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로서의 목회자, 다윗 -사무엘상하를 중심으로- 1. 시작하며 2. 목자로의 부르심 2.1. 시대적 상황 2.1.1.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 2.1.2.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던 시대 2.1.3. 목자같은 왕을 갈망하던 시대 2.2. 목자의 직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2.2.1. 다윗의 부르심 2.2.2. 목회자의 정체성 2.2.3. 타인의 정체성 혹은 부르심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 3. 목자훈련 3.1. 궁중에서 3.2. 전쟁의 현장에서 3.3. 인간관계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훈련 3.4. 친구관계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언약 3.5. 광야에서 3.5.1. 사람들의 섬김 속에서 3.5.2. 아둘람 공동체: 공동체 훈련 3.5.3. 타인의 인생에 대한 관용과 태도 3.5.4. 광야에서의 자립신앙 3.5.5. 시글락 공동체와 브솔 시내: 긍휼의 사람으로 3.6. 다윗을 통해 본 목회자의 “영적 훈련” 4. 이스라엘의 목자 4.1. 애가를 부르는 목자 4.2. 21세기 세대를 섬기는 목자로서의 목회자 5. 다윗의 목자 5.1. 사무엘 5.2. 다윗의 목자이신 여호와의 훈련 5.2.1.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양으로서의 목자 5.2.2. 하나님께 묻는 훈련 5.2.3.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 5.3.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는 목자 여호와: if와 neverthless의 긴장 6. 목자의 번영과 위기 6.1. 성공은 하나님의 선물, 감사의 마음은 공의의 실현으로 6.2. 목자의 위기 6.2.1. 인구조사 ①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② 역전의 하나님 7. 마치며 ‘목자’로서의 목회자, 다윗 -사무엘상․하를 중심으로- 1. 시작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목자가 되신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양으로서, 그를 닮아갈 때, 예수 그리스도처럼 좋은 목자로 성장해 갈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목자로서의 목회자들에게 가장 좋은 멘토요 선생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목자 이미지”를 그림자로서 보여주는 사람을 택하라면 우리는 ‘다윗’을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같은 목자를 기다렸다. 다윗은 어떤 면에서 ‘목자’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가? 본 논문에서는 목회자는 ‘목자’라는 기본 전제 하에, 구약의 인물 중 다윗을 택하여, 그가 어떤 목자인가에 대해서 살펴 보려고 한다. 다윗에 대해서, 즉 그의 삶에 대해서 연대기적으로 나타낸 곳은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서 중에서 ‘사무엘서’에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윗의 삶을 보여준다. 연구의 범위를 좁히면서도 동시에 좀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 우리는 ‘사무엘서’에 집중할 것이다. 사무엘서를 통해서 다윗의 삶을 추적할 때는 ‘성경신학적 방법’으로 주해를 간단히 한 다음, 목회자와 목회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을 택할 것이다. 1) 먼저 다윗이 “목자로 부르심”을 받는 부분부터 연구할 것이다. 다윗이 부름받던 상황을 관찰하고 다윗이 목자로 부름받은 것이 어떤 면에서 은총인지를 볼 것이다. 2) “목자훈련”에 대해서 검토할 것인데, 궁중이나 광야 등에서 다윗이 어떤 훈련을 어떤 목적으로 받게 되었는지를 주석하고 적용할 것이다. 특히 다윗을 통해 본 목회자의 “영적 훈련”에 집중할 것이다. 3) 훈련을 거쳐 “이스라엘의 목자”가 된 다윗에게서 주로 긍정적인 측면을 볼 것이다. 4) 목자로서의 다윗을 연구하는 것만큼 “다윗의 목자”를 보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에, 다윗의 목자인 사무엘과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다윗을 양육했는가를 연구할 것이다. 5) “목자의 번영과 위기”를 통해서 다윗의 후반기 인생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경고를 목회자들에게 적용할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이상의 내용을 간단하게 요약하고 정리하면서 글을 마칠 것이다. 2. 목자로의 부르심 2.1. 시대적 상황 2.1.1. 말씀이 희귀하던 시대 사무엘상 2장에는 불임여성이었다가 사무엘을 낳게 된 한나의 노래가 나온다. 우리는 한나의 노래에서 다윗을 기다리는 이스라엘의 시대적 상황을 알 수 있다. 다윗이 왕으로 나오기 전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아 고통 중에 있었다. 이미 사사기에서 강하게 제시되는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혼합주의 신앙이 다윗의 시대에까지 이어져 그들은 고통에서 해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은 증거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모습에서 발견된다. 사무엘서 기자는 그 시대를 “말씀이 희귀한 시대”라고 명명한다(삼상 3:1). 하나님께서는 말씀이 희귀하여 고통하던 시대에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보내셨다. 다윗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름받았다. 동일한 시대에 태어난 다윗은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섬기는 하나님 왕국의 왕으로 부름받았다. 2.1.2.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던 시대 사무엘상 8장에는 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의 부르짖음이 나온다. 사무엘의 두 아들이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하고(삼상 8:1-3) 이스라엘은 여전히 블레셋 등 외세의 위협 앞에 놓여 있었다. 급기야 백성들은 왕을 요구했다.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반대했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라고 하셨다(삼상 8:4-8). 사무엘상 8:7을 보면, 왕 요구는 여호와를 버리고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하려는 동기를 갖고 있었다. 이런 문제는 갑자기 나온 것도 아니다.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다른 신을 섬겼다. 이스라엘은 고도로 조직화된 군사 공동체와 국가를 진두지휘할 수 있는 강력한 리더쉽을 원했다. 다윗 왕조를 하나님의 왕국으로 이끌어 가시는 모습을 보면, 하나님께서 왕정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왕정 정치’를 통해서 ‘신정 정치’를 실현하려고 하셨다. 하나님은 왕정 제도를 인정하셨지만 선민에게 있어서 진정한 왕이 누구인가 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라셨다(출 23:23-24; 레 18:1-4; 신 4:5-8; 18:9-14). 이처럼, 백성들은 신정보다는 열방과 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원했고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신정정치를 원하던 시대에 ‘평범한 평신도’였던 다윗이 부름을 받았다. 2.1.3. 목자같은 왕을 갈망하던 시대 백성들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 이스라엘의 첫 왕은 사울이었다. 사무엘상 9:1-12:25은 사울의 통치에 대한 내용이다. 사울은 부친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으러 갔다가(삼상 9:1-14) 사무엘에 의해 기름부음을 받은 후(삼상 10:1-16) 백성들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으로 공적으로 인정을 받는다(삼상 10:17-27). 그러나 사울 왕은 “백성들의 목소리”에 너무 민감하여 하늘 대왕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사울은 15:24에서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그들의 목소리’가 신의 목소리가 되었다. 사울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자 사무엘상 15:10-11에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나님의 말씀, 곧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는 마음을 전했다. 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백성들은 열방과 같은 왕이 오면 강력한 나라가 될 것으로 생각했으나, 그들의 그렇게 원한 조건을 가진 사울 왕 아래서, 그들은 전쟁에서 피를 먹을 정도로 고통스런 세월을 보내야 했다. 2.2. 목자의 직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2.2.1. 다윗의 부르심 사울이 하늘대왕이신 영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서 다른 왕에게 기름을 붓두록 하셨다(삼상 16:1-5). 이새의 아들들을 만난 사무엘은 장남 엘리압의 용모에 마음이 끌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이미 버렸다고 하셨다. ‘이미 버렸다’는 극단적인 표현은 사무엘상 15:23, 16:1에서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했을 쓰신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가 뛰어난 사울을 버리셨으므로, 또다시 외모로 사랑을 받는 왕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낸다. 다윗은 사무엘이 눈여겨 보지 않았을 정도로, 그리고 이새의 가족에게서도, 지도자감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을 부음받아 왕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이다. 기름을 부음받았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보여주며, 그의 인간 조건을 보아서도 이스라엘의 목자직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2.2.2. 목회자의 정체성 우리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주는 장면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목자로 쓰실 때는 그 직분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임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선택과 버림을 결정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목회자의 중심을 인정받는 길은 하나님께 조용히 나가 하나님과 대화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목회자의 중심이 알려지고 인정받는 것이 목회자에게는 중요한 신앙생활이다! 부르심에 대해서 죄렌 키에르케고로는 ‘자기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이나 의미’를 찾는 것은 모든 인생이 갈망하는 ‘열망의 대상’이라고 했다. 이 소명이 무엇이냐에 따라 소명을 위해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다. 목회자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열등감에 대한 보상, 기질, 모험심, 주위 사람의 분위기, 가족의 소명, 인도자의 매력에서 아니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확신해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나를 부르시는 예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음성을 듣는 것이 중요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부르심을 일차적 부르심이라고 하는데, 목회자는 일차적으로 부르심의 근거를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찾아야 한다. ‘목회자’라는 개념은 이차적 부르심에 해당된다. 여기서 분명하게 생각해야 할 점은 은사가 평등하듯이 이차적 부르심은 서로 평등하다는 사실이다. 2.2.3. 타인의 정체성 혹은 부르심에 대한 목회자의 태도 목회자가 성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중심’이요 ‘외모’가 아니다. 그 중심은 한 순간은 외모로 위장할 수 있어도 언젠가는 중심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목회자들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각으로 중심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교회는 하나님을 왕으로 삼고 그 분의 원칙에 따라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있다. 이 과제를 수행하는 일이 목회자에게 주어졌다. 그리고 다윗이 “어린 시절” 부름을 받았다는 점을 보면, 목회자는 자신과 성도들이 자녀를 양육할 때 그들의 외모로 일찍 은사를 판별하는 우를 범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눈으로 기다려 보고 면밀히 관찰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녀 자신이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갖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3. 목자훈련 3.1. 궁중에서 다윗은 곧바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목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그를 훈련하셨다. 궁중에서 다윗은 다윗이 사울의 치료자로 뽑힌다(16:14-23). 그는 궁중에서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피폐한 사울을 섬기는 일을 한다. 사울이나 다윗이나 모두 무명의 인물들이었는데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주시자 성령님의 감동을 받아 능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성령께서 떠나시자 사울에게 임했던 힘은 사라져갔다.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하나님의 대리자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가진 능력이란 모두 주님께서 주신 능력이요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을 때 성령께서 떠나시므로 능력 대신 고통이 남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직분을 오직 순종으로 수행해야 함을 배웠을 것이다. 3.2. 전쟁의 현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고통을 준 블레셋과의 전투에 참여하면서 백성의 어려움을 감당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사무엘상 17장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전하는 다윗의 이야기를 다룬다. 골리앗은 40일 동안 나타나 이스라엘의 기를 꺾었다. 이스라엘은 골리앗이라는 용모를 보고 잔뜩 겁을 먹었다. 그러나 다윗은 승리를 확신했다(17:31-38). 다윗은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을 확신하고 달려오는 골리앗의 이마에 물매를 명중시켜 골리앗을 죽였다. 다윗은 보이지 않지만 사시는 하나님께서 전쟁을 주관하신다고 보았다. 오늘날 목회에서 가장 큰 문제 중의 하나가 목회자의 가르침과 삶의 분리, 곧 신행의 불일치라고 할 수 있다. 목회자는 과거 선지자들처럼 삶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데, “너무 쉽게 기존 질서 안에 편입되어 정통의 탐욕에 안주하여” 현실을 극복할 힘을 주지 못한다. 삶의 전투는 실제적이고 치열한데 목회자가 치열한 삶을 외면한 채 가현설적인 목회나 설교를 할 때 교인들은 현장성이 없는 목회에서 자극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곰이나 골리앗이나 별 차이를 못 느낀 것처럼,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친근히 만난 사람은 위기를 평소처럼 대처할 것이다. 말과 행동이 분리되고 외침과 찬양과 자원함이 분리된 가현설적인 시대에서 우리에게 양치기 다윗의 훈련이 절실히 요청된다. 3.3. 인간관계에서: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훈련 사무엘상 18장은 “다윗-요나단-사울”의 역학관계를 다룬다. 전쟁에서 다윗이 계속 승리하자, 백성은 ‘다윗’을 사랑했다.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고 다윗은 백성의 사랑을 받았다. 다윗은 전국가적인 인물이 되었다. 다윗은 공적으로 사랑을 받았고 사적으로도 사랑을 받았다. 사울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다윗은 죽지 않고 오히려 사울이 계획을 세울 때마다 그것을 계기로 더 높아진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생긴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은 ‘마음에 맞는 자’(13:14)인 다윗을 세워가시기 위해서 그와 함께 하신다. 주도권을 가진 것 같았던 사울의 계획은 실패하고, 약자인 다윗이 강자가 되는 것이다. 다윗의 경우처럼, 목회가 얻는 명성은 타인과 싸워 그를 짓밟아 이겨서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므로, 사랑받는 이유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자신이 사랑을 받을 때 그 사랑을 즐기고 사랑을 미끼로 왕노릇하려고 하면 사울의 처지가 될 뿐이다. 사랑을 받을 때, 사랑받는 동기는 하나님의 선물에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행동에 계속 힘써야 할 것이다. 주어진 원칙을 따라 이전처럼 그렇게 살면 마음은 평온해지고 사람들의 사랑은 더 확장되고, 선물은 더 많아질 것이다. 3.4. 친구관계: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언약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던 요나단과 다윗의 마음이 ‘연락’되었다.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했다. ‘연락되었다’(became one in spirit)는 ‘묶였다’, ‘꿰매여졌다’(RSV), ‘공모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다. 요나단의 사랑에는 ‘희생’이 들어가 있다. 20:12-17에서 요나단과 다윗은 ‘우정’을 기초로 언약을 맺는다. 요나단은 자신이 살아 있을 동안에 자신에게 인자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했다. 20:17에는 ‘사랑’이 세 번 반복된다. 다윗은 요나단이 계약에 충실해 주시도록, 즉 자비(헤세드)를 베풀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런데, 다윗이 궁지에 몰린 것처럼 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요나단이 궁지에 몰린 심정으로 다윗에게 ‘인자’를 구하고 있다(14,15절). 요나단과 다윗은 우정으로(인자) 계약을 맺었다. 원래 언약은 피로 맺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우정은 ‘피’와 연결된다. 요나단이 생각한 우정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바쳐서 보여주는 우정이다. 그러므로 요나단의 우정은 피(생명)이요, 두 사람의 우정은 견고하게 되었다. 우정은 친구에게 평강과 용기를 준다. 목회자에게서 친구의 우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석에서 발을 씻겨 주시면서 가르쳐 주신 것처럼, 자기 희생을 통해서 맺어진다. 우정을 나누는 관계에서는 ‘경쟁’이 들어오면 안 된다. 참된 우정에는 위험과 고통과 눈물이 따라 온다. 요나단이 사울과 달리 순수한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것도 경쟁해야 하는 관계인데도 요나단이 하나님 편에서 다윗의 미래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우정은 희망을 보게 하므로 우정어린 목회자는 낙심한 자에게 희망을 주고 받을 수 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평화를 준 것처럼 친구로부터 평화를 선물로 받을 수 있다. 3.5. 광야에서 3.5.1. 사람들의 섬김 속에서 사무엘상 21-26장은 광야에서 도망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는 다윗의 삶이 나타난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하는 길에서 놉의 신전에 도착했다. 거기서 제사장 아히멜렉을 만난다. 다윗은 급하고 중요한 임무를 떠맡았다고 주장한다. 아히멜렉은 다윗을 의심하지 않고 목숨을 유지하게 도와 준다. 다윗은 놉을 떠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갔다. 다윗은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하였다. 22:6-23에는 사울이 아히멜렉의 가족을 전멸시키는 내용이 나온다. 그들은 다윗을 위해 희생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아히멜렉은 다윗에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숨을 걸고 다윗을 변호했다. 6-23절, 사울이 아히멜렉의 가족을 전멸시킨 이유는 그들이 다윗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살아가는 삶의 여정에는 온갖 장애물이 있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만 있다면 어떻게 의인이 살아갈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마다 사람들을 통해서 보호하시고 이끄신다. 목회자의 인생도 결코 홀로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를 맛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사람들을 동역자로 세워주신 것에 감사할 뿐이다. 3.5.2. 아둘람 공동체: 공동체 훈련 가드에서 도망한 다윗이 아둘람 굴에 숨자 4백명의 ‘아둘람 공동체’가 만들어졌다(22:1-5). 그들은 ‘한난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리정돈 되지 않는 오합지졸(아웃사이더들, 마이너러티)이었다. 이들은 고난받는 다윗을 통해서 위로를 받고 희망을 찾는다. 다윗은 자신이 고통을 겪어 보았기에 그들을 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시글락에서도 형제들과 공동체를 이루고 살게 되었다: 환난당한 자, 빚진 자, 원통한 자들로 이루어진 ‘히브리인들’이 공동체를 이루었다. C. S. 루이스는 「고통의 문제」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고통을 겪고 있을 때에는 많은 지식보다 작은 용기가, 큰 용기보다 작은 인정(love)이, 그리고 이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가장 작은 사랑이 더 도움이 된다는 확신 외에는 독자들에게 줄 것이 없다.” 고통스런 현실을 만날 때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진단하는 일은 중요하다. 타인의 인생에 대한 인정을 가진 다윗에게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다윗은 이제 공동체를 섬기는 목자로 성장해 갔다. 다윗과 함께 한 공동체는 문제 많은 사람들로 이루어졌으므로 골치아픈 일들이 늘 생겼을 것이다. 상처받은 이들의 모임이므로, 그들은 더 많이 상처주고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속한 공동체는 사울의 공동체에 비해서 작은 그룹이었지만 오히려 지도자가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에, 그리고 오히려 작은 그룹이었기 때문에 따뜻한 정이 흐르고 문제를 해결할 힘이 강해졌다. 다윗은 곤경에 처했지만, 그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원하신 구약의 ‘교회’였다. 스탠리 J. 그랜즈는 「하나님의 비전」에서 “우리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공동체는 하나님의 비전이다”라고 했다. 예수께서도 작은 무리지만,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교회의 모형과 선교공동체의 미래를 보여주셨다. 이처럼 목회자는 교회는 함께 코이노니아를 이룰 수 있는 모임이 있어야 함을 늘 기억하고 “여러분은 성경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리고 동역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는 조언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3.5.3. 타인의 인생에 대한 관용과 태도 다윗은 엔게디의 동굴에서 사울을 살려 준다(24:1-7). 아비새가 다윗에게 사울을 창으로 죽이겠다고 하자, 다윗은 아비새에게 “여호와께서 기름 부으신 사람을 해치고도 죄를 면제받을 사람은 없다.”며 막았다. 사울은 어떤 방식으로든 죽을 것이나, 사울을 죽이는 자에게는 벌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다윗은 자신이 왕이 될 것을 확신한다. 승리는 뻔한 것이라고 칼을 함부로 휘두는 일을 하지는 않는다. 성급하게 행동하기 보다 좀더 기다려 보는 것이 중요하다. 승산이 있다고 힘을 쓰는 자들이 있다. 우리는 늘 그런 유혹에 직면해 있다.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관용’인데, 다윗은 사울에게 관용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진정한 왕이다. 사울은 관용을 약속하지만, 늘 현실 앞에서 힘의 논리만 생각하다 보니 관용할 수 없었다. 힘의 논리에 서 있는 사람은 관용을 알 수 없다! 지도자로서의 목회자에게 ‘관용’이 필요하며, 잘못을 한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판단하려는 여유가 목회자에게 요구된다. 3.5.4. 광야에서의 자립신앙 26:23,24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여호와께서는 옳은 일을 하고 충성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신다고 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의 생명을 아껴 주었듯이 여호와께서도 자신의 생명을 아껴 주시며 모든 어려운 일에서 나를 구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다윗은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는 광야에서 목숨을 내놓고 살았지만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길을 아시고, 하나님은 의롭고 신실하셔서 생명을 소중히 여긴 것을 갚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목회자도 다윗처럼 악을 행하지 않았는데 오해를 받을 수 있고 쫓길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훈련이므로, 목회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을 믿고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다윗의 길은 예수님의 길이다. 예수님은 고독을 아셨고 홀로된 자의 고통을 아셨기에 제자들을 고아로 홀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목회자는 홀로 섰을 때, 주님 앞에 서게 하신 은총으로 여기고 자신을 성찰할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3.5.5. 시글락 공동체와 브솔 시내: 긍휼의 사람으로=다윗 승리의 결정적인 근거 사무엘상 30장을 보면, 시글락으로 가던 다윗은 아말렉에서 낙오된 이집트 노예 한 명을 극진히 돌보았다. 다윗은 광야생활을 하면서 떠도는 사람, 광야에서 굶주린 마음, 광야에서 버림받은 외로운 처지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사람을 향한 동정심(compassion)은 결코 궁중에서 생길 수 있는 게 아니다. 약한 자를 돌보았을 때, 그가 다윗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 30:18-20에는 다윗이 도로 찾고 획득한 사람과 물품과 가축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전리품을 나눌 때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생겼다. 전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취급받는 것을 부당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래이터는 이들이 “악하고 나쁜”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들이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같은 사람들로 취급했다(30:23-25). 약자 중심의 윤리관이 없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적(경제적 가치 중심의) 윤리관으로 공동체를 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다윗의 자비(compassion)처럼 약한 자들과 함께하는(com) 정(passion)을 가져야 한다. 사랑을 베풀지 않아도 되는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것처럼 행동하고 사명이 오늘 우리 교회와 목자들에게 주어졌다. 타인의 견해를 존중하면서도 ‘긍휼’과 ‘이웃사랑’의 관점에서 단호하게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그는 전쟁에 나가지 못해도 그들의 연약함을 이해했고, 전쟁에서 상처받은 사람을 온 힘을 다해 섬겼다. 목회자는 자신의 그릇이 넓어져야 하며 동시에 자신이 맡은 공동체가 사랑과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사랑의 그릇을 키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때 교회에는 인간미가 넘쳐날 것이다. 3.6. 다윗을 통해 본 목회자의 “영적 훈련” 다윗은 광야와 궁중 훈련을 통해서 그 인격의 변화를 경험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도 성품의 변화는 목회에 필수적인 것인데, 이런 변호는 “영적 훈련”으로 가능해진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The Cost of Discipleship)에서 ‘영적 훈련은 은혜로의 통로’라고 했다. 우리가 받은 은혜는 값없이 주어진 것이지만, 그 은혜를 ‘현재’ ‘풍성히’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격의 변화를 포함한 영적 훈련을 받아야만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형상(성품)은 훈련이라는 과정을 통과할 때 고매하게 변화된다. 훈련이 때로는 고달프고 지치게 하여 삶의 회의를 느끼게 할지라도, 바로 이 훈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아름다운 성품을 가지고 성숙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이 영적 훈련으로 성품이 변화된다고 할 때, 그의 개성이 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목회자가 개성은 하나님께서 유지시켜 주시면서 영적 훈련으로 목회자가 교회를 섬길만한 합당한 사람으로 훈련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목회자가 영적 훈련으로 맺게 될 성품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성령의 열매이므로, 하나님께 늘 ‘순종’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성령의 은사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다고 해도, 그 사람에게 성령의 열매인 그리스도의 성품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공동체의 조화로움을 저해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갈 5:25-26). 바울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에 상응하는 성령의 열매가 없이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행사하는 것은 가증스러운 상황을 만들어 내게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닮은 성품은 신자의 생활 속에 존재하는 성령의 영향력과 능력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러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목회자의 성품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뜻이 원칙임을 명심하고 그 분의 뜻에 순종함으로서 형성된다. 만일 목회자가 성품에서 비난을 받는다면 그 책임은 목회자 자신에게 있다. 목회자가 책임을 느끼지 못하고, 환경이나 기질 탓으로 돌리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4. 이스라엘의 목자 4.1. 애가를 부르는 목자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기리는 애가를 불렀다. 다윗은 유다 백성에게 이 노래를 가르치라고 명령했다. 다윗의 비범함이란 원수같은 존재를 하나님 편에서 ‘왕’이요 ‘친구’로서 존중하며 그들의 죽음을 두고 고통을 몸소 겪는 데 있다. 그의 노래에는 용서와 사랑과 우정과 고통이 어우러져 있다. 다윗은 한 인간이 정신분열증적인 삶으로 고통하는 ‘내면’을 목도했다. 그랬기에 다윗은 기쁨의 노래가 아니라 슬픔의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 특히 요나단을 사랑했기 때문에 비탄의 노래를 부른다. 목회자는 타인의 인생이 겪는 마음의 갈등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정신분열증적인 신앙생활로, 말과 행실이 신앙의 고백과 마음의 감격이 따로 놀기 때문에 생기는 권태감과 조울증으로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서 불쌍히 여기고 그들의 고통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어떤 문제로 애통했던지, 주님께 나와서 애통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셨다. 이 시대에는 애통할 줄 아는 ‘비범한’ 사람이 요청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고통의 현실이므로 목회자는 사람들 속에서 나오는 비탄의 소리, 성경 안에 계시된 비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사랑’은 이런 비탄의 소리를 듣고 비탄의 소리를 노래할 수 있는 것이다. 4.2. 21세기 세대를 섬기는 목자로서의 목회자 다윗이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기까지 훈련받은 과정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은 목회자를 공동체로 인도하시면서도 동시에 1대1로 도우셨다.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돕는 것은 사람을 돕는 데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영혼을 섬기는 목자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는 ‘목자의 심정’이다. 목자는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연민의 정, 애정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터득한 ‘목자의 심정’은 이 세대를 위한 것이요,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세대와 다음 세대에 목회자가 목자의 심정을 갖고 돌봐야 하는 대상은 누구이며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흔히 지금 세대를 ‘N세대’라고 한다. 목회자가 성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는 그 세대에 맞는 교육 철학과 프로그램을 적용해야 하므로, 세대 이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N세대가 속한 청년기는 아동기와 성인기의 중간 단계로서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했던 아동이 한 사람의 독립된 성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준비기이며 과도기이다. 정체감을 획득하기 위해 청년기 개인들은 과거에 자신과 가족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형성된 유대 관계를 해체하고 다시 형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함께 미래를 위한 방향 설정을 해야 한다. 디지털 매체에서 아이들의 스스로 참여하는 지식 활용은 복잡한 두뇌구조 형성과 지능개발에 도움을 주게 된다. 동시에 N세대는 생활에 바쁜 부모를 두었기 때문에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어 가정의 돌봄이 요구되는 세대다. 만일 목회자들이 현 세대에 대해 바르게 이해한다면, 목회자들과 교회의 관심으로 새 세대는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목회자는 늘 세대의 목자임을 기억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세대의 영혼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기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5. 다윗의 목자 5.1. 사무엘 다윗은 19:18-24에서 다윗은 라마로 가서 사무엘을 만나 자신의 목자인 사무엘을 통해서 실질적인 신앙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그는 죽음의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사무엘을 찾아가 희망을 얻었다. 다윗의 모델이 된 사울은 12장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한다. 사무엘은 자신의 정직한 삶을 여호와와 기름부음 받은 자가 증거한다고 백성들에게 말했다. 목회자도 인간이요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기에, 자신의 삶에 사랑으로 관심을 가져 주는 목자가 필요한데, 흔히 이른 사람을 멘토라고 한다. 5.2. 다윗의 목자이신 여호와의 훈련 5.2.1. 목자이신 하나님을 따르는 양으로서의 목자 다윗은,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하나님’을 목자로 삼고 하나님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으로 부름받았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뜻을 삶으로 백성들이 전시할 수 있기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것이 참으로 중요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세상에 나가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도록 부름받았다. 5.2.2. 하나님께 묻는 훈련 다윗은 법궤를 옮길 때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 다윗이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 물어야 한다. 다윗이 스스로 판단하여 정치적 안정과 왕국의 정통성을 세우려고 한 시도들을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여호와의 기름부음받은 왕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떠나서는 정체성과 합법성을 세울 수 없다. 사울과 비교했을 때 다윗이 가진 장점은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이런 변화를 위해 주어졌고, 언제나 변함없이 변화의 능력이다(딤후 3:16-17). 성경 말씀이 실제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말씀을 우리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적용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행동과 생활에 간섭하시고 영적인 습관을 형성하도록 인도해 가신다. 현대 사회에서 사단은 시끄러움과 조급함과 혼잡함을 통해 일한다. 목회자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묵상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광야와 같이 힘든 환경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묵상(meditation)은 히브리어로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이 ‘씹는’ 의미와 ‘혼잣말을 하다’, ‘ 중얼거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의미도 있지만, 순종한다는 뜻도 있다. 생각을 많이 하고 그 생각을 반복하여 씹어 볼수록, 우리는 성경의 사상이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더 잘 보게 된다. 묵상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준비나 순종할 태도가 더 분명한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대로, 우리가 깊은 묵상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예수님과 친한 친구 관계”가 되며 기독교 묵상 가운데서도 성경 묵상은 “성경에 의도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거듭 생각함으로써 성경을 꼭 붙잡게 되는 과정이며, 하나의 생각을 여러 번 씹는 것이다. 5.2.3.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라 사무엘상 4-7장에서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할 때 법궤가 그들의 진에 오면 승리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가 패한 적이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는 자유롭다. 그러나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존경하지 않거나 겁내지 않을 때 공동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진정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있다면 “여호와의 궤가 어찌 내게 오리요?”라는 고백을 동시에 해야 한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이용하거나 개인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거룩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거룩’, ‘영적’ 등의 수식어를 사용하면서 자신과 공동체의 뜻을 합리화하거나 지나친 낙관론에 빠져서 신앙의 용어를 자신의 행동/삶과 분리시켜 사용한다면, 그(들)는 ‘기회주의자(들)’다. 하나님께서 그(들)이게 따끔한 충고를 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편의대로 이용하려는 유혹 앞에 강한 자가 없다! 5.3.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는 목자 여호와: if와 neverthless의 긴장 다윗 언약의 내용은 왕조 하사와 입양이다. 다윗은 여호와을 위해 집을 지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은 사고 패턴을 바꾸시고는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건축하리라”(7:11)고 말씀하신다. 다윗의 후손이 죄를 지어도 반역한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받는 징계는 받지만 결코 제거되지는 않는다는 약속이 다윗 언약의 핵심이다. 만약 하나님이 요구하신 조건에 맞지 않으면 그것은 언약의 파기를 뜻한다(출 19:5): 그런데 다윗 언약의 특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이스라엘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과연 이스라엘의 역사를 볼 때, 다윗의 언약은 ‘무조건적’인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명기에 기초한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멸망한다. 그들은 ‘만약’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긴장관계를 놓쳤다. 다윗이 무조건적으로 헌신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다윗 언약을 성취하신 것은 은총이다. 유대인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믿는 자들을 부르시는 것 역시 은총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주시는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결여될 때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것처럼 현재 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무조건적으로 충성하는 것이 ‘긴장’을 갖고 사는 신앙이다. 6. 목자의 번영과 위기 6.1. 성공은 하나님의 선물, 감사의 마음은 공의의 실현으로 사무엘하의 나래이터는 다윗의 번영에 대해서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밝힌다(8:6). 다윗 역시 자신의 승리는 여호와께서 주신 선물임을 알았기 때문에 전리품으로 얻은 금은이나 선물로 받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 하나님께 바치는 행위가 백성들에게는 공평과 정의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난다(8:15). 다윗은 자신에게 있는 것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온 선물임을 알았기 때문에 공평과 정의로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수 있었다. 한 국가에 공평과 정의가 흐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스리는 사람들에게 첫째 책임이 있다. 교회는 공평과 정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하며, 내부적으로 공과 의를 경험해야 한다. 목회자가 번영을 경험할 때,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 번영은 오직 주님의 것이며 인간의 욕심을 채우는 부분은 아니다. 6.2. 목자의 위기 6.2.1. 밧세바 스캔들(삼하 9-12장): 은밀히 행하였으나→백주에 행하리라 다윗은 자신의 허물을 감추기 위해 요압을 통해 결국 충성스런 우리아를 죽이도록 했다. 다윗은 때가 되어 우리아의 아내를 아내로 맞았다. 모든 일이 다윗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진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을 지켜보고 계셨다. 다윗은 은밀히 일을 꾸미고 평안을 만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은밀히 행한 죄를 드러내겠다고 하셨다(삼하 12:11-12). 밧세바 사건은 아담과 하와의 ‘원죄’와 같이 심각한 죄의 침투였다. 인간이므로,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는데도, 자신의 연약함을 그는 잊어버렸던 것이다. 다윗은 왕권을 남용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임무를 망각하고 남의 아내를 빼앗았다. 나단 선지자의 비난을 듣고 회개하는 다윗의 모습에서, 이스라엘에는 다윗성에 거하는 왕보다 더 큰 하늘의 왕이 계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목회자가에게 조그마한 힘이라도 주어진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샬롬을 위한 힘이다. 샬롬을 가져다 주어야 할 사람이 힘을 남용할 때, 신앙공동체는 엔샬롬의 공동체가 될 뿐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죄다.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섬기는 종”으로서의 리더쉽이 필요하다. 6.2.2. 인구조사 ①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24장은 그 유명한 인구조사 사건이다. 사무엘하 24:1에서 여호와께서는 갑자기 분노하신다. 독자들은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학자들은 아마도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범죄가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다윗 왕국의 영광을 보면서,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져,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영광이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사무엘서에서 ‘영광’은 중요한 메시지가 된다. 사울처럼 누구든지 이 영광을 하나님에게서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인식할 때 비극은 시작된다. 다윗은 영광을 하나님에게서 취하자, 신하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요압의 조언을 듣기 싫어하며, “섬기는 직분으로서의 왕직”을 망각하고 군림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왕들의 모델로서 누구보다 성전을 사모했다. 이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보여주는 법궤를 갈망한 데서 발견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목회적 자질이 잘 준비되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의 손에서 멀어졌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알지 못하다가, “여호와의 손”(24:14)에 자신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갑자기 회개를 한다. 다윗은 영광스런 권세를 누리면서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에게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손에서 멀어질 때 인간은 교만해지고 자신이 이룬 업적에만 관심을 갖게 된다. 이때 하나님의 징계는 임한다. 어쩌면, 그러한 징계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믿었다.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손에 빠지는 것이 은총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자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총을 알게 되고, 그는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은 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이상 처벌에 대해서 하나님과 논쟁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용서를 구하고 기도할 뿐이었다. ② 역전의 하나님 우리는 여기서, 목회자는 자신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성에 거리가 멀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도 멀어진다. 반대로 하나님의 손에 맡겨진 인생임을 알 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만 기도할 뿐이다. 목회자의 인생도 ‘역전의 하나님’에게서 예외가 될 수 없다. 항상 인생은 역동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목회자로 부름받은 것이나, 한 때의 번영에 도취되기 보다, 늘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거리에 민감해야 할 것이다. 늘 순종하는 삶을 살며, 늘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영광(דבכ)을 돌리지 않으면, 다윗의 예에서 본 것처럼 언제나 “역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반대로 살아간 사울의 인생은 먼 데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편, 다윗과 같이 선지자를 통해 들려오는 하나님의 목소리를, 늦게라도, 듣고 하나님의 손에 인생을 맡기는 것은 목회자들이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손 아래서는 자존심을 세울 필요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자신의 전 삶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고,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도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셨다.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다윗처럼 그리스도처럼 언제나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리고 그 손에 맡겨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7. 마치며 ⑴ 목자로의 부름 받을 때의 시대적 배경: 다윗은 그의 스승인 사무엘과 동시대의 사람으로서, “말씀이 희귀한 시대”를 섬기는 하나님 왕국의 왕으로 부름받았다. 그는 백성들이 신정보다는 열방과 같이 강력한 통치력을 원하고 하나님은 강력한 신정왕국을 원하던 때에 양을 치던 소년에서 이스라엘의 목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는 “목자같은 왕을 갈망하던 시대”였다. 오늘날도 다윗의 시대와 비슷한 영적 상황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목회자는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애쓰며 영혼의 목자가 되려는 각오를 해야 할 것이다. ⑵ 목자로의 부르심: 다윗의 목자 직분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기름을 부음받았다는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임을 보여주며, 그의 인간 조건을 보아서도 이스라엘의 목자직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로 선택과 버림을 결정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확립해야 하며, 동시에 목회자는 성도들을 대할 때도 외모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지각으로 중심을 볼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⑶ 목자훈련: 다윗은 곧바로 이스라엘의 목자로 역할을 수행하지 않았다. 그는 “궁중에서” 정신적으로나 신앙적으로 피폐한 사울을 섬기는 일을 배웠다. “전쟁의 현장에서” 말과 행동이 분리되고 외침과 찬양과 자원함이 분리된 가현설적인 시대에서 우리에게 양치기 다윗의 훈련을 받았다. “인간관계에서”에서는 사랑받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훈련을 받았다. “친구관계”에서는 요나단의 우정 언약을 배웠다. 요나단의 우정은 피(생명)이요, 친구에게 생명과 안식과 평강과 용기를 주었다. “광야에서” 다윗은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를 맛볼 때, 우리는 주님께서 지켜주시고 사람들을 동역자로 세워주신 것에 감사해야 함을 배웠다. “아둘람 공동체”에서는 공동체 훈련을 받았다. 타인의 인생에 대한 관용과 태도를 배웠다. 그는 광야에서의 자립신앙을 터득하고 시글락 공동체와 브솔 시내에서 긍휼의 사람으로 훈련되었다. 다윗을 통해 목회자의 “영적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⑷ 이스라엘의 목자: 다윗은 이스라엘의 목자의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슬픈 현실을 슬프게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우리가 사는 세상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고통의 현실이므로 목회자는 사람들 속에서 나오는 비탄의 소리, 성경 안에 계시된 비탄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현 시대의 목자가 되기 위해서는 현 세대와 오고오는 세대에 대한 관찰과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목회자는 늘 세대의 목자임을 기억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세대의 영혼을 섬기는 종으로서 자기 인식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 ⑸ 다윗의 목자: 다윗의 목자는 사무엘과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사무엘”은 다윗을 키웠고 삶으로 모범을 보여 주었다. “다윗의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의미도 있지만, 순종한다는 뜻도 있다. 목회자는 “하나님을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다윗과 언약을 맺으시는 목자 여호와” 하나님에게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배우면서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와 “만약”의 긴장 속에서 목회자는 살아간다. 목회자는 부족하고 허물이 많은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주시는 은혜에 감사해야 하는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무조건적인 순종이 결여될 때 심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⑹ 목자의 번영과 위기: 다윗에게 있어서 성공은 하나님의 선물, 감사의 마음은 공의의 실현이다. “밧세바 사건”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는 직분을 수행할 수 없었는데도, 자신의 연약함을 그는 잊어버렸다. 이스라엘에는 다윗성에 거하는 왕보다 더 큰 하늘의 왕이 계시다는 사실을 다윗은 망각했다. 목자가 자신이 은혜로 사는 존재임을 알지 못할 때 위기로 넘어간다. “인구조사”에서 다윗은 목자의 “인생은 여호와의 손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는 하나님의 손에서 멀어졌을 때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을 의식하자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총을 알게 되고, 그는 사람의 손에 빠지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쫓기는 것은 피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더 이상 처벌에 대해서 하나님과 논쟁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역전의 하나님”이 되셔서 아무리 훌륭한 목자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멀어질 때 비참한 심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순종하는 삶을 살며, 늘 하나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다윗의 예에서 본 것처럼 언제나 “역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늘 긴장을 하고 은혜와 선물을 기억하면서 순종하는 목회를 먼저 행해야 할 것이다. 참고 자료 김애순․윤진. 「청년기 갈등과 자기이해」. 중앙적성출판사. 1997. 김정우. 「시편강해Ⅱ」. 도서출판 엠마오. 2000. 김지찬. 「거룩하신 여호와 앞에 누가 능히 서리요」. 한국성서학연구소. 2003. ______. 「언어의 직공이 되어라」. 생명의말씀사. 2000. ______.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구약 역사서의 문예적-신학적 서론」. 생명의말씀사. 1999. 대천덕. “한국교회여.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 「예수원안내」. 예수원. 2001. 사미자. “성격과 신앙의 상관성에 관한 고찰”. 「교회와 신학」 1998년 봄호. 옥한흠. 「평신도를 깨운다」. 두란노. 1996. 이태훈. 「구약성경에서 배운다」. 이레서원. 2001. 장근영. 「청년기의 갈등과 자기이해 강의록」. 연세대 심리학과. 1998 장휘숙. 「청년심리학」. 학지사. 1999. 정주채. “21세기형 목회유형에 따른 교회건축의 방향”. 「목회와신학」1995년 1월호. 조옥진. 「성격유형과 그리스도인의 영성」. 생활성서사. 1996. 최정훈 외 5인 공저. 「인간행동의 기초」. 학지사. 1999. 홍숙기. 「성격심리학」. 박영사. 1987. 홍인종. “청년 우울증의 원인과 그 대책”. 「목회와 신학」. 두란노. 2000년 2월호 황상민. “N세대를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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