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인물 심리분석 1. 양부모와 생부모 사이에서 내면적 갈등을 겪은 모세
모세의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입양아라는 사실에서 온 정체성의 문제였다.
즉,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면서도 애굽 왕궁에서의 생활을 하는 이중적인 모습에 당황하였다. 다행히 생모가 보모의 역할을 함으로 어느 정도 유아기때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성장하였겠지만 애굽 왕궁에서의 눈총과 교육현실과의 갈등은 심하였을 것이다.
특별히 입양아로서 후계자 자리까지는 오를 수 없음을 인식해야 하는 일종의 '소수민족 콤플렉스'(minoirity complex)를 갖고 자랐을 것이다. 만약에 왕실이 그의 출신성분을 몰랐다면, 언제라도 발각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그의 마음에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모세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세는 히브리인의 아이덴티티를 택했다.
히11장에서 언급된대로 그는 두 어머니, 두 민족성, 두 종교, 두 문화의 갈등에서 마침내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히브리인으로서의 선택을 한 것이다.
기른정보다는 낳은정을 택했다고나 할까?
모세의 열등감은 소극적 삶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사고형이라기 보다는 감정형이며, 전형적인 지도자들과는 다른 내향적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축복받지 못한 모세의 출생은 곧 열등감의 표출로 바라볼 수 있다.
모세의 출생은 불안감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원치 않는 아이" 였으며, 부모와의 신뢰감을 쌓아야 할 때 그는 버림 받았다. 아마 그에게는 유기감의 모습이 항상 그를 괴롭혔겠고, 이러한 "정신적 외상 경험"은 타인과 신뢰감을 형성하는데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모습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하나님을 신뢰하지못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불신감이 팽배하였고, 이드로의 집에서 40년동안 은거한 모습을 통하여 얼마나 소극적 삶을 살았는가를 추측할 수 있다.
셋째, 모세의 인성은 주저함과 저돌성이 공존하였다.
그의 살인은 열등의식의 또다른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정의감을 느끼고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행동형의 사람이었다.
극단의 또다른 모습을 소유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넷째, 모세의 광야생활은 '기' 꺾인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살인 후의 "피해망상증 또는 편집증"에 시달렸을 것이다.
히브리 노예의 자녀에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다시 유목민의 삶으로,그리고 히브리인들의 민족적인 지도자로 급변화된 삶을 살았던 모세는 그러한 급변하고 급강하한 삶에서 "기"가 꺾인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나름대로의 꿈"이 상실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여러 형태로 격려하시고 분을 발하며 자극을 주기까지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출4:13)라고 끝까지 버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다섯째, 합리화의 자기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모세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열등의식과 취약성, 불신감을 이용하면서 자신이 갈 수 없는 이유들을 제시하면서 "합리화"의 자기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다.
이제서야 나타나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감과 아울러 자기격하,무관심,실망감,실의 자기연민,그리고 열등감을 그의 대답을 통해서 쏟아내고 있다. 겸손한 모습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에 자신을 방치해두고 어떤 의미에서 유기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노감의 표현으로도 이핼 할 수 있다. "대인공포증"과 같은 느낌도 있었던 것 같다.
후천적인 언어장애의 모습을 가졌음을 볼 수 있다.
여섯째, 상처와 고통, 좌절을 딛고 일어선 위대한 하나님의 종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인들에게 최고의 민족적인 자긍심을 가져다주는 지도자이다. 과거의 여러 가지 아픔과 좌절과 마음의 상처들을 딛고 일어서서 위기를 극복하며 한 단계 더 성숙된 삶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던 것이다. 과거의 아픔과 상처를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 느낀 점.
모세의 어린시절과 나의 어린 시절을 비교하면서 다음과 같은 점을 느꼈다.
1) 정신적 안정을 갖지 못한 나의 삶
모세의 어린시절은 풍요의 삶이었으나 행복과 정신적 안정을 주지 못하였다.
나의 삶에 있어서도 물질적으로는 잘 사는 집안이었으나 아버지의 과다 알콜과 가정을 돌보지 않고,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 정서적으로 상당히 불안 가운데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은 나에게 악몽이다.
행복은 요원한 것이었다.
2) 형에 대한 콤플렉스
모세는 자신의 출신성분에 대하여 애굽 생활 속에서 열등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나는 형에 대한 콤플렉스를 가지고 자라났다.
형은 똑똑하였고, 부모님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또 그만큼의 능력이 있는 자였다.
그러나 나는 모든 면에 있어서 막내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그만큼 형에 비해 모든 면이 뒤져 있었다.
그래서 모세의 '언어 장애'의 모습이 아버지 앞에서(화를 잘 내셨고, 야단을 많이 치셨기에 제대로 표현하지 못함) 나의 의사를 똑바로 표현하지 못하고 얼버버리는 경우가 있었으며, 형 앞에서는 그 논리성과 설득력, 비교하에서의 열등의식으로 인하여 표현상의 혼란을 겪은 경우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셋째, 이제는 치유와 자신감을 갖게 된 나의 자아상
모세의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부르시고, 연단시키시고, 함께 하심으로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남게 하셨다.
나 모세와 같이 감정형의 모습을 많이 지녔다. 모세처럼 온유하고 소극적인 모습이 때로 저돌적이고 분노의 모습을 동시에 가졌던 것처럼, 또다른 나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받고, 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도움심을 받게 되자, 소망이 생기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용납하는 모습으로 바뀌었다.
모세가 40년이 걸렸지만 나는 다행히(?) 30년이 걸렸다.
나 스스로 아픔을 인정할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어제의 아픔이 소중하였다는 것과, 어제보다는 오늘이 행복하고, 오늘보다는 내일이 희망과 기대속에 살고 있음을 고백할 수 있다.
2. 이삭
1)이삭은 성인아이였다.
하나님의 예언으로 태어난 이삭이었지만 그는 갈등을 적극적으로 헤쳐나가기보다는 긴장상황이나 갈등상황을 회피하며 무마시키는 삶을 살아 갔다. 늦동이로서 사랑을 받고 자랐던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이해할 수 없는 제사 사건으로 인하여 극도의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순종하였다는 것은 평소 그의 어린 시절은 장남이자 외아들로서의 무거운 "역사적인 사명감"이 주어져서 "성인"처럼 대우받았던 "성인 아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수동적이며 여성적인 특징을 지닌 이삭
리브가에게 가장으로서의 힘을 많이 상실하였고, 쌍둥이 아들을 통하여 본 가정의 역기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
3)무저항적 평화주의자 이삭
마이어스-브릭스 인성유형들의 분류에 의하면이삭의 인성유형은 "내향적-직관적-감정적-인식적"에 해당한다고 보여진다.
가정에 대하여 충실하고, 적극적인 리브가의 모습속에서도 남자로서의 일탈적 행위를 하지 않았으며, 우물 사건등을 보아서도 충돌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 였음을 볼 수 있다.
'중재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유형에 속하는 사람의 긍정적인 모습은 삶에서 비교적 만족감을 느끼며, 수용적이며 감정적으로 안정적이며 평화로운 모습이다. 긍정적이며 남들을 지지해주며, 인내하며 성품이 온화하며 신사유형의 사람일 수도 있으나, 이에 반하여 이런 류의 사람은 타인들에게 자신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며, 전통적인 역할과 기대를 쉽게 수용하는 면니 있으며, 문제점을 극소화하거나 회피하며 때로는 포기해버리기도 한다. 잘못하면 중독적인 증세를 보이기도 한다. 이삭이 미식가였다는 것에 그는 음식에 탐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느낀 점.
이삭의 평화주의자였던 모습과 수동적인 행동과 소신없는 행동은 나와 너무도 흡사함을 발견하였다.
그의 "성인 아이"의 모습은 내 자아상의 "또다른 성인아이"의 모습이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가정에서의 역기능적인 모습으로 인하여 정신적 갈등이 심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허무감,무력감에 빠질 때가 많았고, 마음의 상처는 씻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하였다. 이삭의 탐식증과는 종류가 다르지만 또다른 형태의 음란물 중독증에 빠졌던 청소년기, 잠 중독에 빠져 있는 내 모습, 어떤 일에 정신집중을 하지 못한 내 자아상을 발견하였다. '예'와 '아니오'를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친하고 적극적인 듯 하나 그것은 또다른 열등의식의 표현이었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상처를 많이 주기도 하고,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하고, 또 그것을 표출하지도 못하였으며, 내 스스로 용납지 못하고 상처를 입고 정서 불안의 형태(가다가도 어떤 생각으로 인하여 소리를 지른다든가, 몸의 순간적 행동을 할 때가 있음)가 많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삭에게는 고유한 이삭만의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나에게도 그러한 긍정적인 모습이 있다.
이제는 적극적이며, 주체성을 가지고, 언어의 훈련과 말씀과 기도를 통한 자아평정의 법을 잘 활용하여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자신감이 있다.
3. 경쟁의 사람 야곱가에 계속된 속임의 사건들
1) 쌍둥이 형 에서를 경쟁의 상대로 인식한 야곱
이삭은 외향적인 에서를 사랑하였고, 리브가는 내향적인 야곱을 사랑하였다.
이는 '편애'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삭과 리브가의 역기능적인 성격이 이미 자식을 통하여서도 나타나고 있다.
야곱의 경쟁의식은 결국 그의 인생을 험난한 길로 인도하였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가족들도 경쟁의식으로 인하여 부인들, 자녀들이 큰 갈등과 어려움을 겪은 것을 볼 수 있다.
2)자수성가한 대표적 인물
야곱의 이러한 경쟁의식 속에서는 "획득하며""노력해야 하며" 심지어"속이기"까지 해야 얻을 수 있는 환경이 그를 경쟁의 심리로 이끌었을 것이며 그것이 또한 그의 성품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리챠드 로어와 안드레아스 에버느는 야곱의 인성유형을 제 3 유형인 지위추구형의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많은 한국 목회자들에게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얍복강에서의 사건은 야곱의 삶의 여정에 있어서 큰 획을 긋는 분수령과 같은 것이었다.
3)거짓말의 사람 야곱
거짓과 기만은 정직과 성실과 대조를 이루는 인간의 삶의 어두운 부분이다.
4)이민자와 나그네였던 야곱
광야에서의 고생과 라반의 집에서의 생활은 자신의 경쟁의식과 속임의 결과로 톡톡히 그 대가를 치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진정한 자아발견과 축복을 경험한 야곱
그는 부자가 되어 귀향을 하게 되었지만 과거의 미해결로 인하여 고민하게 된다. 성공의 사다리를 올라가기 위하여 타인들과 피상적인 관계를 맺어왔던 야곱에게는 외부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동일시하는 거짓자아를 탈피하고 새로운 자아 혹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시점이 필요했다. 그 삶의 분기점이 된 것이 얍복나루터 사건이었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에 직면하게 됨으로 자신의 과거의 삶을 되돌아보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게 됨으로 새로운 자아상,성숙한 자아상으로 탄생하게 된다.
* 느낀 점
아버지는 항상 형과 나를(형제:누나-형-나) 술을 드시면 항상 경쟁관계의 입장에서 대하셨다. 재산은 공부 잘 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는 자식에게 더 줄 것이라고 하고, 누가 더 잘 하나를 항상 시험하셨다. 나는 모든 것이 열등하였다. 야곱의 적극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성격이 오히려 부럽기도 하다. 비록 그 방법과 수단이 선하지 못하였지만.
거짓말하는 야곱의 모습 속에서 나는 내 자신의 열등과 나약, 부족함을 방어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핑계와 거짓말을 할 때가 많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특별히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솔직히 말씀드렸을 때는 오히려 야단만 맞고, 행동에 큰 제약을 받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숨기거나 거짓말을 한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 역시 그럴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곧 우리의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정직하게 살았지만, 아버지와 우리들(어머니와 자녀들을 말함)은 항상 분단된 조국과 같은 상황과 삶이었다.
그러나 어머님이 돌아가신 이후, 큰 내적인 갈등도 있었지만 아버지와 자녀들은 화해의 길로 들어섰다.
그것은 얍복강에서 야곱이 하나님을 만나고 자신의 자아상을 철저히 의뢰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의 영혼을 변화시켰고(간암의 채찍을 통하여), 가족 모두는 가정과 믿음의 중요성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 역시 할아버지로부터 쫓겨남을 당했고, 철저한 성인아이로 자랐기 때문에 또 다른 피해자였던 것이다.
아버님 역시 또 다른 자아상으로 인하여 고통스런 삶을 사셨고, 그 고통을 해방시키시고 웃음을 띠며 돌아가신 것은 바로 하나님이 얍복강 같은 우리의 심령과 세상에 벧엘의 하나님으로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다.
4. 일그러져갔던 영웅 사울
사울은 겸손으로 출발하여 교만으로 패가망신한 인물이었다.
분명 그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매력있던 남성이었다.
그러나 그의 몰락은 어디에서 기인되었는가?
그의 인격장애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다.
"수동(왕 선출과 골리앗의 모습속에서)-저돌성(사무엘 대신에 제사를 지냄, 지나친 맹세를 함,다윗을 지나치게 증오함, 스스로 약속을 저버리고 저돌적으로 행동함) 인격장애"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편집형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항상 다윗을 라이벌로 의식하였다.
"반사회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다윗에 대한 그의 행동은 반사회적이며, 죄의식이 없었던 행동이었다. 동족살인의 잔인함을 가졌다. "thanatos"의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마저 부상당했을 때 자신의 칼 위에엎드러지는 자기-살인까지 행했던 것이다.
"정신적인 조울증"의 증상을 드러내고 있다. 음악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끝으로 그는 폭군적인 리더였다. "강력하며-확장적이며-폭군적이며-파괴적인 사람"으로 리챠드 로어와 안드레아스 에버는 제8형의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윗은 제8형의 건강하고 기능적인 면들을 갖춘 "훌륭한 리더"였던 반면에 사울은 "일그러져갔던 영웅"이었다.
*느낀 점
사울의 "자기 합리화"와 인격장애에서 오는 '자기 무절제'는 나의 모습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아내에게도, 사람들에게도 먼저 어떤 합리화와 핑계의 모습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결혼 초기에 조울증의 증세가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내와 즐거운 생활을 하다가도 성격이 부딛치고 의견이 충돌될 때, 그리하여 분노의 단계로 들어갈 때 갑자기 심한 허무감과 무력감이 찾아 온다. 자학의 말과 공격적인 언행이 발설되고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많았다. 쉽게 분이 풀리지 않다가, 처음에는 남에 대한 원망이 차츰 자신에 대한 원망과 슬픔으로 다가섬을 볼 수 있었다.
리더십에 있어서 겉으로는 태연한 척 하나 속은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며, 상대방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나의 패턴과 중심이 흔들릴 때가 너무 많다.
그리하여 사울과 같이 변덕과 추스릴 수 없는 언사와 행동을 할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첫째, 핑계와 합리화의 오류에서 벗어나야겠다.
둘째, "싸나토스"와 같은 또다른 나 자신의 부정성을 잘 다스릴 수 있도록 영적 생활과 자아 성찰을 잘 가져야겠다.
셋째, 교회의 리더로서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생각들을 갖지 말도록 해야겠다.
차분한 성격과 집중력,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더욱 더 키워 나가면 훌륭한 인격자, 휼륭한 리더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5. 삼손의 '금지된 장난' 이야기
1)나실인으로서 구분된 삶을 강요받은 삼손
어려운 시대, 어려웠던 가정 환경(뒤늦게 태어남), 운명지어진 삶으로 인하여 그의 유년시절은 성인아이의 특징들을 가지고 보내게 되었다.
2)육적인 강인함은 있었으나 성적으로는 연약함을 보인 삼손
3)주위 사람을 적으로 만든 리더형 인물-자신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험을 좋아하며 도전을 좋아한다. 진취성이 있었으나 나실인의 규례를 깨면서 죄악성으로 나타난다. 탐욕의 그 죄악성의 원인이었다. '섹스와 관계중독'이 그의 가장 큰 질병이었다.
전혀 예기치 않은 감정의 폭발과 분출을 드러내지만 내면적인 갈등은 별로 하지 않은 편이다.
* 느낀 점
삼손의 태어남과 성격은 나실인으로서 적합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내면의 정서를 차분하게 쌓아가는데 실패한 인물이었다.
천방지축의 저돌적이며, 자유분방한 그의 삶은 오히려 요즘 세상에서는 '스타'의 이미지가 강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무언가 튀어야 주목을 받는 지금의 세대, 삼손의 이방 여자에 대한 여성편력과 많은 게임을 즐기며 가졌던 싸움에서의 승리, 한 여인의 치마폭에서 놀아났던 거인의 모습이 충분한 기사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약한 점은 무엇인가? 정에 약하다. 그것은 장점일 수도 있으나 분별하지 못하는 약점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는 부분은 무엇인가? 잠과 영화.
어떤 일을 지속적으로 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많다. 뒤로 미루는 게으름이 있다.
어떤 리더형이 될 것인가?
포용하면서도 비젼을 제시함으로 스스로 움직이게끔하는 리더의 성품을 갖고 싶다.
6. 쓰라린 상실감을 극복한 나오미
나오미는 위기와 상실을 경험하였던 삶이었다.
흉년에 닥친 그녀의 가족은 풍요의 상징인 모압지방으로 이주하였고, 이민생활의 낯설움과 생활고로 인하여 심한 어려움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스트레스는 예기치 않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한 어려움이었다.
홀어머니와 두 아들을 양육해야하는 부담감과 함께 모압여성들과 결혼시킴으로 오는 영적 죄책감이 늘 그녀의 가슴안에 커다란 아픔으로 자리매겼다.
더욱 더 가슴아픈 것은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던 것이다. 그녀의 상실감, 충격은 가히 어떠하였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쓰디쓴 패배의 맛을 보고 고향으로 돌아온 나오미, 온 동네 사람들이 놀라며 충격을 받았겠지만 그녀의 하나님에게의 채찍맞음의 아픔보다는 덜 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을 통하여 다윗의 족보에 올라 간 그 영광을 그녀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느낀 점
나오미의 아픔은 나에게 있어서 공감하는 부분이 있다.
20살 때 어머니의 죽음, 3년 전 아버님의 죽음, 쉽지 않은 이별과의 고통을 겪은 나로서는 나오미의 아픔이 어떠했을까하는 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듯 하다.
그러한 아픔과 좌절, 스트레스는 삶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일 것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시어머니 곁을 지킨 룻을 통하여 그녀의 아픔은 새로운 아들(보아스)을 맞이함으로 회복되고, 가난에서 해방되었으며, 아이를 낳음으로 다윗 왕가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맛보게 된다.
슬픔과 아픔을 회복케 하시며, 위로의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본다.
7. '분리불안'을 경험했던 사무엘
사무엘의 독특한 출생방법-환경과 젖뗀 후에 어머니와 헤어진 것과 실로에 있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은 것이고, 그 다음 사건은 자신을 키워준 엘리 제사장의 죽음과 그의 두 아들들의 죽음, 비느하스의 아내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경험등이었다.
'나실인'으로 부름 받아 특별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무엘은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브닌나와의 갈등은 우울증의 상태에 있었고, 그 슬픔을 기도로 그리고 애통의 언어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역기능적인 상황속에서 사무엘은 나실인의 신분으로 태어났고, 부모의 사랑을 받고 자랄 나이에 성직이라는 길로 들어선다.
엘리 제사장과의 생활속에서 또다른 허와 실을 경험하였을 것이고, 문제 P.K의 생활을 하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파란 만장한 생활을 하고 라마에서 장사되었다.
* 느낀 점.
나에게 있어서도 교육문제로 인하여 청소년시기에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하게 되었다.
신앙생활은 별 도움이 안 되었고, 3남매의 서울 자취생활은 넉넉치 못하였다. 친구들과의 이별과 새친구들과의 갈등,학업의 부진, 고향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 외로움을 달래지 못한 현실, 미래에 대한 고민 등등이 성인아이의 모습이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았다.
사무엘의 일중독(?) 같은 모습은 없으나, 정서불안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집중하지 못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것은 수시로 거주지를 옮기며, 나홀로 살아야 했던 청소년기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는 듯 하다.
8. 관계 중독으로 고통받은 수가여인
사마리아 여인인 수가여인은 기구한 역사를 가진 여성이었다.
여섯 번의 결혼은 그녀가 역기능적인 부부생활을 가졌다는 것이고, 대낮에 물을 길러 왔다는 것은 "피해 망상증"과 "대인 기피증"이 있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생활의 이원화를 극복하려고 하였지만 악순환적인 반복적 생활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성장하였을 것이고, 자신의 인생에 회의적일 수 밖에 없었던 여인에게 예수님의 상담은 가히 폭풍같이 다가오는 생수의 시원함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치유 받은 여인은 그녀의 삶의 터 위에서 새로운 인생, 적극적인 인생을 살며, 믿음의 생활을 함으로 많은 감동을 주었을 것이다.
모든 상처들을 치유하시는 예수님께 돌아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의 방법이 아닐까?
*느낀 점
사람을 만나기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문제는 나의 구미에 맞는 사람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모두를 좋아할 수는 없으나, 나보다 나은 사람을 피하는 경우가 있음을 깨달았다.
나은 사람 앞에서는, 또는 상대하기 좀 어려운 사람 앞에서는 말을 더듬거리는 경우가 있다.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약간의 "피해 망상증"이 있음을 본다.
또한 사마리아 여인의 남편을 통한 악순환적인 상처의 반복처럼, 비록 나에게는 그러한 비교는 될 수 없지만 열등감과 수치감으로 인하여 건강한 자존감을 갖지 못함을 알 수가 있었다.
어린 시절,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라 온 환경이 컸다.
성인이 되어 결혼하고 난 후(수가성 여인도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만), 결혼은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즉, 결혼은 상대방을 위해 희생하며,사랑하며, 섬기는 것이지 나의 유익과 이익을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실제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부부싸움을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상대방과 나 자신에 대해 서서히 깨닫게 되었고, 그럼으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을 내어놓고 치유 받으며, 고치며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있게 되었다.
사역을 하면서 부딪치는 온갖 문제들에 대해서도 이제는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도 생기게 되었다.
물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한 거룩한 부담감들은 당연히 있어야겠지만, 나의 약함이 오히려 강함이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체험하고 있다.
결국, 상담을 통한 치유는 가장 완벽하고 위대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말 씀 : 요4:3-24
제 목 : 치유하시는 예수님
함경도 민요에 "타박네"란 민요가 있습니다
타박네야 타박네야 너 어드메 울고 가니?
우리 엄마 무덤가에 젖먹으러 찾아간다.
물이 깊어 못간단다.
물이 깊으면 헤엄쳐 가지,
산이 높아 못 간단다.
산 높으면 기어가지. 명태 주랴? 명태 싫다. 우리 엄마 적을 다오. 우리 엄마 젖을 다오.
우리 엄마 무덤가에 기어 기어 와서 보니, 빛깔 곱고 탐스러운 개똥참외 열렸길래,
두손으로 따서 물고 정신없이 먹어 보니, 우리 엄마 살아 생전 내게 주던 젖맛일세.
이 민요에는 동조되는 아픔이 있습니다.
비록 타박네처럼 세상을 험하게 살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이렇게 지치고 쓸쓸하며 그나마 포근했던 어머니의 젖을 그리는 고아와 같은 아픔들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하나님은 과연 계시고,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가에 대한 고아와 같은 질문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아픔과 상처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내어 놓기 싫은 약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말못할 비밀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노출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멸시와 거절을 당할까봐 두려워 할 때가 많습니다. 또는 노출이 되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분노를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아픔이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고, 신앙생활의 회의를 가져오게 되며, 사람 만나기가 싫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의 수 많은 아픔의 문제가 치유됨으로 건강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치유받는 첫 번째 길은 무엇일까요?
1. "예수 만으로 만족하다"라는 믿음의 고백 위에서 우리는 치유의 여행을 떠나야 한다.
이것이 일반 심리치료와 다른 기독교만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무엇으로 만족하고 무엇으로 인하여 행복함을 누리십니까?
사람의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족에 있다.
사마리아 여인의 비극은 세상적인 소유에서 행복을 얻으려고 했다는 것에 문제가 있습니다.
남편이 6번째 입니다. 역기능적인 부부생활을 보여줍니다.
대낮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대인 기피증이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부족한 면이 있습니다.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랄 수도 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아픔의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입니다.
한 남자를 통하여 지나간 아픈 세월을 보상받고 싶은 마음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큰 기대감을 가지고 그녀는 동거생활을 시작하였을 것입니다.
결국, 결혼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또 다른 희망을 가지고 한 남자를 선택합니다.
그러기를 공식적으로 한 것이 6번째입니다. 이것도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편이 그녀의 행복을 가져다 주었습니까?
남편을 통해서 그녀의 깊은 마음속의 아픔들이 치유되었습니까?
진정한 행복과 마음의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행복의 근원을 '믿음의 고백'에서 시작하여야 합니다.
마음의 치유는 완전한 치유를 주시는 '예수 안에서' 부터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치유여행의 첫 시작입니다.
2. 이제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의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시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인격적이셨습니다. - 문제의 핵심을 알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꺼집어 낼 수 있도록 유도하셨습니다. 다짜고짜로 정죄하고 무거운 짐을 주지 않았습니다.
2)아픔을 꺼집어 내게 하신다.-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꺼집어 내게 하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결혼생활과 삶의 모습을 꺼집어 냄으로 아픔의 원인을 내어 놓게 하셨습니다. 모든 아픔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 남편을 불러와라" - 네 문제의 핵심을 가슴에 묻어두지 말고, 솔직하게 꺼집어 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져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치유하고 해결해 준다는 것입니다.
꺼집어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생각하기 싫은 과거의 추억으로 더듬을 수도 있습니다.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의 얼굴과 이름이 떠올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과 사건을 떠올려야 할 때가 있다. 오늘날 이 사회에 대해, 그리고 사람에 대한 원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아픔을, 그 상처를 꺼집어 내라는 것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자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한번에 강압적으로 한번에 할 수도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하나 하나님을 의지케 함으로 성숙한 성도가 되어지길 원하십니다. 주님께 용감하게 문제를 꺼 내어 놓으십시오.
3)현실을 인정케 하셨습니다.-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선지자로소이다'라고 고백하였는데 이는 자신의 생활이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며, 나아가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모습입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치유에 있어서 가장 큰 효과를 가져오게 하는 행위입니다.
주님의 치유 방법은 원인을 아시고 꺼집어 내시고 인격적으로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이미 그 사정을 다 알고 계셨지만 만나자 마자 "네 남편이 몇이야?" 하지 않으셨다.
"지금부터 기도 제단 쌓아!" 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 간음 귀신들렸구만"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스스로 아픔과 약점을 알고 꺼집어 낼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셨고 인정하게 만드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시기 위해서 하신 것입니다.
무조건 은혜를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을 무시하고 접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문제를 감춰두고 은혜를 누리도록 하시지 않습니다.
치유의 방법을 너무도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에게도 사마리아 여인처럼 감추고 싶은 부분도 있습니다.
아픈 부분도 있습니다. 기억하기 싫은 추억들도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것은 극복할 문제이지 감추거나 괴로워 할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그러한 것으로 인하여 여러분의 신앙이 방해받고 있습니까?
사람들과의 만남을 저해하고 있습니까?
심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신앙생활 하면서 겉은 웃지만 속 사람이 울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겉은 웃지만 내 안에 울고 있는 모습이 있다면 그 원인을 꺼집어 내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십자가 앞에 놓으십시오. 주님이 치유하여 주실 것입니다.
3. 왜 주님은 그러한 자격이 있으실까요?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고통을 당하신 분이시기에. 그럼에도 죄가 없으신 분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개역] 히 2장 18절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개역] 히 3장 1절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우리와 같이 인간의 약함을 아시는 분이셨다. 가장 큰 억울함과 가장 큰 고통을 당하신 분이시다. 가장 낮은 자로 오셨습니다. 죄의 유혹도 당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누구보다도 우리 인간을 가장 잘 이해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신다면 그분의 고통, 그분의 억울함, 그리고 그분의 위로하심을 깊이 체험할 것입니다. 속사람의 치료가 시작될 것입니다.
4. 영생의 기쁨이 모든 아픔을 치유하는 가장 큰 능력이 됩니다.
[개역] 요 7장 37절-38절에 보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심이 되는 부분을 생명으로 채워 주겠노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배'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속 깊은 곳','트인 공간' 혹은 '空洞', 비유적으로는 '사람의 배'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 공간에 무엇이 채워졌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질은 달라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으로 채워 넣었습니다.
결국, 삶에 자신감과 자긍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갈증에 허덕이던 빈 공간에 영생수가 담겨지니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에 가서 기쁨과 감격에 찬 목소리로 그리스도가 오심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28절, 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절, 와 보라 그리스도가 오셨다고 외쳤습니다.
물동이를 버림으로- 세상적인 가치관이 바뀌어졌음을 보여줍니다.
동네에 들어가서 - 대인 기피증에서 관계 회복형으로 바뀌었습니다.
와 보라 - 복음을 증거하는 전도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빈 공간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습니까?
영생의 기쁨으로 가득 차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가득 차서, 아픔이 치유되고, 내일의 소망으로 가득차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든지 빈 공간이 있습니다.
이성으로서만이 채워질 수 있는 빈 공간도 있습니다.
물질로서 채워질 수 밖에 없는 섬세한 빈 공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여자분들에게는 그렇습니다.
자녀가 채워주어야 할 빈 공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공간들이 이 땅에 살면서 다 채워지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밖에 없는 분들도 계시다.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는 분들도 계시다.
자녀가 없는 분들도 계시다. 건강이 약한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영생의 기쁨을 누리고, 성령이 충만하여 사는 사람은, 다른 모든 공간을 채우고도 남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성숙한 모습으로, 얼마든지 기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영생수가 흘러 나옴으로 치유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에게도 성인아이의 모습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밖에서는 사람들에게 잘 할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문제는 가정입니다. 잘 하다가도 의견이 맞지 않으면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아내의 말이 내 신경을 건드리면 쉽게 화를 낼 때가 많습니다. 그 화가 내가 사는 모든 영역을 허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괜한 분노가 나를 괴롭힐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런가?
원인을 캐어 봤다.
어렸을 때 저는 역기능적인 가정에서 자랐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님 때문이었습니다. 아버님은 할아버님한테 아버지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결국, 가출하여 자수성가한 분이었습니다. 늦게 배운 술은 가정을 항상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좀 내 자신과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면 허무하게 되어서 무력감에 빠질 때가 많았습니다.
그와 더불어 정말 싫었던 것은 가족과 어머님에게 아버님이 화를 내시고, 상처어린 말씀을 하던 것이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도 모르게 그것을 아내에게 표현하게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아내가 많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성인아이의 모습이 많이 치유되고 있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상처뿐인 나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나의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 영생의 기쁨 속에 살 수 있도록 소망을 주심에 너무도 감사하게 된 것입니다.
나의 아픔이 그만큼 많이 깨달아지면 깨달아질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더 소중하게 나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었습니다.
생각하기 싫은 과거에서 소중한 과거로 바뀌었고, 어제보다 오늘이 더 행복하고, 내일이 더 기대되는 삶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 내 육신이 쇠하여 질 때도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생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누릴 소망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맞이할 것입니다.
모든 아픔과 어려움이 치유되고 극복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에게 영생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내 안에 있으니 가족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교회가 은혜롭게 보이고, 세상도 소망스럽게 보이고, 사람들이 사랑스럽게 보이더란 말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은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모든 곳이 예배의 장소요, 예배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생을 가진 자는 예배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또다른 아픔들이 치유되기도 합니다.
예배의 감격이 고난과 아픔을 이기게 합니다.
삶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예배'의 의미속에는 '얼굴과 얼굴이 맞대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얼굴과 우리의 얼굴이 맞대어 친밀한 대화를 나누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화속에 우리는 우리의 약함을 주님의 힘으로 채워지게 되고, 우리의 아픔의 상처를 치유받게 됩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예배의 감격으로 넘쳐질 때, 나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이 선물로 주어지게 됩니다.
필요에 의해서 존재하는 아내나 남편이 아닙니다.
이익에 따라서 좌우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선물'이요,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지게 되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이 없기 때문에 평안을 누리는 자가 아니라, 고통과 아픔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안과 감사를 잃어버리지 않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개역] 눅 17장 16절-19절에 10명의 문둥병자의 치유사건이 나옵니다.
그 중에 예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린 자는 사마리아 문둥병자 한 명이었습니다. 그 한명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아홉명은 병은 고쳤지만 구원받지는 못했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이요, 영생의 기쁨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문둥병과 같은 문제들이 있다. 아픔들도 있다. 이런 것들은 해결되기도 하고, 다시 들이닥치기도 한다.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살면서 모든 것이 우리의 바램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아픔이 한 순간에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이 주신 영생의 기쁨, 구원의 감격을 날마다 되새긴다면 그 어느 것도 이기지 못할 상처와 어려움은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님 앞에 꺼집어 내십시오. 또한 영생의 선물을 붙잡고 그 감격을 날마다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과 상처들이 깨끗하게 치유되고 건강한 신앙생활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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