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거룩한 터치(8)
마태복음 8장14-17절 / 이동원 목사
➤마태복음 8장14-17절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아내의 어머니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녀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그녀에게서 떠나고 그녀가 일어나 그들을 섬기더라. 16. 저녁이 되매 그들이 마귀 들린 많은 자들을 그분께 데려오거늘 그분께서 자신의 말씀으로 그 영들을 내쫓으시고 병든 모든 자를 고쳐 주시니 17.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7장6-8절 “6. 제자들이 그 음성을 듣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심히 두려워하더라. 7.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미국의 인류학자 중에 마가렛 미드(Margaret Mead)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돌며 현대 문명의 영향을 적게 받은 종족들을 대상으로 인류학을 연구하신 분입니다. 그중에서 뉴기니나의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에 대한 연구는 여러 가지로 중요한 교육적 시사점을 던져주었습니다. 아라페시 족과 문두구머 족은 같은 나라에 살면서도 너무도 기질이 달랐습니다. 아라페시 족은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족속임에 반하여 문두구머 족은 난폭하고 공격적인 족속이었습니다.
마가렛 미드는 무엇이 이 두 종족에게 이런 차이를 만들어 냈는가? 연구하여 그 결과를 발표하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리면 두 부족이 아이를 키우는 방법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라페시 족의 엄마들은 아이를 작은 그물모양의 가방에 넣어 앞으로 안고 다니면서 엄마와 계속 몸으로 접촉하며 눈길과 손길을 보내고 원할 때는 언제나 젖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문두구머 족은 같은 나라 멀지 않은 지역에 살면서도 아기를 넣은 바구니를 등 뒤에 매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아기가 엄마의 몸과 분리되어 아무 접촉을 할 수 없었고 엄마의 목소리나 엄마의 표정을 지켜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또한 젖을 먹일 때에도 아라페시 족은 앉아서 아기의 입에 젖꼭지가 잘 들어가도록 배려한 다음 아기가 젖을 먹는 동안 지속적으로 아기들을 토닥여주는 것을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문두구머 족의 엄마들은 서서 한쪽 팔로 아기를 안고 젖을 물리다보니 팔이 금세 아프게 마련이어서 얼른 젖을 떼고 다시 바구니에 아기를 넣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해답은 분명해진 것입니다. 아라페시 족의 평화성과 문두구머 족은 폭력성의 차이는 바로 터치의 차이였던 것입니다. 지금 들려드린 이 이야기는 본래 타파니 필드라는 분이 쓴 명저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선물-Touch”라는 책에서 소개된 내용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일상을 관찰해 보면 그분의 중요한 습관의 하나가 바로 이 ‘터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의 사회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히 사회적으로 터치가 금지된 문둥병자와 죽은 시체조차 금기를 깨고 터치하셨습니다. 왜 그분의 일상에서 터치가 필요했을까요?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거룩한 터치의 실천을 위해 우리는 먼저 그분의 인간 터치의 이유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을 터치하셨을까요?
1. 치유의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게서 터치는 치유의 거룩한 방편이었습니다. 그가 사람들을 터치할 때마다 사람들은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오늘의 본문 마태 8장14절 이하에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제자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 보니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그녀를 고치시는 장면을 기록하는 데 그 치유의 방법이 단순하게 터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14-15절을 보십시오. “14.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 그의 아내의 어머니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시고 15. 그녀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그녀에게서 떠나고 그녀가 일어나 그들을 섬기더라.”고 했습니다. 마태는 이 사건이 바로 이사야 예언의 성취임을 알리면서 17절에 이렇게 기록합니다. ➤“17.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 터치가 그분의 치유의 방편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왜 터치가 치유의 방편으로 사용되었을까요? 터치는 인격과 인격을 연결하는 접촉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예수님께 다가와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성경은 터치의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의 능력이 그에게서 이 여인에게로 흘러나가 여인을 치유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여인의 터치가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한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병자들이 동일한 터치로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동일하게 주님의 터치를 경험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치유의 기적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왜 터치의 사역이 필요합니까? 주님이 이 땅에 계시던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 스스로를 포함한 수많은 이웃들이 연역함과 질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소개한 티파니필드의 책 ‘터치’에 보면 또한 이런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2차대전 당시 이탈리아 작은 도시에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고아원이 있었는데 한 고아원은 연합군의 도움을 받아 시설도 좋았고 영양도 충분하게 공급되었는데 강 건너 편 다른 고아원은 시설도 열악하고 기본 영양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시설이 열악한 고아원이 시설이 좋았던 연합군의 도움을 받은 고아원보다 아이들의 발병율이나 사망률이 크게 낮았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 몇 학자들이 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아주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시설 안 좋은 고아원에 전쟁 중인 어느 날 자기 아이를 잃고 정신이 나간 엄마 하나가 들어와 아이들과 함께 살았는데 이 고아원의 아이들을 자기 아이로 착각하여 날마다 아이들을 번갈아 가며 안아주고 쓰다듬어 준 것이 두 고아원의 결정적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육체와 마음의 연약함에 시달리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바로 이 주님의 터치인 것입니다.
2. 두려움을 극복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또 하나의 본문인 마태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느 날 예수님을 따라 높은 산에 올랐다가 전혀 준비가 안 된 채로 소위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하며 엎드려 집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실존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정서적으로 준비 없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좋은 경험이든 나쁜 경험이든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인간의 의식 속에 소위 나름대로의 충격을 남기게 됩니다.
성경에 인생을 향한 주님의 가장 보편적인 명령의 하나가 ‘두려워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 공산권이 무너지기 전 동구에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던 분 중에 리챠드 범브랜드라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가 성경을 반입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일이 있었는데 감옥에서 두려운 맘도 들고 할일도 없고 해서 몰래 반입한 성경을 날마다 읽고 있는데 성경에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계속해서 그의 시선을 끌었다고 합니다.
옥중에서 별로 할일도 없고 해서 도대체 성경에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몇 번이나 나오나 세어 보았더니 꼭 365번이나 나오더랍니다. (이 숫자가 정확한지는 미상) 그러자 그는 무릎을 치며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다! 성경의 하나님은 나에게 1년 365일 날마다 나에게-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신다.”라고. 본문 마태복음 17장7절에도 변화산상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에게 주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7. 예수님께서 나아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이르시되, 일어나라.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매” 그리고 두려움은 끝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사실 인생의 여정에는 얼마나 많은 두려운 일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요? 그러나 전능하신 주님의 임재와 터치가 함께 하신다면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세상을 떠나신 저의 육신의 아버님의 별세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또, 터치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을 떠나가기 지난 두 달여간 아버님은 육체적으로는 많이 고통스러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 어머님과 아버님의 며느리들 그리고 아들들이 돌아가며 밤낮으로 끊임없이 마사지하고 만져 주시는 터치를 경험하시며 저희 아버님은 무엇을 느끼고 계시느냐? 한 며느리의 질문에 뜻밖에도 “너무 황홀해!”라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암과 더불어 싸우며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고 계신 분의 입술에서 나온 고백이 ‘황홀하다’였음을. 이것이 바로 터치의 위력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가족들이 모인 가운데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찬송가 470장 4절을 들으시며 고요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입관의 순간에 다시 대면한 아버님의 시신에는 두려움의 흔적은 흔적도 없었습니다. 터치가 사망의 두려움을 소멸한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지켜보며 아버지의 평생을 한 번도 부럽다고 생각한 일이 없었던 제가 갑자기 나도 죽음의 길만은 가족들의 황홀한 터치를 경험하며 아버지처럼 가고 싶다는 감동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죽음을 이기는 사랑의 터치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 변화산상에서 제자들의 두려움을 소멸시킨 것도 바로 이 터치였습니다. 터치가 왜 필요합니까?
3. 눈이 열려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큰 감동으로 주님의 터치를 경험한 사람들이 있었다면 맹인들 소위 시각 장애인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만진 자마다 눈을 떴습니다. 바디매오가 두 맹인이 눈을 떴습니다.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도 눈을 떴습니다. 그들은 모두 눈을 떠서 새 하늘 새 땅 새 세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눈을 떠서 본 가장 놀라운 분은 그들을 눈뜨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님이 보이자 그들에게 보아야 할 다른 대상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마태복음 17장에서도 제자들이 영혼의 눈을 뜨게 되자 오직 예수님 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17장8절을 보십시오. “8 그들이 눈을 들어 보니 오직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소망이고,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엠마오 길의 두 제자의 경험이 아니었습니까? 한 순간 식탁에서 그들의 눈이 열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순간의 경험을 누가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누가복음 24장30-31절입니다. “30.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음식 앞에 앉으셨을 때에 빵을 잡으셔 축복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매 31.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았으나 그분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더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말씀이 그들의 마음을 터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들의 눈이 열리는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목장은 무엇 하는 곳입니까? 저는 한마디로 우리의 목장 교회를 우리들의 영혼이 터치하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말씀과 기도 그리고 삶의 고통과 기쁨을 나누며 서로의 영혼들이 터치되는 곳입니다. 거기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의 사건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고 예수를 보게 되는 일입니다. 아직 눈이 열리지 않았다? 걱정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 우선 마음을 여십시오. 그리고 기다리십시오. 우리의 모임 중에 거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분이 곧 우리의 영혼을 터치하며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침을 바르며 묻던 맹인에게처럼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무엇이 보이느냐?”고. 아마 당신은 아직 이렇게 대답해야 할지 모릅니다. 아직은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이 보일 뿐이라”고. 그러나 한순간 당신도 마침내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오 예. 예수, 예수님이 보입니다. 그분이 너무 확실하게 보입니다.” 우리는 그 순간을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거듭남이라고 부릅니다.
노예선의 노예이었던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를 아는 함장의 도움으로 노예의 운명을 벗고 그는 노예선의 선장이 됩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가 항해하던 배가 침몰의 위기를 겪고 파선하는 와중에서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주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구출된 그는 성경을 읽는 중 그가 진실로 죄의 노예였고 영원한 세상을 보지 못하던 맹인이었음을 깨닫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이 구주되심을 깨닫고 구원을 경험한 그는 그의 구원이 전적인 은혜이었음을 깨닫고 찬송시를 작시합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입니다. 본래 이 찬송의 원제는 “놀라우신 은혜”(Amazing Grace)이고 이 찬송시의 첫 문단 마지막 두 줄의 본래 가사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나 한때 길을 잃었으나 이제 찾은바 되었도다./Was blind but now I see/나 한때 맹인이었으나 나 이제 보도다.” 그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그는 후일 이렇게 회상합니다.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영혼을 터치한 것이라고. 그 후 43년을 복음 사역에 헌신했던 그는 그의 나이 82세가 되던 해 그의 생애 마지막 무렵 기억상실증으로 고생하던 때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두 가지 변함없이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죄인이라는 것과,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주라는 사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전히 그의 영혼을 터치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생각난 듯 뉴턴 목사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아, 한 가지 더 기억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여전히 이웃들의 영혼을 터치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 터치가 우리에게도 우리 목장에도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주님의 만져 주심과 생명 주시는 복음을 위해 사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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