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룻기 강해

[스크랩] 룻은 누구에게로 룻기 4장 1-6절

에반젤(복음) 2019. 11. 2. 16:51



   룻은 누구에게로 룻기 4장 1-6절


우리는 지금 룻기를 읽고 있습니다.
룻기 중에서도
가장 긴장되는 장면을 읽고 있습니다.
룻은 과연 누구에게로 시집갈 것인가?
보아스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인가?

우리는 룻이 어떻게 될 것을 다 알기 때문에
당연히 보아스와 결혼하겠거니
심드렁하지만,
실제 상황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긴장된 순간이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긴장감이 도는 구절을 읽을 때는
앞뒤를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해도,
긴장감을 느껴야 합니다.

성경에는
긴장감이 도는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어느날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아들 이삭을 바쳐라 하십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산으로 데리고 갑니다.

모리아 산에 도착해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꽁꽁 묶어놓고
칼을 치켜들고 막 죽이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긴장된 순간입니까?

그렇지만 우리는
잠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것이다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긴장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이 아주 재미있고
손에 땀을 쥐게하는 부분인데,
읽어도 재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가 내용을 다 알고 있다고 해도
이러한 부분을 읽을 때는
긴장감을 느껴야 합니다.

아이들은
몇번 들어서
다 아는 이야기라고 해도,
하도 들어서
이야기를 다 외우고 있어도,
들을 때마다 재미가 있고
들을 때마다 긴장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간다는데,
하나님 말씀읽을 때에
어린아이처럼
그렇게 언제나 새로운 마음으로 읽읍시다.
이것이 본문을 읽는 예의이기도 합니다.
룻기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룻은 과연 누구에게 시집갈 것인가?
어떻게 될까요?

룻과 한밤의 데이트를 한 보아스는
룻에게 보리를 이워주고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3장은 1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가로되
네 겉옷을 가져다가
펴서 잡으라
펴서 잡으니
보리를 여섯 번 되어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이 구절을 자세히 봅시다.

여러분.
성안으로 들어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누가 성안으로 들어갔을까요?
룻일까요?
보아스일까요?
이 문제를 찬찬히 풀어봅시다.
우리가 읽는 성경 맨밑에 보면,
이 구절에 대한 주가 나옵니다.
그것을 읽어볼까요?

수리아와 라틴 번역에는
이워주니 그가 성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읽는 성경과는 달리,
다른 성경에는
룻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룻이 성안으로 들어간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현재의 본문을 그대로 읽으면,
보아스가 성안에 들어간 것을
강조합니다.

룻에게 이워주고
성으로 들어가니라.
룻에게 보리를 이워준 사람이 누구입니까?
보아스이지요?
그러니 성안으로 들어간 사람은 보아스입니다.
물론 룻도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룻이 그 타작 마당에
계속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룻도
당연히 성안으로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룻이 성안으로 들어간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룻이 나오미와 만나는 것을 보면,
룻이 성안으로 들어간 것이 분명한데,
룻이 성안에 들어간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에게 관심이 있습니까?
보아스입니다.

누가 성안에 들어갔느냐?
보아스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보아스가 성안에 들어간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면
보아스는 왜 서둘러서
아침 일찍이
성안으로 들어갔을까요?
그리고 성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했을까요?
보아스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앞으로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을 것입니다.
룻과 나오미에게 약속한 것들을
다 지키기 위해서,
그리고
나오미와 룻이
얼마나 애타게 결과를 기다릴까 생각해서
그 일들을 한시라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서
보아스는 철저하게 준비를 합니다.
특히 룻에게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을 것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그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내가 기업무를 자의 책임을
네게 행하리라.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보아스는 새벽녘에
성안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다음에
보아스는 성문으로 올라갔습니다.
4장 1절 앞부분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보아스는 베들레헴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 앉았을까요?

성문이 있는 곳은
그 성안에서 가장 넓고
사람들이 왕래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마을에서 어떤 일들을 하거나
재판을 할 때는
모두 성문 앞에서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죽었을 때
사라를 장사지낼
무덤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헷족속 에브론이라는 사람에게서
밭을 삽니다.
막벨라 굴이 있는 밭을 사는데,
그러한 계약이 어디서 이루어집니까?
성문에서 이루어집니다.
창세기 23장 10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에 에브론이

헷 족속 중에 앉았더니
그가 헷 족속 곧 성문에 들어온 모든 자의 듣는데
아브라함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여기서 보는 것처럼,
이러한 민사상의 일들이
성문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성문에 앉았다
또는 성문 위에 올라가서 앉았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곳에서
지위가 상당히 높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창세기 19장 1절을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했다
이런 말이 나옵니다.
두 천사가 소돔을 방문했을 때,
롯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두 사람을
누가 맞이했습니까?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아있습니다.
그리고 롯이 그 사람들을 맞이했습니다.
이것은 롯이
그곳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보아스도 성문에 올라가 앉은 것을 보면,
마을 사람들을 재판하고 다스리고

마을을 대표해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또 마을의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그런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성문이라는 것이 이런 곳입니다.
성문은 법을 집행하는 곳입니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일을 처리할 태세를 하는 데,
보아스가 말하던
그 기업무를 사람이
때맞춰 그곳을 지나갑니다.

그래서 성문으로 올라오라고 해서,
그 사람이 성문에 올라가서 자리에 앉았습니다.
보아스는 증인들도 부릅니다.
마을의 어른들인
장로 열사람을 불렀습니다.
재판에 필요한 사람들이
다 제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이제 재판이 시작될 차례입니다.
이렇게 재판을 준비하는 보아스를 보면서,
우리는 보아스가 얼마나
공명정대한 사람인가 생각합니다.
보아스는 모든 일들을
합법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법에 따라서 처리하려고 하지,
절대 사사로이 일을 처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일을 하려고 합니다.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도록
그렇게 일을 처리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본받을 만 합니다.
이렇게 재판준비를 다 한 다음에
보아스가 안건을 내놓습니다.
먼저 보아스는
나오미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그 기업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나오미가 모압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리고 그가
자기들과 형제간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고 있다.
이렇게 당시 상황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기업무를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줍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그리고 무를 것인지
무르지 않을 것인지
선택하도록 요구합니다.
보아스의 말을 들어봅시다.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보아스는 모든 사실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 사람이 엘리멜렉의 친척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그리고
그 사람이 기업무를 자라는 것도 확인시킵니다.
또 기업을 무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러면서
그 다음 순서로
보아스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사람들은

당신과 나
두 사람 뿐이라는 것도
정확하게 밝힙니다.
우리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보아스가 얼마나
정확한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하는 말을 듣고
그 사람은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무르겠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그 사람에게 넘어가게 되는 순간입니다.
그때 보아스가 한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지니라.
그러니까 재산만 무르지 말고,
엘리멜렉 가문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엘리멜렉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멜렉도 죽고,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도
죽었습니다.
이들이 자식을 낳고 죽었으면
상황이 달라졌을텐데
두 사람 다
자식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마디로
집안의 대가 끊기는 거지요.
엘리멜렉의 가문이 완전히 끊기는 것입니다.
한가족이 대가 끊겼다는 것은
지금도 심각한 문제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다 사용했습니다.
씨받이를 데려고 와서
대를 잇게도 했습니다.
이렇듯이 대를 잇는다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멜렉의 대가 끊긴 것입니다.
얼머나 큰 불행입니까?
그래서 친척들을 돕는 고엘들은
재산만 물리는 것이 아니고,
자식없는 과부도 책임져서
자녀를 낳으면
전남편의 아들로 입적해서

그 집안이
대가 끊기지 않도록 했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무어라고 말합니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왜 할 수 없다고 합니까?

6절을 봅시다.
그 기업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 사람은
자기가 손해를 볼 것같아서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재산은 무를 수 있지만,
룻을 아내로 맞아드리고

낳은 자식을
엘리멜렉 가문에 입적시켜서
엘리멜렉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해주는 것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가 손해보는 일이고,
자신이 손해볼 일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사람은
자기권리를 포기하고 맙니다.
그러니 자연히

모든 것을
보아스가 떠맡게 되었습니다.
결국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집안을 책임지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재판결과를 보고
가장 기뻐할 사람은
룻과 나오미입니다.

룻과 나오미는
누가 되었든 자기들의 기업을 무르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이 아닌
보아스가 마음에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들의 고엘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오미가 일을 꾸민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게 여의치 않았습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척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식재판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생각도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앞으로 일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룻과 나오미가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일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마음을 졸이는데
그 남자에게
보아스가
기업을 무르겠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저 사람이 못한다고 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손에 땀을 쥐었을 것입니다.

이러고 있는데,
그 사람이 선뜻
내가 무르겠다고 말하자
일이 다 글렀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마 두 사람 다
온몸에 맥이 빠졌을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렇게 되는가
싶었을 것입니다.

뭔가 일처리를 잘 할 것같더니
보아스도 별 것 없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보아스는
그 정도로 일을 끝낼 사람이 아닙니다.
보아스가 그 사람에게 제기하는 문제는
거기서 그친 것이 아닙니다.
단순히 재산을 무르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혈통의 문제입니다.

보아스는
엘리멜렉 가문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이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나는 무르지 않겠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보아스의 두 번째 질문을 듣고
그 사람이
나는 무르지 않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고,

룻과 나오미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이제서야 나오미와 룻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 쉬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우리에게
룻이 누구에게 시집갈 것인지
손에 땀을 쥐고
보게 합니다.

그리고
보아스라는 한 사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보아스는 얼마나 훌륭한 사람입니까?
보아스는
법에 따라서
모든 일들을 바르게 처리하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이든 숨기지 않습니다.
자기 뜻대로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자기 맘에 맞는 대로 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세워져 있는 법에 따라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보아스를 본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할 때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가 적습니다.
원칙에 따르지 않으면,
개인으로는 괜찮지만
공동체에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해놓고
나중에 말썽이 생기면,
나는 잘해주려고 했는데
왜 그러느냐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엄연히 규범이 있는데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적용하려고 합니다.
이런 행동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언제나 바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세워진 틀을 깨서는 안됩니다.
누구나가 공감할 수 있는

틀을 만들어놓고
거기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런 틀이 없습니다.
원칙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원칙에 따라서
일을 처리합니다.
그래서 보아스는 떳떳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아스처럼 그렇게 살기를 원하실 것입니다.
집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서로 공감하는 원칙이 있어야 하고,
온가족이
그 원칙에 따라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모두가 공감하는 원칙을 세워놓지 않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일을 처리하면,
그것은 폭군입니다.

독재자이지요.
가정에도 법과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도
자기가 분명히 무엇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부모가 야단을 쳐도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자기 기준에서 보면
자기는 전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부모가
자식이 공감하지 않는 부모만의 기준으로
자기를 야단치면,
아주 억울하게 생각하고 분해합니다.
모두가 동감하는 원칙을 세워놓고
거기에 따라서 일을 처리해 나갑시다.
공의로우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의를 이루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