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나 강해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에반젤(복음) 2019. 9. 30. 13:05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마태복음 강해 (#167)>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서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시다.”(마 16:1-4)

   

성경 사건에 자신을 대입하라

 

신자들이 성경에서 본문 같이 어떤 사건을 기록한 내용을 접하면 자신과는 크게 상관없는 옛날이야기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지성과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현재의 형편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사건이 시사(示唆)하는 도덕적 교훈과 종교적 깨우침만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원히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라는 진리를 떠나서도 너무나 불합리한 사고다. 모세가 하나님께 율법을 받아 기록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한 것 같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성경의 모든 사건은 당대에 기록된 것이 아니다.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자기 말과 행동이 성경기록으로 남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결국 성경은 후대인들이 읽으라고 기록된 것이다. 후대가 특정한 시기의 세대만 아니다. 모든 후대에는 또 다른 후대가 있기에 성경은 모든 세대 모든 사람이 읽어야 할 책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을 그 등장인물에 대입하여서 당시 상황을 가상하여 묵상해야 한다. 그 이유도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이 인간과 그 역사를 주관하는 원리가 영원불변하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성정(性情), 특별히 그 죄의 본성이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읽어야 할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의 본문이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자들도 예수님께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으며, 예수님도 그런 신자들을 악하고 음란하다고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본문에 자신을 대입하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자기 안에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같은 모습을 발견하라는 뜻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대했던 내용과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과 우리의 것이 동일함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바로 나에게 야단을 치는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왜 그런지 이유도 깨달아야 한다. 또 그 깨달음에 따라 철저히 회개하여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더더욱 당시의 상황을 잘 살펴야 한다.

 

본격화되는 대립과 갈등

 

예수님은 두로와 시돈의 이방 땅을 떠나선 헬라 이방인들이 사는 데가볼리 쪽 갈리리에도 잠시 들렀다. 그곳에서 초자연적 치유와 7병2어의 이적을 베푸신 후에 유대 쪽 갈릴리 즉, 완전히 유대 땅으로 넘어 왔다. 마태복음 16-18장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에 갈릴리에서 마지막으로 사역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말로 유대사회 지도자들과의 갈등과 대립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산헤드린에서 이단 조사단이 왔을 때에 주님은 그들더러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였고 하나님이 심지 아니했기에 마지막 날에 뽑힐 것이라고 경고했다. 제자들이 그들의 미움을 산 줄 아느냐고 염려한 그대로 상황은 진행되어갔다.

 

그 갈등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1절이 증명한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라고 말한다. 이 두 종파는 평소에 종교적 정치적으로 아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런데 함께 왔다. 말하자면 어제의 원수가 공통의 더 큰 적을 만나자 하루아침에 동지로 돌변한 셈이다.

 

예수님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고 유대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게 되자 자기들의 기득권과 특권이 잠식당하고 상실 될 것을 함께 염려한 것이다. 예수님의 표적을 정말로 보길 원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든 꼬투리를 잡을 심산이었다.

 

이미 마음에 정죄하고 덤비는 자들에게는 어떤 이적을 보여줘도 의미가 없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법적, 종교적 하자를 얼마든지 덮어씌울 수 있다. 사두개인이 바리새인과 함께 나타났을 때부터 그들의 속셈을 훤히 꿰뚫고 있던 예수님이 표적을 보여줄 리 만무했다.

 

하늘로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요청은 당신이 메시아인 것을 증명해 보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5병2어, 7병2어의 기적은 물론, 나면서 불구자들을 초자연적으로 허다히 치유해주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 예수님이 베푼 모든 치유와 이적이 지금껏 주술사, 요술사들이 행했던 것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는 것도 알았다. 바리새인들도 기도하여 축사하는 등(마12:27) 하나님으로부터 초자연적 응답을 받아봤기에 예수님의 표적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름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까지의 사역을 통해 당신의 당신 되심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침례 요한이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그 이가 당신이오니까?”라고 물었을 때에도 주님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고하라”고 했지 않는가?(마11:3,4) 나인성의 과부의 아들이 죽어 장례를 치르러 관에 누어있을 때에 죽음에서 일으켜 세운 사건도 들었을 것이다.(눅7장) 그렇다면 이젠 당신이 십자가에 스스로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표적 말고는 보여줄 것이 남지 않았다.

 

주님은 그들의 요청을 완전히 묵살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요나의 표적을 보게 될 것이라고 답한 것이다. 그 때는 너희가 내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또 너희가 기대했던 메시아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가 어떻게 다른지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유대인들에게 요나의 표적은?

 

요나는 고래 뱃속에 삼키어져 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사흘 만에 살아났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우리의 모든 죄 값을 감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당신께서 세상 죄인들의 구주임을 만천하의 모든 세대에게 공표하셨다. 그 십자가 은혜를 믿고 당신께 겸비하게 엎드리면 누구든지 구원해주신다는 것이 바로 요나 표적의 의미였다.

 

지금은 예수님의 공사역의 후기였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대로 수난 받는 종으로서의 메시아의 모습을 스스로 드러내보이셔야만 했다. 더 중요한 이유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당신의 제자들뿐 아니라 유대교 종교 지도자들에게도 미리 예고할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그들이 당신을 유대 종교법을 위반한 잘못을 범한 죄인이기에 십자가 사형에 처했다고 말하겠지만, 주님은 그들마저도 불쌍히 여기어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십자가를 지셨음을 사전에 그들에게도 가르쳐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나중에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 당신께로 나오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할 한 가지 중요 이슈가 발생한다. 요나의 표적을 예수님의 부활과 연결시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소지하고 교리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오늘 날의 신자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과연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그 당시에 그렇게 이해했을지 따진다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답이다. 유대인들은 그 때는 물론, 그 한참 후에도, 심지어 지금까지도 그렇게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과 3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직접 복음을 배웠던 제자들마저 스승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십자가에 달리는 마지막 날 밤에도 베드로는 혁명을 기대하며 칼 들고 설쳤지 않는가?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도 자기 생명에 위험이 닥치자 혼자 살려는 비겁함이 주원인이었지만, 스승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가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기 싫었던 면도 있었던 것이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이 바로 눈앞에 서있는데도 의심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로선 요나의 표적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연상했을 수는 없다. 특별히 사두개인들은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인간은 죽으면 끝이기에 이 땅이 전부라고 믿는 현세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서두에서 본문이야말로 현대의 신자가 사건 당사자의 입장으로 읽어야할 대표적인 기사라고 말한 까닭이다.

 

그럼 그 현장에서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문이 우리에게 2천 년 전 사건이듯이, 그들에게는 요나가 그때부터 8백 년 전의 이야기였다. 우리처럼 그들 또한 요나 이야기 안에 자기를 당사자로 대입하여 이해해야만 했다.

 

알다시피 요나서의 두 주인공은 요나 선지자와 니느웨 사람들이다. 우선 니느웨 사람들과 자신들을 일체화 시켰을 리는 만무하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타락한 그들을 구제와 기도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기들과 비교한다는 것은 도무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 요나에 자신들을 비추어볼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극심한 죄악의 도성인 니느웨에 가서 회개와 구원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소명을 주었다. 그러나 요나로선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 악하고 음란한 이방인들이 유황불의 심판을 받아도 부족할 판인데 왜 구원을 주시려는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급기야 당시로선 땅 끝인 다시스로 도망갔지만 우여곡절 끝에 하나님의 손에 다시 붙들려 니느웨로 가게 된다.

 

그는 도무지 본심이 내키지 않아 억지로 회개하라고 외쳤는데도 하나님은 니느웨 사람들은 물론 육축까지도 아끼며 구원하는 놀라운 역사를 베풀었다. 그는 더 심통이 나서 하나님께 불평만 털어놓았다. 예수님은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더러 너희가 바로 이런 요나 같지 않느냐고 말씀하신 셈이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기적의 미묘한 차이

 

성경의 기록은 정말로 오묘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로 모든 사건을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이끌었기 때문이다. 인간 구속의 사역이 태초부터 하나님이 세우신 완벽하신 섭리에 따라 진행되었기에 성경에는 인간 이성을 뛰어넘는 완전하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으니 그 의미가 일반적인 도덕이나 종교와는 차원을 달리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5병2어 기적을 일으켰을 때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즉,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이단여부를 조사하러 나왔다. 예수의 제자들이 손을 안 씻고 밥 먹는 것을 문제 삼았지만, 사실은 그 기적 때에 2만 가량의 사람들도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유대교 규정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할 유대 랍비가 오히려 위반케 만들었다는 뜻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계명보다 인간의 유전을 우위에 두니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고 있다고 야단치며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금은 예수님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7병2어의 기적을 일으킨 직후다. 이번에는 바리새인과 함께 정치 지도자인 사두개인들이 따지러 왔다. 약 만오천 명의 사람들이 손을 안 씻고 떡을 떼었다는 사실을 떠나 예수님이 이방인들과 식사 교제를 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는 뜻이었다. 식사 전에 손을 씻어야 하는 것은 거룩한 유대인에게만 해당되는 규정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 여인과 한참 교제를 했고 심지어 그 여인의 믿음이 크다고 칭찬까지 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5병2어 후에는 유대 랍비로서 예수님의 자격 여부를 문제 삼았다면, 7병2어 후에는 유대인이라는 민족적 주체성마저 버렸지 않느냐는 것이다. 유대사회 구성원으로서 최소 조건마저 갖추지 못했으니 자기들 사회에서 추방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

 

그들에게 요나의 표적으로서 예수님이 깨우쳐주고 싶었던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요나가 하나님이 니느웨 이방인을 구원해주는 것이 싫었듯이, 너희도 유대 선민사상에 완전히 고착되어있다는 것이다. 유대 특권주의에 사로 잡혀서 마치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만 독점적으로 구원을 허용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달으라는 것이다.

 

요나는 그나마 니느웨에 죄악이 극심하므로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그분의 공의를 붙들고 씨름했지만, 너희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유대사회에서 영향력이 감소하고,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존경을 덜 받고, 사회적 경제적 특권이 줄지 않나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수입이 줄고 밥그릇이 떨어질까 목을 매단다는 것이다.

 

모세 율법을 세밀히 지키려 노력한 것 까지는 좋지만, 겨우 손 씻고 밥 먹고 또 이방인과 교제하지 않는 것으로 한 사람의 인격과 영성이 우월하다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 차원마저 넘어서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예 죄인 취급하고 구원에서 소외되는 양 정죄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정작 모세의 율법이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다. 하나님은 또 당신의 공평과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는 가장 우선적 방식으로 이스라엘더러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와 압제 당하는 자들을 사랑하라고 명하셨다.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들을 외면하고 천대하다 못해 정죄까지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방 지역에서 초자연적 치유와 7병2어의 이적을 보이자마자 유대지도자들이 찾아와 메시아 되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했다. 겉으로는 그들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유대인의 메시아라면 모세의 계명과 유대의 유전을 잘 지켜야하므로 그런 점을 따져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속내는 요나처럼 사악한(?) 이방인에게 구원은 있을 수도 없고 또 무조건 싫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하나님이 요나를 대체 무엇 때문에 어떻게 야단쳤는지 다시 잘 살펴보라는 것이다. 구약성경은 물론 모세오경을 다시 제대로 공부해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귀신 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과 대화하면서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마15:24)고 쌀쌀맞게 대답했다. 지금 유대 지도자들에게 요나의 표적을 상기해보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은 이전의 그 말이 절대로 당신의 본심이 아니었음을 또 다시 확실하게 입증한다.

 

나아가 예수님으로선 의도적으로 꼭 그런 방식으로 말씀하셔야만 했다. 그녀와 대화 마지막에 가선 오히려 너희 중에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칭찬하기 위해서 말이다. 바리새인, 서기관, 사두개인을 다 합쳐도 이 여인의 믿음만큼 못함을 밝히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5병2어와 7병2어의 기적이 서로 다른 사건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그 은혜의 대상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다른 가운데 하나님의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음을 잘 찾아보라고 성경에 기록된 것이다.

 

이처럼 성경 기록을 죽 연결해서 읽고 묵상해보면 그 배경에 흐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일관되고도 통일된 뜻을 반드시 발견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요나의 표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5병2어, 아니 그 이전의 기록까지 포함하여 종합하여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의 모든 사건은 물론, 그 등장인물의 행동과 말과 심지어 생각까지도 사전에 마련된 어떤 완벽한 각본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다는 감을 느낄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온 선지자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기 때문이다. 당신께서 죄인을 구속하는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계획하시고 끝까지 주도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만이 모든 인간의 알파요 오메가인 진리를 성경이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택한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모세의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을 받기 직전에 하나님 스스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했다고 한다. 니느웨의 악인이든 가나안의 천한 여인이든 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당신의 사랑을 입어 마땅한 자로서 당신의 긍휼밖에 버려둔 적이 없다는 것이다. 택한 백성 이스라엘더러는 율법대로 거룩하게 사는 모습을 이방 백성들 앞에 보여 그들로 당신을 알고 믿게 하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의 육신적은 물론 종교적으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도 마찬가지였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창12: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비록 아내를 누이라 속이거나 아버지마저 속이는 인간적 잘못을 저질렀으나 이들은 가는 곳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단을 쌓았다. 여호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뢰하고 따랐다. 그래서 애굽의 왕 바로, 그랄 왕 아비멜렉, 소돔과 고모라의 왕들로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했고 최소한 그 이방 왕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었다.

 

그런데 지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이방인들에게 여호와를 증거하기는커녕, 예수님이 사흘 굶어 기진한 데가볼리 이방인들이 불쌍해서 떡을 나눠주었고 또 흉악한 귀신 들린 딸에 시달리는 가나안 여인을 위로해준 일마저 문제 삼으려 들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뜻을, 정확하게는 자기들이 정한 규정을, 위반하였으므로 메시아가 아니라고 유대 백성들에게 선포할 작정이었다. 요나의 표적 밖에 보여줄 것이 없다는 예수님의 뜻은 너희들이 그러고도 어찌 모세 율법을 소유하고 알고 실천하고 있다고 감히 자랑할 수 있느냐고 지적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붙들고 씨름한 요나와도 도무지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이다. 아니 회개하여 구원 얻은 니느웨 백성보다 더 못하다는 것이다. 회개 이전의 그 악하고 음란했던 니느웨 백성과 같다고 야단친 것이다. 너희야말로 하나님의 심판 날에 뽑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바로 그래서 너희 같은 자들을 위해서라도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중에 요나의 표적을 확실하고도 온전하게 보여주겠다고 말한 것이다. 너희들이 죽음의 덫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조금 있으면 올라가겠다는 것이다. 골고다 언덕까지 아무 말 없이 올라가 스스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시겠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성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거룩한 율법대로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영적 실상마저 이런 형편이니 그들부터 먼저 참 하나님을 알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가나안 여인에게 매정하게 여겨졌을지라도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 먼저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보여줄 표적이라곤 십자가 죽음과 부활만 남았는데 그 십자가를 통해 모든 세대의 모든 사람이 참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을 듣고, 보고, 만지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내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을 발견할 수 있는가?

 

이제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볼 질문이 남았다. 내 속에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요즘으로 치면 바리새인은 목사 내지 장로이며, 사두개인은 국회의원이나 장관 격인데 일반 신자에 불과한 나와 크게 상관이 없다고 여기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신자는 십자가 복음을 모르는 불신자들 앞에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서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불려나왔다. 세상 사람들 앞에 진정한 요나의 표적을 보여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의 지도자들은 물론 일반 신자들도 예수님이 지금 이 땅에 오신다면 본문과 동일한 꾸중을 듣게 될 것 같다. 목사는 신자들이 교회와 당신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성령께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훼방을 한다고 야단치고 정죄하기 일쑤다. 교회 안에 하나님보다는 인간에 불과한 당신에게 충성하는 자들로만 일꾼으로 세우기 바쁘다. 양적으로 성장한 큰 교회의 목사는 무조건 큰 믿음을 가진 큰 주의 종이라고 대접한다. 그런 큰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만으로 그 교인들도 자기 믿음이 아주 큰 양 착각하고 있다.

 

신자들도 불신자와 타종교인들을 배척하고 매도하기 일쑤다. 진정으로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사랑으로 다가가지 않는다. 종교 간의 교세를 다투는 경쟁상대로 여긴다. 혹시라도 게이나 전과자가 교회에 출석하면 심판 받아 마땅한 자로 취급하여 목사에게 교회 출석을 금지시키라고 요구한다. 겉으로 내색하지 않는 신자들도 은연중에 싫다는 신호를 보내어 결국은 교회에 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교회가 비슷한 수입, 신분, 학식의 사람끼리만 모여 교제하는 모임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요나의 표적 즉, 예수님의 십자가 표적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죄는 당신께서 죽기까지 저주한다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죄인들은 당신이 죽기까지 사랑한다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지만 당신이 지으신 자녀들로 너무나 사랑하기에 당신께서 대신 죽으시고 살려주시는 긍휼을 베푼 것이다.

 

악하고 음란한 이 세대

 

작금 이런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조차 무시되고 있다. 심지어 모르기까지 한다. 대표적 예로 미국의 동성애 문제를 들 수 있다. 동성애자는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할 너무나 불쌍한 자들이다. 십자가 복음으로 얼마든지 그들 자신과 그 잘못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반면에 동성애는 성경의, 아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기에 그분이 저주하는 분명하고도 절대적인 죄다.

 

그런데도 미국의 목회자들마저 이런 구분을 하지 못한 채 애매모호하게 타협하고 있다. 미국의 각 주들은 동성 결혼의 합법화가 대세다. 심지어 동성애자를 목회자로 세우기까지 한다. 바리새인들도 이렇게까지 타락하지는 않았다. 아니 그들은 구제, 금식, 기도에 열심이었고 율법도 철저하게 준수하려고 노력은 했다. 예수님도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5:20)고 하셨지 않는가?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의를 몰랐다는 것이 일차적 의미다. 그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 것인데 영적으로 무지한지라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는 원리를 완전하게 계시한 신구약 성경 66권을 소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죄인을 구속하는 경륜에 관해 일목요연한 전체 그림을 충분히 그릴 수 있다.

 

동성애자를 목사로 세우는 것은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정도를 넘어 죄인이 죄인을 인도하는 짓이다. 그것도 현행범이 강단에서 교인더러 죄를 지으라고 부추기는 셈이다. 이 어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아닌가? 이 세대가 하나님의 심판을 모면할 수는 결단코 없을 것이다. 성경을 정말로 하나님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고 있다면 절대로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서도 안 되는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본문 사건 현장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의 요나에게만 자신을 대입하면 되었다. 현대의 신자는 요나 외에 본문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도 자신을 대입하여야 한다. 나와 이 세대 안에서 요나, 바리새인, 사두개인 모두를 발견하여야 한다.

 

물론 예수님의 복음은 신자 모두에게 너무나 큰 은혜가 된다. 아무리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십자가 앞에 겸비하게 엎드리면 구원해주신다. 이전에 지었던 죄와, 지금 짓고 있는 죄와, 앞으로 지을 죄까지 다 용서해주신다. 그러나 그 용서는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받을 영원한 형벌에서 제외시켜 준다는 것이지,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개별적인 죄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는 언젠가는 반드시 따른다. 죄 지을 때마다 일일이 벌주지 않아도 하나님 인자의 한도가 차면 반드시 무엇이 잘못인지 확실하게 깨달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도 엄하게 징계하신다.

 

신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절대로 없다.(롬6:1) 현대의 신자들은 죄에 대해서 너무나 무감각해졌고 타성에 젖어 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을 주변 이웃에게 증거할 시도는커녕 그런 의사조차 없다. 요나 같이 하나님의 공의와 씨름하며 죄인과 죄를 미워하는 정도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나와 내 가족이 안일하고 형통하는 데만 모든 신앙의 초점을 모은다. 이미 믿은 자로서 특권만 구하려는 것이다. 바로 우리 안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들어와 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저 같은 목회자들부터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바에 관해 진짜로 진지하게 따져봐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온전히 제대로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요나의 표적이 정말로 요나의 표적답게 보이게 해야 한다. 모든 이에게 처음이요 끝인 예수님을 교회 안으로 다시 모시고 들어와야 한다. 실종되거나 퇴색되어가는 십자가 복음을 온 천하에 인간 구원의 유일한 길임을 당당하게 선포해야 한다.

 

세상에선 기독교를 개독교로 부르며 조롱하게 된지 오래다. 다시 기독교로 개명하는 길은 하나뿐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우리 안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날마다 깨트리고 새롭고 깨끗케 되어야 한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목숨 걸고 싸우면서 세상 사람들 앞에 거룩한 제사장 나라로 서야만 한다. 그러는 것이 단순히 기독교와 교회를 위한 것만이 아니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틀어지고 신자가 신자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참된 복을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