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의 복음.
고후13:5절, 210.183.217장.A
지금까지 고린도전서를 이야기 할 때 고린도 교회와 바울과의 서신 왕래에 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서신을 보냈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곧 고린도전후서의 기록 목적(目的)을 확인(確認)하는 것이라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 고린도에 보낸 네 번에 걸친 서신(書信)에 관해서 살펴본바 있습니다.
1.고린도 후서를 쓰게 된 동기와 목적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갔다가 오히려 큰 모욕을 당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왔습니다. 이 방문을 바울은 가슴 아픈 방문이라고 합니다.(고후2:1-5절). 이제 다시 고통스러운 방문을 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고후2:1). 그 대신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를 공부할 때 살펴본 대로 고린도에 보낸 바울의 세 번째 편지(便紙)가 됩니다. 바울은 세 번째 눈물의 편지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고후2:4절에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이 편지(便紙)를 쓰기까지 에베소서에서 많은 고통(苦痛)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한 우울증 같은 것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후1:8-9절에 기록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환난과 고통에 관한 구체적인 말은 없지만 바울에게 상당한 외부적인 변화와 내부적인 고통의 변화가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그런 고통 속에서 바울은 눈물을 머금고 고린도후서 직전에 보냈던 바울의 세 번째 편지를 디도편에 고린도에 보냅니다.
디도가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가지고 고린도에 갔습니다. 그 편지를 보내 놓고 난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 걱정이 앞섭니다.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고린도로부터 뱃길로 돌아오는 디도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어서 드로아로 갔습니다.
그러나 디도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디도가 육로로 오는 것을 깨닫고 마게도니아로 갔습니다.(고후2:12-13절). 그곳에서 디도를 만났습니다. 디도에 전해 준 말에 의하면 바울의 세 번째 편지인 눈물의 편지가 큰 효과를 봤다는 것입니다.(참고:고후7:6).
바울은 이후 고린도에 네 번째 편지를 써서 고린도교회에 대한 문제 해결된 것에 대한 안도감과 사랑과 자신의 고난에 대한 사도직과 복음의 영광을 위해서 사도직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린도후서가 된 것입니다.
2.고린도후서 내용 설명입니다. 첫째, 고린도교회를 위한 바울의 인사 - 사도직입니다.(1:1-2절) 바울은 고린도전서나 고린도후서에서 인사말에서부터 자신의 사도직을 밝힙니다. 그 사도직은 사람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음을 밝힙니다. 인사말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직을 강조하는 곳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뿐만 아니라 로마서나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나 데살로니가전후서에서는 인사말을 통해서 자신의 사도직을 밝히지 않고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거나 문제로 트집잡지 않는 교회에는 자신의 사도직을 구태여 강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거나 문제가 발생하거나 사도직을 밝힐 필요성이 있는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는 자신의 사도직을 인사말에서부터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불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신의 사도성을 밝히고 있습니다.
왜 교회에서 목사님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까? 물론 목회자가 스스로 잘못하여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목회자(牧會者)의 권위에 대해서 도전하면 그것은 스스로 하나님의 복음을 거부하고 도전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님의 권위가 있어야 하듯 교회에서도 목회자의 권위가 살아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권위는 목회자 자신이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가 목회자의 권위를 세워 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고린도 교회와 바울과의 관계입니다.(1:3-2:4절)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간 머무는 동안 그곳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고린도를 떠난 바울은 에베소로 가서 그곳에서 3년 동안 있으면서,에베소교회를 개척합니다. 에베소에 머무르면서 고린도교회에 대한 소식이 들려 옵니다.
그리고 직접 고린도교회 대표단이 에베소에 있는 바울에게 찾아와 고린도교회의 문제에 대한 자문과 해답을 구합니다. 그때 바울은 곧 오순절 뒤 고린도를 방문할 계획을 세무면서 먼저 고린도전서를 디모데 편에 보냅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는 고린도교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직접 고린도를 방문하기로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 고린도 방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문에서 모욕만 당하고 옵니다. 모욕을 당하고 에베소로 돌아온 이후 눈물의 편지를 써서 디도편에 보냅니다.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 사이에는 있는 편지입니다. 이때 쓴 눈물의 편지에 대한 이야기가 고후2:4절에 기록됩니다. "내가 큰 환난과 애통한 마음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①고린도를 방문하여 모욕당하고 돌아온 이후 당한 환난으로 인한 위로(1:3-11절)와 ②눈물의 편지를 쓸 수밖에 없었던 바울의 심경(1:12-2:4)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목회자의 심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문제로 인하여 생존의 기로에 서 있을 때 누가 끝까지 그 교회를 지킵니까? 결국 목회자입니다. 목회자의 심정은 바로 복음에 대한 심정입니다. 어찌 목회자에게만 이런 심정이 있어야 하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 합니다. 셋째, 고린도교회에 대한 바울의 사랑과 용서의 복음입니다.(2:5-17절) 디도로부터 바울의 눈물에 대한 편지로 많은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합니다. 고린도교회에 문제를 일으켰던 반란자를 정죄하고 권징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써서 보내면서 그들을 사랑으로 용서해 주라고 합니다. 고후2:7절에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 합니다.
고후2:10절에서 "너희가 무슨 일이든지 뉘게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 향기로서 성도의 사명을 이야기하면서(고후2:15-16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복음을 증거한 자신의 심경을 이야기합니다. 넷째, 영광스러운 복음과 그 복음을 위한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권한과 영광입니다.(3-6장) 바울은 이 부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이야기합니다.
고후4:6절에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에 일꾼된 사도직의 권한과 영광스러움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아주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위해 수많은 환난과 고통을 말합니다. 그러나 확신이 있었습니다. 고후4:14절에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기를 권면했습니다.(고후5:17절),
하나님과 화목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고후5:20절). 그러면서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날임을 선포하면서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제발 마음을 넓히라고 합니다.(고후6:13절). 다섯째, 고린도교회의 기쁜 소식을 가져온 디도의 말을 듣고 기뻐한 바울입니다.(7장)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고린도 후서를 통하여 고린도교회로부터 가지고 온 소식을 너무나 기쁘게 받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고후7:13절에 이로 인하여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의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를 인하여 안심함을 얻었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여섯째,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헌금과 헌금에 대한 오해를 했습니다.(8-9장) 이제 고린도 교회가 정상적인 교회 질서를 바로 잡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문제들을 극복하였음으로 다시 예루살렘교회를 위해 헌금을 하라고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게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 행위를 모범으로 제시합니다. 마게도냐 교회가 극한 어려움 가운데 풍성한 연보를 했듯이 고린도교회도 어려운 예루살렘교회을 위해 풍성한 연보를 권면(勸勉)합니다.(8:1-8절).
바울은 연보에 대한 자세한 원리와 방법과 목적에 관해서 말합니다(9-15절). 그 연보를 수거해 오기 위하여 디도를 파견하면서 협력해 줄 것을 말합니다.(16-24절). 9장에서는 계속 연보하는 올바른 자세와 그 연보로 인한 축복을 이야기합니다.
일곱째,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거짓 선지자들의 공격과 바울의 변호입니다.(10-13장)
고린도교회에 또하나의 큰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교회를 위한 헌금 운동이 오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한 상태로 번지기 시작되었습니다.
외부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 찾아왔습니다. 이들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①자신들은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자랑합니다. ②이들은 예루살렘의 사도의 권위를 내세웁니다. ③이들은 환상과 이적과 자신들의 영적 체험들을 과시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잘 먹혀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침투한 거짓 사도들을 맞서 변호하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10-13장을 썼습니다. 이 편지는 바울의 다섯 번째 편지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두 가지 가능성(可能性)을 인정(認定)할 수밖에 없습니다. ①이 편지(便紙)가 나중에 바울의 네 번째 편지(便紙)인 고린도후서와 함께 하나가 되었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②바울이 편지를 쓰기로는 각각 다른 날에 기록했지만 고린도에 보내어질 때에는 함께 보내어졌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바울이 고린도후서 1-9장을 기록하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時間)이 경과(京科) 되었는데,
갑자기 고린도에 새로운 위기가 닥쳤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펜을 들었을 가능성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고린도후서 10-13장에서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을 향하여 다른 영을 가지고 다른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말합니다.(고후11:4). 바울은 사도의 표가 어떤 가문이나 예루살렘 총회의 위임이나 성령의,
놀라운 외적 체험(體驗)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선포(宣布)하는 중에 나타난 십자가(十字架)의 고난(苦難)이라고 말합니다.(고후11:23, 12:11).
거짓 사도(使徒)들과 세상적(世上的)인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영광(榮光)의 신학(神學)이 아니라 자신의 사도적 고난의 삶을 예로 들면서 십자가(十字架)의 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3.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들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해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삶은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고난의 삶입니다.
풍요로운 물질문명 속에서 바른 복음으로만 살려고 하면 얼마든지 고난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문제는 고난을 원치 않습니다. 복음(福音)을 위하여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고린도 후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받습니다. ①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우리들의 관심은 지금 어떠합니까?
교회의 문제와 아픔과 분쟁이 왜 생겼으며 이 같은 문제를 위해서 우리들은 얼마만큼 통회하고 자복하며 기도해 보았습니까? 분쟁을 일으키는 교회를 성도들에게 다 물어 보라. 한결같이 자신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운다고 합니다.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길이라면 자신을 포기합니다. 자신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교회 분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분쟁은 예수님이 오셔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어디 가는 것입니까? 지옥 갑니다. 끝까지 믿음을 버리고 고집을 부리다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습니다.
모두가 내가 잘못했다고 해야 합니다. 그런 교회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 가정은 행복해집니다. ②우리들의 연보 생활입니다. 즉 헌금 생활입니다. 물질이 있는 곳이 우리들의 마음이 가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있다면 하나님께 헌금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감사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봉사와 헌신과 물질을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③교회 안에 적그리스도의 침투입니다. 사탄의 침투를 허락하면 안 됩니다. 또한 빌미를 주면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전투하는 투쟁의 교회 성격입니다. 비진리와 사탄과 싸워 투쟁하는 교회로서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장하려면 모이면 성경읽고 기도하고 흩어지면 전도하는 성령님이 역사하는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하는 교회로서의 사명을 잘감당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주는 포도나무 나는 가지 글쓴이 : 이종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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