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 교육/설교방

[스크랩]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에반젤(복음) 2021. 12. 28. 22:23

디모데후서4장 9~18절/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우리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소방서나 국인들의 전선에 가보면 산꼭대기 여기저기에 유비무환이라고 크게 써 붙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앞날을 위해 준비하여 놓으면 환난(患難)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관점(管簟)에서 볼 때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일만 생각할 뿐 전혀 내일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오직 발등에 떨어진 불만 끌 뿐 앞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위급(危急)한 일을 만나면 준비해 놓은 것이 없으므로 당황(唐惶)하고 어쩔 줄을 모르게 됩니다. 마치 시험 전날에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항상 현재만을 생각하여 번번이 똑같은 잘못을 범하는 사람은 지극히 지혜롭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둘째는 항상 미래만 생각하고 꿈만 꾸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현실을 도외시하고 오직 무지개만 잡으려는 환상(幻想)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셋째는 미래를 현재에 옮겨 살 줄 아는 사람입니다. 현실(現實) 속에서 미래를 사는 사람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오늘의 생활 속에서 미래의 삶을 살 줄 알고 또 미래를 생각하고 그것을 위하여 대비하며 오늘을 살 줄 아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로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큰 복 중의 하나입니다. 사계절이 분명하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문명은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발달(發達)했다고 보아도 과언(誇言)이 아닐 것입니다. 사계절은 반복되는 무더위와 강추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매우 큰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각 계절을 맞이하기 위해 항상 준비(準備)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겨울이 오면 많은 것을 준비해야만 합니다.

기온에만 사계절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인생(人生)에도 이와 같은 사계절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봄과 같은 어린 시절이 있고 여름과 같이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청년 시절이 있는가? 하면, 가을과 같이 모든 노력(努力)의 결실(結實)을 맺고 뿌리고 가꾼 대로 수확(收穫)하는 장년 시절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이제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려야 하는 겨울과 같은 노년 시절도 있습니다. 사계절이 분명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이런 인생의 사계절을 깨닫게 해주기 때문에 더욱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지금 어느 계절에 속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4장 21절에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부탁(付託)하고 있습니다. 활동하기에 불편한 겨울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없이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울이 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오히려 겨울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두 번째로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풀려 나와 스페인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였지만 지금 그는 자신의 생애(生涯) 마지막이 오고 있음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디모데후서4장 6~8절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訃音)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冕旒冠)이 예비 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운 재판장(裁判長)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당시 그의 나이는 약70 세로 추측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常況)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자신이 이번에는 순교(殉敎)하리라고 예측(豫測)하였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내게 어서 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지중해는 겨울이 오면 바닷물이 얼어 항해를 할 수 없으니 겨울 전에 오라는 것입니다. 순교를 예측하는 사도 바울에게는 죽기 전에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만나보고 죽음을 대비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것입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이 왔고 관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부음이 되었다는 것은 피를 쏟아서 준비된 제단에 붓는다는 뜻입니다. 피를 쏟아 붓는 제사가 이미 드려지고 나의 인생은 이것으로 끝난다는 이 말은 이미 순교를 내다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죽음이 다가오면 사랑하는 자를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13절)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런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옷을 가져오라고 부탁(付託)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인 의미에서만 겨울을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의 인생애에서 가장 고독한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10~11절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10~11절) 바로 이러한 상황이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가 버린 뒤 혼자 겪는 외로움이 그를 더욱 춥게 만든 것입니다. 모두 가버렸습니다.

데마라는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이 데마라는 사람의 이름은 성경에 세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는 사도 바울이 그를 "나의 동역자"(몬1;24)로 불렀습니다. 골로새서4장 14절에는 아무 설명도 없이 데마라고만 기록되어 있고, 디모데후서4장 10절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떠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대로 그는 한때 사도 바울의 동행자였음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아무런 소득도 없고 오히려 감옥에 갇혀 죽을 것 같으니까 그만 세상으로 다시 나간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가 사도 바울을 추종했던 것은 처세나 혹은 어떤 이득을 바라고 따라왔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자 떠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이번 겨울이 더할 수 없이 쓸쓸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어떤 고난(苦難)도 동행자가 있으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라는 고통(苦痛), 외로움이라는 고통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마가 떠난 것을 몹시 마음 아파하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레스게와 디도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딴 곳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10절) 본인 스스로가 사도 바울을 배반하고 떠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의 일을 성취(成就)하기 위해서 떠나보낸 사람도 있었습니다. 임종(臨終)이 가까워 온다고 하여 붙들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야 하고 또한 계속하여야만 했습니다. 오직 한 사람 누가만이 그의 곁에 있었습니다.(11절)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쓴 사람으로 "사랑하는 의사 누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오랫동안 사도 바울과 동행한 사람으로서 사도행전에 자주 나오는 "우리"라는 말은 누가와 바울이 함께하였기 때문에 쓰여 진 말입니다. 이렇게 누가는 사도 바울과 오랫동안 동행하였고 가장 어려운 시기에도 함께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신실한 친구요 동역자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 바울은 가장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보고 싶었습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아니 죽기 전에 어서 오라고 애타게 디모데를 찾았습니다.

성경 본문의 앞뒤 문맥(文脈)을 살펴보면 그는 겨울이 가까워지자 자신을 반성(反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이 아름다운 결론을 얻었습니다. 7절에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결론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우리의 인생을 마칠 때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비겁하게 피해 다니거나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해서 일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선한 싸움에 도전하여 싸워 나가는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생명 있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믿음을 지키고 경주 장에 온 사람으로서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사도 바울의 인생의 결론을 우리의 인생의 결론이 될 수 있도록 노력(努力)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는 자기의 인생을 반성하면서 마가를 데려 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1절) 그 이유에 대하여는 우리가 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마가는 오순절 성령이 강림(降臨)했다는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마가입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사도 바울이 제1차전도 여행을 떠날 때에 따라갔었습니다. 그러나 전도여행 도중에 병에 걸려 보름 정도 꼼짝 못하고 고생하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마가를 간호하느라고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병이 겨우 완쾌(完快)되자 무슨 까닭인지 사도 바울과 동행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때 바울은 몹시 섭섭했었습니다.

그 후 제1차전도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어떻게 전도하여 복음을 전파했고, 이방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돌아오고 또 얼마나 많은 매를 맞고 고생했는지 등의 여행 결과를 보고할 때에 마가는 크게 후회(後悔)하며 반성(反省)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제2차전도 여행을 다시 떠나려 할 때에 찾아와서 동행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마가가 도중하차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나서겠다고 아무리 맹세를 하여도 사도 바울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너무나 강력하게 거절하자 바울과 동행하려던 바나바가 마가를 대신 데리고 여행을 떠나게 되었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다른 길로 전도 여행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마가는 무척 속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마가는 더욱더 열심히 전도하였고,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의 통역관으로 로마에 갔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소식을 모두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최후의 날이 가까워오자 바울은 마가와의 일을 괴로워하며 매우 마음 아파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그는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11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잘못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좀 더 바르고 곧게 하기 위해 거절한 것뿐입니다. 그러나 마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 또한 사실입니다. 때문에 그는 이 시간 그를 만나 화해를 하고, 격려해 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付託)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겨울이 다가올 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서로의 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무리 결과가 좋았다 하더라도, 그 결과가 그의 행동을 묵과하여 합리화시킬 수는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꼭 만나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이 그에게 유익하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비록 긴 여행이었지만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또한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13절) 이 가죽 종이란 헬라어로는 "비블리아", 곧 바이블(Bible),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책을 갖고 다니기가 편하지만 그 당시의 성경을 가죽 두루마리로서 너무 무거워 갖고 다니기 불편(不便)하였기 때문에 안면 있는 집에 부탁해 놓고 다녔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짐을 느낀 바울은 이제 맡겨 놓은 그의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 눈이 비록 어두워져서 보기는 힘들지만 그래도 임종이 가까워오니 이 성경을 다시 한 번 더 보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겨울이 가까워졌을 때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시겠습니까? 여러분도 매일 성경을 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워 오면 이것저것 해야 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어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사도 바울처럼 멀리 둔 성경책을 찾아다가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본문 14절을 읽다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구리 세공업지란 옛날에 구리로 무늬를 새겨 우상(偶像)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로 인하여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본다고 하여 바울을 많이 괴롭혔습니다. 바울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희에게 갚으시리니…"(14절)하며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내가 더 이상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너희도 저희를 주의하라"고 얘기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에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있으니 너도 그들을 주의하라, 그러나 주께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버리라"고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사도 바울이 회개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16절에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비록 처음 복음을 전할 때 열심히 동행하며 따라 다녔던 무리들이 모두 떠나 버렸고 또 당시에 그들의 행위가 매우 섭섭하기는 했지만 이제 돌이켜보니 그들이 떠난 이유가 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네게도 있었다고 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를 떠난 사람들을 원망하지 말라. 허물이 저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허물은 내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에게도 겨울이 가까워 오고 있는데, 아직도 남을 비판(批判)하고 내 모든 운명(運命의 잘못이 남에게 있다고 원망을 해야 합니까? 결코 국가나 사회나 가정이나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도 맙시다. 비록 우리가 예수님처럼 십자가에 못 박는 자나 나를 죽이는 자를 향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라고까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더 이상 허물을 남에게 돌리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진지하고 진실하게 회개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순간에 나를 부르더라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순종할 수 있는 유비무환의 준비 태세인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겨울은 오고야 맙니다. 우리는 겨울을 맞이하면서 김장을 담근다든지 혹은 난로를 들여놓는 등의 겨울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물량적 준비가 아닌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준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인생의 겨울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 시간 다시 한 번 우리의 믿음을 저울질해봅시다.

본문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확실하게 이를 믿고 있는지 다시 생각해봅시다. 그리고 혹 내가 잘못한 일은 없는가? 또 누구에게 섭섭한 마음을 준적은 없는가? 있다면 찾아가서 그의 손을 잡고 화해하고 격려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 말씀을 진실하게 되새기고 음미하면서 열심히 읽어봅시다. 전도서 12장에서는 젊었을 때에 기억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귀가 어두워지고 눈이 침침해지기 전에 갖추어 놓을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를 섭섭하게 했거나 원수처럼 괴롭혔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믿음의 준비를 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