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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의 결론 (계 22:16-21)

에반젤(복음) 2024. 8. 7. 18:29

 

 

성령과 신부의 초청 (계 22:17)

 

17.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신부는 하늘로 올라갔던 교회나 성도이고 성령은 그 교회를 시작하셨던 분이다. 성령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던 영이시고 신부는 어린 양의 아내이다. 성령이 주는 영감을 신부가 발생한다는 점에서 성령과 신부는 한 목소리이다. “오라”는 명령법이 3번이나 사용되었듯 역사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초청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이 초대는 아직도 예수를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을 향한 것이다. 값이 없다고 생명수를 아무에게나 억지로 주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는 이미 늦지만 그 시간은 아직 이르지 않았다. 목마름이란 하나님 나라 및 의에 대한 동경으로 이해될 수 있다. 오라는 초청은 당연히 불신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 강조된 것은 값없이 주신다는 것으로 이미 지불하셨으므로 우리는 그에게로 가서 마시기만 하면 된다.’ 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보면 ‘천국잔치 초대와 성령과 동역함'에 대한 것입니다.

 

<성령과 신부의 초청>

 

1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요한이 간접화법으로 전하는 성령과 신부의 초청입니다. 초청의 내용으로 보아 은혜의 잔치에 대한 초청으로, 초청하는 대상은 누구든지 입니다. 눅14:23에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하셨고, 요7:37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하신 말씀이 연상됩니다.

 

이처럼 은혜의 천국잔치는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와 같이 신불신을 막론한 모두에 대한 초청입니다. 즉 불신자들은 은혜의 역사 앞에 마음의 문을 열고 진실로 예수를 믿게 되고, 성도들은 온전히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음을 통회하면서 참된 행함의 믿음으로 바뀌게 됩니다. 놀라운 것은 초대교회에서 보듯 은혜받는 즉시로 예수를 위해 핍박도 기뻐할 믿음으로 발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잔치는 교회와 하나님 나라의 흥망성쇠가 결정되는 중요한 잔치입니다.

 

<성령과 동역하는 신부>

 

7절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이 초청은 요7:37-38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신 말씀을 연상시킵니다. 특이한 점은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에서 보듯 신부의 말까지도 묶어서 “말씀”이라고 한 점입니다. 이것은 신부가 성령과 동역하고 있음을 전제한 표현입니다. 즉 사역함에 성령은 신부를 필요로 하고 신부도 성령의 도우심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즉 신부의 기도를 통하여 성령이 나타나시고 신부가 전하는 말씀을 통하여 성령의 감동과 생명의 풍성함이 흘러넘칩니다.

 

그리고 성령 곁에 신부가 등장함은 성령의 동역자가 되려면 신부의 수준에 이르러야 함을 보여줍니다. 고전3:9에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했고, 고후6:1에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한다고 했듯, 성령과 동역하려면 행1:8의 말씀처럼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고, 계19:14에 나타나듯 신부의 수준에 이른 자만이, 백마 탄 하늘 군대가 되어 주님을 따를 수 있으며, 막16:20에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한 것처럼 성령께서 더불어 역사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과 천국잔치>

 

한편 성령과 신부의 초청은 계시록에로의 초청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치 ‘율법과 선지자’가 구약 성경의 별명이듯이, ‘성령과 신부’는 계시록의 별명입니다. 계시록의 두 축과 같이 계시록이 강조하는 것은 성령을 받게 하는 것이고, 계시록의 목적은 성령의 은혜로 신부를 탄생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했듯, 계시록은 천국의 잔치에 들어가는 좋은 안내서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잔치에 들어가는 법>

 

17절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여기에 약 3가지의 점진성이 계시됩니다. “듣는” -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마치 일곱 나팔재앙처럼 충분한 말씀의 감화가 필요합니다. “목마른” - 즉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사모하는 갈망이 생겨나면 일곱 대접재앙에서 몸과 마음을 드려 섬김으로 성령의 충만함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또 원하는” - 여기 “또”는 접속사라기보다 반복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즉 은혜의 맛을 본 자는 또 주님을 갈망하게 되어, 계속하여 주님을 경외하고 교제의 삶이 이루어집니다.

 

<에플레스데산>

 

엡5:18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서 그 반복성을 봅니다. 여기 '충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에플레스데산'의 부정 과거 수동태로 일시적 충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충만함을 유지하려면 그 반복성이 필요합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오순절과 같은 충만함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범적인 교회생활과 아울러 성경을 읽으므로 하나님을 경외할 그 동기를 끊임없이 제공해야 합니다. 흔들림 없이 은혜 가운데 살려면 성경을 읽음이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율법을 등사하여 곁에 두고 읽듯이 이처럼 권능을 유지하는 비밀은 성경에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은혜의 풍성한 자리에 들어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1. 복음을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바울이 에베소 지방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세례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았지만 성령이 계심을 듣지 못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행19:1-2).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주 예수를 전하고 믿는 그들에게 성령세례의 상징인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안수하매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였는데 모두 12사람쯤 되었습니다. 이 표적을 통하여 예수 믿음으로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진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적들은 어떤 메시지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주신 이적들이 많다는 점에서 반드시 방언과 예언을 받아야만 성령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은사를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은 성경 기록적인 표적은 없지만 고전12:11에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하신 것처럼,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나눠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3. 은혜를 갈망함에 이르러야 합니다.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앞에서 설명했듯 말씀에서 감화 감동 충만하게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목말라 사모하는 갈망이 생겨납니다. 이 갈망함이 있을 때 비로소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김으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성경 읽기와 설교와 앞선 성도들의 간증을 통하여 주를 향한 갈망을 일으켜야 합니다. 이것이 목회자가 해야 할 동기부여입니다. 그렇게 갈급한 사람만이 충만하신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시107:9, 시107:9).

 

4. 경외하는 삶이 정착되어야 합니다.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여기 “또‘를 접속사로 볼 것인지, 거듭 원하는 반복적인 의미로 볼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이런 표현이 여기만 있거나, 앞의 목마른 자와 의미가 중복된다는 점, 그리고 점진적인 문맥의 흐름을 참고할 때 거듭 원하는 반복적인 의미로 해석함이 옳습니다.

 

예수 안에 성령이 계시기에 믿어 예수를 영접한 자의 마음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겨자씨와 같아서 더욱 생명 안에서 자라야 하고, 그 충만함을 지속해서 유지해야 하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은 이제 몸과 마음을 드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날까지 호흡을 멈추지 않듯 하나님을 모시고 경외하는 삶은 계속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제일가는 목적이요, 구원받은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성령과 동역하는 하나님의 동역자가 나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눅12:49) 하신 예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동역자야말로 하나님의 기쁨이요, 가장 귀하게 쓰임 받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려 온전히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며 귀하게 쓰임 받는 가장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해석에 대한 경고 (계 22:18-21)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묵시란 본 사람만의 비밀이므로 그 진실성을 의심받기 쉬우므로 보서는 절대적인 진실성을 요한 자신이 증언하고 있다. 더하는 자는 광신론적인 교리와 신앙을 더하는 자요 제하는 자는 성경의 영감을 무너뜨려 성경을 도덕적 예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자다. 더하면 본서에서 밝힌 불신자들이 맞을 고난을 그에게 더하고 제하면 신자가 받을 영생의 특권을 제한다. 하나님의 예언은 변동할 수 없는 고정된 것으로 첨삭하는 범죄의 형벌도 고정되어 있다. 이 보증의 표현 방식은 예언서에는 이례적으로 예언은 계시의 종결에 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계시록의 다른 부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개찬된 것으로 보인다. 이 기록을 가필된 것으로 본다면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사실을 부인하는 것으로 이 경고를 무시하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이 가해질 것이다.’ 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보면 ‘계시록 해석에 대한 경고와 아울러 힌트’를 보여줍니다.

 

<계시록에 대한 경고>

 

18-19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시록의 경고는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은 가장 오해하기 쉬운 대상인 듣는 청중들이 마음대로 상상하는 등의 그 부작용을 차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교회는 성경을 읽어서 전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계시록은 다른 성경과는 달리 상징적인 표현이 많아서 들리는 대로 잘못된 상상을 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예방하는 법은 가르치는 자가 충분히 이해하여 전하든지, 아니면 잘 해석된 자료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계시록 해석의 힌트>

 

18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이처럼 계시록의 겉모습은 두려운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겉모양만 보고 함부로 상상한다면 은혜는커녕 두려움의 재앙만 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두려움의 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19절에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한 말씀에서 보듯 계시록의 내용은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는 은혜의 책임을 알려줍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그동안의 강해에서 그 은혜와 지복성을 충분히 입증한 바입니다.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가감해서는 안 될 이유는?

 

1. 계시록이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18절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라 하셨듯, 두루마리는 성경을 일컫는 대명사입니다. 주님께서 계시록을 “두루마리”라 일컬으심으로 계시록의 정경성을 다시 한 번 보증하고 계십니다. 히2:2에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한 말씀처럼 성경은 일점일획이라도 변경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엡3:5에 “이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성령으로 나타내신 것 같이 다른 세대에서는 사람의 아들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셨” 다는 말씀과 같이 성경은 구원을 얻음에 충분한 말씀이기 때문에 더 이상 기록되지 않습니다. 즉 내용을 추가는 물론 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성경 기록의 종결성입니다. 이처럼 계시록을 가감해선 안 될 것은 주님이 내시고 인증하신 성경이기 때문입니다.

 

2. 유익한 예언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의 말씀” 여기 “예언”에 대해서 오해하는 이유가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1:1) 등의 의미를 몰라서입니다.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성령의 임하심과 재림 등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데, 자연계와 인류가 다 죽는 세속사의 전개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만큼 절대성을 세속사에 부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전14:3-4에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것이요 -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한 것처럼, 여기 예언(豫言)이 ‘미리 예’를 쓰고 있지만 계시록의 예언은 신앙을 세워주는 예언의 은사와 같은 것입니다(딤전1:18-19). 우리는 그걸 그동안 계시록 공부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은 유익한 말씀이므로 가감해서는 안 됩니다.

 

3. 가감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18-19절 “ 만일 누구든지 - 만일 누구든지” 2번이나 “누구든지” 라는 말씀이 반복되는 것은 강조형입니다. 이 말씀은 ‘누구든지’라는 보편적인 의미를 넘어 사람들에 의해 가감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시시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란 경중해석법(즉 가벼운 일에 적용된 말씀이라면 그렇지 않은 일은 당연히 적용된다는 해석)으로 볼 때 듣는 자에게 그렇다면 전하는 자는 더욱 그렇다는 의미입니다. 약3:1에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했듯이, 이처럼 계시록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가 모두 조심해야 할 것은 가감입니다.

 

주님께서 이 말씀으로 경고하셨다는 것은 그런 실수를 충분히 저지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계획적으로 가감하지는 않겠지만 실수할 만한 유형은 많습니다. 예를 들면, 난해한 부분이 많아서 일부분만 가지고 해석하려 든다든지, 상징적으로 묘사된 것을 성경의 힌트나 복음으로 접근하지 않고 느낌에 따라 상상으로 해석한다든지, 해석하기 어렵다고 인봉 된 말씀으로 취급한다든지, 고전14:3-4의 예언과 같이 계시록도 다른 성경과 같이 우리의 신앙을 세워나가는 예언인 줄 알지 못하고, ‘미리 예(豫)’에 집착하여 세속사의 전개로만 해석한다든지... 이 모든 것이 가감에 해당합니다.

 

4. 느낌으로 접근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을 언급한 이유가 또 있습니다. 당시 교회는 회중 앞에서 성경을 낭독하는 습관이 있었는데 계시록의 특성상 청중들에게 문자 그대로 다가올 때 내용 자체가 두려움을 유발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전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은 표면적인 것부터 듣기 쉽기 때문에 표현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낍니다. 계시록은 각종 상징으로 쓰였기에 깊이 알지 못할 때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모두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계시록을 느낌으로 이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5. 계시록의 복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18-19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 말씀에 해석의 힌트가 있습니다.

 

여기 “더하면” 더한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인간의 상상과 같은 것이라면, “제하여 버리면”은 계시록의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더하여 상상으로 접근하면 재앙으로 느껴져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제하여 버린다면 계시록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의 비밀을 알지 못하므로 그 복된 은혜를 누릴 수 없게 됩니다. 이 말씀이 주는 계시록 해석의 원리는 상징을 문자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상징은 상징으로 해석하라는 교훈입니다.

 

반면 가감하지 않고 올바로 해석했을 때 그 내용은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게 하는 진리라는 힌트를 줍니다. 가감하여 자기 추측을 더하면 말세에 나타날 비극적인 세속사로 밖에는 보이지 않지만, 올바로 해석했을 때 계시록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 영혼을 하나님이 마련하신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게 하는 위대한 복음의 말씀으로 다가옵니다.

 

6. 해석이 잘 됐는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시금석이 됩니다.

 

18-19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처럼 계시록 해석을 잘못한다면 이런 결과가 올 것이라는 점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이들이 자신의 추측을 더하므로 기록된 말씀들이 복의 책이 아닌 견딜 수 없는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복의 책이라고 말하지만 내용을 알지 못해 알송달송할 뿐 아니라 도무지 복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계시록에서 큰 시험의 때가 오므로 깨어서 기도하자는 교훈 말고는 건질만한 교훈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발 빠른 사람들은 환난시대를 극복하자면서 요르단의 페트라성에 양식을 사 모으거나 외딴 곳에 땅을 사고 식량을 모으거나 그럴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옵1:3에 “바위 틈에 거주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내리리라”는 말씀을 생각할 때 피할 곳은 하나님이시지 페트라가 아닙니다. 그들은 추측을 더함으로 어떻게 그 불같은 환난에서 살아날지 공포와 실망과 난감과 불안과 염려와 불확실과 가혹함과 보장도 희미하고 믿음 자체가 흔들리거나 무너지는 등 이미 그 재앙을 마음에서 받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착각하지 말고 다시 보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계시록의 해석은 교훈적이거나 결론적인 것들은 대부분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할 부분들이고, 상징이나 비유적인 내용들은 상징이나 비유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런데 계시록의 상징이나 비유가 독창적인 것 같으나 결코 독창적이지 않고 언제나 성경의 용례에서 발견되듯이 항상 그 기본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상징이란 어떤 진리를 묘사하는 것이기에, 그 묘사한 내용을 모아서 어떤 진리를 나타내는지 살펴야 합니다.

 

가령 하나를 설명하는데 100가지의 묘사가 있다면 그중에 하나만 통일성에서 벗어나도 정답이 아닙니다. 즉 그런 묘사라는 점에서 계시록에서 한 낱말이라도 터치되지 못하고 넘어간다면 계시록을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가감하지 말라는 경고는 중요한 해석의 비밀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같은 계속되는 계시록의 경고는 ‘표면적인 것만 보고 착각하지 말라.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하는 진리니 다시 보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가 경고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5-16), 요한이 쓴 계시록이 바로 그런 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계시록을 성경으로 믿는다면 정통신앙의 틀을 떠나지 말고, 구속사적인 관점과 상징을 상징으로 이해함으로 우리 주님을 섬기는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진리로 풍성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재림의 선언과 기도 (계 22:20-21)

 

20.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1.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다양한 견해들>

 

여기에 대한 견해를 보면 ‘본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으로 시작하고 또 그와 같은 말씀으로 종결한다. 주의 재림은 영원한 경륜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실이며 오리라는 현재형으로 볼 때 그 동작이 시작된 것을 뜻한다. 요한은 계시를 통해 2천 년 동안 교회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두려움과 실의에 빠져 있었는데 새 하늘과 새 땅을 본 뒤에 감격하여 주님이 오시기를 외친다. 요한은 기쁨과 고대하는 심정으로 주님이 임하시기를 외친다. 묵시문학에서 인사는 통례가 아니지만 인사한 것은 본서가 서신형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본서의 축도는 롬 16:20의 문장과 흡사하며 대상이 모든 자에게 변한 것뿐이다. 결문의 인사는 고대서신에서 그러하듯 친필로 서명하는 등 바울서신을 모방한 것이다. 요한은 전형적인 기독교적 인사로 결론을 짓는다. 그 책이 아시아의 교회에서 낭독될 때 듣는 모든 자들에게 축복이 선포된다.’ 등이 있습니다.

 

복음으로 보면 ‘재림의 진행성과 아울러 주님을 갈망해야 함’이 나타납니다.

 

<잊지 않아야 할 3가지>

 

1. 그리스도의 재림입니다.

 

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7절과 12절에 이어 3번째 확증입니다. 3번이란 더할 나위 없는 강조입니다. 여기 “속히 오리라”의 원문 ‘엘코마이’는 문법상 현재형입니다. ‘재림’을 의미하는 헬라어 역시 ‘파루시아’(παρουσία)가 '파레이미'의 현재분사형으로 ‘있음, 나타남, 오심, 임하심’이란 뜻으로 성경에서 약 24번 사용되었습니다. 재림의 시제가 현재형이라는 점에서 지금도 성령으로 임하심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만약 재림의 미래성과 동시에 현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신 약속은 성도들에게 많은 의문을 품게 하는 동기가 됩니다. 인정해야 할 것은 승천하신 주님은 멀리 계시지 않고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현재 함께하신 주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사랑하고 경외함으로 더욱 충만하시기를 원하고 마음의 중심과 넓은 자리를 차지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장차 임하실 재림의 예수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재림 시제는 지금 우리에게 임하셨고, 임하고 계시며, 장차 온전히 임하신다는 점에서 현재와 미래입니다.

 

2. 주님을 영접함입니다.

 

20절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 말씀은 아랍어 ‘마라나 다’를 번역한 말로, 우리에게는 "마라나타(מרנא תא, maranâ thâ)"로 잘 알려진 말입니다. 이 용어는 고전16:22에 한번 쓰였는데, 이 용어는 초기기독교 교부들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디다케(가르침이라는 뜻)"의 예식문에서도 발견되며, 초대 교회에서 아람어로 “마라나-다" 즉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20절)가 성찬예식 때 드리는 공식기도문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기도는 지금도 계속해야 할 기도입니다. 엡5:18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서 '충만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 '에플레스데산'은 받고 또 받는 반복성을 의미하는 낱말입니다. 지금도 임하시는 주님을 생각한다면 재림의 임박감도 좋지만, 이미 우리 안에 임재하신 주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며, 더욱 온전하고 충만하신 임재하심을 갈망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임하시든 장차 재림으로 임하시든 주님이 임하셔야 죄도 끝나고 시험도 끝나고 갈등도 끝나고 슬픔도 끝납니다. 믿음의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주님을 믿되 우리 중심에 모시고 기쁨과 감사와 순종으로 영화롭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계시록의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라나타의 신앙입니다.

 

3. 주 예수의 은혜입니다.

 

21절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벧전1:13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한 대로, 주님이 임하실 때 그냥 오시지 않습니다. 재림 시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영광의 형체로 바뀔 것이고 우주까지도 새롭게 변화할 것입니다. 지금 성령으로 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만 해도 우리를 예수 안의 새로운 피조물로 바꾸어 놓고 풍성한 은혜와 은사와 권능과 성화와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 비밀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재림공포증에 빠져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 지금 오시면 안 된다고 이상한 기도를 드립니다. 죄 가운데 방황합니까? 소망과 기쁨이 없습니까? 응답과 영적 부흥이 필요합니까? 우리 주님이 답입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며 경건하게 날마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성령으로 충만하게 기름 준비하며, 현재 임하신 임마누엘 주님부터 사랑하면서, 온전히 임하실 재림의 주님을 갈망하시기를 바랍니다.

 

원수 사탄은 우리의 기쁨을 빼앗기 위해 재를 뿌리며 끝까지 저항하겠지만,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을 향한 이 경외의 삶이 그치지 않는 한,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된 구원과 거룩과 평화와 영생을 지금부터 누리며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의 기회는 요한의 축도에 나와 있는 대로 모두에게 있습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를 바라며 그 기회는 바로 오늘입니다. 요한계시록은 요한의 축도로 마쳐집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