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
1.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예수 그리스도 (1:1-3:22)
인자
일곱 교회
2. 하늘 나라의 환상과 일곱 인 (4:1-7:17)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 주위 사람들의 경배
주의 손에 들려 있는 봉해진 책
인을 하나씩 떼기 시작
3. 일곱 나팔 -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일곱 나팔 (8:1-11:19)
교회에 대해서 일어날 사건들
작은 책을 가진 천사
두 증인
최후심판에 관한 분명한 내용
4. 그리스도 대 용과 그 추종자들의 멸망 - 용과 그 추종자로부터 핍박받는 여인과 남자 아이 (12:1-14:20)
구세주의 탄생에 대한 비유
바다에서 나온 짐승
큰 음녀 바벨론
이 단원도 역시 그리스도의 재림을 감동적으로 말하며 끝맺는다.
5. 일곱 대접 (15:1-16:21)
진노의 대접
여기서도 최후의 심판과 그것과 관련하여 일어날 사건들
6. 바벨론의 멸망 및 짐승과 거짓 선지자의 징벌 - 용과 동맹자들의 멸망 (18:1-19:21)
바벨론의 멸망
짐승과 거짓선지자에게 내리는 징벌
심판하러 오시는 주님
7. 대종말 -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승리 (20:1-22:21)
마귀의 최후 운명에 관한 것
그리스도의 심판의 재림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 계시록은 일곱 단원으로 나뉘어 있고 이 일곱 단원이 서로 같은 목적과 병행관계에 있다.
각 단원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세대를 포함한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시간의 연속으로 보기보다는 반복적 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제 1과 요한계시록에 관한 올바른 관점
계시록 1: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3)
성도들에게 “요한계시록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하고 질문해 보십시오.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이야기 해 보십시오. 아마도 ‘무섭다’, ‘어렵다’, ‘잘못 이해할까봐 걱정된다’ 등등의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이런 선입관이 우리로 하여금 요한계시록을 멀리하게 만든다면 우리는 다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첫 시간에 요한계시록에 관한 지금까지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혹시 잘못 생각한 것이 있다면 고쳐야 할 것입니다.
1.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1:1)
교회를 세우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교회는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산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계시해 준 것이 요한계시록입니다. 본서는 분명 ‘성도들을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기쁨으로 받아야 할 것입니다. 본서에 대하여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마십시오.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분이 주신 아주 좋은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은혜 받을 것을 기대하면서 읽고 배워야 할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을 어려워하지 마십시오.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그 종들에게 열어서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과 능력은 부족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능히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님이 조명해주시므로 잘 깨달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전체적으로는 쉽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부분적 어려움은 요한계시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모든 성경에도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쉽다고 여기거나 친숙하게 여기는 성경 중에도 역시 어려운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본서는 마태복음부터 유다서까지 말씀하신 내용과 동일합니다. 구약성경과도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서를 잘못 이해할까봐 지나치게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해석한 내용이 다른 성경에서 가르친 내용과 일치하면 됩니다. 본서가 성경의 마지막에 위치한다는 것 때문에 다른 복음서나 서신서보다 덜 중요하거나 더 중요하다고 볼 것이 아닙니다. 신ㆍ구약성경을 종합하여 하나님의 특별계시를 마무리하기에 합당한 책으로 이해하면 정확할 것입니다.
2. 요한계시록은 성도들에게 복된 말씀입니다(1:3)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곧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니 그 자체가 복입니다. 또한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3)다고 하셨으니 복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말씀을 좋아하고 사모해야 할 것입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도 이 말씀을 복된 말씀으로 여겨 공예배시간에 읽고 듣곤 하였습니다. 예배의 가장 귀중한 순서로 삼았습니다. 여기서 ‘읽는 자’는 예배 중 공적으로 낭독하는 사람이고, ‘듣는 자들’은 예배에 참여하고 있는 회중입니다. 본서는 읽고 들으면 복입니다. 지키면 복입니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을 복된 말씀으로 여기십시오. 이제부터는 요한계시록에 큰 기대를 걸어 보십시오. 이제부터는 가장 친숙한 책이 되도록 해보십시다.
요한계시록은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밝고 환한 소망을 줍니다. 믿음의 확신을 줍니다. 이단(異端)을 잘 분별할 수 있게 해 줍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합니다. 주님과 교회를 더욱 사랑하게 해줍니다. 혹시 그동안 본서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견을 가졌었다면 다 버리십시오. 자! 이제부터 우리 주님이 주신 복된 계시의 말씀을 기대감을 가지고 일년동안 읽고 듣고 배우며 또는 암송도 하면서 지켜 가십시다.
요한계시록을 잘 배워서 전보다 더욱 충성되게 주님을 섬기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길 축원합니다.
제 2과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
계시록 1:4-5중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4-5중)
1.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합니다.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들을 지교회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 지역 전체 교회, 곧 노회로 보는 것이 개혁주의 입장입니다. 웨스트민스터 교회정치 ‘노회에 대하여’를 참조하십시오. 요한계시록은 각 시대의 모든 교회, 지상의 모든 보편 교회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본서는 사도 요한의 동시대 교회에게 가장 먼저 주어졌고, 동시에 계속 세워질 주님의 교회를 향하여 주어진 말씀입니다.
2. 삼위일체 하나님(1:4, 5)
모든 교회들에게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항상 같이 일하십니다. 창세 이후로 모든 역사에 삼위일체 하나님은 동시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성경에서 어느 한 위가 부각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성부는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 역사 하시고, 성자는 성부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 하시는’ 이런 구조로 이해해야 합니다.
1)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
이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로 이해하기 쉽지만, 오히려 성부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왜냐하면 본서 전체에서 그렇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더라”
계 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계 11:17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 큰 권능을 가지시고 왕노릇하시도다”
계 16:5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시는 이’는, 전 인류 역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활동하시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시는 분으로 현재상황을 뒤엎으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시는 새 창조의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계 21:5-6에서 보좌에 앉으신 이가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말씀하십니다.
2) 그 보좌 앞에 일곱 영
이 표현은 성령 하나님을 지칭합니다. ‘일곱’이라는 숫자 때문에 오해되기 쉬운데 이 표현은 스가랴서의 내용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성령님을,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슥 4:10)고 표현하였습니다. 또 스가랴 4:2에서는 성령님을 “순금등대의 일곱 등잔”으로 표현합니다. 본서에서 이런 표현이 3:1과 4:5과 5:6에도 나오는데 거기서도 역시 성령님을 지칭합니다.
왜 성령님을 지칭하면서 일곱이라는 형용을 하였습니까? 완전하신 성령님이심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구약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11:2에서 성령님을 여호와의 신, 지혜와 총명의 신, 모략과 재능의 신,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의 일곱 가지 속성으로 소개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 목적과 뜻을 친히 이루신 분이시므로 그분의 증언은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먼저 난 자’로 만드신 것과 같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나신 자’로 만드셨습니다. 이 ‘먼저 난 자’라는 통칭이 메시아의 별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일어나사 부활의 첫 열매(고전 15:20)가 되셨고 첫 아들의 역할을 감당하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 위에’ 뿐만 아니라 ‘온 인류 위에도’ 머리되심을 나타내는 뜻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부활로 말미암아 만주의 주요 만왕의 왕이심을 온 우주적으로 드러내신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궁극적인 통치자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늘에서 삼직으로 일하고 계십니다. ‘충성된 증인’은 선지자직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는 제사장직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은 왕직을 나타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23문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속자로서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을 행하시되 낮아지고 높아지신 두 지위에서 하십니다"라는 고백을 기억합시다.
3.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1:5)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는 단순한 인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축복은 계시록 22:21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진정한 ‘은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은혜란 인간에게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호의를 뜻합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값없이, 조건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총애입니다. 이런 호의, 총애를 우리가 받았고 또한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진정한 ‘평강’도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평강은 하나님의 호의가 베풀어진 그 결과로 나타나는 영적인 행복입니다. 은혜의 결과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회복된 화목을 뜻합니다. 이 화목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화목할 수 있고 자연과도 화목할 수 있습니다. 이 화목 때문에 우리 영혼이 평안을 누리는 것입니다. 찬송 469장의 후렴의 영어가사는 ♪평화 평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오는 평화♬ 입니다.
민수기 6:24-26에서 제사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하는 내용과 같습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옛날이나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전 인류 역사에 있어서 진정한 은혜와 평강은 오직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로부터 만 받을 수 있습니다.
제 3과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계시록 1:5하-6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6)
이 땅에 오셔서 삼직(三職)으로 구속을 완성하셨던 주님은 승천하셔서 지금도 삼직으로 일을 하십니다. 그 세 직분으로 하시는 일은 지상에서나 하늘에서나 우리(=교회)를 사랑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립시다.
1.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림(1:5하, 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가 섬길 수 있는 제사장들을 만드셨습니다. 동시에 메시아에 의해 통치되는 왕국의 백성으로서 그 통치에 동참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서 동시에 왕으로서 다스리는, 왕같은 제사장들로 삼으셨습니다(벧전 2:9; 출 19:5-6).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키신 일이 얼마나 크신 사랑입니까! 주께서 우리를 ‘왕같은 제사장’ 삼으셨으니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 영광과 찬송과 경배를 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까닭에 찬미를 드립니다. 여기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삼위일체 중 한 위께 영광 돌리는 것은 곧 삼위일체께 드리는 영광과 같습니다. 본서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리는 빛이 환하게 드러납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환희로 가득합니다.
1) 계시록 4:8-11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8).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심을 찬송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밤낮 쉬지 않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찬양합니다. 다시 오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며 그것 때문에 찬송합니다. 이것을 9절에서 정리하기를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렸다고 합니다.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9).
이어서 장로들이 하는 일이 있습니다. 24장로들은 구약의 12지파와 신약의 12사도로 상징되는 교회의 대표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들 즉 모든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이십 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10-11).
보좌에 앉으신 주님께, 세세토록 사시는 주님께 경배합니다. 자기의 면류관을 던집니다. 만왕의 왕, 만유의 주가 너무나 위대하시기에 면류관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고 찬송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만물을 그 뜻대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영광과 경배를 드리라’고 천사들이 큰 소리로 외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14:7).
2) 계시록 5:9-14
네 생물과 24 장로들이 어린양 앞에 새 노래를 드립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9-10). 어린양이 찬송 받으실 분이십니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신 분으로 호칭됩니다. 일찍 죽임을 당하시고 사람들을 피로 사신 분이십니다. 그 산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리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이십니다. 그들을 땅에서 왕노릇 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찬양합니다.
그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수만 수천의 천사들이 둘러서서 또 찬송으로 화답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우하고 모셔야 하는지 잘 나타납니다. 이런 것들은 오직 주님께만 돌려야 할 것들입니다.
그 다음에 하늘 위에서 땅위에서 땅 아래에서 바다 위에서 또 그 가운데 만물이 즉 모든 피조물들이 찬송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13). 네 생물이 아멘하고 장로들이 엎드려 경배합니다.
3) 계시록 7:9-12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하니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 지로다 아멘”(9-12). 구원을 찬송합니다. 그 구원이 성부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칭송되고 있습니다.
4) 계시록 11:13-18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에게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13하-18). 이 찬송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큰 권능으로 왕노릇 하심을 찬양합니다. 그 왕의 역할 중에 심판하시는 것을 찬송합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고 주님께 분노하며 대적하며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심을 찬송합니다.
5) 계시록 14:3-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르니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십 사만 사천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더라”(3). 주를 향한 찬송을 아무나 배울 수 있고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찬송은 오직 구속함을 얻은 이들만이 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이 찬송 소리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과도 같은데 나에게 들리는 소리는 거문고 타는 자들의 그 거문고 타는 것 같더라”(14:2). 여러분에게는 이 찬송소리가 어떻게 들립니까?
6) 계시록 15:3-4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2), 하프를 가지고 찬송합니다. 이 악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찬송을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라고 칭합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3-4). 주님이 하신 일을 인하여 찬양합니다. 마땅히 영화롭게 해야 할 분으로 찬송합니다. 유일하게 거룩하신 분이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만국의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이십니다.
7) 계시록 19:1-8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같은 것이 있어 가로되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 하고 두 번째 가로되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또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여 가로되 아멘 할렐루야 하니 보좌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아서 가로되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1-8).
천천히 읽으면서 뜻을 생각하면 우리 심령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합니다.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환희와 기쁨의 찬송으로 충만한 책입니다. 위에서 읽었던 것들만 가지고 찬송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찬송은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을 기리는 것입니다. 창조주이시고 영원하시고 구속주이신 만왕의 왕, 영광과 존귀과 거룩하심을 기리는 것입니다. 이 찬송은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드리는 것입니다.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속받은 자들만, 곧 교회만의 특권입니다. 찬송은 예배와 함께 드려집니다. 예배성을 띤 것이 찬송입니다. 그래서 가사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약된 ‘찬송의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4과 요한계시록의 주제 : 기독론
계시록 1:7-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8)
주를 향한 찬송에 이어서 재림하시는 주님을 선포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장과 확인을 해 주십니다. 이것은 본서의 주제가 기독론 중심임을 보여줍니다.
1.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1:7)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는 구약성경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다니엘서의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단 7:13)와 스가랴서의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슥 12:10)의 말씀을 합하여 인용한 것입니다. 이미 마태복음에서도 똑같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의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막 13:26; 눅 21:27).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구약과 신약 성경의 예언을 완전하게 성취하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그러하리니 아멘”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너무나 확실한 사건입니다. 구름과 함께 영광스럽게 오실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의 눈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지금은 믿는 성도들만이 인식하고 고백하고 있지만, 그때에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분이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를 찌른 자들” 곧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배척한 자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이 나타나는 그 때에는 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애곡을 할 것입니다. 회개하는 애곡자들이 있을 것이고 소망없이 절망의 애곡을 하는 자들도 있게 될 것입니다. 그들에게 임할 그리스도의 심판이 지극히 무서운 심판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2. 알파와 오메가요 전능하신 주 하나님(1:8)
1) 알파와 오메가이신 주 하나님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의 처음과 마지막 철자입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철자를 포함합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모든 것을 대표합니다. 알파와 오메가는 영원하고 무궁한 초월자이십니다.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처음과 마지막, 그리고 그 사이에 일어나는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표현은 구약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인 여호와 이스라엘의 구속자인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사 44:6). 이런 하나님의 속성이 본서에 몇 차례 나옵니다.
계 1: 17하반절 -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계 21: 6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계 22:13 -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이런 하나님의 속성이 예수 그리스도께 적용되어 표현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1:17).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완전하고 영원한 ‘계시’가 되심을 나타내십니다.
요한계시록 전체 내용을 한 마디로 말해야 할 경우, 흔히들 생각하듯이 ‘종말론’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밝히 드러나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곧 ‘기독론’입니다. 종말론은 기독론안에 포함된 일부로 보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기독론의 관점에서 본서를 다시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도 다른 성경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계시된’ 성경입니다.
2) 전능하신 주 하나님
‘전능한 자’라는 말씀이 신약성경에 10회 나옵니다. 그 중에 9회가 본서에 나타납니다(4:8; 11:17; 15:3; 16:7,14; 19:6,15; 21:22). 성도들이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기뻐합니다. 그래서 찬송할 때마다 기립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께서 전능하시니 얼마나 든든하며 위로가 됩니까! 사랑만 있고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능력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폭군이 되겠지요. 우리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실 뿐만 아니라 전능하신 주님이십니다. 전능하시므로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합니다. 전능하시므로 영원히 다스리시는 왕이고 상을 베푸시며 의로운 심판을 하십니다.
♪거룩 거룩 거룩 전능하신 주여 이른 아침 우리 주를 찬송합니다♬
제 5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도 요한
계시록 1:9-11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튼 음성을 들으니”(10)
1. 사도 요한의 자기 소개(1:9)
사도 요한이 자신을 “나는 너희 형제”라고 소개합니다. 일곱 도시들의 교회와 자신을 한 지체로 여기고 있습니다. ‘형제’라는 칭호로 관심이나 모든 면에서 유기적 공동체임을 확인시킵니다. 그는 사도와 장로들이 일반 성도들과 나눈 공동의 주제를 만족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자신을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고난을 함께 나눕니다. 고난은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 질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환난은 당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지 않습니까! 성도가 당하는 모든 환난은 예수 안에서의 경험인 것입니다. 환난이란, 예수님이 친히 우리 위해 당하신 모든 고난을 생생하게 기억나도록 해 주는 역할도 합니다. 그런 환난을 성도들은 참아 냅니다. 주와 더불어 왕노릇 할 것을 소망하면서 견디어 갑니다.
참음은 인내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참음은 견디어 내는 힘과 포기되지 않는 소망과 끝까지 이겨나가려는 결단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니라”(롬 5:3-4). 참음은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는 성도들의 미덕입니다. 야고보서에서 ‘참음’의 궁극적인 목적은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고 가르칩니다. ‘참음’은 환난 당한 자들을 ‘나라’의 백성으로 변화시킵니다. 이런 변화는 예수님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 때문에 밧모섬에 있는 자”라고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는 같은 것을 다른 각도에서 표현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밧모섬에 유배되었습니다. 밧모섬은 길이 16km 넓이 9km의 섬으로 에베소 앞에 있고, 밀레도로부터 약 60km 거리에 있는 섬입니다. 요한은 도미티안 황제 때(A.D. 81-96) 밧모섬에 유배되어 광산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도미티안이 죽었을 때 에베소 귀환이 허락되었다고 합니다.
2. 성령의 감동을 받는 사도 요한(1:10, 11)
1) 언제 감동을 받았는가?
주의 날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주일을 가리키는 최초의 표현이 여기서 나옵니다. 주의 날, 즉 일 주간의 첫날은 성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기념하며 예배드리는 날입니다. 이 날은 사도시대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날이었습니다(고전 16:2). 은혜와 축복이 가장 많은 날입니다. 이 날에 성도들이 하늘 안식을 미리 맛봅니다. 이 날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주님 오실 때까지 이날 지키리로다♪
요한은 비록 밧모섬에 유배상태이지만 ‘주의 날’에 살아 계신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공간적으로는 밧모섬에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성령 안에’ 있었습니다. 육적으로는 고난에 처해 있었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입니다.
2) 무엇을 들었는가?
‘나팔 같은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나팔 같은 큰 음성’은 예수님의 음성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책이므로 그 모습도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5장에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으로, 19장에는 ‘백마 탄 자’로 나타나고, 여기서는 ‘많은 물소리 같은 큰 음성’을 발하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이 ‘큰 음성’은 그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의 중요성과 엄숙성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절대적으로 경청하고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할 것을 요구하는 ‘큰 음성’입니다.
3) 큰 음성의 내용은 무엇인가?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신 큰 음성이었습니다. 여기 “너 보는 것”은 계시록의 내용 전체를 말합니다. 이 일곱 교회들은 전체 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입니다. 계시록은 일차적으로는 당대의 모든 교회에게, 더 나아가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교회를 향하여 보내지는 주님의 계시입니다. 2-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들의 형편은 모든 보편의 교회에 해당되는 문제들인 것입니다. 교회가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 교회가 실패하여 책망 받거나 잘하여 칭찬 받거나 또는 교회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며 어디로 가야할지, 그리고 교회가 무엇을 경계해야 하고 어떤 위로와 권면을 들어야 하는지를 종합적으로 알 수 있는 내용들을, 교회의 머리요 주인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편의 모든 교회에 알려주시는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입니다.
제 6과 인자 같은 이
계시록 1:12-20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13)
1. 인자 같은 이(1:13)
사도 요한은 ‘큰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일곱 촛대 사이의 “인자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 그 모습이 다니엘서 7:13-14과 유사합니다.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인자 같은 이가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시고 그 나라의 권세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성도들이 인자 같은 이로 말미암아 그 나라를 얻게 되고 그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인자’라는 칭호를 자신을 지칭하여 사용하셨습니다. 인자 같은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자 같은 이’이신 예수님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습니다(마 9:6). 이렇게 ‘인자’는 굉장한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지극히 낮아지신 분이십니다(마 12:40). 세리와 죄인을 구원하시는 아주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마 11:19). 인자는 세상 끝에 의인들이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같이 빛나게 하실 분이십니다. 또한 천사를 명하여 불법 행하는 자들을 풀무불에 던져 넣으실 분이십니다. 이렇게 인자란 말은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쓰신 독특한 칭호입니다. 인자란 큰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일하시는 분이신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는 칭호입니다.
2. 인자 같은 이의 모습(1:13-16)
그분이 입은 옷은 가슴에 금띠를 띠고 발에 끌리는 옷이었습니다. 가슴의 금띠는 왕의 옷이고, 발에 끌리는 옷은 제사장의 옷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 겸 왕이신 그리스도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분의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고 흰 눈과 같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결이 나타납니다. 그분의 눈은 불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찰력이 드러납니다. 무엇이든지 다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분이십니다. 그 발은 풀무에 단련된 주석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광과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습니다. 온 세계를 통치하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표현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에스겔 43:2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많은 물소리와 같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오른 손에 일곱 별을 가지고 있습니다. 별은 교회의 사자라고(1:20) 했으니 교회를 특별하게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교회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힘있게 일하시는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 입에서 좌우에 날 선 검이 나옵니다. 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 얼마나 권위가 있고 예리한지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심령골수를 쪼개며 죄악을 예리하게 판단합니다. 이 말씀이 믿는 사람을 구원하기도 하며,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빛은 생명의 수여자이심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외모를 상징으로 설명하는 것은 그분의 신비한 존재를 생생하게 그리고 극적으로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위의 각각의 표현을 하나 하나 일대일로 맞추려고 하지 마시고 전체적으로 보십시오. 다니엘 7:13-14의 말씀처럼,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분이 바로 이런 주님이십니다. 얼마나 든든하고 감사하며 감격이 됩니까! 더욱 핍박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진 당시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우리가 위로 받고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우리 주님을 더욱 밝히 아는 것입니다. 주님을 알면 알수록 위로가 고난보다 더욱 진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만큼 교회의 사명은 핍박보다 강렬해질 수 있습니다.
3. 인자 같은 이를 보고 나서(1:17-20)
사도 요한이 ‘인자 같은 이’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나서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하신 주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죄악성과 연약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분이 오른손을 요한에게 얹고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이 찾아오신 것은 겁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로와 격려, 약속과 확신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하는 말일세♪
계속해서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라고 하시면서 자신의 신분을 밝히십니다. 이 세상 사람 중에 어느 누가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생명을 소유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음부의 세력을 체험하셨습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고 영원히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사망과 음부의 문을 열고 닫을 권세를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활시키시면서 “사망과 음부의 문을 열고 닫을 권세”를 주셨습니다. ‘내가 너를 살리리니 너는 네 백성을 누구든지 다 살리라’고 그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결코 죽지 않습니다(요 11:26). 성도의 승리를 보장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은 백성들의 기쁨이고 구원이고 소망입니다. 이런 분이 교회가운데 계시면서 교회의 사역자들을 붙잡고 백성가운데 거하십니다. 이런 분이 교회를 세우시고 양육하십니다.
“그러므로 너의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 손에 있는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여기서 “네 본 것”은 1장의 그리스도의 환상이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의 교회의 현상이며, “장자 될 일”은 4장 이후 2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교회가운데 거하시는 만왕의 왕, 교회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만주의 주를 알려주시고 보여주시고 읽게 하시므로 교회가 어떠한 환난도 견뎌내면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들이 2-3장에서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에베소 교회는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이”(2:1)로, 서머나 교회는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2:8)로, 버가모 교회에는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2:12)로, 두아디라 교회는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같은 하나님의 아들”(2:18)로, 사데 교회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3:1)로, 빌라델비아 교회는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3:7)로,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시작이신 이”(3:14)로 다시 표현됩니다. 그러므로 상징으로 표현된 그리스도의 속성들은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제 7과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2:1-7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
에베소는 당시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구 도시였습니다. 육로로도 주변의 주요 도시들을 거의 다 연결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상업이 활발하고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이 도시의 유명한 아데미 여신에 대하여 사도행전 17장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신전과 관련된 우상과 음란이 대단했습니다. 이런 부유와 도덕적 타락과 우상숭배의 도시 속에서도 에베소 교회는 정통 교리를 지켰고, 열심이 있었고, 시종일관 주님을 위하여 참는 인내가 있는 교회였습니다. 사도 요한이 얼마 전까지 그곳에서 목회를 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1. 에베소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2:1-3)
오른 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다니시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1장에서 촛대는 교회를 의미한다고 해석해 주셨습니다(1:20).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가운데 거하시는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교회를 보호하시고 그 교회를 세워 가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들은 교회를 더 잘 세우기 위해서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실상을 잘 알고 계십니다. 교회의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아십니다. 참고 견디고 부지런히 수고한 것을 다 아십니다. 보이지 않는 은밀한 부분까지 아십니다. 교회가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아십니다. 자칭 사도라 하는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드러낸 것을 아십니다. 그것을 칭찬하십니다.
이런 일은 하나의 지교회가 한 일이라기 보다는 에베소 도시의 모든 교회들로 구성된 에베소 노회가 한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니골라당을 미워한 것도 마찬가지로 노회가 한 일입니다.
2. 사랑의 책망(2:4)
이어서 책망도 하십니다. 책망은 그만큼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잘 아시므로 교회의 잘하는 점을 인정해 주시고 교회의 잘못이나 부족을 책망하십니다.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무엇을 책망하셨습니까?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을 책망합니다.
처음 사랑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본 받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본 받아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교회의 사명을 다 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랑이 없다면 교회는 더 이상 교회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사랑이시고 주님이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교회가 거짓 사도들을 드러내고,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고, 진리를 드러내는 일을 잘 했습니다. 참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처음 사랑까지 잃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 와서 복음을 전하면 ‘그가 참 전도자인가 거짓사도인가 살피기에 급급하다보니 점점 냉랭해지고 은혜 받기가 어려워집니다. 심지어 같은 성도끼리도 저 사람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인가 할 정도로 사랑이 식어집니다. 진정한 진리는 뜨거운 사랑을 수반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진리 위에 선 사랑입니다. 주의 사랑을 실천합시다.
3. 권면과 인도(2:5)
책망으로 끝나지 않고 권면과 인도를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라’. 그리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그렇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 그 죄나 부족의 원인을 생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죄는 점점 커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 첫 출발점부터 헤아리고 근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헤아리면서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하면 용서해주시는 주님이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유일한 것이 회개와 사죄입니다.
이어서 경고하십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회개하지 아니하면 주님이 에베소 교회를 징계하려고 찾아오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에 무슨 변화가 있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회복할 수 있는 대책은 오직 회개밖에 없습니다.
4. 칭찬(2:6)
끝으로 다시 한 번 칭찬을 해주십니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니골라 당과 발람 그리고 이세벨은 동일한 이단을 지칭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 총회의 결의와 상충되는 교훈과 행위를 퍼트리는 자들입니다. 에베소 교인들이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한 것은 주님과 한 마음이었습니다. 잘하는 것을 계속 잘하면서 부족한 것과 죄악을 회개하고 처음 행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성령님이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을 듣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교회가 이기는 길은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잘 듣고 이기는 자, 곧 순종하고 회개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과실을 먹는 영광이 무엇입니까? 에덴동산에서 범죄 하므로 먹지 못했던 과실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회복된 자만이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 받고 실천하는 자들이 먹을 수 있습니다.
제 8과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2:8-11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이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첫째 일과 마지막 일 곧 창조와 심판을 하시는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면서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가지신 분, 참된 생명을 주시는 분이 말씀하십니다.
1. 주님은 교회의 형편을 아십니다(2:9)
교회 형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의 머리되신 주님이십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아십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궁핍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다릅니다. 주님은 너희가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물질 면에서는 궁핍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일자리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폭도들에게 상점과 집까지 빼앗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부요한 자입니다. 때로는 우리의 평가와 주님의 평가가 다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취하지 않습니다(갈 2:6). 이와 같은 예를 누가복음 12장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를 위해 재물을 많이 쌓아 놓고 나는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평가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하다고 하셨습니다(눅 12:21).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서도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7).
2. 주님은 교회의 실상을 알려주십니다(2:9)
교회의 실상을 아시는 주님이 그 실상을 일깨워주십니다. 서머나 교회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훼방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입니다. 그들의 참람함을 주님은 아시고 서머나 교회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서머나 교회가 앞으로 고난받을 것을 아십니다. 그것을 알려 주시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련은 주님이 허용하신 범주 안에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장차 마귀가 서머나 교인들 중에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주님 모르게, 주님과 상관없이 되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주님이 허용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험은 일정기간 동안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너희가 십일동안 환난을 받을 것이라’고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3. 주님께서 이기도록 주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주님이 일깨워 주시는 이유는 교회로 하여금 이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길 수 있습니다. 시험을 당하거나 어려움이 있을 때 교회가 꼭 붙잡아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다 알고 계신다’는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두 주먹을 움켜 쥘 것이 아니라, 이길 수 있도록 알려주신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부요한 교회입니다.
4. 이길 수 있도록 주신 말씀입니다(2:10)
주께서 이길 수 있도록 권면의 말씀을 주십니다.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그 시험기간 동안에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1) 절대로 두려워 말라.
‘처음과 나중인 내가 있다. 내가 다 알고 있고 보고 있다. 내가 간섭할 것이다. 너희가 앞으로 고난, 시험을 받을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2) 죽도록(죽을 때까지) 충성하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의 말씀입니다. 주를 위해 죽은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명심하여라 마귀가 너희 중에 몇 명을 옥에 쳐 넣을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십일동안 시험을 받을 것이다. 그럴지라도 죽을 때까지 나를 믿고 의지하라. 비록 네가 그것 때문에 죽어야만 한다 할지라도 나는 너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계 3:10-11에서는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을 때를 면하게 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성도가 고난을 당하도록 허용은 하셨으나 그 고난을 이기도록 권면해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립시다. 이런 권면의 말씀이 없다면 교회가 어떻게 시험을 견디겠습니까! 이런 말씀을 주셨다는 사실은 주님이 깊이 관여하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말씀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들을 수도, 깨달아 알 수도, 마음에 간직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말씀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주의 영도 우리 가운데 거하게 하셨습니다. 성령님은 그 말씀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2000년이란 긴긴 역사동안 이 말씀을 붙잡고 살다가 갔고, 지금 살아 있는 성도들도 이 말씀을 붙잡고 살아갑니다. 주님은 교회가 지금도 고난을 받고 있지만 앞으로도 고난받을 것을 아십니다. ‘네가 지금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충성을 잘 하고 있구나 그것은 부요한 것이며 네가 지금 부요한 것처럼 앞으로도 두려워 말고 충성을 다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2:11). 둘째 사망은 영과 육이 분리되는 첫째 사망과 다릅니다. 즉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서 영원히 당하는 형벌입니다(20:14, 21:8). 고난과 시련가운데서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은 이기는 자이고 결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주님을 끝까지 신뢰합시다.
제 9과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2:12-17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횐 돌을 줄 터인데”(17중)
버가모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80Km 떨어진 곳에 있는 도시입니다. 로마가 아시아를 점령하고 이 도시에다가 처음으로 로마와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기리는 황제숭배의 신전을 건립하였습니다(주후 29년경). 그 도시의 화폐에 찍힌 형상은 치료하는 신이라는 뱀 모양의 형상이었습니다. 이렇게 황제숭배와 이방종교의 잡다한 의식이 활발한 도시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도시를 일컬어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라고 하실 정도로 심하였습니다.
1. 버가모 교회(2:12-15)
그런 도시에 복음이 전해졌고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의 능력일 뿐입니다. 거기서 황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시고 살기가 쉽지는 않았습니다. 서머나에서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다면 여기서는 황제의 핍박과 이방종교들의 공격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1) 믿음을 잘 지킨 교회
교회가 주의 이름을 불렀고, 계속 주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 주님은 ‘새 이름’을 주십니다.
버가모 교회를 향해서 주님은 ‘내가 안다’고 말씀하시며 위로해 주십니다. ‘네가 사는 곳은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죽임 당하였는데도 너희가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고, 내 이름을 굳게 잡았고, 그것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십니다. 버가모 교회는 목숨을 빼앗기는 지경에 이르러서도 믿음을 굳게 지켰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를 빼앗기고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서 신앙을 지킨 교회가 버가모 교회입니다. 배교냐 아니면 죽음이냐의 기로에서 믿음을 택하였습니다.
2) 발람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음
그런 교회 안에도 두어가지 책망할 것이 있었습니다. 은밀하게 들어 온 삶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성도들 중에 우상의 제물을 먹거나, 니골라 당의 교훈을 따라 행음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 전부는 아니라 할지라도 몇 몇 사람이 이러한 죄에 깊이 관여되어 있었습니다. 버가모 교회는 이것을 권징하지 못했고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 총회가 금지한 것들이었습니다.
에베소 교회와는 대조적입니다. 에베소 교회에도 니골라 당의 교훈이 침투되었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들의 행위를 미워하였었습니다. 그러나 버가모 교회 안에는 이 교훈을 따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2. 회개의 촉구(2:16)
그 입에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가 말씀하십니다.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에게 속히 임하겠다 돌이켜라 지금도 때가 늦은 것은 아니다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면 속히 임하여 그것들과 싸우겠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잘 믿는구나 그러나 회개할 것이 있다 내 말대로 하라’. 주의 말씀은 예리합니다. 그 입에 날 선 검과 같습니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들과 받지 않는 자들을 정확하게 분별해 냅니다. 교묘하게 말씀대로 행하는 것처럼 꾸미는 자들까지 발굴해 내십니다. 결국 회개하지 않는 이들을 내 치십니다.
회개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돌이키면 됩니다. 회개는 먼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회개하라는 말씀이 높은 하늘이나 먼 바다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말씀이 우리에게 가까이 와서 우리의 입안에 있고 우리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 회개는 우리가 해야 합니다. 성령님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십시오. 회개자 앞에 주님은 생명과 복, 사망과 화를 두셨습니다. 결코 미룰 것이 아닙니다. “설령 네가 범죄하므로 이방에 포로로 사로 잡혀 가 있을 지라도 거기서 내 말이 기억되거든 얼른 회개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를 거기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들일 것이며 너의 열조들이 번성하던 때 보다 더욱 번성케 하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참으로 회개하면 주께서 우리에게 생명의 부흥을 주실 것입니다.
3. 회개하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
주께서 ‘이기는 자에게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을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누가 이기는 자입니까? 여기서는 회개하는 자가 이기는 자입니다. 그들에게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쓰인 흰 돌’을 주십니다.
1) 감추었던 만나
만나는 광야 40년 간 하늘로부터 내려온 떡이었습니다. 이것을 금 항아리에 담아 성막의 법궤 안에 보관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장차 주어질 참된 생명, 영생의 양식을 의미했고, 그것이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떡, 세상에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바로 우리의 생명입니다.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는 뜻은,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주님 자신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함께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에게 참된 생명을 주고 그 생명이 자라도록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회개하지 않은 죄들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하는 삶에 장애가 됩니다. 회개하는 자는 마음 문을 여는 자요, 주님을 영접하는 자요,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입니다. 그에게는 생명이 흘러 넘칩니다. 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2) 새 이름이 쓰인 흰 돌을 주심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그 이름은 이마 위에 쓰여지지 않고 돌 위에 쓰여집니다. 받는 자 밖에는 알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기는 각 사람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흰돌은 승인과 받아들임의 표입니다. 검은 돌은 거부와 축출을 의미합니다. 고대 법정에서 당시 배심원들이 유무죄 판결을 내릴 때, 그들이 항아리에서 흰돌을 꺼내면 무죄이고 검은 돌을 꺼내면 유죄였다고 합니다. ‘새 이름이 쓰인 흰돌을 주신’다는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는 뜻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상급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이름은 주님께서 주신 이름인 만큼 이 흰 돌을 받는 사람은 주님께 귀중한 존재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그 우리에 들이십니다. 주와 함께 거하게 하십니다. 주님과 한 상에서 떡을 떼며 주와 함께 삽니다. 이보다 더 큰 소망이 있겠습니까!
제 10과 두아디라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2:18-2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19)
바울이 유럽에 가서 복음을 전할 때, 제일 먼저 그 복음을 받은 사람이 자주 장사 루디아 입니다. 이 여인이 바로 두아디라 사람이었습니다. 그때로부터 이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을까 짐작이 됩니다. 이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한 것 같습니다.
1. 사랑, 믿음, 섬김, 인내가 있는 교회(2:19)
두아디라 교회는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갈수록 더해서 지금은 ‘처음 것보다 더 많다’는 주의 칭찬을 받습니다. 사랑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사랑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지속되지 못했던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저버렸다고 지적을 받았습니다.
두아디라 교회 성도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섬김 즉 자발적인 봉사를 잘 하였습니다. 그들의 사랑과 믿음이 실제적인 섬김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예배로 나타나고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세 가지(사랑, 믿음, 섬김)를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내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 환난을 참아야 하고, 예배를 방해하는 세력들의 온갖 것들을 극복해야 하고, 형제를 위한 사랑과 수고를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 능력은 바로 인내입니다.
2. 계속 자라나는 교회(2:19)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욱 좋았습니다. 사랑과 믿음이 더욱 활발했고, 섬김과 인내가 더 많아 졌습니다. 이것이 큰 은혜요, 능력입니다. 처음에는 친하게 지내다가 상대방의 단점이 드러나면 멀어집니다. 전보다 더 잘 알게 되었으니까 더 이해하고 더 화목하고 서로 더욱 유익하게 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서로간의 단점에만 눈이 어두워져서 사랑이 식고 멀어집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그를 가까이 접했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오랜 기간을 함께 했기 때문입니까? 그에게 흠이 있고, 그가 별 수 없는 인간인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까? 잘 아는 사람을 전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오직 사랑해야 할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시다.
교회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식어진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요? 이만하면 주님을 알만큼 알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한 무궁하신 분이십니다. 갈수록 더욱 주님을 알려고 해야 합니다. 멈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벧후 3:18). 교회가 날마다 자라가야 합니다. 좋다고 여기는 사람만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없다면 성숙한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두아디라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을 다시 한 번 들어봅시다. “너의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3. 성장 중에도 회개해야 할 교회(2:20)
교회가 계속 성장한다고 해서 회개해야 할 요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성장 때문에 회개해야 할 점이 가리워 지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 눈이 빛난 불꽃같은 하나님의 아들, 그 발이 빛난 주석 같은 하나님의 아들, 사업과 행위들을 아시고,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사랑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회개하라’. 주님은 잘 세워져 가는 교회를 향하여, 회개할 것은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에베소 교회, 버가모 교회, 두아디라 교회를 향해서도 회개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것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가 잘 하는 것만 붙잡고 우쭐해하거나 거기서 만족한다면 더 이상의 진전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져야 합니다. 좋은 것은 더 좋아져야 하고 풍성한 것은 더 풍성해져야 하며, 잘못된 것은 회개하고 고쳐져야 합니다. 날마다 달라져야 하고 날마다 좋아져야 합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현상유지는 망하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생활은 생명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체가 자라지 않고 그대로 정체되어 있다면 틀림없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마 23:37에 보면 주님은 우시면서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세벨을 용납하고 행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은 것을 지적하시고 회개하지 않는 것을 경계하십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그 음행을 회개하고자 아니 하는도다”(21). 회개하지 않으려는 죄악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주님은 회개에 민감하지 못한 교회를 드러내십니다. 주께서 회개하지 않는 교회를 ‘침상에 던져 버리고 큰 환난가운데 던지시고 그 자녀를 죽이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교회로 하여금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주님’을 알게 하겠다고 하십니다.
말씀 앞에서 우리의 반응이 어떠해야 합니까?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아! 내가 이런 상태로 계속 살아선 안되겠다 뭔가 달라져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내 신앙양심 속에서 날마다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 내가 그것을 무시해왔고 은근히 회개를 부담스러워 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할 때가 아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간절히 그리고 엄하게 주시는 이 말씀 앞에서 더 이상 지체할 수는 없다’라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 다짐을 주님은 요청하십니다. 회개에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어차피 얻어 터져서라도 할 일이라면 맞기 전에 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4. 받은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할 교회(2:25)
교회는 이미 받은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미 받은 말씀대로 모이기에 힘쓰고, 그 말씀대로 기도에 힘쓰고, 그 말씀대로 더욱 사랑하고, 더욱 주를 섬기고 형제를 섬겨야 합니다. 인내로서 그것을 계속 잡아야 합니다. 주님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 인내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입니다. “내가 올 때까지”라는 말씀이 인내의 원동력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두려움으로가 아니라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과 그 주님이 가지고 오시는 영광에 들어간다는 기쁜 기대를 가지고 대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라는 소망 때문에 오늘을 이길 수 있고 그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내다보는 것 때문에 회개를 거듭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그 뜻을 행하는 신실하고 지혜로운 종들에게 복을 있을 것입니다. 주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소망을 그리스도께 두기 때문에 그가 오실 때까지 굳게 잡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5.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2:26-28)
이기는 자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와 새벽 별을 주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이기는 자는 회개하는 자이며, 끝까지 주님의 말씀을 붙잡는 자입니다. 그들에게 왕권을 주시고 새벽 별을 주십니다. 새벽 별은 길고 긴 흑암의 밤이 지나고 새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역할을 합니다. 밤이 없는 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는 자들 곧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 약속입니다. 그 새벽 별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하기도 합니다. “나 예수는 ... 광명한 새벽 별이라”(계 22:16). 그렇다면 새벽 별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받는다는 약속입니다. 사도 바울이 환난의 밤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었습니다(빌 3:7,8). 바울은 이 새벽 별이 앞에 보이는 때는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을 때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자고 합니다(롬 13:12,13). 그 사람이 새벽 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것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인 새벽 별이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고후 4:4)습니다.
“의인의 길은 돋는 햇빛 같아서 점점 빛나서 원만한 광명에 이르거니와”(잠 4:18).
제 11과 사데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3:1-6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주께서 말씀하십니다. 일곱 영은 성령님이심을 이미 배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영을 가지셨다는 뜻은 성령님의 일을 주관하신다는 뜻입니다(요 14:16). 일곱 별을 가지셨다는 뜻도 이미 배웠습니다. 일곱 교회와 모든 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1.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3:1)
주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제일 먼저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는 것입니다. 사데는 두아디라의 남쪽에 있는 무역의 중심도시로 유명한 곳입니다. 사데 교회는 아무런 이단의 방해를 받지 않았습니다. 거짓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외부로부터 어떤 공격이나 박해를 받지도 않았습니다. 유대인의 비방과 중상도 없었습니다.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요함과 사치, 과소비와 도덕적 문란이 대단하였습니다. 사데 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평안이 위태한 요소입니다. ‘락’(樂)을 위험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잘못하다간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게 될지 모릅니다.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딤전 5:6). ‘사람이 산다’고 할 때는 하나님을 모신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딤전 6:16). 죽지 아니함이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고,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죽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라도 오래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알았다면 착각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죽음이므로 그것을 위험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일락입니다. 이런 것들은 경사진 얼음판과 같습니다. 이 세상은 일락을 가지고 유인하는 곳입니다. ‘세상 사랑’ 그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습니다.
2. 경성해야 할 교회(3:2)
주께서 사데 교회를 향하여 ‘일깨라’고 하십니다. 이 뜻은 ‘계속적으로 경성하라’는 뜻입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는 말씀을 보니 그래도 사데 교회에 아직은 영적 생명이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데 교회의 급선무는 그 남은 생명을 견고히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니까 비록 미약할지라도 잘 보호하고 배양하기만 하면 충실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개선의 여지가 전혀 없다면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를 강하게 하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를 물리치지 않고, 오래 참으시면서, 회복을 위하여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 같고 만사가 다 좋아 보이지만 진상은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계속 경성하여 남은 생명을 굳게 하고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행위를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온전함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셔서 하나로 이루어 가는 것(요 17:23)입니다. 하나가 되는 길은 이미 받은 복음을 기억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알지 못하리라”(3).
교회가 처음에 들었던 복음과 그리고 그 후에 복음을 받고 따르기로 고백했던 일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인을 다른데서 찾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태만에서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짜 회개입니다. 앞에서 ‘일깨라’는 말씀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회개의 열매는 이미 받은 진리를 굳게 지키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행하면 은혜 받을 것이 분명한데 기어코 안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죄가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으니 이것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마음입니다. 왜 그렇게 좋은 것을 받지 않습니까? 살았으나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죽었다는 표현은 잠자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잠을 즐기는 사람치고 부지런한 사람 없습니다. 나태와 방종과 게으름으로 주님 만날 준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주님이 갑자기 도적같이 임하십니다. 사데 교회에 경고하시는 ‘주님의 임함’은 심판의 형태로 임하는 일시적인 방문일 수 있습니다.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탈리아 남부의 나폴리 도시 근처에 ‘베슈비우스’라는 화산이 있었습니다. 그 주변 도시들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준비를 하지 않았습니다. 주후 79년 그 산이 터지면서 녹아 내리는 용암과 기타 모든 분출물들이 그 주변의 폼페이 도시를 온통 덮어 버렸습니다. 후에 거기서 발굴한 화석들 가운데 희한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 숫가락을 물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밥먹다가 그런 일을 당한 것입니다.
신자가 깨어 준비하지 않고, 신앙생활 대충 대충 하고, 하나님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면 어느 때인가 문제가 생깁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기도는 그 자체가 깨어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그로 하여금 회개케 합니다.
3.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가 있는 교회(3:4)
주님오실 때 부끄러움 당하지 않도록 옷을 잘 입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되 옷 입듯이 믿어야 합니다. 옷을 입어야 밖에 나갈 수 있고 옷을 입어야 살 수 있습니다. 옷 없이 못 삽니다. 예수님 없이는 못삽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잊어버리고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활보하는 분은 없습니까?
‘그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는 “세속에 물들지 아니한 자”(약 1:27)입니다. 받은 구원과 그 의에 합당하게 행하여 성결과 경건생활을 힘쓰는 자입니다. 사데 교회의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자기들의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가 몇 명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의 빛은 계속 비취게 되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계속 자라는 것입니다.
1) 이기는 자는 흰옷을 입으리라
여기서도 이기는 자는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주님의 의를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성결과 의의 옷입니다. 이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다닐 것입니다.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하며 산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에녹처럼 지상에서 그 동행의 삶이 끝나면 더욱 하나님과 가까운 교제의 세계로 들어갈 것입니다.
2)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들은 ‘합당한 자들’입니다. 복음을 통해 선포된 사죄와 화목의 은혜를 감사함으로 받은 사람에게 부여되는 명칭입니다. 혼인잔치 비유에서 왕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들은 합당치 않은 자들입니다(마 22:8).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들이 합당한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계 5:1에 “누가 합당한 자냐”라는 말씀의 답입니다. 주님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모든 피조물들은 구원받은 자들의 합당함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합당함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계 4:11, 5:9, 12).
그리스도인은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죄의 길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주인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듣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므로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엡 4:1).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빌 1:27). “주께 합당이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라”(골 1:10; 살전 2:1,2; 살후 1:5).
결국 ‘합당함’은 그리스도가 합당하고, 그리스도안에 사는 삶이 합당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 하고 그들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새생명을 받고 감사하는 자들이며, 생명을 주신 주님께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서 하나님이 행하십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 2:13).
4.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3:5)
1) 생명책의 이름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요한계시록을 많이 읽으신 분은 ‘생명책의 이름’에 대하여 궁금하지 않을 것입니다. 계 20:12은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부활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없는 사람들은 심판의 부활로 나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단 12:1은 “심판날에 그 책에 기록된 자들은 구원받을 것”이라 쓰고 있으며, 계 20:15은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불못에 던지우리라”고 하십니다. 계 21:27은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영생으로 들어갈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책에는 영원한 생명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름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자신이 구속한 백성들의 이름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한 명도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즐거워하며 감사합시다. 눅 10:17-20은 “영들이 너희들에게 복종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고 오직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인해 기뻐하라”고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셨습니다.
2) 주님의 시인
“이기는 자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이미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을 주께서 시인하겠노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시인보다 더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마 10:32,33; 눅 12:8,9)!
제 12과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3:7-13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9하)
빌라델비아 교회는 약하고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그 도시도 살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의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적은 능력으로 불평하지 않고 인내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하여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1. 빌라델피아 교회에 말씀하신 주님(3:7)
1)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
빌라델비아에 사단의 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거짓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사단의 특성은 거짓말하는 것입니다(요 8:44). 모든 거짓과 거짓말의 원천이 마귀입니다. 특히 하나님 말씀과 다른 거짓된 사상과 교훈을 가르칩니다. 성경을 가르친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가르칩니다. 마귀가 세운 사람들이 더 의로워 보일 수 있습니다. 가짜는 구별하기도 어렵고 오히려 진품보다 더 좋아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영화 ‘독재자’의 주연으로 유명한 ‘찰리 채플린’이 여행을 하다가 어느 지방에서 자신을 흉내내는 대회가 열린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흥미도 있고 장난끼도 있어서 그 대회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우승을 하였습니다. 가짜가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보인 예입니다.
거짓이 진리처럼 보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이 세상에 속한 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모든 것으로 미혹합니다. 천국보다 이 세상이 더 좋은 것으로 여기게 하고 이 세상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게 만듭니다. 이 세상이 잠간인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이 세상 것들은 결국 우리에게 사망을 가져다 주지만, 좋게 보이는 면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속기 쉽습니다.
아마존 강가에 사는 거미 중에 꽃과 같은 모양으로 거미줄을 치는 것이 있습니다. 곤충들이 꽃인 줄 알고 거기 와서 놀다가 걸리게 되고 먹혀버립니다. 이 세상의 것들이 그렇습니다. 꽃과 같이 좋아 보이지만 그것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기에 결국에는 허무와 죽음만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주님은 교회로 하여금 거짓말하는 사단의 회를 분별하라고 하십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께서 주시는 말씀입니다.
거짓말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요일 2:22).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거짓말은 없습니다. 사단의 회가 그런 거짓말을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잘 믿는 유대인인척 하면서 실상은 사단의 가르침을 전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은 진실합니다. 오직 진리만을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진실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주님은 우리와 구별된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사단의 회는 주님이 우리와 똑같은 인간일 뿐이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인간이시면서 동시에 하나님이십니다. 신인 양성을 가지신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21문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선택하신 자들의 구속자는 누구입니까?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시어 한 위(位)에 양성(兩性)을 가지신 하나님이시오 사람이시었으며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
2)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을 열고 닫는 분이십니다. 주님이 열어 놓으시면 능히 닫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입국권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아무도 도전할 수 없는 최고의 권위입니다. 새 예루살렘 곧 메시아 왕국에 사람을 들이고 들이지 않는 유일한 권력자이십니다. 이런 주님이 열린 문을 교회 앞에 두셨습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셨기에 교회가 은혜로 말미암아 주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고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감사한 것은 주님이 다 해주시고 주님이 칭찬하십니다. 빌라델비아 교회의 의지가 동원되긴 했겠지만 근본 원동력은 주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적은 힘을 소유했으나 진실한 교회는 이깁니다. 적은 무리이지만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교회가 이깁니다. 거룩하고 진실하고,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주님을 신뢰하는 교회가 이깁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주님은 강하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행복합니다.
2.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3:8-10)
1)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심(8, 9)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그 사랑의 증거를 나타냅니다. 사단의 회 중에 몇을 주어 교회의 발 앞에 절하게 합니다. 유대인중에 몇 명이 복음으로 정복당하여 회개하고 교회 앞에 나아오게 하심으로써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보여주십니다.
2) 주께서 말씀을 지킨 교회를 지켜주심(10)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많은 인내를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거짓을 버리고 진리의 말씀을 붙잡았습니다. 이렇게 인내하며 주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를 주님이 지켜주십니다. 그래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십니다. 그 시험은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하는 환난입니다. 환난의 때에 지켜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3. 주의 약속과 권면
‘내가 속히 임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미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그래서 아무나 너의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상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힘쓰라’고 하십니다.
이기는 자에게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결코 무너질 리 없습니다. 영원히 안전한 삶을 보장하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복을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지진의 공포 속에서 자주 빌라델비아 성밖으로 피신하던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는 결코 그렇게 나가는 일이 없을 것임을 보장해 주십니다.
그 도시의 상황과 관련한다면 주후 17년에 대 지진이 있었습니다. 이 때 여러 도시들이 파괴되었습니다. 그 지진으로 인해 지층이 만성적으로 불안전하게되어 계속적으로 여진이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공터로 뛰어나가곤 하였습니다. 지붕이 가라앉고 벽이 무너지고 기둥이 넘어지는 현상들, 장기간에 걸친 미진은 그들로 하여금 불안에 쌓이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든든한 기둥이 되게 한다는 말씀과 다시는 나가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약속이 든든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십니다. 이 삼중의 이름을 기록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것’ 삼겠다는 표시입니다. 영광 중에 나타나실 그리스도께 속한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보배로운 피라는 무한한 댓가를 주고 구원을 인치신 분의 이름입니다. 성도는 이 이름 안에서 그의 소유가 되고 그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영원 무궁히 안전함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나라, 새 예루살렘의 시민이라는 표식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소유로 되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내가 나를 소유한다 할 때, 얼마나 심리적으로 불안합니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 앞에서 안전보장을 느낍니다. 얼마나 기쁘고 든든합니까! 영원한 존재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사시기 바랍니다(계 14:1; 22:4; 민 6:27).
제 13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3:14-22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하)
1. 라오디게아 도시에 대하여
라오디게아는 상업의 중심지였고 의류제조업이 활발했습니다. 값싼 의류가 대량으로 생산되었고 고급 옷감과 카페트까지 만들었습니다. 또한 의술학교와 유명한 의사들이 많았습니다. 심지어 유명한 의사의 이름이 라오디게아의 주화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 학교에서 개발한 안약이 전 세계에 수출되었습니다.
유대인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 지방의 장관이 그들이 내는 성전세의 막대함에 놀라서 그 도시에서의 화폐 유출을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그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압수된 금이 은으로 따져서 15000드라크마 였습니다. 유대인의 성전세는 반 세겔입니다. 두 드라크마 입니다. 이 단위로 계산해 보면 여자와 아이를 제외하고 약 7500명이 거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이 도시는 매우 부유한 도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후 61년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지만 로마 정부의 원조도 거부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쌓아둔 재물이 많았습니다. 이러한 풍요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 도시의 형편, 그 사회의 상황들은 교회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를 ‘미지근한 교회’라고 칭하십니다.
2.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3:15)
라오디게아 교회는 차지도 덥지도 않은 교회였습니다. 이 뜻은 주님과 주의 말씀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열정도 적대감도 없이 그저 그렇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상태는 어떠합니까? 미지근한 신앙을 주님은 구역질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질적인 부요 때문에 영적으로도 부요하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3. 라오디게아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3:14)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19). 이 교회에 말씀하시는 주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십니다.
1) 아멘이십니다
진실성을 보증하거나 강조하는 말입니다.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주의 말씀도 아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의심 없이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언제나 그 약속은 사실입니다. 아멘이신 주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라오디게아 교회는 신앙이 확실하지 못하고 미지근하였습니다. 주를 향한 우리의 열정은 어느 정도입니까? 주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2)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십니다
증인의 세 가지 요건이 있습니다. 목격해야 되고, 듣거나 본 것을 정직하게 말해야 하고, 듣는 사람이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 권능과 영광이 동등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가장 잘 알려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은 우리에 대해서도 잘 아십니다. 우리를 우리 자신보다 더 정확하게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하신 주님의 말씀이니 옳습니다. 신실(충성)하게 하나님을 알려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주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 자신을 알게 됩니다. 주를 향하고 주의 말씀에 착념하는 것이, 곧 주께서 원하시는 뜨거운 것입니다.
3) 창조의 시작이십니다(요 1:3, 골 1:15-18)
예수 그리스도는 구속주 이시면서 동시에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주님은 창조주의 지혜와 능력과 부요를 가지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 빈곤을 치료하려 하십니다.
라오디게아 교희는 스스로를 부자로 여기고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여겼지만, 그러나 실상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실상을 몰랐습니다. 심각한 병에 걸려 있는 것을 모르고 진찰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큰 문제겠지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주께서 보시는 ‘나’, 우리가 생각하는 ‘교회’와 주께서 생각하시는 ‘교회’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께서 교회를 일깨워 주십니다. 창조주의 치료가 시작됩니다. 숙련되고 권위있는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무시하지 말고 잘 들으십시다.
4. 세 가지 권면(3:18)
주님은 그들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세 가지를 들어서 말씀하십니다.
1)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
이것은 불순물이 모두 제거된 금입니다. 베드로 전서 1:7의 말씀이 연관됩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한 금보다 더 귀하여” 곧 순수한 믿음을 말합니다. 더욱 확실한 것은 이 ‘금’을 누구에게서 사라고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주님 자신에게서 사라고 하십니다. 은행에 금이 많기 때문에 부자가 아니라, 주님께 받은 믿음이 진정한 부자의 척도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내게서 사라”는 말씀으로 ‘너희에게는 금보다도 내가 더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2) 횐 옷을 사서 입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입으라는 뜻입니다. 의로운 백성답게 거룩한 행실로 살라는 뜻입니다. 라오디게아의 유명한 직물과 고급 옷을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수치스럽게 벌거벗었음을 알고 의로우신 주께 나아오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것처럼 영광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3) 안약을 사서 바르라
주께서 ‘라오디게아의 특산물인 안약을 자랑하지 말고 정작 자신의 빈곤과 벌거벗은 것을 볼 수 없는 너의 눈에 안약을 바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눈은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은혜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안약도 주님께 사는 것입니다. 성령님의 책망과 조명으로 영적인 눈이 밝아질 수 있습니다.
세 가지 다 주님께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아멘이시고, 충성된 증인이시고,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문제의 해결자이십니다. 교회의 부귀와 영광은 오직 그리스도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안에서 순수한 믿음과, 성결한 삶과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미지근한 교회를 향하여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주도권을 가지시고 왕의 모습으로 “내가 들어가기만 하면 문제가 다 해결된다 빨리 문 열어라”라고 하십니다. 속히 회개하고 반응해야 합니다.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주님과 더불어 먹게 될 것입니다(3:20). 여기 ‘함께 먹는다’는 표현은 아주 친밀하게 사귀며 지낸다는 뜻입니다. 또한 그분의 주권이 행사되고 우리가 그 통치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모시면 주님은 우리를 자신의 보좌에 앉게 하여 주십니다. 주와 함께 있고 주님과 교통하는 그곳이 바로 교회이고 천국입니다.
제 14과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
계시록 2-3장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1:11)
1. 보편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일곱 교회는 일곱 노회로 보아야 합니다. 즉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는 보편의 모든 교회를 향한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편지를 보내신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교회들이 당면하고 있었던 영적 문제들이, 곧 오늘 우리의 문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매우 적합한 교훈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계시록의 어느 교회와 같다’라고 생각하여 교회대 교회의 비교형식으로 보기보다는, 종합적으로 취해야 할 말씀들입니다.
2. 한 교회의 일곱 가지 양상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교회는 단지 하나의 교회일 뿐입니다. 모든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그분을 믿는 믿음의 터 위에 세워졌습니다. 온 세계 모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한 주님을 섬기는 같은 믿음을 가졌습니다. 한 성경을 읽고 한 이름을 찬송하며 예배드립니다. 다 같은 소망을 품고 날마다 주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천상의 교회와 지상의 교회가 하나의 교회입니다. 땅위의 모든 성도가 주 안에 있어서 하늘의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상교회는 온전하지만 지상교회는 아직 불완전합니다. 일곱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들은 모두 지상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계시록 2-3장을 ‘한 교회의 7가지 양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3. 교회는 주님의 평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교회마다 그 유형이나 흐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평가와 주님의 평가가 상반될 수 있음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서머나 교회가 환난과 핍박가운데 있었으나 주님은 부요한 교회라고 하셨습니다. 사데 교회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라고 하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우리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지만, 주님은 ‘네가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교회를 주의 말씀에 비취어 진단해 보십시다.
4. 교회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일부분이 부패하였다고 하여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를 버리셨다고 속단하지 마십시오. 설령 교회의 많은 부분에 문제가 있다 할지라도 주님은 교회를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계 3:2).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주인이십니다. 교회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일깨워 지적도 하시고 책망도 하시고 칭찬과 권면도 하십니다. 그리고 약속도 주시는데 이 약속은 ‘그렇게 되게 하겠다’는 주님의 의지표명이기도 합니다.
5. 교회의 나아갈 길을 보여줍니다
교회(신자들)의 영적 질병은 한가지만 아니고 천태만상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다른 사람의 죄와 같은 것이 없다하여 안심할 것이 아닙니다. 비록 그런 죄는 없지만 그와 다른 모종의 죄가 나에게 있는 줄 알고 겸손하게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부단히 살피면서 주님의 회개하라고 두드리는 소리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일곱 교회 중 ‘회개하라’고 하신 교회가 몇인 줄 아십니까? 다섯 교회(2:5, 2:16, 2:22, 3:3, 3:19), 자그마치 71%입니다. 교회가 살 길은 회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즉각적으로 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영광이 충만한 교회이길 바랍니다.
6. 주님이 주시는 상급이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이기는 교회들에게 주님이 약속하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 과실’, ‘생명의 면류관’, ‘감추었던 만나’, ‘새 이름을 기록한 흰 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 ‘새벽 별’, ‘흰 옷’, ‘하나님 성전의 기둥’, ‘주와 함께 먹음’, ‘주의 보좌에 앉게 해 주심’ 등의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주님이 주시는 상급은 결국 주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소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한 걸음 더 나아가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있습니다. 주는 우리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주의 백성이 되고 주께서 그 백성과 함께 계시는 상태가 천국이고 교회의 소망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제 15과 4-7장의 관점 : 하나님 나라의 환상과 일곱 인
계시록 4-7장
“이리로 올라 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4:1하)
1. 요한계시록의 구조
우리는 1장에서 요한계시록의 주인공이신 ‘인자 같은 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2-3장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시 소아시아 일곱 지역의 교회들을 통하여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주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계 1:19에서 요한계시록의 구조를 볼 수 있습니다.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 구조대로 본다면, “네 본 것”은 1장의 내용이고, “이제 있는 일”은 2-3장의 내용이고, 4장 이하는 “장차 될 일”입니다. 계 4:1 하반절을 봅시다.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2. 4-5장, 앞으로 나올 내용의 배경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새로운 단원을 시작해야 합니다. 계 4:1-8:1은 일곱 인으로 봉해진 두루마리가 개봉되는 내용입니다. 이 단원을 ‘하나님 나라의 환상과 일곱 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4장은 5장과 함께 앞으로 나올 내용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4장은 보좌에 앉으신 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경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5장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일곱 인으로 봉해진 한 책이 들려 있는데 그 책을 어린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취하시고 찬양을 받습니다. 6장부터 어린양이 그 인을 하나씩 떼어 내는 것을 보여 줍니다.
3. 6-7장, 최후의 심판
6-7장에서 최후의 심판이 소개됩니다. 이 심판이 불신자들에게 어떤 영향을 줍니까?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계 6:16, 17).
이 사건이 성도들에게는 어떤 축복을 줍니까?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데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7:16, 17).
4. 4-7장의 기간: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시대
이 단원(4:-7:)의 기간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전 세대를 말합니다. 여기서 무엇이 가장 부각됩니까? 이 단원에서도 역시 다른 단원과 마찬가지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주인공이십니다. 어린양이 책을 취하심, 어린양이 찬양을 받으심, 어린양의 진노, 어린양이 목자가 되심, 곧 요한계시록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기독론)라고 했습니다. 지금도 이 세대를 다스리시는 분은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5. 삼위일체 하나님
이 단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아봅시다. 4장은 창조자이신 성부 하나님(=보좌에 앉으신 이)께 초점을 두는 것 같고, 5장은 구속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두면서, 성령님은 4장에서는 “보좌 앞에 일곱 등불”(4:5)로 나타나시고, 5장에서는 어린양의 “일곱 뿔과 일곱 눈”(5:6)으로 나타내십니다. 이렇게 성부, 성자, 성령에 의한 하나님의 통치가 ‘앞으로 될 모든 일’의 근원이 됩니다.
6.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를 보는 교회(성도들)가 복됩니다. 역사선상에서 교회가 교회답고 진리를 충실하게 증거할 때 환난과 시련은 당연히 오게 마련입니다. 교회라고 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서 질병이나 기근,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시련들은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한 도구로 주께서 사용하시는 것들입니다. 역사를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보좌를 잊지 맙시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롬 8:28). 때때로 이런 사실을 잊고 세상의 사건들이 마치 하나님의 장중이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관리되는 것처럼 생각하거나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런 그릇된 생각을 고치도록 하는 말씀이 바로 요한 계시록 4-5장입니다. 온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고 다스리시는 하늘 보좌를 바라봅시다. 온갖 시련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의 시선을 왕중의 왕, 만주의 주이신 그분께 향하십시다.
제 16과 영화로운 하늘 보좌에 앉으신 이
계시록 4:1-6상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2)
1. 하늘의 열린 문(4:1)
유배지 밧모섬에서 사도 요한은 “하늘의 열린 문”을 보게됩니다. 하나님이 요한에게 하늘 문을 여셔서 그 안을 보여주셨습니다. 성령님은 감동하시고 그리스도는 계시록 1:10의 큰 음성으로 “이리로 올라 오라”고 분부하십니다. 그곳은 영화로운 하늘 장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후에 올라가신 곳이고, 거기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계십니다. 그곳에 천사들이 있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거합니다. 그곳으로부터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가 장차 그곳에서 오실 것입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성도들은 성령님의 감화로 말미암아 심령으로 그곳을 알며, 별세한 후에 영혼이 그곳에 들어가며,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는 몸까지 부활하여 영혼과 몸이 함께 하늘 나라에 들어갑니다. 무엇보다도 그곳이 좋은 이유는 거기에 성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보좌에 앉으신 이(4:2)
보좌에 앉으신 이가 누구입니까?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이 보좌는 참으로 모든 보좌 위에 뛰어난 보좌이며 가장 탁월한 궁극적인 능력과 권세의 자리입니다. 보좌에 앉아 온 세상을 엄위와 주권으로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주권에서 심판과 구원이 나옵니다. 본서에서 이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진노가 나온다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6:10,16,17;14:7;15:1;16:5,19;18:20;19:2,11). 보좌보다 이 ‘보좌에 앉으신 이’에게 관심을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모습이 ‘벽옥과 홍보석’ 같다고 했습니다. 이 보석들은 대 제사장의 흉패에 붙인 보석들입니다. 이런 보석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합니다.
3. 무지개(4:3)
녹보석같은 모양의 무지개가 보좌를 두르고 있습니다. 무지개는 언약하신 것을 반드시 지키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언약을 하신 후에 무지개를 보여주신 것도 같은 뜻입니다.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리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증표였던 것입니다. 폭풍우가 지나 간 뒤에 떠오르는 무지개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하나님은 진노의 심판을 하시는 중에도 그 택한 백성들에게 언약하신 대로 그분의 긍휼과 자비와 은혜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4. 24장로들(4:4)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24보좌가 놓여 있습니다. 그 24보좌들 위에 24장로들이 앉아 있습니다. 24장로들은 구약의 열 두 지파와 신약의 열 두 사도를 상징하는 사람들로서 신, 구약의 모든 성도들, 구원받은 사람 전체 곧 보편교회를 상징합니다(계 21:12, 13).
그 24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아 있습니다. ‘흰옷을 입었다’는 의미에 대해서는 계 7:13,14에서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흰옷을 입은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덧입은 사람들입니다. 성결한 삶으로 주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해진 사람들입니다.
금 면류관은 이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리는 왕의 신분인 것을 드러냅니다. 주님의 공로를 힘입어서 승리한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었음을 보여줍니다.
5. 보좌로부터 나오는 심판(4:5)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와 뇌성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계 8:5이 가르쳐 줍니다.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매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나더라.” 여기 떨어진 뇌성, 음성, 번개, 지진은 심판의 재앙들을 상징합니다. 성부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심판이 나오는 것을 보여줍니다.
6. 심판자이신 성령님(4:5)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은 바로 성령님을 지칭합니다. 여기서 성령님은 ‘보혜사’이시지만 또한 ‘심판자’이시라는 점입니다. 성령님도 성부와 성자와 모든 사역을 함께 하시고, 권능과 영광도 동등하십니다. 소요리문답 제 6문을 읽어봅시다. 「하나님의 신격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오 본체가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이십니다.」
그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바다”가 있습니다. 이것은 수정 같기도 하고 유리바다 같기도 한 무엇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맑고 투명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맑은 날 밧모 섬의 언덕에서 내려다 본 에게 해의 거울 같은 모습일 것이라고 말한 분도 있습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순수성을 상징하고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는 창조주의 영광과 위엄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제 17과 네 생물과 24장로들이 영광을 돌림
계시록 4:6하-11
“24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10)
1. 네 생물의 찬송(4:6하-9)
성부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습니다.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습니다. 이 생물들에 관한 얘기가 여기서 처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적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의 마음속에 있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유기적으로 사용하도록 성령님께서 감동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발 강가에서 본 바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래 있던 생물들이라 그들이 그룹들인 줄을 내가 아니라”(겔 10:20). 이 인용문 외에도 에스겔서와 이사야서에 여러 차례 나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표현이 하나님 보좌 가까이에 있는 높은 계급의 천사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네 생물은 앞뒤로 눈이 가득합니다. 그리고 각각 여섯 날개가 있습니다.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합니다. ‘눈이 가득하다는 것’은 항상 깨어서 전체를 살피는 것을 나타내고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속성을 가진 존재임을 나타낼 것입니다. 여섯 날개가 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여겨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신속하게 수행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사야 6장에도 스랍들이 나오는데 역시 여섯 날개씩 있어서 그 둘로는 얼굴을 가리워 하나님에 대한 경외를 나타내고, 둘로는 발을 가리워 하나님 존전에서 겸손을 나타내며, 두 날개로는 명령이 떨어지면 신속하게 날아가는 순종을 나타냅니다. 여기서도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 생물같이 표현된 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원하심을 분명히 깨닫게 되면 쉬지 않고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신 사실도 기쁩니다. 그러나 정작 그보다 더 기뻐해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 그 자체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그 자체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영원하신 하나님, 지혜로우시고 의로우신 하나님,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 말로 다 할 수 없는 하나님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밤낮 쉬지 않고 예배드립니다. 그들의 모든 활동은 경배의 표현이며 그들의 입에는 늘 찬양이 있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고 하며,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분께 돌립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합니다. “거룩하다”를 세 번 반복하여 찬송하는 이유는, 한 분 안에 삼위가 계시고 삼위 안에 한 분이 계신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께 드리는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합니다.
2. 24장로들의 경배와 찬송(4:10, 11)
그때에 24장로들 곧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이 엎드려 경배합니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을 세세토록 사시는 즉 영원하신 분으로 두 번 반복합니다. 결국 영원하신 분이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오직 거룩하시고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드릴뿐입니다.
그들이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찬양합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이 찬송의 가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창조주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만물이 하나님의 뜻대로 창조된 것을 찬송합니다. 우리가 만물을 볼 때에 그것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하신 것이요, 따라서 하나님의 관할 하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에 감사할 것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그대로 이루어 졌음을 찬송합니다. 구속받은 자들이 자신들의 구속이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임을 기뻐하며 찬미합니다. 그리고 경배합니다. 장차 성도들이 들어갈 천상의 영광을, 어려움에 처해있는 지상의 교회들이 미리 알 수 있어서 위로와 힘을 얻도록, 말씀으로 미리 보여주시는 장입니다.
3. 면류관으 보좌 앞에 던지며 찬송드림(4:10이하)
24장로들은 ‘면류관을 던지며’ 찬양합니다. 그 뜻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창조로 인하여 시작되었으니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승리의 면류관은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하나님의 것임을 겸손히 인정하는 표현입니다. 자신들이 그것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행동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설령 인간이 마땅히 받아야 할 자기 영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지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영광이든지 자신에게 돌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경건입니다. 벨사살 왕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므로 그 날 밤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단 5:23, 30).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행 12:23).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만이 면류관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인정하여 면류관을 던지며 찬양하는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고전 4:7).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롬 11:26).
제 18과 어린양이 인봉된 책을 취함
계시록 5:1-7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5)
지난 시간에는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심을 보여주면서 지상교회가 위로를 받도록 하는 것과, 모든 성도들이 감사와 찬송과 경배를 돌리는 모습을 배웠습니다.
1. 일곱 인으로 봉인 된 책(5:1-3)
이제는 그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오른 손에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안팎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더 이상 덧붙일 수 없습니다. 물론 뺄 수도 없습니다. 가감할 수 없는 그 책, 하나님의 손에 들려진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일까요? 당연히 4:1에서 말했던 대로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6장에서부터 22장까지의 내용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에 알려 주고 싶어하시는 하나님 자신의 뜻과 계획입니다. 구원과 심판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책을 일곱 개의 인으로 봉인했습니다. 이제 문제는 ‘누가 이것을 열 수 있는가’입니다. 힘있는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누가 이 책의 인을 떼고 펼 수 있는가 그럴만한 합당한 자가 누구인가’. 그 소리가 하늘 위, 땅 위, 땅 아래까지 들립니다. 그러나 능히 그 책을 펴거나 보거나 할 존재가 없었습니다. 봉한 것을 떼는 것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루는 것인데 그것을 해 낼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2. 요한 사도의 울음(5:4, 5)
그래서 요한이 웁니다. 아주 크게 웁니다. 노인네가 크게 웁니다. 아이들은 쉽게 울지만 어른들은 잘 울지 않습니다. 더욱이 노인의 울음은 보기 어렵습니다. 왜 웁니까? 그 책이 펴지기를 바라기에 웁니다. 그 책을 펼 자가 없어서 웁니다. 왜 없습니까? 인간의 죄악 때문입니다. 천사의 부르짖는 소리에 온 우주는 아무 대답을 못합니다. 죄악으로 부패하고 비참하게 오염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장로 중에 하나가 “울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말해줍니다. 이 말씀을 보니 ‘이기었으므로 떼신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이것을 떼지 못하도록 곧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세력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그 세력은 사탄입니다. 그러나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므로 인을 뗄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창 49:9,10에서 야곱은, ‘유다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그 예언이 성취되어 예수님이 유다지파에서 나셨습니다(히 7:14). ‘사자’는 이기는 자의 표상이고 이기는 것은 메시아의 특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 왕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이기시고 구속 사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주를 통치할 수 있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인을 뗄 수 있는 분이십니다. 이 소리를 들은 요한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교회가 무엇 때문에 기뻐해야 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3. 어린양이 그 책을 취하심(5:6, 7)
그 소리를 듣고 기뻐서 바라보니 어린양이 보였습니다. 장로의 말대로라면 사자가 보였어야 할텐데 어린양이 보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사자이며 참된 양이십니다. 사자 같은 승리자이시지만 그의 행동원리는 어린양과 같습니다. 어린양같이 자신을 하나님 앞에 희생으로 드리시고 십자가를 지시므로 사자 같은 승리자가 되셨습니다.
“일찍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고 했습니다. 그 몸에 전에 죽으셨던 표를 아직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루신 대속의 공로가 하늘에서 영원토록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린양이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서 있었습니다. 요한이 본 하늘 장면의 중심자리에 서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그분이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은 중보자이심을 보여줍니다.
그 어린양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습니다. 뿔은 권세와 능력을 나타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일곱 눈은 이미 배웠듯이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성령님이십니다. 눈으로 표현한 것은 모든 것을 다 보고 아시는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아시고, 교회의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일곱 교회에 주신 편지에서 우리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며 자주 사용되었던 말씀이 기억될 것입니다. “내가 아노니”입니다.
어린양이 나아와서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서 드디어 그 책을 취하십니다. 그 인을 뗄 수 있는 분이시므로 책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역사를 다스릴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위임하셨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책을 열어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며 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아멘 하면서 영광을 돌립시다.
제 19과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께 드리는 새 노래
계시록 5:8-14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12)
어린양 예수님이 책을 받아 들었을 때 곧 바로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새 노래 세 곡이 울려 퍼집니다.
1. 네 생물과 24장로의 노래(5:8-10)
먼저, 기쁨의 찬송이 나옵니다. 네 생물과 24장로의 노래가 나옵니다. 각각 기쁨의 악기인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지고 찬양합니다. 향은 성도들의 기도입니다. 성도들의 기도는 하나님께도 향기롭고 자신들에게도 향기롭습니다. 신자가 기도할 때 기쁘고 향기롭습니다. 다른 사람의 기도를 들을 때도 역시 향기를 느낍니다.
1) 새 노래
이 노래들은 새 노래입니다. 어린양이 이렇게 큰 존귀를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새 노래입니다. 그의 가장 위대하고 영광된 구원을 노래하기에 새 노래입니다. 이와 같은 큰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 진 예가 없기 때문에 새 노래입니다.
2) 합당 송
본문에 나오는 새 노래 세 곡의 가사를 유심히 읽어봅시다. 왜 이런 찬송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드려지는지 보십시다. 그분이 책을 받고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합당 송’이라고도 칭합니다.
왜 합당합니까? 그는 일찍 죽임을 당하셨습니다(18과 참조). 그 피로 사람들을 사셨습니다. 각 족속, 각 방언, 각 백성, 각 나라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전 인류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분 자신의 뜻대로 구원할 자들을 사셨습니다. 선택받고 구원받은 자들이여 주께 감사와 찬송, 경배와 영광을 돌리십시다. 그리고 피로 산 사람들을 하나님께 드리셨습니다. 왜 드렸습니까?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인간에게 가장 큰 영광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땅에서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우주를 통치하시는 그분과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입니다.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희생하셔서 우리를 사시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사단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우리들을 그 나라의 왕 같은 제사장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합니다.
2. 많은 천사들의 노래(5:11,12)
둘째, 많은 천사들의 노래입니다.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서 있는 천사들의 수가 만만이요 천천입니다. 만의 만이고 천의 천이라는 뜻입니다. 그 많은 천사들이 큰 음성으로 노래합니다.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을 찬송합니다.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고 노래합니다.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합니다’가 후렴구입니다. 이 찬송에서 나열하여 드리는 일곱 가지는 하늘과 땅의 모든 뛰어난 것들과 모든 덕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계 7:12에서도 똑같은 찬송으로 경배 드립니다.
3. 만물들의 노래(5:13, 14)
셋째, 모든 지음받은 만물의 노래입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피조물이 찬송합니다. 보좌에 앉으신 분께 그리고 어린양께 찬송과 존귀와 영광을 돌립니다. 세세토록 돌려 마땅하다고 노래합니다. 피조물들이 이 때를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려 왔습니까! 4장은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5장은 구속주 어린양을 찬양합니다. 여기 5:13,14절은 그 두 찬송을 합하여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께 드립니다. ‘아멘’하면서 찬송과 경배를 드립니다. 이 찬송과 경배의 규모를 상상해 보십시오. 네 생물들, 모든 구속받은 성도들, 만만 천천의 천사들,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피조물들이 연합하여 드리는 이 예식보다 더 장엄한 규모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음악예배는 없습니다.
5장을 정리해봅시다.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 손에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이 개봉되는 것은 하나님 주관하시는 구원과 심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그 책의 일곱 인을 떼고 열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감사하고 기쁜 것은 일찍 죽임을 당하신 어린양이 그 인을 떼십니다. 왜냐하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승리의 방편은 힘으로가 아니라 십자가의 희생의 방법 곧, 어린양의 희생을 통해서 입니다. 그 어린양의 구속을 노래하는 새 노래 세 곡이 여기 5장에 실려 있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고 구원하시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듯이, 과연 온 우주는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에 의하여 다스려집니다. 오늘 공부와 연관하여 에베소서 1:20-23을 묵상해 볼만합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사신 어린양이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오른 편에 앉으시고 모든 정사와 권세와 능력과 주관하는 자와 이 세상 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성부 하나님)의 충만이 되셨느니라’.
만물은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뜻이 우주 안에서 다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시고 어린양이 함께 다스린다는 사실은 환난과 핍박 고난 중에 있는 성도들에게 근본적인 위로가 되며 담대함과 기쁨으로 주를 섬길 수 있게 해 줍니다.
제 20과 어린양이 인을 떼심
계시록 6:1-8
“내가 보매 어린양이 일곱 인을 떼시는 그때에”(1상)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인을 하나씩 떼기 시작합니다. 온 우주와 역사의 통치권을 가지시고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집행해 가십니다.
요한계시록의 1장부터 5장까지는 우리가 이해하는데 별로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은 믿을만한 사람들의 해석도 제 각기 다 다르고,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 자체를 이해하는데 주력하고 그 다음에 전체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를 공부할 것입니다.
1. 어린양이 첫째 인을 떼실 때(6:1,2)
어린양이 인(印) 하나를 떼실 때에,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천둥소리같이 “오라”고 크게 말합니다. 그러자 흰말과 그 탄 자가 나옵니다. 그 흰말을 탄 사람이 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면류관을 받았습니다. 그 다음에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합니다.
2. 어린양이 둘째 인을 떼실 때(6:3,4)
어린양이 두 번째 인을 떼십니다. 그러자 둘째 생물이 “오라”고 말하고 붉은 말이 나옵니다. 붉은 말을 탄 자는 큰칼을 받고 허락을 받아서 땅에서 화평을 제하여 버립니다. 서로 죽이게 합니다. 불화와 전쟁이 있습니다.
3.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실 때(6:5,6)
어린양이 셋째 인을 떼니, 셋째 생물이 “오라”고 말합니다. 검은 말이 나오고 그 말을 탄 자는 손에 저울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에게 들리는 소리가 있습니다. 요한이 듣기로는 네 생물 사이에서 나는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한 데나리온에 밀 한 되요 한 데나리온에 보리 석 되로다.”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입니다. 하루 종일 일해야 밀 한 되나 보리 석 되 밖에 사지 못합니다. 밀 한 되는 한 사람의 하루 식량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가족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보리는 밀을 먹는 사람들보다는 더 가난한 사람들이 먹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표현합니다. 그러나 “감람유와 포도주는 해치 말라”고 하십니다. 그가 하는 일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4.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실 때(6:7, 8)
어린양이 넷째 인을 떼니, 넷째 생물이 “오라”하고, 이어서 청황색 말이 나옵니다. 그 말을 탄 자의 이름은 사망입니다. 음부가 그 뒤를 따릅니다. 저희가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칼로 죽이고 기근, 흉년으로 죽이고, 사망으로 죽이고, 땅의 짐승으로 죽입니다.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었다’고 했으니 그 권세가 제한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어린양이 인을 떼심(6:1)
본문을 읽어보면 그 내용이 그렇게 밝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화평이 없고, 서로 죽이고, 극심한 경제난에 전쟁과 사망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무서워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풀리지 않는 궁금한 점도 많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잘 읽어보십시오. 이 네 인을 떼는 데 있어서 확실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어린양이 인을 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6장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성도들로 하여금 이런 관점을 갖고 읽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4장과 5장을 앞에 놓으신 것 같습니다. 이 관점을 알고 보면 본문이 매우 밝아 보이고 감사한 마음으로 읽게 됩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들의 주도권을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이 쥐고 계십니다. 우리 위해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 삼으신 주님이 인을 떼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명령대로, 허락과 허용대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관점에서 우리는 기쁨과 자유와 여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보고 그대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놔두고 확실한 것을 굳게 붙잡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우리의 환경과 처지가 어렵거나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그 모든 것을 아시고 조절하시는 분이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지금도 일하고 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제 21과 다섯째, 여섯째 인을 떼심
계시록 6:9-17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 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10)
1.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6:9-11)
어린양이 다섯째 인을 떼실 때는 앞의 네 상황과는 다른 장면이 전개됩니다. 사도 요한은 제단아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봅니다. 모세가 지은 제단의 원형이 하늘에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다가, 그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 당한 사람들입니다.
1) 순교자의 기도
그들이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거룩하고 참되신 대 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신원이란, 억울함을 갚아준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성도들이, 더욱이 순교자들이 그런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라며 궁금해 할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이와 비슷한 질문을 할만한 내용들이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대답은 똑같습니다. 성도들의 기도나 호소의 본심은 자신들의 원수에게 보복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결코 자신들을 위한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입니다. 즉 성도를 죽인 자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비웃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가 속히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받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 대 주재’이심을 만방에 나타내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 날에 그것이 영광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2) 기도의 응답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바로 나타납니다. 각 사람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십니다. 두루마리로 착오하지 마십시오. 흰 두루마기는 성도들에게 덧입혀진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함을 나타냅니다. 천국잔치에 참여한 구원의 영광입니다.
“아직은 잠시동안 쉬”라고 하십니다. 주안에서 죽은 순교자들이 지금 복되게 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무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쉬라고 하십니다. 범사에 주님의 때가 있습니다. 은혜의 때가 있고 진노의 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급하게 심판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으십니다. 이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조급하지 않고 유순하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순교자의 수
“그 수가 차기까지”는 하나님의 정한 수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수가 얼마인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하나님만 아시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직도 더 많은 주의 종들이 죽임 당할 것이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순교에 주님이 확실하게 관여하심을 증거 합니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의 계획에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이 있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영혼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를 들을 때, 밧모섬에 유배 중에 있던 요한, 게다가 당시의 교회들의 형편을 잘 아는 사람으로서 요한의 관심은 비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더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진행은 하나님의 시간에 따르는 것임을 다시금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임을 더욱 확신하며 마음에 평안을 얻었을 것입니다.
2.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실 때(6:12-17)
어린양이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굉장히 무섭고 놀랄만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큰 지진이 납니다. 해가 완전히 어두워집니다. 달이 피같이 됩니다. 하늘의 별들이 태풍에 과일 떨어지듯이 떨어집니다. 하늘이 말리고 없어집니다. 산과 섬이 이동합니다. 온 우주가 파괴됩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이 진노하시는 큰 날이기 때문입니다. 성부와 성자는 신성과 의지에 있어서 하나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업신여기며, 교회를 핍박한 세상에 쏟아 부으시는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이 무서운 진노 앞에서 땅의 임금들, 왕족들, 장군들, 부자들, 강한 자들과 종들, 자주자들이 굴과 산 바위틈에 숨습니다. 가장 담대한 사람조차도 공포에 쌓일 것입니다. 공포에 쌓인 상태로 산과 바위를 의지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그때에도 여전히 다른 무엇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진노 앞에 어느 누가 설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큰 자와 작은 자 모두를 포괄합니다. 그 심판을 피할 자 없고, 숨겨질 자 없습니다. 복음의 은혜를 저버린 자들이 그 날에 외치는 절망소리를 들어 보십시오. “누가 능히 서리요”(나 1:6; 말 3:2; 스 9:15).
회개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들이 맞게 될 그 날은 이미 돌이키기에는 늦어버린 날입니다. 지금이야말로 회개하고 믿어야 할 때입니다.
제 22과 인 맞은 자의 수
계시록 7:1-8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3)
7장은 막간의 장입니다. 여섯째 인이 이미 떼어졌습니다. 그리고 일곱째 인은 8:1에서 떼어 질 것입니다. 7장은 그 사이에 막간으로 보여지는 환상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여섯째 나팔과 일곱째 나팔사이에서도 막간(10:1-11:14)이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그리스도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심판 날에 안전함을 얻으며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6장 끝 부분에서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의 진노에서...누가 능히 서리요.” 7장은 그 말에 대한 답변이 될 수 있습니다. 능히 설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은 자들입니다.
1. 억제되고 있는 심판(7:1-3)
요한이 보니 네 천사가 동서남북 땅의 네 모퉁이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천사들입니다. 거기서 바람을 붙잡고 그 바람이 땅이나 바다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분다는 뜻은 우주를 초토화시킬 가공할 심판을 말합니다. 지금 그것을 막고 있다는 뜻입니다.
왜 천사들은 바람이 불지 못하게 합니까? 왜 심판을 억제하고 있습니까?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무슨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에게 인을 치는 일입니다.
2. 인 맞은 자의 수(7:4-8)
우리는 인친다는 뜻을 14장에서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 인침받은 무리, 곧 14만 4천이 다시 나옵니다. 그들을 일컬어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는 자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은 주님자신이 쓰신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주신 이름인 만큼 그 이름을 받은 사람은 주님께 귀중한 존재이고 주님 자신의 소유인 것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고, “사람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계 14:.4). 인을 치는 것은, 주의 이름을 이마에 썼다는 것과 같은 표현이고 그 뜻은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주셨다는 표시입니다. 그 거룩한 무리가운데 포함시켰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사실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 하나 불러 그 우리에 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보혈로 이들을 사시고 소유하셨습니다. 자신의 의를 덧입혀 의롭다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이들을 보호해 주십니다. 바람이 몰아친다 하여도 인침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해치지 못합니다. 심판이 와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녀들을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인칠 자가 아직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구원할 자가 많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최후의 순간까지라도 기다리시며 남은 자를 구원하십니다. 아직 이 세상과 우주가 건재한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 천사가 앞의 네 천사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를 해하지 말라.”
그 인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천사가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옵니다. 그곳은 사도 요한 당대로 보면 이스라엘 쪽입니다. 드디어 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치는 일을 합니다.
인침받은 자를 요한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숫자에 대하여는 듣게 됩니다. 그 수는 이스라엘의 각 지파 중에서 14만 4천명이었습니다. 만일에 사도 요한이 여기까지만 들었다면 아마 의아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숫자는 14만 4천밖에 안되고 그것도 모두 유대인들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요한이 전도하고 목회를 한 지역은 대부분이 이방인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바로 이어서 그 궁금함이 풀립니다. 계 7:9에서 요한은 각 나라와 각 족속과 각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흰옷 입은 무리들을 봅니다. 구속받은 성도는 유대인만이 아니고 온 세계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옵니다. 그 수는 14만 4천만이 아니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무리들입니다. 그렇다면 14만 4천은 문자대로 이해할 것이 아닙니다. 상징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상징의 뜻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모든 자의 수, 곧 구속함을 받은 모든 사람의 수, 또는 구약과 신약시대는 물론 지상의 모든 교회를 상징하는 수입니다.
이들이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입니다(계 7:14). 처음 질문(6:16,17)의 답변입니다. 궁금해하고 염려했던 요한의 마음이 시원스런 답을 얻게 될 뿐 아니라 큰 위로와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23과 성도들의 천국생활
계시록 7:9-17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10)
지난주에 배운 끝 부분부터 시작합니다. 지난주 배운 내용을 성경을 보면서 얘기해 봅시다.
그 후에 요한은 셀 수 없는 큰 무리를 봅니다. 구원받은 자들의 수효가 많기 때문에 다 셀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십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아십니다. 그들은 각 나라와 각 족속과 각 방언에서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흰옷을 입었습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씻음을 받고 의롭다고 인정받은 사람들입니다(14).
1. 구원받은 사람들의 찬송(7:9, 10)
그들이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기뻐하며 크게 찬송합니다.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서 찬송합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있도다.” 구원하심이 우리 하나님께 있습니다. 구원하심이 우리 어린양께 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고, 이 노래는 아무리 많이 불러도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내용입니다. 이 노래는 성경에서 계속 끊임없이 나오는 가사입니다.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에 부른 찬송의 가사 중에 나옵니다. “주는 나의 힘이요 나의 노래시며 주는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출 15:2). 시편에 무수하게 나옵니다. “의인의 구원이 여호와께 있도다”(시 37:39). 이사야 선지자가 외칩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사 43:11).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칩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
2. 화답 송(7:11, 12)
이어서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 주위에 서 있던 모든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합니다. 앞에서 흰옷 입은 무수한 성도들이 드렸던 구원찬송에 대한 화답송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찬송과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책입니다.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앞 뒤에서 아멘입니다. 아멘과 아멘 사이에 우리 하나님께만 영원히 있는 일곱 가지를 찬송합니다.
3. 흰옷 입은 자들(7:13, 14)
장로 중에 하나가 요한에게 묻습니다. “이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이 질문은 장로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고 요한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응답하여 이르되”라고 했습니다. 이미 요한이 궁금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요한도 그 장로가 알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당신이 알리이다”라고 합니다.
장로의 대답이 이어집니다.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온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신자들이라고 해서 환난이 없지 않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사람들이 나열됩니다. 그들이 ‘악행을 받고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과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고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에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요 15:18-20)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흰옷 입은 신자들은 그 환난에서 나온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큰 환난에서 이기고 나오게 하셨습니다.
4. 성도들의 천국생활(7:15-17)
그러므로 흰옷 입은 자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쉬지 않고 하나님을 섬깁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흰옷 입은 자들 위에 장막을 칩니다. 하나님이 그 택한 백성에게 하신 많은 약속들을 세 마디로 요약한 말씀이 있는데,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내가 너희가운데 거하리라’입니다(레 26:11,12; 겔 37:26-28). 이것이 그대로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누릴 완성된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잘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광야와 같은 세상살이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목자께서 그들을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즉 어린양은 그들을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21:6; 22:1, 17). 어린양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들이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교통하며 살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입니다. 계 21:4절의 말씀대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완전한 기쁨, 평안과 영광, 친근한 사귐, 충만한 생명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4-7장은 환난가운데 있는 교회들에게 보여주신 계시입니다. 환난과 핍박이 성도들을 다 멸해버릴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 모든 것을 허락하시고 통제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위로 받으면서 든든함을 가지고 감사와 기쁨과 찬송으로 주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제 24과 네 나팔
계시록 8:1-13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4)
6장의 연속으로 마지막 일곱째 인을 어린양께서 떼십니다. 그때에 하나님 앞에 있던 일곱 천사가 나팔을 각기 하나씩 받습니다. 천사들이 나팔을 받기 전에 “하늘이 반 시 동안쯤 고요하”다고 했습니다. 땅에 쏟아질 심판 전의 고요함입니다. 침묵은 하나님의 진노를 보다 인상깊게 합니다.
1. 그리스도의 중보 기도(8:3, 4)
각 천사들이 나팔을 받은 후에, 또 다른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가 금 향로를 가지고 제단 위에 서 있습니다. 그에게 많은 향이 주어집니다. 그 향과 함께 모든 성도들의 기도를 보좌 앞 금단에 드리게 될 것입니다. 여기 ‘많은 향’은 자기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늘 성소에서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십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 하시는 자시니라”(롬 8:34). 성도들의 기도가 불완전하지만 중보자 그리스도의 중재로 온전하게 되어 하나님께 드려집니다.
2. 기도의 응답: 심판(8:5)
그 다음에 천사가 바로 그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습니다. 단 위의 불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합니다. 같은 향로가 하나님께 성도의 기도를 드리는 데 쓰이고, 또 대조적으로 교회의 공적 원수들에게 진노를 담아 붓는 그릇으로도 쓰입니다. 고후 2:14-16이 연상됩니다. 똑같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구원받을 자들에게는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되고 멸망 받을 자들에게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됩니다.
천사가 향로의 불을 땅에 쏟았더니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납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땅에 내리는 심판은 그 기도의 응답인 것입니다.
3. 네 나팔(8:6-12)
그러자 일곱 나팔을 가진 일곱 천사가 나팔 불기를 준비합니다.
첫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랬더니 피 섞인 듯한 우박과 불이 땅에 쏟아지는데 땅의 1/3과 수목의 1/3과 각종 푸른 풀의 1/3이 타버립니다. 우박과 불의 파괴적 특성이 실감납니다.
둘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랬더니 불붙는 큰 산과 같은 것이 바다에 던져집니다. 산이 아니라 산처럼 보이는 상징입니다. 그것이 이글이글 타면서 바다에 던져집니다. 그러자 바다의 1/3이 피가 됩니다. 바다의 생명 가진 피조물들의 1/3이 죽습니다. 배들의 1/3이 깨집니다. 배들이 깨졌다면 선원과 선객도 죽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요!
셋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랬더니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떨어집니다. 강들의 1/3에 떨어집니다. 여러 물샘들에 떨어집니다. 그러자 물들이 다 쓴 물이 되고 그 물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별은 지구보다 작은 것도 있지만 훨씬 더 큰 것도 있습니다. 횃불처럼 타는 큰 별이 떨어진다니 이보다 더 큰 공포를 주는 것이 또 있겠습니까? 물론 그 별이 쑥이라고 해석해 주었으므로 실제의 별이 아니라 수질을 오염시키는 엄청난 자연현상을 상징할 것입니다. 사람이 물을 마실 수 없어서 죽게 되는 재앙이니 보통 일이 아닙니다.
넷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그랬더니 해의 1/3과 달의 1/3과 별들의 1/3이 어두워집니다. 침을 받아서 폭발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낮이나 밤의 1/3이 어두워집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인하여 자연은 저주를 받았고 인간의 죄악이 증대되면서 자연의 저주 현상은 더욱 심해집니다. 빛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등지고 교만과 불순종으로 스스로 흑암을 선택한 이들은 심판 날에 자신들이 선택한 어두움에 해당하는 두려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더 가혹한 심판을 예언함(8:13)
네 천사들이 나팔을 분 후에 사도 요한은 또 다른 것을 봅니다. 공중에 날아가는 독수리를 봅니다. 그 독수리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외칩니다.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으리로다 이 외에도 세 천사의 불 나팔 소리를 인함이로다.” 그 의미는 남은 세 가지 나팔 재난은 처음 네 가지 보다 더욱 가혹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심판들은 애굽의 재앙들을 상기시키는 표현들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도를 핍박하는 세상(=애굽)에 쏟아지는 심판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계시록의 심판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해서 환경을 통한 경고의 나팔을 불고 계십니다.
제 25과 다섯째 나팔 (첫째 화)
계시록 9:1-12
“오직 이마에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4하)
1. 하늘에서 떨어진 한 별이 하나님께로부터 무저갱 열쇠를 받음(9:1, 2)
다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떨어진 별 하나를 봅니다. 이 별이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정반대의 입장들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궁금증을 유보하고, 단지 이 별이 무저갱의 열쇠를 받고 무저갱을 여는 일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인격적인 존재인 정도로만 알아도 본문을 이해하는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 열쇠를 누구한테 받았습니까? 물론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가 무저갱을 여니 그 구멍에서 연기가 올라옵니다. 무저갱은 무엇입니까? 그곳은 타락한 천사들, 악령들이 갇혀있는 장소입니다. 귀신들의 감옥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눅 8:31).
그 연기 때문에 해와 공기가 어두워집니다. 해와 공기는 사람을 살리는 복음을 뜻합니다. 햇빛과 공기를 어둡게 하는 연기는 온갖 악한 사상을 세상에 퍼트려 진리를 가리우는 역할을 뜻합니다. 이 세상의 악한 사상, 악한 행위, 악의 영향력을 가지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운동이 있습니다. 여기서 분명히 할 것은 해가 어두워졌다고 해서 그 빛을 발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단지 연기로 인해 가려졌을 뿐입니다.
2. 무저갱에서 나온 황충들과 그 역할(9:3-12)
그 연기가운데서 황충이 나옵니다. 이 황충들은 실제의 황충이 아니라 마귀를 임금으로 둔 악한 영들입니다(11). 이 황충들이 권세를 받았습니다. 전갈의 권세와 같은 권세를 받았습니다. 요한계시록은 구약에서 쓰이는 용어들을 잘 사용합니다. 에스겔 2:6절에서 전갈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말을 하는 무리들을 지칭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눅 10:18,19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떨어진 마귀의 세력을 전갈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권세는 극히 제한된 권세임을 아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께서 황충에게, 땅의 풀이나 푸른 것 그리고 각종 수목은 해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이마에 하나님의 인 맞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지 않은 사람들만 해하라고 하십니다. 이 재앙은 불신자들에게만 임하는 재앙입니다. 이 화는 신자들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 주께서 경고로 주시는 재앙입니다. 주께서 그들을 해하되 죽이지는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한 괴롭게 하되 5개월 동안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재앙의 시간이 부분적입니다. 8장에서는 재앙의 면적이 제한적이었습니다. 황충이 활동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허락하심 안에서만 진행됩니다.
불신자들이 당하는 괴로움의 정도가 전갈이 사람을 쏠 때와 같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워서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럽고 낙망이 됐으면 죽으려고까지 했겠습니까. 설령 죽는다고 해도 인생의 육체적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피할 정도의 고통이므로 지옥 가기 전에 맛보는 지옥의 고통입니다. 불신자들이 악령들에게 괴롭힘 당하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도 성령 안에서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것이 주의 크신 은혜입니다. 소요리문답 제36문을 생각해 봅시다. “의롭다 하심과 양자로 삼으심과 거룩하게 하심에 따라오거나 거기서 나오는 유익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함과 양심의 평안과 성령 안에서 얻는 기쁨과 은혜의 많아짐과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황충들은 그 모양이 전쟁하는 말들 같고, 그 머리에 금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습니다. 비 진리는 잘 달리는 군마처럼 속히 퍼지는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 진리운동은 일시적으로 승리한 것 같은 기세가 있습니다. 그러나 금 같은 면류관이라고 했지 실제로 금 면류관은 아닌 것처럼 비 진리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 얼굴은 사람 같고 머리털은 여자머리털 같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지능의 표식입니다. 마귀의 세력도 어느 정도는 모략이 있습니다. 남자가 긴 머리를 가진 것은 자기 지위를 떠난 것을 상징합니다.
황충의 이는 사자의 이 같고 철흉갑 같은 흉갑이 있습니다. 사자의 이 같다는 뜻은 거짓 교훈으로 사람의 영혼을 해하는 잔인성을 상징합니다. 그 날개소리가 대단합니다. 마치 많은 군마들이 전쟁터를 달려가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이 어느 정도는 정복력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 꼬리에는 전갈처럼 쏘는 살이 있습니다. 꼬리는 거짓 선지자를 상징합니다. 이 거짓 진리가 마귀의 화살입니다. 꼬리의 권세가 다섯 달 동안만 사람을 해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한 말을 반복함으로 사단과 그 세력의 한계를 강조합니다. 꼬리로 인간을 해한다는 것은,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처럼 비 진리로 사람들을 해롭게 한다는 뜻입니다(사 9:15).
황충들에게 임금이 있는데 무저갱의 사자입니다. 그 이름은 아바돈 혹은 아볼루온입니다. 하나는 히브리어이고 하나는 헬라어입니다만 뜻은 둘 다 똑같이 ‘멸망시키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단이 하는 일은 사람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화입니다. 아직도 두 화가 남아 있습니다.
제 26과 여섯째 나팔 (둘째 화)
계시록 9:13-21
“네 천사가 놓였으니 그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삼분의 일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이더라”(15)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붑니다. 요한이 하나님 앞 금단 네 뿔에서 나는 한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이 나팔 가진 여섯째 천사에게,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를 놓아 주라”고 합니다. 여섯째 천사는 나팔도 불고 명령도 수행합니다.
1. 하나님의 정하신 때(9:14, 15)
‘큰 강 유브라데에 결박한 네 천사’들은 그 년 월 일 시에 이르러 사람 1/3을 죽이기로 예비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정하신 정확한 때가 있습니다. 연월일시가 있으니 하나님의 예정이 얼마나 자세합니까! 그 때까지는 그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때가 이르러 하나님이 하라고 명해야 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때가 있습니다. 범사를 하나님께 맡깁시다. 동시에 부지런히 힘써서 기회를 잃지 맙시다.
요한이 2만 만이라는 마병대의 숫자를 듣습니다. 문자대로 한다면 2만의 만이니 2억입니다. 그러나 문자대로 이해하기보다는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무리를 나타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중생하지 못한 인류에게 파멸을 가져오는 귀신들의 무리가 인간의 계산을 능가하는 군대와 같은 숫자일지라도 성도들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저와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5-17). 그들은 결코 성도를 건드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 10:28, 29).
2. 화를 받는 대상: 불신자들(9:16-21)
요한이 환상가운데서 그 말들과 탄 자를 보니 세 가지 색깔의 흉갑이 있습니다. 불빛, 자주빛, 유황빛입니다. 그 말들의 머리는 사자 머리 같고 그 입에서는 불과 연기와 유황이 나옵니다. 이런 표현을 보아도 상징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말의 입에서 불이 나올 수는 없으니까요. 불과 연기와 유황, 이 세 가지는 전쟁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세 가지로 인하여 사람 1/3이 죽임을 당합니다. 다섯째 나팔에서는 사람을 죽이지 않고 괴롭게 하는 것이었지만 여기서는 사람을 죽입니다. 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죽음을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이 화를 받는 대상이 불신자들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본문 끝에 가서 죽고 남은 자들이 이런 재앙을 보고서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더 우상을 숭배하며 더 강퍅하게 행하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억울함을 당할지라도 악인들을 벌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믿음으로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그 말들의 힘이 그 입과 꼬리에 있습니다. 그 꼬리는 뱀 같고 또 꼬리에 머리가 있습니다. 이것으로 사람들을 해합니다. 입과 꼬리에서 나오는 것들은 거짓 교훈과 악한 사상을 말합니다.
3. 회개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함(9:20, 21)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그 손으로 행하는 일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손으로 행하는 일’은 멸망으로 이끄는 일입니다. 그것을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 나무, 돌의 우상에게 절합니다. 이 우상들은 보지도 못하고 다니지도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도 그것들을 섬깁니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는 단지 인간의 손으로 만든 형상들에게 절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상숭배의 본질은 창조주를 피조물의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것이고 피조물을 창조주의 자리에 앉히는 ‘교만 죄’입니다.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인간들은 그런 일을 하면서 결국은 자기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는 ‘참람 죄’를 범합니다. 우상숭배는 이렇게 가장 큰 죄악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두 다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사랑해야 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이,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하지 않습니다. 정말 놀라운 것은, 죄 때문에 천벌이 내리는 것을 알고도 회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도들은 날마다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회개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십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우상숭배뿐 아니라 십계명이 금하는 것을 범하고 있습니다. 강퍅합니다. 죄 때문에 당하는 재앙을 보고도 같은 죄를 범한다면 정말로 강퍅한 것입니다. 살인, 복술, 음행, 도적질은 한마디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하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경건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제 27과 세세토록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
계시록 10:1-7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6)
본문은 여섯째 나팔(둘째 화)과 일곱째 나팔(세째 화) 사이에 삽입된 계시(10:1-11:14)로서, 앞으로 임할 재앙들이 온 세계에 미칠 것을 말씀합니다.
1. 힘센 천사가 내려옴(10:1-3상)
요한이 보니 힘센 다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그는 천사장과 같은 높은 지위의 천사로서 하나님의 전령입니다. 그의 모습이 어떻게 묘사됩니까? 구름 속에 있고 그 얼굴은 해 같이 빛납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선포하는 영광과 엄숙함을 나타냅니다. 그 머리 위에 무지개가 있습니다. 노아시대의 무지개를 생각나게 합니다. 그 무지개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였습니다. 심판 중에 나타난 하나님의 긍휼이었습니다. 천사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 것인지 짐작이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려는 것입니다. 그때의 언약을 지금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천사의 발은 불기둥 같습니다. 불기둥도 역시 두 가지 역할을 기억나게 합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할 뿐만 아니라 공격해오는 애굽 군대를 가로막고 심판하는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 오른 발은 바다를 밟고 있고 왼 발은 땅을 밟았습니다. 땅과 바다는 땅위 전 세계를 지칭합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온 세상에 미칠 것을 나타내 보여줍니다. 천사가 큰 소리로 외칩니다. 사자의 부르짖는 것 같이 외칩니다. 그러므로 이 소리를 듣는 자들은 경외심을 가지고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할 것입니다.
2. 기록되지 않은 일곱 우레의 소리(10:3하, 4)
힘센 천사가 큰 소리를 외칠 때에 일곱 우레들이 각기 제 소리로 말을 합니다. 요한이 그 일곱 우레의 소리들을 기록하려고 합니다. 요한이 기록하려고 한 것을 보니 그 소리의 내용을 알아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전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서 그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기록하지 않았고 그 내용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가슴은 확신이 있었을 것이고 뜨거움도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고 그분의 뜻을 알 수 있을 따름입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는 도무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 계시의 말씀을 배우도록 하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은 신구약 성경 66권뿐입니다.
3. 천사의 맹세(10:5-7)
요한이 다시 천사를 보니 그가 하늘을 향하여 오른 손을 들고 맹세를 합니다.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만물을 창조하신 자를 가리켜 맹세합니다. 그 맹세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7). ‘하나님의 비밀’은 복음 곧 신구약 성경을 지칭합니다. 왜 복음을 비밀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깨닫고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그만큼 놀라운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비밀을 하나님의 종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해왔습니다. 그 비밀이 드디어 이루어질 것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들에게도 비밀일 수 있습니다. 심판 때에 완전히 이루어지기까지는 아직 비밀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비밀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에 분명하게 계시되고 그의 재림 때에 절정에 달하게 되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비밀이 드디어 이루어 질 때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아니하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래서 천사는 맹세하여 외치는 것입니다.
4. 세세토록 살아 계신 창조주 하나님(10:6)
천사가 이렇게 확실하게 큰 소리로 맹세까지 하며 선포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세세토록 살아 계신 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신 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처음이요 나중이십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볼 수 있는 찬송과 경배가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께 드려집니다(계 4:9-10). 시작하셨고 섭리하시고 마무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며, 그 결과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계 15:7에서는 진노하는 일이 바로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의 역사임을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크고 작은 것들, 보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창조하셨습니다. 전능하신 능력으로 창조하셨습니다. 매우 크신 계획을 가지고 만드셨습니다.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지 않는 피조계는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그분의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구원하시고 심판도 하시고 그분의 영원한 나라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또한 세세토록 살아 계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와 안심을 줍니다.
소요리문답 제 8문 : 하나님은 그 작정을 어떻게 이루십니까?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일로써 그 작정을 이루십니다.
제 28과 달콤하고 쓴 하나님 말씀
계 10:8-11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10)
본문은 우리에게 익숙한 말씀입니다만 많이 묵상해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1. 요한이 작은 책을 먹음(10:8, 9)
천사의 손에 작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이 펼쳐 져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나던 음성이 요한에게 말합니다.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8). 그 말을 듣고 요한이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고 합니다. 천사가 말합니다.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같이 달리라”(9). 요한이 그 작은 책을 갖다 먹었습니다. 이 ‘먹었다’는 표현은 이미 구약에서부터 사용되어 온 표현입니다. 같은 표현을 에스겔서와 예레미야서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겔 3:1-3. 렘 15:16). 그 뜻은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받았다는 것입니다.
2. 달콤한 하나님 말씀(10:9, 10)
요한이 그 작은 책을 받아먹으니 입에서 달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꿀과 같이 달콤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바로 배우기만 하면 꿀처럼 단 것입니다.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 19:9,10). 성경은 그 자체가 진리이기 때문에 달콤합니다. 창조주요 섭리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알려 주는 말씀이기에 달콤합니다. 인생의 본분을 알려 주기 때문에 달콤합니다.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주고 그 소망을 갖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우면 마음이 기쁘고 뜨거워집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께 성경을 배우다가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면서 성령님의 조명을 받으면 우리의 신관, 인생관, 우주관, 구원관, 내세관 등이 반듯하게 정리되고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의 단 맛입니다.
3. 쓰디 쓴 하나님 말씀(10:9, 10)
그러나 먹은 후에 배에서는 쓰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쓰다는 뜻이고 또 하나는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쓰다는 뜻입니다.
1)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 쓴 일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좇아서 사는 것이 쓰디 쓴 일이기도 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잘 되는 일입니다만 그 과정에 있어서 쓰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을 순종하기 싫은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온전히 성화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욕심과 하나님의 계명이 상충될 경우 순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순종해야 합니다. 쓴 것도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달콤한 것으로만 여기고 그렇게만 들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전혀 쓰지 않은 부담 없는 말씀으로만 받으려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심령을 찔러 쪼개기도 합니다. 찔림을 받았을 때 아픔이 있는 법입니다. 그 아픔을 회피하지 말고 내가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찌할꼬’ 하는 회개의 반응이 나에게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 오염되어서 생각하는 것이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자기 중심적입니다. 그런 우리의 존재와 가치관이 바뀌려면 하나님 말씀 앞에서 찔림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거나 들으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기도 해야 합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좋은 말, 내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 나를 건드리지 않고 나는 나대로 있고 내게 좋은 것만 덧붙여 주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얼마나 간사하고 가볍고 완고한지요! 나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입니다. 나의 문제입니다. 내가 넘어야 하고 내가 도려내야 하고 변해야 할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생과 사의 문제로 하나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읽느냐”(눅 10:26).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순종해야 할 말씀으로 받느냐 아니면 지식으로만 알면 되는 줄로 아느냐’ 하는 문책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주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쓴 일입니다만 가장 잘하는 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90문 :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읽고 들어야 그것이 구원을 위하여 효력이 있게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을 위하여 효력이 있게 하려면 우리는 부지런함과 마음의 준비와 기도로써 나아가야 하며, 믿음과 사랑으로 그 말씀을 받아 들여 우리 마음에 간직하며, 우리의 생활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39문 :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의 나타내 보이신 뜻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쓴 일입니다.
그때에 요한에게 들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배에서 쓰다”는 뜻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말씀입니다.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11). 전하기 싫은 마음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해야 합니다. 천사가 밟고 있는 ‘바다와 땅’ 곧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 ‘온 세상’을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으로 표현했습니다(11).
반대하는 자들에게도 전해야 합니다. 불경건한 자들이 듣기 싫어하거나 적대감으로 박해를 할지라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겔 3:11). 예레미야 선지자의 고백을 들어 봅시다.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대저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강포와 멸망을 부르짖으오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여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거리가 됨이니이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중심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7-9).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말씀을 전하다가 수난을 당하게도 하시지만 동시에 그 수난을 끝까지 이겨내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요한계시록도 하나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수난과 핍박을 당하는 요한을 비롯하여 교회들에게 위로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입니다(계 1:9).
4. 달고 쓴 하나님 말씀을 먹는 복된 교회(10:10)
꿀과 같이 단 하나님 말씀을 먹을 수 있는 기관은 교회밖에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말씀을 먹을 수 있으므로 가장 복된 기관입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증거하는 유일한 기관도 역시 교회뿐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영광이고 교회의 표지입니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고난일 수 있고 하나님 말씀을 증거하는 일이 고난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배에서 쓰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쓴 것도 역시 교회의 특권이고 복입니다.
달게 먹고 쓰게 고하는 것이 복된 교회의 사명입니다. 요한은 교회의 대표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요한 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가 하나님의 구원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요한은 다시 예언하여야 한다는 명령에 따를 뿐이었습니다. 자신의 뜻에 따라 전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하라고 하면 기록하고 기록하지 말라고 하면 기록하지 않고, 예언하라고 하면 예언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매여 사는 교회가 복된 교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전해야 하는 역사의 마지막 과정에 교회가 서 있습니다. 듣는 자가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떤 신분, 어떤 입장의 사람이든지 전하여야 합니다.
제 29과 교회를 척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계시록 11:1-2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1하)
요한이 척량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 명령은 누가 하는 것일까요? 그 해답을 11:3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 “나의 두 증인”이라고 했으니 이 명령을 하시는 분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1. 교회를 척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11:1)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지팡이 같은 갈대를 주시면서 말합니다. “일어나서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척량하라.” 요한이 주의 명령을 받고 척량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이 세 가지는 같은 것을 다르게 반복하여 표현한 동의이명(同意異名)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참된 교회를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너희(=신자들, 교회)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고후 6:16,17). “그(=예수 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성도들을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일컫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제단’은 성막 뜰에 있는 제단이 아닙니다. 8:3과 9:13에 나오는 표현과 관련해서 보아야 합니다. 여기 ‘제단’은 바로 앞의 ‘하나님의 성전’의 다른 표현으로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하나님 성전과 제단’, 이 두 표현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하여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아시는 자들로서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고 마침내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 하심으로써 영화롭게 할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신자들)를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를 척량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2. 교회의 주인이시고 교회를 보호하시는 예수 그리스도(11:1)
척량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소유자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척량하라는 명령은 교회가 주님의 소유인 것을 나타냅니다. 겔 40:2과 43:13에서도 그것이 잘 나타납니다. 척량하게 되면 주인이신 하나님께 보고될 것이고 하나님은 교회를 관리하시며 안전하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척량하라는 명령은 내 소유니 내가 보호한다는 뜻입니다.
일곱째 인을 떼기 전에 주께서 신자들을 보호하겠다고 했었는데 여기서도 일곱째 나팔을 불기 전에 교회를 확실하게 소유하고 보호하신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3.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들(11:2)
그러나 ‘성전 밖 마당’은 척량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방인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 두 달 동안 짓밟게 될 것입니다.
‘성전 밖 마당’은 외식하는 교인들을 비유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복음을 받지 아니한 유대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비유합니다. 그 ‘성전 밖 마당’ 차지할 사람들은 이방인들입니다. 여기서 ‘이방인’은 불신앙의 사람들,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그들은 ‘거룩한 성’ 곧 교회를 짓밟을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류 총체를 가리키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자들입니다.
그 이방인들이 주님의 교회를 마흔 두 달 동안 짓밟을 것입니다. 계시록에서 마흔 두 달의 해석이 중요합니다. 1260일(11:3, 12:6), 혹은 3년 반 그리고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12:14)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동일한 기간으로 7년의 절반입니다. 이 기간은 신약시대 전부 곧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의 전 기간을 가리킵니다. 이 기간은 교회가 복음을 증거하는 기간(11:3)이고 교회가 양육받는 기간이고 교회가 박해받는 기간(12:14; 13:5)입니다. 이 기간은 재림 이전까지입니다.
교회가 증거하면서 박해를 받지만 주께서는 그 와중에 교회를 양육하고 연단시키고 돌보아 주십니다.
제 30과 그리스도의 두 증인인 교회
계시록 11:3-14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저희가 굵은 베옷을 입고 일천 이백 육십 일을 예언하리라”(3)
1. 두 증인이 누구인가?(11:3)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두 증인에게 권세를 주리니.” 여기 ‘두 증인’은 두 명의 사람을 지칭하지 않고 ‘신약 교회’를 표상합니다. 이단이나 건전하지 못한 해석을 하는 입장에서 개인으로 곡해하여 어느 특정한 사람에게 대입합니다. 그것은 잘못입니다. 만일에 ‘두 증인’이 문자그대로 두 사람을 지칭한다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그 두 사람과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과 전 세계 사람들이 그들의 시체를 본다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교회를 왜 증인이라고 하지 않고 두 증인이라고 했을까요? ‘둘’은 증거 혹은 증인의 수입니다. 성경에서 증언을 할 때 두 세 증인을 세우라고 합니다. 4절에서도 ‘두 증인’을 “이 땅의 주 앞에서 섰는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로 표현하였습니다. 복음의 빛을 발하는 ‘두 촛대’이면서 동시에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는 ‘두 감람나무’는 바로 증거하는 역할을 맡은 ‘교회’를 지칭합니다.
2. 두 증인인 교회가 주께로부터 무엇을 받는가?(11:3-6)
주께서 교회에 권세를 주십니다. 말씀을 전파할 권세를 주십니다. 이 말씀 전파의 권세는 세상을 구원하는 권세일 뿐만 아니라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권세이기도 합니다. 말씀에 충실한 교회의 심판은 곧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주께서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고 믿음을 고백하는 반석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합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의 권세는 원수를 소멸하는 불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만군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그들이 이 말을 하였은즉 볼지어다 내가 네 입에 있는 나의 말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으로 나무가 되게 하리니 그 불이 그들을 사르리라”(렘 5:11,14).
교회가 굵은 베옷을 입고 1260일 동안 예언할 것입니다(3). 교회가 “굵은 베옷을 입고” 죄에 대하여 연대책임을 지고 통회의 슬픔을 가지고 영혼구원을 위하여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1260일 동안 즉 주의 초림부터 재림 때까지 복음을 전파할 것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저희를 해하고자 한즉 저희 입에서 불이 나서 그 원수를 소멸할지니 누구든지 해하려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죽임을 당하리라. 누구든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권세를 가진 교회를 해하려 하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 두 증인이 권세를 가지고 하늘을 닫아 예언을 하는 날 동안 비 오지 못하게 하고 또 권세를 가지고 물을 변하여 피되게 하고 아무 때든지 원하는 대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땅을 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신약교회가 복음을 전하는 권세가 구약 교회를 대표하는 모세나 엘리야가 전한 복음의 권세와 같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3. 교회가 받는 박해(11:7-10)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7상). 교회가 복음을 증거할 때에 무저갱 소속인 짐승이 전쟁을 일으킵니다.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저희 시체가 큰 성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7하-8). 저희 시체는 교회의 많은 사역자들의 집합체입니다. 교회는 소돔같고 애굽같은 적 그리스도의 세력에 의하여 고난을 당하고 모욕을 당합니다. 그리고 극악한 세상(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서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할 정도로 끊임없이 박해를 합니다(9).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10). ‘두 선지자’는 앞에서 말한 대로 ‘두 증인’이고 곧 ‘교회’를 지칭합니다. 교회는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외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증언합니다. 이 복음증거가 죄의 쾌락을 즐기는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괴롭게도 합니다. 거짓 교회는 사람에게 아첨하며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을 합니다. 참 교회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죄를 책망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참 교회가 전하는 복음 때문에 괴로워하던 사람들이 교회의 죽음을 보고 즐거워합니다. 심지어 서로 예물을 보낸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타락했고 얼마나 교회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4. 교회가 이기도록 하시는 하나님(11:11, 12)
그러나 하나님께서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으십니다. 그러자 교회가 발로 일어납니다. 마치 주께서 사흘간 무덤에 계시다가 다시 사신 것처럼 교회도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의 뒤를 이어 부활합니다. 주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죽은 신자들(교회)이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생기는 몸과 영혼이 결합하여 살 수 있도록 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은 창조의 능력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청난 창조와 부활의 능력 앞에서 핍박자들이 크게 두려워합니다.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12). 교회가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서 그것을 보게 됩니다.
5. 구원과 심판으로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11:13, 14)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13). 교회를 핍박하던 세상 나라에 하나님의 징벌이 나타납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선포하였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교회)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전 3:17).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보면서 남은 자들이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둘째 화는 지나갔습니다. 셋째 화가 속히 이를 것입니다. 둘째 화는 여섯째 나팔 재앙이고 셋째 화는 일곱 째 나팔재앙입니다.
제 31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찬송함
계시록 11:15-19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15하)
여기서부터는 그리스도께서 만왕의 왕으로 강림하셔서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과 하나님의 왕국의 완성을 말씀합니다.
1. 성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영원한 나라(11: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자 하늘에 큰 음성들이 들립니다.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노릇 하시리로다.” 여기서 ‘우리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그 증거로는 ‘그(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세상 나라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표현은 되지 않았지만 성령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서 성령을 통해 역사 하시고 성자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역사 하시고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역사 하신다’는 구조를 꼭 알아야 합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역사에 동시적으로 관여하십니다. 성경에서 어느 한 위나 두 위가 부각될 때에 이 구조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 6문 : 하나님의 신격에 성부, 성자, 성령, 삼위가 계시며 이 삼위는 한 하나님이시오 본체가 하나이시며 권능과 영광이 동등이십니다.
이제는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그분이 영원히 왕노릇 하실 것입니다. 세상 왕국이 찬탈세력인 사단과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삼두체제 하에 있다가, 드디어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 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중단되지 않는 영원한 나라를 이루신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세세토록 다스리실 것입니다. 사단의 세력들이 심판과 멸망을 받고 성도들은 상을 받을 것이며 주의 통치에 동참하게 될 것입니다.
2. 이십 사 장로들의 찬송 : 교회의 찬송(11:16-18)
하나님의 왕국이 완성된다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 앞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합니다. 이십 사 장로는 교회를 지칭합니다.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노릇 하시도다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이 때의 찬송 가사에 요한계시록 앞부분에서 볼 수 있었던 표현과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오실 자’란 표현이 없어진 것입니다. 왜 그런지 잘 아시겠지요!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며 드리는 찬송이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큰 권능으로 왕노릇하시는 것을 찬양합니다. 교회가 주를 향하여 드려야 할 찬송의 주를 이룹니다. 오늘날 교회가 좋은 찬송을 많이 잃어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의 부르지 않는 찬송들 중에 좋은 찬송이 많습니다. 아마도 어렵다는 이유로 잘 불려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를 높이고 기리는 찬송을 하는 데 힘과 정성과 노력을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찬송가 앞부분의 찬송, 좀 더 정확히 말해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사역을 높여 기리는 찬송을 많이 부르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때가 온 것을 찬양합니다. 죽은 자들이 심판 받을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악하게 분노하는 이방인들을 심판하시는 주님을 찬송합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는 것을 찬송합니다. 성도는 악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도 기뻐하며 찬송해야 합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선 안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는 것을 찬송합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상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이루시는 것을 찬송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3. 하나님의 성전 안에 있는 두 장면(11:19)
그때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립니다. 그 성전 안에 두 가지가 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언약궤’이고 다른 하나는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우박’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언약궤’는 구약의 언약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들과 맺으신 언약을 이제는 다 실현하셨다는 표식의 상징물입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우박이 왜 있을까요? 심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나온다는 뜻입니다. 즉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공의롭고 엄위로우신지 보여줍니다.
하늘 성전 안에 있는 두 가지는 구원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과 영광과 그 언약에 신실하심을 드러내는 상징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면서 그 계명에 순종하는 자들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제 32과 교회가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다스리고 양육하심
계시록 12:1-6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
하늘에 큰 이적이 보입니다. 큰 이적의 내용은 다음에 나오는 사건들입니다. 왜 큰 이적이라고 했을까요? 이적은 사인(sign)을 의미합니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여자와 용은 무엇인가를 나타내는 사인이기 때문입니다.
1. 해(태양)를 입은 한 여자(12:1-2)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습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녀의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습니다. 그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아파서 애써 부르짖습니다.
여기서 여자는 마리아와 같은 개인을 지칭하지 않고 주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계 19:7과 21:9에서는 교회를 아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낳은 아이가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했고, ‘그 아이가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 갔다(5)는 것을 보아서 메시야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는 메시야를 낳은 자입니다. 누가 메시야를 낳았습니까? 얼핏 생각하면 ‘마리아’라고 대답하기 쉽지만 본 장의 문맥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여인은 교회를 지칭합니다. 물론 마리아도 이 교회에 속한 지체입니다. 14절에서 ‘그 여자가 광야에서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동안 양육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앞에서 배운 바대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기간 동안 양육받는 것을 지칭합니다. 그러므로 이 여인은 구약의 하나님 백성과 신약의 교회 즉 모든 교회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여인이 해를 입고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의를 입은 교회를 나타냅니다. 계시록 7장 9절의 흰 옷을 입었다는 표현과 같습니다. 그 발 아래 달이 있습니다. 달을 발 아래 둔 것은 승리하는 교회를 표상합니다. 그 머리에는 열 두 별의 면류관을 쓰고 있습니다. 구약교회는 12지파를 기본으로 하고, 신약교회는 12사도를 기초로 합니다. 여기 “열 둘”역시 주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별의 면류관은 교회가 왕적인 영광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며 아파서 애써 부르짖습니다. 이 아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구약교회가 그리스도를 해산하기까지 고통을 겪는 것을 상징합니다.
2. 큰 붉은 용(12:3-4)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입니다. 한 큰 붉은 용이 있습니다. 이 ‘큰 용’은 ‘옛 뱀’이고 ‘마귀’이고 ‘온 천하를 꾀는 자’입니다(9). 교회를 해하려는 붉은 색 살기를 가졌습니다.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를 흘리는데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 용의 머리가 일곱이고 뿔이 열입니다. 그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습니다. 이 일곱 머리와 열 뿔이 17:9-12에도 나오는데 일곱 적 그리스도의 나라와 열 왕을 상징합니다. 사단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땅위의 권력들을 가지고 교회를 해하려고 합니다.
붉은 용의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집니다. 꼬리는 거짓말을 상징하고 여기서 별은 천사들을 상징합니다. 사단은 거짓말로 많은 천사들을 유혹하여 타락케 하였습니다.
붉은 용이 여자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려 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해야 할 가장 급한 사안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는 마귀와 그의 행사를 멸하기 위해 오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해하기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해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붉은 용이나 세상의 어떤 것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시는 아들을 죽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목적을 위태롭게 하거나 막을 수 없습니다.
3. 그 아이(12:5)
드디어 때가 차매 여자가 아이를 낳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 아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입니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과 보좌 앞으로 올라갑니다. 사단은 예수 그리스도를 멸하지 못했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만국을 통치하시고 계십니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시 2:7-9; 계 19:15).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가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 9:6, 7).
4. 여자는 광야로 도망하여 양육받음(12:6)
이것은 신약교회의 세상에서의 삶을 구약교회가 광야에서 생활한 것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1260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자를 광야에서 양육합니다. 교회가 양육받는 곳이 광야와 같은 세상입니다. 감사한 것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기르시기 위해서 그분의 사랑과 지혜로 예비하신 곳이 바로 이 광야 같은 세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그 섭리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려운 곳이긴 하지만 교회가 양육받기 위해서 가장 좋은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1260일은 11장에서 배운 바와 같이 교회의 복음 증거기간이고 양육받는 기간입니다. 즉 신약의 전 시대를 지칭합니다.
제 33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의 승리
계시록 12:7-17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11상)
1.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 : 사단이 쫓겨남(12:7-9)
하늘에 전쟁이 있습니다.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용과 싸웁니다. 그 용의 사자들 즉 사단의 부하 악령들도 참전합니다. 이 전쟁은 사단이 처음에 하늘에서 쫓겨나는 그 일이 아니고, 그렇다고 종말의 싸움도 아닙니다. 이 싸움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의 전쟁입니다. 단지 미가엘과 그의 사자들이 이 전쟁의 대행자일 뿐입니다. 이 싸움에서 용과 그의 사자들이 패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부활 승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늘과 땅의 권세를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 용(옛뱀, 마귀, 사단, 온 천하를 꾀는 자)과 그 사자들이 땅으로 내어쫓깁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사단의 군대가 완전히 패전하였습니다. 이 승리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자기 백성을 사단과 죄악가운데서 건져내셨습니다. 이제 승리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본문과 관련하여 요 12:30-33을 읽고 생각해 봅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2. 하늘의 큰 음성(12:10-12)
사단과 그의 군대가 쫓겨나는 것을 보고 하늘에 큰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과 나라와 또 그의 그리스도의 권세가 이루었으니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죽으심, 부활, 승천의 사건 속에 하나님의 구원과 능력, 그리스도의 권세가 결정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들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습니다. 사단의 정수리가 깨진 것입니다. 더 이상 성도들을 참소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습니다.
“또 여러 형제가 어린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 여기 ‘여러 형제’는 순교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승리에 근거하여 사단과의 싸움에서 이깁니다. “저희가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므로 저희를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계 17:14).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다시 산 자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신자들은 세상에서 고난 당하는 자들이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은 자들이고,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성도들이 사단을 이기게 된 무기 세 가지가 나열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양의 피’이고, 둘째는 그 피를 ‘증거하는 말씀’이고, 셋째는 ‘죽기까지 생명을 아끼지 않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그 가운데 거하는 자들은 즐거워하라.” 이들도 역시 주를 믿는 신자들이지만 이미 세상을 떠나 천국에 들어 가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승리는 하늘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큰 기쁨을 줍니다.
“그러나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저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못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여기 땅과 바다는 땅 위의 생존자들을 총칭합니다. 마귀는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고 그 나라의 도래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 때문에 최후의 발악으로 성도들을 핍박합니다만 그것이 성도들의 소망과 기쁨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이빨 빠진 사자, 쇠사슬에 매인 사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은 패잔병이기 때문입니다.
3. 사단이 교회를 핍박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호, 양육하심(12:13-17)
용이 자기가 땅으로 내어쫓긴 것을 보고 남자를 낳은 여자를 핍박합니다. ‘남자를 낳은 여자’는 교회, 곧 성도들이라는 것을 앞에서 배웠습니다.
여자가 큰 독수리의 두 날개를 받아 광야 자기 곳으로 날아가 거기서 그 뱀의 낯을 피하여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양육 받습니다.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는 신약시대 전 기간을 지칭합니다. 즉 교회가 연단 받으며 양육 받는 전 기간입니다. 그 기간을 이렇게 표현한 것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기 위함입니다. 칼빈에 의하면 ‘한 때’는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가운데 주어진 핍박의 기간이지만 반드시 끝이 있는 기간이고, ‘두 때’는 그 핍박이 더욱 심해짐을 의미하지만, ‘반 때’는 그 핍박받는 기간이 감해질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 24:22).
독수리가 두 날개로 그 새끼를 단련시키듯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시련의 방식으로 돌보시며 양육하십니다(신 32:11-12, 시 103:5, 사 40:31).
여자의 뒤에서 뱀이 그 입으로 물을 강 같이 토하여 여자를 물에 떠내려가게 하려 합니다. 사단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박해합니다. 그러나 땅이 여자를 도와 그 입을 벌려 용의 입에서 토한 강물을 삼킵니다. 교회를 해하려는 사단의 모든 악한 계교가 하나님의 섭리적 간섭으로 인하여 실패합니다. 주의 도우심으로 교회는 반드시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습니다. 사단이 단체인 교회를 주의 도우심 때문에 이길 수 없게 되자, 이제는 신자들을 개별적으로 유혹하여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이 내용의 연속이 다음 장으로 이어집니다.
제 34과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 : 적 그리스도
계시록 13:1-10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10하)
요한계시록 12:7-13:18의 내용은 사단의 삼두체제 즉 사단(큰 용), 적 그리스도(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거짓 선지자(땅에서 올라오는 짐승)가 출현합니다. 그 중에서 본문은 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13:1상)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는 인간들이 살고 있는 세상 전체를 총칭합니다. ‘짐승’은 다니엘서에 나오는 네 짐승의 혼합체로서 말세에 나타날 적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적 그리스도는 어떤 개인이나 그룹이 아니고 하나의 거대한 세력 혹은 활동입니다.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그 세력이 인류를 착취하며 황폐하게 만들기 때문에 짐승으로 상징됩니다.
2. 그 짐승의 모습(13:1하, 2상)
그 ‘짐승’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12장의 사단인 용처럼 이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도 뿔이 열이 있고 머리가 일곱입니다. 그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습니다. 열 뿔은 이 세상의 국가들을 상징합니다. 그 짐승은 국가의 권력도 이용하여 활동할 것입니다. 그 머리들에는 참람된 이름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적 그리스도는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든가 아니면 철저하게 하나님을 적대하는 참람된 입장에 서 있습니다.
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습니다. 적 그리스도의 맹수성을 나타냅니다. 야만적이고 불경건함을 나타냅니다.
3. 용이 짐승에게 능력과 권세를 줌(13:2하-4)
12장에 나오는 용인 사단이 본 장의 짐승, 곧 적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권세를 주었습니다(2). 물론 하나님의 허용 하에 준 것입니다. 그 짐승의 머리 하나가 치명적인 상처를 받아서 죽게 된 것 같더니 죽게 되었던 상처가 다시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그 짐승을 따릅니다. 놀라운 일이라고 다 좋은 일은 아닙니다. 적 그리스도의 세력도 이와 같이 기이한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런 기이한 일의 목적은 자기를 따르게 하기 위한 미혹입니다. 흉내내는 일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위대한 사실을 거짓으로 모방합니다.
온 세상에서 적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것을 보고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합니다. 짐승이 자신을 신격화하여 범 세계적으로 경배를 받는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경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배하는 자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들이 경배하면서 무슨 말을 합니까?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강퍅했던 바로의 말과 같습니다. ‘너희 하나님이 누군관대 감히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교만한 자들의 결말은 결국 큰 재앙의 심판과 멸망뿐입니다.
4. 그 짐승의 역할(13:5-8)
짐승이 큰 말과 참람된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 두 달 일할 권세를 받습니다.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훼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합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라고 본문 자체가 해석을 해 줍니다. 이들은 교회를 지칭합니다. 적 그리스도는 항상 하나님을 멸시하며 교회를 핍박합니다.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성도들을 박해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짐승을 따르고 경배합니다. 그러나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간은 마흔 두 달뿐입니다. 또한 그들이 성도들의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5.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13:9-10)
성도들은 죽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성도들의 이름은 창세 전에 이미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세상이 창조된 이후에도 변함 없이 기록된 그대로 내려옵니다. 이들만이 적 그리스도의 핍박을 이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기도록 도와주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설령 그들과 더불어 싸우는 폭력전에서는 승리를 못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성도들 자신이 자기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알기 때문에 든든한 마음으로 이깁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9,10). 이 말씀은 참으로 귀 있는 자가 듣고 기뻐해야 할 내용입니다. 여기 “사로잡는 자”나 “칼로 죽이는 자”는 적 그리스도의 세력을 지칭합니다. 주께서 마침내 짐승의 세력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또한 주께서 짐승의 때를 마흔 두 달로 제한하셨습니다. 그 짐승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아무리 사납게 날뛴다 하여도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며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이런 사실들을 알기 때문에 더욱 믿음에 거할 수 있고 끝까지 인내할 수 있습니다.
제 35과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 적 그리스도의 세력으로서 거짓 선지자의 활동
계시록 13:11-18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18상)
1. 거짓 선지자(13:11상)
또 다른 짐승이 땅에서 올라옵니다. 여기서 ‘땅’은 죄악된 세상을 상징합니다. 이 짐승은 사람들을 죄악 세계로 유인하는 거짓 선지자를 상징합니다(16:13; 19:20;20:10). 대대로 출현하는 모든 거짓 지도자들을 대표합니다.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고후 11:13-15).
2. 거짓 선지자의 모습과 실상(13:11하)
그 모습이 새끼 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합니다. 어린양 예수를 모방하여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지만 두 뿔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용 곧 사단의 말을 합니다. 겉으로는 부드러운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교활하고 간사한 말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3. 거짓 선지자의 역할(13:12-15)
그 땅 짐승이 먼저 나온 바다 짐승에게 모든 권세를 받아서 행합니다. “땅과 땅에 거하는 자들로 처음 짐승에게 경배하게 하니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2). 거짓 선지자들은 적 그리스도의 권세를 대신 행합니다.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적극 협조하는 하수인입니다. 그 사단적인 권세와 능력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적 그리스도를 섬기게 합니다.
“큰 이적을 행하되 심지어 사람들 앞에서 불이 하늘로부터 땅에 내려 오게 하고 짐승 앞에서 받은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13,14). 사람들 앞에서 사람 눈에 보이는 이적을 행합니다. 그러나 이적도 거짓 이적이 있습니다. 눈을 속이는 이적도 있고, 또한 설령 내 눈으로 직접 보았고 사실이라 할지라도 거짓 이적일 수 있습니다. 바울도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살후 2:9-10)라고 했습니다.
“저가 권세를 받아 그 짐승의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그 짐승의 우상으로 말하게 하고 또 짐승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는 자는 몇이든지 다 죽이게 하더라”(15).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숭상하는 동상을 세우거나 우상을 만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 그 우상이 말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무지와 미신에 미혹되어 그 우상이 정말로 말하는 줄 알게 됩니다. 그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수효를 불문하고 다 죽이도록 명령합니다.
4. 사람의 수(13:16-18)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16) 적 그리스도에 대한 소속과 충성의 표시로 그 오른손이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합니다. 그 표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은 온갖 배척을 받게 합니다. 물건을 사거나 팔 수 없고 사업도 할 수 없게 합니다. 성도들이 당할 어려움이 짐작이 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표’는 문자적인 표가 아니라 상징적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여기서 말하는 수가 문자적이라면 다음 절에 나오는 666이라는 수를 세어 보는 총명과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징적인 수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지혜와 총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짐승의 표는 단지 짐승의 소유물로 확인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 육십 육이니라”(18). 본 절에 나오는 ‘666’이라는 수에 대한 견해들이 많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그 많은 설(說)들 중에서 한 두 가지 설들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정리해야 할 것은 요한계시록에 대한 견해를 공부했던 처음 과로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복잡한 것 같지만 단순합니다. 어려운 것 같지만 쉽습니다. 난해한 것 같지만 큰 줄거리는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배운 내용들 중에서 그 실례를 든다면, ‘하나님의 성전, 제단, 두 증인, 두 감람나무, 두 촛대, 해를 입은 한 여자’ 등등의 표현들이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이 다 ‘성도들 즉 교회’를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다양하게 표현했을 뿐이지 분명하고 단순하고 확실하게 말씀해 줍니다. 또한 ‘마흔 두 달, 3년 반,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1260일’ 등의 표현도 다 같은 한 가지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을 지칭합니다. ‘큰 용, 바다에서 나오는 짐승, 땅에서 올라오는 짐승’ 등의 표현들은 모두 사단과 적 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를 지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그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그 ‘666’이라는 숫자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본문 자체에서 분명하게 해석해 준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수’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더 확실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수(數)인 6을 세 번 반복해서 인간 중심, 인본주의적인 삼위일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모방한 가짜 삼위일체를 가리킵니다. 붉은 용(사단), 바다 짐승(적 그리스도), 땅 짐승(거짓 선지자)들로 구성되는 가짜 삼위일체는 창조주 하나님보다는 피조물 인간 중심으로, 하나님의 형상보다는 짐승의 형상을 목표로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즉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의 영들’을 지칭하는 수입니다. 사단의 최고 목표는 하나님을 대항하는 인본주의적 바벨 제국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 즉 총명있는 자들이 분별하고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이런 것들입니다.
제 36과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십 사만 사천
계시록 14:1-5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심 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1)
본 장은 11-13장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앞으로 될 일들에 대한 전주곡입니다. 교회가 많은 환난가운데 있지만 그 환난 때문에 멸절되지 않고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앞에서 짐승이 인을 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여기서는 그 짐승의 인침을 받지 않고 시온산에 어린양과 함께 서 있는 십 사만 사천이 나옵니다.
1. 어린양과 함께 있는 십 사만 사천(14:1)
어린양이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어린양은 택한 백성들을 위하여 대신 피흘려 죽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하늘에 있는 천성 곧 하나님이 계신 시온산에 서 계십니다. 시온은 의와 희락과 평강의 하나님 나라, 메시야 왕국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대망 했던 나라입니다. 거기에 어린양이 서 계십니다. 힘이 충만한 승리자, 왕으로 서 계십니다. “내가 내 왕을 나의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노라”(시 2:6, 히 12:22,23).
여기 예수 그리스도는 앞장에서 나온 거짓 새끼 양과 구별된 순전한 어린양이십니다.
또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 사만 사천이 서 있습니다. 십 사만 사천은 문자적 의미가 아니고, 모든 구원받은 성도들의 총 수를 의미합니다. 계시록 7장 9절에서처럼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구원받은 자의 큰 수입니다. 이 성도들이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서 있습니다. 성도들이 구원받은 것은 어린양과 함께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소유이고 하나님의 보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3:12절에 약속되었던 상급을 받는 자들입니다.
2. 구속받고 새 노래를 부르는 십 사만 사천인(14:2, 3)
사도 요한이 하늘에서 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소리는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과도 같고, 거문고 타는 자들의 거문고 타는 것 같았습니다. ‘많은 물소리’는 크고 우렁찬 소리를, ‘큰 뇌성’은 위엄과 승리를, ‘거문고 타는 소리’는 아름다운 선포와 조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하늘의 찬양은 크고 위엄차고 듣기에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성량이 풍부하고 화음이 잘 되는 소리가 어디서 나는 소리일까요? 십 사만 사천의 성도들이 부르는 찬송입니다. 저희가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부릅니다. 땅에서 구속함을 얻은 144,000인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우고 부를 자가 없습니다. 구원받은 이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천국의 즐거움과 평강을 가지고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런 찬송을 할 수 있는 특권이 성도들에게만 주어져 있습니다.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많은 물소리 같은 어린양의 음성과, 보좌와 생물들과 장로들을 둘러 선 만만 천천의 천사들의 큰 음성과, 네 생물과 이십 사 장로들의 하프소리와,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부르는 노래와, 구속함을 얻은 자들만이 부를 수 있는 찬송이 한 데 어우러진 천상의 대 합창의 장엄함을....
3. 십 사만 사천인의 존재와 삶(14:4, 5)
이 사람들은 여자들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들입니다.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결혼을 정죄하거나 금욕생활을 권장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혼인을 귀히 여기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여자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들을 총칭합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랑하거나 그 죄악에 빠지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정절을 지킨 성도들입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그의 복음만을 순수하게 믿었습니다.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입니다.
어떻게 살았기에 더럽히지 않고 정절을 지켰을까요? 그 해답은 어린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주의 은혜로 구속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구속의 은혜로부터 새 사람으로서의 삶이 시작됩니다. 성도들의 성도됨은 오직 주의 은혜 때문입니다. 이들은 처음 익은 열매로서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부터 처음 익은 열매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께 바침이 되었고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출 22:29). 나무가 열매를 결정하듯이 소속과 존재가 그의 삶의 성격과 방향을 결정합니다.
이 사람들의 입에는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습니다. 거짓말을 윤리, 도덕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성경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아무리 진실하게 산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자들은 가장 큰 거짓말쟁이들입니다. 거짓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는 생활에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성도들은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씀을 그대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입에는 본질적인 거짓말이 없습니다. 또한 성도들은 흠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 때문에 하나님의 법정에서 흠이 없는 의인이라는 선언을 받고 그것을 그대로 믿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도라 할지라도 일상생활 속에서 죄와 허물과 부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게 하셨고 계속해서 완전한 성화에 이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을 확신할 뿐입니다.
제 37과 성도들을 향한 하늘의 격려
계시록 14:6-13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13)
계 14:6-13에서 세 천사의 큰 음성과 하늘에서 나는 음성과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1. 첫째 천사: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의 외침(14:6, 7)
요한이 또 보니 다른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는데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졌습니다. 그 복음은 영원한 진리이므로 항상 변함 없이 원래의 것 그대로 전파됩니다. 나라와 족속과 백성으로 표현된 전 세계에 전파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도록 날아가면서 시급하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파합니다.
그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천사는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임박했음을 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이 외침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심판의 때가 임박했으니 창조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배와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이고 인생의 본분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자들의 목표입니다. 소요리문답 제1문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 둘째 천사: 복음을 받지 않은 불신세계의 멸망 선언(14:8)
또 다른 천사 곧 둘째가 그 뒤를 따라 말합니다.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로 먹이던 자로다.” 바벨론이 심판 받아 멸망할 것을 외칩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을 지칭합니다. 이 바벨론이 11장에서는 소돔, 애굽으로 표현되고, 17장에서는 큰 음녀로 표현됩니다. 큰 음녀라고 표현된 이유는 인생이 마땅히 섬겨야 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기 때문이고 또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첫째 천사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멸망이 너무나 확실합니다. 그래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라고 말합니다. 앞으로 될 일을 과거사로 말합니다. 성경에서 이와 같은 ‘예언적 과거’의 표현들이 많이 나옵니다. 바벨론의 음행에 동참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됩니다. 언뜻 보면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면서도 잘 되가는 것 같고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불신 세상의 결국은 이와 같은 진노와 멸망뿐입니다.
3. 셋째 천사: 짐승에게 경배하고 그 표를 받은 자들이 받을 진노(14:9-11)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이 포도주는 물이 섞이지 않았기 때문에 강도가 높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진노를 받을 것을 지칭합니다. 그들이 한 때는 짐승을 높이고 그 표를 받아 자유롭게 매매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은 표면적인 삶의 일부에 불과했고 결국은 본문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진노만을 받을 뿐입니다. 이 때에 진노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그 짐승의 세력은 목석처럼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짐승을 경배하고 표를 받은 자들이 받을 진노의 벌이 16장에서부터 대접재앙으로 나타납니다. 남김없이 쏟아 부어질 것입니다.
그 재앙이 부어지면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을 것입니다. 그 고난의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갈 것입니다. 그 지옥의 고통이 세세토록 지속될 것입니다.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그 이름의 표를 받는 자는 누구든지 이 재앙 때문에 밤낮 쉼을 얻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4. 성도들의 인내(14:12)
그러나 짐승숭배를 거절하고 그 표를 받지 아니한 성도들은 매매를 못하고 죽임을 당하는 것 같았지만 실상은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성도들의 인내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입니다. 13:10과 같은 표현이 반복되어 강조되고 있습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크고 지옥의 형벌이 무서운 만큼 그 사실을 아는 성도들은 어떤 고난이라도 끝까지 견디면서 믿음을 굳게 지키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들이 얼마나 복됩니까! 우리 주님은 교회를 향하여 불신앙의 마지막 심판과 성도들의 최후 승리를 밝히 보여주심으로서 고난과 박해 속에 있는 교회가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인내하도록 격려하십니다.
5. 하늘에서 나는 음성과 성령님의 말씀 : 교회를 향한 격려(14:13)
교회의 대표로서 요한이 또 하늘에서 나는 분명한 음성을 듣습니다.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죽게되는 자들의 죽음은 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복된 세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음성은 천사를 중개자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입니까! 이 음성에 대하여 성령님이 응답하십니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성령 하나님이 인정하시고 확실한 약속을 주십니다. 성령님의 말씀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주를 믿고 섬기는 자들은 죽어도 복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힘들다 할지라도 그 수고를 쉬고 안식할 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았던 행위가 따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았다면 그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께서는 또한 상급을 주십니다. 주께서 성도의 고난을 갚아 주십니다. 이 원리는 영원불변의 진리이므로 기록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붙잡으십시오. 성령님께서도 ‘그러하다’고 확증해주시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전 15:58).
제 38과 예수 그리스도의 추수 심판
계시록 14:14-20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14)
1. 왕이요 심판자이신 영광의 그리스도(14:14)
흰 구름이 있고 그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아 계십니다.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앞에서 배운 ‘인자 같은 이’이신 성자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성육신 하여 낮아 지셨다가 높아지신 분이십니다. 영광의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십니다.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습니다. 승리의 면류관입니다. 만왕의 왕의 주권을 가지신 예수님이 쓰신 면류관입니다. 그 손에는 이한(날카로운, 예리한) 낫을 가졌습니다. 심판하시는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이제 온 인류를 심판할 때가 임박하였음을 보여줍니다.
2. 추수 때가 되었음(14:15)
14장의 네 번째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구름 위에 앉은 이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가로되 네 낫을 휘둘러 거두라 거둘 때가 이르러 땅에 곡식이 다 익었음이로다.” 흰 구름 위에 앉아 계신 예수님께 한 천사가 와서 전합니다. 성전 안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전달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행합니다. 그 뜻에 순종하십니다. 그 내용은 땅에 곡식이 다 익었으니 거두라는 것입니다. 드디어 추수 때가 된 것입니다.
곡식을 거두는데 두 구분이 있습니다. 알곡 추수와 가라지 추수 혹은 구원받은 자의 추수와 멸망 받을 자의 추수, 영광에 이르는 추수와 정죄의 추수가 있습니다.
3. 알곡 추수(14:16)
‘성도들의 수효가 다 찼으니 그들을 영광의 나라로 거두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영광의 구름 위에 앉으신 심판주께서 낫을 땅에 휘두릅니다. 그러자 먼저 곡식이 거두어 집니다.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자기의 소유, 첫 열매인 택한 백성들을 그의 곡간에 들이십니다.
4. 포도송이를 거둠(14:17, 18)
또 다른 천사가 하늘에 있는 성전에서 나옵니다. 그 손에 이한 낫을 가지고 있습니다. 추수의 주인처럼 날카로운 낫을 가졌습니다. 이 천사들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기” 위해 인자가 보낸 추수군들입니다(마 13:30,41). 추수의 주인이신 인자의 보냄을 받은 조력자들입니다. 주님이 직접 하시지 않고 천사들을 시켜서 하십니다. 주님의 것이 아니므로 내어버린 것입니다. 또 불을 다스리는 다른 천사가 제단으로부터 나와 이한 낫 가진 자를 향하여 큰 음성으로 말합니다. “네 이한 낫을 휘둘러 땅의 포도송이를 거두라 그 포도가 익었느니라.” 여기 ‘포도송이’는 불경건한 자들을 가리킵니다. ‘포도가 익었다’는 말은 죄악이 가득 찼다는 뜻입니다.
불을 다스리는 천사가 어디서 나왔습니까? 제단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곳은 성도들이 신원해달라고 기도하는 곳입니다. 그 기도의 향이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 곳입니다. 심판은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이기도 합니다.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까지 닿았고 일천 육백 스다디온에 퍼집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그의 복음을 경멸하는 사람들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입니다. 술틀에 던져지고 밟히고 터집니다. 그 피의 강이 일천 육백 스타디온에 퍼집니다. 심판이 전 세계적이고 철저하고 완전합니다. 참으로 두려운 장면입니다.
5. 성 밖에서 형벌을 받음(14:19, 20)
주를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 거룩한 성 밖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성 안에 들어오는 것과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큰 관심거리입니다. 새 예루살렘 성은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계 21:27) 들어가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의 자비를 멸시하는 자들이 성밖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성 밖’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진노의 심판을 받으신 곳입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습니다.
요한은 이 환상을 보면서 구약 요엘 선지자의 예언을 기억하였을 것입니다. “너희는 낫을 쓰라 곡식이 익었도다 와서 밟을 지어다 포도주 틀이 가득히 차고 포도주 독이 넘치니 그들의 악이 큼이로다”(욜 3:13).
제 39과 하나님의 진노 :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
계시록 15:1-8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4상)
15-16장에 마지막 일곱 재앙이 나옵니다. 본 장은 그 서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습니다.
요한은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봅니다. 이 이적은 앞으로 있을 큰 일에 대한 표시 혹은 징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이적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진 것으로서 마지막 재앙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게 됩니다.
1.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의 심판(15:2상)
또 요한이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습니다. 유리 바다가 아니고 ‘유리 바다 같은 것’입니다. 유리 바다 같아서 하나님의 의를 비유하고 불이 섞여 있어서 진노의 심판을 비유합니다.
2. 하나님의 심판을 찬송하는 성도들(15:2하-4)
그곳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믿음으로 승리한 모든 신자들입니다. 승리한 교회가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악기를 가지고 노래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합니다. 이 두 노래의 가사를 읽고 깊이 생각해 봅시다. 해석이 필요 없는 찬송의 진수를 볼 수 있습니다.
1) 모세의 노래
모세의 노래는 출 15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애굽의 종 되었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구원을 받고 원수들이 홍해에 멸망된 후 주님께 올렸던 노래입니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
여호와는 용사시니 여호와는 그의 이름이시로다
.....
여호와여 주의 오른 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
여호와여 신중에 주와 같은 자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에 영광스러우며 찬송할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 누구니이까
....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
2) 어린양의 노래
지금 이 찬송을 하고 있는 교회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신 분은 어린양이십니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송합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찬송합니다. 주의 왕권을 찬양합니다. 그 길이 의롭고 참되심을 찬송합니다. 주께서 하시는 심판이 공의롭고 그가 하신 약속대로 이행하시니 참되십니다. 그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함을 찬송합니다. 만민이 주를 경외하고 주를 영화롭게 해야 할 당위성을 노래합니다. 만국이 주께 경배해야 할 것을 찬송합니다.
3. 하나님의 진노의 7대접 준비(15:5-8)
그 찬송이 있은 후에 요한이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립니다. 하늘의 지성소가 열립니다. 이제 보게 될 진노는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임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이 최종적으로 완전하게 이루어집니다.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그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으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사명을 받아 가지고 나옵니다.
그 천사들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습니다. 만왕의 왕되신 주님의 사신들이니 왕의 위엄을 갖습니다.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세세에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대접 일곱을 일곱 천사에게 주니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인하여 성전에 연기가 차게 됩니다. 성결하신 하나님의 광채가 영광스럽게 나타나고 그 심판의 위력이 능력 있게 나타날 것을 보여줍니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께서 마지막 심판을 하실 때에 어느 누구도 그 진노에 대하여 항거할 수 없게 됩니다. 그 때에는 어느 누구도 그 진노를 그치게 할 수 없습니다. 그 때에는 중재도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노하심으로 그의 긍휼을 닫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를 믿고 회개하는 자가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지금 회개할 수 있는 기회에 회개해야 합니다.
제 40과 일곱 대접 중에 네 대접을 쏟음
계시록 16:1-9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5하)
드디어 마지막 재앙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 성전에서 큰 음성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으라’고 명하시되 크게 명하십니다. 이 진노는 하나도 남김 없이 쏟아 붓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마감하는 결정적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1. 첫째 대접을 땅에 쏟음(16:1, 2)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첫째가 가서 그 대접을 땅에 쏟습니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 ‘악하고 독한 헌데’가 납니다. 불치의 악성 종양이나 난치병입니다. 그 고통의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그것을 11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 고통이 죽어 버린다고 끝나는 것도 아닙니다. 죽으면 더욱 고통스럽고 영원한 지옥으로 이어집니다. ‘악하고 독한 헌데’는 애굽에 내렸던 재앙들 중에 하나인 독한 종기입니다. 이 첫째 대접 재앙뿐만 아니라 나머지 재앙들도 애굽에 내렸던 것들입니다. 그 재앙들이 이 마지막 재앙에 다시 사용됩니다. 그렇다면 출애굽 당시의 재앙들은 이 마지막 재앙의 예표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 둘째 대접을 바다에 쏟음(16:3)
이어서 둘째가 그 대접을 바다에 쏟습니다. 바다가 곧 죽은 자의 피같이 되고 바다 가운데 모든 생물이 죽습니다. 매우 고약한 냄새를 풍깁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바다’가 온 세계 만국을 상징하는바 그대로 이해한다면 온 세계가 죽음으로 뒤덮일 것을 뜻합니다.
3. 셋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음(16:4-7)
셋째가 그 대접을 강과 물 근원에 쏟으니 피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마실 물이 없어집니다.
그 물을 차지한 천사가 찬송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 저희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흐렸으므로 저희로 피를 마시게 하신 것이 합당하니이다.’ 이 노래는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와 내용이 비슷합니다. 단지 이 심판이 마지막 심판이므로 주의 칭호 중에 ‘장차 오실 자’가 없습니다. 죄와 상관없는 거룩하신 분이시므로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시고 그 거룩하신 주의 심판은 참으로 공의롭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의롭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혹 ‘하나님의 심판이 너무 잔인하다’라는 식으로 인간의 주관적인 평가를 앞세워 하나님의 일이 부족하다거나 잘못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고 원망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인간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결코 경솔히 말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중에 의롭지 않은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당한 모든 일에 주는 공의로우시니 우리는 악을 행하였사오나 주는 진실히 행하셨음이니이다”(느 9:33).
이 심판은 성도들과 선지자들의 피를 신원해 주시는 심판입니다. 계 6:9-11의 말씀이 응답되는 장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화답송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제단이 화답하여 가로되, 그러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고 의로우시도다.” 제단은 성도들이 신원해 달라고 기도하던 곳입니다. 그 기도가 응답된 것을 찬송합니다.
4. 넷째 대접을 해에 쏟음(16:8)
넷째가 그 대접을 해에 쏟습니다. 해가 권세를 받아 불로 사람들을 태웁니다. 태양 열의 강도가 점점 더 뜨거워져서 사람들을 태웁니다. 사람들이 크게 타버립니다.
이렇게 큰 진노의 심판을 받으면서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재앙들을 행하는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의 이름을 훼방합니다. 더욱 극악해져서 회개하지도 않고 이 재앙을 내리시는 권능자이신 하나님을 비방합니다. 지금 진노를 당하고 있는 인간들의 마음이 얼마나 완악해져 있는지 잘 보여줍니다. 마치 바로가 재앙을 당할수록 점점 더 강퍅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과연 하나님의 최종적 진노의 심판이 내리지 않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가 회개할 수 있음이 큰 은혜이고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주지 아니하시면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회개할 수 있음을 감사합시다. 그리고 부지런히 회개하며 준비합시다.
여기까지 네 대접을 쏟아 붓는 하나님의 진노가 진행되면서 땅과 바다, 강과 물근원, 해에게 쏟아졌습니다. 생태계와 환경이 파괴됩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살기 어렵게 됩니다. 이런 사실들을 보면서 걱정하는 입장에 빠지지 마십시오. ‘이거 큰일났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는구나’, ‘우리의 구원이 가깝구나’라고 믿고 소망 중에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날을 바라보면서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배우면서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걱정하거나 공포에 빠져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차피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렇게 진행될 것입니다. 심판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송할 뿐입니다. 천사들도 하나님의 심판을 찬송합니다. “전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거룩하신 이여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5). 천사들이 기뻐하며 찬송한다면 하물며 택하심을 입고 구원하심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야....
제 41과 일곱 대접 중 나머지 세 대접을 쏟음
계시록 16:10-21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15)
1. 다섯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음(16:10, 11)
다섯째가 그 대접을 짐승의 보좌에 쏟습니다. ‘짐승의 보좌’는 사단의 보좌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집니다. 그 짐승의 나라가 곧 어두워집니다. 그 어두운 적 그리스도의 정치아래에서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합니다. 애굽에서 있었던 아홉 번째 재앙과 비교됩니다. 사람들이 아파서 자기 혀를 깨뭅니다. 가장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 아픈 것과 종기로 인하여 하늘의 하나님을 훼방하고 저희 행위를 회개하지 않습니다. 우상숭배와 부도덕을 고집합니다. 불신앙과 강퍅함이 넷째 대접을 쏟을 때의 현상과 같습니다.
2. 여섯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음(16:12-16)
여섯째가 그 대접을 큰 강 유브라데에 쏟습니다. 그 큰 강물이 말라서 동방에서 오는 왕들의 길이 예비됩니다.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 교회를 공격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멸에 이르는 습격이 된다는 것은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한이 보니,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선지자의 입에서 세 영이 나옵니다. 마귀들의 영인데, 개구리같이 더러운 영입니다. 용과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앞에서 배운 바대로 사단과 적 그리스도와 거짓교사들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흉내낸 교활한 존재들입니다. 그들에게서 나온 세 영이 이적을 행합니다. 이 이적은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이적입니다. 어떤 이적입니까? 온 천하 임금들에게 가서 전쟁을 위하여 왕과 군대를 모읍니다. 전 세계적인 세력 통일을 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과 전쟁하기 위하여 아마겟돈에 모읍니다.
아마겟돈에 대한 설들이 참으로 많습니다만 요한계시록은 구약적 용례로 이해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아마겟돈 지역은 하나님의 백성이 적들을 물리치고 이긴 곳입니다(왕하 9:27; 삿 5:19; 대하 35:22). 그러므로 이 곳은 세계 최후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기는 전쟁을 상징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어디인가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아마겟돈 전쟁은 하나님의 백성이 적 그리스도의 나라를 이기는 전쟁으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단이 자기의 보좌에 진노가 내리자 가만히 있지 않고 온 세상의 임금들을 동원하고 적 그리스도와 귀신의 세력들이 전부 다 규합하여 하나님을 향하여 도전합니다. 그 전쟁이 성도들에게 두려움을 줄 것처럼 보입니다. 어쩌면 교회들이 거의 다 사라지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당할지도 모릅니다. 성도들이 그 세력을 대항하기에는 너무도 무력할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음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보라 내가 도적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그때에 주께서 오신다고 하십니다. 오셔서 가까이 계시고 그 전쟁에 개입하셔서 그 사단의 세력을 모두 처리하십니다. 그 날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큰 날이 될 것이며, 최종 승리는 그리스도의 것이고 교회의 것이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를 격려하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깨어 있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누가 깨어 있는 자입니까? 쉬지 아니하고 힘써 기도하며 준비하는 자입니다. 그 날까지 옷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누가 옷을 지키는 자입니까?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용서받고 새사람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주께서 도적같이 오시는 그 날까지 벌거벗고 다니지 않고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한 자가 복된 자입니다. 끝까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 타락한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주님 중심으로 말씀중심으로 교회중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3. 일곱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음(16:17-21)
일곱째가 그 대접을 공기 가운데 쏟았습니다. 사단의 활동 영역인 공중에 재앙을 내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단에 의존하던 모든 땅위의 조직체들이 무너집니다.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이 있고 또 큰 지진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찌나 큰지 사람이 땅에 있어 옴으로 이같이 큰 지진이 없었습니다. 큰 성이 세 갈래로 갈라집니다. 큰 성은 바벨론을 지칭합니다. 그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는 17장에서 공부할 것입니다. 그 큰 성 바벨론이 세 갈래로 갈라질 정도로 완전하게 멸망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하나님 앞에 기억하신 바 되어 그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잔을 받으매 각 섬도 없어지고 산악도 간데 없어집니다. 그렇게 견고하고 강하게 보이던 섬과 산악도 없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극도의 심판을 잘 보여줍니다.
또 중수가 한 달란트나 되는 큰 우박이 하늘로부터 사람들에게 내립니다. 성경에서 큰 우박이 내리는 것은 항상 하나님의 심판의 표였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하늘에서 내립니다. 사람들이 그 박재로 인하여 하나님을 훼방합니다. 아무리 재앙이 커도 불경건한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에 분노하고 창조주의 이름을 훼방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여호와 하나님을 든든히 의뢰합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 피할 바위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의 심판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택하심을 받고 구속함을 받은 우리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제 모든 진노의 심판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큰 음성이 성전에서 보좌로부터 나서 가로되 ‘되었다’(17)라고 합니다. ‘다 이루었다’는 뜻입니다.
제 42과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져 감
계시록 17:1-18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17)
17-18장은 큰 성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앞에서 나왔던 내용이지만 더 자세한 반복입니다. 본 장은 대단하게 보이는 바벨론의 성격이 음녀와 같음을 드러냅니다.
1. 큰 음녀가 받을 심판(17:1, 2)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와서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의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큰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18하). 하나님을 배반하는 이 세상과 거기 속한 것들을 총칭합니다. 타락한 세상의 불경건한 문명을 의미합니다. 그 큰 음녀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많은 물’은 이 세상 나라들입니다. 12절에서 그렇게 해석해 줍니다.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그 영향력이 전 세계적이고 대단합니다. 땅의 임금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습니다. 음행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이 세상과 그 영광과 권력에 취해 산다는 뜻입니다. 큰 음녀와 더불어 땅위의 지도자들이 이 세상주의에 빠져서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땅에 거하는 자들도 그 지도를 따르고 있습니다. 음행의 포도주 즉 이 세상주의에 취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받을 뿐입니다. 계 14:8을 다시 읽어봅시다. “큰 성 바벨론이여 모든 나라를 그 음행으로 인하여 진노의 포도주를 먹이던 자로다.”
2. 붉은 빛 짐승을 탄 여자(17:3-5)
천사가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광야로 갑니다. 거기서 그 큰 음녀가 붉은 빛 짐승을 탄 모습을 봅니다. 많은 물 위에 앉음과 동시에 붉은 빛 짐승을 타고 있습니다. 이 ‘붉은 빛 짐승’은 우리가 이미 13장에서 보았던 바다짐승입니다. 음녀가 세속지도자인 적 그리스도에게 영향 끼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 짐승의 몸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참람된 이름들이 가득합니다. 적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모독하며 자신을 신성시하는 것이 나타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경배하게 합니다. 일곱 머리와 열 뿔이 있다고 했으니 13장의 짐승과 같습니다.
그 짐승을 탄 여자는 자주 빛과 붉은 빛 옷을 입었습니다.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몄습니다. 죄와 사치의 외모를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미혹을 합니다. 이 세상주의의 매력을 가지고 유혹합니다. 그녀의 손에 금잔이 있습니다. 그 금잔은 음행의 포도주 잔입니다(2). 그 금잔 안에 ‘가증한 물건과 음행의 더러운 것들’이 가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고상해 보일지라도 실상은 하나님을 불신케 하는 인본주의, 무신론을 기초로 한 모든 것들입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미혹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자신들의 죄로 인한 자멸을 보여주는 잔, 진노의 잔이 될 것입니다.
그녀의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비밀, 큰 바벨론,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고 쓰여 있습니다. 비밀은 은밀하게 사람들을 이 세상주의로 이끄는 것을 의미합니다. 살후 2:7에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다고 했습니다. ‘큰 바벨론’은 모든 세속주의, 인본주의의 총체입니다.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은 무신론과 배교사상을 지칭합니다.
3. 그 음녀의 일하는 성격(17:6)
이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고 죽게 합니다. ‘큰 음녀’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고, 아주 가증하고 악하며, 매우 매력적이지만 실상 하는 일은 성도들의 피를 마시는 일입니다. 우상숭배를 거절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며 자신을 깨끗하게 지키고, 충성스럽게 예수의 복음을 전한 성도들을 취중에 폭행하는 것처럼 심하게 박해하고 죽입니다.
요한은 그런 여자를 보고 매우 크게 놀라 기이히 여겼습니다. 왜 기이히 여겼을까요? 큰 음녀의 영향력과 사악함과 매력과 박해를 보고 놀랐을까요? 아니면 큰 음녀가 성도들을 죽이고 승리의 포도주를 마시는 것처럼 보여서 놀랐을까요? 아니면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하시는 것을 보고 놀랐을까요? 다음 문장들을 보니 천사가 ‘왜 기이히 여기느냐’고 하면서 그 여자와 그의 탄바 일곱 머리와 열 뿔 가진 짐승의 비밀을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요한이 기이히 여긴 것은 그 눈에 보이는 상황들의 의미를 다 알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4. 붉은 빛 짐승과 그 짐승을 탄 여자의 비밀(17:7-13)
크게 놀라고 기이히 여기는 요한에게 천사가 가르쳐 줍니다. 여기 음녀와 짐승의 비밀은 두 가지 비밀이 아니고 한 가지 비밀입니다. 둘이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네가 본 짐승은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와 멸망으로 들어갈 자니 땅에 거하는 자들로서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이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으나 장차 나올 짐승을 보고 기이히 여기리라.’ 요한 이전에도 적 그리스도는 있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타날 것입니다. 같은 인물이 다시 나타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일한 사상과 조직, 운동과 행위들이 나타나겠다는 뜻입니다. 그것들이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온다고 했으니 사단의 세력을 가지고 나타날 것을 드러냅니다.
그 짐승을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 즉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 경이감을 가지고 숭배할 것입니다.
이제 천사가 요한이 보고 있는 것들을 잘 알 수 있도록 가르쳐 주겠다고 합니다. ‘지혜 있는 뜻이 여기 있으니’(9)라는 말이 그 뜻입니다(계 13:18).
“그 일곱 머리는 여자가 앉은 일곱 산이요 또 일곱 왕이라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다른 이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으나 이르면 반드시 감간 동안 계속하리라 전에 있었다가 시방 없어진 짐승은 여덟째 왕이니 일곱 중에 속한 자라 저가 멸망으로 들어가리라 네가 보던 열 뿔은 열 왕이니 아직 나라를 얻지 못하였으나 다만 짐승으로 더불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동안 받으리라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9-13). 이 부분의 해석이 매우 다양합니다.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확실한 것만 배우고 넘어 갈 것입니다. 그것은 마지막 문장입니다. “저희가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능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사단과 적 그리스도의 모든 세력이 하나가 되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향하여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5. 만왕의 왕 어린양과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의 승리(17:14)
모든 세력들이 어린양으로 더불어 싸울 것입니다.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들을 이기실 것입니다. 이 전쟁은 16장에서도 말하고 또 앞으로 19장에서도 말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일련의 시간순서로 기록되지 않고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만주의 주, 만왕의 왕 어린양께서 이기는 전쟁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어린양과 함께 있는 자들도 이깁니다. 이들은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얻고 진실한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택함을 받고 부르심을 입고 주를 진실하게 믿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직접 싸우지 않고 단지 어린양과 함께 있는 것으로 이깁니다. 인간의 자력으로 이기지 않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깁니다.
6.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사단 나라의 자체 분열(17:15-18)
천사가 계속 요한과 교회를 향하여 가르쳐줍니다. “네가 본 바 음녀의 앉은 물은 백성과 무리와 열국과 방언들이니라 네가 본 바 이 열 뿔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고 불로 아주 사르리라.” 짐승이 음녀를 미워하여 망하게 하고 벌거벗게 하고 그 살을 먹는 것은 사단의 나라가 자체적으로 분열하여 멸망으로 치달을 것을 보여줍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할 마음을 저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열 뿔과 짐승은 자기들의 뜻대로 한다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본인들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도록 심판을 집행하고 있는 격이 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단 왕국의 자체분열 배후에 개입되어 있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읽을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할 마음을 저희에게 주사 한 뜻을 이루게 하시고 저희 나라를 그 짐승에게 주게 하시되 하나님 말씀이 응하기까지 하심이니라.” 이것이 바로 요한이 기이히 여겼던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열쇠입니다. 온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 뜻대로 이루어져 가도록 주께서 섭리하십니다. 아무리 크고 놀라운 일이라 할지라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하나님 말씀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이 역사의 본질입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잠 16:4).
“또 네가 본 바 여자는 땅의 임금들을 다스리는 큰 성이라 하더라.” 이 말씀도 역시 요한이 보고 기이히 여겼던 환상을 이해하도록 설명해 주는 것입니다. 본과 초두에서 말했듯이 음녀는 큰 성 바벨론입니다.
제 43과 바벨론의 멸망
계시록 18:1-24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20)
앞에서 마지막 7대접 심판으로 하나님의 계획이 절정에 이르게 되고, 본 장은 그 진노의 일부분(16:17-21)인 바벨론의 멸망을 더 자세하게 상술합니다.
1. 바벨론의 멸망 선언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18:1)
큰 권세를 가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영광 때문에 죄악으로 어두워진 땅이 환하여집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천사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빛납니다. 그가 힘센 음성으로 바벨론의 멸망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 장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2. 확실한 멸망과 그 이유(18:2, 3)
그 천사가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라고 외칩니다. 앞으로 될 일이지만 너무나 확실한 예언이기에 과거 동사를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이 표현을 ‘예언적 과거’라고 합니다.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바벨론은 불경건한 이 세상을 지칭합니다. 이 세상이 죄악으로 황폐해 졌습니다. 그래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음행 곧 하나님을 배반하는 행위로 모든 나라들을 꾀어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세계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하여 바벨론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대신에 자기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치부하고 사치하였기 때문입니다(3). 뿐만 아니라 성도들을 핍박하고 죽였기 때문입니다(24).
3. 그 성에서 나오라는 권면(18:4)
또 하늘에서 다른 음성이 들립니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예하지 말고 그의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십니다. 주의 백성들은 바벨론이 받는 형벌에서 제외되고 구원받습니다. 이 음성은 오늘날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권면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있게될 심판을 미리 알려 주면서 불경건한 세상의 가증스러운 죄악에서 구별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그 재앙을 받지 않게 하려는 사랑의 권면입니다. 이 사랑의 소리를 다시 한 번 들어 봅시다.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
4. 죄악이 관영한 성(18:5-7)
바벨론의 죄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가득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모든 불의한 일을 기억하십니다. 그 불의는 극에 달해서 사람을 팔고 사는 인신매매까지 합니다(13하).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위를 기억하시고 행위대로 갚으십니다. 완전하게 갚으십니다(‘갑절’은 완전하게라는 뜻). 고난과 애통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가 마음에 말하기를 나는 여황으로 앉은 자요 과부가 아니라 결단코 애통을 당하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결단코’라는 용어까지 사용하면서 교만하게 말합니다. 마치 바로가 모세 앞에서 하는 말과 같습니다. 자기보다 높은 신이 없고 자기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권세 자가 없다고 호언장담하지 않았습니까?
5. 강하신 심판 주 하나님: 갑작스러운 멸망(18:8-1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하루 동안에’ 재앙들이 이르게 하십니다. 사망과 애통과 흉년으로 그리고 불에 타도록 심판하십니다. 음행과 사치와 교만한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시기 때문에 ‘하루 동안에’ 하실 수 있으십니다. 바벨론과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바벨론의 불붙는 연기를 보고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그 고난이 자신들에게까지 올 것을 무서워하며 멀리 서서 말합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일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구나.” 그들은 갑작스러운 심판을 보고 그렇게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이 강한 분이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6. 바벨론 멸망을 보며 애통함(18:11-19)
땅의 상고들(=왕족들, 23절)도 그것을 보고 울며 애통합니다. 그들이 추구하고 사모하던 물품들 때문에도 웁니다. 그 상품들이 나열됩니다. 보석류, 고급 가구, 고급 향료, 고급 음식, 가축과 농기구 심지어 노예들까지 나열됩니다. 이 목록은 세상이 귀하게 여기던 것들입니다. 불경건한 사람들이 자기들의 영혼과 교환했던 목록입니다. 쾌락과 부와 권력에 대한 욕심 때문에 자기의 생명까지도 팔아 버릴 정도였습니다. 이것들이 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며 웁니다. “바벨론아 네 영혼의 탐하던 과실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라”(14).
이 상품들 때문에 부자가 된 상인들이 그 고난을 무서워하며 멀리 서서 애통합니다.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와 자주와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그러한 부가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상인들이 자기들의 부의 원천이었던 비싸고 사치스런 물건들이 없어진 것을 슬퍼합니다.
이 물품들을 운수하고 무역하는 관계자들 곧 각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인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도 그 불붙는 연기를 보고 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며 애통합니다.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뇨.”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을 인하여 치부하였더니 일시간에 망하였도다.” 이들은 이 세상에서 부자되기를 원하며 재물을 우상으로 삼고 그 노예가 되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모든 자들은 이 세상이 망할 때 같이 망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멸망 받아 연기 나는 재뿐입니다.
7. 심판을 보며 기뻐하는 하나님 백성들(18:20)
이 세상이 망할 때 그들은 통곡하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기뻐하며 즐거워합니다. “하늘과 하늘의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 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성도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떤 일이든지 즐거워합니다. 만일에 이런 심판을 보면서 슬퍼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잘못하신다고 평가하는 외람된 태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보면서 즐거워합니다.
8. 결론: 세상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그 명령에 순종할지어다(18:21-24)
한 힘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바다에 던지며 바벨론의 영원한 멸망을 선언합니다.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몹시 떨어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 하리로다.” 이제는 세상주의의 모든 것들이 다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음악, 공업, 과학문명, 맷돌소리, 등불 빛, 신랑과 신부의 음성 등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문화와 구조, 모든 것들이 끊어지고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것들을 지나치게 믿고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요! 이런 것들에 급급하여 만국이 미혹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들과 성도들은 비록 이 땅위에서 죽임을 당할지언정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살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피가 이 성중에서 하나님께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전도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자는 인생의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하늘아래서 행하는 모든 것을 다 살펴보았습니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모든 지혜와 경험을 총 동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해 아래 행하는 모든 것들이 헛되고 헛된 줄 알게 되었고, 최종 결론으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전 12:13-14).
제 44과 하나님을 찬송함 : 바벨론 멸망을 기뻐하며 드리는 찬송
계시록 19:1-5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1)
본문은 하나님께서 큰 음녀 곧 큰 성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을 기뻐하며 드리는 찬송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기쁨과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찬송의 책이기도 합니다.
1. 구원과 영광과 능력의 하나님을 찬송함(19:1)
요한은 ‘하늘에 허다한 무리의 큰 음성 같은 것’을 듣습니다. 여기 ‘허다한 무리’는 천사들입니다. 그 찬송의 가사들을 살펴봅시다.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능력이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 하나님의 구원과 영광과 능력을 찬송합니다. 이 세 가지는 하나님께만 속한 것입니다. 다른 그 어느 존재에 가져다 붙일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드러냅니다. 구원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사역이고, 심판도 역시 영광이 충만하고 능하신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의 찬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2. 참되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함(19:2)
바벨론의 심판과 멸망을 보면서 우리는 그 사건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심판을 보면서 참되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결국에는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 때문에 기뻐하며 찬송하는 자리에 들어가야 합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참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그의 심판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
2절 하반절에 “음행으로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를 심판하사 자기 종들의 피를 그의 손에 갚으셨도다”라고 했습니다. ‘땅을 더럽게 한 큰 음녀’ 곧 바벨론(=이 세상)을 심판한 것은 주의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원하여 주는 것을 감사하며 찬송드립니다.
계 18:20절에서 ‘즐거워하라’는 하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를 인하여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신원 하시는 심판을 그에게 하셨음이라.” 본문의 찬송은 하늘 음성에 대한 반응입니다. 이 심판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심판이 참되고 의롭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뻐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3. 바벨론 멸망을 기뻐하며 드리는 찬송(19:3)
두 번째 찬송이 나옵니다. “할렐루야 하더니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가더라.” 여기 ‘그 연기’는 그녀의 연기입니다. 즉 심판 받은 큰 음녀의 연기, 바벨론의 멸망의 연기입니다. 그 연기가 세세토록 올라갑니다. 영원한 멸망에 처해진 것을 보여줍니다.
4. 큰 음성으로 할렐루야(19:4, 5)
이어서 이십 사 장로와 네 생물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찬송합니다. 여기 24장로는 구원받은 자들을 대표합니다. “아멘 할렐루야”에서 ‘아멘’은 ‘정말 잘 되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모두 다 아멘입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다 예가 됩니다. 그러자 보좌에서 음성이 납니다. “하나님의 종들 곧 그를 경외하는 너희들아 무론 대소하고 다 우리 하나님께 찬송하라.” 모든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찬송하라고 합니다. 그 찬송하는 성도의 무리가 계시록 5장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대단할 것입니다. 우리도 목소리 높여서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찬송을 하라고 하면서 ‘무론 대소하고’라는 표현을 씁니다. 구원받은 성도들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특권 중에 특권인 찬송을 하는데 있어서 예외도 없고 차별도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 때 볼 수 있었던 작은 자나 큰 자, 잘하는 자와 못하는 자, 인종, 계급, 문화 등등의 잘못된 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누구나 큰 음성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과 그 하시는 일을 마음껏 찬송할 수 있습니다. 또 그렇게 마음껏 큰 음성으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고 감사합니다.
천국은 미래에 이루어 질 나라이지만 동시에 현재 이미 이루어진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이미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안에 곧 교회 안에 들어와 하나님의 경외하고 예배하는 성도들은 찬송하는 태도가 그때와 같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가장 큰 목소리를 어디에 사용합니까? 혈기를 부릴 때입니까? 아니면 찬송할 때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기뻐하는 중심으로 찬송한다면 온 정성과 힘을 다하여 드려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크고 좋은 목소리로 주를 찬양합시다. 소리는 마음의 상태와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음상태가 기쁠 때 나오는 소리와 슬플 때 나오는 소리가 다릅니다. 감격했을 때, 놀랐을 때, 화났을 때, 경외심을 가졌을 때 그 각각의 소리가 다릅니다. 서로 서로 이 소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어 보십시오. 계시록 19: 6에 찬송소리가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다고 했습니다.
제 45과 어린양의 혼인 잔치
계시록 19:6-10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9)
요한이 듣는 하늘의 찬송소리가 ‘허다한 무리의 음성도 같고 많은 물소리도 같고 큰 뇌성도 같’습니다. 이 찬송의 가사를 한 줄 한 줄 읽으면서 깊이 생각해 봅시다. 이 찬송을 중심으로 서로 서로 말해봅시다.
1. 전능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기뻐하며 영광돌림(19:6, 7)
“할렐루야 주 우리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가 통치하시도다.” 구약 성경에서 특히 시편에서는 ‘할렐루야’를 많이 들어 볼 수 있습니다만 신약 성경에서는 매우 적습니다. 그 중에 대부분이 요한계시록 찬송가사에 있습니다. 그 뜻은 잘 아시는 바대로 ‘여호와를 찬양하라’ 혹은 ‘여호와를 찬송하자’인데 그 소리를 발하는 사람의 마음이 과연 그러해야 함이 중요합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가 완성되는 장면을 보면서 전능하심을 찬송합니다. 그 날에 우리가 이 찬송을 부르게 될 것입니다만 지금도 여전히 능하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계속되고 있으므로 지금도 우리는 이 찬송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찬송을 부르며 살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놀라운 축복과 특권입니다. 이 은혜와 복을 누리며 주께 영광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2.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신부가 예비함(19:7하-9상)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어린양의 혼인 잔치가 베풀어 졌습니다. 신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오던 신부인 성도들이 드디어 혼인잔치에 참여합니다. 성도들이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 영접되어 영원 무궁한 천국에서 평강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 복된 천국의 삶을 기뻐하며 찬송합니다.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성도들이 그 잔치에 참예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 준비는 스스로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은혜로 베푸신 것입니다. 믿음을 은혜의 선물로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 거하는 자들이 이 믿음으로 받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옳은 행실로 살 수 있었습니다. 신랑을 닮아가도록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거룩케 하시는 사역으로 말미암아 준비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찬송하는 성도들이 그것을 이미 익히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원인자인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 찬송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얼마나 복된 자들입니까! 그러므로 천사가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고 말합니다.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고 거기에 참예하는 자들처럼 복된 자는 없습니다.
3. 참되신 하나님 말씀(19:9하, 10)
또 천사가 “이것들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여기 “이것들”은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예하는 것을 말하고, 천사의 말 한마디는 축복이 하나님의 참된 말씀의 성취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시면서 교회의 창설직원인 사도들에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이제부터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너희와 함게 마시는 날까지 마시지 아니하리라”(마 26:29)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도 그 의미 심장한 자리에 있었고 지금도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지금 그의 눈 앞에서 예수님의 그 약속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드디어 하나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로 주님과 함께 마시는 날이 된 것입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이 잔치는 한 두 주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토록 계속될 것입니다. 요한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짐작해보는 것만 해도 우리에게 큰 은혜가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천사는 즉시 그것을 만류하면서 “나는 너와 및 예수의 증거를 받은 네 형제들과 같이 된 종이니 삼가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했습니다. 천사는 우리와 동일한 종이고 피조물일 뿐이지 결코 신적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가 경배드릴 분은 오직 하나이신 여호와 하나님뿐이십니다. 그 외에 그 어느 누구나 그 어느 것도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진리가 우리의 예배에서 실현되고 적용되어야 합니다.
사도인 요한도 같은 실수를 두 번씩이나 할 뻔했습니다(계 22:8,9). 우리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에게 경배하려는 실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천사는 요한이 자기에게 경배하려는 것을 제재했지만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거나 자신을 이 세상의 신으로 위장해서 사람들의 경배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런 사단의 궤계에 대하여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 4:8-1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험받으신 것은 우리를 돕기 위함이기도 합니다(히 2:18). 주의 도우심을 구하며 삼가 조심하십시다.
이렇게 일점 일획이라도 빠짐이 없이 그대로 다 이루어지는 참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가 받았고 그것을 증거 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예수의 증거를 활발하게 대언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는 대언의 영”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곧 교회의 사명을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이고, 둘째는 성도들이 거룩하게 자라 가는 것이고, 셋째는 복음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제 46과 흰 말을 타신 그리스도
계시록 19:11-21
“보라 백마와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11)
1. 충신과 진실이신 예수 그리스도(19:11)
요한이 ‘하늘의 열린 것’을 보니 특별한 장면이 보입니다. 백마 탄 자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승리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이름을 ‘충신과 진실’이라고 했습니다. 앞에서도 같은 표현들이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아멘이요 충성되고 참된(진실한) 증인’(3:14, 1:5), ‘거룩하고 진실하신 분’(3:7).
‘충신’은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하나님 나라에 참여케 하셨으니 충신이십니다. 우리의 구원도 구원이려니와 하나님과의 언약,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셨으니 충신이십니다. ‘진실’은 모든 만물과 인생들이 기다리던 진정한 구세주란 뜻입니다. 그분이 “공의로 심판하며 싸”웁니다. 재림하시는 그리스도의 심판의 위엄이 잘 드러납니다. 그 날에는 공의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심판의 싸움이 17-21절에서 다시 언급됩니다.
2.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는 예수 그리스도(19:12)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의 “눈이 불꽃같고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이 있”습니다. 1:14절과 2:18절에서 이미 배웠습니다만 그 눈이 불꽃같다는 뜻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진리와 의의 척도에서 나오는 완전한 통찰력입니다. 면류관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의 능력과 권위를 나타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왕의 영광을 홀로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또 이름 쓴 것이 하나가 있으니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계시해주신 말씀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은 주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복된 말씀입니다. 주를 알 수 있는 성도가 되었다는 사실이 복중에 복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신구약 성경에 주님 자신을 전부 다 나타내 보이신 것은 아닙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요 구속주이신 주를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 주님은 한량없이 크시고, 무한, 무궁, 불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 제4문 -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신이시오 그의 존재하심과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심과 공의와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무한하시며 무궁하시며 불변하십니다.
3. 하나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19:13)
또한 백마 타신 그리스도께서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칭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창조시에도 말씀으로 역사 하셨고 구원도, 심판도 하나님 말씀으로 하십니다. 지금도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아 계셔서 강력하게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분이 증거 하신 말씀이 심판 때에 권세를 나타냅니다.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순종치 않았던 이들이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4.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19:14-16)
“하늘에 있는 군대들이 희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그를 따르더라.” ‘하늘에 있는 군대들’은 희고 깨끗한 세마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으니 ‘모든 성도들’을 지칭합니다. 이들이 백마를 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이한 검이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으로 만국을 칩니다. 친히 만국을 철장으로 다스리십니다. 그 권세에 정복되지 않을 세력이 없습니다. 버가모 교회들(=노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 입의 검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과 더불어 싸우시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또한 친히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을 밟습니다. 불경건한 죄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밟힙니다. 그리스도의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입니다. 모든 것을 정복한 주님의 절대적인 능력과 만물 위에 행사하시는 주권의 영원한 실체를 선포하는 이름입니다. 만왕의 왕, 만주의 주와 함께 하는 자들도 역시 이기고 그 왕권 행사에 동참할 것입니다(계 17:14).
본문에서 백마를 타신 그리스도를 칭한 이름이 네 가지입니다. 충신과 진실, 자기 밖에 아는 자가 없는 이름, 하나님 말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이런 이름들이 그 옷과 다리에 쓰여 있습니다. 주의 이름 하나 하나를 깊이 생각하며 묵상하면 충만한 은혜가 있을 것입니다.
5. 백마 탄 그리스도의 승리 :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의 패배(19:17-21)
눈부시게 빛나는 해에 서 있는 한 천사가 큰 음성으로 외칩니다. 공중에 나는 모든 새들을 향하여 외칩니다. 그 새들에게 공의로 심판하시는 주로 말미암아 패하고 밟힌 적 그리스도를 먹으라고 합니다. “와서 하나님의 큰 잔치에 모여 왕들의 고기와 장군들의 고기와 장사들의 고기와 말들과 그 탄자들의 고기와 자유한 자들이나 종들이나 무론대소하고 모든 자의 고기를 먹으라.” 예수님께서도 이 땅에 계실 때 이와 같은 뜻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이느니라”(마 24:28). 요한계시록은 앞에서 주셨던 65권의 성경내용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큰 자나 작은 자나 지도자나 추종자를 무론하고 불경건한 자는 전부 다 살육 당할 것을 보여줍니다.
앞에서 배웠던 모든 적 그리스도의 세력이 총 결집되어 최후의 결전을 벌입니다. 그 짐승과 땅의 임금들과 그 군대들이 모여 그 말 탄 자와 그의 군대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흰말을 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깁니다. 짐승이 잡히고 그 앞에서 이적을 행하던 거짓 선지자 즉 짐승의 표를 받고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던 자들을 이적으로 미혹하던 자도 다 잡힙니다. 이 둘이 산채로 유황불 붙는 못에 던지워집니다. 그 나머지는 말 탄 자의 입으로 나오는 검에 죽습니다. 그 시체들을 모든 새들이 배부르게 먹습니다. 그들이 받들던 사단도 동일한 최후를 맞습니다(20:10).
제 47과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승리
계시록 20:1-15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6하)
요한계시록은 언뜻 보면 복잡하게 보일런지 모르지만 내용을 잘 알고 보면 자주 반복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양한 표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만 잘 정리할 수 있으면 요한계시록의 내용을 단순, 분명하게 기억할 수 있습니다.
19장과 20장 그리고 21장도 역시 새로운 내용이라기 보다는 이미 앞에서 소개했던 말씀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의 후반부 특히 19장-21장의 해석은 천년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무천년설, 전천년설, 후천년설 이렇게 세 설로 구분됩니다. 이 천년설이 아직은 완전하게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것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사단(용)을 잡아 무저갱에 가둠(20:1-3)
그리스도의 보냄을 받은 한 천사가 무저갱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옵니다. 내려와서 용을 잡아 결박하였습니다. 그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입니다. 사단이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그 행동을 제한시켰습니다. 일 천년 동안 무저갱에 가두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바는 사단이 아무리 큰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활동한다 하여도 그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아래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사단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사단의 활동기간도 역시 하나님이 정하셨고 제한하셨습니다. 주께서 사단이 만국을 다시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결박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의 죽으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심, 그리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보좌에 앉으심으로 사단은 완전 결박이 된 것입니다.
2.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노릇하는 사람들 : 첫째 부활(20:4-6)
또 요한이 보니 보좌에 앉은 자들이 있습니다. 보좌에 앉아 있다고 했으니 이들은 분명 천국에 가 있는 신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입니다. 순교자들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으로서 그리스도를 높인 진실한 증인들입니다.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도 아니하고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도 아니한 자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끝까지 믿음의 인내로서 주님을 따라 살았던 모든 성도들입니다. 이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합니다. 이것을 첫째부활이라고 합니다.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정말 복이 있습니다. 이들은 거룩하게 구별된 자들 즉 주안에서 죽은 자들입니다. 이제는 사망이 성도들을 어떻게 하지 못합니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합니다.
3. 잠깐 놓였던 사단과 그 세력이 유황불 못에 던지워짐(20:7-10)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는데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습니다. 곡과 마곡은 하나의 단일명사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나라를 대표하는 칭호입니다.
적 그리스도의 나라가 지면에 널러 퍼져 ‘성도들의 진과 사랑하시는 성’ 곧 교회를 포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저희를 완전히 소멸합니다. 또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못에 던지워집니다. 거기에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습니다. 거기서 영원히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인은 그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영원토록 빛날 것입니다(마 13:36-43).
4. 흰 보좌에 앉으신 분의 심판 (20:11-15)
주께서 크고 흰 보좌 위에 앉으셨습니다. 절대권위와 공의의 자리입니다. 거기서 온 우주를 심판하십니다. 모든 영혼들이 심판 받기 위하여 그 보좌 앞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입니다. 이 책에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이 있는 영혼들은 생명의 부활(=첫째 부활)을 받고 그렇지 못한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둘째 사망)을 받습니다. 주께서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부활합니다. 어떤 장소에서 어떤 식으로 죽었든 다 부활합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줍니다. 전에 죽었던 몸들이 부활합니다. 어디서 어떻게 죽었든지 간에 다 몸으로 부활합니다.
‘사망’은 사람을 죽게 하는 법칙이었고 ‘음부’는 죽은 자들을 가두어둔 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들도 변동되어 부활의 법에 순종하여 죽었던 자들을 놓아줍니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망법도 없고 음부법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워집니다.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불못은 풀무불이나 지옥과 같은 표현입니다.
지옥은 꺼지지 않는 불이 있는 곳(마 18:8)이고 벌레도 죽지 않는 곳(막 9:48)이며, 영원한 고통이 있는 곳(계 14:11; 살후 1:9)이고 어두움의 곳(벧후 3:17)입니다. 지옥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서 멀리 떠난 곳(마 7:23)이고 사단과 그 사자들이 있는 곳(마 25:41)이며,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 멸망의 곳(롬 2:5-8, 9:22)입니다.
이제 이 마지막 심판이 다 끝나고 하나님께서 영광스러운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장면이 나올 것입니다.
제 48과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계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계시록 21:1-8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3)
이제 우리는 최종적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일관성 있게 흐르고 있습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새 하늘과 새 땅의 거룩한 성(21:1, 2)
요한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봅니다. 이제는 창세기의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습니다. 바다도 없어졌습니다. 또한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 승리한 교회를 말합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고 완성하셨습니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은 택하신 백성이고 하나님의 소유이며 거룩한 성도요 왕같은 제사장들입니다.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습니다. 신랑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결혼식장의 신부처럼 승리한 교회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입니다. 교회만이 신랑되신 주님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신부인 교회는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2. 하나님이 그 백성과 함께 계심(21:3, 4)
요한이 보좌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듣습니다.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완성된 교회와 영원히 함께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낙원이 회복되었고 그리스도안에서 회복 이상의 낙원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드디어 거듭 거듭 말씀하셨던 주의 언약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보좌에서 큰 음성으로 그 성취를 선언합니다. 이제는 처음 것들 곧 죄로 말미암아 저주받았던 것들이 다 없어졌습니다. 창조세계와 인류사회를 부패와 오염으로 망가뜨렸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더 이상 기억되지 않을 것입니다. 옛 세계의 모든 법칙들과 제도들이 다 폐지되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성도들이 불행과 비애가 없는 새 세계에서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선지자들이 예언하였었습니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51:11; 35:10).
3.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과 그 말씀(21:5, 6상)
보좌에 앉으신 이가 직접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구원이 완성되었음을 선포하는 중대한 말씀입니다. 성경 66권에 말씀하신 그대로 어김없이 성취되는 것을 ‘신실하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계획 그대로 나타나는 것을 ‘참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기록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성도들이 기억하고 살아야 될 말씀이기 때문에 기록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이 신실하고 참된 근본 이유는 말씀하시는 분이 완전하고 미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에 시작한 것을 친히 이루십니다. 나중 혹은 마지막은 시작에 이미 배태되어 있고 하나님의 시작(알파)은 그 마지막(오메가) 성취의 보증입니다. 앞으로 이루실 일이 남아 있지만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이기 때문에 말씀하신 것은 이미 다 이룬 것과 같습니다.
4. 목마른 성도들에게 값없이 주시는 축복(21:6하, 7)
그 날에 성도들에게 ‘생명수의 근원’(=생명수 샘물)을 주실 것입니다. 주께서 값없이 주시는 샘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6, 7).
우리 성도들이 지금도 영적인 생명수를 받고 있습니다만 그 날에는 더욱 충만히 받을 것입니다. 성도들은 현세에서 생명의 양식을 먹고 마시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충만한 천국을 사모하게 됩니다. 그래서 목마른 자들입니다.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주실 것입니다. 이기는 자들에게 생명수 샘물을 유업으로 주실 것입니다. 여기서 주시겠다고 하는 ‘생명수의 근원’과 ‘유업’은 하나님 자신을 주시겠다는 놀라운 약속입니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는 뜻을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것으로 달리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축복의 상태를 어떻게 인간의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5. 불신자들에게 주어지는 둘째 사망(21:8)
승리한 성도들은 만유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유업으로 받지만,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합니다.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그 새 세계에 들어가지 못할 자들이 누구입니까?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두려워하는 자, 흉악한 자, 살인자, 행음자, 술객, 우상 숭배자, 모든 거짓말하는 자, 그들 모두 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자들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계속 불신앙으로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사단과 적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며 숭배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영원한 못에 참예할 것입니다. 이것이 둘째 사망입니다.
제 49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I)
계시록 21:9-27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10하, 11상)
본문의 내용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의 모습입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의 교회를 지칭한다고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고도 표현합니다.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요한에게 말합니다. “이리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그 말을 마치고 성령님께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여줍니다.
1.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성(21:9-14)
그 성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어지는 모든 표현들은 바로 교회에 미치는 충만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습니다. ‘같다’고 했으니 문자그대로 볼 것이 아니고 비유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보석 같은 빛은 하나님의 성결과 영광을 나타냅니다. 승리한 교회의 성결과 영광은 교회 자체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입니다. 현세에서 신앙 생활하는 교회도 빛을 발하려면 자신을 감추고 그리스도를 옷입듯 해야 합니다.
‘벽옥과 수정같이 맑’은 것은 흠과 티가 없이 순전한 의를 이룬 상태를 말합니다. 천국의 영광과 존귀와 의와 기쁨과 평강을 상징합니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습니다. 구원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천국문입니다. 그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이 써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입니다. 열 두 지파는 신구약 시대의 모든 택한 백성을 상징합니다. 동편에 세문, 북편에 세문, 남편에 세분, 서편에 세 문입니다. 그 성에 성곽은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습니다. 열 두 사도는 교회의 창설직원들입니다. 모든 교회의 대표입니다.
2.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하는 성(21:15-17)
요한에게 말하는 천사가 그 성과 그 문들과 그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길이와 넓이가 같습니다.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고 길이와 넓이와 높이가 똑같습니다.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입니다. 척량한 모양이 대 제사장만 들어가던 지성소 모양(왕상 6:20)과 같습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을 하는 곳임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입니다. 사람이나 천사는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의 계산에 불과한 것이므로 숫자들도 산술적 의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인간의 용어로 표현할 수 없는 초자연, 초인간, 초월적인 아름다움과 빛, 의와 희락과 평강, 임마누엘의 상태를 ‘...같고’나 ‘숫자’ 혹은 유비로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충만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 가서야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듯이 환할 것이고 세상의 비유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3.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것들(21:18-21)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습니다. 벽옥은 맑습니다. 하나님의 의의 영광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성도에게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보호의 힘입니다. 그 도시가 정금이면서 유리처럼 맑습니다. 그 천국도시에 사는 성도들이 금과 같은 신앙으로 다닙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습니다.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고 둘째는 남보석이고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고 여덟째는 녹옥이며 아홉째는 담황옥입니다. 열째는 비취옥이고 열한 째는 청옥이며 열두째는 자정입니다. 그 천국도시의 기초석을 꾸민 각색 보석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주신 각양 은사와 지혜, 덕을 의미합니다.
그 열두 문은 열두 진주니 문마다 한 진주요 성의 길은 맑은 유리 같은 정금입니다. ‘진주’는 천국에 들어가는 진리를 비유합니다(마 7:7, 13:45, 46). ‘정금’은 하나님의 신실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천국에서의 행로에는 아무런 장애물이 없고 평탄하고 즐거울 뿐입니다.
4. 전능하신 하나님과 어린양은 성안의 성전이심(21:22, 23)
요한이 성안의 성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어린양이 그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이 그 등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므로 복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성전처럼 특별한 장소를 구별하여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5. 그 성에 들어오는 자들(21:24-27)
만국이 그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올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가지고’ 들어온다는 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그분께 영광이 될 존재로서 거기에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성문들을 낮에 도무지 닫지 아니합니다. 왜냐하면 거기는 밤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증한 일 또는 거짓말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받지 않은 모든 것은 다 ‘속된 것’입니다.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가증하다고 일컫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믿지 않는 자들은 전부 다 거짓말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천국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는 영광스런 하나님의 도성입니다.
제 50과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모습(II)
계시록 22:1-5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3)
앞장의 계속으로 새 예루살렘을 묘사합니다.
1. 생명수의 강의 근원 :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22:1, 2상)
사도 요한이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게됩니다. 에덴 동산에 흐르던 강이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으로 다시 나타납니다. ‘생명수의 강’은 늘 흐르는 강이며 생명을 주는 강입니다. 그 강이 맑게 빛나고 있습니다. 의와 영생과 광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나옵니다. 내세의 무궁한 생명이 하나님과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말고 무엇을 생명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에 의한 것이며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입니다.
이 생명수의 강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한이 본 이 환상은 구약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과 비슷합니다. 겔 47:1절부터 읽어보십시오. 이 에스겔서의 환상을 예수님이 요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요 7:37). 이 생수의 강이 곧 성령입니다. 성령을 통한 생명의 역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해석으로 본서의 다음 성구들을 다시 한 번 묵상해 보십시오.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저희 눈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계 7:17).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계 21:6).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계 22:17).
우리의 갈증은 주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시 42:1,2). 성도에게 가장 완전한 만족은 주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성도에게 복입니다. 천국이 천국일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성 삼위일체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충만한 교통을 누리며 사는 그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2. 생명나무(22:2하)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습니다. 그 나무가 열두 가지 열매를 맺습니다. 달마다 실과가 맺힙니다. 그만큼 풍성한 생명을 공급합니다. 그 생명나무 잎사귀들이 만국을 소성하고 치료하기 위하여 있습니다. 이렇게 생명나무의 열매는 사람에게 영생을 주고 그 잎사귀는 상한 영혼을 낫게 합니다. 천국에 질병이 있느냐고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은 어린양이 눈물을 씻겨 주신다고 해서 천국에 눈물이 있느냐 하는 질문과 같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질병이 없는 건강만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천국의 생명의 충만함을 무엇으로 다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나오는 그 풍성한 복과 영원하고 충만한 그 생명을...
3.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22:3상)
다시는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아담이 범죄하므로 저주를 받아 하나님과 함께 사는 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므로 주와 함께 복된 삶을 살려면 먼저 그 저주가 없어져야 합니다. 그 저주가 없어진 곳이 천국입니다.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계실 뿐만 아니라 영원한 중보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십니다. 영원한 대속의 어린양이 함께 계십니다. 이것이 저주가 없어진 현상입니다. 이제는 영생 복을 잃어버릴 염려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사랑의 통치가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에 거하는 백성들이 기쁨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4. 주 하나님을 그 백성이 섬김(22:3하, 4)
하나님의 종들이 주를 섬깁니다. 주를 섬기는 것이 인생의 본분인데 이제는 그 본분을 온전히 발휘합니다.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특권입니다. 진정한 섬김은 섬길수록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대면하며 그 은혜를 즐거워하고 경배합니다. 이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이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자기의 소유라고 공인하고, 이들은 기쁨으로 하나님을 주(主)라고 고백합니다. 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다스리심이 이렇게 충만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 시대에도 이러한 천국이 실현되고 해당됩니다만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룩될 때 완전히 성취됩니다.
5. 성도들도 왕노릇함(22:5)
다시는 밤이 없을 것이며 다시는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시기 때문입니다. 그 빛의 비취임을 받으며 성도들이 세세토록 왕노릇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통치에 동참하다니! 주와 함께 통치하는 이 영광은 지금도 미리 맛보고 있긴 하지만 그 충만함은 천국에 가서야 다 알게 될 것입니다.
제 51과 요한계시록을 가르치라는 세 차례의 권면
계시록 22:6-17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10)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이 예언의 말씀을 주시고 위로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로 하여금 계속하여 이 예언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하십니다.
1. 첫째 권면 : 신실하고 참된 말씀이니 지키라(22:6-9)
주께서 지금까지 계시하신 모든 말씀들 곧 계시록의 모든 내용은 ‘신실하고 참’됩니다. 그러므로 권위가 있고 꼭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주께서 이 말씀대로 반드시 오실 것입니다. 다른 모든 일들도 반드시 속히 될 것입니다.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그러므로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지키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것들을 보고 들은 요한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래서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와 경배를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것을 못하도록 제지하였습니다.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아무리 위대해 보이는 천사라 할지라도 경배를 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도 역시 우리와 같은 피조물입니다. 경배는 오직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드려야 합니다.
2. 둘째 권면 : 계시록을 인봉하지 말고 가르치라(22:10-15)
두 번째 권면을 합니다.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주께서 인봉하지 않고 개봉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그 내용을 읽을 수 있고 들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연구, 묵상할 수 있고 그 말씀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왜 인봉하지 말아야 합니까? “때가 가까우니라”(10). 주께서 오실 날이 가깝기 때문에 인봉하지 말고 가르쳐야 합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이므로 증거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때가 가깝습니까? 불의를 하는 자를 그대로 불의를 하도록 내버려 둘 정도로 가깝습니다. 때가 촉박하기 때문에 악인들이 회개할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회개가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가 지나고 나면 사람들이 더 이상 회개할 기회가 없고 다만 자기들의 행위의 열매나 거두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여서 속히 오실 주님이 그들의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11).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십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본서를 통하여 계시하신 주님을 알고 주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두루마기를 빤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앞에서 배운 대로 어린양의 피로 그 옷을 씻어 희게 했다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한다는 뜻입니다. 회개하여 용서받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죄, 칭의를 입은 사람들이 날마다 생활 속에서 정결하고 거룩하게 사는 삶을 지칭합니다. 주의 거룩하심처럼 거룩해져 가는 성화를 포함하는 표현입니다. 이미 어린양의 피로 구속함을 입은 성도들이 날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주의 마음을 닮아 가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은 생명 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 갈 권세를 얻습니다.
죄 때문에 가로 막혔던 생명나무에 나아갈 권세를 얻습니다. 문들을 통하여 그 성에 마음대로 들어 갈 권세를 얻습니다. 그러나 그 성에 들어가지 못하는 자들은 영원히 불행한 자들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못 들어갑니까?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성밖에 있을 것입니다.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 그리고 사망과 음부와 함께 둘째 사망인 불못에 던지움이 될 것입니다.
3. 셋째 권면 : 주께서 교회에게 전하라고 명하심(22:16)
예수님께서 요한계시록을 주신 것은 교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사자를 보내어 이 말씀들을 먼저 교회에게 알리게 하고 또한 그 교회로 하여금 증거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이 일을 하시는 주님은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십니다. ‘다윗의 뿌리, 다윗의 자손’은 교회를 세우러 오신 메시아를 지칭합니다. ‘광명한 새벽별’은 계시하시는 주님을 나타냅니다. 마치 낮이 가까웠음을 알려주는 새벽별과 같은 주님이십니다.
4. 교회의 순종(22:17)
주의 명령에 따라 교회가 순종합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17). 여기서 신부는 하나님의 백성들 곧 교회원들입니다. 교회의 증거에 증거의 영이신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성령님과 교회가 외칩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누구에게 오라는 초청입니까? 세상의 구주와 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라고 합니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안에 들어와 있는 성도들이, ‘당신들도 내가 있는 이 좋은 곳으로 오라’고 손짓하며 다른 사람을 초대합니다. 이것은 성도의 특권이자 의무입니다. 그리스도를 영적으로 갈망하는 목마른 자들에게 값없이 와서 생명수를 받으라고 외칠 수 있는 우리들의 처지가 얼마나 복됩니까! 아직도 주를 갈망하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들에게 주님 앞에 나오되 값없이 나아와서 주를 영접하라고 외칩시다.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제 52과 주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교회의 태도
계시록 22:18-21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18, 19)
1.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 대한 태도(22:18, 19)
본서를 마무리하면서 이 책에 기록된 말씀이 주의 예언의 말씀인 것을 분명히 하고, 본서의 절대적 가치를 증거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대한 태도를 권면하십니다. 이 권면 속에 경고가 있고 그 경고 속에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부정문을 긍정문으로 바꾸면 약속이 보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가 보일 것입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자신의 기발한 생각을 덧붙이든지 자기들에게 부담된다거나 맞지 않는다거나 유익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빼버리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를 기쁨으로 받으십시다. 성도들을 위하여 주시는 지극한 사랑의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감동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단 한 마디라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주의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계시록을 공부할 가치가 없는 것처럼 멀리하거나 소홀히 해도 안됩니다. 스스로 속거나 속이는 자리에 들어가지 않도록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합시다.
2. 모든 성경에 대한 태도
본문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은 일차적으로 요한계시록을 지칭합니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는 않습니다. 이차적으로는 전 성경을 향하여 주시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전 성경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책이고, 이것으로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종결됩니다.
본서의 내용도 전 성경과 연관되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서 창세기의 처음 세 장과 본서의 마지막 두 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이 세상의 처음을 말하고 요한계시록은 이 세상의 나중을 보여줍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하늘과 땅)를 창조하시니라”(창 1:1) -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계 21:1).
“모인 물을 바다라 칭하시니라”(창 1:10) -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계 21:25).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창 1:5) - “거기는 밤이 없으리라”(계 21:25).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해)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달)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창 1:16) -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데 없으니”(계 21:23).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7) - “다시 사망이 없고”(계 21:4).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창 3:16) -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며”(계 21:4).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창 3:17) - “다시 저주가 없으며”(계 22:3).
‘사단은 간교한 자로 나타나고’(창 3:1) - ‘사단은 영원히 못 나타나고’(계 20:10).
‘사람이 생명나무 곁에 갈 수 없게 되고’(창 3:22-24) - ‘누구나 생명나무를 취할 수 있고’(계 22:2).
‘사람이 하나님 면전에서 쫓겨나고’(창 3:24) - “그들은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계 22:4).
이렇게 성경의 처음 문제가 다 해결된 것이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이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으로 우리는 현실세계를 지나 하나님의 영원한 평강의 세계를 바라봅니다. 진노의 날을 지나서 은혜의 날을 바라봅니다. 바벨론을 거쳐서 새 예루살렘을 바라봅니다. 이런 연관성과 점진성을 밝게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총 망라하여 인용합니다. 그리고 본서의 내용이 다른 성경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본문(계 20:18,19)은 요한계시록은 물론 전 성경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마지막 한 마디(22:20)
이 모든 계시록의 말씀들을 증거 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나타내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더욱 밝히 알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통하여 알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도록 은혜주신 주님께 감사 드립니다. 그분께 속하고 그의 소유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이제까지 교회인 너희들 즉 성도들에게 알려주었던 나, 바로 그 내가 속히 올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나를 믿는 믿음으로 인내하라.’ ‘오직 내 안에서 나를 신뢰하며 기도하며 그 섬김을 계속하라.’ ‘내가 속히 오리라.’
4. 교회의 반응(22:20하)
이 말씀에 대한 우리 교회의 반응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주저함이 없이 기쁜 마음으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넉넉하게 위로를 받고 힘을 얻어서 화답합니다. 요한이 교회의 대표로 그 화답을 합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는 신부의 간절하고 열렬한 반응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5. 축복(22: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사람을 위한 축복 중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보혈로 뿌림을 받아 깨끗해진 무리들,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의 영원한 안전보장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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