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사도행전 강해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에반젤(복음) 2019. 10. 3. 19:42




  

마가 요한, 그리고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행 12:12, 25; 13:5, 13; 15:36-41-



윤철원/서울신학대학교 교수



TV 드라마 보기와 성서 읽기

문득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유명한 TV 연속극을 시청할 때는 그 드라마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것은 물론, 시청하지 못한 친구에게 상세히 들려줄 정도로 빠져들면서, 성서를 읽을 때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는지 궁금하다. 신약성서 문학의 백미로 꼽히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잘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누가 이 비유 이전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며, 하물며 이 비유의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아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글을 읽는 독자들은 애송이 마가 요한을 주목하면서 흥미진진한 사도행전 읽기를 경험하기 바란다.


주목받을 조연들

사도행전에는 다양한 모습을 띠면서 등장하는 조연이 많다. 단적으로, 맛디아 같은 신출내기 사도는 등장과 함께 사라진다. 그의 등장이 왜 필요한지 의구심마저 든다. 물론 신학적인 이유와 그러한 사건을 기록하는 저자의 의도는 별개로 치더라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 가말리엘, 유두고 등으로 이어지는 여러 조연들의 역할은 그리 무게를 두지 않아도 될 만큼 미약하다. 이런 조연 가운데 마가 요한의 위상은 평범하지 않은데, 내러티브에서 그의 역할이 실제로 상당하다. 바울과 바나바의 탄탄한 연대감은 그로 인하여 깨진다.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몇 차례 등장해서 결국은 바울과 바나바의 협력을 깨고 마는 마가 요한을 주목하는 작업은 흥미로울 것 같다. 앞으로 분석할 내용처럼, 마가 요한은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등장한다(12:12, 25; 13:5, 13; 15:37). 그는 부정적으로 그려지지만, 궁극적으로는 바울을 성숙하게 만드는 하나의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누가의 서술 기법

사도행전에서 마가 요한을 주목할 때, 먼저 숙지할 사항은 누가가 앞으로 전개될 사건을 미리 암시하는 기법을 활용한다는 점이다. 코텍스트(co-text)적으로 누가 문서를 읽어갈 때 이러한 특징은 누가복음서의 앞부분부터 두드러지는데, 예수의 가버나움에서의 사역이 언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나사렛의 사람들은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들을 고향에서도 행하라고 몰아세우지만(눅 4:23), 독자들은 가버나움의 일을 전혀 모른다. 유사한 경우는 ‘시몬의 장모’라는 언급에서도 반복된다(눅 4:38). 여기서도 역시 시몬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그렇지만 누가는 독자에게 시몬을 만날 수 있게 미리 준비시킨다(5장에서 시몬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 이렇게 암시적으로 묘사하는 특징은 누가의 문학적 전략이다. 마가 요한의 등장도 유사한데, 그의 첫 등장에서 그러한 특징이 드러난다. 헤롯 아그립바 1세의 감금으로 투옥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석방된 베드로가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가는 장면에서 그의 이름은 언급된다(행 12:12). 과연 마가 요한은 누구일까 독자들은 궁금해 하며, 본격적으로 등장할 인물을 기대하게 된다.


스치는 듯 언급되는 마가 요한

기적적으로 감옥에서 석방된 베드로가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여기서 마가 요한의 이름은 스쳐가듯 언급된다. 베드로가감옥에서기적적으로구출된후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집으로간다(행12:6-12). 12장 12절에서우리는마가 요한의 가족 관계이외에그에 대해서 어떤 것도 듣지 못한다.간접적으로우리는그의모친이유복한 예루살렘 교회의 여성인 것만알 뿐이다. 마리아의 집은‘로데’라는하녀(12:13)가있고,많은 성도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한 집(ο?κο?)을소유할 정도로 부유했으며,그집에접근하는방법으로대문이나현관(12:13)을이용했을 만큼의 큰 규모였다.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마가 요한은그의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소개된다. 그런데 기적의 주인공 베드로가 찾아간 집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의 집이라고 언급되면서도, 흥미로운 것은 사도행전에서 마가 요한과 베드로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독자들은 한편에서 마가 요한과 베드로가 혈연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예상할지 모르지만, 내러티브에서 그들의 만남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기적적으로 석방되어 문 앞에 서 있는 베드로를 가로막는 일이 있은 후(12:13-16), 마침내 그가 집으로 들어와 자신의 탈출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 야고보와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형제들에게 그 사실을 전하라고 부탁한다(12:17). 나레이터는 베드로가 도착하자마자 그를 마리아의 집으로부터 떼어놓는다(12:17). 12장 12-17절에서마가 요한의 이름은 베드로의후원자 역할을 수행하는마리아를지목하면서 스칠 뿐, 그와 베드로는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사도행전에서 마가 요한이 재등장할 것이라고 독자들이 기대하기는 상당히 어려워진다.

선교 동역자, 마가 요한

아니나 다를까 마가 요한은 재등장한다. 그의 등장과 관련된 사정은 좀 길게 설명되어야 한다. 유대의 예언자 아가보가 천하(ο?κουμ?νη)에 흉년이 들 것이라고 예언하는데(11:27-28), 이 내러티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그렇게 되었음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결정하고 바나바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파견했다(11:29-30). 물론 천하에 흉년이 들 것이라는 예언은 예루살렘 모교회가 위치한 유대 지역은 물론 안디옥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의 성도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봉사의 구제를 자발적으로 참여하는데, 바나바와 바울이 헌금을 전달하는 책임을 맡아 예루살렘을 방문한다. 바렛(C.K. Barrett, The Acts of The Apostles, vol. 1, ICC, T & T Clark: Edinburgh, 1994, 559)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의 이러한 결정은 그들의 교회가 자립한 상태임을 드러내주는 동시에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의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기대하는 전략적 측면이 있다. 그 부조의 책임을 맡아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바나바와 바울은 구제의 사역을 마친 후 ‘마가 요한’이라는 한 명의 동역자를 데리고 안디옥으로 돌아온다(12:25).

여기서 독자들은 마가 요한이 안디옥 교회의 바나바와 사울이 펼치는 선교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협력자가 될 것을 예감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사도행전의 선교에서 마가 요한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할 것임을 예감한다. 결국 그는 예루살렘과 안디옥에서 파송 받아 활동하고 있는(9:26-30; 11:19-30)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선교여행에 나서게 될 것이다. 물론 바나바와 사울도처음등장할때는 보조적인 인물로소개되었었고, 내러티브의 전개에 기여하며 은연중에 나타나는 듯하다 곧 사라졌었다(4:36-37, 8:1a). 반면, 독자들은 마가 요한의 영향력을 확신할 수 없는데, 그가 동행하는 두 사도와 동등한 파트너로 언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누가의 내러티브는3명의 선교사 모두를 동일하게 배치하지 않고 바나바와 바울이 마가 요한을‘데리고’(συμπαραλαβ?ντε?) 활동했다는 정보를 흘린다(12:25; 15:37, 39). 여기서 풍기는 이미지는 바나바와 바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선교의 과정에서 마가 요한은 후배 동역자이자, 좀 심하게 표현하면 선교 사역에 이제 겨우 편입된 애송이일 뿐이라는 느낌이다.

이쯤해서 독자들은 하나의 고민거리가 생기는데, 예루살렘에 있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마가 요한이 바나바와사울의동역자로선택된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내러티브는 그것을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오래된 학자이지만 마가 요한의 해석에 중요한 스웨트(H.B. Swete,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London: Macmillan, 1927, xvi.)는 ‘바나바가 그의 사역을 위해서새로운 동역자를 물색했고, 요한은 바나바의 가까운 친척’이라고주장한다. 이 주장은 골로새서4장 10절에 의존하며, 사도행전에서 마가 요한의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로 제시된다. 그렇지만 누가가 마리아를 마가 요한의 모친과 동일시하는 반면, 바나바와 마가 요한을 사촌 관계로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만약 사도행전 12장 12절에서 누가의 의도가 독자들이 익히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 마리아를 연결시키려는 것이었고,또한 마가 요한과 바나바가 사촌지간인 것을 누가가 알았다면, 마리아가 바나바의 친척이라고 밝히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이 생긴다. 동시에바나바와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체재할 때 마가 요한의 모친의 집에서 체재했다거나,또한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 도중 마가 요한이 합류하게 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이 내러티브는언급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2장 25절에서 왜 마가 요한이 갑자기바나바와 사울을 따라갈 수 있었을까? 내러티브의 실마리가없는 가운데 어떤 답변을 제시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내러티브의 암시가 자연스럽지 않고 미진한 것은 그냥 놔두는 것이 더 나을 듯싶다. 누가는 바나바와 사울의 제 1차 선교여행이 시작될 때 마가 요한을 함께 데리고 갔다고만 언급할 뿐이다. 그러므로 마가 요한이 왜 무대에 출현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독자들의 노력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문학비평, 특히 독자반응비평을 애용하는 학자들은, 저자의 의도는 밝혀낼 수 없고, 다만 [죽은] 저자의 의도를 독자가 밝혀냄으로, 죽은 저자를 살려내는 만능인으로서 독자의 위상을 격상시키므로 독자의 능력을 무한대로 확대한다.


흔들리는 마가 요한의 정체?

13장 5절은 제 1차 선교 여행이 시작되어 살라미에 도착한 바나바와 사울이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수종자로 그들을 돕고 있는 마가 요한을 소개한다. 그는 바나바와 사울이 바나바의고향구브로(4:36)에서선교하는 기간동안 수종자로 봉사한다. 여기서 마가 요한의 인물 묘사와 관련하여두가지 문제가제기된다.우선, 부차적인질문은 누가가 마가 요한을 언급한 것과 그 언급에 대한 모호성이다. 12장 25절과 13장 5절 사이에서 요한으로 명명된 다른 인물이 언급되지 않으므로, 이 구절에 언급된 요한을마가 요한으로 봐야한다. 둘째,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것은마가 요한을수종자로묘사하는누가의의도인데,어떤것이그용어에대한최선의번역인지에 따라서 마가 요한의 위상이 결정된다. 수종자(?πηρ?τη?)는본래 갤리선의맨 아래서노를젓는노예를의미했다.헤로도투스(History 3.635.111.)나 플라톤(Politicus 289c)의글에서도이미사용되었으며,부하,종,시중드는 사람을 의미했다. 이 용어는 가정과 정치, 그리고 종교 분야에서 모든 종류의 종속적인 관계를 지시했다.

과연 이 용어의 본래 의미가 무엇인지 많은 궁금증을 제기한다. 그렇지만 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마가 요한의 위상을 보조자로 판단하는 것은 그리 무리가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13장 초두에서 안디옥 교회는 이방 선교를 위해서 바나바와 사울, 이 두 사람을 안수하여 성령의 증인으로 삼았다. 마가 요한이 그들과 동등한 위치였다면, 누가의 이런 묘사가 설득력이 있는가? 안디옥 교회에는 바나바와 사울을 포함하여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과 같은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여서 예배하고 금식할 때 성령이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지시한다. 이렇게 다수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안디옥 교회에 주류를 형성했는데, 13장에서 마가 요한은 그 자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이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다’(ε?χον)고 할 때 사용된 동사의 주어는 바나바와 사울이 분명하다. 바나바와 사울은 마가 요한을 그들의 도우미로 데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음식을 만들고 짐을 나르거나 선교 여정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거나, 또한 여행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기록하는 일을 맡았던지 불분명하지만, 내러티브의 흐름상 그가 바나바와 사울과 동등한 위치에서 사역하지 않은 점은 명백해 보인다.

이와 동시에 13장 6절 이하에서 총독 서기오 바울과 엘루마라는 박수를 만나는 장면에서도 마가 요한은 스포트라이트의 조명을 받지 못한다. 도대체 마가 요한의 직무는 무엇이었을까? 그가 성령의 지시를 받은 바나바와 사울과 같은 위치의 선교사가 아니라면, 두 선교사가 필요해서 데리고 온 보조자일 뿐이라는 사실은 정당하다. 바나바와 사울이 자투리 일이라도 시킬 요량으로 그를 예루살렘으로부터 데려왔음이 명백하다. 그렇다면 마가 요한의 위상이 너무 초래해지는 건 아닌가? 물론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선교를 위해서 봉사하는 두 사람의 선교사들을 돕는 자로서의 그의 위상은 여전히 중요하다. 성령의 지시를 받은 선교사들이 중차대한 선교 여행을 위해서 아무나 협력자로 데려왔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물 묘사를 통해서 누가는 무엇을 의도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마가 요한의 위상을 높이 치켜세웠다거나 아니면 그의 정체성에 대하여 모호한 그림을 그린 것은 분명 아닌 것 같다. 누가가 이러한 묘사를 통해서 혹시라도 마가 요한이란 인물이 숨기고 있는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폭파력을 숨기고자 했을까? 지금까지의 내러티브 전개로 볼 때, 그러한 암시는 희미하다.

돌연한 마가 요한의 귀향

뿌옇게 보이던 마가 요한의 정체는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자 그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릴 때 단번에 드러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마가 요한에 대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묘사를 접한다. 구브로 동쪽 해안 살라미에서부터 사역하다, 전체 섬가운데를 지나서쪽항구 바보에 이르러, 바울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남부 소아시아의 주요 항구 도시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자, 마가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린다(13:13).

왜 마가 요한은 바울 일행을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을까? 이 물음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첫째, 그가 선교사로 처음 위임받은 지역이 시리아의 안디옥과 구브로에 한정되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귀향했다. 요즘 말로, 단기 선교사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바울의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저항으로 돌아갔다. 즉 이방 선교에 대한 신학적 갈등 내지는 몰이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셋째, (그의 삼촌) 바나바가 바울의 다음 지위로 밀려나는 것에 조카로서 분개한 나머지 돌아갔다(끈끈한 혈연관계). 넷째, 밤빌리아 북부의 만만찮은 타우루스 산맥을 넘을 생각에 미리 겁에 질려 버렸다(박약한 의지). 다섯째, 그의 모친을 예루살렘에 남겨둔 것에 대한 책임감이 발동했다(효도의 발동). 여섯째, 그의 모친 마리아의 요리를 선호해서 돌아갔다(마마보이). 그렇지만 내러티브가 언급하지 않은 사실을 재구축하려는 노력은 무모해 보이며, 본문의 의도를 곡해하는 오류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마가 요한의 행동에 혐의를 둘 수 있는 실마리를 내러티브상으로 남겨놓았다. 첫째, 마가 요한의 명망이 바나바와 사울과 동등한 위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바나바와 사울이데려간 수동적 인물일 뿐이다. 둘째,성령이 마가 요한을 따로 세워 파송했다는 것이명확치않고,선교 과정에서 안디옥 교회의승인을받지않았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13:1-4).셋째, 마가 요한이 그의 후원자들과 결별하기 바로 직전, 로마 총독의 회심과이어지는 박수 엘루마와 바울의 대면이 독자들에게 언급된다.

이이야기에서마가 요한을설명해주는몇가지시사점이있다. 첫째,엘루마이야기는신적개입으로만극복될 수 있는인간의강퍅함과부패성을보여준다.마가 요한을처음언급할 때 그주제를전달하는다른이야기 즉 베드로의영접(12:12-17)과헤롯의잔악한행위(12:18-23)와일괄적으로취급된다. 둘째, 사도행전 13장에서 마가 요한에 관한 두 가지 언급(바나바와 사울을 도움, 5절; 그들을 떠남, 13절)이한이야기의틀을 구성하는데, 이것의 결과는 한 유력한 이방인이 기독교로 회심한 일이다. 이 사건에 대한 마가 요한의 역할은 판단하기 어려운 반면, 그가 유대인 회당에서의 선교 활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다(5절).

우리가 어떻게, 그리고 가령 마가 요한과 연결이 될지는 모르지만, 세 번째 요점을지적하는것이옳을 것이다.그것은바나바와 사울의 관계가 뒤틀리기 이전(9:26-30, 11:19-30, 12:25, 13:1-2, 7), 그리고 바울이 선교 팀에서 선임 멤버가 되기 전-여기서부터바울의이름이 보통 먼저 언급되거나 대표자가 된다(13:13, 43, 45, 46, 50, 14:9, 11, 15:2, 35). 그리고 바울의 권위, 설교가 현저하게 중심으로 부상하기 이전(13:9-12, 16-41, 14:9-11, 19-20, 15:36), 엘루마와 서기오 바울의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바울과 바나바가 연대하여 활동하는 것으로 묘사되더라도(13:43, 46-47, 50-52, 14:1-7, 14-18, 21-28, 15:2-4, 12, 22, 30-35), 제 1차선교여행이나예루살렘 사도회의를 통해서 바나바의 특별한 활동을 따로 묘사하지는 않는다(행 13:1-15:35). 바나바의 중요성이 불확실한 반면, 바울의 위상은 높아지고, 바나바의역할이축소되는 바로 그 시점에서 마가 요한은 사도행전의 내러티브를 이탈하고 있다.

하여튼,사도행전의 내러티브에서 마가 요한을 둘러싼 긴장과 반전은극도로치밀하다.그래서 13장 13b절에서 마가 요한이 무대에서 사라지는 것이 하찮은 것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계획된 단절인지 쉽게 결정하기조차 힘들다.역경가운데서 사도들이 성공을 거두고(13:42-52, 14:1-28, 15:30-35), 마가 요한의예루살렘으로의 귀환에대한애매한진술이독자들을긴장시킨다.


이제야 드러난 마가 요한의 역할

13장 13절 다음을 연이어서 읽지 않은 독자들이라면 마가 요한이 이제는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단정할 수 있겠지만, 이것을 쉽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에서 마가 요한이 15장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15장의 서두를 보면, 유대로부터 안디옥에 와서 율법과 할례의 당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는 혼란에 빠진다. 이 소용돌이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 소집된 예루살렘 사도회의는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최소한의 단서를 달고, 새로운 이방 개종자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문을 활짝 개방하게 된다. 교회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결정은 안디옥과 소아시아의 회중들이 환영하고 사도회의의 소식을 수용하는 가운데서 절정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중심으로 하는 이방 선교의 여정은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대로를 향해서 내달리게 되는 조건이 마련된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서 갑작스럽게 균열이 생긴다. 선교에서 지지해주는 협력자들은 놀랍게도 서로에게 등을 돌린다. 그들은 아시아 교회들을 방문하려는 여행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마가 요한을 데려갈 것인지에 대하여 의견을 달리하게 된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반면, 바울은 이전의 이탈자와의 합류에 거부감을 갖고 반대한다(15:37-38). 결국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구브로로 돌아가는 여행을 선택하고, 바울은 그의 새 파트너인 실라와 함께 2차 선교여행을 출발한다.

이러한 분열이 발생한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내러티브에서 바울과 바나바 사이의 갈등은 두 인물과 그들의 특별한 관계의 빛 아래서 가장 잘 해석된다. 바나바의 특별한 반대 없이 지도력이 바나바에서 바울로 이미 교체되었다. 그러나 바나바의 지속적인 중요성에 대한 암시는 바울 앞에 그의 이름이 열거되고, 제우스와 관련된 루스드라의 사건(14:12, 14)에서 다시 나타나고, 예루살렘에서 소개되는 순서에서 또 한번 나타난다(15:12, 25). 바나바는 바울의 보호아래 존재하려고 완전히 자신의 자리를 양보한 것도 아니고, 특히 그의 영향력이 여전히 건재한 예루살렘에서는 더더욱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나바가 이전의 핍박자였던 바울을 탐탁치 않게 여기던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동료 제자로 받아줄 것을 처음으로 설득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기억한다(9:27). 우리는 또한 이러한 행동이 신자들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서 바나바의 넉넉함을 기억하게 된다. 용기를 북돋아 주는 바나바의 이러한 사역은 여기서 마가 요한에게 적용되어 그에게도 또 한번의 기회를 주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나바는 마가를 위하여 바울의 입장을 반대하면서까지 행동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이 불화 이야기에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사람은 오히려 바울인데, 그는 자신이 회심한 핍박자로서 이전에 바나바로부터 받았던 신뢰를, 회심한 이탈자 마가에게는 결코 베풀지 않는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역량 있는 선교사로서 바나바보다 더 역량을 발휘하지만, 덕망 있는 권위자(4:36)에게 좀더 배울 게 있다. 여기서 드러나는 바울의 모습은 불완전해보이며 결코 완벽하지 못한 사도일 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바로 누가의 문학적 의도 같다. 왜냐하면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이끌어내는 부정적인 역할을 마가 요한이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바로 바나바의 인격과 위로의 아들이라는 그의 명성을 다시 확보해주기 때문이다(15:37). 그래서 사도로 활약하는 바울조차도 바나바로부터 더 배울 것이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역할을 마가 요한이 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가 요한은 그러한 자리에만 머물지 않고, 바나바와의 선교적 연대를 통해서 복음 선교에 매진한다(15:39). 바울에게 마가 요한은 선교 여행에서 이탈한 배신자일지 모르나, 바나바에게는 당당한 선교 파트너이다. 이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인간관계 속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의 구원 계획을 추진한다는 점이다. 스데반의 순교로 불거진 예루살렘 교회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밖으로 내몰아서 결과적으로 사마리아에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성공을 거두는 것과 같은 일이 이미 발생하지 않았는가? 즉 사도행전의 목적인 선교 명령을 확증하고 실천하기 위해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인간관계와 같은 표피적인 요소들을 극복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하는 공동체로 거듭 태어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기서 ‘하나님은 넓은 가슴을 가지고 있다’는 성서의 진리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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