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오바댜 강해

오바댜서의 개론과 신학

에반젤(복음) 2019. 9. 30. 10:57




오바댜서의 개론과 신학

 

 

 

오바댜 서론
 
오바댜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짧은 예언서로서 간결한 문체를 자랑하는 책이다.

'빅토르 위고'(St. Victor Hugo)는 본서에 대해 '간결한 문체로서 많은 의미를 담고 있으며, 적은 말로 풍부한 사상을 포용한 책'이라고 평하였다. 그는 또 본서의 풍유적인 비판 의식을 높이 평가하고 구세주의 형상을 부각시킨 것에 대해 본서의 폭넓은 사상의 영역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한편 이 같은 본서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오바댜서는 두 가지 문제점을 인해서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또 이 문제들은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실정이다. 그 두 가지 문제란 본서의 역사적인 배경과 문헌으로서의 완전성이다. 그만큼 본서에는 다양한 역사적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시기의 폭은 거의 500년이나 차이가 난다. 따라서 본서의 역사적 배경의 문제와 동시에 문헌적인 완전성의 문제도 거론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본서의 가치는 간결한 문체 속에 함축된 풍부한 사상에 있다. 즉 본서에는 역사적인 자료들을 비롯하여 여호와의 심판과 다가올 주의 날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 사상이 함축되었다. 또한 윤리적인 면에서 자만과 물질 숭배 사상을 비난하였다. 본 서론에서는 본서를 전체적으로 개괄하고, 특별 주제들을 다룸으로써 본서에 대한 개괄적인 정보를 전하고자 한다. 다만 여러 가지 제약으로 인해 폭넓은 자료 제시를 하지 못한 점이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제1부: 오바댜서의 역사적 배경
 

   I. 명칭
 

   본서의 1절에 의하면 '오바댜의 묵시'라는 표제가 붙어 있다. 그러나 이 표제는 나중에 붙여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Eichhorn). 물론 이러한 추측이 사실임을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는 없다. 다만 본서에 나타난 역사적 자료들의 혼재에 비추어 볼 때 전혀 근거 없다고 할 수도 없다(Schabert). 따라서 본서의 명칭을 다룰 때 그것은 정경으로 완성된 최종적 형태에 대한 명칭을 살피는 것이다.
   본서의 히브리어 명칭은 <hy"dib'[o ; 오바디야>로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를 경배하는 자'란 뜻이다. 이 명칭은 히브리 관습에 따라 표제를 제목으로 한 것이다. 그리고 70인역(LXX)은 이 명칭을 <ojbdiou': 오브디우>로 음역했으며, '불가타'(Vulgate)에는 로 음역했고 한글 개역 성경에서 본서의 명칭은 '오바댜'이다.
 

  

 II. 저자 및 기록 연대
 

   1. 저자
 

     1) 전통적인 견해

 

   본서의 저자 문제에 대해 다양한 주장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입장을 취하는 학자들은 수 세기 동안 본서의 저자를 오바댜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저자 문제와 더불어 가장 논점이 되고 있는 예레미야와의 관계에 있어서 그들은 오바댜가 예레미야에 앞서며, 렘 49:7-22에 나타난 오바댜와 유사한 사상은 예레미야가 오바댜에 의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Archer, Naegelsbach, Caspari, Keil, Delitzsch). 한편 구약성경에는 11명의 오바댜에 대한 언급이 수록되었는데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아합 왕의 궁내 대신으로 여호와를 섬기는 경건한 오바댜(참조, 왕상 18:3-16). ② 다윗의 후손 오바댜(참조, 대상 3:21). ③ 잇사갈 지파에 속한 이스라히야의 아들 오바댜(참조, 대상 7:3). ④ 베냐민 지파의 아셀 아들 오바댜(참조, 대상 8:38; 9:44). 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최초의 포로 귀환자 오바댜(참조, 대상 9:16). ⑥ 갓 지파의 족장으로서 다윗의 군대에 들어간 오바댜(참조, 대상 12:9). ⑦ 스불론의 관장 이스마야의 아버지(참조, 대상27:19). ⑧ 여호사밧 왕의 명령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가르치기 위해 유다 각 지역에 파견되었던 방백들 중의 한 사람(참조, 대하 17:7-9). ⑨ 요시야 때 성전 중건을 감독했던 사람 오바댜(참조, 대하 34:12). ⑩ 예루살렘으로 귀환할 때 에스라와 더불어 온 사람으로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계약에 인을 쳤던 제사장 중의 한 사람(참조, 스 8:9; 느10:5). ⑪ 대제사장 요아김의 시대에 문안의 곳간을 파수했던 문지기 중의 한 사람 오바댜(참조, 느 12:25). 즉 성경에는 이처럼 수다한 사람들이 오바댜란 이름을 갖고 기록되었으나 그중 본서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2) 진보적인 견해

 

   구약성경에서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과 본서의 저자를 연관시키려는 시도가 전통적인 입장의 학자들과는 달리 진보적인 견해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견일치를 보지 못해 실패했다. 그리고 진보적인 견해의 학자들 대부분의 본서의 저자를 익명의 저자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에돔에 대한 심판의 예언들을 수집하여 이스라엘과 맺어 온 오랜 원수 관계를 복수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본서이고, 따라서 단일한 저자에 대한 기록일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파이퍼'(Pfeiffer)는 에돔에 대항하는 원래의 예언이 두 종류로 나뉘어져 전해져 왔다고 본다. 즉 옵 1:1-9과 렘 49:7-22은 이스라엘과 에돔과의 적대 감정을 표면화시킨 예언으로서 이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이스라엘 내에서 전해져 왔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 그대로라면 본서의 저자 및 기록 연대는 정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학자, 곧 '로돌프'(Rodolph)는 위의 두 개의 예언은 인정하지만 '파이퍼'와 달리 둘 다 오바댜의 기록으로 돌린다. 또한 그는 옵 1:14, 15과 옵 1:16-18도 나누어 그것들 역시 오바댜의 예언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로돌프'의 주장에 의하면 오바댜는 예레미야보다 시기적으로 앞서며, 예레미야는 오바댜에 의지하여 기록하였다는 것이 된다.
   한편 '아이스펠트'(Eissfeldt)는 옵 1:2-9의 언급이 에돔에 대한 실제적 위협이라고 해석하고 옵 1:11-14은 예루살렘의 마지막 날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로써 본서의 저자 문제는 다시 혼선을 빚기 시작했다. '아이스펠트'는 계속해서 예레미야보다 후기에 본서가 기록되었으며, 예레미야의 에돔에 대한 심판 예언을 전수 받은 익명의 저자에 의해서 본서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오바댜에게서 본서의 사상이 유래했을 것이라고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문헌 비평 학자인 '카스파리'(Caspari)의 문헌적인 연구가 새로운 논증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즉 그는 오바댜의 구절과 렘 49장과의 긴밀한 병행 구절을 고찰하여 오바댜 우선권을 주장하였다. '카스파리'에 의하면 오바댜의 예언이 우선 하며 예레미야가 오바댜를 의지하여 기록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의 주장대로라면 본서의 저자는 오바댜 자신이 된다. 하지만 아직 소수의 학자들은 본서의 오바댜 저작을 의심하며(Bonnard), '볼프'(Wolff)같은 학자는'파이퍼'의 견해를 옹호하여 본서와 예레미야서의 공통적인 구두 전승을 주장하기도 한다.
 

 

   2. 기록 연대
 

     본서의 기록 연대를 정하는 문제는 앞에서 논의한 저자 문제와 분리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의 표제에서 예언자가 자신의 시대에 대한 배경적 설명을 하지 않는 이유로 해서 저자와는 별개의 문제로 기록 연대를 정하는 문제가 난관에 부딪혔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내적인 증거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또한 본서의 기록 연대와 관련된 견해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계열이 있는데, 이는 전통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이다. 전자는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기는 했어도 B.C. 586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하고, 후자는 B.C. 586년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구분은 본서에 언급되어 있는 역사적인 자료에 대한 취사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
   본서에 언급된 역사적 자료를 토대로(참조, 옵 1:11-14) 몇 가지 가능한 연대를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애굽 왕 시삭의 침입(B.C. 925)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수난(참조, 왕상 14:25, 26; 대하 12장). ② 블레셋 사람과 구스에서 가까운 아라비아 사람들의 침입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수난(여호람 왕 때, 참조, 대하 21:16, 17; 암 1:6, 11, 12). ③ 이스라엘 왕 여호아하스의 침입(B.C. 790년 경)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수난(참조, 왕하 14장; 대하 25장). ④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침입(B.C. 586년)으로 인한 예루살렘의 함락 사건(참조, 왕하 24, 25장; 시 137:7). 전통적인 입장과 진보적인 입장의 차이는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가능한 추정 연대 중에서 서로 다른 연대를 선택한 결과이다.
 

   1) 전통적인 견해

 

   앞서 제시한 연대들 중에서 두 가지가 가장 보편적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하나는 B.C. 844년 경 여호람의 통치 시기이고, 다른 하나는 B.C. 586년 예루살렘 함락 후의 시기이다. 그중에서도 전통적인 입장의 학자들은 이른 시기를 본서의 기록 연대로 주장한다. 즉 이들은 옵 1:10-14에 묘사된 사건들을 여호람 통치 시대에 침입했던 블레셋 사람들과 아라비아 사람들에 의한 예루살렘 탈취 사건(B.C. 844년)과 동일시한다(참조, 왕하 8:20; 대하 21:16, 17). 이들 학자들이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 844년경으로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본서의 기록은 B.C. 586년 이후일 수 없다. 왜냐하면 본서의 기록에서 바벨론에 의해 무참하게 파괴된 성전에 대한 언급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본서에서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을 구별짓는 특징들이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Laetsch, Archer).
   ② 아람어 표현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는 B.C. 6세기보다는 B.C. 9세기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이 논증은 절대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람어가 나타난다고 해서 B.C. 6세기 에 기록되었고,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B.C. 9세기에 기록되었다는 논증은 아람어의 사용 시기를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을 잃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람어는 B.C. 11세기 이래로 고대 근동의 문화권에 영향을 끼쳤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한 예를 들면 B.C.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에게서도 아람어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③ 오바댜의 본문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보고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벨론에 의한 성전 파괴 사건과 별개의 사건임을 암시한다.
   ④ 본서에 언급된 이방 나라들이 바벨론 포로기의 인접 국가들이 아니라 그 이전 시대의 적들이었는데 예를 들면 블레셋, 길르앗 같은 나라들이다.
   ⑤ 본서의 내용은 B.C. 8세기의 예언자인 아모스의 사회 비판과 거의 똑같다(비교, 암 1:11).
   ⑥ 재점령에 대한 언급에서 유다 산지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이미 유다 산지는 유다 백성들이 점령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는 또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완전한 멸망과는 차이가 있는 지엽적인 사건에 대한 언급임을 암시하게도 한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서 전통적인 입장의 학자들은 옵1:10-14에 묘사된 사건을 여호람 왕 때 일어난 사건으로 보며, 본서의 기록 연대도 예루살렘의 수난사건(B.C. 844년) 직후라고 본다(Caspari, Keil, Delitzsch, Naegelsbach, Archer, Laetsch, Kirkpatrick).
   이외에도 본서의 연대를 결정하는 데는 본서의 정경상 위치와 관련된다. 소선지서는 히브리 성경 내에서 세 시기로 구분되어 연관을 맺고 있다. 즉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책으로 학개, 스가랴, 말라기가 있고, B.C. 7세기 후반의 것인 나훔, 하박국, 스바냐가 있으며, B.C. 8세기의 것인 호세아, 아모스, 미가서가 있다. 오바댜서는 이중 B.C. 8세기의 예언서들과 더 많은 유사점을 가졌다. 이와 같은 사실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 8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입장의 학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논증으로 채택하였다. 본서의 연대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최대의 논점이 된 것은 본서와 예레미야서와의 관계일 것이다. 여기에서는 '카스파리'의 논증을 통하여 인정된 예레미야보다 오바댜가 앞선 예언자였다는 사실만을 지적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2) 진보적 견해

 

   진보적인 견해를 내세우는 대부분의 비판적 학자들은(Kuenen, Wellhausen, Nowack, Eichhorn, Ewald, Cornill, smith, Elmslie, Bewer, Driver) 본서의 기록 연대를 바벨론 포로기, 혹은 그 이후로 주장한다. 그들이 B.C. 586년 이후에 본서가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① 옵 1:11-14에 묘사된 사건들은 예루살렘의 파괴와 가장 자연스럽게 들어맞는다.
   ② B.C. 586년 이후에 에돔에 대한 적대 감정이 노골화되었다. 따라서 본서에 기록된 에돔에 대한 적대적 표현과 일치한다(참조, 시 137:7; 애 4:21; 겔 25:12-14; 35:1-15).
   ③ 본서의 기록 연대를 여호람 왕 통치 시기라고 주장하는 전통적인 학자들의 견해에 반대하여, 여호람 왕 시대의 블레셋 침략을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④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점유에 관한 언급은 이스라엘이 존속했던 전기 연대보다 후기 연대에 더 알맞다.
   ⑤ 오바댜의 예레미야가 서로 영향을 주거나, 또는 받은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오래 된 구전 전승을 사용하여 오바댜는 본서를 예레미야는 렘49:7-16을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Pfeiffer, Weiser, 특히 보수주의 학자이며 본서의 후기 연대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Robinson, Thompson등이다).
   한편 '벨하우젠'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 5세기로 생각했다. 그는 본서의 진정한 역사적인 배경은 에돔 사람들이 아랍 족속들을 억압하는 것에서 발견되어야 한다고 보고, 옵 1:1-9에 나타나는 동사들은 과거의 사건들을 가리키는 동사들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그의 의견은 많은 학자들에 의해 지지를 받아 왔으나 본서의 통일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거의 논외 의 견해로 밀려난 주장이다. 곧 그의 견해를 입증할 만한 아랍의 침입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없는데다, 그가 과거의 사건들을 나타낸다고 주장한 동사들이 미래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해짐으로써 그의 견해는 설득력을 잃었다.
   이 외에도 본서의 기록 연대로 제시된 주장들이 여럿 있다. 예를 들면 '레이븐'(Leeuwen)과 '데이비드'(David)의 아마샤?아하스의 통치 시대설(B.C. 730-720), '톰프슨'의 B.C. 450년경 설(Pfeiffer), '힛지그'(Hitzig)와 '벤첸'(Bentzen)의 B.C. 312년경 설 등이 있지만 널리 인정받지는 못하였다.
 

 

   III. 기록 목적
 

   본서의 기록 목적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에돔이 유다에 대한 형제적인 우애가 없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다른 하나는 주의 날에 있을 최후의 승리를 보여 주기 위함이다. 먼저 에돔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에돔의 조상인 에서는 야곱의 쌍둥이 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에는 뿌리 깊은 반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참조, 창 25:23; 27:39, 40). 또 통일 왕국 시대로부터 에돔을 지배하는 것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들에게 있어서 불변하는 정책이었다. 더욱이 B.C. 597년 예루살렘이 포위되었을 때 에돔은 유다의 곤경을 기뻐하였으며(참조, 애 4:21), 유다에 대해 보복하였으며(참조, 겔 25:12), 바벨론과 연합하여 유다를 파괴시키고 네게브를 점유하였다(참조, 겔 35:10).
   따라서 본서의 에돔에 대한 적대적인 표현은 이스라엘과 에돔 사이의 오랜 역사를 통해 쌓은 반목과 적대 감정의 표현인 것이다. 다음으로 본서는 주의 날에 종말론적인 희망을 제시한다. 이 주제는 많은 다른 예언서들에서 발견되는데(참조, 사 2:6-22; 겔 7장; 욜 1:15-2:11; 암 5:18-20; 습 1:7, 14-18), 본서에서는 세상의 종말을 예시하고, 또 여호와의 왕국이 도래할 것을 보여 준다. 이는 여호와의 날에 있을 의의 최후 승리라는 고전적인 신앙 고백이라 하겠다.
 

 

   IV. 특징 및 구조
 

   1. 특징
 

     1) 통일성

 

   본서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본문을 가진 책이면서도 통일성에 대한 논란이 무성하다. 본문의 구성 문제와 관련된 쟁점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렘 49:7-22에 대한 옵 1:1-10의 문학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배경의 문제이다. 먼저 문학적 관계에 대해 살펴보면 렘 49:7-22과 옵 1:1-10은 분명한 병행 구절인데 이중 어느 것이 앞선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있어 왔다. 그러나 앞서도 논의한 바와 같이 예레미야의 것이 2차적인 본문으로 널리 인정되고 있다. 왜냐하면 오바댜의 본문은 예레미야의 것보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약간 뒤진 사상을 포함하지만 책의 배열에 있어서는 예레미야의 본문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즉 오바댜서는 렘 49:7-22에 비하여 문체가 보다 생생하고,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어서 본서의 통일성 논의에 긍정적인 빛을 던져 준다.
   다음으로 본서의 통일성에 대한 역사적 배경적 논쟁을 살펴보면, 옵1:15-21이 보다 후대의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초하여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비평 학자들에 의해서 제창되어 왔는데, 그들은 우선 앞부분에서 열방이 심판의 도구였는데 반해 후반부에서는 심판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든다. 두 번째 첫 부분에서는 선지자가 황홀경 속에서 받은 묵시인데 반해 후반부는 에돔에게 향하는 역사적인 심판 선언이란 점을 든다. 따라서 비평 학자들은 본서를 둘로 나누고 그 통일성을 의심했다. 그러나 다른 학자들은 ① 주의 날에 대한 일관된 주제, ② 에돔에 대한 관심으로 일관된 예언, ③ 위에서 언급된 두 부분에서 세계 전역이라는 주제가 두드러진다는 점을 들어 본서의 통일성을 주장한다. 이상의 논의를 살펴볼 때 본서의 통일성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2) 사상적인 면

 

   본서의 주제는 역사적인 것에서 종말론적인 주제로 변천하였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비평 학자들은 후대의 첨가라는 주장과 통일성을 의심하는 근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본서의 통일성은 의심받을 수 없고, 따라서 후대의 첨가라는 견해 또는 억측이라 하겠다. 본서에서 주제가 바뀐 것은 저자나 기록 연대의 문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서 흐르는 시대정신, 곧 출애굽에 대한 관습적인 회상에 기인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옵 1:19-21에 나타난 땅의 분배와 여호와의 직접 통치를 제시하기 위해서 18절에서 하나님의 세계 심판을 언급한 것은 오바댜의 문학적인 소양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에 뿌리박고 있는 출애굽과 계약 신앙의 최종 단계인 약속의 성취라는 사상적 맥락 속에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본서는 사상적인 면에서 이스라엘의 고대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며, 약속의 성취라는 종말론적 기대에까지 주제를 확장시킨 뛰어난 작품이라 하겠다.
 

 

   2. 구조
 

     본서의 구조에 대한 견해는 다양하지만('뷰어'는 4부분으로 '로빈슨'은 7개의 예언으로 나누었음), 가장 보편적인 구분은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다. 이처럼 두 부분으로 나뉘게 된 유래는 '벨하우젠'의 비평적인 의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두 번째 부분을 추가 본문으로 이해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러나 본서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뮐렌버그'(Mueilenberg)는 본서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 것은 '벨하우젠'의 견해를 따르지만, 시대적인 특색이나 에돔에 대한 관심, 그리고 뒤바뀐 운명에 대한 언급이 두 부분에 동시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내용 구분을 토대로 본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도표1>과 같다. (참조, 오바댜 도표1)
 

  

 제2부: 오바댜서의 특별 주제들
 

   I. 오바댜서와 렘 49:7-16
 

   1. 문제 제기
 

     학자들은 옵1:1-9과 렘49:7-16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최근 두 본문 사이의 연관은 <비교표1>에서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명백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두 본문의 상호 연관성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본문에 대한 논쟁은 계속되었다. 그 이유는 두 본문 사이의 문헌상 연관성은 확인되었지만, 두 본문의 우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바댜와 예레미야의 예언이 포함하고 있는 기록 연대와 사상의 문제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의견의 일치를 못보고 있는 것이다. 본 서론에서는 문제 해결을 위한 학자들의 논의를 살펴보고, 두 예언의 현대적 적용, 즉 하나님의 살아 계신 말씀을 나타내기 위한 예언서 간의 협력이란 의견을 소개하고자 한다. (참조, 오바댜 도표2)
 

 

   2. 문제 해결을 위한 시도
 

     1) 오바댜서 우선설

 

   이 견해는 오바댜서의 기록 연대와 관련하여 전기 연대를 주장하는 학자들의 견해이다. 그들은 본서의 기록 연대를 B.C. 9세기라고 주장하며, 예레미야의 기록 연대(B.C. 586년 경)에 비추어 볼 때 예레미야는 본서를 토대로 자신의 예언서를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이들은 오바댜서에서 B.C. 9세기의 문체를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Mueilenberg). 더욱이 그들은 렘 49:7-16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그 안에 포함된 예레미야 고유의 표현들을 구분해 냄으로써 오바댜와 렘 49:7-16을 구별지으려고 하였다. 곧 그들은 오바댜의 표현들이 예레미야에게서 이질 적인 표현으로 바뀌어진 독특한 요소들을 구별해 냈다. 예를 들어 보스라, 데만, 드단 등은 에돔을 지칭하는 것들로서 예레미야의 고유한 표현들이다(Glueck). 한편 오바댜의 우선권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예레미야가 쓰여진 후에 오바댜가 쓰여졌다면, 오바댜서 내에서 포로기에 쓰여졌다는 근거를 찾아보라고 반박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본서가 쓰여진 시기를 여호람의 통치 시기(B.C. 855-840)에 있었던 예루살렘 수난사건 직후(B.C. 844)라고 보고 본서의 예레미야서에 대한 시기적 우선을 주장하였다(Caspari).
 

   2) 예레미야서 우선설

 

   오바댜서의 연대에 대한 초기 주석가들의 견해는 본서가 예루살렘의 멸망과 관련시켜 포로기에 쓰여졌다고 보았다(Calvin). 또한 어떤 학자들은 본서의 내용을 B.C. 5세기 초반의 나바태인(Nabataeans)에 의한 에돔 침공에 관련시킴으로써 기록 연대를 B.C. 5세기 초반이라고 주장하였다(Wellhausen). 비록 본서의 기록 연대에 대한 혼란스런 견해들이 주장되었을지라도 하나의 일치된 부류는 B.C. 586년의 예루살렘 멸망 후의 어느 때가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서의 기록 연대를 후대로 보는 일련의 학자들은 본서와 렘49장의 관련에 대해서도 예레미야 우선설을 주장하였다. 이들의 주장은 다분히 연역적인 추론에 의한 것인데, 오바댜서의 주요 사건들이 B.C. 586년의 일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오바댜는 예레미야보다 후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뷰어'는 옵 1:1-4이 예레미야를 인용한 것이며, 거기에 오바댜의 해석과 의역을 덧붙여서 옵 1:1-9을 완성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들의 약점은 옵 1:1-9과 10-21의 역사적 괴리에 대한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의 의견이 오랫동안 지지받아 왔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예레미야보다 오바댜가 먼저 기록되었음을 주장하는 오바댜 우선설이 지지받고 있는 실정이다.
 

   3) 제3의 자료설과 최종 형태로서의 오바댜

 

   위의 두 견해보다 최근에 이루어진 연구는 '볼프'등에 의해 주창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제3의 자료설로 두 본문 모두 이미 형성되어 있던 전승이나 구전 전승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Gottwald). 이는 최근의 문학비평적인 연구의 결과에 힘입은바 크며, 최근 학자들 간에 구전되어진 기간을 인정하려는 추세에 한 걸음 다가선 견해라고 하겠다. 제3의 자료설은 그만큼 두 부분에 대한 상충된 의견들을 하나로 묶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한편 제3의 자료설을 살펴보면 출애굽과 사사시대를 거치면서 에돔에 대한 저주의 신탁들은 이스라엘과 에돔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졌다. 그리고 그 신탁들은 에돔과의 적대적인 감정으로 인해 오랫동안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을 분만 아니라, 에돔의 위협이 있을 때마다 암송되었다. 그러던 것을 오바댜가 먼저 자신의 신탁과 연결지어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오바댜의 본문이 예레미야의 것보다 기존의 자료들을 더 정확히 재생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여하튼 오바댜서가 에돔에 대한 저주 신탁이 흡수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예레미야가 오바댜서에 의지하지 않은 채, 독자적으로 에돔 저주의 신탁 자료를 사용하여 자신의 예언서를 기록했다는 것이 제3의 자료설이다.
   한편 제3의 자료설은 최종 형태의 오바댜서와 어떤 모순된 문제도 야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논의들이 비생산적인 시간 낭비였다면, 제3의 자료설은 획기적인 견해라 하겠다. 또한 최종 형태의 오바댜서 내에서 옵 1:1-9의 내용은 하나님의 신탁 적인 문구들로 이루어진 여호와의 날에 대한 것이다. 즉 궁극의 날, 그날에는 누구와도 원수진 것을 풀게 될 것인데, 그 동안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이방의 철저한 파괴를 전제한 화해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은 출애굽의 경험 속에서 형성된 것이었다. 따라서 오바댜가 출애굽의 신앙 안에서 계약을 말하고, 이방, 특히 그중에서도 에돔의 운명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 것도 그가 이어받은 전통에 비추어 볼 때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레미야도 아나돗 출신으로서 출애굽의 전통에 확고하게 서 있는 예언자였다. 따라서 예레미야가 에돔 저주 신탁을 그의 예언 안에 포함시킨 것은 계약 신앙의 기조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3. 사상적인 유사점
 

     오바댜와 예레미야가 출애굽의 전통 위에 서 있다는 것은 그들이 같은 자료를 사용하여 예언을 선포한 문제, 곧 옵 1:1-9과 렘 49:7-12의 선후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두 예언자는 같은 전통의 기반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사상적인 측면에서 유사점들이 발견되어 그중의 하나가 계약 신앙의 전토 위에 서 있다는 점이다. 오바댜는 계약 신앙에 서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회복을 희망했고, 곧 여호와의 날에 이루어질 이스라엘의 황금시대와 여호와의 왕국의 건설을 희망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면 옵 1:1-9과 렘 49:7-12의 문제는 어느 것이 우선인가의 문제도 아니며, 얼마나 오래 된 전통을 포함하고 있느냐의 문제도 아니라 다만 두 본문의 연관은 하나님 말씀에 대해 서로 보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현재의 독자들에 유익을 끼친다 하겠다.
 

 

 

   II. 오바댜의 신학: 에돔 저주의 신학
 

   오바댜서는 수천 년에 걸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서로 갈등적인 관계에 있었던 에돔에 대한 솔직하고도 담백한 관심이 표현되고 있는데, 그것은 에돔에 대한 저주요 증오였다. 그래서 초대교회 신학자와 역사가들은 이 짧은 책을 '에돔 저주의 문서'라고 불렀으며(Josephus), 현대의 신학자들은 본서를 '에돔 저주의 신학서'라고 부른다. 또한 오바댜의 메시지는 '오바댜의 묵시'라는 표현에서 암시하는 바와 같이 예언적인 메시지이다. 한편 신학자들은 본서의 기록에 대한 여러 학설(연대, 저자, 신학 등)을 내놓았지만, 대개 본서가 '에돔 저주에 관한 고대의 예언'에서 유래한 것이라는데 의견을 모았다. 한편 본 서론에서 오바댜의 신학을 다룸에 있어 먼저 에돔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살펴보고 다음으로 예루살렘 멸망을 전후한 시기의 오바댜 예언의 역할과 마지막으로 에돔 저주 예언의 확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에돔과 이스라엘
 

     1)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야곱이 이스라엘과 동일시되었듯이 에서는 에돔과 동일시되었다(참조, 창 36:1). 따라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도 의미를 지니지만, 이스라엘과 에돔의 국가적 운명과 결부되었다고 할 때 더 의미가 있다. 먼저 에돔이란 에서의 몸이 붉다는 것과(참조, 창 25:25), 에서가 야곱의 속임수에 의해서 장자권을 판 팥죽의 색깔이 붉다는 사실(참조, 창 25:30)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에돔은 '붉은 지역'이란 의미이다. 두 번째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두 형제 개인의 특징에 따라 민족의 특색이 정해졌다. 곧 야곱은 매끈매끈한 사람으로, 그리고 에서는 털이 많은 사람으로 묘사되었다(참조, 창 27:11). 세 번째로 두 형제에 대한 운명적인 이야기는 아버지 이삭의 축복에서 국가적인 운명으로 진전되었다(참조, 창 27:39, 40). 즉 이삭의 축복은 에서에 대한 것으로 끝나지 않고 에돔 나라의 운명과 직결되었다.
   에서가 살 땅, 곧 에돔은 기름지지 않은 땅이며, 하늘에서 이슬 한 방울도 내리지 않는 땅이었다. 실제로 에돔에 대한 고고학적인 발굴에 의하면 에돔 지역은 산악지대로 농사짓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지역이며, 산맥의 급경사와 토질이 척박한 이유로 멀리서 보면 붉은빛을 띤다고 한다. 따라서 에돔의 명칭도 이와 같은 지형적인 특색에서 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삭의 축복에서 두 번째 요소는 에돔이 칼을 믿고 생활할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고고학적 연구를 살펴보면, 에돔은 요새 지역이었으며, 대상들이 많이 왕래하던 교통의 요지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들의 주요 산업은 천연 자원을 파는 것이었는데, 구리와 철은 주요 광물로 아랍과 애굽 시리아 등지에 수출하고 대신에 다른 생산물을 사 왔다고 한다. 또 그들의 재원 중에 빼놓은 수 없는 것은 통행료였다. 교통의 요지였던 에돔 요새 지역을 통과하는 대상들은 통행료를 내야 했다는 것이다. 이삭의 축복에서 에돔의 국가적 운명을 결정한 것은 세 번째 요소에 있다. 즉 에서는 동생 야곱을 섬길 것이며, 매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만 했던 것이다. 한편 이러한 에돔은 유다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후에 독립하였다.
 

   2) 이스라엘과 에돔의 반목

 

   에돔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할 때에 이미 한 왕 아래에서 훌륭한 국가적 기반을 닦았다(참조, 민 20:14-21). 그들은 정복 시대와 사사시대를 통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을 통과하지도 못하게 하는 등 적극적으로 방해하였다(참조, 민 20:18; 삿 11:18). 그러던 중 왕조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스라엘이 어느 정도 국가 체제가 완비되는 단계에 들어설 때 이 같은 에돔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사울은 이스라엘 변방의 이민족들은 쳤는데, 에돔을 비롯한 모압, 암몬 족속들을 쳐부수었다(참조, 삼상 14:47). 그리고 다윗은 에돔을 처음으로 정복하여 그곳에 수비대를 두었으며(참조, 삼하 8:13, 14), 다윗의 군대 장군 요압은 6개월 동안 에돔의 남자들을 죽임으로 에돔에게 혹독한 패배를 안겨 주었다(참조, 왕상 11:15-17). 사울에 이어 다윗의 에돔 정벌은 솔로몬 시대의 번영에 일익을 담당했다. 왜냐하면 두 정벌의 결과로 이스라엘은 아랍으로부터 풍부한 물자를 들여오는데 장애를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에돔의 광산으로부터 대규모의 광물을 공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에돔 지배는 왕국이 분열된 뒤에도 여전히 지속되었다. 여호사밧 시대에 와서는 에돔에 왕이 없어 이스라엘의 섭정 왕에 의해 다스려졌다(참조, 왕하 22:47). 그러나 후기에는 에돔 족속 중에서 섭정 왕이 임명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모압에 대한 원정 기사에서 '에돔의 왕'이 언급되기 때문이다(참조, 왕하 3장). 그러나 이러한 임명은 이스라엘에게 불행을 초래했다. 즉 솔로몬 시대 이래로 계속된 하닷의 반란(참조, 왕하 11:14-22)은 급기야 여호람 시대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켰고 유다의 손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왕을 세우기에 이르렀던 것이다(참조, 왕하 8:20-22). 그리고 이 독립 국가 시대는 50-60년간 지속되었다. 그러나 아마샤의 정복(참조, 왕하 14:7)으로 에돔의 독립 국가 시대는 끝나고 유다에 다시 복속되었다. 또한 아마샤의 후계자 아사랴가 엘랏까지 정복하면서 에돔을 또 한 차례 완전히 정복하기도 하였다(참조, 왕하 14:22).
   그러나 나약한 아하스 왕 통치 시대에 이르러서는 에돔이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B.C. 735; 왕하 16:6). 더욱이 에돔은 B.C. 735년경에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복종을 맹세하면서 나라의 독립은 유보적인 것이었지만, 비교적 다양한 외교적 동맹을 맺으면서 약 100년 동안 지냈다. 그 후에도 에돔은 앗수르의 속국으로 지내다가 B.C. 604년에 새롭게 등장한 근동의 주인 바벨론에게 귀속되었다. 에돔의 역사는 B.C. 13-8세기 동안 최대의 번영을 누렸지만 그 후 독립 시대에는 이스라엘과의 반목으로, 그렇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지냈다. 그러다가 에돔은 B.C. 586년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바벨론에 합세하여 오랜 숙적이었던 유다를 쳐서 파멸시켰다(참조, 시 137:7; 애 4:21, 22; 옵 1:10-16). 그리고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 에돔 족속은 북쪽으로 이동하여 유다 남부의 중요 도시인 헤브론에 그들의 수도를 정했다. 이로써 오랫동안의 종속 시대는 끝나고 에돔의 독립 국가는 바벨론 포로 후기 시대에 이르러 이두매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 오바댜의 에돔 저주 예언
 

     1) 예언자들의 에돔에 대한 예언
 

   이처럼 독립 국가 시대에는 이스라엘과 반목하고,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지낼 때에는 그 나라를 도와 이스라엘을 침공했던 에돔에 대해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을 향한 혹독하고, 적대적인 저주의 예언을 퍼부었다. 시편의 시인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이스라엘을 쳐서 다시는 기억되는 일이 없도록 하자고 서로 동맹을 맺는 일에 에돔이 가담했다고 전한다(참조, 시 83:2-8). 이어 시인은 그들을 멸하여 줄 것을 여호와께 호소하였다. 또한 이사야도 에돔의 멸망을 선포하였는데(참조, 사 34:5, 6, 9,11), 그는 아주 혹독한 표현으로 에돔을 저주하였다. 또 아모스도 에돔 족속이 포로를 노예화시키고 전쟁에서 잔인한 만행을 저지른다고 비난하였다(참조, 암 1:11). 그리고 그는 마침내 에돔이 이스라엘의 기업이 될 것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였다(참조, 암 9:12). 예언자들의 이와 같은 혹독한 저주의 예언은 에돔이 이스라엘과 형제지간이면서도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항하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을 잔학하게 노예로 부리거나 살육한 행위 때문이었다.
 

   2) 오바댜의 에돔 저주 예언
 

   오바댜의 에돔에 대한 저주 예언은 이스라엘과 에돔의 역사적인 반목과 적대적인 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 것이었다. 그의 에돔에 대한 솔직하고도 담백한 저주의 예언은 B.C. 586년 바벨론 제국과 연합하여 유다를 침공한 사건으로 구체화되었다. 두 나라는 오랫동안 상대방을 시기하고 질투해 왔으며, 증오심 또한 긴 시간 쌓여 왔었다. 그리고 B.C. 586년의 에돔 침략을 유다의 입장에서 보면 크게 두려운 존재는 아니었다. 하지만 에돔이 바벨론을 등에 업고 유다를 침공할 때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런 이유로 해서 예언자 오바댜는 '에돔 저주의 예언'을 기록하여 택한 백성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대신하여 보복해 주실 것이라고 믿어지는 여호와의 목적을 예언 형태로 표현했던 것이다.
   먼저 옵 1:1-9을 보면 오바댜는 에돔이 저주받을 것이며, 열방 중에서 가장 미약한 나라가 되어 멸시를 당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하고 거만하여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집을 짓고 살았다. 이는 에돔의 요새와 관련된 구절이다. 왜냐하면 에돔의 요새는 난공불락의 천연 요새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바댜는 에돔의 요새가 아무리 높고, 강하며, 난공불락의 암벽 요새라 할지라도 에돔은 크게 멸망당할 것이라고 공포하였다. 왜냐하면 에돔의 멸망 약속은 여호와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에돔은 멸망당하는 날에 크고도 철저하게 약탈당할 것이다. 더욱이 여호와께서 에돔을 멸망시키실 때, 그 범위는 지혜 있는 자들까지 포함되었다. 왜냐하면 에돔은 전통적으로 지혜로 유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지혜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방도도 못 찾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지혜마저 없어지게 될 것이다.
   두 번째로 오바댜가 지적하는 에돔의 죄를 살펴보면(참조, 옵 1:10-15), 무엇보다도 먼저 에돔의 형제애를 저버린 사실이다. 그들은 완악하여 이방인들이 재물을 앗아갈 때에도, 야곱의 성문 안에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제비를 뽑을 때에도 방관만 하고 있었으며, 심지어 그들은 침략자처럼 행동하였다. 오바댜가 지적하는 에돔의 죄, 그 두 번째는 예루살렘이 무방비 상태로 있을 때, 그들이 예루살렘 성읍을 약탈한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죄목은 멸망당한 예루살렘 성읍으로부터 도망하는 자들을 막아서 노예로 만들거나, 바벨론에 남겨 주거나, 혹은 노예 상인들에게 팔아 버린 것들이다. 이러한 죄들로 인해 에돔은 자신들이 저지른 만큼 그 대가를 받게 될 것이며, 여호와의 진노가 그들의 머리 위에 떨어질 것이다. 세 번째로 에돔에 대한 저주는 여호와의 날에 회복될 이스라엘과 대조되는 에돔을 언급하는 것으로 그 극심한 증오심을 표현하였다(참조, 옵 1:16-21). 여호와의 날에 이스라엘은 회복되어 에돔의 땅을 재분배하게 될 것이며, 에돔의 성읍들은 회복된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거주하게 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오바댜의 에돔 저주 예언은 극심한 증오심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에 근거한 편협한 배타주의의 관점이 드러난다는 주장이 있지만, 오바댜의 저주 예언에서 광신적인 민족적 증오심을 초월하는 계약 신앙을 발견해야 할 것이다.
 

 

   3. 저주 예언의 확장
 

     오바댜의 에돔에 대한 저주는 한낱 민족적 증오심의 표현이라고만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유다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라는 점에 그의 예언의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는 계약을 이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한 불이익에 대한 정의의 심판에, 그리고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여호와의 날에 있을 마지막 심판에 근거하여 에돔이 받을 형벌을 선포하였다. 또한 오바댜는 이스라엘이 당한 수난을 세계의 심판에 대한 전조로 생각했다(참조, 옵 1:16). 더구나 그는 여호와의 날에 대한 범우주적인 성격에 대해 말함으로써 오바댜 이후의 예언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먼저 예레미야는 에돔의 철저한 멸망을 선포하면서(참조, 렘 49:7-22),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또한 에스겔도 이스라엘을 통하여 에돔을 멸할 것(참조, 겔 25:14)과 에돔의 철저한 멸망을 선포하였다(참조, 겔 32:29; 35:15; 36:5). 또한 그는 여호와의 권능과 여호와의 날에 대해 예언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계약 신앙의 묵시문학적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이는 오바댜에서 유래하는 계약 신앙에 기초한 것이었다. 결국 오바댜의 에돔에 대한 저주는 에돔과의 오랫동안의 적대 감정을 여호와의 신실하시고, 정의로우신 심판과 회복에 대한 신앙으로 승화시킨 것이라 하겠다.

 

 

<출처: 옥계새기쁨교회>


'***신구약 성경강해*** > - 오바댜 강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바댜(Obadiah)  (0) 2019.09.30
오바댜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2019.09.30
오바댜書  (0) 2019.09.30
오바댜 서론  (0) 2019.09.30
오바댜 서론  (0) 2019.0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