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디의 어머니
19세기가 낳은 신앙인, 세계적인 대부흥사 무디 선생의 이면에도 역시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박식이나 그 어떤 출중한 기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예가 바로 무디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 중에서 그의 확신과 겸손과 덕망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록 학교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으나 그는 영력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모든 선한 일에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덕을 베풀 줄 알았습니다. 무디 선생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동 노스필드의 드와이트 엘 무디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기록의 내용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내가 죽지 아니한 지금보다도 더 확실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나는 육신으로는 1837년에 태어났으나, 영혼으로는 1855년에 태어났습니다. 육신의 나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삶을 살면서도 영혼의 삶을 더 강하게 의식하고 산 위인의 이면에는 어린 아들의 마음속에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을 심어주고 길러준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7남 2녀를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고 길렀던 무디의 어머니 뱃시 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41년 5월. 41세의 젊은 나이에 무디의 아버지는 결혼 생활 12년 6개월 만에 노동에 지쳐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늘 밝은 희망이 서린 눈길로 내일을 기대하며 아이들 교육에 성의를 다하라고 말하던 남편, 빈곤과 많은 자녀들 때문에 걱정하는 아내를 다정하게 위로해 주던 남편을 생각하면서 뱃시 여사는 자녀들이 없는 틈을 타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에 지필 장작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다행히도 불쌍한 이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들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뗄나무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벳시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들을 돌보아 주시니 앞으로도 영원히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들은 어린 무디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엇이나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어머니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디는 어머니의 기도로 힘을 얻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갔습니다.
무디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에베랫 목사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으며, 이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에베랫 목사는 무디의 가정을 위해 많은 관심과 염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불친절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과부 혼자서 7남매를 기르려면 힘이 들 터이니 어린 자식들을 남의 집 양자나 양녀로 보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뱃시 여사는 남의 집 양자로 보내면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있겠으나 인간을 기르고 신앙심을 심어주는 교육은 어려울 것으로 알고, 귀중한 어린 생명들을 위해서 어떠한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자녀들을 함부로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자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는 거다. 선한 목사 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모두 나를 도와야 한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을 깊이 깨닫고 힘써서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아이들이 때로 말썽을 일으키면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본 아이들은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가정의 변함없는 일과의 하나는 식구들이 난로 둘레에 모여 앉아 어머니의 성경 이야기, 옛날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정신적인 양식이 무디의 영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실수나 장난을 꾸중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타일러도 순종하지 않고 고집을 피울 땐 맹 엄하게 벌을 주거나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이 자랄수록 관대하고 따뜻하게 대했으므로 집안은 항상 아늑하고 포근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만은 한결같이 엄격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책임감과 약속을 강조하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훌륭한 일임을 거듭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궁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집에 얻으려 오는 사람에게 관대하게 나누어 주어 자녀들에게 남을 돕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의 이같은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엔 아이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회학교에 출석하도록 했고, 교회 갈 때는 늘 하얀 깃이 달린 깨끗한 웃옷을 입혀서 보냈습니다. 온 식구가 하루 종일 예배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찬송가를 배우고 저녁예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요일은 가족들에게 대단히 즐겁고 보람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한 절씩 외웠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무디는 판에 박힌 듯한 가정생활에서 더 넓은 사회에 뛰어드는 모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도끼로 쪼개고, 톱으로 켜는 통나무 일을 팽개치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등지고 맨손으로 나온 무디는 외롭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벌도 기술도 없었고 나이도 어려서 취직할 곳도 없었습니다. 거리를 헤매던 끝에 그는 신문사에 배달부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실수로 실직당하고 구둣방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해 보아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사의 무례함과 사회의 냉대와 차가움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좌절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기도에 힘쓰라는 간곡한 부탁과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드린다는 편지를 받고, 무디는 다시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겸손해야 하고 저급한 자존심을 버려야 함을 깨닫고, 착실히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쓴 무디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차츰 함께하기 시작했고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날이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디는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하는 한편, 교회가 없는 벽촌에 교회학교를 세워서 많은 아동들을 교육시켰습니다. 마침내는 링컨 대통령이 와서 축복해 줄 정도로 그의 사역은 규모가 커졌습니다. 그는 이제 구둣방 일을 그만두고 갈급한 영혼들을 먹이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전도자의 생애를 시작하였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습니다. 가난과 냉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자신의 연약한 손으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 낸 어머니가 있었기에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무디의 어머니
19세기가 낳은 신앙인, 세계적인 대부흥사 무디 선생의 이면에도 역시 위대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움직이는 힘은 박식이나 그 어떤 출중한 기술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훌륭한 예가 바로 무디 선생의 이야기입니다.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 중에서 그의 확신과 겸손과 덕망에 감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비록 학교교육의 혜택은 거의 받지 못했으나 그는 영력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모든 선한 일에 이해 관계를 초월하여 덕을 베풀 줄 알았습니다. 무디 선생은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언젠가 여러분은 동 노스필드의 드와이트 엘 무디의 죽음에 대한 기록을 읽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기록의 내용을 믿지 마십시오. 그때는 내가 죽지 아니한 지금보다도 더 확실하게 살아 있는 것입니다....나는 육신으로는 1837년에 태어났으나, 영혼으로는 1855년에 태어났습니다. 육신의 나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의 나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육신의 삶을 살면서도 영혼의 삶을 더 강하게 의식하고 산 위인의 이면에는 어린 아들의 마음속에 보다 높은 차원의 신앙을 심어주고 길러준 한 어머니의 눈물겨운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극도로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7남 2녀를 정성과 사랑을 아끼지 않고 길렀던 무디의 어머니 뱃시 여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841년 5월. 41세의 젊은 나이에 무디의 아버지는 결혼 생활 12년 6개월 만에 노동에 지쳐서 먼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평소에 늘 밝은 희망이 서린 눈길로 내일을 기대하며 아이들 교육에 성의를 다하라고 말하던 남편, 빈곤과 많은 자녀들 때문에 걱정하는 아내를 다정하게 위로해 주던 남편을 생각하면서 뱃시 여사는 자녀들이 없는 틈을 타서 한없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울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당장 내일 아침에 지필 장작을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습니다. 다행히도 불쌍한 이들에게 동정과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나타나서 이들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뗄나무감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벳시 여사는 눈물을 흘리면서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나무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저희들을 돌보아 주시니 앞으로도 영원히 저희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기도를 들은 어린 무디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무엇이나 잘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어머니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아서 외롭지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습니다. 이와 같이 무디는 어머니의 기도로 힘을 얻고 성경 말씀을 묵상하면서 씩씩하게 살아갔습니다.
무디는 같은 동네에 사는 에베랫 목사를 무척 좋아하고 따랐으며, 이분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에베랫 목사는 무디의 가정을 위해 많은 관심과 염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무관심하고 불친절했습니다. 이들 가운데는 과부 혼자서 7남매를 기르려면 힘이 들 터이니 어린 자식들을 남의 집 양자나 양녀로 보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뱃시 여사는 남의 집 양자로 보내면 허기진 배를 채울 수는 있겠으나 인간을 기르고 신앙심을 심어주는 교육은 어려울 것으로 알고, 귀중한 어린 생명들을 위해서 어떠한 고난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습니다. 자녀들을 함부로 아무에게나 줄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녀는 자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하는 거다. 선한 목사 되신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시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거다. 그렇지만 너희들은 모두 나를 도와야 한다.”
이 말을 들은 자녀들은 어머니의 사랑과 믿음을 깊이 깨닫고 힘써서 어머니를 도왔습니다. 아이들이 때로 말썽을 일으키면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가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본 아이들은 더 이상 말썽을 부리지 않으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 가정의 변함없는 일과의 하나는 식구들이 난로 둘레에 모여 앉아 어머니의 성경 이야기, 옛날 이야기, 그리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정신적인 양식이 무디의 영혼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실수나 장난을 꾸중하지 않고,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자라게 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타일러도 순종하지 않고 고집을 피울 땐 맹 엄하게 벌을 주거나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이 자랄수록 관대하고 따뜻하게 대했으므로 집안은 항상 아늑하고 포근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만은 한결같이 엄격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책임감과 약속을 강조하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훌륭한 일임을 거듭 가르쳤습니다. 그녀는 궁색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집에 얻으려 오는 사람에게 관대하게 나누어 주어 자녀들에게 남을 돕는 본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녀의 이같은 행동에 주위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엔 아이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교회학교에 출석하도록 했고, 교회 갈 때는 늘 하얀 깃이 달린 깨끗한 웃옷을 입혀서 보냈습니다. 온 식구가 하루 종일 예배당에서 성경공부를 하고 찬송가를 배우고 저녁예배 후에 집으로 돌아오는 일요일은 가족들에게 대단히 즐겁고 보람있는 날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새벽 온 가족이 한 방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한 절씩 외웠습니다.
열일곱 살이 되자, 무디는 판에 박힌 듯한 가정생활에서 더 넓은 사회에 뛰어드는 모험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도끼로 쪼개고, 톱으로 켜는 통나무 일을 팽개치고 자신을 발전시키는 그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도시로 나갔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등지고 맨손으로 나온 무디는 외롭고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학벌도 기술도 없었고 나이도 어려서 취직할 곳도 없었습니다. 거리를 헤매던 끝에 그는 신문사에 배달부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실수로 실직당하고 구둣방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일을 해 보아도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상사의 무례함과 사회의 냉대와 차가움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좌절을 경험하는 가운데 그의 어머니로부터 기도에 힘쓰라는 간곡한 부탁과 자신을 위해 밤낮으로 기도드린다는 편지를 받고, 무디는 다시금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세상을 살아가려면 겸손해야 하고 저급한 자존심을 버려야 함을 깨닫고, 착실히 교회 생활을 했습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 중심으로 살려고 애쓴 무디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차츰 함께하기 시작했고 많은 결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나날이 주위 사람들의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디는 거리에서 노방 전도를 하는 한편, 교회가 없는 벽촌에 교회학교를 세워서 많은 아동들을 교육시켰습니다. 마침내는 링컨 대통령이 와서 축복해 줄 정도로 그의 사역은 규모가 커졌습니다. 그는 이제 구둣방 일을 그만두고 갈급한 영혼들을 먹이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위대한 전도자의 생애를 시작하였고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갔습니다. 가난과 냉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믿음을 지키면서 자신의 연약한 손으로 자녀들을 훌륭하게 키워 낸 어머니가 있었기에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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