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사전/- 마르틴 루터

[스크랩] 마틴 루터-(1)

에반젤(복음) 2022. 5. 19. 02:46

 마틴 루터(1)

마틴 루터가 명실공히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나타났을 때 
유럽은 여러모로 루터에게 유리한 형편에 놓여있었다. 
당시 유럽의 중심은 신성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였다. 
다시 말하자면 전유럽의 막대한 권력과 부는 
이들 몇몇 소수의 나라들에 의해서 좌우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림잡아 인구 4백만의 영국, 인구 8백만의 스페인, 1천 6백만의 프랑스 시민, 
1천 2백만의 이탈리아인 그리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대략 2천만의 독일 시민들에게는 
종교의 문제가 곧 정치와 경제의 문제로까지 연결되는 중요한 것이었다. 
이들 나라 중 유독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인 독일인들만이 
아직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지 못하여 
도저히 단합되고 통일된 힘의 집중을 형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독일은 압도적으로 많은 시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강력한 군대 하나 제대고 유지하지 못했다. 
이러한 힘의 약세는 어쩔 수 없이 분열된 봉건 영주의 권력구조를 
형성시킬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고 
그 결과 필연적으로 외부의 압력에 시달리는 고통까지 수반하였다. 
약삭빠른 로마 교황청은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열망속에서 
강력한 통치기반을 확보한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보다는 당연히 
분열된 독일에서 더욱 더 엄청난 재정적 착취를 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터가 "은혜로 인한 믿음으로 의인"이 된다는 
이신칭의(iustification by faith through grace)교리를 주장하기 전 
이미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가 과연 적법한가?'에 의문을 제기했을 때 
독일인들은 전적으로 루터를 환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의 환호 속에는 단순히 교황청의 경제적 착취에 대한 
그 동안 쌓여왔던 반항 뿐만이 아니라 독일인의 민족적 자부심에 먹칠한 
교황청의 정치적 억압에 대한 증오와 경멸이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볼 때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와같은 
정치 경제적인 요소 이상의 더 절박한 문제에 접근하였다. 
그것은 바로 중세 말기 이후 산발적으로 터져나왔던 부패한 카톨릭 교회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감을 하나의 집약된 혁명적 세력으로써 나타낸 결정적인 것이다. 
루터는 이 혁명적인 세력을 종교개혁 초기에는 기독교적 인문주의자로부터 
그리고 종교개혁 진행 중에는 대부분 독일 귀족들로부터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무엇보다도 루터는 죄와 죽음과 심판의 심연에서 시달리는 
수 많은 영흔들로부터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은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세 원리 곧, 
오직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오직 은혜만으로(sola gratia),
오직 민음만으로(sola fide)에 적극적으로 응답하여 중세의 한 제도 교회와 
그 제도 교회에 기초한 신앙의 교리체계를 붕괴시키는 철퇴를 가하였던 것이다.
Ⅰ. 시대배경 
15세기 말과 16세기 초는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맞물려 돌아가는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 영국의 토마스 모어 같은 
정치사상가가 배출되었고 미켈란젤로나 라파엘과 같은 탁월하고 뛰어난 
예술가의 작품들이 선보였으며 한쪽에서는 신세계를 발견하여 
전 유럽인을 흥분의 도가니로 만든 크리스토퍼 컬럼버스가 우뚝 서있었으며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하여 그 당시 문제가 되었던 
지구는 태양을 돈다는 혁명적인 신이론을 체계화한 코페르니쿠스가 살았던 시대였다. 
시대의 대세는 이미 변화와 창조적 활동을 간절히 요구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일련의 변화만으로 그 동안 묶여있던 중세사회 체제를 
단숨에 모두 바꾸었다는 말이 곁코 아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와 다양한 발전적 인간활동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아이들의 사산이나 흑사병과 같은 전염병은 인간의 통제 밖에서 
해결할 수 없어 내버려져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도 생활의 터전을 땅위에 두었기에 기근이나 홍수로 인한 
식량의 감소가 생기면 의식주 조차 해결하지 못해 구걸하는 거지 신세가 되었다. 
심지어 독일의 영주들은 매년 군사를 동원하여 이 거지떼들을 
자기의 영지에서 쫓아내는 것이 하나의 중요한 업무가 될 정도로 심각해졌다. 
사람들은 무정해졌고 강퍅해졌으며 폭력을 사용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익숙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종교적으로 16세기 초엽의 유럽인들은 
영적으로 신앙심이 매우 고양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날마다 죽음의 기로 앞에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전쟁, 기아과 흥수, 한 번 걸렸다 하면 바로 죽음으로 이어지고 마는 
저주의 흑사병, 어린아이들의 조기사산과 같은 죽음의 그림자는 
도처에 산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화가나 조각가들이 놓치지 않고 작품으로 잘 묘사한 것이 있으니 
그리스도는 죄를 사하는 인자하고 자비로운 구세주인 대신 
무지개 위에 앉아 죄인을 하나 하나 정죄하는 무서운 심판자로 그려졌다.
그림 속 그리스도의 오른쪽 귀에는 백합, 왼쪽에는 칼이 있었다. 
칼은 유황과 불의 심판을, 백합화는 부활하여 천국을 향해 가는 구원을 상징하였다. 
이런 그림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두려운 심판을 피해 구원받는 길을 찾고자 했다. 
교회는 이러한 절박한 심령으로 무거운 짐을 메고 찾아오는 자들에게 
오히려 "최선을 다하라" 곧 행동으로 백합화를 얻으라고 말해 
무거운 짐을 더 언지는 것을 조장했다. 
그 당시에 구원이란 개인의 최선의 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어졌다.
그래서 순례, 구걸, 성자와 성물숭배와 같은 것들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었다.
교회와 수도원은 이들의 영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한술 더 떠 
성인의 뼈나 머리털을 수집하여 진열하기까지 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에게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철저히 의무화하였다. 
만약 고해성사를 게을리하면 결국 연옥으로 떨어져 
그 대가를 톡톡히 치룬다고 으스름을 내놓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십자군 전쟁시에 고안된 면죄부는 16세기 초에 대단히 유행되었다. 
얼마나 죽음과 심판의 공포가 컸던지 경건한 사람일지라도 이 절망의 
깊은 나락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값비싼 면죄부를 사지않고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