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년주일설교. 와서 보라, 더 큰 일을 보리라 (요한복음 1장35-42절) ----------------------------------------------------------------------------------------------------------------------------------------- 지난 한 해를 돌이켜 보는 송년주일 예배로 함께 합니다. 코로나 질병이 온 세계를 얼어 붙게 만들어서 전 인류가 고통 속에 지내온지 2년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이 공포와 두려움에서 언제 벗어날지 기약이 없습니다. 교회 예배도 비대면 예배라는 생소한 단어가 이제는 익숙해졌고, 종교시설에도 집합금지, 시설폐쇄 라는 초유의 국가권력의 통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이 것 또한 지나 가리라(This, too, shall pass away)”는 다윗 왕의 반지에 새겨졌던 글귀처럼 언젠가는 코로나도 지나갈 겁니다.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점점 잊혀질 때도 올겁니다. 영생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삶의 시간은 안개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고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이 짧디 짧은 인생입니다. 우린 한정된 삶을 살아가지만,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지나간 한 해의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습니다. 과거에 집착하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지난 시간의 모든 과거를 예배의 은혜로 인하여 다 지우시고, 잊어 버리십시오. 죄 문제는 반드시 회개하고 진실한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2022년에는 더도 말도 덜도 말고 제가 늘 강조하고, 앞으로도 수백, 수천 번 더 말씀드릴 신앙의 기본(예배, 기도, 말씀, 찬양, 감사)을 습관화 하는 일만 결심해 보십시오. 결심대로 실천 하신다면, 아무리 고통의 현실이 지속된다고 하여도, 하늘에서 주시는 평안, 입술에서 나오는감사, 일상에서 벌어지는 형통함의 은혜가 충만하게 부어질 것입니다. 송년주일 예배로 함께하는 우리 모두가 새 마음, 새 결단, 새 믿음을 무장하고 한 해의 시간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복음의 용사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대림절, 성탄절을 은혜롭게 지내왔습니다. 이제는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나의 구원자, 나의 주인 나의 친구되시는 우리 주님과 내가 어떤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아가야 하는지를 늘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과 한 번 데이트 하고 끝낼 사이가 아니라면, 다음에 더 기분좋은 만남을 잘 준비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정말 기분 좋은 만남, 그리고 열린 미래에 대한 소망이 풍성하게 담겨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다섯 명의 제자들을 부르십니다. 기록된 대로 엄밀하게 구분하면, 두 명은 예수님을 따라갔고, 한 명은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나를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들었고, 두 명은 동생과 친구의 손에 이끌리어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다른 복음서에서의 상황과는 많이 다릅니다. 다섯 명의 상황이 다르지만 만남의 기쁨과 소망은 아주 특별하고도 남달랐습니다. 먼저 두 명의 제자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35-37절 말씀입니다.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아멘. 지금 이야기가 나오는 장소는 갈릴리 바닷가 근처의 ‘베다니’라는 어촌 마을입니다. 35절에서 나오는 ‘이튿날’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후 이튿날(그날의 다음날)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베다니 마을 거니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의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세례 요한의 제자 두 사람이 이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이 제자 두 명은 누구이고, 왜 이들은 세례요한이 한 말을 듣고 무슨 이유에서 예수님을 따라갔을까요? 세례 요한의 제자 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두 사람의 정체, 제가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누군지 기억나시나요? 한 명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이고, 또 한명은 베드로의 형제인 ‘안드레’입니다. 잘 기억하시고, 또 잊으셔도 됩니다. 그래야 제가 다음에 또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기죠. 사도요한과 안드레는 세례 요한을 따르던 제자 였는데,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 한 마디만 들었을 뿐인데, 즉시 세례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좋게 보면 쿨한 장면이지만 다소 황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세례 요한이 의도적으로 연출을 한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러 오실 때에 세례요한이 그 모습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 때 두 제자도 요단강가에서 보고 있다가 이 소리를 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이튿날 또 한 번 예수님을 보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같은 말을 했습니다. 요한이 두 번째 한 이 말은 제자들을 향한 일종의 싸인이었습니다. “저 분이 너희들이 따라가야 할 바로 그 분이다. 너희들이 저 분을 따라가게 만드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나의 역할은 끝났으니 얼른 저 분을 따라가라” 이렇게 싸인을 주고 허락을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이 더 좋은 스승 밑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모습이 참으로 흐뭇합니다. 사도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을 따라가자 예수님이 그들에게 “무엇을 구하느냐(표준새번역-무엇을 찾고 있느냐)” 라고 물으셨고, 두 사람은 “랍비(선생님)여 어디 계시니오니까(표준새번역-랍비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라고 대답합니다. 숙소를 물어본 것은 함께 머물며 가르침을 받겠다, 제자로 받아 달라는 유대인식 대화 화법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대답 하시기를 “와서 보라”라고 하십니다. “와서 보라”, 참 많은 것을 음미해 볼 수 있는 함축적인 말입니다. 재미있게 생각해 보면, 긴말 안하겠다, 실력으로 가르칠 수 있음을 증명할 터이니 내가 뭘 하는 사람인지 직접 와서 보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조금 진지한 의미로 보면, 몇 마디 말을 듣는다고 너희들이 다 이해하지 못할 터이니, 내가 무엇을 하는지 와서 보고 하나씩 배워 가도록 하라는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와서 보라”는 간단 명료한 말로 두 사람을 제자로 받아주셨습니다. 39절 후반 부에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라고 했습니다. 간단한 대화 몇 마디에 두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방을 쓰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바둑기사인 조훈현 9단이 1984년 당시 9살의 이창호를 내제자(집에서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친 이야기가 있습니다. 요한과 안드레가 예수님의 내제자 형식으로 받아들여진 셈입니다. 이후에 안드레가 자기의 형인 베드로를 예수님에게로 데려왔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말씀 하시기를,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지만 이제는 게바(반석)라는 이름으로 부르겠다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안드레, 사도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제자로 불러 주셨습니다. 자, 여기서 제가 의도적으로 빼 놓은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안드레가 자기 형인 베드로를 찾아가서 한 말입니다. “베드로 형! 내가 누굴 보았는지 알아, 내가 메시아를 보았어, 내가 그리스도를 보았어” 이 말을 전하고 형을 이끌어 예수님에게로 데리고 온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안드레에게 자신이 메시아라고, 그리스도라고 말씀 하신 적이 없습니다. “너희들이 무엇을 구하느냐?, 와서 보라” 딱 두마디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드레는 어째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그리스도라고 증거 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과의 만남속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비밀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단계별로 진행이 됩니다. ① 첫째, 예수님에게로 인도하여 주는 인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역할을 맡은 사람이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처럼, “보라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이런 말을 들려 줄 누군가가 필요 합니다. 두 제자는 인도자인 세례 요한의 말을 듣고, 즉시로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② 둘째, 예수님을 찾는 스스로의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겼고, “선생님(랍비여)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질문 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시고, 어디가야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해 볼 수 있있는가, 자꾸 묻고, 계속 찾아야 합니다. 그 해답은 진리의 성경에 전부 담겨 있습니다. 묻고, 찾는 이 과정은 만남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품게 합니다. ③ 셋째,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두 제자는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라고, 질문하고, 찾아가는 과정에 열심을 냈더니 드디어 초청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마음 중심에 예수님을 만나려는 포기하지 않는 열심, 열정이 있다면 반드시 예수님께서 만남을 허락하시는 초청의 음성(감동)을 들려 주실 것입니다. 그 때가 언제 올지 모를지라도 들릴 때까지 꿋꿋하게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④ 넷째, 예수님과 함께 있으며 구원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묵고 계신 곳에 함께 머물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의 동거(연합)와 동행이 시작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 시점에서부터 예수님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게 되고, 그로 인하여 구원 영생의 일체의 비밀을 깨닫게 됩니다. 이 때부터 믿음에 터가 잡히고 믿음이 자라나는 성장이 일어납니다. ⑤ 다섯째, 내가 믿는 예수님을 증거(증언)하는 것이 일생의 사명이 됩니다. 안드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자, 곧바로 자기 형에게 제일먼저 달려갔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는데, 믿음이 생성 되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을 자신의 일대 사명으로 여깁니다. 이 다섯째가 삶의 목표와 방향으로 정착 된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믿음을 지닌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이라 불리기에 합당합니다. 아 다섯과정이 믿음의 단계인데, 두 제자는 이 과정을 엄청난 속독과정으로 빠르게 습득을 했습니다. 안드레가 ““베드로 형! 내가 누굴 보았는지 알아, 내가 메시아를 보았어, 내가 그리스도를 보았어”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믿음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두 제자가 경험했던 것과 동일한 과정속에서 믿음을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인도자의 도움을 받았고, 예수님을 찾는 열심을 냈고, 초청의 음성(성령의 감동)을 들었고, 예수님과 연합과 동행을 하고 있고, 부활영생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이 반복되고 지속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계속 윗 단계로 상승 곡선을 그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섯 단계까지 가 보긴 했는데, 점점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한 번 현재 내 자신의 믿음의 위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디쯤 위치하고 있습니까? 대개 믿음이 약해져 있는 무감각과 무관심에 이르게 되면 2단계에서 멈추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열심과 열정이 없는 거죠. 신앙의 기본(예배, 기도, 말씀, 찬양, 감사)을 지켜가는 것을 귀찮아 하고, 습관으로 삶는 것에 무진장 게을러 집니다. 저도 여기쯤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 믿음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항상 3단계는 유지해야 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을 이루는 것, 이것은 거룩과 경건을 지켜 간다는 의미입니다. 또한, 예수님과의 동행은, 성령으로 항상 소통하고, 기도의 통로를 열어놓고 화목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단계에서 밀리지 않으면, 4, 5단계로 올라가면 올라갔지 2단계 이하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3단계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 적인 전제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2단계에서 보여준 예수님에 대한 열심과 열정입니다. 예수님은 알면 알수록 신비롭고 영광 스러운 분입니다. 더 찾고, 더 묻고, 더 알아가는 열심과 열정이 살아나야 3단계로 올라 설 수 있습니다. 그냥 가만이 있으면서 아무런 열심을 내지 못하면, 예수님과 나 사이는 침묵의 정적만 흐르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정해진 분량이 없습니다. 점점 자라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목표치는 예수님에게까지 자라난다고 했는데, 이것은 예수님으로부터 믿음을 인정 받고, 칭찬 받는 최종 단계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이 수준까지 올라가도록 항상 높은 단계를 지향하고, 굳센 믿음을 이루어 낙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안드레와 같이 내 형제, 내 이웃을 찾아가서, “내가 메시아를 보았어, 내가 그리스도를 보았어”라고 증언하는 일에 기쁨과 즐거움을 얻어야 합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올 한해 열심히 맡은 자리에서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대림절을 잘 보내시고 감격의 성탄절 만남의 시간도 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이제 믿음이 막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과 깊은 교제와 동행의 시간을 보내시면서, 더 굳센 믿음의 용사로, 더 강력한 복음의 증인으로 2022년을 설계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제 다른 두 명의 제자를 부르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43, 44절입니다.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아멘. 예수님이 빌립에게 “나를 따르라” 라고 말씀 하신 것은, 빌립이 1~5단계 까지의 믿음의 전 과정을 초고속 습득 했다는 것을 함축적으로 말해 줍니다. 아내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나온다는 속담이 있죠. 예수님 말씀만 잘 들으면 가만히 있어도 은혜 충만 성령 충만해 집니다. 빌립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앞 이야기 에서의 안드레와 같이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강한 마음이 일어나서 친구인 나다나엘을 찾아 갑니다. 45, 46절입니다.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아멘. ‘나다나엘’은 생소한 이름 같지만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바돌로매(탈마이의 아들, Son of Talmai)와 동일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12제자 중에 이름이 두개로 불리워지는 제자들이 있습니다. 베드로+게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작은 야고보)+다대오가 있습니다. 또 가나나인 시몬이라는 제자는 ‘셀롯’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이름이 아니고 ‘젤롯(zealots,열심당원-무장 혁명을 통해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도 하는 유대인 분파)’당원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성경 읽으실 때 이런 사람들의 이름은 자주 헷갈릴 수 있으니 두 이름을 함께 적어 놓으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의 율법에 기록되어 있고, 선지자(예언자)들이 에언 했던 메시아(그리스도)를 내가 만났는데, 그 분은 바로 목수인 요셉의 아들 예수님이셨다고 전해 줍니다. 나다나엘은 “무슨 나사렛 같은 시골 촌 동네에서 선한 것이 나느냐, 왕의 신분으로 오시는 존귀한 메시아가 날 수 있겠느냐”라고 의심하며 빌립의 말을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와서 보라”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빌립을 부를 때 하셨던 말씀을, 친구인 나다나엘에게 그대로 잰해 줍니다. 영화 감독들은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 영화감독의 작품속에 나오는 장면이나 대사를 자기가 연출하는 영화에 그대로 재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걸 ‘오마쥬(프랑스어로‘존경·경의’를 뜻함)라고 하는데, 빌립은 예수님의 말씀을 일종의 오마쥬하여 나다나엘에게 전도를 한 것입니다. ‘와서 보라’, 우리도 자주 오마쥬 해야 할 짧고 굵은 전도 용어입니다. ‘와서 보라’, 한 마디에 나다나엘은 예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시고 두 사람 간에 서로 대화가 오갑니다. 먼저 예수님이 말씀 하십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님이,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님이,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아멘 이런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나다나엘은 오래전부터 습관적으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메시아를 기다리는 소망을 품고 기도하며 지냈습니다. 이런 기도의 모습을 이미 예수님은 다 보고 계셨고, 다 알고 계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 주님께서 나다나엘에게 하신 이 말씀이 정말 영광스럽고 경이로운 말씀입니다. “내가 곧 메시아다, 그리스도다, 내가 이루어갈 성취의 영광을 너에게 보여주겠다”라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제자로 들어오기를 허락하심과 동시에, 하늘 영광을 누리게 하시고, 구원 영생의 일체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는 놀라은 은총을 내려 주셨습니다. “와서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 주님의 부르심의 음성과 영광의 광채를 펼쳐 보이시는 은혜가 우리가 이땅에서 누려야 할 은혜중의 은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1~2단계에 머물러 있으면 도저히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 구원 영생의 비밀을 감동적으로 느낄 수 없습니다. 믿음이 자라나고 견고해지면, 더 큰일을 보게 되고, 더 큰 감동과 은혜를 받고, 더 큰 소망가운데 기쁨의 일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 수준을 최고 수준까지 끌어 올려 주시려는 단 두 마디, ““와서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 주님의 음성이 들리시는데로 결단하고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마지막 51절입니다.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아멘. ‘진실로 진실로’라고 두 번 강조 하셨습니다.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질 말씀을 하실 때 진실로 진실로라고 하셨습니다. ‘와서 보라’고 하신 것은 인간 예수님의 얼굴을 보러 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이 열리는 장면을 보게되는 영안을 열어 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신 것은 기적을 많이 보여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 하늘 보좌의 광채, 권세와 심판의 주로 계시는 만왕의 왕의 모습을 보여주시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뜻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믿음 생활 한다는 것이 구원자 예수님을 믿고 영생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정도는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기쁨, 영원한 평안을,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날마다 보고, 날마다 감동 받고, 날마다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곧 나의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역사를 경험하며 사는 것, 이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주님은 믿음을 지닌 모든 사람들에게 진실로 진실로 이 약속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그 약속의 주인공이 본문에 나오는 다섯명의 제자들이었고, 오늘 말씀을 듣고 계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송년주일에 우리 주님은 “와서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 모두를부르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아멘”으로 응답하셔서, 따라가시고, 열심을 내시고, 초청의 음성을 들으시고, 구원 영생의 비밀을 간직하시고, 예수님의 이름만을 증거하는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새롭게 결단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00교회 모든 성도는 “와서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 주님의 부르심을 받은 택함 받은 존귀한 제자임을 잊지 마시고, 날마다 하늘 영광, 날마다 하늘 소망을 풍성하게 경험하며 평안가운데 한 해를 설계 하시는 믿음의 증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와서 보라,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우리를 불러 주시니 감사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여, 오직 믿음으로, 오직 영생의 소망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를 제자 삼고 믿음으로 인도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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