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빌립보서 강해

빌립보서 2장– 구원받은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에반젤(복음) 2019. 12. 10. 19:27



         

절에서 교인이 예수 믿으라고 메가폰 전도를 한다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은 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생각하는 장입니다.

1장에서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우리는 파악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권면하고 싶은데 잘못하면 오해 받아 오히려 일을 그르칠 염려가 있다고 칩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예, 굉장히 조심스럽게 그러나 논리가 정연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칫 역효과가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는 성도들에게 바울은 이런 심정으로 이야기의 포문을 엽니다. 빌립보 성도들은 현재 서로 반목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그들에게 어떤 말을 하겠습니까? “싸우지 마! 성도들끼리 웬 쌈질이야! 창피하게 시리..” 이러겠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집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베푸신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러겠습니까? 바울이 선택한 내용이 오늘 본문 1:27-2:18입니다.

 

우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인답게 살아야겠죠?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 인답게 살아서 바울이 주변 사람들에게서 듣고 싶은 소문이 있답니다. “그들은 굳건히 믿음 위에 서서 고군분투하며 대적하는 자들을두려워하지 않고 고난도 마다하지 않으며 바울과 같이 똑 같은 믿음의 투쟁을 벌이고 있다.” (1:27-30)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면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특별히 바울은 이 생활을 싸움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싸움이라면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이 명령은 단순히 인격적으로 “그리스도 인답게 되라.” 가 아닙니다. 복음에 대한 대가도 각오하라 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믿는 특권도 있지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도 특권이라고 하였습니다. (29) 권리가 있다면 의무도 있다는 말입니다. 특권이라면 책임도 따른다는 말입니다. 교인들은 그 특권과 책임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입니다. 절에서 예수 믿으라고 확성기의 볼륨을 높이는 행위만이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아닙니다. 교회 앞마당에서 목탁을 두드리는 승려가 있다면 당신은 그 행위가 불교인의 합당한 생활이라고 하겠습니까? 구원에 상응하는 책임과 의무를 다 하라는 말이지요. 도덕적 의무를 포함함은 물론입니다.

 

다음,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자 입니다. 바울은 슬슬 본론으로 들어 갑니다.

 

이 글의 목적 중 하나는 사랑하는 이들이 예전처럼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아마 모르긴 몰라도 담임목사인 에바브르디도가 이를 위하여 별 방법을 다 해 보았을 것입니다. 권면도 해보고, 구슬러 보기고하고, 때로는 협박도……(교회에서 가끔 듣는 ‘다른 교회가면 사고 난다’가 이 말인가? ㅎㅎ) 그래도 안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로 왔겠지요.

바울도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그러다…… 겸손으로 하나가 되라는 말인데…… 이게 되나? 라는 생각이 불연 듯 들었나 봅니다. 이런 사람들 같았으면 여기까지 올 리가 없었겠지…… ㅉㅉ

그래서 극 처방을 씁니다. 그것이 바로 2:5절 이하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니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리스도의 비하입니다. 인류 최대의 역설입니다. 우주 최고의 시나리오입니다. 그는 가장 높은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낮은 사람이 되어 가장 비참하게 죽었으나 가장 영광스럽게 부활했습니다. 그분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스스로 낮추신 그 분! 그 분의 겸손한 마음! 그 겸손은 성 육신에 그치지 않고 십자가까지 나아가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는 그 마음! 그것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이 마음만 품는다면…… 세상에 원망과 시비가 있겠습니까?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겠습니까? 마음이 갈라지겠습니까? 사랑이 변하겠습니까? 우리 가정의 상비약이요, 우리 사회의 명약이요, 우리 국가의 비상약이요, 온 인류의 만병통치약입니다. 이 약을 매일 아침 한 알씩만 드십시오. 가정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이 처방약은 우리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섭취하여야 할 약입니다. 식사하기 전에 드세요~  

 

마지막으로 바울은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이루라고요? 그럼 우리가 받은 구원은 가짜? or 구원은 인간이 노력해서 쟁취하는 것인가요?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앞에 있는 수식어를 봅시다.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바울이 이렇게 아끼는 성도들에게 어찌 영적인 아비로서 허튼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구원에 대한 대가입니다. 그의 신학은 2,000년간 신학자들이 연구해도 끝이 없는 신학입니다. 그의 영성은 삼층 천까지 다녀온 체험을 갖고 있는 영성입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하였다면 우리는 구원에 대하여 조금 더 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믿었을 때에 구원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우리는 죄사 함을 받았습니다. (칭의) 그리고 나서 우리는 그 분의 뜻에 따라 성스러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화) 그러면 우리의 구원은 언제 완성될까요? 예, 우리 하나님 앞에서 입니다. 그때 구원은 완전히 성취됩니다. (영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 완전히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정이지요. 그렇다면 구원을 확보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 적극적으로 그 구원을 이루면서 살아야 하지요. 부단히 성화를 이루며 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영원한 선생님인 바울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살아 있을 때에 열심히 이루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몸에 성화의 흔적이 없다면 어찌 영화의 단계로 나갈 수 있겠습니까?

 

알 것 같은데, 육신인지라 자신이 없다고요? 걱정 마십시오! 실은 이러한 것도 우리들이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하십니다. 그래서 다음 절이 있습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리니”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예, 힘 빼고 있으면 됩니다. 제발 자기 주장 좀 하지 마십시오. 자신만 옳죠? 자신의 의지 좀 꺾으십시오. 성화로 나아 가는데 최고로 경계할 대상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 분이 하시게끔 순종하십시오. 늘 그분을 경외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십시오. 그것이 비결이라면 비결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구원에 대하여 그 만큼 아는 사람이 인류 역사상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언제? 어디에서요? 바로 오늘 여기에서!” 실현되어야 할 구원의 과제입니다. 숙제는 당신이 하는 것입니다. 숙제를 하고 나면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작성자 : 행복한 순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