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에반젤(복음) 2019. 12. 12. 22:42



                 

내용 개요

시작하는 말(1:1-10)
사도로서의 바울의 권위(1:11-2:21)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3:1-4:31)
기독교인의 자유와 책임(5:1-6:10)
맺는 말(6:11-18)



갈라디아서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진리들 중 하나로서, 기독교의 자유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이며,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자유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다. 이것은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언제나 하나님의 행위의 결과이다. 이 자유로부터 기독교인들 간의 교제와 더 넓은 공동체 안에서, 책임감 있는 행동과 이기심 없는 행위가 나올 수 있다.

기록 장소와 기록 시기

바울이 어디에서 갈라디아서를 썼는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기록 시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바울과 바나바가 사도들을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던 이후인 것만은 확실한데, 이 여행은 갈라디아서 2:1-10에 언급되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여행을 사도행전 15:1-30의 사도 회의와 동일한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하면 사도 회의가 이방인들을 교회에서 인정하기 위해서 열렸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 갈라디아서는 에베소나 마게도냐에서 주후 56년 경에 쓰여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갈라디아서에 보도된 여행을 사도 회의보다 더 이른 바울의 예루살렘 방문, 즉 유대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구제금을 전달했던 방문(행 11:30; 12:25)과 동일시한다. 어떻든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가장 이른 편지들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신약 서신 개론을 보라).

독자들

갈라디아라고 하는 장소(1:2)는 로마의 행정구역, 혹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1 행정적으로 갈라디아는 로마 지역에 속한다. 바울은 그의 첫 번째 선교여행 기간에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 교회들을 세웠다(행 13:13-14:26). 2 그러나 인종적으로, 갈라디아는 갈리아 사람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의미하는 것으로, 로마 지역보다 훨씬 더 북쪽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이 편지의 목적지로는 전자에 더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바울이 갈리아인들이 거주했던 광범위한 지역에서 행한 일들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갈라디아서의 독자들은 바울 자신으로부터 복음을 처음 들었던 사람들이고, 바울은 그들에게 특별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특히 갈라디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가 그들에게 선포했던 참된 복음을 버릴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목적

「갈라디아서」는 매우 개인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기독교인의 믿음에 대해 체계적인 설명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다만 바울은 그의 독자들이 잘못된 복음 때문에 배교의 길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매우 열정적으로 노력한다. 갈라디아 교회에는 어떤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회의 사람들에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 율법에 복종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예를 들면, 그들은 기독교인의 믿음을 받아들인 이방인 남자는 모세의 율법에 요구된 대로 할례를 받아야만 하고, 회개한 모든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에게 금지된 음식들을 먹지 말아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러한 가르침은 기독교의 믿음을 뿌리째 흔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가르침은 믿음의 초점을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에서 일련의 규율에 복종하는 인간의 행위로 바꿔놓기 때문이다.
바울은 온갖 거친 말들을 사용하여서, 이 거짓 복음과 그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비난한다(1:6-9). 바울은 구원이란 인간의 죄에 의해서 깨어졌던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 행위의 근원과 원동력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인간은 구원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러므로 구원은 언제나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위이며, 결코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힘으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바울은 이것이 참으로 기독교인의 자유의 원천이며 근거라고 말한다. 기독교 안에서는 어떠한 종류의 율법주의도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바울과 율법

바울은 모세의 율법도 역시 하나님의 법이었음을 인정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했던 언약의 일부로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은 경건한 유대인의 자리에서 벗어난 일이 없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삶을 찾았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믿음으로 연합한 자들은 더 이상 율법에 종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종들이 아니라 자유인들이다. 그러므로 이방인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유대인과 같이 살 필요가 없다.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율법에 대한 복종 때문이 아니다(2:16,21; 3:2,5).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역사로부터 예를 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웠다. 이 때, 아브라함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할례 받기 전에, 이미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다(3:6-7). 이것은 율법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오래 전에 일어난 것이며,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430년이 지나서야 주어졌다(3:17-18). 그러므로 율법은 임시적으로만 유효한 것이었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올 때까지만, 즉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실현될 때까지만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3:19). 그리스도가 온 지금 율법은 우리에 대해서 더 이상 권위를 갖지 못한다(3:22-25).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율법에 복종하여 종이 될 것인가, 또는 그리스도에 복종하여 자유를 얻을 것인가(4:21-26,31).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5:14).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너희들을 자유롭게 하셨으니, 너희들은 더 이상 종노릇 하지 말라(5:1). 만약 너희들이 아직도 율법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으려고 한다면, 너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다(5:4). 그리스도와의 연합 속에서 유일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다(5:6).

바울의 적대자들

갈라디아서에는 바울과 그의 적대자들 간의 갈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바울은 그들을 바울 자신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는(1:9) “첩자”로 기술한다(2:4). 적대자들이 드러내 놓고 바울을 비난하는 두 가지의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은 진정한 사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말할 수 없었다.
2 복음에 대한 바울의 해석은 적절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의 복음은 가르침과 실천들이 추가됨으로써 보충되어야 했다.

 

바울도 역시 격렬하게 그들의 비난들을 거부한다. 적대자들을 비난하는 데 있어서나 독자들의 자각을 촉구하는 데 있어서, 바울은 다른 서신에 유례가 없이 매우 신랄하다.

적대자들의 주장에 대한 바울의 거부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바울의 적대자들이 누구였는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들은 유대인 기독교도들일 수도 있고, 기독교인이 아닌 유대인들일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유대교에 영향을 받은 이방인들일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그 지역 사람들일 수도 있으며, 야고보에 의해서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보냄을 받은 사람들(2:12)일 수도 있다. 바울의 관심은 주로 이방인들에게 유대적 규율을 부담시키려는 “유대화된 자들”에게 쏠려 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5:13부터), 바울은 방종으로 인해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그러므로 적대자들은 두 개의 그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우리는 물론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이제 막 성장하려고 하는 갈라디아 교회가 기독교에 대한 모든 것들을 치명적으로 오해할 위험성에 빠진 것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독자들을 바른 길로 돌려 놓는 것은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이다.

오늘을 위한 교훈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의 관계가 여전히 매우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대다수의 기독교인들에게 할례가 종교적으로 중요한 주제는 아니다. 그렇지만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주제는 훨씬 더 광범위하다. 바울이 원래 편지를 썼던 사람들만큼이나, 오늘날의 사람들도 죄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 오직 믿음을 통해서 받아들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물로서의 자유에 대한 바울의 메시지를 거듭 들을 필요가 있다.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이나 업적도 이에 덧붙여질 수 없다. 그러므로 바울의 메시지는 그의 처음 독자들에게만큼이나 우리에게도 소중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