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5-24-1 서로 용서하십시오
엡 4:25-32 나영석 목사 설교 교회는 완전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의롭고 완전한 사람들을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고 했습니다. 사실 교회는 온갖 죄인들이 모인 곳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죄인들이 모여서 의롭게 변화 되어 가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의 에베소 교회를 보십시오, 에베소 교회에도 ①헛된 삶을 사는 사람, ②거짓 말쟁이 ③도둑놈 ④더러운 말을 하는 사람들, ⑤사기꾼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전도를 받아 교회에 나왔는데 변화가 더디게 되다 보니 온갖 문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①거짓을 버려라, ②분을 내지 말라, ③도적질하지 말라, ④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 고 편지를 보내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 우리교회도 에베소 교회처럼 거짓말하는 교인들, 술 취하고 방탕한 교인들,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불평하고 화내는 교인들, 심지어 도둑질하는 교인들, 더러운 말을 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뭐 별로 다를 바가 없어요. 사실 불신자들이 이런 성도들의 삶을 보면 교회 나오기 힘듭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달라지지 않는 교인들, 과연 이런 교인들이 있는 교회가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요?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의 변화를 위해 교회가 존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예수 믿으면 생각이 변합니다. “이제 믿으니까 잘 살아야지, 조심해야지”, 그렇지만 하루 아침에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교인들이 모두 한 순간에 변화하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교인들이 변화하는 과정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견뎌야 합니다. 사실 제가 여러분에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저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여러 분들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신분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 되었습니다. 그러니 저는 여러분이 성도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변화하기를 바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덜 변화 되어 과거의 습성대로 술 먹고, 방탕하고, 거짓말하고, 호언 장담한 대로 하지 않고, 속이는 교인들이라도 저는 믿음의 눈으로 그 분들의 변화를 바라보고 기다립니다. 그리스도인으로 변화 될 때까지 견디어 내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하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변했습니다. 아주 조금, 그리고 변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변화는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많이 변해야 합니다. 주님 만나는 그 순간까지 변해가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서로 서로 변화 되기를 기다려 줘야 합니다. 정죄하지 말고, 비웃지 말고, 견제하지 말고, 따돌리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될 때까지 참아주고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면서 우리 공동체 서로 서로 견디어 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이 서로 서로 변화 되기를 기다리는 중에 변화되지 못한 서로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변화되지 못한 성도의 모습을 보게 될 때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서로를 향한 용서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제일 상처 많이 받는 곳이 어디일까요? 가정입니다. 그렇다고 가정을 모두 없애자 그럴 수는 없지요,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입니다. 좋은 가정은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가정이 서로를 향한 비난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런 가정은 세상을 따뜻하게 할 수 없습니다. 영적인 가정인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32절 이 그 대답입니다. 32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용서를 실천하는 방법은 첫째로 서로 친절히 대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일차적으로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도 친절히 대하면 용서를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 사용된 친절은 "크레스토스" 즉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 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과 상관없이 그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친절한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링컨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는데 늘 링컨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하고 심지어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뜻밖에도 스탠튼을 장관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링컨의 참모들은 어떻게 그런 사람을 장관으로 임명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링컨은 웃으면서 "그 자리에는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오"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용서를 실천 하는 방법 두 번 째는 서로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서로 불쌍히 여기라” 이 말을 어떤 번역은 '부드러운 마음'(tender heart)을 가지라 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은 '이해하는 마음을 가지라” 고 번역했습니다. “이해하는 마음”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그가 내게 행한 분통터지는 말이나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그를 둘러싼 삶의 역경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면 용서가 쉽습니다. 또한 기도하면 이해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나를 속상하게 한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를 핍박하는 사람, 힘들게 하는 사람, 심지어 원수까지 축복하며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히틀러의 참모였던 아히히만이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히히만의 재판 과정을 취재하던 유대인 기자는 이런 인간은 만천하가 보는 데서 극형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재판과정에서 아히히만의 일생을 그를 동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해는 용서의 열쇠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그를 이해하게 해달라고 먼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실천하는 방법 세 번 째는 주의 모범을 따르는 것입니다. 용서가 제일 힘들 때 제일 좋은 방법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이 제시하는 방법입니다. 32절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어지는 5:1에서도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 같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아시고, 보시면서도, 그리스도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고 용서 하셨습니다. 용서받았다고 우리가 하나님 마음에 쏙 들게 살아가느냐, 어떻습니까? 대부분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못삽니다. 우리는 용서받았어도 여전히 용서받아야 할 짓을 하고 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이키면 하나님께서 또 용서해 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여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하루에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좋을까요? 일곱 번 정도하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형제가 잘못하고 용서를 빌 때마다 끝없이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렇게 용서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용서 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용서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계속 용서 받고 있으니 나에게 잘못한 형제도 계속 용서해야 합니다. 또한 용서하라는 말씀이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차원에서 우리는 친절하게 하고, 불쌍히 여기며,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기는 하지만 완전하지 못합니다. 완전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완전하기를 바라면서 서로 기다려 줘야 합니다. 불 완전한 집사의 모습, 성도의 모습이 보이면, 서로 용서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삼면교회가 서로친절 하게 대하며 서로 이해하며 용서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유서 깊은 미국의 기독교 명문인 휘튼 대학의 총장을 지낸 분 가운데 허드슨 애머딩 박사 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한번은 그가 이 학교를 지원하는 후원 이사회로부터 심각한 사임 압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학생들이 자유화 되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학생들의 머리가 길어지고 심지어 어떤 학생들은 수염을 기르고 머리에 물을 드린다는 소문이 퍼진 것입니다. 점차 학교의 후원자들이 감소하고 학교는 재정적인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 학생들에게 호소했지만 학생들의 행동은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총장의 마음속에도 학생들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기도회가 채플에서 열리게 되었고, 총장의 권면 시간이 되자 그는 학생들을 바라보다가 머리가 긴 학생 하나를 강단으로 불러내었습니다. "자네와 자네의 친구들은 우리학교의 후원자들이 그렇게 싫어하는 긴 머리를 가지고 있네. 그리고 이 긴 머리 때문에 나와 내 동료 교수들이 그 동안 심적인 고통을 받고 있었던 것을 알리려 하네. 그러나 내가 자네를 이 앞으로 불러낸 이유는 자네를 정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네. 나와 나의 동료 교수들은 우리가 받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후원자들이 자네를 바라보는 식으로 자네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라네. 이 긴 머리와 상관없이 자네의 마음속에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고, 진리를 향한 열정을 갖고 있음을 믿고 있다는 것--우리는 자네들의 머리의 길이와 상관없이 자네들을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라네." 학생들은 일어나서 박수와 환호성으로 반응했고, 이후 스스로 머리를 깎고 기도하는 부흥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 합니다. 서로 사랑하라 요13:34-35, 요일4:16-21 어거스틴의 표현을 빌리면 "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 대해서는 관용을, 그리고 모든일에 사랑으로"인 것입니다. 미국에서 아더 힝클리(Arthur Hinkly)라는 이름을 가진 18살 먹은 소년이 무려 3000파운드의 무게가 나가는 트랙터(농장에서 일하는 자동차)를 혼자의 힘으로 들어올린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소년은 역도선수가 아니었고 타고난 장사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런 괴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었을까요? 한 날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다가 자기 여자친구의 비명소리를 들은 것입니다. 소녀가 언덕에 세워둔 트랙터 아래서 놀다가 갑자기 밀려 내려온 트랙터 바퀴에 이 소녀가 깔리게 되자 소리를 질렀고 이 비명을 듣자마자, 아더라는 소년은 달려가서 트랙터를 들어올린 것입니다. 이 소년의 힘은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의 힘은 비단 트랙터뿐만 아니라, 이 세상도 들어 올릴 수 있습니다.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힘이 바로 이 사랑의 힘이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터튤리안(Tertullian)이라는 교부의 글에 보면 초대 교인들은 종종 불신자들에게 전도할 때 "당신들은 그리스도인들 처럼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 일이 있습니까?"라는 말로 전도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기독교회는 이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었을까요? 교회사가 들에 의하면,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기독교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고 기독교가 소위 국교화 된 다음부터의 일이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정교회가 없어지고 소위 예배당 중심의 신앙으로 전환한 다음부터의 현상이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물을 떠난 물고기처럼, '가정'(집)이라는 사랑의 현장을 잃어버리자 우리는 사랑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께서 12제자들과 작별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주신 소위 다락방 강화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12명으로 구성된 셀 교회 교인들에게 이 교회의 가장 중요한 생활수칙으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명하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는 목장교회가 왜 중요한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만 이제부터는 목장교회 안에서의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첫째 메시지- 서로, 사랑하라-를 잘 이해하기 위한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1.사랑의 명령은 왜 중요합니까? ---주님의 새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새 계명이란 결코 처음 이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옛 계명의 핵심도 사랑입니다. 우리 주님은 구약에 나타난 모든 계명을 요약하여 그것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본래 이 계명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란 독선에 빠진 나머지 이웃사랑의 책임을 망각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런 이스라엘의 실패로 인하여 주님은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랑은 이제 영적 이스라엘인 교회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명령 곧 새로운 기대 이셨던 것입니다. 왜 사랑해야 합니까? 사랑은 주님의 명령이요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옵션이 아닙니다. 사랑해도 좋고 안 사랑해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사랑해야 합니다. 12명의 제자공동체는 바로 이 사랑의 숙제를 풀어야 할 사랑의 교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과거에 교육현장에서 콩나물시루 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한 교실 안에 학생들이 과다할 때 선생님에게는 학생들 하나 하나에게 신경 쓰는 것이 불가능했거니와 숙제검사조차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신앙의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생활 스타일이 만일 주일예배 중심이라면 우리에게는 사랑을 배울 기회도 실천할 공간 도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목장 교회 안에 들어가 10명 내외의 이웃들을 진지하게 사랑하는 것을 배운다면 자신도 변하고 공동체도 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여 이 작은 목장교회를 진실로 사랑의 공동체로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우리는 초대교회처럼 이 세상을 향하여 할말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12제자를 택하여 공동체가 되게 하신 주님의 기대요, 우리교회가 목장교회로 새롭게 출범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명령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그리스도인 기초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새로운 기대요, 마지막 기대이십니다. 2. 사랑의 명령은 어떻게 실천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면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에 앞서 선행하는 사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랑의 케이스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 케이스는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입니다. 사랑은 명사가 아닌 동사입니다. 예수님은 사랑을 말로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힘들고 아파하고 더럽혀진 이웃의 발을 씻기는 일입니다. 둘째 케이스는, 자신을 팔아 버리고자 한 가롯 유다의 배신을 아시고도 끝까지 그를 품에 안아주신 일입니다. 그가 주님을 버려도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유다는 스스로 스스로를 버렸을 따름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런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의지적 결단이 중요합니다. 의지적 결단이란 감정적 결단과 비교하시면 됩니다. 감정적으로는 사랑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음에도 그에게 여전히 만찬의 식탁에서 그에게 사랑의 잔을 건네어 주셨습니다. 저 유명한 화란의 할머니 코리 텐붐이 종전 후 언니와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던 라벤스 부르크 수용소 간수를 만나 악수의 손을 건넨 것도 마찬가지 결단이었습니다. 코리 할머니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의지적 결단을 먼저 했을 때에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도움도 따라올 수 있었다는 간증을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는 일부터 시작해 보십시오. 3.사랑의 명령의 실천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작고하신 기독교 철학자로 라브리 운동을 하신 프란시스 쉐이퍼 박사는 사랑을 가르쳐 그리스도의 '제자의 뱃지' 라는 말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철야기도를 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달한다고 해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경지식을 보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지식도 우리의 뱃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가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모든 것이 조건적이고 이기적인 세상에서 아직도 무조건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 존재하는가에 세상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작은 공동체인 목장에서 우리가 참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에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은 선교의 문을 여는 유일한 열쇠라고 할 만 합니다. 우리 가정에, 우리 사회에 아직도 선교의 문이 닫혀 있다면 우리가 사랑의 실천을 외면한 까닭일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1세기의 세상을 바꾼 현저한 이유중의 하나는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공동체 안에서 역동적인 사랑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습니까? 그 직전 말씀에 보면 "그들이 날마다 집에 모여 떡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교제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리스도인 가정교회 안에 있었던 사랑의 교제-이것이 불신자들을 믿음의 교제 안에 끌어들인 자력이었던 것입니다. 영국인들의 가슴속에 애절한 사랑으로 남아있는 사람가운데 앨리스라는 공주(Princess Alice)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디프테리아라는 병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왕실의 주치의는 공주에게 그 병의 전염성 때문에 딸과의 신체적 접촉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한 날 밤중에 딸의 고통스런 소리를 듣고 공주는 잠을 깨었습니다. 딸에게 달려가 보았더니 고열로 헛소리를 하며 공주 엄마에게 "엄마, 키스해주어요"(Mamma, kiss me!)라고 했고 공주는 의사의 말을 무시하고 딸에게 키스를 했습니다. 얼마 후 공주도 이 병에 감염되어 죽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공주님, 왜 그렇게 하셨어요?" "내 딸을 살릴 수 있다면 앞으로 열 번이라도 키스할 것입니다." 공주는 갔지만 딸을 살렸고 영국인들에게 사랑의 영원한 교훈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어머니의 사랑을 새롭게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의 사랑으로 이웃이 살아나고 이 세상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칠 수 있다면 우리도 이제 사랑의 실습장인 우리의 가정으로 그리고 확대된 우리들의 영적 가정인 목장교회로 돌아가셔서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시겠습니까?--"서로 사랑하라.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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