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2)
II. 루터의 생애
1. 루터의 출생과 초기교육
루터는 1484년 11월 10일 인구 4,000명에 달하는 평범한 농촌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는 원래 농부였으나
세상에서 행운을 잡기 위해 의지적으로 광부가 되었다.
광부생활 7년만에 만스펠트의 번성하는 구리 광산의 소유주가 되는
큰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이어서 그곳의 시의원이 되는 명예를 누리게 되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아들 루터 또한 자기처럼
출세시키기로 확고 부동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루터는 만스펠트의 라틴어 학교에서 문법과 논리학 그리고
수사학의 기초를 주입식으로 교육받았다.
루터는 그 당시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라틴어 문법표를 잘 외우지 못해 회초리를 맞았던 적도 있었다.
1497년 그가 14살이 되었을 때 막데부르그의 공동생활 형제단으로 들어갔으니
이 형제단은 네덜란드 개혁 운동의 하나인 근대적 경건(devotio modana)이라는
평신도 분파에 속해 있었다.
이 형재단은 학교교육 뿐만 아니라
주택공급과 집을 떠난 남학생들을 관리하는 데도 헌신적으로 일했다.
루터는 이 형제단으로부터 경건 속에서 학문하는 아름다운 자세를 배웠다.
1년 후 아이제나하 성 게오르그 학교로 옮기게 되었으니
이 학교의 선생들은 루터에게 회초리의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 대신
꿈과 상상력을 키워 주는 열린 교육을 제공하였다.
루터는 여기에서 수필과 시를 지을 수 있는 능력을 배양했교
이솝, 테렌스 그리고 버질과 같은 뛰어난 고전작가들을 공부했다.
이 시기에 루터는 신앙적으로도 상당히 충실하였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그는 성가대에서 찬양했으며
보통 사람 이상의 경건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바야흐로 1501년에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 교양학부에 입학하였다.
1502년 9월 문학사, 1505년 1월 22에 17명의 학우들 중
차석으로 시험을 통과하여 좋은 성적을 빛내며 문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5월부터 동 대학에서 법률 공부를 시작했다.
루터는 이 대학에서 논변이나 대중토론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날카롭게 사물을 투시하는 지적 분석력을 함양하였다.
그는 가장 우수한 학생 중의 하나였다.
1505년 여름 부모를 만나고 난 후 루터 홀로 에르프르트(Erfiuz)대학으로
다시 되돌아가던 중 슈토트테른하임(Stottemheim)마을 부근에서
무시무시한 폭풍우를 갑자기 만나게 되었고 무섭게 몰아닥친 천둥소리에 놀라
꼬꾸라져버린 루터는 두려워 소리쳤다.
"도와주소서, 성 안나여(St. Anne)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왜 루터는 이렇게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갑자기 수도사 되겠다는 비장한 말을 했을까?
한스 힐데부란드(Hans J. Hillerbrand)가 적절하게 지적한 바와 같이
루터는 구원에 대한 불확실하고 불안한 심정을 이렇게 표출하였으리라.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루터가 수도사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은
이 사건이 처음이 아니라 그 보단 훨씬 전이었으나
아직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이 천둥 번개로 인하여 루터의 수도사 서원이 구체화되었턴 것이다.
2. 루터의 회심
수도사가 되기를 서원한 후 그가 22살 되던 해인 1505년 7윌 17일
에르프르트의 엄격한 규칙을 따르는 어거스틴파 은둔 수도원
(the black cloister of the Augustinian hermits)에 들어갔다.
이 수도원을 일명 검은 수도원이라고도 부르는데
그 이유는 검정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엄격히 통제된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간지 2년도 채 못되어 신추에 서품(1507년 3월)되고
첫번째 미사를 집례하기에 이르렀다.
이 짧은 기간에 그는 엄격한 수도원의 모든 규정들을 다 만족시켰다.
키텔슨은 루터의 수도원 훈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랜 기간 동안 아무 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으며, 또한 수면도 취하지 않으면서
뼈를 깎는 추위 속에서 옷을 입거나 담요를 뒤집어 쓰지도 않은 채 -
게다가 자기 몸을 채찍으로 때리면서 수행하는 것은 진지한
수도승의 삶에 있어서 일상적인 일이었으면 또 그러한 일이 요구되기도 하였다.
그는 단순히 기도나 금식, 궁핍, 탐욕의 흉내만 내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 진지하게 그것을 추구하였다.
그는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였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가족,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루터는 만년에 병 때문에 매우 고생을 하였는데, 이것도 아마
자신의 육체적 요구를 너무나 엄격하게 거부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격한 수도원의 규율을 거의 완벽하게 이행하여 그렇게도 빨리
정식 사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영적으로 여전히 행복하지 못했다.
그의 양심은 지속적으로 죄책감에 시달렸으며 이 죄를 사함받기 위해
지극히 작은 것까지도 가슴 아파하며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드렸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루터는 인간이 전폭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의 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기사랑과 자기이익에 기초한 한정된 사랑이기 때문이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결단코 문자적으로 완벽하게 지켜질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녀들을 사랑한다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자녀의 성공을 통해 자기만족이나 야망을 달성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으며
그 안에는 결국 자녀에 대한 강한 소유욕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루터는 자신 안에도 이와 동일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부분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이 흐르고 있음을 예리하게 간파하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흠도 점도 없는 완전한 헌신을 하나님께 드려
의롭고 거룩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단 말인가?
그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절망하고 또 절망하였다.
이러한 루터의 지서오가 헌신을 바로 옆에서 귀중하게 지켜보았던
어거스틴회 수도원장이자 비텐베르크 주교인 슈터우 피츠(Johannes von Staupitz)는
끊임없이 고통하는 루터에게 신학공부를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루터의 관심을 고행이나 금욕에서부터 성경으로 돌리게 했다.
이렇게 하여 루터는 성경에로 심취하게 되었고, 1509년 성경학사,
1512년에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기에 이르렀다.
신학공부 도중인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그는 로마를 방문하였다.
이 방문목적은 그가 소속한 수도원이 비텐베르크 주교좌에 소속되지 않고
독립 수도원으로 남을 수 있도록 로마 교황청에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루터는 에르푸르트 수도원의 대표로 뽑혀 수도원의 독립에 청원하는 쪽에 있었지만
일단 교황청이 이에 반대하는 뜻을 표명하자
비텐베르크의 주교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였다.
그는 개인적으로 스승인 슈타우피츠 주교에 아무런 적대심이 없었던 것이다.
한편 루터는 학문에 심취하였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이 당시의 교회 박사들의 책들을 탐독해 나갔다.
얼마나 열심히 읽었는지 그는 말년에도
그 책들을 줄줄 외우면서 인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편으로 루터는 독일 신비주의 영성 신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의 제도나 의식 그리고 선행보다 하나님과 직접 만나는
내면적 순례를 주장하던 타울러의 책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그는 타울러의 [독일신학]을 편집해서 출간할 정도로 타울러에게 매료되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신학박사가 된 루터는 스승의 자리였던
비텐베르크 대학의 성경신학 교수직을 이어받았다.
그는 그곳에서 시편강의, 로마서 강의, 갈라디아서 강의, 히브리서 강의,
그리고 다시 시편 강의를 하였다.
이들 강의를 하는 동안 루터에게 새빛이 비추어졌다.
그 새빛은 루터가 그렇게도 고민하던 구원을 이루는 방법이었다.
이 빛은 신비주의자처럼 명상을 통한 하나님의 본질에 접근하는 것이나
성례전이나 순례행위를 통해 얻어지는 것도 아니며
면죄부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는 것은 더 더욱 아니었다.
구원을 주는 새 빛은 다름아닌 후술하게 될
"오직 신앙만으로" 그리고 "오직 그리스도 만으로"를 의미하였다.
(롬1:17, 이신칭의)
구원을 그리스도의 은혜에 초점을 맞춤으로
그의 길고 긴 고통과 불안한 양심을 치유받았다.
루터는 그의 샘솟는 기쁨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는 모든 박사들의 전통과 관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의"란 표현을
철학적으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이 의롭게 되시고 죄인과 불의한 자들을
벌하시는 소위 "형식적인"-- 혹은 다른 말로 표현하여
"능동적인"-- 의로 이해하도록 가르침을 받았기에 그것을 혐오했다.
그러나 나는 그 의로우신 하나님, 벌하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었다.
나는 그를 혐오했다 . 나는 하나님이 매우 불쾌했다.
은밀히 하나님을 모독하기까지 하며 나는 정말이지 몹시 투덜거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원죄로 영원히 저주받은 비참한 죄인들이 십계명의 율법을 통한
온갖 재난으로 압박 당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단 말인가?
하나님께서는 심지어 복음을 통해서조차 고통 위에 고통을 더하시고
그의 의와 또 복음을 통한 진노로 우리를 위협하셔야만 하는가?...
나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의 문맥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기까지 밤낮으로 끊임없이 생각했다.
그 후에 나는 의인이 믿음을 뜻하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그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이 이렇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나님의 의가 복음을 통하여 나타났다.
즉, 우리는 소위 "수동적인" 의를 받는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은총과 자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써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이제 나는 다시 태어난 것으로 느껴졌다.
문들이 활짝 열렸고, 나는 낙원으로 들어섰다.
출처: 그리스도인의 복된 삶 원문보기 글쓴이: 주님찬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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