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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께서 당하신 3대 고난 (요 3:14-16)

에반젤(복음) 2025. 4. 12. 21:20

 

 

예수께서 당하신 3대 고난 (요 3:14-16)

 

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시간 “예수께서 당하신 3대 고난”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욥5:7에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 했습니다.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바로 화상 통증이라고 합니다. 경험해 보셨겠지만 다른 것은 아프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불에 데었을 때는 화기가 빠지기 전에는 계속하여 염증이 깊어지고 그렇게 아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욥이 고난을 불꽃에 비유했다는 것은 그의 고난이 보통 고난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재산 다 사라지고 열 자녀까지 대풍에 집이 무너져 죽고, 자기의 몸마저 시체처럼 썩어가고 영혼만 남은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많은 고난을 당했다 해도 욥의 고난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그보다 더 큰 고난을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님의 고통입니다. 많은 고난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범죄함으로 직접 간접으로 온 것이지만, 주님의 고난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듯 순전히 우리를 위한 고난이셨습니다.

 

그럼 주님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을까요?

 

1.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영혼의 고난이었습니다.

 

막15:34에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버리시렵니까?’가 아니고 “버리셨나이까” 과거형입니다. 우리 죄짐을 대신 지시고 아버지께 버리심을 받았습니다.

 

요17:5에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하셨듯, 주님은 그 영혼이 하나님과 분열된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과 같이 계셨고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과 교제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죄를 대신 지실 때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한 후 그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은 아마도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재가 끓어지고 하나님이 없는 그 심령은 그처럼 불행하기 그지없는 지옥과 같습니다.

 

창1:1-2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했을 때 그 혼돈하고 공허하고 컴컴한 깊은 흑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영적 상태입니다. 영원히 희망이 없는 절망 상태 그것이 바로 버림받은 영혼의 모습니다.

 

눅22:42에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기도하실 때, 이 기도는 십자가 고난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혹시라도 이것 때문에 아버지 영광을 가릴까? 혹은 아버지와 끊어지는 것에 대한 고통 때문이었습니다.

 

사53:4-5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했습니다.

 

고후5:21에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영육 간의 고난을 지셨습니다. 온 인류의 고난을 다 지셨으니 그 죄짐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2.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은 심적인 고통이었습니다.

 

시55:12-13에 “나를 책망하는 자는 원수가 아니라 원수일진대 내가 참았으리라 나를 대하여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나를 미워하는 자가 아니라 미워하는 자일진대 내가 그를 피하여 숨었으리라 그는 곧 너로다 나의 동료, 나의 친구요 나의 가까운 친우로다” 이 말씀은 메시야의 시편으로 가장 가까운 자에게서 배신을 당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할 때 가장 마음이 아픕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믿고 사랑해서 돈궤까지 맡겼던 제자 가룟 유다에게 배신을 당한 것입니다. 원수에게 배신당하는 거야 예상할 수 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고 귀하게 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그 고통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장 사랑하던 유다가 예수님을 은 30에 원수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유다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당할 때 다른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같이 있을 때는 감옥에도 같이 가고 죽는데도 같이 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그들이었지만 모두 예수를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승리하기 위하여 그토록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하셨건만 피곤하다고 졸고 늦었다고 졸고 주님과 함께한 자가 없었습니다. 아마 ‘제자들 다 키워 놔 봤자 아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대제사장 가야바의 뜰에서 침 뱉음을 받고 주먹으로 얻어 맞고 수염이 뜯기고 부어서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겠지만 멀직이 따라온 수제자 베드로는 자신의 신분이 탄로 나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맹세하며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여기 저주함에 대해서 예수를 저주했을까? 아니면 베드로를 알아본 여종을 저주했을까? 의견이 분분한데 학자들 중에는 여종을 저주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아무튼 3년 반이나 주야로 기른 제자들의 상태가 그랬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병 고쳐주고 위로하고 다독거려준 그 군중들이 유대인들의 선동에 의해 아무 내용도 모른 체 “저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면서 은혜를 원수로 갚을 때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주님은 그 말에 시험 들지 않았지만 아픈 것만은 사실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내가 목마르다” 하셨는데 어찌 육신적인 목마름만이겠습니까? 어머니와 요한과 갈릴리에서 온 여인 몇 사람 외에는 주님을 위로할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이 당한 고통은 육체적인 고난이었습니다.

 

요19:33-34에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했는데, 보통 사람을 칼이나 창으로 찌르면 몸에서 피가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함께 물이 나왔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영국의 의학협회 회장이 하나의 새로운 학설을 발표했습니다.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면 피가 심장 옆에 있는 한 주머니에 모이는데, 피가 그 주머니에 모이면 혈청은 가라앉고 말간 물이 남는다는 연구였습니다.

 

그 후 프랑스 학자와 이탈리아 학자가 그 학설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얼마나 열이 나고 고통스러웠으면 심장이 극심한 충격을 받아 파열되었을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고난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그뿐 아니라 그 전에도 예수님은 목요일 마지막 만찬을 떼시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잡혀서 가야바의 뜰로 끌려간 것이 약 한 밤 1시쯤 됐습니다. 거기서 밤새도록 심문을 받으시고 매를 맞으시고,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때리는 내가 누구냐? 알아 맞취 보라” 면서 온갖 모욕을 다 했습니다.

 

이처럼 밤새도록 시달림을 받고는 이른 새벽에 빌라도 앞에 끌려가서 빌라도의 심문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고 또 로마 군인들에게 끌려가서 옷 벗김을 받고 조롱 의미에서 홍포가 입혀지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씌우고 말뚝에 묶어서 쇠구슬이 달린 채직으로 40에 하나 감한 매를 때립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올라가시는데 밤새도록 심문 당하고 아침도 잡수시지 않아 가다가 넘어지고, 가다가 쓰러집니다. 그리고 올라가서 양손과 양발에 큰 못이 박히고 높이 세워졌습니다. 그러기를 오전 9시에서 오후 3시까지 6시간 동안, 주님은 마지막으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시고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 기도하시고 영혼이 떠나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우리를 위한 고통을 어떻게 다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딱 하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신 이것 때문입니다. 이 큰 구원을 이렇게 베푸셨는데 우리가 등한히 여긴다면 큰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우리 주님의 희생이 아깝지 않도록 예수 잘 믿고 우리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받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