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헬라와 로마의 편지형식은 대개 서문,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현대의 논설문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서문은 다소 긴 편입니다. 특별히 답장의 경우 보낸 이에 대한 예절로 성의를 다 하여야 하기 때문에 관례상 장황합니다.
빌립보서의 서문도 긴 편입니다. 그러나 이 서신서는 인사치레라기 보다 서문서부터 글쓴이의 마음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다름아닌 사도 바울의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애뜻한 마음입니다. 오죽하면 우리 주님의 심장으로 사모한다고 하겠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 이 사실을 증명하시는 분이 글쎄 하나님이래요! 참 목자의 마음입니다. 혼이 담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 대한 기도제목입니다. 첫째, 교인들이 가장 좋은 것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우리 주님의 사랑을 알면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면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이 가장 좋은 것의 기준(바로미터)이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 주님이 오실 때까지 순전하고 흠이 없게 지내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신앙의 순결을 잃지 않고 의인으로서 열매 가득한 삶을 소망한다는 것입니다.
왜 우리 목사님께서는 이런 기도를 우리들에게 해 주시지 않을까요? 맨날 건강과 형통과 진학과 진급과 부자 되는 것과 축복받는 그런 것들만 기도 해 줄까요? 우리가 잘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신앙을 갖고 그런 기도를 원한다면 왜 그런 기도를 안 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그 교인들을 자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그것은 연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들이기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들도 교인들을 연모하는 마음이 있겠죠.
이 서신서만큼 바울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한 책도 없습니다.
어떤 경지까지? 예, 이제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 즉, 죽고 싶다 까지 바울은 솔직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대 사도 바울이! 이 정도까지? 그러나 아직은 아니랍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너희들 때문이랍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사명이라는 딱딱한 말로 대치 할 수 있습니다.
12절부터는 바울이 처한 형편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시위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럼 함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퍼져나갔습니다. 시위대 군인들에게도 전해 진 것입니다. (성 세바스찬도 시위대 장교이었다 함) 이런 소식은 고무적인 효과를 보였습니다. 많은 믿음의 식구들이 낙담하지 않고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된 것입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겁 없이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이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글쎄! 바울을 시기하여, 자세히 말하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전파방법에 대립하여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이방인들이나 유대인들이나 개방되어 있는 복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주의자들은 율법과 할례를 중시하는 유대교적 전통을 가진 닫혀있는 복음이었습니다. 이들은 바울이 갇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활동을 활기차게 하면 바울이 얼마나 속이 상할까? 라는 것도 계산하고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못 됐죠? 복음을 순수하게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나 바울은 사도 바울입니다. 이 모든 것을 수용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결국은 그리스도가 전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바울은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의 숲을 본 것입니다. 목회자답게 큰 틀에서 본 것입니다. 이 마음을 품으면 못 할 것이 없습니다. 복음 전하는 일을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틀린 것이다’ 아니라 ‘다를 뿐이다’를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석방될 것을 소망합니다. 그리고 석방될 것을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의 기도와 성령님의 도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이제 곧 석방된 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성령님이 도와주신다니까요! 그런데 이 말 다음에 이어진 그의 말을 봅시다. 우리들에게 영원히 기억되는 고백입니다. “살든지 죽던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 …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기독교인이라면 이 정도 차원까지 가야 합니다. 조그만 자리, 시시한 바램에 연연하여 감정이 죽 끊듯 하면 곤란합니다. 매일 드리는 기도제목이 소원성취이면 문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세상의 미련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육신을 입고 살아가야 하는지 아니면 주님 곁에 가야 하는 것인지 이 둘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합니다. 자신은 솔직히 말하면 후자가 훨 낫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믿는 자라면 죽음에 대하여 이런 정리를 미리 하여야 합니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죽음에 대하여 말한 것은 아닙니다. 사명자의 입장에서 죽음은 고민할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 남아 있어도 좋다고 합니다. 왜? 그 사명 때문에! “이제 주님 곁으로 가고 싶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내게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직 나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서문의 바울의 심정입니다. 위대한 사도 바울! 그에게 기쁨이 되는 빌립보 성도들! 두 주체의 아름다운 사연들이 다음으로 연결됩니다 작성자 : 행복한 순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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