺음말
"여러분은 벌써 배가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벌써 부자가 되었습니다"(4:8). 이 말은, 지금 여기에서 신령한 것에 참여함으로써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열광주의자들을 두고, 바울이 그들 자신의 표현을 가지고 비꼰 것이다. 바울은 죽은 사람의 부활이 있음을 분명히 할뿐만 아니라, 그것을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의 희망으로 확립함으로써(6:14; 15:22-20), 열광주의자들의 잘못된 종말론에 쐐기를 박았다. 열광주의적 성령 이해는 공동체 안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도외시하고 무시하는 자아도취나 교만으로 나타났다. 고린도전서의 여러 곳에서 바울은 이러한 교만을 직·간접으로 지적하고 있다(4:6, 8, 18-19; 5:2; 8:1). 이것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그 기초를 뿌리째 흔들어 공동체 전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한 것이다.
바울은 이런 위험의 뿌리는 열광주의자들의 내면적, 심령적 성령 이해에 있다고 보고, 이를 물리치기 위해 역사적, 그리스도 중심적 성령 해석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열광주의자들이 성령을 소유하였다고 주장하는 데 대하여, 바울은 성령은 구상화 할 수도 없고, 개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성령을 받음은, 어떤 내면적, 심령적 황홀경에 빠진 상태가 아니라, 공동체 가운데 역사하는 성령의 능력에 사로잡혀서 그리스도께서 이룩한 구원의 현실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바울은 성령이 임재하는 곳은 개인의 마음속이 아니라 공동체('여러분 가운데')임을 밝힘으로써, 성령의 역사(役事)는 내면적, 심령적 현상이 아니라 역사적 사건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성령 안에서'를 '그리스도 안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함으로써, 정체불명의 영을 받고서 성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자들에게 영을 분별하는(고전 12:10)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