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출애굽기 강해

출애굽기 연구자료

에반젤(복음) 2019. 7. 9. 07:24



출애굽기(תומשׁ הלאו; Exod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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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교수,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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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의 중요성 : 이스라엘의 역사 중 가장 중요한 사건들의 하나가 바로 출애굽이다. 신명기 26장에서 보듯이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가장 크다. 우리가 출애굽기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의 사건과 관계없이 그저 하나님의 크신 능력과 은혜의 사건으로만 볼 것인가? 창세기부터 출애굽기까지는 연관된 역사이다. 그리고 출애굽기는 출발부터가 의미심장하다. 70인이 내려갔으나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고 이에 대해 세상 나라가 핍박하고, 그 핍박 때문에 세상 속에서 갈등과 투쟁을 한다. 결국 세상 속에서 교회는 싸울수 밖에 없다 = 전투하는 교회(militant church). 그러나 이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다.

출애굽기 전체 성격을 파악하려면 서론 1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박해 받는 것과 창세기를 어떻게 연결지을 수 있는가? 1:1-7에 나와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출발점이요 전체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출애굽기 1장의 내용 1-7절과 8-22절로 나눌 수 있는데 1-7절은 야곱의 혈속 = 예렉(허벅지) = 친혈족을 의미한다. 애굽에 내려간 이는 70인 이었는데 이들의 생육이 중다, 번식, 창성, 심히 강대해진 이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출애굽의 출발점이다. 관심의 촛점은 이스라엘(야곱)이고 이스라엘 역사가 주된 관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을 기업으로 택한 백성이기 때문이다.

70인이 심히 강대해진 것의 의미는 아브라함의 언약의 성취이다. 그리고 야곱에게 브엘세바에서 하나님이 밝히신 이유는 이 민족을 큰 민족을 이루고 그것이 이루어지면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 함(46:3), 즉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셨고(큰 민족 만드셨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의 약속을 이루시겠다. 즉 이는 창세기와 연결되며 출애굽의 배경이 밝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성취를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셨다. 이제 큰 일이 있게 되는데 이 시기를 사도행전 7:17절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1:8절 이스라엘 백성의 박해가 기록되어 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 - 새 왕조인가? 새로운 인물인가? 그 특징은 요셉이 애굽에 끼친 큰 공적을 모르는 이든지 아니면 요셉의 공적과는 관계없는 이일 것이다. 아마 공적과 관계없는 인물로서 새 왕조라 여겨짐, 즉 요셉을 아는 왕조는 Hyksos왕국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이 왕조는 셈족 출신, 요셉도 셈족 출신 같은 족속이므로 요셉에게 호의 베풀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한때 이 왕조가 애굽을 다스리다가 축출되고, 함족 출신의 왕이 새 왕족에 들어섰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1:9절 이 새 왕이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시작하는데 이스라엘의 강성은 애굽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이 우리보다 많고 강하도다”. 자기들 가운데 유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심히 강해지므로 박해한다. ? 강해지는 것을 불안해 했는가? 만일 다른 민족이 애굽에 쳐들어 올 때 그들과 합세하거나 도망갈까봐.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 외의 백성은 이방, 세상, 이방(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따라서 애굽의 박해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먼저 애굽으로 내려 보내셔서(세상 속에서) 큰 백성을 이루신다. 자기 나라에서 점점 강성해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세상은 점점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강대국이 하나의 약소민족을 압박, 착취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하나의 약소민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가 점점 강성해질 때 세상으로부터 박해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세상과 필연적으로 갖게되는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바로의 염려한 핵심은 이스라엘이 강성해져서 애굽을 떠날 것을 염려한 것이다. 바로가 다른 이민족과 연합할 것에 대한 염려였다면 이스라엘을 내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떠날 것을 염려한 그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큰 유익을 주는 것 같았다. 즉 경제적, 지적으로 애굽에게 상당한 유익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적정 수준에 묶어 두어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숫자만 남겨두어 자기 유익을 취하고자 즉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으려, 자기를 섬기게 하려고 하였다.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강성함을 두려워함으로 배제하려는 것만이 아니고 좀더 적극적 의지를 갖는데, 즉 세상은 하나님 나라를 이용하여 자기를 섬기게하여 자기의 유익을 취하려 한다. 이같은 바로의 의지는 세상왕국의 특성, 즉 죄와 마귀의 속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죄악 한 가운데 세워지며, 하나님 나라를 압박하는 세상은 항상 사단의 세력이 있어서 하나님 나라를 놔주려고 하지 않고 항상 자기 유익을 위하여 이용하고 자기를 섬기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노역을 강하게 시키나 이스라엘이 더 강해지고 산파들도 바로 왕의 말을 듣지않는다. 이것은 앞으로의 승리를 암시해준다. 바로가 사내아이를 다 죽이도록 하는 그 계획(이스라엘을 멸절시키려는) 가운데 오히려 이스라엘을 구출해내는 사람이 애굽의 보호 아래 애굽의 심장부에서 자라게 된다. 바로의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려는 자기의 계획 속에 자기를 멸망하게 하는 일이 진행된다. 출애굽의 역사는 사도행전의 역사와 유사한 점이 있다.

세상 핍박이 극에 달했을 때 이스라엘의 구원자인 모세가 태어난다. 죽음의 상징인 물 속에 모세는 갈대 바구니(תבת;테바트   방주)에 담겨있었다. 즉 노아의 방주처럼 또 하나의 방주에 넣어져서 물 속에 던져진 것이다. 바로의 공주에 의해 죽음의 영역인 물 속에서 건져져서 바로 공주의 아들, 왕자(prince)가 된다. 애굽의 모든 지혜를 배우고 말과 행위에 능하였다(사도행전). 애굽의 왕자로서의 교육은 통치자, 지도자로서의 교육이었다. 하나님 나라를 멸절시키려는 대적의 심장부에서 미래의 구원자를 교육시키시되 최고의, 당시에 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시키신다. 말도 능하였다는 말은 세상 모든 학식에 능함을 말한다. 당시 최강국 애굽의 교육, 당시 가장 이상적으로 부러워하는 대상이 되는 교육을 받았다. 당시 세상 교육은 강한 자가 칼과 무력으로 정복하는 통치자, 지도자의 이상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 세상 교육을 받은 모세가 동족을 구하기 위해 처음 행하였던 것은 칼과 무력으로 동족을 구원하려 함이었다. 이렇게 세상적인 방법으로 했을 때 실패한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 통치 방법은 세상 나라 통치 방법과는 다르다. 이것은 세상적인 방법으로 세련되게 조작하는 것과는 다르다.

1:1-7은 창세기와 연결시켜 볼 때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신 목적이 성취되었고 이제는 그 다음 단계의 역사를 기대하게 한다.

출애굽의 근본 의미는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이스라엘을 다시 이끌어내심이다. 큰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하나하나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내시고, 큰 민족을 이루시고, 다시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 즉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긍정적으로 하나하나 이루어져간다. 하나님의 그 큰 계획이 단순하게 이뤄지지 않고 복합된 상황에서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즉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박해를 당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 내려간 것은 외적인 생존 수단이 가장 풍성한 곳에 내려가 이스라엘을 번성하게 한다는 것만이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애굽 왕이 이스라엘을 박해한 것을 보면 애굽은 세상 나라로 볼 수 있다. 즉 일반화시켜 그 의미를 보면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하는 곳은 세상 가운데서이다. 세상에서 유리된 별천지가 아니라 세상 한 가운데서 비록 겨자씨 같이 미미하게 시작했어도 큰 나라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미하게 시작한 하나님 나라가 강성한 나라로 되자 세상 나라는 적대 세력으로 하나님 나라가 커지는 것을 방해하고 하나님 나라를 자기 손에서 자기 수준에서 조작할 수 있고 조종할 수 있는 상태로 이끌려고 한다. 아브라함 같은 미미한 존재로 하나님 나라가 존재할 때도 의와 공의의 증거로써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구실을 했다. 예로 소돔과 고모라 사건에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구실을 했었다. 출애굽기에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의 나라가 되기를 원하신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서 강력한 나라(물리적인 강력함이 아니다)이기를 원하셨다. 이 강력한 하나님 나라에 애굽이 위협을 느끼고 필연적으로 갈등이 일어난 것이다.

산아제한과 산파로 사내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나 더욱 창성, 번식하자 노골적으로 사내아이를 애굽 나일강에 버리도록 한다. 한 가문이 겪는 애환이나 강대국에게 착취당하는 약속민족의 비애를 보고 하나님께서 억압받는 백성을 어떻게 다루시는가를 보면서 해방신학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창세기부터 출애굽기를 연결시켜 볼 때 이런 관점은 틀리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와 교회와 세상 나라 세력 간의 갈등, 투쟁을 말하는 것이다. 이 갈등, 투쟁이 어떻게 끝날 것인가를 모세를 통해 암시해준다. 이스라엘에게 고역시키고 산파를 조정하려 했으나 바로의 계획은 다 실패하고 이스라엘이 더욱 창성, 번식하게 된다. 이어 바로의 가장 극단적인 계획(강물에 던지는 것) 속에서 모세가 건져냄을 입고, 바로의 공주의 손에 바로의 궁중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모세가 자란다. 바로 궁중의 교육은 왕자의 교육으로서 통치자의 교육이다. 이 교육은 미래 통치자로서의 교육이기에 모세는 세상적인 통치자로서의 교육을 받는다. 당시 최강국의 교육, 당시 사람들이 이상으로 삼는 통치자의 교육(칼과 무력으로 무자비하게 다스리고 통치하는 세상 나라의 교육)과 그 속성을 배우는 교육이었다(정복하고 통치함).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말씀하심, 18:36내 나라가 세상의 나라일것 같으면...”

2:11절 앞으로 모세가 어떻게 사역을 할 것인가를 보여준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나 뜻은 분명하다. 2:13-14절 모세가 민족으로부터 배척을 받는다. 이는 배은망덕한 태도(백성을 염려한 모세의 애정과 염려를 배척하는 것 같은 태도) 같으나, 출애굽기의 사건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 사건을 조명해 보면 이 배척은 좀더 깊은 뜻이 있다. 이 반문에 깊은 암시가 있다(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로 삼았느냐). 누가 자기를 통치자, 지도자로 세워주지도 않았는데 바로의 궁정에서 받은 통치자의 이상에 따른 통치방법으로 백성을 다스리려 했다. 통치자의 태도와 통치 방식에 큰 문제가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이 세우지도 않았는데 자신을 지도자로 자천한 것. 세상은 자기의 힘으로 지도자직을 탈취하려 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께서 세우신다. 하나님으로부터 세우심을 받아야 한다. 자신이 되고 싶다고 해서 되지않는다. 세상 나라의 leadership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aggressive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신다. 몇 십년 동안 세상 교육을 받은 채, 그 생각이 바뀌지 않은 채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잘못이다.

통치 방식에 문제가 있다. 내 힘으로 칼과 무력으로 쳐 죽인다. 네가...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이 반문은 무력으로 살륙하는 방식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를 암시한다. 이 통치 방식이 자기 백성에게 가해질 때 자기 백성을 칼로 죽이는 방식이 된다. 하나님이 요구하는 지도자의 성품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하시는지를 볼 수 있다.

2:11절 이제 하나님의 교육이 나온다. 세상의 통치자 이상의 교육을 받고 애굽의 모든 학식과 교육을 받았으나 이 세상 통치 방식이 실패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교육이 시작된다. 미디안 광야로 들어간다. 십보라와 결혼하고, 양치는 목동 생활을 한다. 40년간 목동 생활이 하나님의 구체적 교육 내용과 방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없으나 추측할 수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모세가 부르심 받았을 때,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한다. 내가 누구관대, 나는 말할 줄 모른다고 사양, 그러나 행 7:22에 보면 말과 행동에 능한 자로 모세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태도에서 40년간의 교육 통해 모세가 얼마나 낮아졌는가, 겸손해졌는가를 볼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오묘한 성경의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뜻한다. 자신은 철저히 무능하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달려있다고 철저히 맡기는 확신, 세상에서 받은 모든 것, 모든 교육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용지물임을 깊이 깨닫고 그런 세상의 것이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변화되어 하나님께 쓰여져야 할 것을 깊이 깨닫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님의 교육 = 양들을 치는 목동생활(양들은 우둔하고 일일이 사람의 손이 필요한 동물), 아마도 목회가 이와같은 성격의 일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모세의 태도를 보라 - 차라리 내가 죽겠다고 탄식한다.

2:23-25절 애굽 왕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 상달되고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셨다. 앞으로 하실 하나님의 행위는 물론 이스라엘의 부르짖음 때문이기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성취의 역사에 대한 진전이요, 계속이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개입하여 새로운 역사를 일으키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나님 개입의 필요성 암시, 모세를 죽이려는 왕이 죽었으므로 모세의 귀환을 암시하는 표현이 나온다. 하나님의 역사는 족장들의 역사와 깊은 관계가 있다.

3장 모세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내용이다. 모세가 양을 치면서 호렙산에 와서 이상한 현상을 본다. 가시떨기에 불이 붙었으나 타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그곳에 계시므로 접근하지 말라하시고, 여기서 하나님을 뵙게된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 사명을 주신다.

8절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당함을 보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손으로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 וליצהל דראו(와에레드 레하칠로) 하나님께서 내려오셨다는 표현은 바벨탑 사건, 소돔과 고모라 사건 때도 나온다. 하나님께서 내려오심 =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 개입(incarnation),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실 것을 암시한다.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귀환하는 것, 아브라함, 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다. 특히 후자의 약속(야곱에게 하신 약속)의 성취이요 그 다음 단계의 일을 행할 때가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

3:10절 내가 너를 보낸다. 모세가 자기 백성을 무력으로 구원해 보려 할 때와 매우 다르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고 보내신다. 즉 모세가 사명을 받음이다. 8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도록 부르심과 보내심을 받는다. 이스라엘을 해방(구원) 땅에로 인도(자유), ...을 향한 자유 - 적극적 자유(...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 가장 기본적인 부분과 기초적인 부분에서 점검하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바로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유케하여 약속의 땅으로 돌이키는 사명,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서 이 백성을 구원하겠는가?” 이 때는 모세가 좀더 현실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로 궁중 당시는 돈키호테처럼 순진하게 민족을 구하려 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미화시키는 것이다. 모세가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강대국 바로에게 모세 일 개인이 가서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쨌든 모세는 자기가 철저히 무능함을 깨달았다. 자기 힘으로 그 강력한 세상 세력에서 이스라엘을 구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에 대한 고백은 정당하고 꼭 필요한 것이다. 신자는 절대 현실적이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Be Ambitions’는 옳지 않다.

철저히 무능을 고백하는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하겠다 - 즉 이것은 네가 하는 일이 아니요 이것은 내가 하는 일이다. 너는 하나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하심.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므로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가능하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나라는 하나님이 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사람은 자기가 자기 영광을 위해 자기 힘으로 하므로 하나님 나라를 다 망가뜨리는 자이다.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다. 성경에 자기 힘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망가뜨린 사람이 많았다. 자기부정으로 끝나면 낙심과 좌절밖에 없으므로 자기 부정하는 사람에게 또한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있어야 한다. 자기를 부정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데 이 새로운 가능성은 하나님께 있다(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하는 이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짐). 하나님의 사람은 이런 기본적인 원칙이 확실해야 한다.

3:12절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하셔서 그의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증표, 표적이 있는데 이 때의 표적은 미래의 표적이다. 이 표적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현재에 나타내 보이는 것인데 모세에게 주신 표적은 미래적 표적이다(미래적 표적도 있다) - ‘이 산에서 나를 섬기리니

3:13절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םשׁ() = 그가 누구시요 어떤 분이요? Who is He? 이름은 그 사람의 본질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14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I will be what I will be = היהא רשׁא היהא;에흐예 아쉐르 에흐예  = “나는 내가 되고자 하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바로 나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일면을 나타내주며 또한 일면은 숨긴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말함, 누가 나를 규정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즉 나는 나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에 따라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분, 또 달리 표현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본질을 꿰뚫어 알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님께서 친히 나타내 보여주기 전에는 그분이 자신의 계획을 알리시기 전에는 아무도 알 사람이 없다. 그가 원하시는 뜻대로 행하시는 자요,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타내 주는가에 따른 계시에 따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 가에 따라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분이다. 즉 앞으로 행해질 이스라엘에 대한 계시에 따라 하나님이 알려질 것을 나타내 준다.

3:15절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리라. 조상에게 나타내 보여 주셨던 하나님과 연속성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이스라엘 가운데서 행해질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데 따라서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을 부를 때 사용되는 칭호 오고오는 세대 동안 바로 이러한 하나님으로(출애굽 시키신 하나님) 불리울 것이요 알려질 것이다.

* 출애굽의 의미는 새로운 시대를 출현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요, 따라서 아빕월로 새 달을 삼는 것은 새로운 시대를 나타낸다. 즉 영원한 이름, 대대로 기억할 표호의 의미는 하나님은 앞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으로 기억될 것을 말한다.

3:16-22절은 하나님의 행하실 역사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4장에 모세가 그래도 사양한다. 나는 무능한 자이므로 못맡겠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가지 능력을 행할 수 있는 기적을 보이신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능력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있겠다는 약속과 관련 내가 너를 통해 큰 역사를 이루겠고 그것으로 내가 어떤 자인 것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능력으로 하나님을 보이시며 그들로 순종케 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적은 항상 믿음을 주기 위한 것이다(신약에서도 마찬가지).

4:10절에 계속해서 말 못하는 자라 사양하자, 아론을 대변인으로 삼아서 가라하심. 모세가 주저할 때마다 그것에 추가되어 모세의 사명이 분명해지고 하나님의 뜻이 명확해진다. 모세의 궁중교육과 광야 목동생활 전체로 인해 모세는 하나님이 쓰실만한 사람이 된다(자기부정 하나님의 능력 표현).

4:13절 하나님 그만 하십시요. 보낼 딴 사람을 찾아 보십시요. 하나님이 노하시고 가라하신다. 이일을 통해 복합적인 뜻이 있는데(가라, 못 가겠읍니다. 할 때 이런 일련의 행동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쓰임받는 자로 하여금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게 함이요, 무능한자와 함께 하나님이 역사하시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 무능한 것을 알리시고 무능한 자로 하나님이 함께하셔 하나님이 이루심을 보이신다는 것이다.

부수적으로 하나님이 기묘하게 이루시는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떻게 역사하실 것이며, 그가 사용하실 도구를 세우실 계기가 된다. 즉 모세와 아론이 부르심과 세우심을 입고, 모세를 통해 이루어질 출애굽의 사건은 결정적인 사건이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되게 하신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시편 등의 성경에서 말한다. 출애굽이 결정적인 사건임을 잘 드러내주는 성경구절은 출 3:14 이스라엘의 출애굽시키실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 할까요? 이는 모세 자신의 질문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내가 누군인가는 앞으로 사건을 통해 가르쳐 줄 것이다. 이 명칭은 대대로 영원한 기념 칭호가 될 것이다. 오고오는 세대를 통해 이스라엘 가운데 출애굽을 행하신 하나님으로 기억될 것이다.

4:22-23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바로 앞에 서서 어떤 말을 하라고 하셨나? 출애굽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밝혀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요 이스라엘을 내보내어 나를 섬기게 하라” = 이것이 출애굽의 의미의 핵심이다. 여기서 출애굽의 최종적 목적이 나타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겨서 구원얻는 것은 아니다. 출애굽이 예표적 사건이라 할 때 구원의 목표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임을 보여준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해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삶, 이것이 진정한 삶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생명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나?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 하나님을 섬기는 것 즉,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요, 삶이요, 축복이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이룬다0는 것은 내가 의로운 행위로 구원을 사는 것,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해드려 그 댓가로 구원을 얻는 것이다. 이는 구원의 가장 큰 방해거리요, 사단의 가장 교묘한 속임수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 하나님 백성으로 사는 것, 구원하신 목적 자체가 율법을 지키는 것, 구원하신 것에 감사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도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한 것이요, 하나님 은혜의 핵심은 성령이시다. 하나님 섬기는 그 자체가 나의 생명이요 축복이다. 이것이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고 하나님께 무엇인가 해 드리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자신의 신앙을 check해봐야 한다.

4:24-26절 수수께끼 같은 불가해한 사건이 나온다. 모세를 여호와의 사자가 죽이려 하신다. 십보라가 그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다. ‘당신은 나의 피의 남편이요...’, 이는 모세 아들의 할례에 관한 사건으로 이제까지 모세의 아들이 할례를 받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행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 여기서 피의 남편이라는 이 뜻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드로는 모세의 장인으로 미디안의 제사장이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길리가 없고 이방인으로 자기의 신을 섬겼을 것이다. 그 지방 제사장과 함께 살므로 모세가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놓지 않은지도 모르고 그래서 자기 아내, 아들에게 자기의 신앙이 받아들여지도록 되지 않은 것 같다. 즉 언약 백성으로서 자신을 내보이지 못함을 추측할수 있다. 피의 남편이라 함은 육체의 남편만이 아니고 언약과 연결된 신앙의 동질성을 십보라가 인식하게 된 사건이 아닌가 보여진다. 정확한 해석은 알 수 없고 추측해 볼 수 있다.

5장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고하고 표적을 행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믿는다.

열 재앙의 의미(7:8-12:36)

1. 나일강의 물이 피가 되게 함(7:14-25) - 나일강의 신 Nilus 징치

2. 개구리로 온 땅을 덮게 함(8:1-15) - 다산신인 개구리 형상의 Hekt 징치

3. 애굽 온 땅의 티끌이 이(빈대, 모기)가 되게 함(8:16-19) - 땅의 신 Seb 징치

4. 파리떼 일으켜 사람들과 짐승들 쏘게 함(8:20-24) - 투구풍뎅이 신 Khephera 징치

5. 모든 생축이 악질이 생겨 죽게 함(9:1-8) - 수소와 암소의 신 ApisHathor 징치

6. 재를 뿌려 독종(붉게 타들어가는 피부병;)이 생기게 함(9:9-12) - 악마의 눈을 가진 신 Typhon 징치

7. 하늘에서 우박이 내리게 함(9:18-21) - 대기의 신 Shu 징치

8. 메뚜기로 푸른 곡식을 먹게 함(10:4-19) - 곡식을 지켜주는 신 Serapis 징치

9. 캄캄한 흑암이 3일간 온 애굽을 덮게 함(10:21-29) - 태양신 Ra 징치

10. 장자를 죽이는 재앙(12:29-33) - 생명의 신 Ptah 징치

7:10절 구체적으로 바로 앞에 가서 행하라고 하시는데, 바로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알려주신다(바로가 강퍅해질 것). 11절은 지팡이가 뱀이된다. 애굽의 술객도 지팡이로 뱀이 되게한다. םיפשׁכמ(메카쉐핌; 박사), ימטרה(하르테메; 박수), םהיטהל(라하테헴; 술객) 단순히 마술을 행하여 눈속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령의 도움을 받아 악령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다. 계몽주의의 영향이 여러가지 해를 끼치는데 미신이라 하여 쓸데없는 공포로부터 해방시켰다고 하는데 오히려 눈을 감고 못보게 하는 것이었다. 과학자들은 심리적인 것, 착각이라고도 하나 그런 것도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 악령이 행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마술을 하는 사제, 제관 : 박수

사람이 잘 모르는 비방을 행하는 자 : 술객이라 한다.

출애굽을 세상 나라 안에서 자라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세상 나라가 박해하고 없애버리려 하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갈등의 역사로 본다. 이는 제일 처음 사건이다. 모세를 정점으로 하는 세력과 바로를 정점으로 하는 세력의 싸움과 갈등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싸움이 정치적 싸움, 강대국에서 약소국을 해방시키는 육적 싸움이 아닌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바로가 세상 나라의 대표라 할 수 있는데, 바로가 술객들 제사장들 Priest를 내보내는 것을 볼 때 단지 이는 정치적인 싸움이 아니다. 종교적 충돌이요 배후에는 악령들이 개입되어 있다. 모세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혼자 대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두 충돌은 세상적 차원과 정치적 차원의 충돌이 아니요, 이 충돌은 악령과 사단과 하나님과의 충돌이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왕국의 왕권, 하나님 나라의 고체(imbody)라 할 수 있는 자는 모세, 이스라엘의 장로들이다. 세상 나라 사단의 도구는 바로와 술객들이다. 처음부터 하나님과 악령들간의 싸움이다. 하나님 통치 받는 나라와 그 백성과 세상의 사단의 통치받는 세상 나라와 그 백성과의 싸움이다. 12절 모세의 지팡이가 변한 뱀이 바로 술객의 뱀을 잡아먹는다 = 하나님께서 앞으로의 투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준다.

14절 나일강을 당시 사람이 먹음 - 식수였다. 그리고 애굽의 풍부함의 근원이 나일강이었다.

* 나일강은 생명이요 풍부함의 상징. 그러므로 이 생명의 근원인 나일강을 신격화시킨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한 것은 이것이 애굽의 생명줄이 아님을 보여주고 하나님께서 나일강을 피가 되게 하신 것으로 치신 것은 애굽의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요 심판이다.

81절 개구리 재앙, 16절 티끌이 이가 되게함, 19절 애굽 술사들이 이를 행하지 못함 - 이를 보고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손가락이라함, 하나님의 손가락 = 하나님이 친히 개입하셨음을 말한다. 애굽의 술사들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이는 신의 직접적인 개입이요 자신들이 당할 수 없음을 말하고, 이들은 악령을 부리는 자들이요 이들처럼 악령을 통해 행하는 술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것임을 알게된다.

9, 10장은 파리재앙, 역병이 가축을 치고, 피부병(이때 애굽 술사들이 악령의 하수인들이나 하나님 앞에서 견디지 못함), 우박으로 곡식을 치신다(생존수단 또는 일의 수단을 치심) =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아니라 애굽도 통치하시는 분,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임을 보여주는데, 이 모든 재앙들이 유월절의 재앙으로 연결되어진다. 유월절에 가서 굴복되어진다.

메뚜기 재앙을 당하고 바로의 신복이 굴복하고, 우박 재앙시부터 바로 신복들 중에서 이탈자가 생겨나는데, 이것은 이기적 관점보다는 물론 그들의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나 이들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시 이스라엘만이 아니고 많은 잡국이 함께 출애굽했는데 그중에 애굽인도 포함되었을 수 있다. 온 우주 만물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믿어 함께 나왔음을 보여준다.

흑암 : 생명부재, 죽음, 심판의 상태임을 표현, 죽음이 사흘 동안 임함은 암시적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빛이(생명력)이 있었다.

마지막 재앙이 유월절이다. 애굽 술사로부터 시작한 모든 재앙들의 절정이 유월절이다. 즉 악령과의 싸움에서 절정을 이룬다.

11장 이제까지 지팡이를 던져 일으킨 재앙 사건들의 절정이 유월절 사건이다. 이 사건들의 의미는

하나님과 그 백성, 사단과 그 백성의, 즉 세상 나라와의 전쟁이다. 이제까지는 내보내지 않았으나 이 유월절 사건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빨리 나가라고 내쫓는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절정적인 승리(사단과 세상 나라에 대한 승리).

장자 : 기력의 시작, 장자를 치는 것, 애굽 기력의 시작을 치는 것. 원칙적으로 애굽을 깨부수는 것, 결정적인 패배를 주는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과 동등한 세력이 아니다. 마귀도 하나님의 지배하에 있다. 즉 유월절은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한 세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앞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반역한 세력에 대한 심판의 성격을 갖는다. 앞의 모든 사건은 명령을 거부한 것에 대한 징벌의 사건이요, 그 심판에서 이스라엘은 항상 구별되어 심판을 면한다.

유월절도 이 사건들의 절정이므로 사단과 그 추종자들인 세상 나라에 대한 심판이요 이스라엘은 그 심판을 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심판을 무엇으로 면하는 가가 유월절 사건에서 보여짐, 즉 어린양의 피를 근거로 심판을 면한다.

유월절 사건과 비슷한 사건 : 이삭을 제물로 바침. 앞으로 성전이 세위질 곳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린양이 피 흘려야 할 장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할 장소, 이 어린양의 그 제사의 성격이 유월절 사건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진다.

*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그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심판을 행하지 않으시고 넘어가시는 것과

그 어린양의 살을 먹는데 모든 이스라엘이 참여하는 것, 각 개인이 혼자 먹는 것이 아니라 가족 단위로 또 가족 수가 적은 자는 다른 가족과 합하여 먹음, 즉 공동체 단위로 참여한다.

: 생명을 의미, 나 대신 생명을 희생한 그것에 의해서 생명을 얻음, 새 생명을 얻는 것이요,

제육에 참여함 : 그 제사에 내가 하나된다, 그 양과 내가 하나된다.

아담이 하와에게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내 살 중에 살이라는 것은 그가 나와 하나이다라는 의미.

로마서 6장에 그리스도의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살으심에 하나됨, 즉 제육에 참여한다, 살을 먹는다 - 성만찬과 연결 - 그리스도와 하나됨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에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단위로 참여, 나 혼자만이 관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만이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 교제가 포함되어 있다.

고린도전서 : 성만찬이 강조하는 것, ?너희로 그리스도에게 하나되게 하는 것이요 이는 또 너희들도 하나되게 함? 교회의 분열 계급화를 반대 = 제육에 참여함은 교회의 성만찬과 동일한 본질의 의미, 그리스도는 성만찬을 유월절과 관계시키셨다.

이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며 구약자체 내에서도 이를 읽을 수 있다.

유월절의 독특함 : 유월절 어린양을 대신함으로 내가 생명을 얻음, 이 새 생명의 핵심에 대해 바울은 죄사함이라한다. 죄사함을 위해 흘리는 어린양의 피라함 = 어린양과 하나가 됨과 동시에 그 어린양에 참여한 모든 지체와 또한 내가 하나됨을 포함한다.

이렇게하여 출애굽이 이루어지는데, 숙곳에서 발행하여 약속의 땅으로 간다. 이때 불레셋 땅으로 가지않음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보고 후회할까 보아서이다. 요즈음 옛 지도가 발견되어지는데 옛 애굽의 수비대들의 위치를 그린 지도가 발견되었다.

어떻게 홍해를 건너게 되었는가? 바로는 다시 마음이 강퍅해져서(하나님께서 강퍅케하심), 바로가 다시 전차를 내보내어 이스라엘을 추적한다.

* 추적하던 이 병거와 전차들이 홍해 속에 결국 몰사하고 만다. 이 의미는 무엇인가? 한 나라의 세력은 군사력으로 단적으로 표현된다. 병거, 전차는 그 당시 최신 무기, 강력한 무기요 그 병거는 600승이었다. 이도 선정된 것이요, 최신예의 병거 중에서도 또 뽑아 선정된 것이 600, 그런데 이것이 몰살된다.

장자를 침 = 애굽의 기력을 침, 세력의 기를 꺽음.

병거를 몰살 = 다시 애굽이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결정적 사건으로 쐐기를 박는 것 같은 사건, 이것은 하나님의 전쟁이라는 측면으로 보았는데 그 측면에서 사단 세력을 깨뜨린 하나님의 결정적인 승리의 사건.

*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고전 10:1-4절에서는 홍해를 건너는 것을 구름 아래에서 세례를 받았다라고한다.

홍해 : 옛 땅에서 새로운 땅,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 길을 막는 최대의 장애, 그냥 건널 수 없는 죽음을 상징(애굽 병거의 몰살)한다.

구름 아래에서 구름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애굽에서 노예상태로 있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장애인 죽음의 장소를 하나님의 임재 아래에서 마른 땅처럼 건넜다.

고전 10:2모세 안으로 모세 속으로 모세에게 속하여 세례를 받았다

모세를 그리스도와 비교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분,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종.

그리스도는 신약에서 구원사역을 이룸, 모세는 구약에서 구원사역을 이룸.

신약에서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구원얻는 것처럼,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구원사역을 이루실 것을 믿고 모세를 의지하여 나아갈 때 구원을 받게하신다. 이렇게 볼 때 홍해사건과 유월절 사건은 같은 내용이다. 하나님께서 두 번 반복하신 것이다. 다시 돌이켜 홍해사건을 일으켜 하나님께서 애굽을 쳐부수고 이는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시고 두려움을 씻어주신 것이다.

이 사건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보이신 목적은 하나님은 유일하신 신이시며, 애굽의 신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유일한 신이심을 보이시는 것,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사건이다.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도 되나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이신 사건이다.

이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인이 됨, 즉 세상의 노예됨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인이 된 것이다.

* 하나님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을 못살게 하고 억압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복되게 하고 잘살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축복이요 생명이다.

유월절 사건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사단(세상)의 세력을 멸하시고 그것에 사로잡혀 노예된 그의 백성을 구원하셔서 자유인이 되게 하셨다. 이 원리는 신약에서 그대로 적용되었다.

홍해 - 애굽과 약속의 땅의 경계, 두 영역을 나누는 것.

이스라엘은 이 죽음의 영역을 넘음으로 노예의 땅에서 완전히 결별 즉 노예생활과 세상문화, 세상의 타락한 생활 속에서 완전히 결별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새 생활이 시작된다.

세례 -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탄생을 의미, 노예생활이 끝나고 새 생활이 시작됨, 이 새 생활에 대해 하나님께서 내 백성을 내어보내라세상 세력에게 명령했는데 그 생활의 목적은 나를 섬기리라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새 생활을 하는 것. 이것이 적극적 의미에서 해방과 하나님이 주신 자유이다. 즉 이제부터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성경 속의 작은 조직신학이라 할 수 있는 로마서의 구조가 이렇게 되어있다)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해방되고 새 생활을 시작한 이스라엘에게 나타난 생활은 광야생활이었다.

광야의 의미 : 먹을 물과 양식이 없음. 즉 생존수단이 없음 = 죽음의 땅. 사람이 자기 힘, 능력으로 살기 힘든 땅. 바로 그런 땅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쓴 물(썩은 물, 먹으면 죽는 물)이 식수로 바꾸어 지며, 바위 속에서 물이 터져나오고, 아무 곡식이 없는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으로 살아간다. 이것은 신약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 - 예수를 믿으면, 중생하면 옛 존재 노예로 지내던 생활에서 자유얻어 새 사람이 된다. 이 새 사람이 살게 내버려둔 곳이 낙원이 아니라 이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며 살라하신다. 이 새로운 삶의 본질적 성격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요, 그의 전 삶이 하나님을 순종하며 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 속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완전한 순종을 요구하시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있다는 것은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또 역설적으로 살 수 있다. 그것은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살 수 있다. 하나님이 죽음의 땅에서 솟아나게 하시는 생수로, 하늘로부터 내려주시는 음식으로 살 수 있다. 고전 10장에서 이 반석이 생수의 근원이라 했고, “나는 진정한 만나요라고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성령이 내려주심인데, 예수의 생명을 직접 누리게 하시는 분 성령님, 성령이 없으면 살 수 없다. 노력하면 할수록 안되는 것을 깨닫을 수 밖에 없게된다. 그때부터 엎드리기 시작한다. 그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 이 내용이 롬 7-8장에 나온다.

13장 광야 생활 중 이스라엘 백성은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 하나 이 고난의 여정은 그렇게 절망스러운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절망스러운 것만은 아니다.

13:20절 광야가 시작되는 에담에 이르렀을 때 구름기둥, 불기둥이 나타남 =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 구름기둥, 불기둥이 이스라엘을 인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던 여행이었다.

13:22절 두 기둥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들 앞서 행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들 앞서 인도하심. 28:20절 말씀에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겠다”.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성령을 보내시겠다(요한복음)하심. 구약과 신약은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나 본질에서는 같다. 구약은 가시적으로 나타남 - 구약의 특성. 그러나 그 본질은 구름기둥, 불기둥 그 자체가 무엇이냐가 아니고 생명의 공급자가 하나님이요 성령이심을 나타내 주시는 것으로 같다.

* 이 여행은 평생동안 계속되는 것이 아니고 안식의 땅을 바라고 소망하는 목적지가 있는 여행, 언제나 고난과 더불어 무한정하게 싸우는 싸움이 아니고 목적지가 있는 소망이 있는 여행이며, 하나님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고 함께하셨던 여행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생명을 누렸던 여행, 육적생명 뿐아니라 영적실체를 말한다. 영적실체는 신약에서 확실하고 분명히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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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여행의 목적

출애굽 후 즉시 가나안 땅으로 들이시지 않고 왜 혹독한 삶의 환경 속에 두셔서 고통하게 하시는가? 그것은 Test(δοκιμαζω;도키마조), 신약에서 이 단어를 보면 광야생활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시험하시는데 사단이 하는 유혹과는 그 방법과 목적이 완전히 다르다. 하나님의 목적은 단련하시기 위해(연단을 위해서 = 더 굳게 하시기 위해)서 이다. 5:1절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 즉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린다 = 전혀 새로운 존재 즉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을 누리는 자가 된다. 곧이어 하시는 말씀이 5:2, 이런 가운데 기뻐하지만 또한 환난 가운데 기뻐한다고 함. 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 = 이것이 바로 시험이다. 12:1-2절은 시험을 통해 단련된 자의 모습을 소개해 준다.

15:25 “율례와 법도를 베푸시고 거기서 시험하셨더라시험과 율례, 계명은 깊은 관계가 있다. 광야기간을 주셔서 단련하시는 목적은 인간의 힘으로는, 자연인의 능력으로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광야를 걷게하심으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계속 함께 하시고 양식과 물을 주심으로 생명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철저히 깨닫게 함이다. 인간은 자기의 노력으로 뭔가 얻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내 힘으로 뭔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는 절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단련하시는 시험기간으로서의 광야생활에 율법이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항상 순종하는 것을 통해 단련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순종은 믿음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살리신다. 내 생명의 근원이시요, 주인이심을 믿을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순종한다. 이러한 믿음이 있을 때 진정한 순종이 있다. 이러한 믿음이 없으면 순종해서 뭔가 얻으내려는 상업주의가 마음 속에 감추어 있는 것이다. 순종할 때 살리시고 불순종할 때 죽이신다 - 광야생활 여기서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뭔가를 얻어내는, 순종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뭔가를 사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순종이란 믿음의 자발적인 표현이다. 그런 믿음이 있으면 자연히 순종하게 된다. 이런 믿음과 순종 역시 내가 믿고자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 안에서 되어진다.

이러한 믿음과 순종의 삶이 바로 생명의 삶이다. 믿음과 순종의 삶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복된 다스림을 받아들임이 순종이요 생명이다. 이 순종을 좀 더 정확히 나타내는 것이 불순종이란 말인데, 자기 의지하여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이 불신앙이요 불순종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만나 주시고 생수 주시고 고난의 광야를 걷게 하신 것은 ‘...을 알게하려 하심, 인정하게 하심이라고 표현한다. 즉 내가 너희의 구원자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 믿음의 순종과 단련을 위해서이다. 신자의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고통스런 세상 속에서의 삶의 의미 = 고난은 순종을 굳건케하는 즉 축복의 시간, 하나님이 구원과 더불어 함께 주시는 추가적인 축복이다. 인간의 기본 상식은 주고, 받는 것이다. 공짜 좋아하는 자를 비윤리적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우리 잠재의식 속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것은 상업주의 그러나 하나님께 이런 상업주의 의식으로 나아갈 때 그것은 죄악이다. 하나님께 대한 신자의 자세를 함께 묶어 한마디로 말하면 믿음이다. 믿음은 깊고 넓은 내용을 가졌다.

시내산에 이르름 - 광야여행시 처음 들른 곳,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는 것의 배경이 18장 내용이다. 18장에서 모세 장인 이드로가 온다.

18:1-12절 이드로가 모세 즉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모세에게 온다. 이드로가 방문한 의미가 13절 이하에 나타남 - 모세에게 충고함. 이스라엘의 행정조직이 이루어짐 - 다스릴 자를 백성 중에서 뽑음, 이런 행정조직이 이루어졌는데,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자들이다. *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했다 - 율례와 법도가 필요함.

18:20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라하나님의 율례 - 사람의 율례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례를 가져야 했다 - 율례의 필요성. 이런 배경하에서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시게 된다. 또한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은 것은 하나의 징표가 되었는데(3:12에서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있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시키신다는 사실의 징표는 바로 시내산에서 주님을 섬길 것이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심), 이 징표는 - “너희가 애굽에서 나와 이 산에서 너희가 나를 섬기리라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도 된다.

광야여행 속에서 이 율법을 주신 것도 또한 의미가 있다. 광야여행은 시험기간, 즉 믿음과 순종의 단련기간이다. 하나님의 율법이 믿음과 순종의 단련의 수단으로 주어짐으로 광야여행 초두에 이 율법 주신 사건이 일어남은 광야여행의 본질과 의미에 매우 부합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내산 율법 주심에 대하여도 포괄적인 시각에서 말씀하신다.

19:4-6 “너희는 나의 구원을 다 보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내 말을 청종하면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구원을 보이신 뜻과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가를 가르쳐주신다.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를 밝히는 것, 하나님을 순종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 백성으로 산다는 것,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 살 때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온 땅이 내게 속하였다(하나님이 온 세계를 소유하셨고 다스린다는 의미) 할지라도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은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물 - 이스라엘이 선민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교회에도 적용된다. 이스라엘의 신민됨이 세상과의 단절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 속에 산다. 그러나 이 세상과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스라엘과 일반 민족과의 관계를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민족을 다스리는 것과 일반 민족을 다스리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 세상 속에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 특별한 의미이며 의미가 있다.

제사장 왕국이요, 거룩한 나라. 이스라엘 자체를 제사장 왕국이라 함. 제사장은 일반백성과 구별되어서 하나님과 특별히 가까이 하나님을 모시고 섬긴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존재 의미는 제사장 나라라 한다. 이스라엘은 일반백성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섬기는 특권을 소유한 자이다. 또한 세상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감당한다.

제사장 =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축복을 백성에게 전달하는 자 - 백성에게 유익을 주는 자이다.

예로 아브라함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간구를 통해서 보았다.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이스라엘의 즉 제사장 왕국으로서의 이스라엘의 본질은 거룩한 나라이다. 즉 성결함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모셔 섬기는 자의 가장 중요 특징이 성결. 성결이 없으면 교회의 존재 의미 상실한 것. 이 성결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축복을 세상에 전달하는 축복을 감당한다. 성결은 하나님 말씀을 순종함으로 이루어지는데, 성결된 민족으로서 성결을 이루는 수단으로 율법이 주어짐, 율법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의 복된 통치에 이스라엘이 순종함으로 거룩한 백성으로서 제사장 왕국이라 한다(율법, 거룩, 제사장).

시내산에서 불러 왜 내가 너희를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소유물로 삼았나 그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과 뜻을 가르쳐주신다. 그리고 부르심의 목적과 뜻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율법이 주어진다, 율법 :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규범.

순종을 요구하심, 여기에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순종을 맹세함. 24:1-3절 이러한 관계에 근거하여 하나님 말씀을 고하고 이스라엘은 순종을 맹세함 - 신약 교회의 세례와 같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킨 다음 시내산으로 불러 하나님의 뜻을 알리심. 제사장 나라가 되어 하나님 백성으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시겠다 하심. 즉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 거룩하게 사는 삶이 이방의 빛으로서 사명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거룩하게 사는 삶이 이방의 빛(중보사역)이 될 수있나? 거룩하게 산다 = 순종하여 산다는 이것이 이방에 대해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게하는 것, 이것은 소극적인 것 같으나 사실은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효력이 된다. 한 마디로 증인사역, 증거사역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 자체가 세상 나라에 가장 강력한 증거였다. 이스라엘이 세상 한복판에 있었다. 길목에 있었다. 강한 나라의 한 가운데, 거룩하게 사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이러하다고 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이다. 5:13-16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빛이라는 것은 증인사역과 깊은 연관을 나타낸다. ?이방의 빛?이라 표현하고 있다.

- 너의 착한 행실을 통하여 -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게 하는 증인사역, 빛의 사역 여기는 말의 증언과 삶의 증언이 동시적인 것으로 나타난다(말도 삶의 일부, 행동의 한 형식). 내적인 것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 행동, 말이다.

19:9절 하나님이 강림하심,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모습으로 나타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보이시면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분, 경계를 정하사 그 정하신 경계를 넘을때 진멸하실 것을 말씀하신다(가까이 주님을 모시는 이스라엘이라도). 이 거룩하심을 보이는 것은 의미가 깊다 - 20장으로 연결, 그 의미의 중요성은 율법을 주심이다.

20-23장은 십계명, 율법주심. 이스라엘을 부르셔서 거룩하게 살게하신 목적을 선포하신 후 거룩하게 사는 방법으로 율법을 말씀하심, 즉 거룩하게 사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반포하신다. 그리고 이것은 통치의 근본사상을 요약하고, 율법을 주신 자가 누구인지를 밝힌다.

20:1-2절 나는 노예의 집, 애굽 땅(세상 나라를 상징,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우상, 귀신을 섬기는 땅, 자신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땅, 죄의 세력)에서 이끌어 낸 너희 하나님으로서 구원주로서 이것을 명한다 하심.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명하시는 권위의 근거를 밝히신다. 이 사실은 새 상태,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됨을 의미하는데, 새로운 생명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명백히 밝히신다. 하나님은 그 능력으로, 새 생명을 주신 그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삶의 도리를 말씀하신다.

1-2Motive close, 왜 지켜야하나 지켜야 할 동기를 말씀하심, 세상 나라에서 벗어나서 죄의 노예가 죄가 시키는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거기서 해방되어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킴,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할 도리 즉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것 이것이 곧 십계명이다. 율법은 삶의 원칙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통치하는 매개체, 구속 받은 자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해방되고, 새롭게 된 삶, 나는 너희 하나님(ךיהלא;엘로헤카),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절대적(배타적) 권리 소유를 말하신다.

31계명 -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당시 종교적 상황을 의식하시고 말씀하심으로, 당시 여러 신을 섬겼다. 오직 하나님만이 너희 하나님인 것을 천명함. Exclusive Claim = 배타적인 요구, 하나님 외에 어떠한 신도 너에게 있을 수 없다.

42계명 - 어떠한 존재의 형상을 본따서 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근본적 의미 = 하나님을 어떤 가시적 형태로 형상화하지 말라. 즉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칼 바르트는 하나님과 피조계 사이에 무한한 질적 차이가 있다건너뛸 수 없는 큰 간격을 말함.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 이스라엘이라도 침범할 수 없는 경계를 정해 주사 접근하지 못하게 하심도 다 이것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이해와 파악 능력 밖의 존재이다. 당시 가시적, 물리적 형상으로 형상화시키지 말라는 것은 인간의 고안물도 포함된다. 즉 돈, 인간의 과학, 이성 등도 다 그 속에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피조계로부터 무한히 높으신 분이므로, 하나님께서 알리실 때만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인간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부터 유추해내어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로마서 1장에 의해 혹 어떤이는 인간 타락 이전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했으나 옳지 않다(바르트와 부른너의 논쟁).

하나님의 형상을 어떤 피조물로도 형상화하지 말라 = 하나님을 피조화 하지 말라. 하나님을 피조물로 끌어 내리는 것, 즉 피조물을 신격화 시키는 것(TWO Way crosses).

스랍이라도 두 날개로 얼굴을 두 날개로 발을 가리고 거룩하다! 거룩하다! 말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접근할 수 없는 그 거룩하심 앞에 이사야가 내가 죽었구나라고 고백할수 밖에 없는 것.

이 선언은 당시의 종교 상황에서 보면 놀라운 선언이다.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       . 여기서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삶이다. 계명을 지킴 하나님을 사랑하는자, 계명을 안지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 계명을 지키고 안지키는 것은 그 근본이 사랑에 있다. 계명을 지키지 않음은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방종교와 다른 점은 그들은 의식과 행위로 신앙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의 삶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십계명을 주심 - 애굽에서 노예 상태에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시되 섬김의 규범을 주심이다. 천지간에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상에 노예되었던 상태에서 구원해내셔서, 이곳까지 인도해내셔서 하나님을 섬기되 천지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요 모든 피조물보다 뛰어난, 초월하신 분이므로 어떤 피조물의 형상으로도 비교될 수 없는 유일 독특한 하나님이시요, 어떤 가시적 형태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으로 하나님을 나타내려 해서는 안된다.

3절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라(1계명).

20:3절 의식영역에 있어서 하나님 섬김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섬겨야 하는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피조성을 철저히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의 이름을 계시하고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찾아오시겠다. 의식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이 찾아오시고 임재하시고 축복하시는 하나의 통로이다. 오늘날 기도, 예배, 성만찬도 역시 상징적 행동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축복하시고 임재하시는 것이다.

다른 신들의 존재의 속성을 알려줌, 피조물의 형상을 따라 피조물을 신격화시킨 인간의 고안물이라는 우상임을 보여준다(2계명에서 밝힘). 천지간에 하나님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임을 십계명 자체가 밝혀주고 있다. 세상에서 너희를 구원하신 하나님은 투하는 하나님이시다.

질투 = 열심. 인간의 저속하고 악독한 질투가 아니다. 이스라엘이 바알브엘에 빠져 음행을 함, 비느하스가 창으로 제사장을 죽임, 이때 비느하스가 하나님에 대하여 느꼈던 질투, 열심 이것을 תדק(콰다트)라 한다.

다른 우상에게 탈취당하시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는 것,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순종하지 않는 인간을 하나님이 처벌하심. 이는 하나님의 주권 침해이다. 하나님 되심과 그의 영광을 모독하는 것 처벌하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하나님의 주장에 근거한다. 이 하나님의 주장을 무시할 때 십자가는 희극이 되어버린다. 굳이 십자가의 고통스런 방법을 택하심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불순종하는 자를 3대까지 그 책임을 묻겠으나 나를 사랑하고 순종하는 자는 그 축복, 은혜를 천대까지 베풀겠다 하심. 하나님의 사랑에 묻혀서 하나님의 의 요구를 무시해 버릴 때 값싼 사랑이 된다. 이 하나님의 의 요구가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값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 - 그의 통치에 순종하는것, 네 성품, 마음 너의 전부를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라, 순종의 내적 동기는 사랑이다. 순종은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우리의 내적인 표현. 사랑이 전제되어 있지 않은 순종은 무의미하다. 사랑이 없는 순종은 무의미하다.

요한일서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 그럼 그의 계명을 지키자 이것은 순서가 거꾸로 된 것이다. 사랑의 표현으로 순종을 하지 않을 때 상업주의 순종이 된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 전제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는 순종하게 된다. 순종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누리는 형식이지 하나님의 축복을 사는 공로가 아니다.

73계명 :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in vain; 의미없이, 헛되이) 일컫지 말라뜻없이, 아무렇게나, 경솔하게, 준비없이 하지말라.

1, 2계명과 다 연관된다. 1, 2계명을 더 확대한 것이라고 말할수 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기라는 것이 1, 2계명의 건전한 뜻이라면 여호와의 이름을 경홀히 여기지 말라는 3계명은 1, 2계명의 확장. 즉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분으로,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분으로, 그의 앞에 꿇어 엎드려 마음으로부터 언어, 행동에 이르기까지 두려움으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이나 그에 관한 일을 농담으로 삼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엇이 모자라 우리로부터 영광을 받으려 하시지 않으신다. “너는 범사에 여호와를 인정하라말과 생각과 행동에 있어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이어야 한다.

인간 편에서는 알 수 없고 인간의 생각이나 무엇으로 알 수 없다. 하나님이 알려 주실 때만, 알려 주시는 만큼만, 즉 계시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유일한 형상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사람이 생각해내거나 사람이 무엇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고,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셨고, 인간이 감각할 수 있는 형식으로 자신을 계시해 주신 것이다. 친히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 한 분 뿐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나 노력으로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은 한없이 높고, 거룩하신 분이다.

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은 심령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구체적 방법이다 = 즉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않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 이름에 합당한 경배를 드림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는데 뜻없이 하는 함부로 하는 것은 죄이므로 조심해야 한다.

84계명 안식일을 기념하여 거룩히 지키라

6일 동안 네가 모든 일을 행할 것 - 명령, 7일에는 여호와의 거룩한 날 - 명령. 사실 모든 날(전체)이 하나님께 속해있다. 그러나 6일은 일하라는 명령, 7일은 쉬라. 창세기 2:2절의 하나님의 안식은 모두 완성하신 후의 안식으로, 7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하게 하신 선언적 의미를 갖는다(piel형으로 쓰임, ךרב שׁדק;콰도쉬 바랔 . 7일은 하나님께서 창조를 완성하시고 그 완성된 상태를 복되고 거룩하다 하심(완성의 상태 = 복되고 거룩함). 성경은 우리의 구원을 복되고 거룩하다고 한다. 하나님이 쉬신 것은 모든 창조가 완성되어 그것이 복되고 거룩했다. 따라서 제 7일을 거룩하게 하라는 것은, 그날을 기억하고 축하하라(festival)는 것, 즉 하나님의 완성의 사역을 축하하고, ‘복되고 거룩함을 높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안식은 출애굽과 관련되어 나타나 창조와 구속의 연결성을 갖는다.

חונ(노하)” 라멕이 노아를 낳고 이름을 지을 때 חונ라 했다 = 안위하다, 안식하다 고역으로부터 안식하게 될 것. 창조 후 타락이 있음으로서, 완성된 안식이 상실됨. 그러므로 안식은 그 이후 다시 회복됨을 전제한다. 즉 안식은 구속을 전제하고 있다. 노아와 여호수아,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진정한 안식이 되어진다.

3:17-19절에 아담은 원래 땅을 정복하게 되어 있는데 그의 타락으로 인해 질서가 뒤바뀌어 땅이 아담을 반항하고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것, 그래서 노아 이전까지의 땅은 상당히 척박했을 것이다. 그런데 노아를 통해 회복된다 안식”(구속). 인류의 구속은 본래 창조 목적의 회복을 전제한다. 최초의 창조 사역의 완성과 관계된 안식이 출애굽 이후의 구속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안식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본래 창조하신 후 안식하신 하나님의 안식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의 안식을 회복하심을 시작하셨음을 생각해야 한다.

주일 :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완성인 그리스도의 부활로서 안식의 개념이 주일로 바뀌고 최초 창조의 목적이 회복되고 완성되었음을 우리가 기억하고, 온전한 안식이 이루어질 것을 축하하는 날이다.

깊고 넓은 내용. 한마디로 말하기 어렵다.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삶의 도리가 20-23장에 나타나고, 신명기, 민수기에서 이것이 확장되는데, 어쨌든 출 20-23장이 핵심이다. 여기에 법은 안식법이다. 즉 안식일이라는 틀 속에 이 법이 소개된다.

안식년 레 23장에 3절기가 나옴. 안식일, 안식월, 안식년. 7년 대속죄일, 대개가 성회로 모이는 절기이다. 7년 안식년, 7*7=희년. 안식일, 안식년 -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기본틀이 됨. 안식은 םולשׁ(샬롬; 평강 = 온전하다. 어그러진 것이 없다)의 의미와 연결되었다. 창조 후 안식하시면서 거룩하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하나님이 창조를 완성하신 후 거룩하게 하시고(성별하시고) 축복. 당시 속된 것이 있었나? 그러므로 성별하셨다기 보다는 PI HILL의 의미는 선언을 종종 말하므로 완성하신 창조 향하여 복되다! 거룩하다! 선언하셨다는 의미. 성경의 주요 개념이 안식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하나님의 창조사역의 완성을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사역도 새 창조라는 것에서 다 포함한다. 이는 하나님에게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의미가 있다. 이것은 인간을 위하는 것이다. 안식일을 기념하여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할 뿐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극한, 거룩한, 복된 상태인 안식을 받아 누리라는 것이다. 안식은 매우 깊은 의미 갖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복되고 거룩한 실재, 구원의 전 실재를 안식이라 한다.

그 이후의 계명 모두가(5, 6계명) 안식과 관련된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할 도리를 가르치고 있는 출애굽기 20-23장의 법을 안식법이라 한다. 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 하나님을 경외하며, 순종, 섬기는 것이요, 인간과의 관계에서는 -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에 순종,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안식은 하나님을 경외, 순종하고, 이웃 사랑이 바로 안식이다.

125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성경은 함축적이다. 포괄적 원리를 제시한다. 부모는 육적 차원에서 존재의 근원이다. 궁극적 차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근원이나 육적 차원에서는 부모가 우리의 존재의 근원이요, 상대적 의미에서는 나의 주인이다. 자녀가 성년이 되기 전에는 모든 것이 부모에게 권리가 있다. 부모는 하나님의 주권과 권위의 대리자요 상징이다. 부모의 공경은 단순히 부모 자신만이 아니고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질서에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먼저 부모 자식간의 질서를 말함은 인간 사회의 질서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수직질서 임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질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리적 권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권위는 상대적 권위요, 다 하나님께 귀착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모든 권위가 귀착하므로 더 지켜야 한다. 바울은 모든 권위의 근원이 하나님께 귀착되므로 모든 권위에 순복하라 한다.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 있다.

12절 약속의 땅 = 하나님의 나라가 세위질 땅 즉, 교회. 하나님께서 주신 땅 즉 하나님 안에서 네 날이 길고 복되리라.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장수한다는 것이다. 하나님 백성의 삶이 창조질서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하나님의 권위로 알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우리의 신앙적 삶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13-176, 7, 8, 9, 10계명 - 수평적 관계, 이웃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가정의 권리, 제물의 권리 등등. 이 모든 죄악의 동기를 탐심, 욕망에 두고 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을 탐심으로 빼앗는 것 살인, 간음, 도적질이다.

한 공동체 서로가 자신을 위해 착취,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서로를 돕는 공동체요 사랑의 공동체이다. 레위기는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소극적으로 네 이웃도 나와 같이 똑같은 삶의 권리를 가졌다는 것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너와 나는 하나다 라는것 알아야 한다.

18-21절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엄위하신 두렵고 떨리는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남 - 하나님을 경외하여, 범죄하지 않도록 나타나심. 오고오는 세대 속에서 하나님을 경외, 범죄치 않도록 하기 위해. 중보자로서 모세의 위치가 두드러진다.

22-26절 의식 영역(cultic sphere)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김에 가장 요점을 설명한다. 십계명 전부가 하나님 섬김의 법도 - 이것은 내적인 마음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실생활에서 계명 순종으로, 또 이웃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는 의식의 영역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가 나옴, 레위기에서 더욱 자세히 나온다. 하나님 섬김은 도덕 윤리뿐 아니라 삶 자체가 섬김 곧 예배여야 한다.

번제와 화목제의 의미는 명확치 않다.

הלוע(올라; 번제) ? םימלשׁ(쉘라밈; 화목제)

모두 태워드림 ? 제물을 사람이 먹음(이는 하나님과 화평을 통한 교제 의미)

Cult(의식) - 12: 하나님께(향해) 살아있는 제사를 드리라. 그 근거는 롬 6(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에 나온다. λατρεια(라트레이아)섬기다의 뜻, 이런 단어는 모두 의식영역에 관계된 용어들이다.

우리의 삶의 섬김이 cultic용어들을 빌어 사용된 의미는 무엇인가? 실제의 삶과 의식을 통한 제사가 똑같이 하나님 섬김의 삶이며 이 둘은 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선지자들이 구약의 제사를 비난할 때 그 제사 자체에 대한 비난이 아니고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의식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이란(상징적 의식) 일상생활에 나타난 하나님 섬김의 삶을 가장 집약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배한 후에 그에 따른 실제 삶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선지자들은 이것을 맹렬히 책망하고 있다. 실제 삶이 없는 예배란 무의미한 것이다. 의식영역의 하나님 섬김과 실제 삶에 있어서 하나님 섬김은 뗄 수 없다. B.C. 8세기에 이스라엘 선지자들은 이것을 공격한 것이다. 또 하나 예배 자체는 실제 삶의 일부인 것이다.

죄악을 사함받기 위해서는 양과 소를 바치는데 당시 소는 노예 한 사람 값이다(30).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얼마나 큰 문제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24절을 보면 기념하는 곳(성소)에 찾아오셔서 축복하실 것이라고 말한다.

신상문제

,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재료, 하지만 이런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지 말라. 피조물, 아무리 아름다운 것이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피조물을 초월하시는 분이므로.

제단문제

자연석이나 흙이나 돌을 깎아서 만들지 말라. 자연성 그대로 인간이 고안해 낸 것으로 말라. 피조성이 가장 잘 드러내는 재료로 하고 그것도 자연 모습으로 제물도 짐승으로 하라, 인간을 제물로 하지말라.

의식을 통한 섬김은 철저히 피조물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임을 분명히 하신다. 고대사회에서 널리 유포된 사상과 매우 비교가 된다. aultic Time, place - 거룩한 장소, 시간. 제물드리는 시간과 장소는 거룩한 장소나 시간이라 여겼다. 이러한 거룩한 장소와 시간이, heavenly realmearthly realm이 서로 만난다. 그 장벽이 철폐된다. 즉 신적 차원이 고양된다고 여김. 이러한 사상과 매우 다르다. 인간은 피조성의 한계를 철저히 나타냄. 인간의 피조성을 감추려고 금, 은을 사용하지 말고 흙이나 자연석으로, 양이나, , 짐승으로 제사하라! 피조물의 한계 내에서 피조물의 형식으로 그대로 제사하라! 이 의미는 또한 구약 체제의 불완전성을 나타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완전한 제사의 예표를 암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의 제단은 놋으로 만들고 금, 은을 가지고 성전지음 - 앞의 내용과 상충되지 않고 환경적, 시대적 상황에 의한 것. 앞의 원리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이 세상의 존재하는 것은 참 실체가 아니다. 하늘에 있는 성전의 모형이다. 여기서 말씀하신 명령은 나중에도 그 전제가 되어 있다.

21장 안식년, 노예를 자유케 하는 일, 노예의 인권, 삶의 권리 보장, 사형에 해당하는 죄(살인, 부모를 저주, 유괴 등), 상해 죄(사람 상해, 가축 상해, 물건 상해, 처벌, 변상 등) 등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하나님 섬김의 삶의 일부)을 다룬다.

21장 노예제도가 나온다. 앞의 것과 연결되면서 공동체의 원리의 부정적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삶의 권리나, 자유를 저당 잡히거나 잃어버린 부정적 상황이 전제되면서 안식일과 관계되어 있다.

구약율법의 틀은 안식, 안식의 법이다. 삶의 상태의 부정적 시각, 부정적 상태를 제시하면서 이를 회복하는 방법이 나오는데, 상실되고 잘못된 부분에서 회복되는 방법이 안식과 관련되어 있다. 또 긍정적인 면은 회복을 통해 공동체의 긍정적 질서를 표현해준다.

노예는 가장 밑바닥 계층. 다른 나라에서는 노예는 물건처럼 팔려 평생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7년 후면 삶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안식년을 주신다. 이스라엘은 한 백성으로 그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되고 있다. 인간이 다른 한 인간을 소유할 수 없고 그 권리를 지배할 수 없다.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삶의 권리의 보장이 노예까지라면 다른 계층은 말할 것도 없다. 공동체 전체가 다 하나다. 이스라엘은 자유민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권리를 다 갖는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누구라도 자유자라는 의미이고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 근본적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서 종이 될 수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가족 때문에 자유를 포기할 경우에는 하나님 앞에서 귀를 뚫어 영원히 종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가족유대(familiar tie)를 중요시하는 것이다.

7절 여종 - 대개 상전의 첩이 됨을 암시한다. 그러나 그런 관계라 할지라도 결혼의 의미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녀를 아들에게 주기로 하면 그를 딸같이 취급하라고 하는 것은 여종이라도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여종을 팔지 못한다. 특히 외국인에게 팔지 못한다. 다른 여종이나 아내를 얻는다 하여도 의식주와 부부생활을 거부할 수 없다. 즉 싫어한다 하여도 아내로서의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 노예들에게도 삶의 권리를 인정해준다.

율법의 예증적 성격(illustrative) : 십계명 이후 바로 상전과 노예와의 관계를 취급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이 관계가 바로 상전과 노예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의 상하질서에 대한 예로 보여주신 것이다. 모든 상하 관계에서 지켜야 할 인간관계의 예를 보임이요, 다른 쪽의 삶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것이다. 5장에는 모든 인간관계를 규정하면서 종과 주인을 이야기한다.

이 당시 노예에 대한 개념은 물건취급이었으므로 하나님께서 명하신 인간권리에 대한 법은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질서의 관계가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누리며 맺어지는 관계라는 것이다.

동족간의 배상문제(Lex Talionis) : 여기서의 근간은 Lex Talionis인데 23절의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율법의 완성의 가르침과 상반되는 것 같으나 이런 경우에 당시의 근동의 풍습은 완전보복이었음에 비해서 율법의 한계선은 인간의 완악함을 어느 정도 인정해주는 것이지만, 근본정신은 신약이나 구약 모두 사랑으로서, 긍휼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원리 : 사회적 신분계층과 남, 녀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하나님의 백성은 자유민으로 삶의 권리를 소유한다는 것을 보여주며, 이것이 안식에 의해 보장받게 되어있다.

출애굽기 20-23장은 안식법이다. 여기 죄악들은 다 안식이 깨어진 경우이다. 노예 - 자신의 삶이 빼앗긴 상태(삶 상실). 살인 - 자신의 생명을 도적질한 경우. 부모를 침 - 사회질서, 권위가 짖밟힌 경우. 오늘날 권위가 무시되는 시대. 하극상의 풍조는 분명히 나중에 또 한 번의 진통을 겪는다. 유괴 - 가정이라는 평안과 복된 삶을 파괴하는 것. 공동체에서 악의 근원을 제거해 버려라. 공동체에서 질서를 파괴하는, 평안과 안식을 깨는 악의 근원을 제거하되, 그 방식이 항상 문제이다.

물질적 상해는 심한 경우가 아니면 변상을 통해서 깨어진 삶의 질서 즉, 안식의 상태를 회복할 것을 말한다. 왜 안식의 법이라 하면서 안식의 상태의 회복이라 하나? 또 하지말라는 부정적인 면이 나오나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안식은 죄로 말미암아 상실한 안식의 상태를 회복한다는 의미 갖는다. 즉 구속으로 인한 회복을 말한다. 안식과 구속은 깊은 관련을 갖는다. 특히 공동체적 삶에서 안식은 의와 공평에 깊이 관련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내 형제, 나와 똑 같은 삶의 권리를 갖는 자로 인정하라는 것이 명령의 기본 전제이다. 내 형제와 똑같은 삶의 권리를 인정하는 삶의 형태는 의로운 삶, 공평한 삶이다. 이와같은 것이 깨어졌을 때는 어떻게 회복할수있는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는 의와 공평을 말함이다.

즉 안식의 상태의 본질적인 면을 표현해준다. 또 모든 사람의 공정한 삶의 권리로서 처벌을 받아야 하는 의 면에 관심을 둠과 동시에,

이것은 피에 굶주린 복수와는 또 다르다. 타락한 인간의 모습은 뿌리 깊은 복수심을 갖는다. : 라멕의 노래 - 자신의 창상을 인해 살인하고 자신에게 상해를 입히면 77배로 복수. 물론 이러한 처벌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처벌이다. 즉 눈에는 눈으로 하지 그 이상으로 처벌하지 말라는 뜻이다.

점쟁이는 귀신과 짝하는 자이다. 짐승과 관계를 갖는 자. 성관계는 상대방과 하나되는 것이므로 짐승과 관계 갖는 자는 스스로 인간됨을 포기, 짐승 수준으로 자신을 떨어뜨림이다. 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에 대한 모독이요, 하나님 은혜와 하나님이 주신 고귀한 특권을 포기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22장 실화, 실수로 인한 이웃에게 해를 준 경우, 점쟁이, 짐승과 관계한 경우, 우상숭배를 다룸. 22:20-23:9절을 보면, 22:21절과 23:9절에 똑같은 말씀이 반복되어 있다 - Unclusio. 어떤 한 단위의 첫 부분과 마지막 부분에 동일한 사상을 반복하므로 이 단원의 전체 사상을 요약해주고 나타내주는 문학적 기교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안식 상태의 또 다른 하나의 중요한 요소 나그네와 고아를 압제하지 마라.

나그네 - 공동체 내에 완전한 삶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 나그네에게, 타향인에게 텃세를 부리지 말라는 것.

고아 - 아버지가 없는 자.

과부 - 남편이 없는 자.

이들은 그 삶의 권리가 침해 당하기 쉬운 계층이다. 공동체 내에 가장 연약한 사람이다. 이는 단지 고아와 과부만이 아니라 모든 연약한 자들을 말함이다. 이들을 압제할 때, 이들이 부르짖을 때, 돌아보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너희 아내와 자녀를 고아와, 과부되게 하겠다. 또한 가난한 자에게 이()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라! 다른 이의 약점을 이용해서 너의 부를 축적말라.

이러한 부정적인 면에 대해 긍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구절이 25절이다. 가난한 이에게 돈을 빌려주고 옷을 저당 잡았는데 돈을 갚지 않아도 해가 지기 전에 옷을 돌려주라. 그가 춥게 잘 것이므로 나는 저에게 옷을 돌려줄 의무가 없는데도 돌려주는 것은 이는 긍휼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고아, 나그네, 과부를 도우라는 말씀이다. 연약한 사람, 도와야 할 사람에게는 궁휼을 베풀어라! 긍휼을 베풀어도 되고 안 베풀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긍휼을 베풀라. 긍휼없는 자에게는 긍휼없는 심판을 행하겠다.

앞에서는 안식을 의로 표현했다. 여기에서는 안식의 상태를 긍휼이라는 상태에서 더 보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즉 자기 것을 먹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더 적극적인 면을 포함한다(영적, 물질적, 사회적, 지식적인 모든 가난함). 의와 긍휼이 있는 공동체의 삶에서의 관계를 사랑의 관계라 한다.

23:2-9절 의로운 태도(공정한 태도)와 긍휼의 태도의 관계에 대해 더 깊이 말하는 것. 잘못하면 긍휼이 소홀히 되기 쉬운데서 다시 의를 강조한다.

23:2절 너는 많은 사람을 좇아서 판결의 시비를 굽게 말라. 사람은 항상 대중의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이 좇는다고 해서 그것을 따르지 말고 옳고 그름의 판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시비 판단시 또 하나는, 힘있는 자, 다수가 압력을 가할 때도 시비를 굽게하기도 한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약한 자에 대해 관대함으로 시비가 잘못 판단되어서도 안된다. 약한 자나 강한 자, 타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약한 자의 편에 역성들다가 옳고 그름을 잘못 판단하지 말라. 옳고 그름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바르게 판단하라.

23:5 네 원수의 나귀라도 돕고 물을 먹이라. 나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자라도 그에게 인간으로서 베풀어야 할 일을, 도움을 주어야 할 일을 도우라. 시비 가리는 일과, 긍휼 베푸는 일은 둘 다 행해져야 한다. 시비 가린다고 긍휼을 버리는 것 아니고 긍휼 베푼다고 시비를 굽게 말라. 이는 하나님께서 악인을 결코 의롭다 하시지 않기 때문,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명히 가리신다.

23:10 안식년, 21장 안식년에 노예를 자유케, 23장 휴경하는 것 - 인간의 타락으로 욕심이 많아져 착취함. 자연까지 착취함. 오늘날 먹고 마시는 일에 자연을 착취, 환경오염. 7년 마다 휴경 - 땅 자체의 안식도 있으나 땅이 쉬면 사람과 짐승도 쉰다. 그때에 자연적으로 나는 것은 고아와 과부에게 주라. , 물질적인 것에 바둥바둥 말고 일용할 양식에 족하게 여기라.

12절에 안식일이 다시 언급되는데, 안식일의 의미가 안식년과 통한다. 안식일의 의미도 고된 노동에서 한숨을 돌린다는 것. 땅의 휴경을 명하사 사람과 가축을 쉬게 하시고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푸심이다.

23:14절 무교절, 출애굽 기념 - 안식과 깊은 관련. 수장절, 추수절도 - 안식일과 관련. 오순절 유월절로부터 그 다음 날부터 49일째. 7(우리 달력 10월 연종). 5월에 추수시작, 10월에 다 거둠. 7월에 다거둠. 7월달은 절기가 많아서 거의 안식하는 날들이다. 안식일에는 축제가 있었다. 이는 즐거워하는 날, 안식일에는 이렇게 항상 희락이 있었다.

23:18절 누룩, 기름 - 부패하게 하는 것. 즉 변질시키는 요소를 경계하시고, 19절 염소 새끼를 어미젖에 삶지 말라. 이는 이방종교 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교의식의 혼입을 경계한다. 즉 신앙의 순결성 강조한다. 20절 사자를 보내겠다. 그 안에 내 이름이 있으며, 그의 말을 청종치 않으면 그 죄를 용서 않겠다. 그의 앞에서 조심하라 이분이 누구인가 예수님 제 2위 성자. 2, 3위인 성자, 성령 하나님과 관련.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이스라엘 앞서 행하며, 보호, 인도하신다. 이스라엘 가운데 위하시며, 앞서 행하시는 신적인 분을 말하는데 이를 자꾸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방식에 경계를 주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불과 구름 기둥으로 임재를 보여 주실 때 불과 구름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시는 것이므로, 그 사자의 말에 순종할 것이며, 이교의 더러운 종교적 습관을 받아 들여 거룩하신 분의 임재를 더럽히지 말라.

24장 언약 맺으심.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이 세워지기까지는 이 언약의 규제를 받는다. 그리고 24장 이후에는 성막건설을 다룬다. 25-30장 성막 건설에 대한 명령과 지침.

23:20절에서 사자를 통한 하나님의 영적 임재를 말씀하신 후에 여호와께서 명하신 성막 건설은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이 성막의 의미는 무엇인가?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내가 거할 곳, 내 이름을 둘 곳...)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막에 어떤 형태로 계셨는가?

이 가시적 형태 자체가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신 하나님을 표현, 하나님이 백성을 세상 세력에서 해방시킨 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의 도리를 가르쳐 주시고, 하나님이 그 백성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데 이것이 구원의 모형이다. 계시록에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온 것 계시하신다. 성막은 휘장 앞에 그룹을 수놓음, 전체 벽이 널판지로 되어 있는데 여기도 그룹이 있고, 덮는 천(세겹으로 덮는다)의 맨 속에도 그룹이 수 놓아져 있다. 성막 전체에 그룹으로 덮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성막을 하늘의 성소를 본따 지은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보여주신 식양대로, 온 그룹이 하나님의 성막을 뒤덮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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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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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상에 미가야 선지자가 하늘의 환상을 보는데 영들이 하나님을 모셔 섰는 형상.

욥기에서 하나님을 하나님의 아들들(영적 존재들)이 둘러섰고

이사야에는 스랍들이 날면서 창화.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 = 통치자이신 하나님. 온 세계를 다스리시는 통치자.

이것은 하나님의 통치권과 궁전을 묘사한다. 온 세계와 역사의 결정이 하나님의 보좌에서 이루어지는데, 이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이 성막이다. 성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으로, 왕으로 임재해 계신다. 이 왕의 지시와, 인도와, 말씀에 따라 진치고 움직이고 순종하여 살게 되어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내용이다. 히브리서에 보면, 모세에게 준 성소의 원본이 하늘에 있다고 하므로 모세의 성막은 하늘의 하나님의 통치소를 본따 만든 것이다. 모든 구속사와 세계사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이고, 그 결정사항을 선지자가 증거하는 것이다(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의 구별 :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참석여부로 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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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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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절 이하 거기서 너와 내가 만나리라성막은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만나는 장소, 통치 장소이다. 25:22절에 보면 통치 명령이 성막에서 나간다. 성막이 지어지자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성막 위에 머무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며, 불기둥, 구름기둥과 함께 이스라엘이 이동한다.

성소의 기능 : 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 만남은 왕과 백성의 만남이요, 만남의 형식은 경배와 예배이므로 그 도구는 제단이고 제사의 형식을 띠게 된다. 하나님은 거기서 백성을 축복하신다.

25-40장까지는 모두 성막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성막이 얼마나 핵심적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25-40장이 모두 성막문제인데 32장에 유일하게 금송아지 범죄 사건이 나온다. 그러므로 금송아지 사건은 성막과 관련하여 이해해야 한다.

금송아지 사건의 독특한 성격 : 금송아지 사건 전후에 성막에 대한 지시가 있다. 금송아지 사건은 성막이라는 내용에서 나타남, 성막과 깊은 관계가 있다. 출애굽기 24장에서 피의 맹세로 다 순종하겠다 했으면서도 금송아지를 만든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자 이때까지 중보자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만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웠다. 불안해진 백성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것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태로 가시화시킨 것이다(후에 여로보암은 똑같은 죄를 범한다. 북방에는 법궤가 없으므로 금송아지를 만든다). 이것은 제 2계명을 범한 것이다. 언약이란 율법의 순종을 근거로 하여 이루어지는데 이 사건은 스스로 율법의 불순종 = 언약파괴가 되고 말았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언약을 파기한 것이다. 레위 족속이 이스라엘 백성을 도륙한다.

모세가 율법의 판을 깨뜨려버린 일은 모세의 화난 결과라기 보다는 깨어진 언약을 의미하는 것이다. 십계명의 판 - 증거의 판. 율법이 기록되어 있다.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기록된 판이다. 판이 깨어짐은 언약이 깨어져 버림 - 언약이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모세가 목숨을 걸고 기도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백성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구(חלס;살라 = 무조건 용서) - 하자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계명을 다시 주심, 다시 증거의 판을 주심. 즉 언약의 갱신이다. 이것은 중보자 모세의 간구, 그리고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깨어진 언약이 회복된다. 이 모세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 34절이다. 나의 사자가 나의 앞서 행하리라. , 하나님이 동행하시겠다는 응답을 듣는다.

이 사건이 성막사건 속에 담겨져 있는 의미는, 깨뜨려진 언약이 성막에서 치유된다는 것을 말한다. 성막 속에서 이루어진 일들과 이 언약의 갱신의 의미와 관련있다. 이것이 레위기에서 제사로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성막은 이동식 궁궐이다. 이스라엘이 아직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에 솔로몬의 성전은 정착된 것이다.

21רמת(타메르; 쓰게하다, 고통하게 하다)는 노엽게 하지 말라 신약에서 성령을 근심되게, 슬프게하지 말라 즉, 성령을 거역하여 근심케하지 말라고 한다. 너희의 반역을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반드시 처벌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신약에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 앞에 삼가 조심할 것이며, 순종하고, 반역하면 처벌당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렇게 볼 때 말락 아도나이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분은 과연 어떤 권세를 가진 분이신가? 그 안에는 나의 이름(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구약에서 이름은 매우 중요한 뜻이 있다. םשׁ = ονομα(= 오노마; 이름). 신약에서도 그의 이름을 믿는다고 했다. 그리고 구약에서 םשׁ은 하나님의 그 인격 자체를 표현하기도 한다(21).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3:13에 볼 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즉, 그가 어떤 분이냐. Who is he? 다시 말해서 내 이름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가를 말락 아도나이를 통해서 계시하시겠다는 의미이다. 3:1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철저한 주권성을 말하는 것이다. 앞으로 행하실 역사를 인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나타내 보이겠다. 내가 이 사자를 통하여 나를 알리겠다는 즉, 나의 이 사자를 통하여 나의 역사를, 나의 일을 이루겠다는 의미이다. 또한 말락 아도나이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이스라엘을 안식의 땅까지 보호하여 들이시겠다는 것이다.

22절 말락 아도나이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과 같다. 말락 아도나이와 하나님의 unlty가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context를 살펴보면, 이 구절의 문맥적 상황을 보면 23:24-33에서 하나님 섬김의 순수성을 말하고 있다. 너희는 참된 신앙으로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을 말하시면서 왜 성결히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 즉, 말락 아도나이가 너희 가운데 계셔서 너희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이다. 모세가 너희를 인도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신다고 했는데 이는 실제로는 말락 아도나이를 통한 임재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통치해 가신다. 이것과 유사한 신약성경은 요한복음이다.

말락 아도나이에게 권세와 위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요, 그리고 절대순종을 요구하심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23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대적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적하시겠다. , 하나님이 대적하심은 말락 아도나이의 대적이다. 이런 의미에서도 말락 아도나이는 신적인 분이시다.

33:7 회막을 금송아지 사건 이후 진 밖으로 옮겨 버리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에 부족하여 도저히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시는 것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 방식의 제한성이다. 성막에서도 그 제한성이 나타난다. ,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나눈다. 이 제한성이 제거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휘장이 갈라지고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온전한 그리스도를 통한 교통이 있게 된다.

8절 당시는 성막이 있기 전이다. 모세만 회막에 들어가고 들어가면 구름기둥이 회막 위에 머문다. 이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이다. 백성은 자기 장막 문에서 먼 곳에서 보며 경배한다. , 모세와 백성의 구별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독특한 지위를 볼 수 있다(9). 모세가 하나님과 누리는 친밀함, 깊이가 11절에 보인다. 모세의 독특한 신분은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사람처럼 만나셨다. , 모세가 하나님을 얼마나 직접적으로 알았는가 하는 그 직접성과 심도를 암시하는 것이다.

12절 모세가 말락 아도나이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 나타난다.

14절 내가 친히 가리라 ינפ(파나이)ךאלמ(말락)과 동일하다.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봄. 여기서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얼굴이라고 하였다.

18절 하나님의 영광을 내게 보여주소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알 수 있게 체험케 해달라고 한다. 19절 이하에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심(긍휼을 베풀자에게 베품), 긍휼은 하나님의 주권적 행사이므로 하나님의 주권적 성격이 나타난다.

20절 너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에 직접 접촉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다. 내 등(배면)을 보리라는 것은 모세의 하나님의 지식의 제한성을 말한다. , 간접성이다. 신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이다. 초월적인 것이다. 인간이 그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이시다. 신약에서는 고린도전서 3장에 이것을 말한다. 모세는 구약에서 하나님을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본 자였다. 아주 특별하고 독특한 체험이었다. 그러나 이 독특한 체험도 우리가 신약에서 성령 안에서 체험하는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모세는 어디까지나 구약에 속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그 자체로 폐쇄된 책이요, 완전한 책이요, 동일한 책이므로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고 풀어야 한다. 2:9에 보면 신성의 충만한 것이 몸(경험)으로 거하시고 요한일서는 본 바와 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와 증인과 말씀으로 하나님을 체험한다고 한다. 말락 아도나이로 통한 하나님의 얼굴을 통한 임재와 인도, 분명히 라고 하는 분과는 구별된 절대순종을 요구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안식의 땅으로 인도하시는 분 말락 아도나이를 분명히 계시하셨다.

출애굽기가 성막중심화 경향에서도 의식적 요소가 현저하게 나타남은 레위기를 위한 예비적 단계이기 때문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외부적(phisical), 가시적 상징이다. 성막, 법궤, 이 모든 것은 물질로 되어 있다. 성막중심화 경향과 의식적 요소가 현저해지면서 계속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속죄소와 그룹은 연결되어 있다 = 하나님의 보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가장 현시적인 것은 구름과 불기둥인데 잘못하면 구름과 불기둥을 하나님의 본체와 일체화시키기 쉽다. 2계명 우상을 만들지 말라 ; 초월적 하나님을 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 형식화, 가시화하지 말라는 것으로, 하나님은 초월적인 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임재해 계시는 것은 말락 아도나이의 인격으로서 임재해 계신다. 구름이나 불이라는 비인격이 아니라, 인격적 임재이다. , 말씀하시는 하나님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한 다른 인격을 통해 임재하신다. 삼위일체 교리에는 불분명하나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 말락 아도나이는 자기에게 절대 순종을 요구하고, 불순종시 엄한 처벌을 하는 최고의 권위를 가진 분이시다. 말락 아도나이 자신도 우리 경험으로 이해 하능하거나 보는 구름, 불기둥과 동일시하시 쉬우나 그러나 말락 아도나이는 나의 얼굴이라 하신다. , ינפ(파나이; 얼굴)는 그 자신이 신적인 존재로서 인간의 이성, 지적 능력으로 그 본질을 꿰뚫어 알 수 없는 분이다.

성막중심화 경향과 함께 말락 아도나이 또는 파나이로 하나님의 임재를 자꾸 거론하는 것은 성막이 이스라엘 삶의 핵심적 위치에 있지만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한 쇄기를 박기 위함이다. 그 위험성은 하나님의 임재를 불기둥과 구름기둥과 동일시하기 쉽다. 하나님의 임재를 가시적, 물리적인 것에 국한시키기 쉽다. 하나님의 임재가 이스라엘의 존재의 의미이며(33:16), 그 삶을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 되게 하는,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과 구별하는 즉, 이스라엘의 존재의미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것을 표시하는 가시적 표시로 성막과 구름기둥이 있다. 하나님은 그 백성 가운데 영적, 인격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영이시며, 초월자이시며, 무한자이시고, 영원자이시며, 물질에 갇히어 국한되거나 가시화될 수 없는 분임을 깨우치는 부분인 것이다.

솔로몬의 성전 건축시 기도에 보면 하나님은 하늘의 영역이라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 없다고 한다. 이런 계속적인 경고는 결국은 하나님 자신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 안으로 들어오시므로 우리가 결험할 수 있는 영역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런데 구약에서 하나님을 직접 경험할 수 없음을 상기시키는 것은 구약은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이며, 완성을 기다려야 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사무엘이 교회(이스라엘은 국가가 아니다)를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 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적 임재에 있어서 왜 의식이 필요한가? 하나님은 영이신데도 의식의 형태를 취할 수 밖에 없었는가?

하나님의 임재의 표시로서 성막이 두드러지는 과정 속에서 말락 아도나이, 파나이를 통해서 영적으로, 인격으로 하나님이 임재하심을 보여주신다. 하나님 임재의 가시적 상징인 성막과 불,구름기둥으로 국한시키는 위험을 배제하기 위한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도로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사실과 맥락을 같이한다. 가시적 상징 표시가 실재와 연관되어 있다. 그래서 성막에 가까이 가는 자는 쳐죽이도록 되어있다. 이스라엘 한 가운데 성막이 진치고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 이스라엘 삶의 한 중심을 차지한다. ,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하나님이 삶의 중심을 차지하는 그런 삶이다. 레위긴출애굽기의 이와같은 문맥을 전제로 하고 있다. 레위기의 내용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성막 중심의 이스라엘의 삶에 대해서 말한다.

레위기의 초두에 보면 1:1에서 여호와께서 회막(meeting place)에서 모세를 부르신다. 회막이라고 부르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 회막은 meeting place로서 하나님과 백성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이 장소에서의 이스라엘의 삶의 본질을 ןברק(코르반;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한다. 하나님 백성의 삶의 핵심, 삶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 매우 귀중하다. ברק(콰라브; 가깝다), בירקה(히크리브; 히필형으로서 가져오다, offer, 바쳐드리다), ןברק(코르반 = 고르반; 하나님께 드림, offering의 의미).

이스라엘의 삶의 본질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 이스라엘에게 1년에 3차씩 하나님게 보일 때 빈손으로 오지 말라 하신다. 이는 헌금을 가져오라는 요즈음의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드림은 상당히 복잡하고 깊은 의미이다. 이는 자기 의()나 갚음의 의미가 아니다. 전체적인 의미는 대속적인 의미이다. 회막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로서 이스라엘의 한 중앙에 위치하고 그 중에서도 하나님과 직결되는 곳은 지성소였다. 그리셔 지밀(至密)의 처소(가장 깊은 차원에서의 사귐, 만남이 이루어지는 처소)이다. 이러한 처소에서의 만남은 어떤 형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이는 의식의 형식으로 이루어진다(cult, rite, ritual).

의식(cult)이란 무엇인가? 의식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는 단어는 רכז(자카르; 기억하다)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지나간 과거를 지금 현재에 와서 돌이키고 재생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의미를 갖는 유월절 등은 항상 기억하라고 한다. 기억이란 과거의 재생에 의해 그 효과를 지금에까지 미치게 하고, 다시 오늘에 와서 되살려 놓는 것이다. 시간적 의미를 떠나서는 Vergegenwärtgung(페어게겐붸르트궁; 현림)인데 contemporary + persidence의 두 의미가 합한 것이다. , 지금 여기 있지 않는 것을 지금 여기 있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임재의 뜻을 가진다.

의식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어떤 역사적 사건과의 관련성(역사적 밀착성), 예를 들어 유월절 의식의 근거는 출애굽시 하나님이 애굽의 장자를 치신 사건인데 유월절 의식은 해마다 4월이 되면 옛날에 하나님이 하신 역사를 오늘에 다시 한 번 살리는 것,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또 의식은 과거만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킬 때, 저주와 심판 아래 살다가 노아 때의 안식을 기억하며, 애굽의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키신 그 안식을 기억하고 되살려 다시 누린다. 그러나 그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실 안식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인해서 주실 안식을 미리 오늘날 다시 소망의 형태로 미래를 오늘에 미리 당겨서 살리는 것이다(성취). 예를 든다면 성만찬도 역시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이루신 구원과 앞으로 이루실 구원을 미리 소망의 형태로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이 집중하게 된다.

concentrated moment(accumilate point) = 직접점. *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을 신화적 주제와 관련시켜 말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많다. 특히 cult를 극대화시키고 과장하여 ‘eternal now’라 해석한다. concentrated moment(= 집중적인, 밀도있는 순간). 자유주의 학자들이 cult를 과장하여 주장한 한 예를 보자. holy time, holy place에서 의식이라는 형태 속에서 모든 시간이 해소되어 버린다 - 초시간, 무시간. 천상의 영역과 지산의 영역이 만나는 곳, 특별한 공간, 특별한 시간이 마련되는 것 - ,공의 개념이 없는 것.(노우트 한 페이지(페이지 17)가 복사되지 않았음)

특히 천상의 것, 영적인 것을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나타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영적이며, 인격적임을 강조해온 것과 같이 하나님은 영이시요, 그러므로 물질적, 가시적 예배는 하나님이 직접 받으신다고 볼 수 없다. 물질적인, 가시적인 형식을 통해서 드려지는 영적, 인격적 섬김이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요, 받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4:23)에서 볼 수 있다.

인간도 영적 존재이므로 하나님과 교통이 있다. 순전히 영으로만 섬김과 교제가 가능한데, 순전히 영으로만 교제하는 것이 바로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 창조상태에 사는 이상 인간은 항상 영육의 통일체로 살게 되어 있다. 영육의 unity 속에서모든 것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영혼과 가장 밀착된 예배의 형식이 고전 14장에서는 말씀, 예언, 기도, 찬송(언어는 인간 내면과 가장 밀접히 관련)으로 이루어졌다. 이런 형식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항상 언어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이런 가장 영적인 예배도 인간 영육의 통합체의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현 창조질서에 사는 이상 그리고 인간이 영육의 통일체로 살 때, 항상 영적, 인격적인 것이 항상 외적, 가시적 형태로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을 삶이라고 한다.

참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간의 존재방식으로 취하셨다. 가시적 형식에 담긴 영적, 인격적 섬김과 그 육체를 심자가에 못박히심도 육체만이 아니라 육체와 영혼의 통일체로서 드리셨다. 구약 성도들도 그들 삶의 전체로 드림에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께 영적, 인격적 섬김을 외적 모습으로 드렸다. 첫 곡식, 가축, 곡식 등을 드림. 특히 말과 형식(언어로 찬송, 감사; 내면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했다.

12:1-2 마음이 새로워져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것 즉,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이는 이성적 존재(영혼을 소유한 존재)로서 마땅히 기대되는 섬기는 삶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 인격적 삶이 인간의 실재 삶(눈에 보이는 행동)으로서 드려지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서 영적인 것만 드려지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드려지기 원하신다. , 오히려 자연적 인간의 삶을 지키기 원하시는 것이다. 의식에 의해서 지상적인 것이 천상적인 것으로 바뀌어지기(로마 천주교의 사상)를 원하시지 않는다. 철저히 인간의 삶에 충실한, 피조성을 철저히 드러내는 형태로 드려지기를 원하신다(= 인간의 존재방식에 충실한 형태 = 영과 육의 통일체). 이는 내면과 외면의 일치를 원하신다.

33장의 ינפ 모세와 얼굴과 얼굴로 대면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보지 못하고 뒤만 본다. 죽이는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 하나님 그 자신은 어떤 가시적 형태인, 언어의 형태인 계시와는 구별되며, 그 하나님 자신은 어떤 인간도 파악할 수 없으며, 가시적인 것으로 나타낼 수 없다. 오직 배면만 즉, 가시적 형태는 간접적 경험으로만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되심, 독생하신 하나님만이 하나님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본질, 본 모습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오관을 초월한, 인간의 경험을 초월한 방식으로 임재해 계시며, 영육의 통일체인 인간과는 다른 분이시다. , 인간과 하나님과의 무한한 거리를 말한다. 그래서 cult는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cult : 상징적으로 제물과 언어로 나타내는 것이 의식이다. 영이신 하나님,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성막에서 가시적, 가현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통해 만나는 것은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독립적 영역이 아니라 실재적 삶의 영역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고 이것이 깨어질 때 의식 자체도 무의미해진다. 영이신 하나님이 가시적 형식을 띠는 의식을 하도록 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방식의 고려에서 나온 것이다. 영육의 통일체로서, 영적인 것과 분리되지 않으며 영적인 본질을 담고, 영적인 삶도 전체적인 삶의 일부분으로 가장 실제적인 삶이라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 영적 성격이 가장 두드러지는 장소인 성막에서 육신을 입고 있는 영육의 통일체 즉, 육체와 상관되는 인간의 섬김은 모든 활동이 육체적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 섬김이 영적 사귐을 상징하는 형식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도 물론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와 영적 사귐이 가능하겠으나 우리의 영과 하나님의 영의 무한 질적 차이 때문에 더더욱 죄인(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된 인간)으로서의 인간이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된다. 성령님이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의 실제적 만남이 불가능하다. 칼빈은 믿음으로 성찬에 참여할 때 성령으로 그 은혜를 받아 누리게 한다고 말한다. 영의 질적 격차, 죄인으로서의 장벽 때문에 상징화된 의식을 해소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이 은혜를 실제화시키는 분은 성령이시다.

cult의 공동체성과 관련하여 상징될 수 밖에 없는 필여성, 그런데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섬김이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진다면, 물론 영적인 예배가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 의식은 공동체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공동체로서의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항상 communication이요, 이렇게 communication이 요구됨은 모두가 하나가 되어 한 마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요구된다.

공예배에서 요구되는 것(공동체에서 드려지는 예배에서 요구되는 것)은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 사람이 한 마음으로 영적 예배를 드리려면 상호 communication이 필수적이다. 그들의 내면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고리 즉, communication 수단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영적 내면을 직접 대할 수 없고 언어나 행동이라고 하는 영적 내면의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고 효과적으로 내면과 접촉하게 하는 것이 언어와 행동이다. 따라서 어떤 공동체가 어떤 영적 체험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형식성을 띤 외부적인 매체가 필요하다. 이것이 cult가 왜 언어와 형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그 이유를 밝혀준다. cult는 항상 공동체를 전제로 하므로 공동체가 함께 하기 위해 언어의 통일이 있게 된다.

signifying referent ; 말 자체도 상징이므로 음성기호 sign이라 한다. 기호라는 것은 공동체 안의 하나의 약속이다. 행위는 상당히 형식화되어 있다. 언어와 행동은 영적 내면을 가르키기는 하나 내면 그 자체는 아니므로 따라서 언어와 행동은 내면 상태에 대해 상징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영적 내면에 뿌리를 둔 언어와 소리라는 외부적 표현, 가청적 표현인 찬양은 그것이 단순히 상징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내면의 찬송과 분리될 수 없다.

외부적 형식, 약속만으로 공동체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예배드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성령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한 마음으로 드릴 수 있다. 오직 이 의식을 믿음으로 참여하여 드릴 때, 성령이 이 예배가 영적 내면에 실체가 되도록 하신다. 4:24 신령과 진정으로 = 정당한 예배, 이때 신령은 우리의 영과 성령 둘 다 가리킨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거듭남은 다시 태어나고 또한 위로부터 나는 이중적인 의미의 언어를 요한은 사용한다.

12:1-3의 영적 예배는 영적 존재로서 적합한 예배 형식에 대해 하신 말씀이다. 영적 존재가 변화되어 외부로 나와야 한다. 전인격과 삶을 통한 예배, 단순히 표식의 형태로서만이 아닌 즉, 영육의 통일체로서 드린 예배가 섬김의 삶으로, 외부적 표현으로까지 연결되어야 한다. 몸으로 산제사를 드리라는 것은 그 몸을 통해 자신의 삶을 드리라는 것이다.

35장 성막을 짓는다. 40장 성막 세우는일, 성막 봉헌식으로 마침.

출애굽기가 성막사건으로 종결짓는 것은 구속사의 흐름이 성막과 큰 관련이 있음을 말한다. 구원의 마지막 모형은 성막으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다스리시며 통치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의 완성도 영원한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볼 때 이 성막사건은 큰 의미가 있다.

성경은 역사 이야기이다. 그리고 궁극적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역사이다. 그 역사의 중심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의 역사를 마태복음 1장을 통해 관찰하는데 예수님의 족보는 아브라함으로 즉 창세기 12장으로 연결 올라간다. 즉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약속(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겠다는 약속), 이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으나 아브라함 때 이미 맺어지고 성취되어 가고 있다. 이 약속이 일단 다웟에게서 완성되었지만, 그러나 구약의 왕국은 그림자, 예표이다. 이 왕국이 몰락, 부패, 와해된다.

성경이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 성경의 역사를 강조할 때 중요한 면은 역사는 변하는 것, 변화를 전제로 한다. 역사 통해, 본질적으로는 아브라함 통해 이루어 왔으나, 각 시대마다 형식에서는 변화와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해야 한다. 한 시대의 계시, 규례들이 다른 역사 시대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이 있다. 여기서 구속사적 역사가 역사를 통해, 또한 상황에 따라서 구속사적 형식이 달라지고 의미가 달라진다.

구약 - 짐승잡아 제사 = 예수님의 사역의 예표.

신약 - 짐승잡아 제사하면 죄 = 예수님의 구속사역 완성. 지금은 성만찬으로 기념.

율법이 타락전 : 아담이 지킬 수 있다.

타락후 : 인간이 더 이상 지킬 수 없게 됨, 정죄하는 의미를 갖는다.

성령오신후 : 성령 안에서 다시 지킬수 있는 법이 됨.

같은 율법이라도 시대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진다. 성경의 개념이나 중요사상 이해할 때 그것이 갖는 의미가 다름, 즉 어떤 역사적 상황에 서 있는가, 구속사적 상황에 관련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봐야한다. 항상 변해버린 구속사적 상황에 맞추어 해석하라.

성경을 역사적 시각으로 보는 관점을 이해하라. 각 시대마다 역사 안으로 초청하여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통하여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

제사 예표 성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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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타락 아브라함 출애굽 민수기 Exile 예수님 완성 파루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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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Theophany로 보여진다. 시내산에서 불꽃, 천둥, 번개, 구름기둥, 불기둥 등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는 이와같은 또는 성막 같은 물리적 처소 통해 임재해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구약에서도 인격적, 영적 임재이셨다. 하나님과 다른 인격이신 분이 인격적으로 임재하셨다. 이것은 성부 하나님의 사역인지 성령 하나님의 사역인지 정리해야 겠으나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구약에 하나님의 사역의 본질은 차이가 없다. 구약에도 단순히 외적 의식 통해 성부만의 사역은 아니었다. 스데반의 설교에서 보면 너희가 성령을 거스렸다고 하여 구약시대에도 성령의 사역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식의 특징은 과거, 미래의 일을 상기하거나 성취하는 것이다. 영적 실재를 경험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의식은 공동체로 많이 드려진다(예배). 이스라엘이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 = communication이 있었고, 이는 언어나 외부적 상징물로 되어졌다. 외적 상징은 의식도 포함되고 이도 역시 약속하는 것이다. 언어, 외적 상징, 의식 등 다 약속으로서 동참하는 자들의 내면을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한 상징들은 그 자체만으로는 효력이 없고 믿음으로 참여할 때만 그 효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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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 말락 아도나이)

출애굽기 34장 이후에는 성막 중심화 경향과 함께 나타나는 것이 의식적 요소의 두드러집이었다. 또한 이와함께 병행해서 주입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방식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방식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3:2,4에서 하나님과 여호와의 사자가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다. 구약에서 말락 아도나이는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여호와의 사자께서 말씀하셨다가 거의 동일하게 나온다. , 말락 아도나이는 보통신분이 아니다. 하나님이신 또는 하나님과 동등한 신분이신 분임을 알 수 있다.

14:19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는 분이 말락 엘로힘이었다. 이분이 돌이켜 가면 구름기둥이 따라 움직였다. 에담에서부터 불기둥, 구름기둥이 나타난다. 이 신적인 분이 가시적 형태와 일치된 것은 하나의 신현현상(Theophany cloud)이다. 구름기둥은 바로 말락 아도나이의 임재를 나타내는 가시적 형태였다. 그리고 밤에는 구름기둥에서 불꽃같은 것이 비워나온다. 3:2에서 불꽃형상으로 해석함은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불꽃형상으로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23:203:2, 14:19와는 달리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다. 앞의 두 구절이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고, 하나님과 동등시 되는 분이라는 막연한 암시가 있다면 23:20에서는 הלשׁ(αποστελλω; 샬라; 아포스텔로) , 이스라엘 앞서 행하시도록 보내심을 받은 앞서 행하시는 분, 도중에서 너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며 내가 예비한 장소로 너희를 인도해 들이는 분으로 묘사한다. 이는 신약과 매우 흡사하다(14:1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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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ארקיו; Leviti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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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위기는 시내산 언약의 일부(Sinaite Covenant Law)이다. 레위기 7:37절에 보면 율법의 일부인 Cultic regulation을 시내산에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5대 제사의 규례). 율법(law)은 출 20장에서 십계명으로 주어진 후(pecalogue), 21-23(civil law)은 시민법이며, 24장에 오면 covenant making(언약의식)이 된다. 25장은 성막건축을 지시하는데 먼저 헌물에 대하여, 설계도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31장에 가면 건축기술자를 택정하고(브사렐, 오홀리압), 이어 12-18절은 안식일 규례를 말씀한다(이것은 언약에 있어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나와 너희의 표징, 영원한 언약이라 한다 - 두 돌판을 주심.

32장은 Aposfacy of Israel(이스라엘의 배도), Intercession of Moses for Israel(모세의 중보), Covenant Renewal(언약갱신)이 나온다. 31:18절에서 두 돌판 주심은 증거판이며 맹세인데 32장에서 배도해 버리자 모세가 돌판을 깨어버린다. 그 의미는 언약의 의미가 없어져 버렸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세는 다시 중보기도하고 renewal한다 - 두 돌판 다시 주심.

34장에 두 돌판을 다시 들고 내려옴.

35장에 안식일 규례가 또 나타난다.

31장의 성막규례가 나타나고 또 35장에 다시 성막규례가 있는 그 둘의 차이는, 전자는 하나님이 직접 명령하신 것이고, 후자는 그 명령을 받은 모세가 대신 명령을 시행하는 것이다. 그런 구조에서 볼 때 31장의 성막규례는 바로 35장으로 연결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32-34장의 내용은 왜 들어가 있는가?

그 의미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에 대해 이스라엘이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며 모세의 중보로 인해 파기된 언약이 다시 갱신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그 문맥은 성막건축 명령과 시행(35) 사이에 되어짐으로서 성막의 기능의 주요한 것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파기된 관계를 회복시키는 의미라 하겠다. 이것이 레위기의 성막제도(cultic system)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거룩하지 못한 백성이 거룩한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제사를 통한 거룩화된 백성이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 성막인 것이다.

35장은 성막건축이 시행된다. 헌물 시행자를 불러 성막을 세움.

35-40장은 성막에 관계된 제도이다. 반면에 레위기는 하나님이 시내산에서 주신 율법의 일부인데 특히 성막과 관계된 율법이다.

34장은 십계명과 연결되는데 조목이 3개 많아 13계명이라 한다. 그 계명은 cult와 관련된다. 그래서 34장은 cultic pecalogue라고도 한다. 어떤 자들은 출 20장의 십계명과 34장의 십계명을 다르게 해석하는데, 그것은 모세와 하나님과의 만남의 사건을 너무 축소화시키는 오류를 범한다.

20장의 십계명은 그것만 말씀했다는 뜻이 아니라 많은 말씀 중 가장 밀도있게 요약하여 주신 결정체라 할 수 있다.

레위기는 출 34장의 십계명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 설명하는 것이다. 5장에 보면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로 하여금 여호와를 섬기게 하기 위함이다고 한다. service는 애굽으로부터 벗어나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삶의 본질을 의미한다. דבע(아바드) : 하나님을 섬기는 삶. 이것은 롬 12장의 신약적 원리와 같다.

하나님 섬김의 원리는 십계명’(20)이다. 20장 첫 부분은 하나님 섬김이 나오는데 특히 뒷부분에는 의식영역(cultic service)에 있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김은 성막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적 형태의 service이다. 레위기는 성막 중심의 삶이다.

출애굽기 마지막 부분에서 확인한 것은 성막 중심의 삶이다. 법은 삶의 규범, 도리이다. 따라서 삶의 중심에 성막이 위치함은 삶의 중심에 하나님이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다. 레위기는 성막에서부터 이스라엘의 삶이 시작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성막을 회막(דעומ להא; 오엘 모헤드)이라고 한다. 회막 = 만남의 장소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만남이다. 영적, 인격적으로 그들 가운데 임재해 계시는 하나님과 만남. 만남의 장소이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시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 계시. 그러므로 cult의 기본구조(임재, 계시)는 만남이다. 이것은 족장시대의 cult구조와 동일하다.

이스라엘의 삶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다. 회막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을 섬기는 삶의 특징은 형식으로서는 제사요, 본질로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삶이다(고르반).

Theophany(하나님이 직접 인간 처럼 나타나셔서) 계시하신다. 성막의 임재 특성은 throne(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이며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형태이다. הבצמ(미츠바)  또한 예배의 형태이다. 성막 중심의 삶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 하나님 면전에서의 삶이다. 신약의 요한 1서는 레위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인데 cultic 구조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귐을 가리킨다(κοινωνια;코이노니아). 하나님에 대한 감사, 사랑, 헌신 등이 일어나는 장소, 이런 형태가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제사이다. 사죄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제사이다. 이와같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사죄이다. 그러므로 그 만남은 사죄와 동시에 축복의 만남이다.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당시의 cultic system을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예배와 삶이 괴리되었기 때문이다. cultlife를 통해 더욱 구체화 되는 것이다(12).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된 삶을 cultic용어로 말하는 것에서 cultlife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삶과 예배가 분리될 때는 둘 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mere cult - 형식주의에 빠짐

mere life - 인본주의에 빠짐

실 생활에 이루어지는 감사와 헌신, 사귐 등이 가장 밀도있게 이루어지는 순간과 장소가 바로 예배이다. 물론 예배 자체도 하나님 섬김의 삶의 일부이지만, 예배는 대표성을 갖고 삶을 예배화시키는 것이다.

구약체계 속의 이스라엘은 율법지킬 능력 없음 때문에 반드시 성막과 제사를 필요로 한다. 비거룩한 존재가 거룩성을 요구받을 때, 그 결과는 절망이고 그 회복은 제사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은 신약의 요한 1서에도 그대로 구조화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 범죄하면 거짓말 ??

하나님을 아는 백성이 죄없다하면 거짓말 ?? 그 해결책은 요일 1:9절의 자백이다.

레위기 6,7장을 보자. 성막 중심의 삶은 곧 하나님 중심적 삶이다. 그것은 ןברק(고르반) 즉 하나님께 드리는 것(offering)이다. 그리고 제사에 관한 것이 6,7장이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르반의 의미가 매우 복잡하다. 우리는 우리의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실제에 있어서는 매우 복잡하다. 드림의 구체적 형태는 5가지 제사로 나타난다. 이것을 흔히 5대 제사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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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ןברק(코르반)의 종류(5대 제사)

1. הלע 올라; 번제)

2. החנמ 민하; 소제)

3. םימלשׁ חבז(자바 쉘라밈; 화목제) - 감사제(הדוג;고다 , 서원제, 낙헌제

4. האטח 헤타아; 속죄제)

5. םשׁא 아샴; 속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빈손으로 나아오지 말라.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항상 드릴 것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속죄제나 속건제는 사죄의 의미이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만 있지 않고 하나님께 받는 것이 오히려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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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드리는 방법

화제 - 태워드림, 요제 - 흔들어 드림, 전제 - 부어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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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물의 종류

밀가루, 기름, 향료, 소금, , , 염소,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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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번제, 화목제, 소제 삶의 의식적 형태(드려짐)

속죄제, 속건제 피로 인한 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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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제는 모든 것을 다 태운다. 이것은 순전히 드림만의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1:3절을 보면이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열납되는 것이 포함된다. 4절은 이 제사를 통해 속한다(רפכ; 카페르). 이는 pay off로 갑을 치루는 뜻도 있다. 죄값을 지불하는 것(속죄)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죄가 덮여지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가 드림의 의미도바 우리가 받는 것의 의미가 더 많다. 하나님께 드림의 형태가 제사의 형태로 되어 있다. 이는 상징적인 행동 양식이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하나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인간들의 행동이 상징성을 띨 수 밖에 없는데 이는 하나님은 영이신데 인간은 영육의 통일체(영육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현 창조질서의 존재방식에 결과). 그러므로 영적 만남이라도 가시적 형태가 필요했다. 이 여러가지 형식은 영적 실재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반드시 이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레위기에서 여러 형식이 어떤 영적 실재를 상징하는지 잘 알 수 없다.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 의미가 어느 정도 밝혀져 있으나 화목제도 추측할 수 있는 당시 실마리가 있는데 번제와 소제는 무엇을 의미하는제 성경내에서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번제 הלע는 출애굽 이전 노아시대까지도 드려졌던 종류이다. 속죄제나 속건제는 출애굽 이전에는 출현하지 않는다. 번제, 화목제는 이스라엘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고대 근동 여러 민족에게서도 보이는, 이방종교에도 있는 형태이지만 속죄제와 속건제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형태이다. 그리고 속죄제와 속건제는 그 제사의 뜻이 분명하게 밝혀진다(죄를 사함).

번제, 화목제의 뜻이 명확치않는 이유는 이방종교에도 알려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그 당시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제사의식이므로 알려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근동지역의 종교적 맥락에서 그 의미를 발견하려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오히려 이 의미는 구약성경 문맥에서, 그리고 역사적 으로 성경을 자세히 살피면, 역사적 흐름이 예전부터 있어 왔음을 희미하게 발견할 수 있다. םימלשׁLXX에서 σωτηριος(소테리오스)라고 번역함으로써 구원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האטחםשׁא은 이스라엘의 독특한 제사형태이다.

구약에서 가장 오래된 제사는 소제와 번제이다. , 가인과 아벨의 제사이다. 이 두 사람의 제사는 다 소제였다. 레위기의 5대 제사에서는 번제가 먼저 언급되었으나 역사상으로는 먼저 소제가 나와 있다(명백한 언급). 소제가 역사상 최초의 제사였으나 제사의 존재를 맨먼저 언급하는 구절은 아담에게 가죽 옷을 입힘에서 즉, 동물을 죽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치부를 나뭇잎으로 가림은 성적인 범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성결의 상실이 그러한 표현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 내적 부패의 표현, 다른 사람의 나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순결하게 보지 못하는 내젹인 부패에 대한 표현이다. 내적인 욕망, 정욕이 생겨 자꾸 죄를 생각나게 하므로 부끄러워 그 나체를 가리게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죄를 생각하지 않도록 즉, 이는 우리의 죄성을 은폐해 보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혀 수치를 가리셨다. 짐승의 죽음은 피흘림으로 죄를 가리움이다. 이것은 바로 속죄의 원리가 아담에게 계시되지 않았겠나 추측할 수 있다(단순히 추측이다). 그리고 레위기의 번제에서 다 태우는데 그 중에 안태우는 것이 있다. 바로 동물의 가죽이었다. 이것과 이상의 가죽 옷을 연상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이것과 관련을 시킨다면 이것은 역사적인 면에서도 최초의 제사는 번제라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말하지는 않았으나 성경의 문맥을 보면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동물은 정결한 짐승에 속하며 대개 가축(야생동물이 아니다)에 해당한다. 여기서 제물의 종류에서 생각할 점은 첫째 음식이라는 점이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 생산하는 것들이다. 이런 점을 organize한다면, 성막 중심의 삶이 첫째로 제사로 시행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이 ןברק(제사)으로 된다는 것(바치는 것)이다.

소제 : 최초로 성경에 기록된 제사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였다. 레위기의 소제는 밀가루, 향료, 소금 등으로 드리는 식물성의 제사이다. 가인의 제사는 곡식, 아벨은 양을 드렸다. 그러나 아벨도 소제로 드렸다고 나온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의 의미는 소제라고 보는 것이 좋다. 왜 한 사람은 곡물로, 한 사람은 동물로 제사를 드렸는가? 4:4절을 보면 분명히 아벨은 제물을 죽여서 드렸다. 뿐만 아니라 아벨의 제사는 기름으로 드렸다. 그런데 분명히 동물을 죽여서 드렸으나 성경은 곡식으로 드린 것이나 동물을 죽인 것(피흘린 제사)도 다 החהנמ(민하; 소제)로 표현했다.

가인 - 곡식, 아벨 - 동물의 제물에서 이는 자기 직업과 관련된 제물이었다. , 자기 일에 열심히 해서 그 소산으로 제물을 드림이다. 여기서는 제물의 종류보다는 그들의 공통점 즉, 그들이 숙하여 일한 열매로 하나님께 드렸다고 보는 것이다. 직업, 수고, 삶의 열매, 하나님이 허락하신 삶의 영역에서 수고로 얻은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 즉, 삶 자체를 드리는 것이다. 물론 신약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열매 맺는 삶을 드리라고 한다. 이는 레위기 2장의 소제와도 연결된다.

기름은 대개 성령을 상징한다. , 성령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맺게 하시는 열매를 드린다. 이것을 태워 드릴 때, 향기롭고 하나님께서 열납하신다. 소제에 관하여 또 참고해 볼 수 있는 성구가 창 32장이다. 야곱이 에서에게 선물을 보내는데 그때 선물이 바로 החנמ(민하)인데 에서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이다. םינפ אשׁנ(나샤 파님) 누구에게 호의를 베풀다. ...을 맞아들이다. 누구에게 편애, 특별대우하다. 사정을 봐주다의 의미이다. 이것은 소제와 관계가 없으나 החנמ의 성격을 보여준다.

4:7 תאשׂ ביטית־םא אולה(할로 임-테티브 세에트) 여기서 ביטיתאשׁנ בוט(토브 나샤)이다. 어찌 낯을 들지 못하느냐, 왜 얼굴이 떨어졌는가? ביטית는 내적 삶만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외적 삶의 형식도 나타내는 두 성격을 포함한 것이다. 소제는 삶의 열매, 직업과 관련된다. 그래서 내적인 면과 외적 생활도 포함하는 것이다. 창세기 32장과 4장에서 알 수 있는 소제의 성격은 그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제사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기 위해 드려지는 제사이다.

최초의 명백한 번제의 제사 기록은 노아의 제사이다. 바로 홍수 후에 정한 짐승을 잡아 번제로 드렸다. 최초의 두 가지 제사 형태는 번제와 소제이다. 이는 레위기 5대 제사들의 순서와 일치한다. 4:26 셋의 아들 에노스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 5:21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 이곳에서는 제사가 있었는지 명백한 기록이 없다.

노아에 와서 두번째로 제사가 명백히 기록되었다. 노아는 제사 드리기 전 먼저 제단을 쌓았다. 회막 앞의 제단은 번제단을 말한다. 상번제는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불이 타게 한다. 안식일에는 2번 드리나 평일에는 한 번 드린다. 화목제(기름, 콩팥 등만 드림)는 이 상번제 위에다가 사르게 되어 있다. 레위기의 번제의 제물은 정결한 짐승 중에서 가축을 드린다. 소나 양이나 비둘기 등을 드리는데 노아가 정결한 짐승을 드림은 앞으로 레위기에서의 제사의 선조전형(proto-type)이다. 노아에서부터 정결한 짐승을 구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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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번제의 효과는 죄값이 치루어져 그의 죄가 가리워져 속하게 된다. הוהי ינפל ונצרל ותא בירקי(야크리브 오토 리르초노 리프네) 여기서 밑줄 친 ו는 황소를 가리키는지, 제물드린 제사자를 가리키는지는 이론적으로 둘 다 가능하다고 보여지나 문맥을 보면 황소를 드려 제물을 열납되게 하라는 의미보다 제물 드린 자가 열납되어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는 자로 설명한다. ,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서게하는 것이다. 의는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지게 하는 것의 조건이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 의롭다는 것과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것과 상호교환된다. 11:4 더 나은 제사는 하나님께 열납되는 제사요 이는 의롭다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 더 나은 제사 = 열납되는 제사 = .

1:4 안수한다 = 동일시한다. 내가 죽어야 할 것을 짐승이 대신 죽는다. 그러므로 내 죄를 전가한다는 의미보다는 내 대신 짐승이 죽는다는 동일시의 의미가 더 강하다. 예를 들어 신약의 안수는 하나님이 디모데가 장로회에 안수하셨다는 것으로 하나됨의 의미가 더 커서 동일시의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므낫세, 에브라임에게 안수한 것은 야곱의 축복에 동참함이다.

레위기 1장에서 번제의 의미를 살펴보면, 대속적인 죽음에 의해서 내 죄가 사해지고 내가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는 중요한 의미이다. 가죽을 제외한 전부를 태워 드리고 내장과 다리를 씻어 전부 드림의 의미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노아에게서도 속죄적인 의미의 번제를 찾아볼 수 있다. 8:21ff에서 노아의 제사를 열납하시면서 하나님은 인류의 악함을 인정하시고 그러면서도 이 땅과 모든 생명을 저주하지 않으시고 멸하지 않겠다고 하신다. 희망이 없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죄를 사하사 죄의 결과인 사망의 효력을 무력케 하셨다. 이는 레위기와 일치한다. 삶의 질서존속을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선언하신다.

번제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창 22장 이삭을 바치는 사건에서 나타난다. 15:9 언약의식과 관련하여 제사드림이 나오는데 이도 번제이다. 언약과 제사의식을 논할 때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22장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온전함을 알기 위한 시험이다. 번제는 하나님에 대한 온전한 헌신, 자기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음을 이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다. 22장은 창 17장과 더불어 주어진 할례의 언약(새 삶의 시작으로 새 삶에 대한 요구)을 완결하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인신제사를 요구하심. 당시에도 통상적인 제물은 양이었음을 알 수 있다(22:9). 따라서 인신제사를 요구하심은 상상밖의 일이다. 결국 시험의 목적이 경건, 헌신을 알고자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의해서 알 수 있다. 이삭을 바치라는 이 사건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인신제사를 하나님은 절대로 요구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세의 율법에서도 절대 인신 제물을 드리지 말라고 한다. 오히려 전체 삶을 통해 드리는 헌신과 순종을 즉, 하나님께 대한 경외를 더욱 요구하시는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이루어질 수 많은 제사(대하 3:20, 모리아산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지어짐)를 예시한다는 것을 비춰볼 때, 이삭을 바치는 인신제사는 하나님의 진정한 의도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 이삭은 죽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선언 명령이었다. 이삭은 그 허리 안에 이스라엘이 있었으므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 보면 인신제사는 필연적이었다. 동물의 피가 인간의 죄를 해결 못하므로 인간의 제사가, 인간이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번제에는 경건 또는 헌신, 죽어 마땅한 죄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인신제사에는 이삭이 죄인으로 반드시 죽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에 의해서 심판과 죽음이 제거된 후에야만 경건과 헌신이 의미있고 하나님의 정당한 요구였다. 따라서 이삭은 죄인이요 죽어 마땅했기 때문이다. 이 하나님의 요구가 다른 사람의 죽음에 의해서 만족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유일무이한 인신제사였다. 왜냐하면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이다. 인신제사를 금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이교에서의 악한 풍속(이기적인 제사)의 부당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것을 확대하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느 누구도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인신제사를 드려야 할 분이 오셔야 함을 의미한다.

소제(החנמ  중에 한줌을 태우는 것을 기념물’(2:2)이라 한다. 번제는 헌신, 화목제는 감사, 서원, 낙헌제는 교제, 속죄제, 속건제는 속죄, 소제는 처음 것을 바친다. 이런 것들이 제사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한 제물의 재료는 손으로 수고하여 얻은 것이라고 한다면, 26장의 고백처럼 이스라엘의 생명이 오직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고 찬양하는 의미이다.

이 제사(의식)의 내적 의미가 하나님 섬김과 감사의 삶에 있다고 할 때, 선지자들의 지적(삶과 의식의 괴리)과 롬 12장의 바울의 명령들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갈 5, 6장에서 성도의 삶을 열매라고 한다는 것을 본다면, 삶이 모두 주께로부터 나왔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제사의 제물은 삶의 일부이기도 하지만 또한 제물은 내 삶과 나 자신을 바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제사가 삶의 대표적 집결형태로써 나타난 것이 첫째 의미라고 한다면 두번째 속죄제와 속건제의 의미는 피로 인한 대속에 있다.

피는 생명의 희생인데, 제물이 희생됨으로써 내가 희생됨을 대신한다(제물과 나는 identification ). 제사드리는 자는 제물의 피를 통해 죄의 무서움을 실감해야했고 하나님을 반역한 댓가의 심각성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죽을 것을 제물이 대신 죽는 것이다. 그러나 제물이 죽는다고 해서 진정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을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은 죽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두 가지(드려짐과 속죄)가 동시에 만족되는 예가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이다. 그러므로 제사는 본래부터 완전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보다 나은 온전한 제사(예수 그리스도의 사역)를 바라보는 성질이 있었던 것이다. 드려짐과 속죄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동시에 충족한다.

offering 하나님과 나의 화목 ??

하나님으로부터의 내 죄의 속죄 ??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

피와 살은 결국 의식적 용어인데 성만찬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를 겨냥하고 제사의 온전함을 기념하는 중요한 성격이 있다.

화목제, 감사제, 서원재, 낙헌제 등 여러가지는 그 모델이 야곱이 벧엘에서 서원한 것이 그 모델이다. 다른 제사와 다른 화목제의 특징은 제사드리는 사람이 그 제육에 참여함이다. 제사자가 함께 참여하는 교통, 사귐을 통하여 대적관계의 해소, 화목이 이루어진다. 그 화목에 근거한 사귐이 그 요소마다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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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에 근거해서 구약 제사제도를 밝힐 수 있겠으나 구약의 제사제도를 통해 신약을 밝힐 때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죽음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삶, 하나님과 교제하며 예배하는 삶이다. 하나님이 임재하신 성막을 주시고 그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삶, 섬기는 삶의 형식이 제사이다. 자신의 경건과 수고로 되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의 죄 값이 먼저 치뤄졌음을 알아야 한다. 대속적인 죽음(죄사함이 있은 후에) 후에 헌신과 경건이 가능하다. 제사의 의미는 그리스도를 통한 삶(하나님의 은혜)과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을 드림이다. 성막에서 상징적 형태로 섬겼다. , 그리스도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을 예표하기 때문이다. 이는 예표적일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미래에 이루어질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1:3-4 제사가 열납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삶의 핵심을 차지하는 성막이 하나님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성막에서는 제물 즉, 가시적 물건, 행동으로 의식이 이루어지기는 하나 여기서 예배자는 하나님의 어떤 면을 가장 철저히 느끼고 의식하게 될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물론 하나님이 임재하시겠다고 했지만 그리고 법궤, 그룹 등으로 임재를 표현했지만)이므로 하나님의 철저한 영적 성격을 느낄 것이다. 영이신 분, 인간을 초월해 계시는 분임을 느낀다(하나님의 인도하심, 역사하심은 생활 속에서는 더욱 느낄 것이나). 그러면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4:24 신령과 진정이다. 이때 진정은 진리, 참된 것, 진실함이다. 이 신령과 진정은 여러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신령 - , 성령. 진정 - 진리, 참된 것, 진실함. 하나님을 확실히 의식되는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적 자세, 영적 자세가 절실히 요구된다. 하나님이 예배에서 가장 원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인 영적인 자세로 내면의 마음을 원하신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제사는 바로 상한 심령이다(51:17).

시편에서 예를 보면 다윗의 시, 아삽(레위인으로서 성전에 관련된 찬양대 사람들)의 시를 볼 수 있다. 사해사본 psalm scrawl에 보면 시편 중 가경이 한 편 삽입되어 발견되는데 여기에 나와 있는 내용을 살펴보면, 상번제를 드릴 때 찬양을 드렸고, 이 찬양을 위해 365곡을 지었다. 절기, 안식일을 위해 작곡했다 한다. 제사가 있을 때 찬양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요제와 같은 흔들어 드리고 들어서 드리고 하는 외적 상징도 있었지만 상당히 영적 내용을 갖춘 찬송도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향은 성도의 기도(게시록, 스가랴 보면 분향시 밖에서 백성은 기도한다)로 보인다. 그래서 제사는 외적 상징 의식과 함께 내적, 영적인 찬송, 기도가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속죄제를 드리는 경우는 행하지 말아야 할 것(금령)을 범한 경우인데, 누가 알려주거나 스스로 깨닫거나 간에 드려졌다.

속건제는 누가 맹세, 저주하는 말을 듣고도 증언을 거부할 경우, 부정한 것에 접촉한 경우, 말로써 함부로 서약하는 등 말로 범죄하는 경우, 여호와의 성물을 범하는 경우에 드려졌다. 그러나 속건제는 속죄제보다 가벼운 경우의 죄일때이고 그리고 20%를 더하라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와 하나님의 성물을 속되게 하는 경우로 보여지기도 한다. 어쨌든 두 경우(속죄제, 속건제) 다 죄를 깨닫고 죄를 속하는 제사이다. 그래서 죄가 용서 받고 사해지는 제사이다. 이것은 신약의 요한일서 1:9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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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장은 1-5장의 내용의 반복인 것 같으나 1-5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규례라면, 6-7장은 제사장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제사장이 지켜야 할 규례로서 제사장들에 관한 구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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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은 성막을 지키는 자들의 세움 - 아론과 그 아들의 임직식. 제사장을 세웠다고 하는데 제사장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은 중보자를 통해서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복된 삶을 매개하는 중보자이다.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중보자 역할이다(축복의 전달자). 20:24 12:5. 성막에서의 하나님을 섬김에 이스라엘 백성이 참예하는 부분은 제물을 끌고와서 안수하는 것, 화목제의 경우는 함께 먹음, 그 나머지는 모두 제사장이 제사를 행한다(제물을 죽임, 피뿌림). 그리고 아무나 지성소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제사장 조차도 1년에 한번씩 돌아가며 들어갔다.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없고 중보자를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보자는 양편을 다 대신한다. 중보자가 이스라엘을 대신한다는 증거는 흉패와 견대 위의 보석에 12지파의 이름을 새김에서 볼 수 있다. 이스라엘 편에서는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간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증거는 민수기 6장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축복을 제사장이 대리하여 선언한다.

구약의 제사장, 제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사장과 제물의 의미를 다 갖고 계신다. 제사장과 제물의 대리되는 섬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제사와 제물이 결합되어 그 의미를 나타내 준다.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과 동시에 이것이 대속의 효과를 가지고 동시에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셔서 섬기셨다.

7일간의 임직식 후 8일에 첫 제사를 드린다. 이때 하나님이 가시적으로 영광으로 나타나셔서 제사를 받으신다. , 하나님 앞에서 불이 나와 모든 제물을 불태운다. 이는 하나님의 임재와 이스라엘의 제사를 열납하심의 가시적 확인이다. 이 첫 제사 때 불이 나와 살랐기 때문에 그 불을 항상 꺼뜨리지 말고 보존하라는 것은 번제단의 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초자연적인 불이라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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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2ff 아론이 백성을 향하여 손을 들어 축복하였고 번제, 속죄제, 화목제를 드린 후 내려왔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 모세와 아론이 회막 밖으로 나와 백성을 축복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의 표시가 가시적으로 나타났다. 특히 그의 앞에서 불이 나와 번제 위에 놓은 것(기름) 등을 태움은 하나님께서 그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표시이다(번제의 제사는 내장의 기름, 콩팥, 신장 등을 태운다). 그리고 번제 위에 화목제 등의 제사의 제물을 태웠다. 제단 불을 꺼뜨리지 않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초자연적인 불에 의해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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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장은 성막에서의 섬김의 전형을 가르친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분향)을 드리다가 하나님께로부터 불이 나와 그들을 태운다. 여기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불이 아닌 다른 불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며, 더우기 제사장이 명령을 어겼기 때문에 즉각 하나님이 처리하시며 3절 이하를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 말은 제사장의 중보자적인 역할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다.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사건으로 הוהי의 명하시지 않는 불을 분향하자 즉사해버린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상징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성막의 삶은 일상생활의 삶의 응집된 형태인데 이 삶의 모형 사건에서 일상생활을 어떻게 해야할 것인지를 깨닫는다. 임직한 제사장이 첫번째 행한 사건이 즉사사건인데 그런 무서운 징계의 의미가 10:3절에 나온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는 더욱 엄격한 성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제사장은 모든 백성의 model로서 정결의 모형이다.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모시는 특권을 가진 자로서 가질 태도는 가장 엄격한 성결이다. 그 성결을 통해 모든 백성 앞에서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신다. 그러므로 일반 백성에게는 괜찮은 일이 제사장에게는 안되는 것으로 요구되는 것이 많다. 제사장의 불경건을 심판하심으로써 모든 백성의 성결을 깨닫게 경계하신다. 이스라엘은 제사장 왕국으로서, 이스라엘 전체의 성결이 요구되는 것이다.

דבכא םעה־לכ ינפ־לעו שׁדקא יברקב(비크로바이 에콰데쉬 웨알-페네 콜-하암 에카베드)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 = 공경, 중히 여김, 거룩히 여김. 이는 하나님을 거룩한 분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으로 인정받음을 나타낸다.

왜 나답과 아비후를 혹독히 심판하셨는가? 이는 10:3 거룩히 여김을 받거나 거룩함을 나타내시기 위해서이다. 이 거룩을 나타내심의 목적은 모든 백성에게서 공경을 받거나 영광을 얻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제사장의 위치는 모든 백성의 본이 됨이다. 하나님은 그를 가까이 하는 자에게 더욱 성결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는 그 제사장에게 엄중히 문책하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집(백성), 교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심을 통해, 그의 삶의 열매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신다. , 신자의 성결을 통해 하나님 자신의 성결을 나타내 보이신다.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제사장에게 더욱 성결을 요구하심으로 인해 일반 백성에게는 허용되는 일이 제사장에게는 허용이 안되는 것이 많다. 부모, 친척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제사드릴 때 포도주를 마시지 말고, 처녀와 결혼하고, 제사장 자녀 중 창기 노릇을 하는 자는 불태워 죽이라고 하시면서 더욱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신다. 이러한 요구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까? 바울의 교훈은 성도들의 본이라고 한다. 벧전 2장은 이 원리를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확대하신다. 5장 역시 너희의 선행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하신다.

10:4은 사도행전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제사장은 섬기기 위해 성막에 올 때는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어떠한 진지함으로 섬겨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신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보이지 않으나 영으로 임재해 계시므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 너무도 분명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예배는 너무도 인간중심적이다. 인간들에게 흥미 혹은 재미있는 것을 제공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한다.

10:8-16절에 이와같은 사건을 통해 모세가 제사장의 성결을 가르친다. 여호와의 회막에 들어갈 때 포도주, 독주를 마시지 말라. ,속을 구별하고, 정하고 부정한 것을 구별하라. 그리고 이 구별을 일반 백성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16절에 보면 속죄의 제육을 먹게되어 있는데 아론이 태워버렸기 때문에 모세가 노하자. 아론이 속죄제육을 먹었더면 הוהי께서 어찌 선히 여기셨으리요하자 모세가 선히 여겼다고 한다. 이상한 것은 나답, 아비후도 법규위반이고, 아론도 법규위반인데 나답, 아비후는 즉사하고 아론은 그 마음 동기로 인해 용서 받았다(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제육먹기를 삼가한 것). 그러므로 법규위반 자체가 그렇게 문제되는 것이 아니고 그 마음 속에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가가 문제가 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cult는 하나의 기계적 효과나 단순한 의식 효과가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믿음과 내적 태도가 동반되어야 함을 가르치신다.

나답, 아비후 즉사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무리 미미한 의식이라도 하나님이 명하신 것이라면 죽음으로도 바꿀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아론의 사건에서는 하나님께서 cult만이 기계적 효과가 아니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내적 태도를 중요시함을 가르친다.

의 보충사건은 홉니와 비느하스의 제육 뺏은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죽이시기로 뜻하실만큼 의식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의 보충사건은 이스라엘이 법궤를 메고 나가기만 하면 이길 것이라고 마법적 신앙 가진 것을 하나님께서 깨뜨리시고 패배하도록 하신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또한 법궤가 블레셋에게 갔을 때는 그 법궤 자체의 거룩성이 또한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사건을 한꺼번에 다루심으로 하나님의 명령의 중하심과 명령의 기계적 적용보다는 유기적 순종의 중요함을 동시에 가르치셨다. 하나님을 모셔 사는 자에게는 구별됨이 요구된다. 철저히 구별하여 거룩하고, 정결한 것만 취하고, 부정하고 속된 것을 제거해 버려야 함을 가르치기 위해 이 사건이 기록되었다. 더 중요한 것은 10:11로서 이 성,속의 구별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나를 가까이 하는 자는 거룩해야 한다는 사실이 제사장 뿐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도 요구됨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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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이하 온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성,속 구별의 규례에 대해서 설명한다. 44절 이하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니라고 하신다. 11장의 성,속 구별이 어떤 영역에서부터 시작되는가? 먹는 음식에서부터 시작된다. , 먹는 음식에서부터 철저히 성,속을 구별하여 지키라고 하신다. 속된 것에서 자기를 지켜 성결하게 되는 삶이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10ץקשׁ(샤콰츠; 가증한 것)는 혐오감을 주는 것, 잔인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구역질난다는 뜻을 가진다. 비록 외부적인 것이라도 우리에게 혐오감을 주는 것은 철저히 피하고 하신다.

이 먹는 것에서부터 성,속을 구별하여 지키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적용될까? 먹기를 탐하는 자 처럼 하지 말라. 바울은 누추한 말, 희롱의 말을 피하라고 한다. 이는 말까지도 조심하라는 뜻이다. 혐오감을 주는 것은 먹는 음식에서 유출병(피나 썩은 고름, 썩은 피 등이 흘러 나오는 것)의 모든 것, 아이가 태어나는 고귀한 생명의 탄생에 있어서도 혐오감을 주는 것은 정결케 하기를 말씀하신다. 그러나 과연 혐오감 주는 것 때문에만 금하심인가? 바리새인이 제자들을 비난시 예수님께서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했다.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의 두 가지 원리를 배울 수 있다. 사람의 존재 방식은 마음에서부터 즉, 사람의 성결은 마음에서부터이다. 구약의 규례도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내부적이다. 겉만 깨끗케 함이 아니요, 영혼을 깨끗하려 하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정한 것은 초식동물(반추동물)이다. 반대로 부정한 것은 맹수(피와 살을 찢고 먹는 것), 포학성, 비늘 없는 것(뱀 처럼 생긴), 새는 육식류인 맹조류이다. 부정한 것들 중 특히 그 시체가 우리를 더럽게 한다. 이는 더러움의 진정한 근원이 죽음에 관련해 있다는 것을 말한다. 특히 죽음이 더러움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또한 죽음은 죄와 관련되어 있다. 죽음은 육체의 죽음 뿐 아니라 죄의 모든 악한 결과를 말한다. ‘먹으면 죽으리라에서 이때의 죽음의 의미는 매우 포괄적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모든 죄악의 악한 결과이다. 육체적 죽음은 여러 의미의 죽음의 극단적이고 가시적인 표현이다. 바로 죽음의 대표격이다.

채식은 창조 때부터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채식에는 부정, 정결의 구분이 없고 육식(노아 이후)과 관련해서 정결과 부정, 먹을 것, 먹지 못할 것을 말씀하신다. 노아 이후 왜 육식이 허락되었을까? 외부적, 육신적 차원에서 보면, 육식은 매우 고된 노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 과중한 육체 노동을 하는 자들이 필요로 한다. 타락 후 인간의 사회 환경이 열악해진다. 그러므로 인간의 이마에 땀이 흘러야 즉, 중노동을 해야 먹고 살게 된다. 노아를 낳을 때 중노동에서 안식을 주신다는 의미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 노아 홍수 이전에 지금보다 따이 훨씬 척박했다. 삶의 환경이 훨씬 열악했으므로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육식을 허락하심은 오히려 은혜라 할 수 있다. 성경을 보면 홍수 이전보다 홍수 이후가 훨씬 더 환경이 좋아졌을 것이다. 이 육식 허락이 있기 전 노아가 정결한 짐승 잡아 번제를 드린다. 따라서 육식 허락이 단순히 식량 문제 뿐 아니라 번제와 관련이 된다. 짐승은 사람의 죄를 해결하는 외적 상징이 되어왔다. 육식 허락은 하나님의 은혜의 허락이었으나 단순히 물질적 양식뿐 아니라 영적 차원의 제사제도의 의미도 가졌다고 본다.

성막 중심적 이스라엘의 모습은 광야의 출애굽 때나, 가나안 정착 이후나 여전히 마찬가지이다. 포로시대에도 역시 성막중심이었고, 에스겔에 보인 제 2성전의 이상은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며 그를 섬기는 삶이 이스라엘의 본래적 삶인데 상징적 모습이 레위기에 드러났다. 성막을 통한 제사에서 감사와 서원 등이 있고(cult), 금지 동물과 허락 동물이 주어졌고(음식규례), 윤리적 영역으로 확대되었다(성적규례).

성막의 삶= Cult 음식 윤리 삶 전체 영역에로 확대

cultic service whole life service

그 섬김의 삶의 질(Quality)은 한 마디로 שׁודק’(콰도쉬; 거룩)이다. 11:44-45절은 הוהי가 거룩하니 너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신다. 그 명령의 근거는 출애굽으로 인한 구원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명령은 결국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을 말씀하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한 백성(1:26-27), 그런데 거룩의 근거를 창조에서 찾지 않고 구속으로부터 찾는 것은 구속의 의미가 창조의 완성이요 회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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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שׁודק의 개념

...으로부터의 분리적 의미 ?? 레위기 전체에 나타난 하나님의 통치 아래의 삶의

...에로의 합일된 의미 ?? 질이 거룩함이다.

שׁודק의 개념을 세목해보면 pure(정결)와 관련된다. רוהט(정결)   המט(부정), 나답과 아비후의 죽음 이후 하나님께서 성,속을 구별토록 하셨다. 거룩한 것과 거룩을 더럽히는 것을 구별하셨다. ,속의 구별은 음식에서부터 시작한다.

먹을 수 있는 것 - 새김질하고 굽이 갈라진 것. 이 특징은 초식동물이라는 것이다.조류도 맹금류는 금지되고 순한 것만, 물고기도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만 해당된다. 부정한 것을 관련짓는 단어는 ץקשׁ(샤콰츠)로서 이것은 혐오스럽고 가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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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5 ,속 구별의 목적과 이유를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므로 그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속된 것에서 끊어 성결하라.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성결해야 되는가? 신약에서 희롱의 말이나 부정한 말도 하지 말라고 한다. 사회적으로도 신사적이지 못하고 비열한 것은 하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천박한 말이나 행위는 특히 목회자에게 합당치 않다고 했다.

12:1을 보면 매우 의아스러운 내용을 다룬다. 출생과 관계된 내용이 나온다. 출생은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것인데도 출생과 관련해서 정결케 할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은 의아스럽기도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것을 요하는 문제이다. 새생명, 새존재의 탄생, 가장 순수하고 때묻지 않은 새생명의 탄생도 더러움에 오염이 있으므로 정결케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외적인 위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 모든 외적인 규례는 내적 성결에 대한 상징이다. 인간의 모든 생활 영역이 타락해서 부정하다. 죄의 결과 타락의 부정이 삶의 구석 구석에 스며 있다. 출산하면 산모가 부정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신약에서 보면 해산하므로 구원을 얻는다고 한다. 그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해산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 최초의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그 타락이 미친 결과 중 가장 직접적인 것이 죽음과 해산의 고통이다. 해산은 죽음을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새생명을 잉태하는 모체가 죽음의 위협을 느낀다. , 죄의 저주로 인한 해산의 고통을 상기한다. 특히 다량의 출혈로 인해 죽음의 위협이 가중된다. 특히 출산 후 7일간 부정하다. 이는 생리 기간과 같이 부정하게 여긴다. 이는 창세기의 죄로 말미암은 저주이며 심판과 관련이 있다.

사내아이는 7일간 부정하고 33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다.

여자아이는 14일간 부정하고 66일의 정결기간이 필요하다.

이러한 구별은 최초 범죄의 경중을 구별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사내아이는 8일에 할례를 행한다. 이때는 옛 존재의 죽음과 옛 존재를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새 생명이라도 죄를 끊어버려야 새 존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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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장은 악성 피부병, 문둥병 = 썩은 고름이 터져 나옴, 부스럼. 음식(육적 생존), 출산(새로운 탄생으로 하나님 형상을 가진 존재로 태어남), 생리나 병은 인간의 생존과 삶에 들어온 것으로 순수한 부정적 요인으로서 죽음과 좌와 관련된 것이다. 특히 피부병은 가장 외적인 병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이런 환자는 진 밖으로 내보내고 나으면 들여보내라. 이는 잠정적인 출교(excommunication; 교제의 단절)이다. 특히 피부병은 전염성이 강하다(사람의 옷, 담벼락에까지 전염). , 다른 사람에게 더러움을 옮기는 전염성이 강한 것이다. 악성 피부병 환자를 진 밖에 내어보냄은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는 것이다. 나으면 다시 들여 보내라는 말은 오염의 근원이 제거되면 다시 들여보내는 것이다. 이때 오염을 문제삼는 것은 공동체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것을 오늘날 적용하면 고린도교회의 성범죄에 대하여 볼 수 있는데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짐을 비유한다. 외부적으로만이 아니라 영적으로 너희를 더럽게 만드는 오염의 근원을 제거하여 온 공동체 전체가 부패하는 것을 막으라는 것이다. , 공동체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의 경우는 돌로 쳐 죽이는 등 죽임으로 완전히 그 근원을 제거해야 한다.

예를 들어 오염을 제거하는 방식은 마 18:15-17로 온유한 심령으로, excommunication은 육체를 사단에게 내어주고, 그 영혼은 구원받게 하기 위함이다. 철저히 회개하여 돌이키게 하기 위해 출교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출교는 돌이켜 다시 돌아오게 하는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가진다. 여기서 우리는 교회의 원리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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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은 유출병, 해산, 주검. 성생활에서의 유출도 정결케 하라. 외부적 혐오감의 근원까지도 제거하거나 정결케 하는 그 동기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분의 임재의 처소인 성막이 너희 가운데 있으므로,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백성은 모든 일에 정결하고 거룩해야 한다. 고전 6:19-20 ‘너희 몸이 하나님의 전인 것을 알지 못하느냐

이제까지 말한 먹고, 자고, 아이를 낳고 하는 일은 우리 생활의 가장 일상적인 일이다. 이런 일상적인 사소한 일까지도 부정한 것, 속된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하여 정결케 하라는 것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 지밀의 처소 성막에만 국한되지 않고 가장 일상적인 일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부부생활까지, 사적인 일인 것 같으나 이것까지 성경은 모두 거룩함을 나타내도록 하라고 말씀하신다. 신약에서도 너희 침상을 더럽히지 말고, 너희 아내를 거룩함으로 취하라고 하신다.

하나님과 영적인 만남 영적인 은혜의 삶 섬김의 삶이 상징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섬김의 삶은 성막에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삶에까지 이루어져야 함을 나타내도록 하기 위해 이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지시하신 것이다.

이런 것들이 부정한 것과 정결한 것을 갈라내는 principle을 낼 수 있다면, 타락 이후의 인간과 세상 질서의 포악성을 의미한다. 타락의 결과인 죽음은 타락 이후의 모든 왜곡된 상태의 카테고리를 포함하고 있는데 타락은 몸과 마음의 더러움을 가져왔다. 죽음의 외부적 전형은 육체의 사망이다. 사망을 향한 모든 것들이 질병과 악성병환들이다. 이런 것들을 부정하다고 하는 뜻은 이런 것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죄의 결과를 지적하는 것이다.

성막의 삶이 cult에서부터 윤리적, 전체 삶의 성결로 확대된다는 것은, 타락 이후 전체 삶이 부패되어 버린 질서를 회복해가는 가치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막적 삶이 cult로 응결되어 있고 그 제사 형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사를 상징하고 있음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는 모든 만물의 회복을 의미하고 내적정결을 갱신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음식 자체의 규례point를 두지 않고 그 규례가 영적인 의미에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7장의 피뿌리는 의식과 물로 정결케 하는 의식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 의미가 없고, 앞으로 오는 온전한 제사의 그림자인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 있어서 cult는 온전하지는 않다 할지라도 그때의 의미는 너무나 중요한 회복의 의미이다. 당시에는 윤리적 가치가 부여할 수 없는 의식적 요소까지에서도 거룩과 속됨을 구분하는 것에서 온전함을 향한 명령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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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성결의 회복(속건제, 속죄제로 인한 속죄)

15장 파괴된 삶의 질서의 회복으로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삶 - 원래 창조질서에로의 회복이다. 회복의 수단의 첫째는 물이다. 물로써의 정결은 내적정결을 의미한다. 히브리서는 물 자체로 정결되는 것이 아니고 온전한 정결의 그림자이지만 적어도 내적, 온전한 정결을 가리키는 점에서 의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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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사와 하나님의 임재와의 관계

생명의 희생을 통한 사죄를 근거로 해서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과의 만남이므로 그럴 수 밖에 없다. 하나님과 인간관의 만남이므로 항상 예배의 형식을 취한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 하심 즉, 우리를 귀히 여겨주셨다. 그리고 히브리서에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갈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불렀을지라도 이 만남은 예배일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꿇어 엎드려서 그의 발을 붙잡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로서 자세를 가져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은 감사, 찬양, 기도로 이루어지고 하나님 편에서는 참 경건(예배)한 자를 축복하시는 평강, 안식,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신다.

16장은 대속죄일(710, 16:29-34). 대속죄일의 맨 초두에 아론의 두 아들이 죽은 사건이 나온다. 이 사건을 상기시키는 이유는 10장에서 여기까지가 다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 일상적인 생활에서부터 철저히 성,속을 구별하여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심이다. 이런 성,속의 구별과 관련하여 대속죄일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대속죄일은 모든 삶의 영역, 모든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종류의 더러움 즉, 의식적이든 물질적 더러움이든 이 더러움을 일괄적으로 정결케 하는 것이다. 일년에 1차씩 지성소에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을 드리다가 즉사한 것을 상기시킴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조심없이 방자히 나아간 것을 상기시키면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나아가서 죽임을 당치 말아라고 하심이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지 말아라. 왜냐하면 속죄소로 인해 하나님이 구름 가운데 저희를 찾아오셔서 너희를 만나실 것이므로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속죄소에 나아가지 말라.

대속죄일은 11차로 710일인데 제사장이 자신 위해 속죄제로 황소나 수양을 취해 번제로 드린 후에, 그리고 회중 위해 수염소 둘을 위하여 한 마리를 번제로 드린다. 회중의 두 수염소를 제비 뽑아 한 마리는 여호와를 위해 속죄제로 드리고,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해 방목한다.

לזאזע = לזא זע(에즈(염소) 아잘(가는) = 아자젤) , 광야로 보내버리는 염소

αποπομαιος = αποπεμπω 보내버리다의 명사형

הוהיל דחא(에하드 라아도나이) - 여호와께서 인격적 존재라고 한다면 이 표현에서

לזאזאל דחא(에하드 라아자젤) 아사셀도 인격적 존재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광야는 죽음, 황량한 곳, 폐허의 상징이다. 신구약을 막론하고 광야는 악한 귀신들이 거하는 곳으로 본다. 이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이다. 그래서 악령들의 거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3:20-21 들짐승 = 악령의 뜻, 34:14 들짐승 = 악령, 12:43; 1:24; 18:2 등에서 광야는 파괴, 황폐를 상징한다. 귀신이 갖는 특성이 파괴요 황폐이다. 사단을 잘 나타내는 사건은 귀신들린 자가 자신을 상하게 한다. 돼지들이 물 속에 빠져 죽는다. 이는 귀신의 파괴적인 형태를 보여준다.

그러면 아사셀 염소를 광야로 보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사단의 요소인 죄, 죽음 등을 제곳으로 보내버린다는 뜻인가? 이렇게 보기는 힘들다. 이유는 16:5에 두 마리 염소는 다 속죄제이다. 이 염소들은 백성의 죄를 다 짊어진다. 특히 아론이 이스라엘 백성의 온 죄를 안수하여 다 고백한 후 광야로 보낸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다 짊어진 자는 그의 영역, 죽음의 영역으로, 사단의 영역으로 가서 죄값을 온전히 다 치룬다. 아론이 자기 가족의 죄를, 온 이스라엘의 죄를 속죄한 다른 한 양은 죽임을 당한 후 진 밖으로 끌고 나가 불살라 버린다. 아사셀의 염소를 광야로 내쫓는 것과 같다.

*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에는 주후 400년에 사도신경에 그리스도께서 장사되어 지옥에까지 내려가셨다는 문구를 삽입하였다. 이 그리스도의 지옥강하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에 의해 반대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죽음의 영역(사단, 음부의 영역)에 까지 내려가시므로 죄값을 다 치루셨다고 보면, 아사셀로 보냄의 해석이 맞다. 그러나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씀 때문에 그렇게 보기 어렵다.

* 예수님께서 온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성문 밖에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은 죽음의 영역까지 내려가시므로 죄값을 치루셨다면 구약의 아사셀과 비슷하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영육간에 철저히 죽음을 당하셨다고 한다면, 이것 자체로도 아사셀의 염소와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죽음은 사망, 음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사셀에게 양을 보냄이 죄에 대한 책임을 사단에게 지는 것이 아니다. 사단은 죄에 해 고소하는 자이지 죄에 대한 책임을 해결해야 할 것은 없다. 하나님에게만 죄에 대한 책임을 진다.

16절 너희 가운데 있는 부정과 죄로 인하여 지성소와 회막을 위해 속죄제 드리라. 이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므로 신자 자체가 성전, 성소로 비유된다. 백성의 모든 윤리적인 면과 의식적인 면까지 깨끗게 하라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금지된 성관계 또는 이웃 사랑을 포함한 윤리, 종교적 규례가 나오는데 그 한 가운데 대속죄원리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성,속의 구별이 일상생활의 먹는 것(사소한 것)에서부터 삶 전체로 확대되어 윤리적 영역으로 넘어가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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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장은 진 안에서나 진 밖에서 제물로 사용 가능한 짐승을 죽이는 경우를 다룬다. 이때는 먼저 하나님께 드린 다음 죽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피흘린 자로 간주하여 백성 중에서 끊쳐지게 된다. 이 말로 판단하건데 육식은 먼저 화목제를 거쳐서 그 제육을 먹는 것으로 되어있다.

7절 회막문에서만 드리지 들에서 제사하지 말라. 들에서 드리는 것은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수염소는 마귀라는 뜻을 가진다. 회막에 끌고와서 먼저 제사한 후에 그 제육을 먹으라는 의미는 종교적, 신앙적 잘못 왜곡을 금하고 막기 위한 것이다. 들에서 드리는 것을 마귀에게 드리는 것이라는 의미는 그 전에 이스라엘이 이교적 풍습에 오염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그래서 결국 그 제사가 마귀에게 드린 제사가 된 것이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우상 제사의식에 참여하게 되면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본다. 너희가 어떻게 주의 성찬과 귀신의 상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 우상에게 제사하는 것은 결국 귀신에게 절하는, 귀신에게 드리는 것과 같은 영적 효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외적인 상징과 의식과 관련해서 어떤 영적 자세로 드리냐에 따라 영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에게 절하는 것이 바로 귀신과 짝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신 의미이다.

이교 우상 제사의식에서 중요한 것 두 가지는 제물은 식물에 불과하다. 상징물에 불과하나 그것은 영적 자세를 나타내므로 어떤 영적 자세를 가지는가는 매우 중요한 것이다. Hidden Azenda의 말을 빌자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면 굳이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교의 잘못된 신앙 풍습이 들어올까봐서 하나님께서 막으심이다. 이처럼 회막에서만 제사를 드리라고 제한하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자적인 신앙 풍습과 사상이 생겨날 것이므로 결국 남북왕국이 분열되며, 우상을 세우고 평민을 제사장으로 세움을 북왕국에서 볼 수 있다. 신앙의 동질성이 깨어지고, 신앙의 동일성을 근거로 한 신앙공동체인 이스라엘의 분열이 오래도록 지속되게 된다. 신앙의 통일성과 동질성을 근거로 하는 하나님 백성의 하나됨과 이방 종교의 제사의식에 오염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즉, 신앙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회막의 제사의식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궁극적으로 성막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이므로 유일한 성전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 제단에서 의식을 거친 그 제육을 먹게 한 것은 또 다른 이유가 있다. , 그것은 피채 먹지 말라하심이다. 피채 먹는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고, 피는 육적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피흘림은 생명의 희생이요 이 생명의 희생은 더 깊은 차원에서 오직 다른 생명을 속하는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이 원리를 따라 성전, 성막에서 짐승이 피를 흘려야 했고, 마지막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셨다. 그러면서도 구약에서는 인신제사를 엄격히 금하셨는데 이는 인간의 생명을 진정 속할 수 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고, 오직 하나님 뿐임을 보이시기 위함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만 하는 필연성을 보여준다.

피흘림, 특히 죽임은 오직 다른 생명을 속하는 것만 가능하다. 그래서 피흘림 즉, 모든 제사의 핵심인 이 피흘림의 의미에 대해 말씀하시고 강조하신 것이다. 이 피흘림은 원칙적으로는 부자연스러운 것임을 말씀하시면서 오직 한 곳에서만 피흘림이 긍정적인데 그곳은 바로 십자가이다. 그러나 십자가도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어서는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데 그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심판이요, 끔찍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 죄의 끔찍함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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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은 가나안 땅과 애굽의 풍습을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의 여호와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2절의 내용이 4절까지 반복되는 것이다. 4절을 보면 내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니라여호와께서 너희 섬김을 받고 너희는 여호와의 통치하심을 받는 나의 백성, 나의 민족이다. 이 의미를 곧 애굽의 풍습과 가나안 풍습과 규례를 좇지 말라고 표현했다. , 내 백성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이다. 애굽 = 너희가 탈출해야 할 죄악의 세상, 가나안 = 너희가 정복해야 할 죄악의 세력. 가장 죄악의 세력이 강한 그 세상에 들어가 너희가 세상과 하나님 백성간의 근본적 차이는 삶의 규범이 다르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곧 삶의 통치자가 다르다는 의미요, 여호와의 율법으로 살라는 말씀이다.

5절은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그리하면 살리고 하신다. 바로 계명 준수가 생명이다. 게명은 인간이 지켜야 할 당연한 것이다. 거룩함의 요구는 당연한 요구이다. 이 요구는 한 번도 폐해진 적이 없다. 이 하나님의 요구가 신자에게서는 그리스도에게서만 만족되고, 성령의 통치를 받는 신자의 삶에서만 가능하다. 레위기 전체는 출애굽, 홍해를 경험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은혜 안에 들어온 이스라엘에게만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요구되어졌다. 1-17장까지는 의식적 삶에서의 성결이 요구되었으나, 17장 이후에서는 이방 종교의 악영향을 이야기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성결을 요구하신다.

6절은 성범죄가 나열된다. 성에 있어서의 성결을 말씀하신다. 성범죄는 외면적인 죄이다. 다른 죄는 몸 밖에서 짓는 죄이나 성범죄는 몸에 짓는 죄이다. 성범죄는 상대방을 즉,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가장 외적이며, 친밀한 관계이다. 가장 밀접한 육체적 관계이면서 육체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하나가 되는 관계이다. 성관계의 이런 성격 때문에 세 가지를 금하신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지 말라. 혈연관계 내에서의 성관게를 금하신다. 성관계를 가짐은 남편과 아내가 되어 버림으로 혈연관계가 완전히 무너지게 된다. 성관계에 의해서 인간 사회의 질서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의 자신의 위치와 역할이 다 파괴될 수 있다). 따라서 근친상간의 성관계를 금하신다. 성경의 많은 부분이 성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참되고 바르게 가르치면 성은 더럽고 악한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를 가장 친밀하게 만드는 아름답고 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되지 않을 때 가장 악하게 된다. 생리시 성관계를 금지하심, 이웃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

21절은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자녀를 우상숭배에 사용치 말라고 하신다. 자녀는 성생활의 열매이다. 따라서 성을 종교에 오용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간음을 종교의 이름으로 미화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종교 제사 중 간음을 이방종교는 행했다. , 종교의 이름으로 간음을 행하고 이것을 미화한 것이 이방종교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반대가 21절의 말씀인 것이다.

이어 22절은 Homo Sex를 금하시고, 남녀가 부부될 것을 명하신다. 여기 Homo Sex는 창세기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23절은 동물과의 교합을 금하신다. 성관계가 하나됨이라면 자신을 짐승의 수준으로 낮추는 것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는 것이요, 나아가 인간됨을 포기하는 것이다. 인간과 짐승을 구별하여 지으신 하나님의 의도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레위기의 모든 자세한 내용은 다 일맥상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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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은 거룩과 윤리적 삶을 관련시킨다.

cult(응결된 service) 먹고 사는 일상생활 성생활 모든 삶의 영역

이 삶의 질서가 파괴될 경우 회복되는 통로를 마련하신다. 성결의 파괴가 회복되는 수단이 성막에서 이루어진다. 물로 씻는 것과 제사 - 전 이스라엘이 함께 대속하는 날(710), 1년에 1차씩 대제사장이 전 이스라엘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정결함을 받는 날(대속죄일)이다. 거룩과 생명은 너무나 밀접한 관계이다. 거룩은 하나님과 만나 정결해지는 것인데 하나님과의 연결만이 생명의 본질이라고 한다면 거룩은 바로 생명의 통로인 것이다.

2절에 하나님이 거룩하시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내용을 재천명하신다. 19장은 일관된 제목하에 분류될 수 없는 잡다한 법을 모아 놓은 것이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나, 오히려 다양한 삶의 영역에 관련된 다양한 법들을 단편적으로 모아 놓은 것에는 뜻이 있다. , 다양한 삶의 영역에 관련된 다양한 법을 말함은 포괄적 삶의 원칙, 성결의 원칙의 대강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그 영역에서의 전체적인 삶의 원리로서 하나의 대표적인 뜻을 갖는다. 부모공경 - 인륜의 질서토대와 권위의 상징이다. 안식일 - 의식 영역에서의 하나님 섬김의 기본 틀이다. 우상 숭배나 화목제물도 같은 내용의 하나님 섬김의 내용들이다.

9절은 가난한 자와 객을 위해 추수한 것들을 남겨두라고 하신다. 객과 가난한 자는 어떤 집단 내에 삶의 터전, 삶의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로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계층)의 대표적 사람들이다. 추수라는 것은 내 노력과 수고의 결과를 내가 차지할 것이므로 마땅한 권리이나 내 수고를 다른 이를 위해 남겨두라는 것은 긍휼의 법칙이다. 내 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라는 공평의 원칙을 지나 내 자신을 희생하여 내 것으로 남을 돕는 사랑과 긍휼의 원칙을 말씀하신다.

11절은 이웃의 삶의 권리를 침해하지 말라. 13절은 이웃을 압제하거나 착취하지 말라. 경우에 어긋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려 말라. 14절은 장애자를 골탕먹이지 말라. 남의 약점을 이용하거나 욕보이지 말라.

15절은 재판의 경우 = 옳고 그름의 결정, 판단에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시비판단의 중요한 것은 큰 자 즉, 사회에서의 특권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라고 얼굴을 봐주지 말라. 또 하나는 가난하다고 해서 얼굴을 봐주지 말라. 의롭고 마음 약한 사람들 중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으나 시비판단에 있어서는 아주 공정해야 한다. 너무 약자를 의식하다가 약자 편에서 시비를 그릇판단하고 옳은 것을 굽게 할 수 있는데 시비판단에 있어서는 약자인지 강자인지를 생각지 말라.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라 하여 시비를 굽게해 달라는 외부 사람의 요구가 있을 수 있으나 시비는 정확히 판단해야 한다.

17절 네 이웃을 마음으로(= 진정으로) 미워하지 말라. 이웃을 책망하여 바로 잡으라. 그래서 이웃에게 죄를 짓지 말라고 하신다. 이 세 구절은 상충되지 않고 하나의 조화된 뜻을 갖는다. 이 세 마디는 서로 서로를 규정해 준다. 억울한 일 당할 때라도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라. 그러나 억울한 일 당할 때, 이웃으로부터 다하는 불의를 참고 그냥 지나치지 말고 여기서 더 나아가는 적극적 사랑을 요구한다. 미워하지 말고 책망하여 바로 잡으라는 것이다. 책망은 마음에서 나와야 한다(= 마음으로 미워말라).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무관심으로 또는 귀찮거나, 너 한 번 당해봐라는 마음으로 내버려두지 말고, 책망해야 한다. 그러나 그 책망은 사랑으로 하라. 이렇게까지 사랑하지 않으면, 적극적 사랑이 아니면 죄를 짓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신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외식주의(형식주의)이다. 하나님 계명의 피상적 오해와 이와 관련된 자기 의() 때문이었다. 신약과 구약의 하나님 사랑은 같다. 오히려 구약이 더욱 더 생생히 표현하지 않았다. 호세아와 고멜, 이사야에서 보면 부모의 사랑을 지닌 사랑이다.

19절은 가축과 종자를 혼합교배하지 말라. , 잡종을 만들지 말라. 이는 순수함을 보존하라는 뜻도 있으나 더 나아가 하나님이 창조한 질서를 혼란, 혼잡시켜 버리지 말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유전공학은 얼마나 하나님의 창조에 대항하는 것인가?

26절은 점술, 사술을 하지 말라. 인간의 진행, 운명, 생사화복을 귀신에게 묻는 것은 인간의 생사화복을 귀신이 주관한다는 것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호기심 처럼 보이나 이것을 캐보면 무서운 죄악이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생사화복의 비밀을 알기는 하나 주관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사화복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에 달려 있다. 통계학 원리 자체가 비성경적이요, 사이비 과학이다.

19장에 나타나는 다양한 삶의 영역이 언급되고 그와 관련된 규범된 제시가 있다. 이와같은 원칙 제사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을 붙이신다. 이 모든 윤리 원칙이 성결에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성결이 포괄하는 영역은 삶의 전 영역이다. 종래에는 거룩이라는 개념은 교회와 관련된 활동, 교회 내의 활동만을 국한하여 말하였었다. 교회 내에서 교회와 관련된 일들에도 속된 일이 많다. 이렇게 보면 모든 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져야 할 삶의 quality가 거룩이다. 긍휼, 동정, 사랑 뿐만 아니라, 피부병, 먹는 음식, 성생활 등까지 다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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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장은 자녀제사 드리는 일 금지, 성적 범죄 금지이다. 21절을 보면 가나안 사람들이 축출되는 이유가 역겨운 일을 행했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거든 하나님이 너희 민족을 다른 민족들과 철저히 분리, 구별해 내신 하나님인 것을 기억하라. 너희 자신을 혐오스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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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장은 제사장의 특별한 성결을 다룬다. 백성과 구별되어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는 자들이 제사장인데 여기에는 10:3의 원리가 적용된다.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자들의 성결의식은 더 엄격하다. 일반 백성에게는 허용되는 일이 제사장들에게는 허용이 되지 않는다. 4-5절은 이교 풍습을 좇지 말라고 하신다. 13절은 제사장의 결혼을 말하는데 처녀와만 결혼하라고 하신다.

16절은 제사장이 될 사람은 흠없는 자만이 되는데 이는 하나님께 온전히 offering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제사장은 이스라엘 백성(제사장 나라)의 모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이다. 이런 부분은 백성에게 적용안되는 부분이다. , 제사장에 관한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적용되어야 할 부분인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모델로서 제사장은 오늘날 성직자에게 관련되는 부분에서 보면, 너희는 모든 면에 본이 되라 하심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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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장은 성물의 구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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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은 여호와의 절기들 = 성회 - 온 이스라엘이 집단적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림(3대 절기) 유월절(무교절), 초막절. 여기서 절기라 할 때 이와 관련하여 생각해야 될 것은 이것은 항상 공동체적 차원에서 집단적으로 이루어진다. , 오늘날 공예배와 같은 의미이다. 절기의 가장 큰 특징은 정한 날, 정한 곳에서 모임(시간, 장소가 구별되어 있다)이다.

요즈음 성수주일의 문제를 보면 Westminster 견해는 구약 안식일의 의미의 전이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이전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마서에 보면 모든 날이 거룩하다고 한다. 그래서 각각 자기 형편에 따라, 양심에 따라 지키라고 한다. 후자를 따르는 자는 주일 성수를 자유롭게 하라고 한다. 그러나 이 후자의 의견이 설혹 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일을 가볍게 여기거나 자기 편한 날 하겠다 함은 잘못이다. 주일의 의미가 들어간다면 덩의미있고, 지켜야 하며, 또한 모든 성도들이 한 곳에 함께 모여 예배하는 공예배로 드려지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따라서 직장을 쉬고 함께 모여 예배하는 일에 하루가 드려져야 한다.

모두 함께 모인다는 공예배로 드려진다는 것(구약에서도 일하지 않는다)은 일상의 직업에 매여서는 잘 이루어질 수 없는 하나님 섬김의 삶을 통해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정당한 바른 말씀이 성령의 능력으로 전달된다면 이 공예배는 개인적으로 말씀을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하며 이것이 없이는 풍성하고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없다. 가장 밀도있고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은혜 받는 시간으로서 소중히 여기고 빠지거나 가볍게 여겨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local church(지역교회)는 지역별로 그 주위에 사는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교회를 말하는데 그 교회 지도자와 그 교회 교인들과 영적으로 하나된다는 의미가 있다. 이때는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고 감사한다. 그리고 이어서 이스라엘 공동체 삶의 절기로 내용이 나아감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제사장 직무는 개인적 차원의 사역이 아니요, 이스라엘 공동체를 대표하는 자로서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일하지 말라. 타락은 인간의 노동이 고역이 되게 하였다. 그러므로 일을 쉼으로 육체의 휴식도 안식에는 포함된다. 이보다 큰 것은 공동체의 예배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는 적극적 요소가 있다.

유월절은 이 날로부터 이스라엘이 시작된다. 이는 이스라엘의 존재의미를 말함이다. 유월절과 더불어 시작되는 절기는 무교절로서 무교절은 누룩(다른 것을 변질시키는 것 = , 오염)을 없앤다. 누룩 즉, 죄를 없애는 성결한 삶을 의미한다. , 이스라엘의 존재 의미는 성결한 삶을 살므로 구별됨인 것이다.

맥추절은 각 개인의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진 삶의 열매를 드림이다. 첫 이삭을 드림은 수고한 열매를 드림인데(26), 전체 삶을 드리는 표시이다. 이 복된 삶의 영역()에서의 삶과 삶의 열매를 하나님께 드림이다. 보리 추수는 4월 말 - 5월 초이다.

오순절은 밀 추수 후인데, 밀은 보리보다 늦게 즉, 2-3주 늦게 추수한다. 밀 추수는 오순절과 유월절 사이에 온다.

7(안식월)은 절기가 가장 많다. 1일은 성회로 모이고, 10일은 대속죄일이요, 15-23일은 수장절, 초막절로서 하나님 앞에서 기뻐하는 절기이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초막에 살 때 하나님이 보호해 주심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이 성회의 기본의미는    (안식)로 시작한다. 성회의 다음은 안식년이 나오고, 희년이 나온다. 전체가 안식이라는 구조 속에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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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절에서 끊이지 말고 등잔불을 켜 두는 것은 이스라엘의 공동체로소의 삶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의 삶과 관련이 있다. , 23장의 구별된 날, 정한 날에 이루어지는 것 말고, 항상 언제나 일상적인 날에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을 말한다. 그리고 이 등불은 하나님 앞에서 빛된 삶, 이방인에게 비취는 빛으로서의 삶, 어두움을 비추는 세상의 빛으로서의 삶을 말한다. 5절은 항상 열 두 개의 떡을 둔다(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의 상징). 이 떡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옴의 감사와 수고의 삶의 열매 드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열매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삶에서 거룩히 구별된 날에 대해 말한 후 매일 일상생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거룩한 삶은 holy time에서만 아니라 매일, 항상, 일상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10절은 거룩함을 오염하는, 파괴하는 자의 처리가 나온다(사형 = 오염의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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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장에서는 안식년이 나온다. 1-7절은 휴경을 명하심으로 안식의 법은 땅, 환경에도 적용된다. 이는 안식의 은혜의 포괄적 적용성을 말한다. 8:21-23을 보면 그때는 땅도 새로와질 것이다. 특히 파종을 말라는 것은 땅만 쉬지 말고 사람 특히 종이 쉬게 된다. 그래서 이 안식년에 히브리인 종은 다 자유케 된다. 8절은 희년을 말한다. 바로 안식년 중의 안식년이 이 희년이다. 안식년을 7번 한 후 다음 해인 50년의 대속죄일이다. 이때는 해방을 선언한다. 이때 종은 자기 친족과 자기 기업에게 돌아가는 귀향과 해방의 날이다. 땅도 그 전 소유주에게 돌아간다. 그러므로 땅을 사고 팔 때는 희년을 계산하여 사고 판다. 이 희년은 각자 자기 기업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기회는 주는 것이다. 23장에서 땅은 여호와께 속하였다고 했다. 이 말은 여기서 다시 생각해 보면, 너희의 전 존재가 하나님께 의존되어 있다. 여호와야 말로 너의 삶의 전 존재요 전 터전이다. 여호와께서 진정한 삶의 터전임을 일깨워주는 표시요,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의 삶의 터전을 박탈, 상실하는 것이 없도록 보장하신 것이다.

24절은 기업을 무르는 제도가 나온다. 땅의 상실은 육적 생존의 상실이요, 다른 이에게 예속됨을 의미한다. 육적 얽매임은 육적, 정신적 얽매임이고 큰 영향을 미친다. 희년을 통해서 상실된 삶의 터전, 권리를 원칙적으로 회복하는 제도를 만드셨으나 희년까지 가지 않아도 기업무르는 제도를 통해 땅을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다. 이것으로 시내산의 율법이 일단락된다.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대원칙은 거룩한 삶 =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 = 생명을 누리는 삶인데, 이 삶이 의식영역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의식영역 즉, 임재의 지밀에서 이루어지는 섬김의 삶, 축복의 삶, 하나님을 만나는 삶, 예배의 삶, 이 삶이 전 영역으로 확대되어진다. 일상적인 것에서부터 즉, 음식, 성생활, 아이 잉태하는 것, 윤리적인 것, 이웃관계, 절기 통해 이루어지는 공동체적 삶, 경제적인 것까지 인권문제까지 다 확산된다. 이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이스라엘 한 가운데 계신 성막에서 시작해서 개인적, 사회적, 모든 삶의 영역으로, 전 공동체적인 삶의 영역으로 확산된다. 이 모든 영역에서 거룩한 삶이 이루어질 수 있고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의 삶 구석구석까지 물들어야 한다. 먹고, 입고, 자는 데까지, 직장, 모든 영역에서 성,속을 구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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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과 안식의 관계

최초의 안식은 창 2:1절 인데 그 날을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케 하셨다. 축복(blessing)과 거룩(holy)과 안식(rest) : 하나님 통치의 구조이다. 7일을 하나님께서 안식하셨다. piel형은 선언적 형태(declarative)를 의미한다.

?? 복주셨다 ךרביו(와에바렉)

?? 거룩케 하셨다 שׁדקיו(와에콰도쉬) 안식은 복되고 거룩한 것으로 선언되었다.

그러나 안식은 타락으로 파괴되고 구속으로 회복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는 안식은 파괴된 질서로부터의 회복을 항상 의미한다. 노아(הנ 의 의미가 안식이라는 뜻임을 생각할 때 죄의 결과인 타락으로부터의 회복은 모든 안식으로 설명된다.

레위기에서도 안식일과 모든 절기들, 안식년, 희년들이 모두 복된 회복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고 예배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출애굽 역시 안식의 시작이며 가나안은 안식의 완성의 모형이고 전인적, 완전한 안식의 예표로 주어졌다. 앞으로 올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것이다. 안식은 그래서 성결의 회복, 삶의 질서의 회복을 의미하며 그것이 절기의 제사를 통해 이루어진다. 그 절기를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감사하고 즐거워한다. , 축제를 벌인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을 통한 다스림을 받을 때만 이러한 참된 안식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