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목사/정직한 자의 생활 (대하 19:1-11)
「너희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불의함도 없으시고 편벽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대하 19: 7>
역대하 19장 1절에서 11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정직한 자의 생활"이란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문 19장에는 여호사밧이라고 하는 유다 왕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본문에 여호사밧 왕을 가리켜서 정직한 자라 하는 표현은 없습니다. 그러나 계속 읽어 내려가다 보면 결론에 가서 여호사밧 왕을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한 자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직은 반드시 하나님의 표준으로 볼 때 정직한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정직하다 하면 그 사람은 정직한 것이고 하나님이 정직하지 않다 하면 천하 만민이 정직하다 해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 사람 만 사람의 표준보다도 하나님의 표준이 가장 정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모르심이 없고 틀림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표준이 가장 정확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표준에 의한 정직한 사람에 대해 말하겠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하나님의 표준에 의해서 살아간 사람이고,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생활이 있었느냐 하는 내용이 되겠습니다.
평안한 생활(1-3절) 첫째로, 정직한 사람에게는 평안이 생활이 있습니다. 즉 그 생활이 평안합니다. 1절부터 3절을 보게 되면 세 가지 평안이 있는데 첫째로는 "도움 받아 평안"입니다.
도움 받아 평안(1절) "유다 왕 여호사밧이 평안히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그 궁으로 들어가니라" 여호사밧 왕이 평안히 궁으로 돌아왔다 하는 것을 보면 궁궐을 멀리 떠났었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 평안히 돌아왔다 하는 것을 보면 어딘가 모르게 큰 위험스러운 일이 있었다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위험스러웠었는데 지금은 평안히 궁으로 돌아왔다는 말입니다.
여호사밧 왕은 남 왕국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왕이 북왕국인 이스라엘의 아합 임금과 더불어 연혼을 했습니다. 북쪽 아합 임금은 같은 이스라엘이요 같은 유다 족속이지만 우상 섬기기로, 바알 섬기기로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굉장히 미워하는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해서 인척 관계, 즉 사돈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아합의 집에 갔습니다. 그 때 북쪽 왕 아합은 길르앗 라못으로 전쟁을 하러 가려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합이 자꾸 전쟁터에 함께 가자고 요청할 때 여호사밧은 정말 가기가 싫었습니다. 거짓 선지자 백명이 나타나서는 가면 이긴다고 예고했습니다. 그러나 미가야라고 하는 하나님의 참 선지라는 가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가기가 싫었지만 사돈 되는 왕의 강권 때문에 전쟁터에 같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아합왕이 자기는 평군인 복을 입을 테니까 여호사밧이 왕복을 입고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전쟁에 나갔더니 적군 다른 병사들하고 싸우려 안하고 여호사밧을 향해서만 달려들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달려들었습니다. 그래서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가는데 어떻게 급했던지 하나님 앞에 그냥 소리를 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그 때 그를 도와서, 그를 따르던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서 그를 떠나게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적군이 가만히 살펴보니 자기네들이 찾는 아합 임금이 아니었습니다. 아합 임금은 군인들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합 왕을 쫓아가서 죽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여호사밧 왕은 그런 위기에서 살아났습니다. 100% 하나님의 도움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궁으로 평안히 돌아왔다는 것이 바로 1절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평안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도움은 아무리 받아도 평안이 없습니다. 군인들이 나를 겹겹이 싸고 있어도 평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도와주시니 평안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을 당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 속에서 평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회개하고 평안(2절) 두 번째로는 "회개하고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나가서 여호사밧 왕을 맞아 가로되 왕이 악한 자를 돕고 여호와를 미워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이 가하니이까?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이 왕에게 임하리이다" 예후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지가가 평안히 돌아오고 있는 여호사밧 왕을 가서 맞이합니다. 하나님이 미워하는 사람을 어찌하여 도우러 갔었냐고 책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한 사람을 당신이 가서 도우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했느냐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여호사밧이 핑계와 변명을 얼마든지 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권세를 가지로 눌러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잔소리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는 자기 위신을 세워 놓은 다음에 아무도 안 보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죽을죄를 지었다고 회개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를 통해 오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그 말씀을 묵묵히 받아들였습니다. 변명을 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에는 변명이 없는 법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죽을 때까지 그런 짓을 안 했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말로만 하고 눈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눈물을 많이 흘려도 그 죄를 그대로 또 반복하면 어떻게 회개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그것을 다시 안 하는 것이 참 회개입니다.
여러분 1 한번 실수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내 놓고 보니 엄청난 잘못을 저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진정으로 회개하고 뉘우칠 때 우리 마음에 평안이 찾아오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찾음으로 평안(3절) 세 번째로 찾음으로 평안합니다.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묵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 하고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기 보면 왕에게는 좋은 점도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사밧 왕은 실수도 했고 때로는 그런 엄청난 짓도 저질렀지만 이상하게 죄를 지으면서도 꼭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이것이 다릅니다. 믿는 사람도 살면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을 찾는 그것이 안 믿는 사람들과 다릅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평안이 있다고 증거합니다. 죄를 지었다고 하나님을 떠나면 불행해지고 더 죽을 일만 있습니다. 죄를 지어도 평안하려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중에 불란서의 루불 박물관에 가보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그 박물관은 너무너무 큽니다. 그래서 가서 조금 보다가 귀찮아서 그냥 나오고 마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곳에 있는 그림을 보면 너무나 생생합니다. 사람이 눈을 뜨고 서 있는 그림을 보면 꼭 말을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생합니다. 그리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그림만 있습니다. 그런데 한 쪽 구석에 가 보면 조그만 그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면 높은 벼랑에 나뭇가지가 뻗어났는데 거기 새집이 있습니다. 그 새집은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서 당장에라도 천 길 만 길 되는 벼랑으로 떨어질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중에도 어미 새가 날개로 새끼들을 감싸고 있습니다. 날개 밑의 새끼들이 주둥이를 내놓고 눈을 반짝이고 있는데 그렇게 평화스럽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그 그림 제목이 "평안"입니다.
주위는 그렇게 무섭고, 그렇게 시끄럽고, 그렇게 어지러워도, 새끼는 어미의 품안에만 있으면 그렇게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 하나님 믿는 사람은 비록 죄를 지을지라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품에 있을 때가 가장 평안할 때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지만 부엌에서 일하고 계시다, 함께 계신다고 느끼고 있을 때 평안합니다. 먹을 아무리 쌓아 놓아도 어머니가 없을 때는 불안합니다. 믿는 사람은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고 내가 하나님 품속에 있다고 느낄 때가 가장 평안한 때입니다.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 품속에서 항상, 일평생 평안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서 "도움 받아 평안", "회개하고 평안" "하나님을 찾음으로 평안"입니다.
순행한 생활(4-9절) 큰 두 번째로는 "순행한 생활"입니다. "순행"이란 말은 두루 돌아다녔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의 생활은 순행하는 생활입니다. 즉 두루 도는 생활입니다. 본문 4절부터 9절까지를 보면 세 가지 순행이 나옵니다.
부흥을 위한 순행(4절) 첫째로는 신앙 부흥을 위한 순행입니다. "여호사밧이 예루살렘에 거하더니 나가서 브엘세바에서부터 에브라임 산지까지 민간에 순행하며(백성들 사이에 순행하며)저희를 그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게 하고"
에스겔 선지자가 한번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어디로 데리고 가셨는데 너무나 깊고 큰 골짜기였습니다. 그 깊고 큰 골짜기에 바짝 마른 뼈들이 꽉차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에스겔은 "하나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럼 뼈들에 대해서 대언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뼈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대언을 했더니 저마다 흩어져 쌓여있던 뼈들이 서로 연락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뼈 위에 살이 오르고, 힘줄이 놓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아주 멋진 사람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숨은 쉬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아직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즉 송장이었습니다. 다시 생기에 대해서 대언하라는 말씀에 따라서 에스겔이 "주 여호와의 말씀에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사망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게 하라"고 대언을 했더니 생기가 코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들어가자 벌떡 일어났습니다. 일어난 사람들이 순식간에 눈으로 헤아릴 수 없는 군대가 되었습니다. 강력한 정병이었습니다. 환상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환상입니까?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살아있고 그 백성들이 많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 때, 즉 영적으로 볼 때는 전부 죽은 해골들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대로 두면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더니 연결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연합 운동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또 대언을 했더니 살이 오르고, 힘줄이 놓이고 가죽이 덮였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에 생기에 대해서 대언을 했더니 생기가 들어갔고 그 결과 살아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운동을 가리킵니다. 그 결과 살아서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운동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하여 큰 강력한 군대가 된 것처럼, 나라가 잘 되려면 영적으로 부흥해야 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나라는 군대가 약할 때 약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민소득이 낮을 때 나라가 약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믿음이 약해질 때 나라가 망했고, 믿음이 부흥할 때 흥했기 때문입니다.
여호사밧은 예루살렘 성 궁전 안에 그냥 앉아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만히 살펴보니 백성들의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남쪽 브엘세바에서부터 저 북쪽 에브라임까지 산지까지 갔습니다. 에브라임 산지는 국경을 넘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것은 여호사밧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신분을 보장해 줄 이가 없습니다. 위험과 고생이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민족의 살길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신앙부흥운동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그냥 평안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가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순행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나와 내 가정과 내 교회의 신앙의 부흥을 위해서, 더 나아가 이 민족의 신앙의 부흥을 위해서 안일하게 있지 맙시다. 고생과 위험을 무릅쓰고 정말 최선을 다하는 이 운동에 동참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정직한 자의 삶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부흥을 위한 순행의 삶입니다.
법도를 위한 순행(5절) 두 번째로는 "법도를 위한 순행"입니다. "또 유다 온 나라 견고한 성에 재판관을 세우되 성마다 있게 하고"
여러분, 나라는 신앙이 부흥된다고 하여도 다 잘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도가 세워지고 기강이 있어야 합니다. 즉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법은 있는데 백성들이 법을 안 지킨다거나 법 위에 사는 사람이 있어서 자기네들은 법을 안 지키면서 남들에게만 법을 지키라고 한다면 그 나라는 망하게 됩니다.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의 법을 세워야 합니까? 하나님의 법도를 세워야 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여호사밧 왕은 온 나라 견고한 성마다 재판관을 두고 재판관으로 하여금 반드시 하나님이 법대로 시와 비, 정과 사를 가려서 하나님의 정과 사를 가려서 하나님의 법으로 나라의 기강을 서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그는 전국을 순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나라,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교회가 진정으로 흥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정직한 사람이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이 귀하게 쓰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도가 통하는 교회와 나라가 되도록 합시다.
"구안록"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우찌무라라고 하는 사람이 쓴 글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헬라 나라가 저렇게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기 전에 그 나라에 아주 현명한 임금이 한 명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풍기가 너무 문란하여 간음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든지 두 눈을 뽑는다는 법령을 공포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이 두려워하며 그 법을 지키고 있는데 그만 한 사람이 잡혀 끌려왔습니다. 이제는 두 눈을 빼십시오, 하고 끌고 왔는데 보니까 하나밖에 없는 왕자였습니다. 큰일이었습니다. 왕자는 가지의 대를 이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법령을 공포해 놓았으나 눈을 못 뽑는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법을 지키겠습니까? 그러나 또 두 눈을 뽑아 버리면, 자기의 대를 이어 왕이 될 사람이 소경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할 수 없이 법대로 왕자의 눈 하나를 뽑고 한 눈은 자기 눈을 뽑아 버리고 맙니다. 백성들이 그 장면을 보고서는 그 다음부터 법을 꼭꼭 지켜서 법도가 서고 기강이 서고 나라가 흥왕 해졌습니다. 그러다 보니 헬라의 문화가 꽃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나, 가정이나. 나라라 모두 법도와 기강이 서야합니다.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곳에 번영이 있고 정직한 사회의 삶은 바로 이런 곳에 있다고 하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일꾼을 위한 순행(6-9절) 다음에는 "일꾼을 위한 순행"입니다. "재판관에게 이르되 너희는 행하는 바를 삼가라. 너희의 재판하는 것이 사람을 위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위함이니 너희가 재판할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그런즉 너희는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삼가 행하라.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불의 함도 없으시고 편벽 됨도 없으시고 뇌물을 받으심도 없으시니라. 여호사밧이 또 예루살렘에서 레위 사람과 제사장과 이스라엘 족장 중에서 사람을 세워 여호와께 속한 일과 예루살렘 거민의 모든 송사를 재판하게 하고 저희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여호와를 경외하고 충의와 성심으로 이 일을 행하라"
한마디로 이야기하면 여호사밧 왕이 전국을 순회하고 저 북왕국까지 넘어가서 백성들을 다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그 다음에는 재판장들을 세워서 법대로 다 다스리게 했는데 그래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이제는 성마다 재판장들을 찾아 다녔다는 말입니다. 친히 찾아가서 사명감을 불러 일으켜 주었습니다. "너희들의 재판하는 일은 어떤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고, 너희를 위한 것도 아니고, 여호와를 위함이요, 재판은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사명감을 가지고 하라"고 일깨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즉 경외함으로 하라고 타일렀습니다. 사람을 재판하고 있을 때 재판 받는 사람들이 재판장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처럼 재판하는 나를 하나님이 재판하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재판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무서운 줄 알고 약하다고 하여 깔보거나 강자라고 하여 아부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약자라고 동정을 베풀게 되는데 약하다고 무조건 편들지도 말고 강자라고 해서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지도 말고 정과 사, 시와 비를 분명히 가려주라는 것입니다. 내 손에 권세가 있고 내 손에 힘이 있는 이상 너희를 건드릴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여호사밧이 말했습니다. 즉 소신껏, 힘껏 일하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나 자신이 일 잘하는 일꾼 되는 것도 좋지만,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일을 잘하는 일꾼 되게 하는 것도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예수 잘 믿는 것도 좋지만 내 아들, 딸, 가족, 친구들로 하여금 예수 잘 믿도록 뒤에서 도와주는 것은 더욱 귀한 일입니다. 이것이 정직한 자의 생활 중에 순행해야 할 일입니다.
선행하는 생활(10-11절) 그리고 세 번째로는 선행, 즉 선을 행하는 생활입니다.
예방하는 선행(10절) 첫째로는 "예방하는 선행"입니다. "무릇 어느 성읍에 거한 너희 형제가 혹 피를 흘림이나 혹 율법이나 계명이나 율례나 규례를 인하여 너희에게 와서 송사하거든 저희를 경계하여 여호와께 죄를 얻지 않게 하여 너희와 너희 형제에게 진노하심이 임하지 말게 하라. 너희가 이렇게 행하면 죄가 없으리라" 여러분, 이 성경 구절은 아무리 읽어봐도 도무지 선을 긋듯이 깨달아지질 않습니다. 그래서 대개 그냥 넘어가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쉽게 설명하면 이런 뜻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즉 이렇게 하면 죄가 됩니까? 그렇게 죄 문제에 대해서 질문을 합니다. 그 다음, 법이나 규례나 계명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고 해석하는 문제에 대해서 너에게 송사하거든 즉 물어보거든 너희들은 미리 알려주어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면 저희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지 않을 것이고 너희는 책임을 면하겠다는 말입니다. "죄가 없으리라" 너희에게 죄가 없으리라는 말은 너희에게 책임이 없겠다는 말입니다. 우리말 성경이 조금 어렵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쉽게 풀어서 말씀드리면, 죄를 지은 다음에 들추어 해결하는 것도 선한 일이지만 죄 짓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 이것이 선한 것 중에 최고의 선이라는 말입니다.
발람 선지자는 아주 복 받은 선지자입니다. 왜냐하면 나귀에게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지 말라는 길을 기어이 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발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귀의 눈에 비친 천사가 죽이려고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나귀는 앞으로 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타고 가는 선지자는 그것도 못 보았습니다. 그래서 발람은 가지 않는다고 마귀를 마구 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나귀가 입을 열어 말을 했습니다. "이 미련한 놈아 네 눈에는 천사가 안 보이느냐?" 나귀가 입을 열어 책망을 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고 발람 선지가가 참 복 받은 선지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나귀가 자기 주인이 잘 못한 것을 주인에게 한 마디 하고 말았지만 동네방네 나팔불고 돌아다니지 않았습니다. 가령 그 때 발람 선지자가 나귀 대신에 앞집에 있는 김집사와 같이 갔더면 큰 변이 났을 뻔했습니다. 김집사는 환상을 보고 또 천사의 모습을 보는데 발람 선지자는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 김집사가 발람 선지자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앞집의 이집사, 뒷집의 김집사, 옆집의 박집사 모두 찾아다니면서 나팔을 불었다면 큰 일이 났을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지 막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나귀를 보십시오. 얼마나 착합니까? 발람 선지자에게만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제 아내에게 종종 충고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가만히 두고보다가 안 되겠으면 한마디 합니다. 한마디 하면 제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남자의 위신과 체통을 지키느라 "당신이 당회장 노릇 다 하시지요. 그래 내가 아무리 못났지만 당신만 못할 것 같소"하고 소리를 지릅니다. 그러면 그만 꼼짝 못하고 쑥 들어가 버립니다. 그런 식으로 내위신은 세워 놓았지만 돌아서서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옳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1년 동안 지켜보고서 참다 참다 한 소리가 왜 틀리겠습니까? 그럴 때에 혼자서 내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발람은 마귀를 통해 책망해 주셨는데, 저는 앞집의 김집사를 통해서 책망하지 않으시고 집사람을 통해서 책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제 아내는 나에게 말할망정 나가서 다른 사람에게는 한마디 안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거든 절대로 다른 데 가서 나팔을 불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본인에게 이야기해서 막아야 합니다. 즉 예방하는 것입니다.
아비멜렉이라고 하는 블레셋 왕이 아브라함의 아내를 빼앗아 갔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사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너를 막아 범죄치 못하게 하였나니"하셨습니다. 우리를 막아 범죄치 못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죄 지은 다음에 드러내서 수술하는 아픔이 있기 이전에 죄를 막아서 범죄치 않게 하는 예방이 선한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분담하는 선생(11상반절) 그 다음에는 "분담하는 선행"입니다. "여호와께서 속한 모든 일에 대제사장 아마랴가 너희를 다스리고 왕에게 속한 모든 일은 유다 지파의 어른 이스마엘의 아들 스바댜가 다스리고 레위 사람들은 너희 앞에 관리가 되리라"
이 말은 왕의 일은 왕이 하고 곧 왕에게 속한 일은 스바댜가 하고, 하나님께 속한 일은 대제사장이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즉 일을 나누어 분담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혼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남편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아내의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이것이 모여져서 하나가 될 때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분담해서 서로 하나를 이루는 가정이 행복한 가정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한 일과 왕에게 속한 일이 서로 나누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가 되어 질 때 그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성가대에서 파트가 따로 있습니다. 제 할 일만 하면 안됩니다. 다른 파트까지 참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파트 소리낼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도 목사 할 일이 있고 장로 할 일이 있습니다. 권사는 권사가 할 일만 하면 됩니다. 남의 일 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분담해서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것이 가장 선한 일이요, 결과는 성공이 되는 줄로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역행하는 선행(11하반절) 마지막으로 "힘써 행하는 일"입니다. 11절 하반절을 보게 되면 "힘써 행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바꾸어 말하면 역행하는 일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전력투구하는 일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야구를 할 때 그렇습니다. 자기편이 1:0으로 이기고 있는데 지금 9회말이라고 합시다. 상대편이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투 아웃은 되었는데 1루, 2루, 3루까지 꽉 찼습니다. 볼 카운트도 투 스트라이크, 스리볼입니다. 그러니까 한 방 맞으면 두 점이 나서질 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이기고 있던 것이 한방에 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 하나 잘 던져 스트라이크로 아웃을 시켜 버리면 이기는 것입니다. 한 방에 이기느냐 지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이럴 때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던집니다. 이것을 전력투구라고 합니다. 여기에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힘써 행하라"우리의 신앙생활은 전력투구입니다. 정직한 자는 전력투구하는 생활을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이라는 하나님의 분부하심을 따라서 여러분들은 모두 인생과 신앙을 성공하고 승리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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