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14장 신앙과 종교심의 차이 (찬 349)
1.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진치고 있는 사울의 군대는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600명이 고작이었고(1~3) 앞에서 묘사한대로 해변에 모래같이 허다한 블레셋 군대는 믹마스에 진치고 있었다. 사울은 이미 블레셋 진영이 있는 믹마스에 인접한(불과 2~3 킬로미터 떨어진) 게바에서 물러나 기브아로 후퇴하였던 것 같다. 이때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알리지 않은 채, 자기 무기를 든 군인과 함께 적진을 향해 올라가는 일을 감행했다(1). 이 일은 무모한 모험이 아니라, 믿음의 행위였다는 몇 가지 증거들이 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심으로 이 일을 행했는데, 이것은 후에 우리가 보게 될 다윗이 골리앗을 대적하여 싸운 이야기의 예고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할례받지 않은 백성인 골리앗이 하나님의 백성을 모욕하는 것을 본 다윗은, 골리앗이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함으로써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분개하였는데(삼상 17:16,36), 요나단 역시 할례받지 않은 백성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할 수 없다고 느꼈다(6). 둘째로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여 승리를 주실 것을 믿었던 다윗처럼(삼상 17:34~36), 요나단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일하실 것을 믿었다(6). 이뿐 아니라 요나단은 충분히 신중하게 행동했다. 블레셋 군대가 자기를 보고 ‘올라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싸인으로 알고 올라가 싸우겠다고 생각했다(9~10). 요나단의 무기를 든 군인 역시 자기 주군과 같이 믿음의 용기를 가지고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7). 블레셋 진영과 이스라엘의 진영 사이가 멀지는 않았지만, 계곡이 놓여있었기 때문에 블레셋 진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험한 바위들을 손 발로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4,13). 요나단은 이런 장애물 때문에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부하와 함께 반나절 동안 이십 명의 블레셋 군인들을 쳐죽였다(14). 요나단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진영에 큰 일을 만들어내셨다. 블레셋 진영 전체가 공포에 크게 떨기 시작했다(15). 그리고 땅이 진동했는데 이는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으로 개입하셨음을 보여준다.
2. 한편 기브아로 후퇴해서 영문을 모르던 사울은 파수꾼을 통해서 블레셋 군대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자기 군대에서 빠져나간 사람을 점호하게 되고 요나단이 무기 든 자와 함께 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제사장 아히야에게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오라고 명한다(18). ‘하나님의 궤’를 70인경은 에봇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 번역이 더 원본에 맞는 번역일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궤는 당시 기럇여아림에 있었고 아히야가 에봇을 입고 사울의 군대와 함께 있었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3). 결국 사울은 제사장의 옷 에봇과 우림과 둠밈을 통해 이 전쟁에 나가야 하는지를 물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블레셋 진영의 소동이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본 사울은 제사장에게 ‘됐다’고 말하고는 전투에 돌입하기로 결정한다(19). 이때 블레셋 군대에 붙어 매국 행위를 하던 히브리 사람들까지도 사울의 군대와 합하여 싸우고 숨었던 사람들도 나와서 이 싸움에 합류함으로 큰 승리를 얻게 된다(21~23). 하지만 본문은 사울의 불신앙을 지적한다. 사울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군사들에게 승리하기까지 아무 것도 먹지 말라는 맹세를 하게 하였다(24). 사울이 왜 이런 비상식적 맹세를 하게 하였을까? 군인들이 먹지 않고서 어떻게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사울이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인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제사장 아히야를 불러 하나님의 뜻을 물으려 하다가 전세가 유리해지는 것을 보고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지 않고 전쟁에 나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여전히 있는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극단적 맹세를 하였다. 종교인은 불안감을 이기기 위해서, 그리고 승리와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극단적 맹세를 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안에 없는 확신을 만들어내는 종교적 방식이다. 이 맹세는 예상치 않은 나쁜 결과들을 초래했다. 첫째는 군인들이 먹지 못함으로 승리 후에 성급하게 고기를 먹음으로써, 피를 다 빼지 않은 고기를 먹음으로써 모세의 율법을 범한 일이다(32; 레 19:26; 17:11). 여전히 종교적인 사울은 왜 믿음 없이 행했느냐고 군인들을 책망한다(33~34). 사울은 왜 이런 일이 초래되었는지 자신의 잘못을 보지 못한다. 둘째는 사울의 아들이자 이 날의 전쟁 영웅인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의 맹세 내용을 알지 못해서 전투 중에 숲의 꿀을 지팡이에 찍어서 먹은 일이었다. 사울은 여기서도 죄를 지은 자를 찾기 위해서 제비를 뽑게 되는데 다시 무모한 말을 한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죄가) 내 아들 요나단에게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죽으리라(39).” 결국 요나단이 걸렸고 사울은 특유의 종교적 무모함(이것은 신앙이 아니다)으로 전쟁 영웅인 아들을 죽이려 하지만, 온 군대의 강력한 반대에 막혀서 그 일을 행하지 못한다(45). 사울의 종교적 맹세가 초래한 세번째 나쁜 결과는 패주하는 블레셋 군대를 다 치지 못한 일이다(36~37,46). 하나님은 사울이 패주하는 블레셋 군대를 쫓아 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것은 이 맹세의 문제를 다루시기 위함이었다. 사울은 이 전쟁에서 처음으로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고 기록된다(35). 이것은 사울이 얼마나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지 않은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사울은 이후에도 주변의 나라들을 물리쳤다(47~48). 비록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려 다른 계획을 이루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백성과 사울을 향해서 은혜를 베풀고 계셨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은혜에 참된 회개로 반응하여 하나님께 나아갔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3. 신앙과 종교심의 차이는 무엇인가? 신앙의 용기와 종교적 무모함은 어떻게 다른가? 본문은 요나단과 그 아버지 사울을 대조함으로써 이 차이를 보여준다. 겉으로는 차이가 미미할 뿐 아니라, 도리어 아버지 사울의 무모한 종교심은 엄청난 신앙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결코 무모하거나 몰상식적이지 않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이 모욕당하는 것에 분개하지만, 종교심은 자기 이름에 모든 것을 건다. 참된 신앙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맹세를 통해 하나님과 거래를 하려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참된 신앙은 “죽으면 죽으리이다”하는 태도로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지, 승리와 성공을 얻어내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 아니다. 참된 신앙은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지만, 종교심은 결과에 집착하고 부심한다. 당신은 참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는가, 아니면 종교심으로 섬기는가? 당신의 모습은 사울에 가까운가, 요나단에 가까운가?
4. “하나님 아버지, 저희가 불안함을 이기고 성공과 성취를 얻기 위해서 하나님께 종교심으로 반응하는 인생이 되지 않게 하시고, 자기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용맹하여 힘을 발한다고 한 말씀대로(단 11:32) 하나님을 아는 지식 위에 서서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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