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요나 강해
[스크랩] 김희석교수님의 요나서에 관한견해
에반젤(복음)
2019. 9. 30. 13:39
김희석교수님의 요나서에 관한견해에 공감하면서^^
[전성민 교수님의 글에 대한 의견] 김희석교수
1. 요나서 토론에 관하여 유익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전성민 교수님의 글인데, 보수는 답답하다, 왜 비판하느냐, 문학성을 모른다 등등의 의견들보다 훨씬 견실합니다. 토론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근거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 부분에 집중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2. 전교수님의 중심 논지는 "장르"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요나서의 장르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장르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글이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기 위한 장르를 가지고 있다면 그 글이 기술하는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장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논지로 읽힙니다.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3.... 하지만 저의 의견은 다릅니다. 이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4. 먼저는, 전교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서의 장르적 특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교수님은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의 전달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1) 요나서 1:4에 "배"가 "스스로 깨어질 것을" "생각한다"는 의인법이 나타난다는 점
이것은 매우 인상적인 독법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어휘 용례를 살펴보면, 이것은 전교수님의 상상력에 의한 독법인 것이 드러납니다. 먼저는 "생각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처럼 <피엘>형태로 쓰일 때는 단순히 "생각하다"의 의미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수량이나 수준이나 가치를 지녔는지를 판단해본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HALOT이나 Holladay 사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25:27에서 "판 해를 계수하여 남은 값을 산 사람게 준다"할 때 "계수하다"가 이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일반적인 “생각하다, 고안하다”의 의미로 쓰일 때는 대개 악한 계획을 고안해내거나 하나님께 대적하는 생각을 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대개의 사전들은 이 단어의 요나 1:4에서의 의미를 "~에 근접하다, 막 ~하게 되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인 상황이라는 표현입니다. 둘째로, "깨어지다"의 니팔형을 재귀형(스스로 깨어지다)으로 보셨는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성경 용례에서 그런 해석은 거의 없습니다. 그 동사가 니팔로 나오면 그냥 "깨어지다"는 수동의 의미로 쓰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니팔 16개의 용례 전체가 그렇습니다. 재귀적으로 쓰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상은, 일반적인 문법사항 및 용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상상력에 의한 독법입니다. 재미있는 독법이긴 한데, 일반화해서 받아들이기에는 즉 "의인화"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해 보입니다. 또한 이런 독법이 받아들여지려면, 한번 이렇게 쓰인 것 이외에 앞뒤 구절에서 계속 그 의인화가 등장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들이 요나 1장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요나서에 "크다"라는 말이 유독 아주 많이 쓰였다는 점
요나서에 “크다”는 표현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에 근거하여 더 구체적인 논거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큰 성읍, 큰 물고기, 큰 두려움 등등 다양하게 쓰였는데, 예를 들어 니느웨가 “큰" 성읍이라는 것은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지요?
3) 4장 10절에서 박넝쿨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는 방식의 서술이 나타난다는 점
4장 10절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랐다”고 대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 넝쿨은 하룻밤의 아들이었고, 또 하룻밤의 아들로서 멸망했다." 이것은 매우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 나오는 “아들”을 “나이”로 해석한다면, “하룻밤에 태어나서 자랐다가 하룻밤에 죽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나이가 아닌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상 13:1 원문의 “사물이 왕이 될 때 한 해의 아들이었다”는 표현을 ESV나 KJV는 “사울이 왕이 되어 한 해를 다스렸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박넝쿨이 "하룻밤에는 있다가, 하룻밤에는 없어졌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룻밤에 자랐다가 하룻밤에 없어졌다는 것은 유일한 번역 가능성은 아닙니다. 그러니, 전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표현이 요나서가 박넝쿨이 빠르게 자라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썼다는 점이,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장르는 아니라는 것을 든든히 뒷받침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하룻밤에 자라서 하룻밤에 시들었다”라고 번역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번역을 선호합니다. 다만, 전교수님의 논지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요나서 4장에서 박넝쿨을 묘사할 때, 박넝쿨이 자라는 속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있었다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이것은 니느웨 백성이 있었다가 없어지면 되겠느냐는 본문의 메시지를 뒷받침합니다. 니느웨백성이 빨리 생겨나고 갑자기 없어지고는 본문의 관심사가 아니지요.
그러니,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닌 장르는 아니다”라는 논지를 위해 들어주신 예들은, 그다지 근거가 튼튼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4. 이제는, 전교수님의 의견과는 반대로, 요나서가 역사적 서술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근거를 몇 가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왕하 14:25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2) 요나서에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장소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니느웨, 다시스 등이 언급됩니다.
3) 요나서에는 당시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니느웨 성이 삼일길을 가야 하는 큰 성읍이었다는 점, 그리고 니느웨에 좌우를 분간 못하는 12만 명이 살았다는 점 등입니다.
4) 요나서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사건의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진행시킵니다. 요나가 도망갔다, 풍랑을 만났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니느웨로 가서 선포했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다,,,등의 전개로 나타납니다.
5) 위의 사실들은 역사적 서술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장르의 특징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사사기의 요담 이야기나 예수님의 비유 등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장소나 상황에 대한 언급, 그리고 사건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나오지 않지요. 그냥 그 비유가 전달하려는 중심 포인트를 통렬하게 지적할 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경우와 명확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실들은,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장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저는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닌 장르가 아니다”라는 의견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5. 이제 가장 중요한 논의점에 이르렀습니다. 전교수님께서는 성경의 장르 중에서 역사적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장르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러한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저는 장르를 해석학적 입장에서 이해할 때, 본문이 독자/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의 원리들(interpretive rules)로 받아들입니다. 즉,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하는 소통의 의도(communicative intent)를 파악하게 해 주는 것이 장르의 주요한 기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르를 말할 때는 “그 장르가 무엇을 집중적으로 말하는가”를 보아야 하지, “그 장르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를 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 자체에 주목하면 안 되고, 요나서가 “허구를 전달하고 있는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의 오류가 됩니다. 즉 의인화 용법, “크다”라는 단어의 집중적 사용, 박넝쿨이 빨리 자랐다는 것 등등은, 본문의 장르와는 관련될지 모르나, 역사성 문제를 논하는 것에 대한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르를 가지고 역사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면, 본문의 장르가 “역사적인 사실성을 다루는 것” 즉, 진실이냐 허구냐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일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 뿐만 아니라, 저는 성경에 기록된 본문들 안에서, 그 장르를 연구함으로써, 그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성경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나서를 읽을 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면서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장르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본문이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3)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역사성 문제와 장르 문제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역사성 문제를 그 장르가 다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한 해석의 열쇠가 되지 못합니다. 역사성 문제과 문학성 문제(이 글에서는 장르문제)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역사성과 장르 문제를 깊이 연관시킨 것이 될 뿐입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저는 요나서의 장르 문제와 역사성 문제를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성과 문학성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어떤 하나로 다른 하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7. 제가 신학펀치 프로그램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한 것은, 그 방송에서 역사성 문제를 문학성 문제로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교수님은 이 요나 문제가 성경관 문제가 아니라 장르문제라고 하셨는데, 정작 그 방송은 성경관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역사성 문제”를 핵심 이슈로 제기한 후 (요나서는 픽션인가요, 다큐인가요? 라는 제목이 잘 보여줍니다), 그것에 대해 “장르문제”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연관시켜서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성 문제와 성경관 문제로 계속 논의가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처음부터 문학성 및 장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면, 저는 결코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성 문제는 역사성 문제로 다루고, 문학성 문제는 문학성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8. 이상의 내용이 제가 전성민 교수님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입니다. 전교수님의 의견은 논리적이고 견실합니다. 다만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전교수님께서는 요나서의 기록이 과연 역사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성을 전달하는 특정한 장르”의 존재 여부와 그 본문상의 근거들에 대한 글입니다.
9. 많은 분들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글을 올려주신 전교수님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의할 수는 없네요. 저는 요나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요나서는 매우 특징적인 문학성을 표출하는 장르의 글인데, 이 두 가지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편의를 위해 전교수님의 글 중에서 요나에 관계된 부분을 아래에 옮깁니다.
============================== ===========
난 페북에서 벌어진 요나서에 대한 논의가 성경관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 해석학의 기본 혹은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장르 파악에 관한 문제다.
1.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의 본문이 있다.
2. 장르가 없는 본문은 없다.
3. 각 본문은 그 장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4. 그래서 문자적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장르 판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5. 만일 신명기가 언약/조약 문서 같은 장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정치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가까운 명령일 것이고 (왕상 5:1 참고), 만일 지혜 문학적인 장르라면 그 명령은 가족관계에서의 애정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6. 어떤 본문은 그 장르가 명시적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예수님의 비유), 어떤 본문은 거의 상식적으로 그 장르를 파악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요담이 말한 나무들의 대화와 왕이 되는 가시나무 우화).
7. 문제는 그 장르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본문의 장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다.
8. 그럴때 본문 바깥에 있는 나의 입장이 아니라 본문 자체의 특징을 살펴 장르를 파악해야 한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이 교육받은 직관 informed intuition 이다. 당연히 틀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9. 그렇다면 요나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나서의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중요하다.
10. 요나 물고기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냐는 질문에 대해 김구원 교수가 암수물고기 표현에 대한 관찰과 해석을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성을 논하기 전에 요나서의 장르를 먼저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송 내내 성경 장르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11. 사실 요나서에는 그 장르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정보들도 꽤 있다.
12. 1장 4절하반절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배가 자기가 부서질까(Niphal middle) 심각하게 생각했다(Piel active)” 정도가 된다. “배”가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다. 당연 의인법이겠지만 이런류의 의인법이 주로 등장하는 장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3. 4장 10절은 박넝쿨이 하루밤에 났다가 하루밤에 말라버렸다. 식물이 빠르게 자라는 내용이 담긴 글들은 주로 어떤 장르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추가) 13-1. 요나서는 성경에서 "크다"(히. 가돌/그돌라)라는 단어가 가장 자주 나오는 책이다. 요나서에는 1000단어당 12.92번 나오며 그 다음은 학개서인데 1000단어당 6.51번 나온다. 다른 책들의 경우 1000단어당 1-2번 정도가 일반적이다. "크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글은 주로 어떤 장르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4. 이런 관찰들과 교육받은 직관을 통해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 서술이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요나 물고기 사건의 “역사성”에 관한 질문은 본문이 아니라 본문 바깥의 관심일 뿐이다.
15. 사사기 9장의 요담의 말(본문은 우화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을 읽으며 예수님을 부활케 하신 하나님이 나무가 말하지 못하시게 할 이유가 없다며 사사 시대에는 나무들이 (잠시라도) 말을 했다고 믿을 수 있다고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16. 그러나 만일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 서술 또는 역사 서술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안의 진술의 역사성은 중요할 것이다.
17. 따라서 만일 요나의 물고기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려면 성경의 역사성이 중요하다는 고백적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요나서 본문 자체내에서 역사서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찾으면 된다.
18. 우선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정경 전체의 맥락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요나서의 장르와 예수님의 요나 발언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 이런 과정과 방법이야 말로 본문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이며 접근법이다. 본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찰 없이 본문이 이래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다.
20. 이 모든 논의는 성경관과는 관계가 없다. (1)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의 글이 있다 (2) 모든 본문은 그 장르가 있다 (3) 그 장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이 세가지 진술이 다른 성경관 때문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해석학의 기초일 뿐이다.
1. 요나서 토론에 관하여 유익한 글을 발견했습니다. 전성민 교수님의 글인데, 보수는 답답하다, 왜 비판하느냐, 문학성을 모른다 등등의 의견들보다 훨씬 견실합니다. 토론은 이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그 근거를 명확하게 밝히고, 그 부분에 집중해서 토론해야 합니다.
2. 전교수님의 중심 논지는 "장르"에 대한 이해에 있습니다. 요나서의 장르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고자 하는 장르는 아니라는 것이지요. “만약 어떤 글이 역사적 사실을 기술하기 위한 장르를 가지고 있다면 그 글이 기술하는 내용의 역사적 사실성이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 장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사실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논지로 읽힙니다. 명쾌하고 분명합니다.
3.... 하지만 저의 의견은 다릅니다. 이에 대한 저의 견해를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4. 먼저는, 전교수님이 말씀하신 요나서의 장르적 특성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교수님은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의 전달을 위한 장르가 아니라는 점을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점을 근거로 드셨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저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1) 요나서 1:4에 "배"가 "스스로 깨어질 것을" "생각한다"는 의인법이 나타난다는 점
이것은 매우 인상적인 독법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인 어휘 용례를 살펴보면, 이것은 전교수님의 상상력에 의한 독법인 것이 드러납니다. 먼저는 "생각하다"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본문에서처럼 <피엘>형태로 쓰일 때는 단순히 "생각하다"의 의미 정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의 수량이나 수준이나 가치를 지녔는지를 판단해본다"라는 뜻으로 많이 사용됩니다. 이것은 HALOT이나 Holladay 사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레위기 25:27에서 "판 해를 계수하여 남은 값을 산 사람게 준다"할 때 "계수하다"가 이 동사입니다. (이 단어가 일반적인 “생각하다, 고안하다”의 의미로 쓰일 때는 대개 악한 계획을 고안해내거나 하나님께 대적하는 생각을 한다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사용이 됩니다). 이런 이유로, 대개의 사전들은 이 단어의 요나 1:4에서의 의미를 "~에 근접하다, 막 ~하게 되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배가 깨어질 정도인 상황이라는 표현입니다. 둘째로, "깨어지다"의 니팔형을 재귀형(스스로 깨어지다)으로 보셨는데, 이론상으로는 가능하나, 성경 용례에서 그런 해석은 거의 없습니다. 그 동사가 니팔로 나오면 그냥 "깨어지다"는 수동의 의미로 쓰입니다. 구약에 나오는 이 단어의 니팔 16개의 용례 전체가 그렇습니다. 재귀적으로 쓰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배가 거의 깨어지게 되었다"로 해석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 이상은, 일반적인 문법사항 및 용례에 근거한 것이 아닌, 상상력에 의한 독법입니다. 재미있는 독법이긴 한데, 일반화해서 받아들이기에는 즉 "의인화"라고 보기에는 근거가 부족해 보입니다. 또한 이런 독법이 받아들여지려면, 한번 이렇게 쓰인 것 이외에 앞뒤 구절에서 계속 그 의인화가 등장해야 하는데, 그런 경우들이 요나 1장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습니다.
2) 요나서에 "크다"라는 말이 유독 아주 많이 쓰였다는 점
요나서에 “크다”는 표현이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런데, 그 현상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본문에 근거하여 더 구체적인 논거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큰 성읍, 큰 물고기, 큰 두려움 등등 다양하게 쓰였는데, 예를 들어 니느웨가 “큰" 성읍이라는 것은 그냥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지요?
3) 4장 10절에서 박넝쿨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자라났다는 방식의 서술이 나타난다는 점
4장 10절은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랐다”고 대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번역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그 넝쿨은 하룻밤의 아들이었고, 또 하룻밤의 아들로서 멸망했다." 이것은 매우 문학적인 표현으로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여기 나오는 “아들”을 “나이”로 해석한다면, “하룻밤에 태어나서 자랐다가 하룻밤에 죽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나이가 아닌 “특정한 기간”을 가리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삼상 13:1 원문의 “사물이 왕이 될 때 한 해의 아들이었다”는 표현을 ESV나 KJV는 “사울이 왕이 되어 한 해를 다스렸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런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박넝쿨이 "하룻밤에는 있다가, 하룻밤에는 없어졌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룻밤에 자랐다가 하룻밤에 없어졌다는 것은 유일한 번역 가능성은 아닙니다. 그러니, 전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표현이 요나서가 박넝쿨이 빠르게 자라나는 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썼다는 점이,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장르는 아니라는 것을 든든히 뒷받침할 수는 없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저는 “하룻밤에 자라서 하룻밤에 시들었다”라고 번역해도 전혀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 번역을 선호합니다. 다만, 전교수님의 논지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또한, 요나서 4장에서 박넝쿨을 묘사할 때, 박넝쿨이 자라는 속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있었다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이것은 니느웨 백성이 있었다가 없어지면 되겠느냐는 본문의 메시지를 뒷받침합니다. 니느웨백성이 빨리 생겨나고 갑자기 없어지고는 본문의 관심사가 아니지요.
그러니,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닌 장르는 아니다”라는 논지를 위해 들어주신 예들은, 그다지 근거가 튼튼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4. 이제는, 전교수님의 의견과는 반대로, 요나서가 역사적 서술을 분명히 하고 있다는 근거를 몇 가지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요나는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인물입니다. 왕하 14:25에 보면,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때에 선지자 활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2) 요나서에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장소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니느웨, 다시스 등이 언급됩니다.
3) 요나서에는 당시 역사적 상황을 묘사하는 구체적인 표현들이 있습니다. 니느웨 성이 삼일길을 가야 하는 큰 성읍이었다는 점, 그리고 니느웨에 좌우를 분간 못하는 12만 명이 살았다는 점 등입니다.
4) 요나서는 전형적인 내러티브입니다. 그래서 이야기를 사건의 서술을 전개하는 방식으로 진행시킵니다. 요나가 도망갔다, 풍랑을 만났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니느웨로 가서 선포했다, 하나님과 논쟁을 벌였다,,,등의 전개로 나타납니다.
5) 위의 사실들은 역사적 서술을 염두에 두고 기록된 장르의 특징으로 생각됩니다. 우리가 흔히 역사적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는 사사기의 요담 이야기나 예수님의 비유 등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습니다. 역사적 장소나 상황에 대한 언급, 그리고 사건의 드라마틱한 전개는 나오지 않지요. 그냥 그 비유가 전달하려는 중심 포인트를 통렬하게 지적할 뿐입니다. 그런데 요나는 그런 경우와 명확히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위의 사실들은,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 장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저는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닌 장르가 아니다”라는 의견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5. 이제 가장 중요한 논의점에 이르렀습니다. 전교수님께서는 성경의 장르 중에서 역사적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은 장르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그러한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저는 장르를 해석학적 입장에서 이해할 때, 본문이 독자/청중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해석의 원리들(interpretive rules)로 받아들입니다. 즉, 본문이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가 하는 소통의 의도(communicative intent)를 파악하게 해 주는 것이 장르의 주요한 기능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르를 말할 때는 “그 장르가 무엇을 집중적으로 말하는가”를 보아야 하지, “그 장르가 무엇을 말하지 않는가”를 봐서는 안 됩니다. 만약 요나서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려면,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 자체에 주목하면 안 되고, 요나서가 “허구를 전달하고 있는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내야 합니다. 안 그러면 본문이 말하지 않은 것으로부터 의미를 끌어내는 “침묵으로부터의 논증”(argument from silence)의 오류가 됩니다. 즉 의인화 용법, “크다”라는 단어의 집중적 사용, 박넝쿨이 빨리 자랐다는 것 등등은, 본문의 장르와는 관련될지 모르나, 역사성 문제를 논하는 것에 대한 근거는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장르를 가지고 역사성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면, 본문의 장르가 “역사적인 사실성을 다루는 것” 즉, 진실이냐 허구냐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일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2) 뿐만 아니라, 저는 성경에 기록된 본문들 안에서, 그 장르를 연구함으로써, 그 장르가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성경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나서를 읽을 때, 그것이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면서 읽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 사실을 전달하는 장르인가를 판단하는 것”은, 본문이 던지는 질문이 아닙니다.
3) 성경 본문을 읽을 때, 역사성 문제와 장르 문제를 연결시켜서는 안 됩니다. 역사성 문제를 그 장르가 다루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중요한 해석의 열쇠가 되지 못합니다. 역사성 문제과 문학성 문제(이 글에서는 장르문제)는 전혀 별개의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이 역사적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면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역사적 사실성 여부를 판단하면 안 된다”는 것은, 이미 역사성과 장르 문제를 깊이 연관시킨 것이 될 뿐입니다.
6. 이러한 이유로, 저는 요나서의 장르 문제와 역사성 문제를 연관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성과 문학성은 별개의 개념입니다. 어떤 하나로 다른 하나를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7. 제가 신학펀치 프로그램에 대해서 의견을 제시한 것은, 그 방송에서 역사성 문제를 문학성 문제로 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전교수님은 이 요나 문제가 성경관 문제가 아니라 장르문제라고 하셨는데, 정작 그 방송은 성경관과 깊이 관련되어 있는 “역사성 문제”를 핵심 이슈로 제기한 후 (요나서는 픽션인가요, 다큐인가요? 라는 제목이 잘 보여줍니다), 그것에 대해 “장르문제”로 대답을 했습니다. 그 두 가지를 연관시켜서 설명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역사성 문제와 성경관 문제로 계속 논의가 이어지게 된 것이지요. 처음부터 문학성 및 장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었다면, 저는 결코 이견을 제시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성 문제는 역사성 문제로 다루고, 문학성 문제는 문학성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8. 이상의 내용이 제가 전성민 교수님과 의견을 달리하는 부분입니다. 전교수님의 의견은 논리적이고 견실합니다. 다만 저는 의견이 다릅니다. 전교수님께서는 요나서의 기록이 과연 역사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루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은 “역사적 사실성을 전달하는 특정한 장르”의 존재 여부와 그 본문상의 근거들에 대한 글입니다.
9. 많은 분들이 더 깊이 생각할 수 있도록 글을 올려주신 전교수님께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의할 수는 없네요. 저는 요나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이며, 동시에 요나서는 매우 특징적인 문학성을 표출하는 장르의 글인데, 이 두 가지는 서로에게 어떤 영향도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 편의를 위해 전교수님의 글 중에서 요나에 관계된 부분을 아래에 옮깁니다.
==============================
난 페북에서 벌어진 요나서에 대한 논의가 성경관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경 해석학의 기본 혹은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장르 파악에 관한 문제다.
1.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의 본문이 있다.
2. 장르가 없는 본문은 없다.
3. 각 본문은 그 장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4. 그래서 문자적으로 읽는다 하더라도 장르 판단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5. 만일 신명기가 언약/조약 문서 같은 장르라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은 정치적 충성을 요구하는 것에 가까운 명령일 것이고 (왕상 5:1 참고), 만일 지혜 문학적인 장르라면 그 명령은 가족관계에서의 애정의 의미에 가까울 것이다.
6. 어떤 본문은 그 장르가 명시적으로 표현되기도 했고 (예수님의 비유), 어떤 본문은 거의 상식적으로 그 장르를 파악할 수도 있다 (사사기에서 요담이 말한 나무들의 대화와 왕이 되는 가시나무 우화).
7. 문제는 그 장르가 명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본문의 장르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다.
8. 그럴때 본문 바깥에 있는 나의 입장이 아니라 본문 자체의 특징을 살펴 장르를 파악해야 한다. 이 때 사용하는 것이 교육받은 직관 informed intuition 이다. 당연히 틀릴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어 보인다.
9. 그렇다면 요나서를 바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나서의 장르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중요하다.
10. 요나 물고기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냐는 질문에 대해 김구원 교수가 암수물고기 표현에 대한 관찰과 해석을 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역사성을 논하기 전에 요나서의 장르를 먼저 이야기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방송 내내 성경 장르의 다양성에 대해 이야기 한다).
11. 사실 요나서에는 그 장르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정보들도 꽤 있다.
12. 1장 4절하반절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표현은 문자적(!)으로 “배가 자기가 부서질까(Niphal middle) 심각하게 생각했다(Piel active)” 정도가 된다. “배”가 “생각하다”라는 동사의 주어다. 당연 의인법이겠지만 이런류의 의인법이 주로 등장하는 장르는 무엇인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3. 4장 10절은 박넝쿨이 하루밤에 났다가 하루밤에 말라버렸다. 식물이 빠르게 자라는 내용이 담긴 글들은 주로 어떤 장르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추가) 13-1. 요나서는 성경에서 "크다"(히. 가돌/그돌라)라는 단어가 가장 자주 나오는 책이다. 요나서에는 1000단어당 12.92번 나오며 그 다음은 학개서인데 1000단어당 6.51번 나온다. 다른 책들의 경우 1000단어당 1-2번 정도가 일반적이다. "크다"라는 표현을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글은 주로 어떤 장르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14. 이런 관찰들과 교육받은 직관을 통해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 서술이나 그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요나 물고기 사건의 “역사성”에 관한 질문은 본문이 아니라 본문 바깥의 관심일 뿐이다.
15. 사사기 9장의 요담의 말(본문은 우화라고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을 읽으며 예수님을 부활케 하신 하나님이 나무가 말하지 못하시게 할 이유가 없다며 사사 시대에는 나무들이 (잠시라도) 말을 했다고 믿을 수 있다고하지 않는 것 처럼 말이다.
16. 그러나 만일 요나서의 장르가 역사 서술 또는 역사 서술에 가까운 것이라면 그 안의 진술의 역사성은 중요할 것이다.
17. 따라서 만일 요나의 물고기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려면 성경의 역사성이 중요하다는 고백적 도돌이표를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요나서 본문 자체내에서 역사서술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찾으면 된다.
18. 우선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정경 전체의 맥락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생각하는 요나서의 장르와 예수님의 요나 발언이 어떻게 관련되는지 설명할 필요가 있다.
19. 이런 과정과 방법이야 말로 본문 자체를 존중하는 태도이며 접근법이다. 본문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찰 없이 본문이 이래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으로 본문을 읽는 것이다.
20. 이 모든 논의는 성경관과는 관계가 없다. (1) 성경에는 다양한 장르의 글이 있다 (2) 모든 본문은 그 장르가 있다 (3) 그 장르에 따라 해석해야 한다. 이 세가지 진술이 다른 성경관 때문인가?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냥 해석학의 기초일 뿐이다.
출처 :개혁주의 마을 글쓴이 : grace
'***신구약 성경강해*** > - 요나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요 나 서 연 구 (0) | 2019.09.30 |
---|---|
[스크랩] 요나 1장 내가 죽어야 한다. (김형익목사) (0) | 2019.09.30 |
요나의 표적의 올바른 의미? (0) | 2019.09.30 |
[스크랩] 니느웨냐 다시스냐?(욘 1:1~10) (0) | 2019.09.30 |
[스크랩] 하나님과 대결하는 요나(욘 1:11~17) (0) | 2019.09.30 |
'***신구약 성경강해***/- 요나 강해'의 다른글
- 현재글[스크랩] 김희석교수님의 요나서에 관한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