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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 22:10-16)

에반젤(복음) 2024. 8. 7. 18:27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 22:10-16)

 

10.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11.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12.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15.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16.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각자의 행함에 따라 엄중히 갚아주는 심판의 때이고 종말이다. 대환란의 끝에 주님이 오셔서 대심판을 집행하실 것을 말한다. 행한 대로 보상이란 의인에게는 영적 축복이지만 악인에게는 심판일 것이다. 낙원과 거룩한 도시의 결합은 구원 대망이 독립적으로 전개됐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은 구속받은 자의 영원한 거처이며 생명나무는 불멸의 상징이다. 개들은 하나님의 통치에 반대하는 자들로 남창 이방인 율법주의자를(빌3:2-3) 각각 의미한다. 개는 도덕적으로 타락했거나 신앙을 떠난 비루한 인생이다. 개는 믿음이 있지만 조금 있고 교회를 사랑하지만 물고 찢는 자이다. 이들은 이미 성으로부터 추방 되어 불못에 들어간 자들인데(21:18) 재등장하는 것은 악인과 의인의 운명을 대조하는 요한의 표현방식일 뿐이다. 광명한 새벽별이란 예수께서 죄와 사망의 세력을 물리치고 빛 가운데 거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가리킨다. 다윗의 뿌리와 그의 자손은 예수의 메시야이심을 강조한 표현이다.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야에게 건 희망의 성취자다. 광명한 새벽별은 고통 당하는 독자들에게 새날을 예고함이다. 그분은 한 무리의 깨어 있는 자들의 새벽별이 되셔서 휴거 될 수 있게 하신다.’ 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보면 ‘주님의 임하심을 갈망하면서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입니다.

 

<화자의 구분>

 

본문은 요한이 간접화법으로 말한 천사의 말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즉 10-11절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는 천사의 말이고, 12-15절의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내용이 주님이 오실 때까지 열심히 하거나 경계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주님을 맞는 자세>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하셨는데, 여기서 “오리니”는 (‘엘코마이’, 오다. 임하다) 문법상 현재형으로 재림의 현재성을 강조한 표현입니다. 이 말씀은 재림의 임박감을 가지고 살라는 의미를 넘어서, 큰 상을 가지고 현재도 임하시는 주님을 갈망할 것을 시사합니다.

 

주님은 현재도 임하시고 장차 온전히 임하신다는 재림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의 자세는 더 현실적이고 실재적이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 자세는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와 같이 기름 즉 성령 충만과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재림에 대한 막연한 자세를 버리고 지금도 우리에게 큰 상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주님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주님이 속히 오시기를 갈망하며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1. 계시록을 닫지 않아야 합니다.

 

10절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앞에서 어린 양 그리스도에 의해 이미 열린 말씀이지만 인봉하지 말라는 경고는 닫지 말라는 것이다. 닫지 말라는 것은 지금도 적용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때”가 가깝기 때문인데, 이 “때”는 막1:15에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심과 같은 문법으로, 재림이 가까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때가 가까웠다는 표현은 마4:17에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신 말씀과 같은 의미입니다. 즉 이“때”는 바로 우리 곁에 이미 와 있습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같이 우리에게 다가오셨고 더욱 충만하실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 그 은혜는 우리를 온전하게 하셔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만들어 놓으실 것입니다. 마치 행2:3-4에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던 것처럼,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그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일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신학적 정설이지만, 이제 할 일은 더욱 충만함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여 주님이 이미 우리와 함께하시는데 재림이라는 낱말로 주님을 저 멀리 계신 분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도 임하셔서 우리와 함께하시고, 성령 안에서 더욱 충만히 임하시기를 원하시며, 장차 온전히 임하실 것이라는 현실감을 가지고 계시록을 열어놓고 공부하시기를 바랍니다.

 

2. 계시록의 말씀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11절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 이런 문법의 용례는 대개 변경 없이 심판을 작정하셨을 때를 가리킵니다(시6:12, 창15:16). 그런데 죄인을 복음으로 변화시켜야 할 우리들에게 그대로 두라니 문장의 서술로만 본다면 난해한 구절입니다. 계시록의 정신과도 상치되는 내용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보다 강렬하게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역설적인 문장입니다. 즉 ‘이 정도 말했으니 그대로 살고 싶으면 그대로 살고 거룩하고 싶으면 거룩하라.’는 의미입니다. 본문을 더 반영해서 표현해 보면 ‘계속 더럽게 살고 싶으면 더럽게 살고, 의롭게 살고 싶으면 의롭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 이상 더할 수 없을 만큼 알려주었고 충분히 권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달렸습니다.

 

그런 갈망이 없으면 계시록이 말씀은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5:6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한 말씀처럼 의란 갈망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안 되는 신비한 특징이 있습니다. 본문의 “의”는 원어로 ‘디카이오쉬네’, 그 의미는 신적 본질의 속성이나 하나님의 의이기도 하고, 그리스도 자신이기도 합니다(롬1:16). 이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해 온갖 의와 생명과 은사와 복락으로 가득 준비하셨어도, 예수님을 진실로 사모함이 없이는 우리 중심에 바로 모실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바로 모시려면 주님을 제일로 삼고 주님을 내 중심(中心)에 모시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심정을 가지고 섬기시기를 바랍니다. 사흘 굶으면 도둑질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마름은 그보다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그 심정으로 주님을 높이고 경외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어린이는 엄마 젖에 목숨이 달린 것을 아는지 모르지만 양보하지 않습니다. 설득도 안 됩니다. 기다려 주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심정으로 주님을 섬기지 않으면 몇 년이 가도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울 것입니다.

 

삼하 6장에 오벧에돔이 온갖 재앙을 불러오고 만지기만 해도 죽이던 두려운 법궤를 집에 모시고, 하나님께 대한 온갖 호의로서 생존전략을 벌였을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 최선을 다하여 섬기라는 것입니다. 막12:29-30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하셨듯 이것이 하나님은 섬기는 법입니다.

 

눅11:28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셨는데 여기 “오히려”는 ‘더욱’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계1:3에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했을 때 무엇을 지켜야 할지조차 몰랐지만,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 충만함을 받으라는 계시록의 골자를 알았으니, 말씀을 읽고 듣는 데 그치지 말고 진실로 경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 경건에 이르도록 연습해야 합니다.

 

12절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이 말씀은 계2:23에 두아디라 교회에 하신 약속의 말씀이기도 한데, “상”을 말씀하심은 상은 물론이요, 열심 다하여 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약속은 어린 신앙을 위한 것이라며, 난 상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식의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히11:26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한 모세처럼 주님이 상을 주시겠다면 경주자처럼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기쁨으로 그리고 겸손히 받아야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상의 약속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만, 그 상을 알고 보면 계시록 일곱 교회에 약속하신 것처럼,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님과, 아버지의 사랑과, 주님의 온전히 함께하심, 그리고 우리의 믿음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고전1:30-31). 그런 의미에서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는 약속은 신랑을 사모하는 신부로서 더욱더 거룩함을 향하여 자라가라는 독려이기도 합니다.

 

3. 구원의 완성이신 주님을 온전히 모시는 것입니다.

 

13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이 말씀은 1장과 21장에서 성부에게 돌려졌던 칭호인데, 여기서는 성자에게 돌려지고 있습니다. 즉 1장은 시작하신 일을 온전히 완성하시겠다는 성부의 의지라면, 본문에는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씀이 추가되어 완성이신 주님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 곧 끝’ 즉 ‘한 번으로 끝나는 완성’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을 온전히 모신다면 그것이 구원이요 성화요 영화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이 한 가지 일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하셨듯, 3번이나 다른 용어로 반복하심에서 완전수 3이란 점에서 주님의 임하심이 곧 완전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우리들이 완성해 가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 모두 완성해 놓으시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게 하심으로 그 완성을 누리게 하십니다.

 

창1:26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하신 것처럼 구속사의 시작과 과정과 완성은 삼위일체의 합작입니다. 그런데 믿음조차도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므로(엡2:8), 기도로서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면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의 완성이신 성령으로 늘 충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우리가 힘써 해야 할 일입니다.

 

4. 행실의 두루마기를 빠는 것입니다.

 

14절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계시록의 결론 부분에서 이 말씀을 다시 언급하심에서 계시록이 성화의 책임을 더욱 확신케 합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아직 성 밖에 있지만, 성안의 은혜 잔치에 참여하려고 몸과 마음을 씻으며 준비 중입니다. 이들은 예수 믿어 천국의 백성이지만 깨끗하게 씻음으로 은혜의 잔치에 들어가기를 희망하는 지상의 우리 성도를 묘사한 것으로 봄이 자연스럽습니다. 결국 계시록은 우리 지상 성도를 위한 책입니다.

 

왜냐하면 믿는 자는 누구든지 잔치에 들어갈 수 있지만 성막의 물두멍과 같이 씻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행2:38-40). 이스라엘 백성들도 성안 사람과 성 밖의 사람으로 구분되었습니다. 느헤미야서에도 나오듯 도성은 외적의 침략이 끊이지 않았으므로 성민이 되려면 성전과 성벽을 지키고자 하는 신앙의 용사가 아니고는 거하기를 꺼렸습니다. 이처럼 새 예루살렘의 잔치에 들어가려면 침노하는 전투적인 믿음으로 악과 싸우며 거룩함에 거해야 합니다.

 

그런데 씻지도 않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고 능력을 받겠다고 간구 위주로 나가다가 사탄에게 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무엇을 구하기 전에 마음과 행실을 씻는 일에 주력하시기를 바랍니다. 죄악은 물론 어두운 마음도 밝게 씻으세요. 대개 어두운 마음과 표정을 가진 사람들이 악한 영에 쉽게 사로잡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히12:1-2에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한 말씀과 같이 죄나 문제에 짓눌리지 말고 성경의 거울을 통해 스데반처럼 예수를 바라봄으로 천사의 얼굴처럼 빛나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의 배경으로 설명해 보면, 악성 피부병에 걸리면 성 밖으로 격리했듯이, 죄로 오염된 병든 마음으로는 은혜의 잔치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계21:26-27, 계3:5). 이미 거룩함을 입은 성도라 할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 오염되기 쉽기에 자주 씻지 않는다면 주님과 교제가 끊어질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요13:8-10). 대제사장이 여호와 앞에 나아갈 때 순금에 새긴 "여호와께 성결"(출28:36)이라고 쓴 패 관 앞에 붙였듯 생명의 풍성함과 은혜의 잔치는 성결이 아니고는 누릴 수 없습니다.

 

5. 주님 오실 때까지 잘 준비되는 것입니다.

 

15절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혹자는 성 밖이 지옥이라고 주장하지만 성 밖이 지옥이라고 쉽게 단정하기에는 많은 의문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옥에서 씻음을 받아 천성에 들어간다는 이론은 성경에 없습니다(눅16:25-26). 그리고 이들이 불신자라는 증거가 없습니다. 앞의 계21:8에서 이 죄를 가진 자들이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졌지만, 22장 본문의 이들은 흉악한 죄를 가졌지만 두루마기를 빨며 문들을 통해 성 안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고 준비 중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불신자라면 성 밖은 고사하고 지옥으로 격리됐을 텐데, 이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 안착한 새 예루살렘의 문밖에서 들어갈 준비한다는 사실입니다(계21:1-2).

 

“문들을 통하여 - 성 밖에 있으리라” 이 성은 새 예루살렘 성이요, 14절에 “문들”이라 한 것처럼 문이 단수가 아니라 복수입니다. 만약 문이 단수라면 그들은 예수를 전혀 모른 자들일 것입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오직 예수이므로 문밖에 있다면 예수도 모른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이 열둘인 천성문 밖에 있다는 점에서, 그들은 예수 믿지만 아직도 세속에 물든 채로 살아가는 육신에 속한 지상성도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알고 보면 계시록은 지상성도를 위한 책입니다. 공학적으로 볼 때도 새 예루살렘이 내려와 새 땅에 안착하여 천국의 수도가 됐다면 천성 밖도 천국의 영역입니다(계21:1-2). 그리고 두루마기를 씻어야 한다는 점에서 "문들"에 들어가는 가장 큰 조건은 거룩입니다(계21:27).

 

15절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 문자적인 의미에서 이들의 죄가 심히 흉악하다는 점에서 달리 생각하기 쉬운데, 이들이 천성에 들어갈 준비하는 자이므로 신자라는 점에서, 고쳐야 할 목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면, “개”는 이방인들처럼 본능 따라 사는 육신에 속한 자이며, “점술가”는 점술사는 물론 은사를 받아도 믿음을 세우는 데 쓰지 않고 무당처럼 실용주의적인 습관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이고, “음행하는 자들”은 음행이나 마음의 음행 그리고 세상을 사랑함도 음행이며, “우상숭배자들”은 이방신을 숭배함이나 탐심도 우상숭배입니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 내는 자”는 사기꾼은 물론 비진리나 믿음 없는 인간의 생각도 거짓에 속합니다.

 

이처럼 신자의 마음일지라도 오염되면 불신자나 악인과 같거나 알고 지은 죄라서 더 흉악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죄가 마음에 있다면 돌이켜 씻으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그 풍성한 은혜 안에 살지 못한다면 아시아 일곱 교회가 그랬던 것처럼 그 원인을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상은 주님이 속히 임하시기를 갈망하는 자들이 힘써 할 일입니다.

 

힘써야 할 이유는, 주님이 직접 인치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6절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구약 성경에 하나님께서 강조하시는 말씀마다 “여호와의 말이니라” (학2:4, 사66:22)로 끝내시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인 치시는 사인(sign)입니다.

 

6절에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계시록의 신실함을 인증한 바 있었는데, 본 절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신의 증거인(계1:2), 계시록을 직접 인증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하심은 계시록을 보증하심과 아울러, 우리에게 장려하시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1장에서 계시록이 예수님의 계시임을 밝혔는데, 계시록이 끝나는 지점에서 다시 언급하심으로 계시록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다시 한번 확증하십니다. 그리고 사인의 내용 역시 그 인증을 더욱 빛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인하신 그 내용은 어떤 것입니까?

 

1. 자신이 수여자이심을 사인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이 말씀은 갈6:11에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했던 바울의 사인이 연상됩니다. 예수님의 자기소개는 친필 사인보다 더 신뢰도가 높습니다. 그런데 1:1에서 하신 말씀을 본문에서 재언급하신 것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의 내용이 주님이 주신 계시임을 인증하심입니다. 요한이 받은 계시라는 의미에서 전통적으로 요한계시록이라 부르지만, 1:1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해야 더 정확합니다.

 

2. 교회를 위해 주셨다고 사인하셨습니다.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계시록의 수신자가 교회임을 1장에서 밝혔는데(계1:4,11) 이 역시 마지막 장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계시록의 수신처인 당시의 일곱 교회는 물론 7이라는 완전수가 의미하듯 역사 속의 모든 교회를 상징한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들을 위하여”란 수신처 외에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계시록은 교회에 유익한 책입니다. 영적 지도에 도움이 되는 책이지 세속사의 전개가 아닙니다.

 

그동안의 강해에서도 나타났듯 계시록은 성도를 온전한 자로 양육하는 신앙훈련 교재로서 의미가 큽니다. 계시록 강해는 신령한 것을 갈망하는 자들을 대상으로 소그룹에서 활용된다면 좋을 것입니다. 함께 읽으면서 설명하고 기도처로 흩어져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경건에 이르는 훈련이 없이 지식으로만 받아들인다면 귀만 높이는 결과가 올 수도 있습니다. 여러 실천 항목이 있지만 초대교회가 실천했던 하루에 세 번의 기도생활을 필수로 병행하길 바랍니다.

 

3. 경로대로 전달된 정상적인 책임을 사인하셨습니다.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노라” 예수님의 사자는 천사들, 요한, 그리고 각 교회의 사자들에게 보내졌습니다. 이 경로 역시 다른 성경과 같은 정경으로서의 신뢰도를 줍니다. 그런데 바로 천하에 공포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지막 수신자가 주의 사자들이었던 것은 해석이 필요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성경과 교리적 기초가 있는 주의 종들의 손을 거쳐 가르쳐져야 하기 때문입니다(말2:7). 주님이 교회의 사자들을 믿고 계시록을 주셨다는 점에서, 당시 주의 일군들은 계시록을 이해할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구속사적 관점 성경기자나 히브리적 관점에서 기본적으로 성경을 아는 분이라면, 계시록은 활짝 열린 책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수여하실 때 해석된 형태로 주지 않으셔서 혹시 견해 차이가 있을지라도, 사도들이 물려준 성경 및 정통신앙의 테두리를 떠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본질에는 일치를, 비본질에는 자유(관용)를, 그리고 모든 일에는 자비를” 이라고 했던 루터교 신학자 루퍼투스 멜데니우스의 라틴어 경구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이 원칙을 무시하고 정통신앙의 기본조차 없는 사이비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용해 먹다가 얼마나 본질적으로 잘못되고 있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경로는 지금도 참고해야 합니다. 기본조차 없는 이들이 잘못 해석하는 일이 없도록 복음을 아는 주의 종들을 통하여 취급되고 전파되어야 합니다. 이 교재 역시 강단이나 방송 등으로 전파됨보다 교회의 소그룹에서 진지하게 활용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4. 저자가 메시야시라고 사인하셨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예수님은 족보상 다윗의 자손일 뿐 아니라 본질적인 면으로는 다윗의 뿌리입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했는데 어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이 되겠습니까?(마22:41-46) 예수님은 성자의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예언대로 오신 다윗의 자손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라는 자기소개는 자신이 메시야이심을 안팎으로 입증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확실한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계시록을 확증하셨다는 점에서 계시록의 정경성은 더욱 확실하다 하겠습니다.

 

5. 악용하지 못하게 사인하셨습니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셔서, 메시야의 표적을 보이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으나 우리를 위해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이 주님이 계시록에 이처럼 사인하셨으므로 그 누구도 계시록의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는 자칭 메시야가 많은데 그들은 다윗의 뿌리나 그 자손과는 상관조차 없는 자들입니다. 계시록에 나타난 예수가 자신이라고 주장한다면 본 절과 같이 자신이 다윗의 뿌리와 자손임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다윗의 혈통은 많지만 그렇다고 다 메시야는 아닙니다. 성경의 수백 가지의 예언에 부합하고 입증되고 하나라도 맞지 않으면 가짜입니다.

 

6. 빛 가운데로 인도할 책이라고 사인하셨습니다.

 

“곧 광명한 새벽 별이라 하시더라.” 새벽 별은 메시야를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기에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는 것도 메시야를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깊은 밤에 새날을 알리는 새벽별처럼 예수님은 죄인의 소망이요 인류의 소망입니다. 그런데 그냥 새벽 별이 아니라 대낮처럼 밝혀주시는 “광명한 새벽 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처럼 큰 소망이 넘칠 것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에 사인하시면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계시록을 받아들이는 성도들에게 이런 결과가 넘칠 것을 시사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얼핏 인봉이 된 듯하나 샛별이 떠오르듯 알게 된다는 성경의 원리도 그렇고(벧후1:19), 예수로 말미암아 어둠을 벗고 천국의 은혜 가운데 살도록 이끌어 준다는 점에서도 그러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셨듯, 계시록은 다른 성경과 같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이 오실 때까지 몸과 마음을 드려 해야 할 일은 더욱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 받아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차도록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 위대한 비전을 품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실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부족함이 없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