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이 펴지지 않았다. 절대 절명의 순간에 누군가 나를 공중에서 낙아 챘다. 리더였다. 이 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악착같이 그에게 붙어 있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런 심정으로 본 장을 썼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시작할 때부터 복음에 동참한 헌신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중 유대교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이들을 얼마나 싫어했던지 개, 행악자, 손할례당(3:2)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에 의하여 이루어진 값진 구원을 할례의식을 첨가함으로 변질시키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정결한 빌립보 교인들이야 말로 참 할례당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할례와 율법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할례는 원문에 의하면 의미가 전혀 다릅니다. 전자는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며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하는 마음의 할례를 뜻하는 것이고, 후자는 육체를 신뢰하며 율법을 자랑하는 몸 할례를 뜻하는 것입니다. 후자를 이야기 하자면 실은 바울로 봐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그는 신분적으로는 태어난 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파 유대인으로서, 혈통적으로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요,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 흠이 없던 자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 모든 것을 다 손해로 보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 주님을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발견하는 곳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안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발견되는 곳도? 바로 그 안입니다. 다른 곳은 없습니다. 오직 그 곳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 그 안에서” “주 안에서”라는 말이 성경에 그렇게 많은 것입니다.
“그 안에서”란 무엇입니까?
우선 위치를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때의 위치는 물리적 좌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위치입니다. 그래서 위성 GPS에서 딸 수 없는 좌표입니다. 땅이 아닙니다. 육체가 아닙니다. 거룩한 영 안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 외에는 모두 거짓된 곳으로 다른 가르침이 있습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유대주의자들 외에 교인 행세를 하며 십자가를 반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복음을 갖고 있었는데 바울에 의하면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3:19) 그들은 복음을 위해 사는 것 같았지만 실은 자신들의 육체의 욕심을 위해 사는 자들이었고 그들은 당시 쾌락주의 같은 사상들을 갖고 있어서 이러한 부끄러운 것들을 자랑하는 자들이었고 하늘의 일들을 생각하지 않고 땅의 것들을 찾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란 십자가의 가르침이 있는 곳으로 거룩한 영이 있는 곳입니다. 우리도 교회당 안에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 밖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다음, 형태를 말 할 수 있습니다. 존재의 형식이라고 할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같이
죽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산 자들입니다. 그 후는? 그 안에 예수님이 사는 자들입니다. 이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연합! 예수님과 연합된 자들입니다. 이들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가리켜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3:12)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어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생의 대전환을 맞았고 영광된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모두 주님이 먼저 찾아와 줬기 때문입니다.. 자칫했으면 성도들을 핍박하다가 영원한 벌로 갈 뻔했는데……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지다가 누군가 그를 낙아 챈 것입니다. 그 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잡는 것입니다. 좇아 가는 것입니다. 어디 까지요? 주님의 죽으심을 본 받아 부활에 이르기까지……(3:10-11) 주님과 연합되기 위하여서는 먼저 그의 죽으심을 본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그의 삶의 목표는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그는 죽음을 마다 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줄을 알면서도 그의 발길이 계속 로마로 향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입니다. 죽어야 산다! “푯대를 향하여……좇아가노라”(3:14)는 그의 절박한 다른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 10:39) 보다 높은 삶을 위하여 바울은 보다 낮은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3장은 우리에게 도전합니다. 그 바울을 본받으라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학부모는 자녀가 학교에서 발견되기를 원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가정에서 만나기를 바랍니다. 직장인은 직장에서 찾아져야 합니다. “그 안에서”! 이것의 영적 순서는 사명보다 앞서 있습니다.
작성자 : 행복한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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