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로 말씀을 지키라 (계 3:7-13)
7.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9.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11.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13.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열린 문이란 교회적으로는 선교의 문을 개인적으로는 천국의 문이다. 열린 문은 교회의 부흥의 문을 열어놓으시겠다는 뜻이다. 열린 문은 복음 전파의 기회와 듣고자 하는 마음을 열어놓으시겠다는 것이다. 시험이 때는 로마 세계 전역이나 온 세계에 임할 공식적인 박해를 말한다. 7년 대 환난을 말하는데 시기는 알 수 없다. 시험의 때로 인해 전환난설과 후환난설로 나뉜다. 주후 1750~1905의 빌라델비아 교회시대에도 환난이 있을 것이나 피하게 하심을 의미한다. 진정한 신자에게는 계 6~10장까지의 세상 심판이 오기 전에 구하여 내실 것이다. 시험의 때가 환난 전 휴거인가 영적 보호인가 환란 중의 보호인가 아니면 역사적 사실인가 논란이 있다.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천년시대가 지나 아마겟돈 전쟁 때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항상 이방세계를 뜻한다. 이들은 세상 사람을 의미하며 이단자들도 시험을 받는다. 그리스도의 보호는 신자들을 데려감으로가 아니고 마귀 세력을 이길 수 있는 영적 능력을 제공함으로써다.’ 등이 있습니다.
☞ 복음으로 보면 ‘경건의 도를 인내로서 실천한 결과’를 보여줍니다.
<역사적 배경>
빌라델비아는 사데 동남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고원 도시로 포도 생산지로도 유명하였고, 서머나와 리디아 왕국으로부터 동방으로 가기 위해 제일 먼저 들러야 하는 도시로 동방의 관문이라 일컬어지기도 했습니다. 농업과 상업이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를 누렸으나 지진의 피해가 심했습니다. 또한 많은 신전과 종교적 행사가 있어 A.D.5세기에는 작은 아테네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는 이교 신전과 종교 행사가 많고 2,3장에 나타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가 위치한 지역 중 가장 짧은 역사였음에도(B. C. 159-138) 아시아가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짓밟힐 때 유일한 기독교의 보루(堡壘)로서 신앙적인 면에서 가장 칭찬을 받은 지역입니다. 빌라델비아는 “형제 사랑”이라는 의미로 암미아(Ammia)라는 여선지자가 이 교회를 관할하면서(A.D. 100-160) 큰 부흥을 이루었다고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교회의 성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 개종하는 역사도 있었으나 반면에 교회를 가장 반대하는 자들 역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위치한 카타케카우메네는 지진이 많던 활화산 지대로 모두 이주하고 미약한 사람들만 남았지만 마음의 옥토만은 간직하고 있었던 그들이 곧 빌라델비아 교인들입니다. 즉 그곳에는 조직적인 사탄의 회가 있어 심한 박해 가운데, 교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약했고, 사도적인 목자나 능력이나 은사 같은 뛰어난 지도자도 없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전부로 알고 인내로서 경외의 삶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를 받았습니다(눅8:15).
<영적 상태>
7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빌라델비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은 닫힌 문들을 활짝 열어 주실 긍정적인 모습만 보입니다. 이 문은 약1:17에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한 것같이, 온갖 아름다운 것을 허락하시는 하늘의 문입니다. 행13:22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거룩하고 진실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예수를 보내주신 것처럼, 인내의 믿음으로 계속해 나가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칭찬과 책망>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없고 칭찬만 받은 가장 모범적인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하나님의 엄위하신 징계 때문이 아니라 자원하여 거룩함에 이르는 경건의 도를 앞장서서 인내로서 실천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삶처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 인내로서 지키는 옥토와 같은(눅8:15), 믿음이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은 빌라델비아 교회는 책망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교회는 아닙니다. 11-12절에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이기는 자는” 이라 하셨듯, “속히” 오시는 주님을 강조하심을 보면 더 온전한 임재를 향해 나가야 하며, “이기는 자”라 하셨듯 게으름이나 낙심이나 육신의 생각 등 악의 도전을 이겨나가야 하며, 아직 약속하신 것이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아직은 진행 중이기 때문입니다.
<장점>
8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하심과 10절의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에 빌라델비아 교회의 옥토 같은 믿음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행위”를 언급하심에서 실천하는 믿음이 있었고, “작은 능력”에서 예수를 주로 믿을 정도의 겨자씨로도 표현되는 믿음이었으며, 혹은 특출한 지도자가 없어 말씀도 기초 교리 정도에 머무르는 수준이었지만, 그들은 받은 말씀대로 하나님을 섬기는 도를 생명같이 귀히 여기며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즉 자세가 훌륭한 것이지 다 이룬 것은 아니며, 다 이루었다 해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빌3:15).
<약속>
9절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10절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11절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등인데, 여기서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얼마나 진리에 서서 주님을 사랑했는지 나타나지만 빌라델비아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더욱 인내로서 계속하는 것입니다.
끝까지 인내로서 경건의 도를 실천할 때 주시는 은혜는 무엇일까요?
1. 하늘 문을 열어 주십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여기 열린 문에 대해서 여러 견해가 있지만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문은 먼저 하늘의 문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도 하늘 문이 열렸습니다(마3:16-17). 이처럼 주님의 본을 받아 자기 십자가 지고 전진하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하늘의 문은 교통의 문, 천국의 문, 형통의 문, 전도의 문 등도 포함되는 문입니다. 하늘 문이 열리면 온갖 은혜와 복락과 부흥과 전도와 선교와 형통의 문까지도 열립니다(신28:12).
2. 불가능한 일이 이루어집니다.
9절 “보라 사탄의 회당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초대교회를 가장 핍박했던 집단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이름을 독차지하거나 부르지만 영적 실상은 하나님이 내신 교회를 박해하는 사단의 회였습니다. 그들 중 몇 사람이 교회 앞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시험을 이기며 끝까지 믿음으로 전진하면 꿈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먼저는 사탄의 회당같이 나를 가장 괴롭힌 자신의 완악한 마음부터 주 앞에 순복합니다. 그리고 체험의 유무를 떠나 말씀에 굳게 서서 나가면 그것이 믿음의 은사가 되어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릅니다(막11:22-23). “기도” 한 가지 끝까지 붙들고 행하다 성령의 대부흥을 일으킨 일군들도 있습니다. 먼저 잘할 수 있는 것부터 붙들고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입니다.
3. 사랑을 체험하게 해주십니다.
9절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처럼 불가능한 일을 이루어 주심으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을 표현하십니다. 주님의 기쁨이 된다면 우리의 소원의 성취도 예상할 수 있지만, 그보다 성령으로 부어주시는 항구적 임재의 경험이 아버지의 최고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평강을 위해서는 신비보다 말씀을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4. 시험을 면제하여 주십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여기 “인내의 말씀”은 약1:3-4에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한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시험을 면제하시는 이유는 징계가 필요 없이 자원하여 경건을 실천하는 순종하는 백성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이 시험의 때에 대해서 "장차"라는 낱말을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종말에 있을 7년 대환난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렇다면 주후 1세기의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상관이 없는 일입니다. 이 시험은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질 진리의 차원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빌라델비아 교인들과 같은 사람들이 면제받는 시험이라면, 빌라빌라델비아 교인들이 순종하는 자녀가 되어 자원하여 투철한 경건 생활을 했다는 점에서, 연단과 징계의 환난입니다. 그 증거가 “땅에 거하는 자들들을 시험할 때”라 땅에 거하는 자들이란, 계시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문구로 그 용례로 볼 때 아직 육에 속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계7:9-17의 흰옷을 입은 셀 수 없는 무리가 큰 환난에서 나왔듯, 아직 육신에 속한 자들이 환난의 연단을 받는데, 자발적으로 순종한 영에 속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어린양이 어디로 가든지 순종한 무리인 십사만 사천과 같이 이 시험을 면제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면제하신다는 시험은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련하는 징계와 채찍과 같은 시험을 면제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과정을 훌륭히 순종했거나 통과하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노새와 같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5. 승리를 주십니다.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여기서 면류관은 승리자의 면류관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의 죽도록 충성하는 신앙이 그들의 면류관이었습니다. 여기 “네가 가진 것”이란 말씀을 인내로서 지키는 우직한 믿음 말고는 없습니다. 변함없이 예수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핵심 중의 핵심이 우리를 영적 깊이 들어가게 합니다. 다른 교회처럼 사도 바울이나 요한 같은 담임목사가 있음도 아니었고 특별한 은사의 도움도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도를 인내로서 실천하는 승리적 믿음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6. 가장 귀한 것을 주십니다.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속히 오심은 재림 혹은 지금 성령으로 임하시는 충만하신 임재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굳게 잡으라 하셨듯, 빌라델비아 교회가 할 일은 현재의 믿음을 계속하고 체질화하고 거기에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 더욱 크신 임재로서 함께 하시겠다는 뜻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의 최고의 장점은 실천하는 우직한 믿음으로,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는 최고의 은사요, 최고의 면류관이요, 그들을 신앙의 영웅으로 만든 원인이었습니다.
다른 은사가 있다고 해도 결국 그 모두는 우리를 하나님의 말씀에 세워 행하게 하는 돕는 역할입니다(요20:30-31). 그런 의미에서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장 귀한 신앙의 본질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흥미롭고 화려한 설교나 이적도 좋지만 한 말씀이라도 온전히 내 신앙으로 정착되도록 실천함에 관심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 계속하여 도전하고 반복함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체질화하시기를 바랍니다.
7. 크고 귀히 써주십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는 특별한 지적이 없는데 무엇을 이기라는 걸까요? 앞 절에서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하신 말씀에 힌트가 있습니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힘써야 할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 하던 것을 더욱 견고히 계속하는 것입니다. 마치 나무가 위치를 떠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더욱 견고해져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솔로몬 성전의 야긴과 보아스처럼, 초대교회의 기둥같이 여기던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처럼(갈2:9),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같이 귀하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예루살렘 교회와 같이 세계복음화의 주요기지가 되고, 사탄의 세력을 공략하는 최고의 요새가 될 것입니다.
1984년 6월 미국의 피닉스 애리조나에서 미국 장로교 총회가 열려 자기들이 선교한 나라 중에 가장 성공적인 나라가 한국이었는데 그 이유에 대한 주제 발표가 있었는데, 그중에 가장 호소력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새벽기도 운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 물질로서 참여하는 십일조 운동이나 금주나 금연 같은 절제운동도 한국교회의 장점이지 비판받을 일이 아닙니다. 백 마디의 말보다 실천입니다.
8. 하나님께 인정과 은혜를 받게 됩니다.
12절 “이기는 자는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약속으로 3가지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3은 완전한 은혜를, 이름은 그 본질을 의미하는 용어로 볼 때 그만큼 인정해 주시고 거기에 맞는 은혜를 누리게 하실 것을 시사합니다. 마치 다윗을 왕으로 세울 때처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시2:7) 하심과 같습니다.
성경의 용례로 살펴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인은 ‘너는 내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3:17) 인정하심과 같고, 새 예루살렘의 이름은 ‘너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신부’, 그리고 예수님의 새 이름은 그동안 맛볼 수 없었던 예수 안의 놀랍고 새로운 은혜를 암시합니다. 달리 표현하면 온전히 함께하신 임재의 복입니다(벧전4:12-14). 여기서 임재의 은혜란 순교자에게 넘쳤던 평안과 생명과 빛나는 광채와 같은 것입니다. 빌라델비아 교인들은 산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마5:10-12).
이 약속을 받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신실한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7절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주님이 “거룩하고 진실”하시다는 것은 약속의 신실성을 암시합니다. 행13:22에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그 약속대로 예수를 보내주신 것과 같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지만 한 번이라도 끊기거나 막힌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스도의 예표가 된 다윗 역시 약속하신 대로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다윗보다 더 큰 권세를 가지셨기에 빌라델비아 교회처럼 그렇게 믿음으로만 나간다면 그 앞에 어떤 장애가 있어도 열리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우직할 만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이 신실한 약속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계속하시기를 바랍니다.
2. 비전을 보아야 합니다.
8절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빌라델비아 교회의 비전을 말씀합니다. 갈6:7-8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한 대로 믿음으로 심고 심는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는 희망이 넘칩니다. 그만큼 행함 있는 믿음은 비전이 큽니다. 성경암송의 비전도 불을 토하는 부흥사를 만들어냅니다. 인내로서 순종하는 옥토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3. 행함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들이 받은 달란트는 적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행함 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눅11:28에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11:28) 하셨듯, 읽고 듣는 것도 복되지만 지키는 것이 더욱 복이 됩니다. 그래서 제자훈련과 같은 신앙훈련이 복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부족함이 없도록 온전히 주님을 배우시고 닮아가시기를 바랍니다.
4. 헌신적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10절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여기서 인내란 끝까지 계속하는 믿음입니다. 기도와 감사를 쉬지 않았던 다니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체질화되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주님과 함께 죽는데도 함께 가겠다고 다짐한 것은 거짓이 아니었지만, 주님이 잡히실 때 주님을 부인하거나 도망친 것은 기도의 부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을 받은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도들은 주님도 고난을 당하셨는데 우리야 당연한 것이라고 여기며(마10:24-25), 예수의 이름 때문에 박해당함을 합당하게 여겼습니다(행5:41). 기도 생활 하나가 달라지니 이렇게 변했습니다. 제자 훈련의 성과가 이렇게 위대합니다. 이걸 볼 때 정상을 달리는 영적생활을 위해서는 헌신적인 기도가 필수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그 믿음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11절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겨야 할 가장 큰 시험은 그 믿음이 게을러지거나 변질되거나 중단되는 것입니다. 결국 영적인 싸움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신 것처럼, 혹은 미갈이 여호와 앞에서 춤추는 다윗에게 수모를 준 것처럼 사탄이 우리의 얼굴에 재를 뿌리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기쁨을 잃지 말고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경배하시기를 바랍니다.
사58:12에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하신 대로 한국교회의 꺼진 불을 다시 일으키고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는 역사의 주인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그 무엇보다 빌라델비아교회나 다니엘처럼 우직한 마음으로 하루 3번씩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바로 실천에 그 비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뿌리가 아름다우면 나무는 아름다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가장 작고 가장 가난하고 특별한 은사의 도움도 없었으나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다가 가장 큰 믿음, 가장 큰 교회, 그리고 가장 큰 복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처럼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며 능력을 구하십시다. 우리 모두 빌라델비아교회를 바라보며 가슴 부푼 비전 가지고 하나님 경외함을 실천하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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