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오바댜 강해

오바댜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에반젤(복음) 2019. 9. 30. 10:59




오바댜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제 고백을 해서 미안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기를 사십 년 가까이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한 번도 회중들에게 설교해 보지 않은 본문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을 다 강론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니 건너뛰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 성경은 아예 의도적으로 건너뛰기를 합니다.

아예 없는 본문인양 취급을 합니다.

분명 본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예 투명성경으로 여깁니다.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은 듯 있는 성경이 오바댜서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하려고 했습니다.

오바댜서를 갖고 설교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오바댜서를 진지하게 읽어보긴 했습니까?

성경에는 오바댜란 인물이 자그마치 열세 명이나 등장합니다.

그러니 오바댜란 이름이 생소한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종” 혹은 “예배자”란 의미를 지닌 합성어이지요.

흔하디흔한 이름인데 정작 아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고작해야 엘리야의 시대에 선지자의 생명을 구한 오바댜 정도일 것입니다.(왕상 18:3이하)

선지자 엘리야의 말 한 마디에 북이스라엘은 기근이 시작됩니다.

비를 부르는 온갖 기우제를 드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점점 더 이스라엘은 메말라만 갑니다.

대지는 까맣게 타 들어가고 통치자의 가슴엔 광기가 서립니다.

선지자 엘리야에 대한 분노는 그 땅의 모든 선지자를 쓸어버리는 복수로 나타납니다.

그런 어려운 가운데 오바댜는 백 명의 선지자를 살립니다.

오십 명씩 두 그룹으로 나눠 동굴에 숨겨두고 먹여 살립니다.

그 오바댜를 제외하곤 별로 아는 인물이 없습니다.

선지자 오바댜 역시 그렇습니다.

그의 예언 내용과는 달리 그가 누구이며 어느 시대의 사람인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습니다.

 

읽혀지지 않는 성경, 그 존재감마저 잃어버린 성경이 어쩌면 오바댜서일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오바댜서는 직접적으로 이스라엘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에돔의 멸망을 적극적으로 그려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희석 교수는 “저주의 신학”으로 오바댜의 신학을 소개합니다.

온통 저주로 가득한 본문을 정경으로 채택한 까닭이 무엇입니까?

에돔의 저주는 에돔에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에돔은 에돔을 넘어 불신앙의 세계를 향합니다.

결국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차적 대상은 에돔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에돔의 정치적 역학관계를 규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오바댜의 활동 시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예언서들은 시대적 배경을 확인하기가 버겁습니다.

학자들마다 주장하는 논리에 따라 시대가 왔다 갔다 합니다.

오바댜 역시 학자들의 논리에 따라 시대적 배경에 커다란 차이가 있습니다.

문서선지자들의 활동무대였던 주전 8세기가 여전히 다수를 차지합니다.

그러나 일부의 학자들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선지자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오바댜의 시대적 배경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는 결국 관점의 차이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바댜의 예언이 정경으로 수납된 이유이겠지요.

온통 저주의 메시지로 채워진 오바댜의 예언에서 정경의 이유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문서 선지자의 예언이 정경으로 수납된 이유는 “남은 자”의 신학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오바댜서가 정경으로 분명 자리를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속에 남은 자 신학이 있음을 웅변하는 셈이지요.

우리의 할 일은 저주의 예언에서 남은 자의 신학을 찾는 것입니다.

 

에돔은 잘 아는 대로 야곱과 쌍둥이인 에서의 후손을 말합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붉은 피부를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특징을 따라 “붉다”는 뜻으로 에서라 했습니다.

에돔 역시도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에돔은 활달한 성격에 걸맞게 천부적인 사냥꾼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야곱과 에서는 공존보다는 치열한 경쟁의 삶을 삽니다.

먼 훗날 야곱의 귀향을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을 만나기 위해 에서는 사백 명의 무리를 데리고 옵니다.

그 만큼 에서의 리더십은 남달랐다고 볼 수 있지요.

에서와 야곱은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함께 치룬 것을 끝으로 등을 돌립니다.

원수지간이 되어서라기보다는 자연스럽게 상봉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왕래가 멀어지면서 남남처럼 살게 된 경우입니다.

굳이 만날 까닭이 없고, 만나보았자 서먹서먹하니 만나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의 생존은 그나마 억지로 묶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죽음으로 형제간의 관계는 그저 이름뿐인 남남의 삶을 살게 됩니다.

 

기근으로 야곱의 일가족은 이집트로 이주하게 됩니다.

야곱만의 기근이 아니라 가나안을 위시한 전 지역의 기근입니다.

그렇다면 에서의 지경인 세일 산 에돔 땅에도 기근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에서를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잘 되어서 떠나는 이주입니다.

그러니 혈육에게 조금의 혜택이라도 주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자신의 식구들만 쏙 빼어서 이주합니다.

그렇게 사백 년이 훌쩍 지납니다.

에돔은 그 기근의 역경을 딛고 살아남습니다.

그리고 간간히 이스라엘의 소식을 접합니다.

어느새 노예로 전락한 이스라엘의 형편을 듣습니다.

그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벗어나 가나안 땅으로 향합니다.

모세가 파송한 이스라엘의 사신들이 에돔을 찾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 부득불 에돔 땅을 통과해야겠다고 전합니다.

그저 통과만 하겠으니 양해해 달라는 전언입니다.

에돔이 이스라엘의 그런 부탁을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그러나 모세오경을 읽어보면 끝까지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거절하고 때로는 용인하는 속에서 이스라엘은 광야를 배회합니다.

사십 년의 배회는 오로지 이스라엘의 죄 때문입니다.

그러니 에돔의 거절 때문에 광야에 머물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과 에돔은 애증의 관계입니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이스라엘은 얼마나 강성했습니까?

주변의 국가들을 아우르는 탄탄한 국가를 세워나갑니다.

그 시절 에돔은 이스라엘에게 복속된 나라 중 하나입니다.

천혜의 도시인 세일 산과 페트라는 에돔의 자랑입니다.

에돔은 이스라엘보다도 더 오랜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있을 때에 이미 에돔은 국가를 형성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생기기 전에 이미 에돔엔 왕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에돔은 여전히 국가로 존재합니다.

바벨론과 연합하여 남 유다를 공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에돔은 이스라엘보다도 더 긴 역사를 지닌 나라입니다.

그 에돔에 대한 멸망을 담고 있는 것이 오바댜서입니다.

 

누구나 이스라엘과 에돔의 불편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봅니다.

그러다 보니 에돔에 대한 저주 역시도 시대적 배경에 따른 것으로 이해를 합니다.

오바댜의 시대적 배경이 달라지는 이유입니다.

오바댜서를 보십시오.

오바댜는 묵시라는 독특한 형식으로 예언을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시는 이유는 교만입니다.

형제인 야곱의 멸망을 수수방관했다고 그들의 죄를 지적합니다.

아니 그저 구경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멸망을 부추겼다고 말합니다.

적군이 되어 유다의 패망을 부채질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묻습니다.

에돔은 과연 이스라엘의 형제 나라입니까?

 

오바댜서는 저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묵시의 후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소위 남은 자를 대변하는 “시온 신학”이 그의 예언을 관통합니다.

오바댜의 예언을 보십시오.

“오직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17절)

“구원 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21)

 

그러므로 오바댜서의 예언이 저주의 신학만으로 도색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어둠을 뚫고 희망의 신학을 이야기한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나저나 오바댜서를 갖고 설교할 수 있는 그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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