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출애굽기 강해

출애굽기 전체 40장 강해

에반젤(복음) 2019. 7. 9. 07:22



출애굽기 1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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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창성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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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애굽을 비롯한 팔레스틴 지방에 심한 기근을 내림심으로써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애굽으로 이주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미 준비하셨던 요셉으로 하여금 양식을 풍족하게 비축하도록 함으로써 이스라엘 자손들이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없도록 모든 여건을 준비해두셨다.

이스라엘 민족은 비좁은 가나안 땅에서 사람들과 다투지 않게 되었고 오히려 넓은 애굽에서 번성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업인 목축업을 부정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스라엘은 애굽 사람들과 분리될 수 있었고 외부의 문화로부터 아무런 동화도 받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에서 이스라엘 후손들은 이스라엘만의 순수한 문화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하나의 국가를 형성할 수 있을 만큼의 많은 인구로 성장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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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취되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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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1:6-7)는 기록은 애굽으로 이주했던 이스라엘 후손들 중 초창기 세대 사람들은 수명이 다하여 죽었으나 그 후손들은 큰 수를 이루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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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이주한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많아졌다는 것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야곱에게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46:3-4)고 말씀하셨다.

이때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큰 무리로 장성하게 한 후 그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올 것을 약속하신 바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후예들이 큰 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돌아갈 기한이 다 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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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애굽 왕 바로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큰 수를 형성하고 번성하는 것에 대하여 깊은 우려를 가지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수가 많아진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이 애굽에 대항하는 세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8-10). 이스라엘의 창성에 대한 우려를 감출 수 없었던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함으로써 더 이상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을 방지하고 그들의 힘을 축적하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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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해 불안감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하여 보다 잘 이해하게 된다. 야곱이 BC 1876년경 애굽으로 내려간 이후인 BC 1720년경부터 BC 1570년경까지 애굽은 북쪽 팔레스틴에서 침략한 힉소스(Hyksos)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당시 힉소스 왕조는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애굽에서부터 팔레스틴을 거쳐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애굽은 북쪽에서 온 가나안 사람들에 의해 수많은 약탈을 당하며 수모를 겪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애굽 사람들은 북쪽 팔레스틴 사람들에 대하여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BC 1550년경 애굽의 제18왕조를 건설한 아모세 1(Ah-Mose I)가 일어나 힉소스 왕조를 물리치고 애굽을 통일하였고 이후 애굽은 자주적인 국권을 회복하면서 번영을 추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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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팔레스틴에서 건너온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의 콧잔등이에서 번성하고 있다는 것은 위험한 요소가 아닐 수 없었다. 만일 이스라엘의 수가 번성하게 되면 자연히 북쪽 팔레스틴 군대와 힘을 합하여 애굽을 재침략함으로써 예전과 같이 애굽을 약탈할 수도 있고 혹은 북쪽 군대와 애굽이 전쟁하게 될 때 배후에서 애굽을 모반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다. 출애굽기 1장에 등장하는 요셉을 모르는 애굽의 왕은 힉소스 왕조를 물리친 왕가의 출신으로 추정되며, 이 왕은 자연히 이스라엘에 대하여 배타적인 경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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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정세 때문에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 건재하고 있다는 것은 언제나 바로에게 목의 가시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 백성을 팔레스틴으로 내쫓아버릴 수도 없었다. 당시에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대부분의 토목 공사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에 인력을 많이 확보한다는 것은 곧 국력을 판가름하는 척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이스라엘 백성의 노동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로에게 부를 가져다 주는 셈이었다. 때문에 바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추방할 수 없었다. 아마 바로는 이점, 즉 경제적 이익 때문에 이스라엘을 자기 수하에 두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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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백성의 통치자이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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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는 비돔과 라암셋에 국고성을 건축하는 일에 이스라엘 백성을 동원하여 강제 노역을 시키는 등 자신의 권세를 세우는 일에 동원하되 한편으로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세력이 커가지 못하도록 갖은 수단을 다해 이스라엘을 학대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바로의 학대를 받는 것과는 상관없이 이스라엘을 더욱 번성하게 함으로써 야곱과 맺은 약속을 성취해 나가고 있었다.

이러한 하나님의 경영을 알지 못하는 바로는 이스라엘에게 더 큰 노역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번창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이스라엘에게서 노동력만을 얻을 목적으로 산파들을 시켜 여자아이들은 살리고 사내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을 내리게 되었다(1: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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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의 명을 거역하고 사내아이들을 살려내었다. 산파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아보려 했던 바로는 이대로 두어서는 이스라엘의 수가 계속 번성하는 것을 막아낼 방법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사내아이가 출생하면 모두 강에 던져 죽이도록 명령을 내림으로써 이스라엘이 강성해지는 것을 막아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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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그의 후손들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번성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신 바 있다(15:5, 22:17, 26:4, 28:14). 하나님은 그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크게 번성하도록 역사 하시고 계셨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지 못하고 있는 바로는 이스라엘이 번성하여 곧 애굽을 위협하는 세력으로 등장하게 될 것만 우려하고 이스라엘의 수를 바로가 다스리기 쉬운 적정한 수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학대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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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부터 애굽으로 내려오게 하신 것은 그곳에서 이스라엘의 고유한 문화적 특성을 살리며 번성시킨 후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그 땅에 순결한 문화를 세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스라엘이 장성하여 큰 민족을 이루게 되면 그들을 이끌고 가나안으로 돌아오실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새나라를 건설함으로써 창조 이래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인간들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내신 언약의 백성을 통해 하나님의 뜻, 즉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는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 때문에 이스라엘을 자기의 소유로 삼고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소모품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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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이스라엘을 창성케 하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하여 반역하고 이스라엘을 장악하여 자기의 부를 유지하려는 바로와 하나님 사이에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가를 밝히는 싸움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가 누구인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다. 아무리 바로가 이스라엘의 수를 조절하여 자신의 손아귀에 잡아 두려 해도 이스라엘은 그것과 상관없이 자꾸 번성하고 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성경 기자는 이점을 부각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1:7)는 내용을 반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12, 20). 이렇게 이스라엘의 생육이 지속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머지 않아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불러들이실 하나님의 때가 가까웠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출애굽기 2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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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공동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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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한 시한이 가까워지고 있을 즈음인 BC 1520년경에 레위 족속 중 한 가문에서 모세가 출생하게 된다. 모세의 어머니는 석 달간이나 모세를 숨겨 키웠다. 그러나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게 되자 아기를 갈대 상자에 담아 나일강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 목욕하러 나왔던 바로의 딸 공주가 갈대 사이에 떠 있는 모세가 담긴 상자를 발견하고 물에서 건져내었다. 공주는 모세가 히브리인인 것을 알고 히브리인 여인을 유모로 택하여 모세를 기르고자 하였다.

이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공주에게 달려가 모세를 위해 히브리인 중에서 유모를 찾아주겠다고 하며 모세의 친어머니를 유모로 천거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모세는 공주의 보호 아래 모세의 어머니 품안에서 정당하게 양육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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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국 백성으로서 모세의 자의식(自意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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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어머니의 양육을 받았으므로 상당 기간 히브리인으로서 교육도 함께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2:10). 이 기간 동안 모세는 어머니를 통해 히브리인으로서 의당히 가져야 할 인생의 본분에 대하여 교육받은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모세가 바로의 궁중에서 교육을 받고 장성한 후 애굽 사람에게 구박 당하는 히브리인들을 위해 나선 사건을 보면 이미 모세는 히브리인으로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2:11-13 참고).

모세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단순히 히브리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민족적 의식만을 배운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에 대해서도 자세히 배웠다. 그것은 모세가 동족을 위해 나섰던 것이 히브리인으로서 자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근거가 된다(7:2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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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히브리인의 한 사람으로서 민족을 압제하고 있는 애굽의 체제애 대하여 민족적인 의분을 보인 것이 아니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때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알고 이를 알리기 위해 동족들 앞에 나섰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7:26). 이것은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지도자로서 자신의 역량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식을 일깨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취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역설하기 위함이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미 모세는 당시의 시대적인 특성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가나안으로 불러들이실 기한이 가까웠음을 보고 있었다. 또한 그러한 하나님의 경영에 자신이 어떤 형태로 참여해야 할 것인가를 나름대로 인식하고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의 기록을 보더라도 모세는 이스라엘의 본분을 되찾기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1:24-26). 모세는 어머니의 품안에서 양육 받는 기간 동안에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성취되어야 할 것인가를 배웠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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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으로 이주하게 된 경위와, 때가 차서 생육하고 번성한 뒤에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으로 돌아가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민족적 사명에 대해서도 바르게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시대적 사명에 근거하여 모세는 지속적인 바로의 핍박 아래에서도 이스라엘이 번성하고 있다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 핍박 가운데에서도 죽임을 당하지 않고 공주의 보호를 받으며 온전하게 양육되어 성장한 자신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인생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판단할 수 있었다. 이처럼 시대적 사명에 근거하여 모세는 애굽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로서 자신의 시대적 사명을 확인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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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인생의 본분을 바탕으로 바로의 궁중에서 최상의 학문을 연수하였다(7:22). 모세는 자기가 최상의 학문을 배우게 된 것을 개인적인 부귀를 얻기 위한 기회로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인생의 본분을 수행함에 있어서 마땅히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과정으로 알고 학문에 매진함으로써 모든 학문을 습득했다.

그러나 자신이 애굽의 학문을 습득하고 이제 백성의 지도자로 나서서 백성으로 하여금 민족적 존재 의미를 확인하고자 했던 모세의 시도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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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국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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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애굽 사람을 쳐죽인 것은 동족인 히브리인들에게 자신이 형제 의식을 강하게 지니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위한 하나의 증표였다. 이튿날 히브리인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모세가 그 그른 자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동포를 치느냐”(2:13)고 힐문한 것은 자신이 백성에게 스스로 재판장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모세는 히브리인들 사이의 형제 의식을 확인하고 나아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해야 한다는 민족적 사명을 일깨우려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들로부터 거부를 당하고 말았다(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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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는 이스라엘이 민족적 공동체 의식을 확인하고 하나의 사명을 수행해야 함에 있어 지금과 같이 분란이 발생하고 서로 의견이 달리 나타나고 있음을 볼 때 더 이상 자기의 노력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후예들로서 시대적 사명을 각성하고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것을 소망하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로 부역하고 있으면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들의 이권을 얻으려고 동족끼리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민족적 구원을 바라보고 있는 모세에게 큰 실망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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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의 민족적 수준이 저급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발견한 모세는 아직 하나님의 구원의 때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때 모세가 애굽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각되어 바로가 모세를 찾자 모세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으로 피신하게 되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의식을 일깨워 이스라엘 민족의 존재 의미를 되찾으려 한 일은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의도를 잘못 받아들임으로서 수포가 되고 말았다. 아무리 훌륭한 지도자가 있다 하더라도 대중을 이루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준이 저급하다면 그 백성은 여전히 무지의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모세가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40여 년을 보내고 있는 동안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그 이전보다도 훨씬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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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적 존재 의식을 일깨우고자 했을 때 그것을 거부했던 이스라엘은 바로의 압제가 강해지자 비로소 하나님을 향하여 그 고통에서 구원해 줄 것을 부르짖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바로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이 정상적인 위치에 서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미리 깨달았어야 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특별한 시대적 사명을 각성하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주는 식생활의 안락함에 빠져 자신들의 위치와 본분을 망각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더 심한 고통만이 주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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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심해지자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밑에서 압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 자신들의 정상한 위치가 아님을 인식하기 시작했다(2:23-25).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더 이상 바로의 노예가 될 수 없다는 민족적 공동체 의식에 대해 비로소 눈을 뜨게 되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언약 백성으로서 그 언약에 대해서 완전한 의식을 갖지는 못했으나 그들이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찾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들에게 일종의 민족 공동체 의식이 싹트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결정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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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을 곧바로 구원하지 않고 오랫동안 바로의 손에 남겨두신 것은 최소한 이스라엘 민족이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는 수준에까지 도달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전체가 민족적 사명을 깊이 깨닫지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자기들이 바로에게 속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함을 고백할 정도의 수준까지는 도달해야 할 것을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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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같이 몇몇 개인의 각성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민족적 경향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한 민족적 의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구원의 능력을 발휘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도탄에서 건져내시는 원칙이다. 적어도 이스라엘 민족이 민족 공동체적인 존재 의식을 확인하고 자신들은 바로에게 속한 민족이 아니며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가지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구원의 손길을 펴기 시작하셨다.

출애굽기 3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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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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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에서 약 400여 년 동안 거주하던 이스라엘의 후손들은 어느새 큰 세력을 형성할 수 있는 민족 단위로 성장하고 있었다. 처음 야곱이 애굽으로 이주할 때만 하더라도 70여명의 가족 단위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을 허다하게 많게 하심으로써 하나의 민족을 형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난 40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아래 타민족의 영향력을 받지 않고 다분히 히브리적 문화를 보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이 형성한 히브리적 문화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에 참여한 백성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을 세상의 백성들과 구별하여 한 민족을 이루고 그 민족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구현되는 나라를 건설하실 것이라는 사상은 이 세상 어느 민족들에게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사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세상 민족들과는 유달리 다른 역사관과 인생관을 갖게 된 것도 이처럼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신앙에서 나온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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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을 수용하고 그 언약의 성취에 대하여 철저하게 신앙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후손들도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될 것에 대한 확실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을 때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학정에서 벗어나 애굽을 떠나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 나아가 그들이 애굽을 벗어나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된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을 점검하도록 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인도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자신들이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명 의식을 고취함으로써 가나안에 돌아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여야 할 것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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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은둔 기간 동안 바로의 압제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출하시기로 한 때가 바로의 압제가 극에 달하고 있다는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특별하신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먹고사는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고 있을 정도의 저급한 수준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스스로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을 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 가나안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다는 것은 그들이 가나안에 돌아가 해야 할 일이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스라엘이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가나안에 돌아가 세워야 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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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모세를 선택하신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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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민족 공동체적인 사명 의식을 재삼 일깨워 주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다. 이때 모세는 미디안에서 양치는 목자로 40여 년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시내산으로 인도하여 그곳에서 친히 자신을 나타내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의 독특한 의미를 가진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3:6)고 소개하셨다. 하나님이 자기 스스로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셨다면 그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음을 인정하신 것과 같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친히 언약을 세우고 그 언약의 대상자들에 대하여 그처럼 즐겨한다는 사실에 대하여 두려움이 앞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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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는 의지를 모세에게 명확하게 표시하셨다(3:7-8). 그리고 그 일을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위임하셨다(3:9-10).

모세는 자신을 돌이켜 볼 때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했다(3:11). 이스라엘 백성의 굳어진 마음을 자신의 언변과 능력으로서는 도무지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모세로서는 동족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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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13)고 하시며 모세를 독려해 주셨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에 보내시어 애굽의 궁정 학문을 다 습득하도록 하셨다.

모세는 아직도 그 옛날의 뼈저린 실패를 털어 버릴 수 없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선다는 확고한 증거를 하나님께 요구했다. 하나님은 모세의 두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매우 구체적으로 애굽에서 할 일을 소상히 알려주셨다(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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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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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 대해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보여주신 계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을 그의 백성에게 나타내심으로써 하나님이신 것과 언약을 성취하는 여호와임을 증거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인간에게 보여 주심에 있어 먼저 창조주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우주 만물과 자연 현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표시하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대하여 인식하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그러나 이미 죄로 인해 그 양심이 무디어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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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에게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게 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계시하실 필요가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죄로 오염된 자리에서 구원되었음을 인식하여 더 이상 죄 아래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바른 지식을 얻음으로써 진정한 자유인으로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자기 계시를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그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는 일에 유효한 능력을 발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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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היהא רשׁא היהא)”(3:14)고 자신을 계시하셨다. 이 말은 나는 나 자신에 의해 증명될 것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존재 목적을 위해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당신 외의 누구의 존재 목적을 위해 존재하지 않으신다. 오직 자신만이 존재 이유이며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왜 존재하시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스스로 대답하기 위해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로 언약하셨고 그 약속을 성취해 나가는 분이시다. 그 언약은 처음 아담에게(3:15), 후에는 노아와 그의 식구들에게(9) 그리고 나중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주어졌다(17). 따라서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로 한 것은 하나님 스스로의 존재 목적에 따라 이스라엘을 구원한다는 사실을 모세에게 분명하게 계시하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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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새나라를 건설하시겠다는 약속을 성취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민족적 존재 의식을 다시 한번 점검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서살을 통해 자신들이 건설해야 할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고 있음을 확인하고 언약에 참여된 백성으로서 자신들의 인생을 새롭게 경영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참으로 자유를 얻은 백성이 추구할 진정한 삶의 자태이다. 바로의 종 된 자리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는 그 안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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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군가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비록 바로의 손에 잡혀 있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은 평생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얽매여 있어야 한다.

바로의 손에 얽매여 있다 할지라도 그 안에 있는 동안만은 굶어 죽는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지만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사람은 자신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바로의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생존에 대한 염려에서 벗어나 자신이 궁극적으로 성취해야 할 인생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이 먼저 앞서야 한다.

출애굽기 4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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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사역에 담겨 있는 구속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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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시기 위한 가장 적합한 인물로 모세를 선택하셨다. 모세는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역사적인 사명을 띠고 있음을 인식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을 일깨우려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민족적 수준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하기에는 미달된 상태였다. 이스라엘의 민족 의식을 되찾는 운동에 실패한 모세는 미디안에서 40여 년 동안 목자로서 생활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던 중이었다. 이미 뼈저린 실패를 안고 있는 모세로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다는 사실이 몹시 부담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확인했지만(3) 막상 자신이 나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여 애굽에서 나와야 하는 일에는 극구 사양하고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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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세에게 주어진 사명

모세는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4:1)고 변명하며 애굽으로 가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시며 이는 그들로 그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나타난 줄을 믿게 함이니라”(4:6)고 하며 모세가 애굽으로 들어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오기를 독려하셨다. 이적을 행할 수 있는 권능을 손에 쥔 모세였으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4:10)고 하며 한사코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서 벗어나려고만 했다. 이러한 모세의 태도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다. 그렇지만 이미 40여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행하였던 행위를 본다면 이스라엘의 구원 사역에 쓰임받는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모세가 잘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꾸 변명을 하자 아론을 함께 보내시겠다고 하심으로서 모세가 더이상 변명하지 못하게 하셨다.

모세가 애굽에서 할 일에 대해선 출애굽기 421-23절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애굽으로 돌아가거든 내가 네 손에 준 이적을 바로 앞에서 다 행하라 그러나 내가 그의 마음을 강팍케 한즉 그가 백성을 놓지 아니하리니 너는 바로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은 내 아들 내 장자라 내가 네게 이르기를 내 아들을 놓아서 나를 섬기게 하라 하여도 네가 놓기를 거절하니 내가 네 아들 네 장자를 죽이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니라”(4:21-23)는 말씀과 같이 이스라엘은 창조주 하나님의 장자로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일에 선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이를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자신의 소유로 잡고 있기 때문에 바로의 장자를 죽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낼 것이라고 선포하는 일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사명이었다.

이 말씀 속에는 하나님만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소유주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비록 지금은 바로가 이스라엘을 붙잡고 있으나 본래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선택된 백성이었다. 따라서 이제 하나님을 위해 이스라엘을 보내어 달라는 요구를 바로에게 선언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는 자신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창조주 하나님의 요구를 거역하고 끝까지 이스라엘의 소유권을 주장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는 형벌을 내리시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경영에 대해 거역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였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다시 애굽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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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월절의 의미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시키는 대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의 아내 십보라와 그의 아들들을 데리고 애굽을 향하는 중에 잠시 숙소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게 되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그곳이 어디인가 밝히지 않고 있지만 아론이 시내 산에서 모세를 만난 것을 볼 때(27), 이 숙소는 애굽의 국경 지역으로 시내산 근처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겠다고 피의 보복을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갑자기 "여호와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하시는지라"(24)는 기록이 등장한다. 그런데 한글 개역 성경에 모세라고 번역된 단어의 원어가 라는 삼인칭 대명사라는 점에서 ""가 누구인가에 대한 번역상의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십보라가 아들에게 급작히 할례를 행함으로써 무사히 지나간 것으로 볼 때(25) 하나님께서 죽이려 하신 사람이 모세일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모세가 미디안에서 아들을 얻은 후 할례를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었지만 당시 이방의 나그네로 살고 있는 모세로서는 아들의 할례를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본문 23절에서 애굽의 장자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의지와 연관지어 볼 때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모세의 아들들 때문에 모세를 죽이시려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문 21절에서 모세에게 바로 앞에서 이적을 행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결정적인 이적인 유월절에 애굽의 장자들을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신 후(22-23) 이제 모세를 죽이려고 하신다는 것은 애굽 땅의 모든 장자들이 당할 죽음의 위협, 즉 유월절에 발생할 사건을 모세로 하여금 미리 체험하게 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세로 하여금 유월절을 미리 체험하게 함으로써 유월절의 기본 원리를 가르쳐 주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가정에 예비적 유월절을 시행하셨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11:28)이라는 히브리서 기자의 해석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있다. 이 경험을 통하여 모세는 믿음으로 유월절 규례를 분명하게 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십보라가 말한 피 남편"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라"(26)는 말씀과 연관지어 해석되어야 한다. 본문에서 남편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하탄’(ןתח)으로서 그 뜻은 신랑을 의미한다. 히브리어에서 남편이란 말은 이쉬’(ישׁא) 혹은 바알’(לאב)로 기록된다. 그런데 한글 개역에서 유독 본문에서만 하탄을 남편으로 번역하고 있는 것은 를 모세로 번역했기 때문에 문맥의 흐름을 맞추기 위한 부자유스런 번역이 되고 말았다.

본문의 피 신랑이란 의미는 이스라엘의 혼인 관습과 연관지어 해석할 수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혼인 초야에 신부의 순결을 증명하는 핏자국을 제시하도록 되어 있다(22:13-21). 신부는 정숙한 처녀의 핏자국을 제시해야 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신부는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핏자국이 보이지 않을 경우 신부를 사랑하는 신랑이 대신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하여 그 피로 신부의 생명을 살리게 되는데 이것을 피 신랑이라고 하였다. 신랑은 할례의 피로 신부에게 법적인 보호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십보라가 할례를 행하고 모세를 가리켜 피 신랑이라고 한 것은 할례의 피가 자기와 가정을 하나님의 손에서 건져내었음을 상징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유월절에 담겨 있는 신비한 의미를 보여주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신부 이스라엘과 혼인하는 잔칫날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월절은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로 신부 이스라엘의 죄악을 덮으시고 구속하신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세와 그의 가족은 할례의 피를 통하여 죽음에서 놓이게 된 이 사건은 여호와 하나님과 신부 이스라엘의 혼인을 상징하는 유월절 사건을 예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피 신랑의 의미는 후에 십자가에서 피흘리신 그리스도에게서 재확인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유월절 어린양이라고 하는 것도 이러한 의미와 일맥상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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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5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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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이 당하는 시련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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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과 함께 애굽에 들어간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장차 여호와께서 하실 일을 선포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4:31)는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이 실행되고 있음에 대하여 감격해 마지않았다. 이스라엘의 마음이 어느 정도 하나님께 향하고 있음을 확인한 모세는 바로에게 찾아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이다”(5:1)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그러나 바로는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 하리라”(5:2)고 거절하며 모세와 아론이 백성을 선동하여 부역을 하지 않게 한다고 하며 오히려 더 가중하게 부역을 시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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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백성이 감당해야 할 시련의 성격

애굽의 간역자들은 바로의 명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로의 말씀에 내가 너희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짚을 얻을 곳으로 가서 주우라 너희 일은 조금도 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5:10-11)고 하며 직접 짚을 구해 벽돌을 만들게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 온 땅을 찾아다니며 곡초 그루터기를 거두어다가 짚을 대신해서 벽돌을 만들고자 했으나 일이 벅차게 되어 일당을 채우지 못하게 되자 간역자들은 더욱 백성을 못살게 굴며 여전히 벽돌의 수효를 채우라는 성화가 대단해졌다. 이에 이스라엘 패장들이 바로에게 가서 왕은 어찌하여 종들에게 이같이 하시나이까 종들에게 짚을 주지 아니하고 그들이 우리더러 벽돌을 만들라 하나이다 종들이 매를 맞으오니 이는 왕의 백성의 허물이니이다”(5:15-16)고 호소했으나 바로는 오히려 너희가 게으르다 게으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르기를 우리가 가서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자 하는도다 이제 가서 일하라 짚은 너희에게 주지 않을지라도 너희가 벽돌을 여수히 바칠지니라”(5:17-18)고 거절하며 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전 국가적인 장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을지라도 이미 그 마음 속에 자신의 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거역하는 것이 그 자신뿐만 아니라 전 국가와 국민들의 장래에 엄청난 피해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위기를 자초했다는 사실조차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세상 나라 통치자들이 가지는 우매한 통치력이다. 그러나, 더욱 안타까운 것은 막상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제 자의식이 생기고 애굽에서 나가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겠다며 하나님의 구원을 요청했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더 큰 문제점이 있었다.

바로의 학대가 심해지자 이스라엘의 패장들은 그 원인에 대해 분석하기보다는 우선 외형적으로 나타난 결과만을 따져 모세와 아론 때문에 고역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보자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5:21)고 하며 원망을 마다하지 않았다.

처음에 모세와 아론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반가워한 그들이(4:31) 바로가 심하게 자기들을 학대한다는 이유 때문에 금새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둔감해져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처신이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패장들이 그처럼 금새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나선 것은 그동안 자유스럽지 못한 상태에서 애굽 상관들의 눈치를 보며 살아온 사람들의 생리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들의 장래와 생존에 대해 점검하고 대처해 나가기보다는 언제나 윗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 궁리를 찾아왔던 노예적 근성에 젖어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기보다는 바로의 압제 앞에서 어떻게 하면 헤어나올 수 있을까 하는데 관심을 보이고 있다. 지난 오랜 세월동안 바로의 압제를 당하던 처지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며 살아왔다면 이제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크다는 것쯤을 알고 있어야 한다.

바로의 종 된 상태에서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편히 자유의 몸으로 구원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유치한 어린아이들이나 바라는 요행수일 뿐이다. 진정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소망하고 있다면, 또한 모세와 아론을 통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이 가까웠음을 들었다면 그 구원에 참여하기 위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대책을 강구하고 그 대가가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이겨내어야 한다는 다짐을 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벽돌을 굽는 일이 어렵고 힘들어졌다고 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나선다는 것은 그들의 판단 수준이 매우 저급하고 유치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오랜 노예 생활이 그들의 사고력을 그처럼 저급하게 만들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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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급한 수준의 이스라엘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대책

하나님은 이러한 처지에 있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셔야 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각성을 했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바로의 노예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의 저급한 수준을 상당히 정상한 위치로 회복시켜야 하는 중요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은 단회적인 기적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기보다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이스라엘 스스로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게 하는 절차를 먼저 밟도록 하는 방편을 미리 정해 놓으셨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소유권에 대한 하나님과 바로와의 싸움이었다.

사실 창조주 하나님과 한 나라의 왕인 바로 사이에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소유권 싸움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싸움의 상대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바로에게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한 하나님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통치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다.이렇게 함으로써 생존권에 매어 살고 있는 저급한 수준에 있는 이스라엘을 상당한 수준으로 승화시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에 참여하는 수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훈련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참여한다고 할 때에는 적어도 우리들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가를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하나님의 경영에 참여할 정도의 수준에 미달되어 있다면 먼저 그 자신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경영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을 상대로 진행되지 않고 전 교회를 상대로 진행되기 때문에 이 시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민감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느 순간이든 한번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고 만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각성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빠져있는 딜레마가 그 시대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자 하신 경영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신앙의 괴리가 발생하고 마침내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출애굽기 6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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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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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6:1-8)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하실 일에 대해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께서 바로를 철저하게 심판하심으로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는 것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쫓아내게 될 것과 둘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는 것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고 그들을 친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여호와이심을 나타내게 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이러한 일을 이루어 나가기 위해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이스라엘을 내보라고 요구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활동으로 오히려 바로의 압제가 심해지자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무관심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에서 구원해 내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겠다는 의지를 모세에게 분명히 표하고 계신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태도와는 매우 상반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겠다고 의지를 밝히신 것은 이미 하나님 스스로 아브라함과 약속하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사역하시는 일의 독특한 성격이다.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6:8)는 선언이야말로 신실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기필코 그의 백성을 구원해 내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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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가 체제를 이루기 시작한 이스라엘

막상 구원의 대상자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대하여 시들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전격적으로 구원 사역을 시작하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게 한 후, 이스라엘의 12아들들의 후손들을 따라 각 가족의 족장들을 세우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족장들을 세우도록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여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일이 원만하게 진행되도록 할 목적으로 일종의 국가 체제를 갖추기 위함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각 족장을 세우고 장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이끌고 나가는 일에 차질이 없도록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이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모세는 바로에게 나아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가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쉽사리 이스라엘을 내어 보내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계셨다. 하나님은 그 사실을 모세에게 밝히고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바로를 치신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을 내보낼 것이라고 알려 주셨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나의 표징과 나의 이적을 애굽 땅에 많이 행하리라마는 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 내가 내 손을 애굽에 더하여 여러 큰 재앙을 내리고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지라 내가 내 손을 애굽 위에 펴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야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7:3-6)는 말씀 속에서 이제부터 시작될 하나님과 바로 사이에 발생할 싸움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다.

바로는 자기 스스로의 이권을 유지하기 위해 모세의 요구를 거절할 것이지만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의 강한 능력이 애굽 온 땅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그 후에야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내어 보내게 될 것이며 그 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은 누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진정한 신()인가를 알게 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애굽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재앙은 바로의 강퍅한 마음을 꺾을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역사 위에 분명히 나타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유일한 신이라는 사실을 애굽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분명히 밝히려고 하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지난 430여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이라는 막강한 나라에서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애굽이 그처럼 막강한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애굽을 다스리는 바로의 강력한 통치력 때문은 아니었다. 애굽이 그처럼 강력한 국가로 세워진 것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생육하고 번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세상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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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군대로 선택된 이스라엘

하나님은 이 사실을 애굽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확하게 보이고자 하셨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애굽의 부속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바로에게 알리고 이를 끝까지 거역한 대가로 애굽이 철저한 재앙으로 심판을 당한다는 점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더 이상 이스라엘이 애굽에게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임을 인식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해 내는 것은 이스라엘만이 가지는 독특한 존재 의미를 이 세상에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세상과 구별되어 있음을 알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독특하게 대우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내 군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지칭하고 있는 데에서 확연하게 나타나고 있다(7:4). 아직 애굽의 종으로 있는 이스라엘을 가리켜 하나님의 군대라고 지칭한다는 것은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전혀 전쟁에 대비한 훈련도 쌓지 않았고 군사적인 작전 경험이나 조직 체계조차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 같은 이스라엘을 가리켜 군대라고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군대라고 지칭하는 하나님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군대는 세상 군대와 같이 막강한 전투력이나 체제를 갖추는 식으로 조직되거나 운영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 하나로 조직되고 운영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군대는 최소한의 조직만을 필요로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의 각 족속에서 족장만을 세우는 것으로 군대의 조직을 완수하게 하였다. 하나님의 군대는 그 정도의 조직만으로도 막강한 전투력을 갖춘 세상 어떤 군대보다도 월등한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

이러한 군사 조직은 세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기이한 형태이다. 군대라고 할 때에는 상당히 군사적 훈련을 감당할 수 있는 장정들을 중심으로 조직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는 장정만으로 조직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녀노소 할 것이 없이 누구나 이스라엘 후손이라면 그 군대의 일원으로 조직이 되었다. 어떻게 보면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체이기보다는 전투력을 찾아 볼 수 없는 조직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내 군대라고 지칭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런 군대를 이끌고 바로의 막강한 군대와 싸워 바로의 손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내시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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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7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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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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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바로와의 싸움은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7:8-13). 아론이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을 행하자 바로의 술법사들도 자기들의 지팡이로 뱀을 만들었다. 그러자 아론의 지팡이가 술법사들의 지팡이를 삼켰으나 바로는 그것으로 여호와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적을 행사하는 방법으로 바로의 마음을 바꾸려 한 것은 바로에게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가벼운 이적만으로 바로가 쉽게 항복할 것을 바랬던 것은 아니었다(7: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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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굽의 술객들이 행한 이적에 대하여

본문에서 아론이 행한 이적을 애굽의 술객들도 그대로 따라 행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단순히 마술이나 눈속임으로 이적을 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사탄의 도움을 받아 마치 하나님께서 아론을 통해 행하신 이적을 자기들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출애굽의 성격을 규명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애굽이라고 하는 세상 나라 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함에 대하여 사탄이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박해하여 제거하려는 음모가 그 안에 담겨 있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생육이 중다해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하는 바로의 배후에는 사탄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지금 아론과 술객들이 행한 이적은 단순히 누가 기이한 이적을 행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바로가 그의 제사장들과 술객들을 내보는 것은 이 싸움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인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상대적으로 모세와 아론의 배후에는 하나님께서 자리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바로와 모세와의 싸움은 결국 사탄과 하나님과의 싸움인 것이다.

이것은 강력한 나라를 상대로 해방을 추구하기 위해 약소 민족이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전쟁과 그 성격이 다르다.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과 사탄의 지배를 바고 있는 세상 나라와의 싸움인 것이다. 사탄은 바로와 그 술객들을 동원해 하나님의 백성을 억압하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막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강력한 방법으로 애굽의 술객들도 아론과 같은 이적을 행할 수 있도록 이적을 베풀었다.

그러나 사탄은 결코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될 수 없다. 사탄이 비록 막강한 애굽의 세력을 앞세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억압하려 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상 처음부터 적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이스라엘의 성장과 해방을 적극적으로 막으려 하는 것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좇아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는다. 아론의 지팡이가 술객들의 지팡이를 삼킨 사건(7:12)은 앞으로 전개될 싸움의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 사탄이 술객들을 앞세워 행한 이적이라 할지라도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이적과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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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애굽에 내린 재앙에 담긴 의미

하나님은 바로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바로에게 기회를 주셨으나 바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을 여전히 자신의 종으로 잡아 두기 위해 이스라엘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이에 하나님은 재차 바로에게 경고하며 마침내 애굽 전역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재앙을 내리기 시작하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을 받고 아침에 바로에게 나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첫째 재앙을 행했다. 애굽의 모든 하숫물이 피로 변하였으나 술법사들도 모세와 같은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본 바로는 여전히 모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첫 번째 재앙을 내리실 때 앞으로 있을 재앙의 성격에 대하여 명확하게 언급하셨다.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17)는 말씀과 같이 완강하게 이스라엘 백성 내보내기를 거부하고 있는 바로로 하여금 진정한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보여주는데 제 1차적 목적이 있었다. 이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바로가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점을 상기해 볼 때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을 향해 선전포고를 함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사탄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세상 나라에 가두워 놓고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지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지만 하나님이 애굽에 재앙을 내리심으로 결국 사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이기지 못하고 말 것이다.

특히 애굽에 내린 재앙의 성격은 세상 나라가 섬기는 신들에 대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사실이 더 분명해진다. 나일 강은 애굽에 생명을 공급해 주는 생명의 젖줄이라는 점에서 신격화되고 있었다. 애굽에는 여러 신들이 있었는데 열 재앙과 관련된 신들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1. 나일 강의 물이 피가 되게 함(7:14-25) ; 나일 강의 신 Nilus에 대한 재앙.

2. 개구리가 온 땅을 덮게 함(8:1-15) ; 다산 신 Hekt(개구리 형상)에 대한 재앙.

3. 티끌이 이가 되게 함(8:16-19) ; 땅의 신 Seb에 대한 재앙.

4. 파리 떼를 일으킴(8:20-24) ; 떠오르는 태양의 신 Khephera(딱정벌레 형상)에 대한 재앙.

5. 모든 생축에게 악질이 걸려 죽게 함(9:1-8) ; 수소의 신 Apis와 암소의 신 Hathor에 대한 재앙.

6. 재를 뿌려 붉게 타들어가는 피부병인 독종이 생기게 함(9:9-12) ; 악마의 눈을 가진 신 Typhon에 대한 재앙.

7. 우박을 내리게 함(9:18-21) ; 대기의 신 Shu에 대한 재앙.

8. 메뚜기 재앙(10:4-19) ; 곡식의 신 Serapis에 대한 재앙.

9. 흑암으로 3일간 애굽을 덮게 함(10:21-29) ; 태양 신 Ra에 대한 재앙.

10. 애굽 백성의 장자를 죽이심(12:29-33) ; 생명의 신 Ptah에 대한 재앙.

이상을 보아 알 수 있듯이 각각의 재앙은 애굽 사람들이 섬기는 신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그 신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모든 권능이 하나님에 의해 철저하게 징계를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들은 사탄이 세상 나라 백성들 사이에 조장한 사악한 신들로서 그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사탄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사탄은 하나님의 적대 세력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여호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세상 사람들에게 풍요와 건강을 보장할 것처럼 보였던 신들이 하나님의 재앙 앞에서 오히려 그것들을 섬기던 사람들에게 재앙을 가져다 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는 것은 누가 진정한 신인가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로서 네가 이로 인하여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7:17)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가 분명하게 밝혀지게 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되 자신이 곧 여호와이심을 스스로 증명하시는 분이시다(3:14).

출애굽기 8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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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 재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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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다시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개구리 재앙을 선포하도록 하셨다(8:1-4). 모세의 두 번째 이적에도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온 애굽 땅에 개구리가 득실거리는 재앙을 당한 바로는 술법사들도 하수에서 개구리를 올라오게 하는 것을 보고 여전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만 개구리에게 시달린 바로는 모세를 불러 애굽 사람들에게서 개구리를 떠나게 하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겠다고 제안을 해오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점차 바로가 하나님의 권능 앞에 무너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에 모세가 바로의 제안대로 해주었으나 바로는 다시 마음이 바꾸어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지 않았다.

하나님은 다시 애굽 온 땅의 티끌을 이로 변하게 하는 세 번째 재앙을 통해 모든 애굽 사람들과 생축들에게 오르게 하였다. 이번에도 술객들이 술법을 부리려 했으나 이번만은 이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 그러자 술객들은 비로소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8:19)고 하며 바로에게 사실을 고했다. 티끌로 이를 만들어 내는 것은 창조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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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거듭된 재앙이 주는 교훈

첫 번째 재앙에 이은 두 번째 재앙은 애굽의 술객들도 사탄의 도움을 입어 바로로 하여금 마음을 강팍하게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세 번째 재앙에 이르러서 그들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권능이란 손가락이란 말로 하나님의 손이 직접 이러한 이적을 행하신 것은 인정하였다. 이것은 애굽의 술객들조차도 하나님께서 직접 이 일에 간여하고 계심을 인정한 일이기도 하다. 이로써 바로는 하나님과 싸움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렇지만 이미 두 번이나 재앙을 견디어낸 바로는 세 번째 재앙에서도 여전히 마음을 바꾸지 않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다

여호와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 번째 재앙을 선포하게 하셨다(8:20-23). 애굽 전국은 파리 떼로 인하여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고센 땅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런 해를 당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를 불러 너희는 가서 이 땅에서 너희 하나님께 희생을 드리라”(8:25)고 절충안을 내어놓았다. 하나님을 섬기되 애굽 땅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술책이었다. 이것은 바로가 항복을 하되 자신의 이권을 최대한으로 보장받으려는 일종의 술수에 지나지 않다. 이미 바로가 패색이 짙어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는 모세로서는 조금도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모세는 우리가 사흘 길쯤 광야로 들어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되 우리에게 명하시는 대로 하려하나이다”(8:26-27)고 하며 바로의 제안을 거절했다. 바로는 모세의 말을 받아들여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8:28)고 허락하고 말았다. 이에 모세는 다시는 약속을 파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다짐을 하고 애굽 사람들에게서 파리 떼를 떠나게 하였다. 그러나 파리 떼가 떠나가 바로의 마음이 더욱 강퍅해져서 이스라엘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재앙이 거듭될수록 바로의 심정에는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본문에서 볼 수 있다. 두 번째 개구리 재앙은 바로가 요청한 것처럼 일시에 개구리들이 사라짐으로서 그 일이 여호와로부터 나왔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8:10). 바로는 그 사실을 친히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티끌이 이가 되어 사람들과 육축을 괴롭힌 세 번째 재앙에서 애굽의 술객들이 흉내 낼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그러나 바로는 술객들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권능을 정면 거부하고 나섰다. 친히 확인한 사실을 두고서도 바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가 철저하게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탄은 거듭되는 재앙이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며, 그 재앙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직접 이 싸움에 참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바로의 마음을 사로잡고 하나님을 계속 거역하도록 종용하였다. 이것이 그 백성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과 사탄의 차이점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더욱 소중히 여기시는 반면 사탄은 자기 수하에 있는 자들이 어떤 고난에 처하든 하나님을 거역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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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재앙의 의미

이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 재앙 사건이 네 번째 재앙이다. 애굽 전역은 파리 떼로 인해 크게 곤역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다. 이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바로의 지배를 받고 있는 백성들과의 차별화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이것은 하나님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증거해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죽어 있는 신이라면 자기 백성을 구별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나아가 이 사건은 하나님이 애굽까지도 다스리시는 분이심을 증거한다. 애굽의 사람들과 육축만을 구별해 재앙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애굽 전역을 대상으로 행하여지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비로소 바로는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광야에서 희생을 드릴 것이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 그런즉 너희는 나를 위하여 기도하라”(8:28)고 함으로써 하나님의 실체를 인정하는 단계에까지 이르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사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모세는 이 재앙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음을 확인해 주기 위하여 내일이면 파리 떼가 바로와 바로의 신하와 백성을 떠날 것이라고 약속해주었다(8:29). 이것은 재앙이 우연히 이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하나님은 모세의 말대로 파리 떼를 그들에게서 떠나게 하셨다.

한편, 이 재앙으로 인하여 사탄의 앞잡이로 이적을 행하던 애굽의 술객들도 곤욕을 치르게 되었다. 술객들은 비록 악령의 도움으로 자신들도 이적을 행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는 참 실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탄의 하수인들을 무력하게 하신 것으로 이제 하나님께서 직접 사탄에게도 그 권능을 행사하시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재앙이 거듭될수록 하나님의 편에 있는 백성과 사탄의 편에 있는 사람들과 구별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표징으로 주어진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재앙은 하나님의 권능을 친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자신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들과의 구별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건설할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규명한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 건설할 나라는 세상 나라와 그 성격이 다른 나라이다. 이스라엘은 이미 아브라함의 언약을 통해 그 나라가 바벨탑 사건 이후 혼돈과 무지로부터 구별된 신령한 나라임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장차 건설할 나라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해 통치되어지는 나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세상 나라와 그 존재 목적이 다른 독특한 나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출애굽기 9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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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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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주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

다섯 번째 재앙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소유인 생축과 애굽 사람들의 소유인 말과 나귀와 약대와 우양을 구별하여 애굽의 모든 가축들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었다(9:1-7). 처음에는 아무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던 재앙이 점차 사람들을 괴롭게 하는 재앙으로 발전되다가 마침내 애굽 사람들의 재산에 타격을 가하는 재앙이 시작되었다. 애굽 사람들의 소유인 가축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생명의 위협이 가해질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 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려 하지 않았다.

여섯 번째 재앙은 애굽 사람과 짐승들에게 독종이 생기는 것이었다(9:8-12). 이렇게 함으로 애굽 사람들 자신도 하나님이 내리는 재앙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심지어 술객들조차도 몸에 독종이 발하여 괴로움을 당하게 되었으나 바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일곱 번째 재앙이 내렸다. 일곱 번째 재앙은 지금과는 그 성격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타났다.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9:14)는 말씀과 같이 바로와 애굽의 모든 사람들에게 커다란 두려움을 가져다 줄 것이었다. 그것은 건국 이래로 그 유래가 없을 정도의 강력한 우박이 내릴 것이며 그 앞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기 위한 대책까지도 제시한 것이었다.

내일 이맘때면 내가 중한 우박을 내리리니 애굽 개국 이래로 그 같은 것이 있지 않던 것이리라 이제 보내어 네 생축과 네 들에 있는 것을 다 모으라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릇 들에 있어서 집에 돌아오지 않은 자에게는 우박이 그 위에 내리리니 그것들이 죽으리라”(9:18-19)는 말씀 속에는 애굽에게 임하는 재앙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결정만 하신다면 바로와 그의 백성을 언제든지 몰살할 수 있는 분이지만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도록 하기 위해 애굽에 재앙을 내리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지금까지는 바로의 교만으로 인해 애굽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재앙을 당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진정한 신임을 나타내기 위한 성격의 재앙이 내리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애굽 사람들이 원하기만 하면 재앙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즉 하나님께서 우박으로 들에 있는 생축을 죽일 것임을 미리 선포하고 누구든지 그 말을 따라 생축을 집에 들여놓으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그동안 하나님의 재앙을 당해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한 애굽 사람들은 모세의 말대로 생축을 집에 들여다 놓았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의 생축은 우박에 맞아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애굽 사람들조차도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에 특별한 권능이 있음을 재차 확인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로는 모세와 아론을 불러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여호와께 구하여 이 뇌성과 우박을 그만 그치게 하라 내가 너희를 보내리니 너희가 다시는 머물지 아니하리라”(9:27-28)고 다급히 구원을 요청했다. 비로소 바로의 마음이 급하게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이미 패색이 짙은 바로가 드디어 항복을 요청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바로의 마음이 여전히 강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모세는 내가 성에서 나가자 곧 내 손을 여호와를 향하여 펴리니 그리하면 뇌성이 그치고 우박이 다시 있지 않을지라 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 그러나 왕과 왕의 신하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아직도 두려워 아니할 줄을 내가 아나이다”(9:29-30)고 하며 재앙이 끝나면 바로가 변심할 것을 경고했다.

모세가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펴자 뇌성과 우박이 그치고 비가 땅에 내리지 않게 되었다. 바로는 비와 우박과 뇌성의 그친 것을 보자 다시 마음이 완강하여졌고 그 신하들도 마찬가지가 되어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다. 이렇게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이스라엘을 보내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만드셨기 때문이었다. 이 일에 대해 하나님은 바로에게로 들어가라 내가 그의 마음과 그 신하들의 마음을 완강케 함은 나의 표징을 그들 중에 보이기 위함이며 너로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들 곧 내가 그 가운데서 행한 표징을 네 아들과 네 자손의 귀에 전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10:1-2)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애굽에 계속해서 재앙을 내리심으로서 이스라엘 백성과 그 후손들이 어떻게 애굽으로 구원받았는지의 표징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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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 나라의 생존 원칙

이상과 같은 일련의 재앙을 통해 하나님이 우주적인 통치자임을 드러내셨다. 특히 애굽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말씀을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대로 따르게 될 경우 재앙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그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준다. 이로서 하나님의 권능은 이 땅에 사는 누구에게든지 그 효력을 나타내신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특히 애굽인 소유의 가축이 죽임을 당하고 우박으로 인해 농작물이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애굽 사람들의 생존과 깊은 관련이 있는 문제였다. 그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재산과 식물이 하나님에 의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생존에 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결정 여하에 달려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만큼 깊숙이 애굽 사람들의 생존의 문제에까지 접근해 있다는 것은 그리고 그 생존의 수단은 언제든지 하나님에 의해 유린되거나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생존의 여부가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반면에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생존을 보존해 주시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계속되는 재앙의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생존을 보호하시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길들여졌던 생존의 방식과 현격한 차이를 가져다 주었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바로의 압제 가운데에서 비인간적인 학대를 받아가며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게 됨으로서 그들은 바로의 학정에 시달림을 당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자신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그 보호 아래 있는 동안에는 바로가 주는 눈물의 양식이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그보다는 훨씬 강력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들은 자신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찾을 수 있는 생존의 원칙이다. 바로 아래에서는 바로의 요구에 따라 학대를 받아가며 생명을 구걸하여야 했지만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그 안에 안주(安住)하는 것만으로도 생존의 문제를 보장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차이점인 것이다. 이것이 세상 국가가 보장하는 생존과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생존의 방편에서 찾을 수 있는 차이점이다.

하나님은 지속되는 재앙을 통해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셨다. 이제 바로가 선택해야 할 최종 단계가 무엇인가는 분명해졌다. 곧 하나님의 요구에 다라 순응하는 것만이 그 앞에 놓여진 유일할 길인 것이다. 아울러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같이 요구되는 사항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바로의 편으로 다시 되 돌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보호 아래 거처를 정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출애굽기 10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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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국가와 구별되는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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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와 아론은 다시 바로에게 들어가 하나님께서 내리실 여덟 번째 재앙을 선포하였다. 이제까지는 하나님께서 바로를 상대로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셨지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가슴속에 새기기 위한 재앙이 바로와 애굽 땅에 내려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바로의 마음을 돌이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라는 성격을 가진 재앙이었으나 이제는 그 재앙의 성격이 완전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다(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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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분열되는 애굽의 권세

모세의 경고를 받은 바로의 신하들은 사태가 예전과 같지 않고 무언가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들은 바로에게 어느 때까지 이 사람이 우리의 함정이 되리이까 그 사람들을 보내어 그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게 하소서 왕은 아직도 애굽이 망한 줄을 알지 못하시나이까”(10:7) 하고 직언을 하였다. 그들은 서둘러 모세와 아론을 바로에게로 다시 데려왔다. 그러자 바로는 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갈 자는 누구 누구뇨”(10:8) 하며 마지못해 허락을 내렸다. 모세는 우리가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인즉 우리가 남녀 노소와 우양을 데리고 가겠나이다”(10:9)고 대답을 하였다. 바로는 내가 너희와 너희 어린 것들을 보내면 여호와를 너희와 함께 하게 함과 일반이니라 삼갈지어다 너희 경영이 악하니라 그는 불가하니 너희 남정만 가서 여호와를 섬기라 이것이 너희의 구하는 바니라”(10:10-11)고 한 후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고 말았다.

지금까지 진행된 재앙을 통해 바로의 신하들에게서 바로와 의견을 달리하는 변화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것은 바로의 왕국에 분란이 발생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절대 권력을 가진 바로에게 신하들이 항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바로의 통치력이 약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에 바로의 신하들은 재앙의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차원에서 바로의 거듭된 고집에 반기를 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 전개된 재앙이 우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심정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깃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의 궁정에 있는 측근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권능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은 상대적으로 바로의 권세가 약화되고 있다. 이것은 바로를 앞세워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려던 사탄의 궤계가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다.

바로의 마음이 여전히 강퍅하여 이스라엘의 자손을 보내지 않자 하나님의 재앙이 내렸다. “메뚜기가 온 지면에 덮여 날으매 땅이 어둡게 되었고 메뚜기가 우박에 상하지 아니한 밭의 채소와 나무 열매를 다 먹었으므로 애굽 전경에 나무나 밭의 채소나 푸른 것은 남지 아니하였더라”(10:15). 메뚜기의 재앙은 애굽 전역에 경제적으로 심각한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이제 애굽은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이것은 바로로 상징되는 세상 통치가 가져다 주는 극적인 결말을 예고하는 징조이기도 하다. 통치의 제일 원칙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인 것이다. 백성들의 생존을 보존하는 것이 통치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바로는 그의 백성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양식을 공급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은 바로의 통치의 한계를 보여준다. 이것이 세속 왕국의 한계인 것이다.

그러자 바로의 마음이 더 급해지기 시작했다. 바로는 황급히 모세와 아론을 불러 내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와 너희에게 득죄하였으니 청컨대 나의 죄를 이번만 용서하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 죽음만을 내게서 떠나게 하라”(10:16-17)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바로는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모세의 간구가 있자 여호와께서 강렬한 서풍을 불게 하여 메뚜기를 홍해에 몰아 넣으셨다. 그러나 하나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심으로 바로는 이스라엘 자손을 보내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는 이번 재앙을 통해 자신의 통치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바로의 신하들뿐 아니라 바로의 백성들마저도 더 이상 바로의 통치권 안에서 생존에 대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갈 때 상당수의 애굽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게 되었는데(12:38) 이것은 바로의 통치에 대한 한계를 그 원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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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

아홉 번째 재앙이 시작되었다(10:21-23). 그렇지만 이번 재앙은 예전과는 달리 바로에게 경고하지 않은 재앙이었다. 이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애굽 땅과 이스라엘 땅을 구별하여 애굽 땅에만 3일 동안 흑암이 있게 하신 것이었다. 이러한 이적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바로가 의지하는 신()들이 아무리 권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이적은 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바로는 더 이상 하나님과 대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한번 더 만용을 부려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것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10:24)고 하며 선심을 쓰고자 했다. 이것은 패전한 바로가 한 가닥 자존심이라도 건져내 보고자 하는 비열한 속셈을 담고 있다. 그러나 모세는 단호히 바로의 제안을 거부하고 나섰다.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희생과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우리의 생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 중에서 취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기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10:25-26)고 하며 오히려 바로로부터 하나님께 드릴 재물을 받지 않고서는 갈 수 없다고 하였다.

모세는 더 이상 바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막강한 권세를 가지고 있는 바로와 그의 군대라 할지라도 모세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비록 이스라엘 군대가 사람들의 눈에는 볼품 없이 보일지라도 만군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면 그 어떤 세력도 대적이 되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사실을 그의 백성도 알고 있었다. 이제 바로와 그가 자랑하는 막강한 군대는 더 이상 모세와 이스라엘의 대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진 것이다.

3일간의 흑암이 애굽을 덮은 반면에 이스라엘이 거주하는 땅에는 빛이 있었다는 것은 새로운 징조였다. 흑암은 죽음을, 빛은 생명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번 재앙은 암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곧 죽음과 생명, 생사(生死)의 문제가 그 안에 내포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가 통치하는 국가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국가의 근본적인 차이점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빛으로 상징되는 생명의 나라인 반면 바로의 세속 국가는 어둠으로 상징되는 죽음의 나라였다. 그 흑암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모세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매 캄캄한 흑암이 삼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그 동안은 사람 사람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이스라엘 자손의 거하는 곳에는 광명이 있었더라”(10:22-23).

흑암이 지배하고 있는 애굽 전역에서는 오직 정적만이 감사고 있었다. 사람의 움직임을 전혀 감지할 수 없을 정도의 정막함이 온 땅을 덮고 있었다. 살아있으나 죽어있는 것과 같은 죽음의 상태가 삼일동안 계속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곳에서 생명을 찾아 볼 수 없음을 보여준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여전히 빛 가운에 살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끊임없이 창조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창조하신 목적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1:26).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 행위의 연속적인 활동이 보장되는 나라이다. 그 안에서 백성들은 자신의 존재 목적에 따라 창조라는 문화 활동을 여전히 수행해 나갈 수 있다.

출애굽기 11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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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군대의 승리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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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애굽에 내리신 9차례의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임을 증거하셨고 반면에 바로는 재앙이 거듭될 때마다 패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계속 자신의 권세와 이권을 지키기 위해 애굽을 파탄으로 몰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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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

이즈음에 하나님은 마지막 재앙을 애굽에게 내리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보낼지라 내가 너희를 보낼 때에는 여기서 정녕 다 쫓아내리니 백성에게 말하여 남녀로 각기 이웃들에게 은, 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1:1-2). 말씀을 마치신 후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애굽 사람의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셨고 또한 모세는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와 백성에게 크게 보이게 해주셨다(1:3).

이로써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빈손으로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 사람들로부터 은, 금 패물을 구하게 하셨는데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군대가 전리품을 얻는 것을 상징한다. 이는 하나님과 바로와의 전쟁이 전리품을 얻고 있는 하나님의 승리로 끝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 전쟁에 참여했지만 그들이 한 일이라고는 하나님께서 바로와 그 세력을 어떻게 제압하시는가를 지켜보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군대로 세움을 받은 바 있다(7:4). 따라서 승리한 군대의 군사로 전리품을 얻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으로부터 나올 때 많은 재물을 이끌고 나온다는 것은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을 성취하는 여호와인 것을 증명하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의 약속을 잊지 않고 준행하는 분임을 다시 한번 입증하신 것이다.

여러 차례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이스라엘을 여전히 자신의 소유로 삼기 위해 하나님을 거역해왔지만 처음부터 바로는 하나님의 상대가 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모세는 바로에게 찾아가 최후 통첩을 고하기에 이르렀다(11:4-8). 모세는 하나님께서 바로와 애굽 사람들의 모든 장자와 모든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을 죽이실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동안 모세가 바로에게 경고한 9차례의 재앙이 하나도 어긋남 없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바로였으나 모세의 마지막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내보내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최후 결전의 대상으로 바로와 그 백성들의 장자를 죽이시는 것으로 결정한 것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장자는 한 가문의 기력(氣力)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바로의 장자는 애굽의 기력을 상징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를 치신다는 것은 애굽의 기력을 치심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애굽의 근본을 철저하게 무너뜨리게 되는 것이다. 애굽의 장자들이 죽는다는 것은 애굽의 결정적인 패배를 상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전쟁은 사탄이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하나님 나라와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제 장자를 치시는 것은 처음 지팡이로 뱀을 만드는 이적의 최종적인 결정판인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세력이 철저하게 하나님 앞에서 무너짐을 의미한다. 사탄은 결코 하나님과 동등한 세력이 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의 수하에 가두어 두기 위해 바로로 상징되는 애굽이라고 하는 세력으로 그들을 가두어 두고자 했다. 사탄의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에 돌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을 방해하는데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탄은 자신의 근본 세력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유월절은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고 반역한 세력에 대한 심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지금까지 진행된 재앙 역시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점차 그 농도가 짖어져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끝까지 승복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일을 늦추기 위한 소모전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이러한 사탄의 저항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하는 계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마침내 승리하고 그 전리품을 얻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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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이스라엘 군대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자의식을 갖는다는 것은 구속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께서 쉽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시지 않고 그들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할 수 있도록 10가지의 재앙을 내리신 것은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군대를 성숙하게 하기 위한 의도가 숨겨져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내려진 재앙을 통해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각성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하나님의 군대로서 거룩한 전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장차 가나안에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는 역사적 당위성을 재확인할 뿐 아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자기들의 손에 의에 성취된다는 시대적인 요청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15:13-14)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제 그 약속이 성취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군대로서 이스라엘이 충분히 성숙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친히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증표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마지막 재앙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 그들이 모든 사람과 생축의 처음 난 것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 상황에서 죽지 않고 살리움을 받는 근거는 이제 유월절 사건에서 명확하게 제시된다(12). 이것은 사탄과 그 추종자들인 세상 나라의 심판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 심판을 면한다는 외형적인 증표로 나타나는데 그 근거로 제시된 것이 유월절 양의 피였다.

유월절 양의 피를 예표하는 사건은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에서 찾을 수 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유업을 이을 실질적인 장자였으며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해 모리아 산에서 양을 제물로 받으셨다(22:13). 당시 자식을 신에게 제사로 드리는 관행에 익숙해 있는 아브라함으로써는 이삭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시는 하나님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고 이삭을 언약의 계승자로 세우시기 위해 이삭 대신 양을 받으시는 대속의 의미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은 이제 이스라엘의 장자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유월절 양으로 대신하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나아가 유월절 사건은 언약에 참여하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에 대한 신학적 근거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12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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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에 담긴 구속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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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사람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해 유월절을 행하게 하셨다(12:1-11).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유월절이 가지는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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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의 의미

첫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알리는 사건이다(12:2).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애굽의 속박 아래 놓여 있었다. 그동안 이스라엘은 애굽에 속해 있는 하나의 민족 단위로 밖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공적으로 자신들의 역사를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제정하며 그 달을 이스라엘의 원년으로 삼게 한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 단위로 출범하였음을 기념하기 위하였다.

처음 야곱이 70여명의 식솔을 이끌고 애굽에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하나의 가족 단위에 불과했던 이스라엘 족속이 이제는 한 민족을 이룰 뿐만 아니라 하나의 국가 단위로 정식 출범하고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더 이상 애굽의 부속물이 아닌 하나의 독립 국가로 태어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46:3)고 브엘세바에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성취되었다.

둘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단일 민족 공동체임을 알리는 사건이다(12:3-4).

어느 민족이나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역시 각 가족 단위로 구성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타의 민족은 각기 다른 가정들이 모아 민족을 구성하는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의 가정 자체가 그 민족을 구성하는 단위라는 점에서 독특하게 구별된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그 자체가 야곱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하나의 가정 단위이며 동시에 민족 단위이기도 하였다.

이 사실은 유월절 양을 나누어 먹음에 있어 각 가족대로 그 식구를 위해 어린양을 취하되 그 수가 부족하면 이웃과 함께 사람의 수를 따라 유월절 양을 취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 하나님은 한 가족 단위로 유월절 양을 취하기보다는 그 이웃과 연합하여 하나의 유월절 양을 취하게 하심으로서 이웃과 연합하여 전 민족이 하나의 가족이 되도록 연결하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 양을 통해 민족 전체가 하나의 가족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민족 단위가 하나의 거대한 가정 단위로 구성되고 있음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표시하고 있다.

셋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대속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12:5-7).

유월절 양의 피를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바르게 한 것은 유월절 양의 피가 그 집안에 있는 장남의 죽음을 대속하게 함으로써 더 이상 사망의 권세가 그 집안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일에 대해선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12:12-14)고 하신 말씀 속에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이스라엘은 유월절 양을 잡고 그 희생의 피를 내보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죽음의 사자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재앙의 대상으로 애굽의 사람 및 짐승의 처음 난 것뿐만 아니라 애굽의 모든 신들에게도 벌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서 유월절 양의 피로 대속되지 않은 것들은 그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계신다.

넷째, 유월절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성별되어 헌상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12:8-10).

유월절 양을 먹되 고기는 불에 구워 무교병과 쓴 나물과 아울러 먹어야 하며, 날로나 물에 삶아서 먹지 않고 하나도 남김없이 먹되 아침까지 남겨 두지 말고 남은 것은 불에 태우도록 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 순결한 신앙을 표하고 그 자신을 하나님께 철저하게 헌상해야 할 것을 상징하고 있다. 특히 남은 것을 불에 태운다는 것은 제사적 성격을 강하게 표시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후일에 하나님께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는 제사 정신을 정립하는 기초가 되고 있다. 특히 유월절 예식에 대한 말씀에서 유월절 제사’(12:26-27)라고 표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더 이상 원수 된 것이 없고 화목이 이루어짐으로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유일한 신()이 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됨을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위해 성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기 위해 세워진 제도가 무교절이다. 무교절은 유월절 제사를 마친 후 7일 동안 누룩이 없는 떡을 양식으로 먹는 절기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먹는 떡은 곡식 가루를 곱게 빻은 후 그것을 반죽하여 번철에 얇게 구워낸 것인데, 이 기간 동안에는 가루 반죽에 누룩을 넣지 않고 구워낸 떡을 먹도록 하였다. 무교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심을 기념하기 위한 절기로, 무교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경영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구별되었음을 확인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따라서 유월절 사건을 통해 죽음으로부터 구속되어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이 무교절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성별된 인생을 살아야 할 것을 다짐하기 위함인 것이다.

다섯째, 유월절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되었음을 알리는 사건이다(12:43-51).

출애굽 이후 하나님은 유월절 규례에 대하여 엄격하게 시행하되 할례를 받은 자만이 유월절에 참여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할례를 받지 않은 자는 절대로 유월절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게 한 것은 유월절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그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17:1-2)고 복을 주신 후에 언약을 세우셨다(17:3-8). 이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후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월절에 참여한다는 것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아브라함의 할례에 참여하지 않고서는 약속의 땅을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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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여호와의 최후 승리

유월절 예식이 있던 밤에 여호와께서는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들을 다 치심으로 사망에 던지셨다(12:29-30). 유월절의 피가 이처럼 생명과 사망으로 구별지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모든 처음 난 것들을 다 치셨다는 것은 애굽의 모든 기력을 꺾으시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애굽은 더 이상 하나님을 대적할 힘이 없게 되었다. 바로는 장자를 잃고 난 후에야 비로소 현실을 바라보게 되었다. 바로는 하나님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12:31-32). 애굽 사람들조차도 이스라엘이 빨리 떠나주기를 간청하고 나섰다(12:33).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전쟁의 승리자가 되어 애굽 사람들에게서 전리품을 얻은 후에야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애굽을 떠나 왔다.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되었다(12:37-40).

이로써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내며 그 고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큰 재앙으로 너희를 구속하여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6:6-7)고 선언하신 여호와의 약속이 성취되었다. “그 같은 날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그 군대대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더라”(12:51). 이제 이스라엘은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6:8)고 하신 여호와의 약속을 믿고 모세의 인도에 따라 가나안으로 행군하는 일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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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3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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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약의 성취로서의 출애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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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온 우주의 왕으로서 온 땅을 통치하시는 모습을 이 땅에 현저하게 드러내신 사건 중에서 그의 백성을 세상과 구별시키어 따로 불러내신 사건으로는 단연 출애굽 사건을 들 수 있다. 시편기자는 이 사건을 하나님의 일(the works of GOD"(66:4 이하)이라고 하면서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권능의 하나님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은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어떻게 경영해 나가시는가를 이 땅에 선포한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은 역사의 대전환점일 뿐만 아니라 특히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인생을 새롭게 한 전환점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신분은 애굽의 왕 바로의 노예였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변화되었다. 지금까지의 삶의 형태에서 전혀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전격적으로 변화되었다(이러한 변화는 신약에 와서 칭의라고 신학화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감상적이거나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이었다. 그러므로 이 변화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획기적인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처럼 출애굽 사건은 역사라는 실제적인 삶 속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변화의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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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월절에 참여할 사람의 자격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역사상에 전 세계를 대상으로 펼쳐진 유월절 사건에는 특별히 구별된 표징을 가지고 있는 사람만이 참예하게 되어 있었다. 유월절 규례(12:48-49)에 다르면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있었다. 비록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할례를 받지 아니하였으면 유월절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세우시면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이 이 언약에 참여한 백성이라는 증표로서 주신 표징(sign)이었다(17:9-14 참고). 그러므로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구별되어 불리움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이다. 따라서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되 또한 그 나라를 세워나감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현저하게 드러내어야 하는 인생의 목적이 분명하여야 한다. 때문에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비록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경영이 어떠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영원한 언약에 참여한 백성으로서 자신의 삶의 목적을 확고하게 세웠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유월절에 참예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은 사람들로서 최소한 인생의 목적과 인생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이스라엘이 최초로 애굽 땅에서 유월절에 참여할 때에는 최소한 하나님의 구원에 합당한 자격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유월절을 제정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비록 처음에 그들이 애굽에서 사는 것이 힘들어 하나님을 향하여 구원하여 달라고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그 즉시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시지 않으시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상세하게 보여주셨다. 열 가지의 재앙을 애굽에 내리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라는 지식을 이스라엘이 충분히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유월절에 참여할 때에는 이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자신들의 신분과 위치에 대하여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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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유월절 행사의 효과

유월절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들어있는 사람으로서 죽음에서 건지움 받아 새 삶을 시작하였음을 상징한다. 특히 유월절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생명을 보장해 주는 대신에 대속의 죽음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죽음에서 구속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으로서 그리고 진정한 자유인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13:1)는 하나님의 선언은, 이스라엘이 종으로 있던 애굽에서 자유인으로 해방될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 대신 애굽 사람들의 장자와 육축의 초태생이 모두 죽임을 당한 것을 기억하여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의 장자와 초태생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라는 당연한 요구이다.

유월절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곧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 대신 애굽의 생명을 대가로 요구하신 사건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장자와 육축의 초태생의 생명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그러므로 새생명을 얻어 유월절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장자와 초태생을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헌상의 의미를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 장자와 초태생을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구속의 결과로서 그들의 옛 생명이 새 생명으로 변화된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고 그 변화에 따라 진정한 생명의 가치를 발휘할 수 있는 특별한 위치에 오르게 된 신분으로서 마땅히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어야 함을 각성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 드릴 수 없는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영원한 언약의 백성들의 무리에서 버려진 사람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헌상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들어와 있음을 상징하고 기념하는 매우 독특한 자의적인 행사이다. 이처럼 헌상이란 하나님의 구속을 입은 사람이 자기를 기꺼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헌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가를 일깨워주는데 있어서 큰 역할을 한다. 과거 이스라엘은 전체를 하나님께 헌상한다는 의미로서 그들을 대표하여 레위 지파를 하나님께 헌상하였다. 그래서 레위 지파는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항상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 생애를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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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모세는 애굽을 떠나올 때 요셉의 유언을 따라 요셉의 해골을 취하여 나왔다. 이것은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케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필연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나의 해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13:19)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요셉은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실 것을 믿고 있었기에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날 때 자신의 유골을 가나안에 장사할 것을 유언하였다(50:25, 11:22).

하나님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갈 때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46:4)이라고 약속하신 말씀에 따라 (여기에서 로 지칭되는 인물은 제1차적으로 야곱을 지칭하고 있지만 야곱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대상으로 담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 친히 앞장서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어 가나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과 함께 길을 가신다는 사실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증거하셨다(13:20-22).

이스라엘은 그들의 눈으로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볼 때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며 약속의 땅으로 향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대강 가나안으로 가라고 지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구원 사역을 끝내지 않고 한 발자국씩 그의 백성이 나아가야 할 행보를 친히 보여주시는 분이다. 특히 광야에서 여행길은 낮의 더위와 밤의 추위가 여간 고통스러운 장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가나안을 향해 가는 길에서 더위와 추위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나님을 신앙해야 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계시적 사건이기도 한다.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가는 길에 있어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동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4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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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사건의 구속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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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이름을 알린 사건

출애굽기 14장에서 홍해 사건의 의미를 몇 가지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홍해 사건은 하나님께서 여호와이심을 만방에 알리는 사건이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 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리라”(14:4)는 말씀과 같이, 마음이 강포해진 바로가 열 가지의 재앙으로 말미암아 애굽이 초토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또 다시 이스라엘을 자기의 종으로 만들기 위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쫓아 홍해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세계사에 있어서 최강을 자랑했던 바로의 막강한 군대가 하나님의 입김으로 한 순간에 홍해 속에 수장되고 말았다. 당시의 바로의 세력은 전 세계를 대표할 만큼 크고 웅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사건을 통하여 전 세계는 아무도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이 여호와이심을 만방에 알리셨다. ‘여호와라는 성호는 특별히 구속과 연관지어 구속받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을 상대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에 사용하시는 성호이다. 곧 하나님은 언약의 성취자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이름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 이름과 같이 언약을 성취하시는 분이심을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만방에 알리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것에 대하여 이미 400년 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 있다. “내가 너의 후손들을 애굽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한 뒤에 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겠다”(15:13-16 참고)는 약속을 마침내 홍해 사건을 통하여 성취하신 것이다.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심을 이스라엘과 만방에 선포하셨다.

둘째, 홍해 사건은 하나님이 절대 주권의 행사자이심을 보여준 사건이다. “너희는 두려워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또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하리라”(14:13)는 말씀 속에서 보듯이 홍해 사건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실제적인 사건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행위가 역사 안에서 실제로 등장하는 사건이다. 따라서 홍해 사건 속에는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는 실제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하시되 직접 역사 속에 개입하시어 당신의 권능을 행사하시는 사건으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강력하게 나타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처럼 하나님의 경륜이 어느 특정한 순간에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라 할지라도, 그 사건의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하지 않으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의 행사와 구원 사역을 발견하여 자신이 그 능력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릴 수 없다. 이스라엘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 속에서 강하게 행사되어지는 홍해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이스라엘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전 역사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의 나라를 역사해 나가시는가 그리고 운영해 나가시는가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인식이 있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해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는 말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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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의미

지금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진멸하기 위하여 달려오는 애굽 군대와 앞으로 더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게 버티고 있는 홍해 앞에 서 있다. 그래서 살기 위하여 홍해를 건너고 싶어도 도무지 건널 수 없는 심각한 위기 가운데 빠져 있다. 따라서 그들이 홍해를 건널 수 없다는 것은 애굽 군대의 손에 죽음을 당해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처해 있음을 의미합니다. 때문에 홍해 앞에서 발이 묶여 있는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운명이 위태하다는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들의 운명에 대하여는 누구나가 그 정도는 느낄 수 있다. 누구나 죽음에 직면하면 상당한 위기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여기에서 이스라엘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것과는 다른 면에서 심각한 위기감을 느껴야 한다.

이스라엘을 진멸하기 위해 맹렬하게 돌진해 오는 애굽이라는 세력은 약소 국가를 침략자의 도탄에서 건져내기 위한 정의의 군대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상을 정복하여 지배하기 위해 꿈꾸는 독재자의 허황된 침략군도 아니다. 이 애굽 군대는 하나님께서 자기 소유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또다시 자기의 손아귀에 집어넣고 종으로 삼기 위해 달려오는 반신국적인 세력이다. 하나님의 경륜에 정면 대적하는 바로의 군대는 따라서 단순한 세속 국가의 세력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나라를 반역하는 사탄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잡기 위해 달려오는 애굽 군대를 보고 무서워하고 어떻게든지 살아보겠다고 수단과 방법을 찾기보다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저들의 손에 의하여 유린당하게 된다는 심각한 위기 의식을 느껴야 한다. 이러한 위기 의식을 느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경영 안에 참여시킨다는 증거로서 애굽의 군대에서 구원하신다. 이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에 대하여 바르게 인식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홍해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적같이 애굽의 군대에게서 죽음은 면했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똑같이 홍해 앞에서 살아났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경영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권능의 손을 체험하고 자신의 존재 위치와 의미를 깨닫는 사건이 되며, 어떤 사람은 기적적인 사건으로만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구원을 체험한 사람들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정당한 신앙을 표명함으로써 구원의 신앙으로 나아가게 되고, 반면에 하나의 기적으로만 체험한 사람들은 항시 기적적인 요소만을 강조하는 기적 신앙을 추구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자기들의 인생을 경영하다가 죽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홍해에서 구원하신 것은 이 땅에 하나님의 힘을 과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무언가 특별한 것을 바라시는 것이 있으셔서 그들을 절대절명의 순간에 죽음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그것은 그들이 역사 속에서 성취하여야 할 역사적인 사명이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특별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요구하시는 사명이 있기 마련이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고 방해하는 적대 세력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세력으로부터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경영해 나가시는 일에 그들이 직접 참여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은 죽음 앞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역사의 경영에 직접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이 과정에 있어서 하나님은 각 사람을 개인적으로 부르시되 한 무리를 부르시어 함께 협력하고 격려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도록 하셨는데 그들의 공동체가 바로 교회이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이 애굽이라는 세속 세력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고 죽지 않은 것을 가지고 위안으로 삼을 것이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경영 속에 참여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역사 속에서 성취해 나간다는 역사적인 사명 때문에 기뻐하여야 할 것이다. 때문에 구원에 참여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특별한 시대적인 사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4-6)는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출애굽기 15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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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롭게 건설되는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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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해 사건을 통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하신 의도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는 노래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주께서 주의 큰 위엄으로 주를 거스리는 자를 엎으시나이다 주께서 진노를 발하시니 그 진노가 그들을 초개같이 사르니이다”(15:6-7). 이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애굽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여러 차례 밝혔듯이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인이심을 만방에 선포한 것이 바로 홍해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의도를 비로소 깨닫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인도하시기까지 그 어떤 세력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주께서 그 구속하신 백성을 은혜로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성결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열방이 듣고 떨며 블레셋 거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에돔 방백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거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놀람과 두려움이 그들에게 미치매 주의 팔이 큼을 인하여 그들이 돌같이 고요하였사오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이 통과하기까지 곧 주의 사신 백성이 통과하기까지였나이다”(15:13-1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홍해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가시는 길에는 아무런 방해 세력도 있을 수 없다는 것과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마침내 성취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것을 그의 백성에게 계시하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이스라엘은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 여호와여 이는 주의 처소를 삼으시려고 예비하신 것이라 주여 이것이 주의 손으로 세우신 성소로소이다 여호와의 다스리심이 영원무궁하시도다”(15:17-18)라고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 기업의 산에 주의 백성을 심으신다는 말은 매우 의미심장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사랑하시는 백성을 에덴 동산에 두실 때의 장면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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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덴의 회복을 상징하는 출애굽 사건

여호와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 사람을 생령이 되게 한 후 사람이 거할 처소로 아름다운 에덴 동산을 만드셨다. 사람이 거하기에 가장 알맞은 곳으로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을 만드신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여 창조의 목적을 완수하는데 있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런 점에서 에덴 동산은 사람을 위해 적합하게 마련된 장소였다.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심으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2:8-9).

그런데 모세는 본문을 기록하면서 마치 아담을 에덴 동산에 심으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할 만한 사상이다. ‘그 지으신 아담을 거기 두시고라는 말은 에덴 동산에 그 아담을 심으시고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인생을 가장 온전하게 발휘할 수 있는 처소로써 에덴을 주신 것이다. 불행히도 아담은 그 땅에서 범죄하여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새로운 민족으로 형성하게 한 후 약속의 땅으로 그 후손들을 불러들이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마침내 이스라엘 후손들이 홍해를 건너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모세는 주께서 백성을 인도하사 그들을 주의 기업의 산에 심으시리이다”(15:17)라고 노래하고 있다.

따라서 홍해 사건은 여호와의 구속을 받은 이스라엘 후손들이 그 조상 아담이 범죄하여 상실한 에덴 동산으로 되돌아가게 되었음을 예표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기업의 동산에 심으실 것이라는 사상은 다윗 왕국이 건설되고 난 후 시편 기자에게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열조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저희가 우리에게 이르매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주께서 주의 손으로 열방을 쫓으시고 열조를 심으시며 주께서 민족들은 괴롭게 하시고 열조는 번성케 하셨나이다”(44:1-2.)라고 노래함으로써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 심으셨다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상은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80:8)고 노래하는 곳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 사상은 좀더 발전하여 이스라엘이 범죄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그 땅에서 쫓겨남을 예언하던 예레미야에게서 새롭게 나타나게 된다. 예레미야는 선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잠시 동안 바벨론으로 잡혀갈 것을 예언하며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그의 백성을 다시 약속의 땅으로 불러오실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날에는 하나님의 신()을 그의 백성에게 부어 주어 다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이며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 자기들과 자기 후손의 복을 위하여 항상 나를 경외하게 하고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32:38-41). 이 날에 하나님께서 세우실 언약은 그의 종을 통해 그의 백성에게 성령을 부어줌으로서 체결될 새언약이었다(31:31-34 참고). 이 새언약에 대한 예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화목을 이루게 하여 오순절에 성령이 그의 백성에게 임하게 됨으로서 성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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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례와 법도를 주신 이유

이처럼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기업에 심기우는 것과 동일하게 언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에 에덴 동산을 만드시어 그곳에서 아담이 하나님과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살 수 있게 하셨던 것처럼, 이제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 이스라엘을 인도하시어 그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의 참된 목적을 이루며 살게 하신 것이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이미 명백하게 밝혀진 것처럼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가 구현되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러한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에덴 동산과 같이 가나안에서도 모든 여건을 완벽하게 갖추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 나라에 들어가 살기 위해선 먼저 이스라엘이 점검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 에덴 동산과 같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수행함에 있어 완전한 곳인 반면에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일에 있어서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곧바로 가나안 땅으로 불러들이지 않고 광야 길을 가게 하심으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훈련을 받도록 하셨다. 이것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지극한 배려에서 나온 결단이었다. 지난 430년 동안 애굽의 종으로 살아오던 이스라엘 후손들이 하루아침에 자유인이 되었다고 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세상 나라와는 달리 고상한 문화를 건설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아시고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결단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여 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마라에서 쓴 물을 먹은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신 말씀 속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마라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신 후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15:26-27)고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율례와 법도를 세우신 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약속의 땅에서 인생의 본분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에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세운 율례와 법도가 어떤 것인가는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지만 후에 시내 산에서 성문화하여 주신 율법의 전신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출애굽기 16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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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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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홍해를 건너 광야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여 마라와 엘림을 거쳐 신 광야(wilderness of Sin)에 도달했다. 이 때가 애굽에서 나온 지 한달 만인 제 215일이었다(16:1). 그동안 이스라엘은 물샘 12개와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엘림에서 상당한 시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애굽에서 급하게 나온 이스라엘은 엘림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하며 거친 광야 길로 피곤해진 심신을 풀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기 위한 마음의 각오를 새롭게 하였을 것이다.

하나님은 휴식이 끝난 이스라엘을 인도하여 시내 산 근처 신 광야(Wilderness of Sin)에 이르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미 마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규범으로 법도와 율례를 제정해 주셨는데, 이제 엘림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게 한 후 그들을 인도하여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광야로 가게 한 것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지 1개월이나 지났기 때문에 길양식으로 가지고 온 대부분의 양식이 떨어지게 된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필요로 하는 양식을 공급받을 수 없는 상태의 광야로 인도해 가신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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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생의 주체는 누구인가?

엘림에서 평안히 살다가 갑자기 광야로 나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친 생활 환경을 의식하고 그들 사이에 먹어야 산다는 생리적 욕구에 대한 불안이 일기 시작했다. 사람에게 있어 양식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한 기본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양식이 확보되지 않았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로 사람들에게 작용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는 애굽에서의 생활의 방편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살아 온 방법과 다른 삶을 경영하기 위함이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건설함으로써 인생의 본분을 완수한다는 인생의 목표까지 확인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들이 부딪힌 문제는 인생의 본분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대한 고차원적인 문제가 아니라 당장에 먹을 것이 없다는 생리적 욕구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이 인생의 본분을 수행함에 있어 생존에 필요한 생리적 욕구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문제이다. 생존을 위한 생리적 욕구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생의 본분을 수행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인생의 사명을 부여하실 때 그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생존에 필요한 제반 여건을 충분히 갖춘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신 것이다.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생존을 위해서 아무런 염려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의당히 필요로 하는 모든 생활 여건을 갖추어 주신 후에 인생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는 분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도 그들이 광야에서 살아나가기 위해서 양식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들은 살아야 할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원시적인 욕구에 앞서 인생의 목적이 분명히 서 있던 사람들이다. 따라서 지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약속의 땅으로 가는 도중에서 갑자기 생존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양식에 대한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은 전혀 예기치 못한 문제였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하여 가나안에 들어가 새나라를 건설할 것을 인생의 사명으로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으로서는 기본적으로 양식에 대한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원망을 하고 있는 동안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들 곁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언제나 있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문제는 심각한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생존에 필요한 원시적 욕구에 부딪히게 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의지하기보다는 자기들이 인생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해 보겠다고 나서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하나님은 마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법도와 율례를 주신 사실이 있다. 그 내용은 후에 시내 산에서 명확하게 법조문으로 밝혀진 것처럼 전심으로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아야 할 것을 그 정신으로 가지고 있다(15:26). 따라서 여호와의 법도와 율례를 가진 백성으로서 의당히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을 경영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삶의 궁극적 모습으로 새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가나안으로 가고 있다면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인생의 주체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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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만나를 주신 의미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을 모아놓고 친히 그들의 양식을 책임지겠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의당히 그의 백성에게 생존의 보장을 책임지겠다고 공히 선언하는 장면이다(16:11-12).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그 백성에게 알리셨다. 따라서 인생의 주체는 이스라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다시 한번 일깨우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배불리 먹을 수 있었고 아침에는 만나를 걷어 하루의 양식을 삼을 수 있게 되었다. 모세는 만나를 가리켜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하신 양식이라”(16:15)고 선언한 후 각 사람의 식량대로 만나를 거두되 각기 사람의 수대로 매 사람마다 한 오멜씩 취하도록 하였다. 사람들은 모세의 말을 따라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원리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한다. 어떤 사람이든지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양식을 공히 공정하게 주셨다는 것은 그 나라의 통치 이념이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우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한다. 이러한 통치 체제야말로 가장 고도한 정치이다. 모든 백성이 골고루 자기의 필요에 따라 양식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나라가 안정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 날 거둔 양식은 그 날에 모두 소비하고 다음날까지 남겨두지 못하게 하였다. 만일 만나를 다음날까지 남겨두면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심하게 나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그의 백성의 양식을 책임져 주신다는 사실을 신앙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일 매일의 양식을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을 신앙하지 못한다면 만나를 한꺼번에 많이 거두어 보관하고자 할 것이다. 따라서 만나를 하루치만 거두게 하고 남은 것은 다음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지 못하게 함으로써 당일에 필요한 양식 외에는 더 이상 보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애굽에서 나와 한달 만에 생리적 욕구의 지배를 받아가기 시작하는 이스라엘에게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신 사건이 바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일이다.

이런 점에서 만나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첫째, 매일 해결해야 하는 생존의 욕구에 대한 문제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존하여 매일의 삶을 경영한다면 궁극적으로는 생존에 필요한 그 어떤 일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만나는 이스라엘의 인도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넷째, 만나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도와 율례를 따라 사는 자만이 약속된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만나를 매일 거두어 양식을 삼을 수 있는 것과 안식일에는 전날 거둔 만나만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은혜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불순종하게 되면 더 이상 만나를 먹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매일 만나를 먹게 됨으로서 인생의 본분은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를 지키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고 그 최종적인 모습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안식에 참여한다.

출애굽기 17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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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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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은 신 광야(Wilderness of Sin)를 떠나 남쪽으로 이동하여 시내 산에 가까운 르비딤에 도착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장정이 60만 명 가량이고 중다한 잡족이 따라 나와 전체 인구는 300-400만 명에 이르고 그와 함께 양과 소와 심히 많은 생축이 여행하고 있었다(12:37-38). 이처럼 많은 수의 사람들과 생축이 한 달이 넘도록 광야 길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에게는 식수와 식량이 가장 큰 문제였다. 또한 언제 있을지 모를 외적의 침입에 대한 대책은 큰 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신(Sin) 광야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아침과 저녁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심으로 양식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식수나 외적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는 문제만은 그리 간단하게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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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비딤 사건에 대한 해석

광야 길을 여행함에 있어 식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이 애굽을 떠나 가나안을 향해 가는 노정은 이스라엘 민족이 새롭게 정착할 땅을 얻기 위해 집단 이주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그들은 애굽에서 있었던 바로의 학정에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고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정도의 박해를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처지에 빠져 있던 그들이 애굽을 나오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기억하여 바로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심으로 떠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의 생존에 대한 모든 문제를 하나님께 의지하고 애굽을 떠나왔음을 의미한다.

특히 기억할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역사적인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고 가나안에 들어가 그 언약에 근거하여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 불림을 받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을 가지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의 탁월한 영도력을 믿고 애굽을 떠나온 것이 아니었다. 또는 애굽에서 살기 어렵기 때문에 해방운동을 일으키고 자기들의 나라를 건설해보자는 일념을 가지고 자기들의 의지로 애굽을 떠나온 것도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고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실 분은 하나님 자신이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돌아가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할 것에 대해선 이미 400여 년 전부터 명시되어 있었고, 이제 그들은 역사적인 요청에 따라 가나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시고 가나안으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확인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르비딤에 도착하자마자 먹을 물을 달라고 모세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한 것은 백성의 마음 속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고의적으로 문제를 야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모세도 백성의 의도를 간파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먹을 물이 없어 이 사건이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일종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왜 여호와를 시험하느냐고 백성을 나무라고 있다(17:2).

이스라엘이 모세에게 먹을 물을 공급하라고 주장하고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음모가 숨겨 있다는 점을 성경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모세는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므리바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해를 달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모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17:7). 모세는 므리바 사건의 성격에 대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께서 과연 그들 중에 함께 계신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규정짓고 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찾아와 물을 달라고 요구하고 나선 그 이면에는 과연 여호와께서 늘 자기들과 함께 하시며 자기들을 약속의 땅에까지 책임지고 인도해 가실 수 있는 분인가 아닌가를 시험해 보기 위해 물을 구할 수 없는 므리바에 이르러 물을 만들어 내라고 요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의도는 장차 가나안에 이르기까지 숱한 어려움이 닥칠 것인데 어느 순간에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포기하고 떠나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의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을 불신하고 나아가 야곱에게 약속하신 말씀(46:3-4)을 불신하는 행위인 것이다.

모세는 저급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더 이상의 변론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생존의 욕구 문제를 들고 일어선 백성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불신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인생의 본분을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세는 다급히 여호와 하나님을 찾아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하겠나이다”(17:4)고 하며 백성의 문제를 고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호렙 산의 한 반석을 지시하신 후 이스라엘 장로들 앞에서 지팡이로 반석을 치게 함으로써 그곳에서 물이 나오게 하여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먹을 수 있는 물을 공급해 주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저급한 수준에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불신하는 문제들을 치유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처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저급한 수준에 맴돌고 있는 것을 개의치 않고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심으로서 더 이상의 의심과 불신이 싹트지 않도록 배려해 주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을 한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한번 발견하게 된다. 끝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어린 상태를 돌아보고 그들이 조금씩 장성할 수 있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실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하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어 먹고 반석에서 물을 길어 먹음으로서 하나님께서 언제나 자기들과 함께 계심과 자신들의 생존을 철저하게 보호하는 분이심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구원해 내신 하나님에 대한 신개념을 조금씩 세워나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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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는 이스라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은 이 사건 이후에 아말렉의 침공 사건에서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여행하고 있어 지쳐 있었고 많은 노약자와 아낙네들과 어린이들이 함께 있어 제대로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아말렉의 침략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외적의 침입을 받을 경우 방어력이 약하기 때문에 대책을 세우기조차 어려운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이 상황은 앞서와 같이 집단적인 시위를 통해서도 해결될 수도 없고 무슨 수를 쓰던지 적을 물리치는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절대 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이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한번도 전쟁의 경험이 없었다. 더욱이 애굽에서 노예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자치적인 훈련도 되어 있지 않은 오합지졸과 같은 형편이었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전투에 임한다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상식 밖의 행동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말렉을 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결국 아말렉의 침공 사건은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라기보다는 여호와의 승리였음이 명확하다. 이 사실은 모세뿐만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인정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언제나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어떤 대적이 오더라도 능히 이스라엘을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한 셈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과연 자기들과 함께 하시겠는가 하고 의심할 정도였다. 아말렉이 약탈해 올 때는 자기들의 능력으로 대책을 세우지도 못할 만큼 열악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능히 아말렉을 물리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출애굽기 18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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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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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은 점차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장성하게 되었다. 애굽에서의 재앙과 유월절 사건을 통해 여호와께서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고, 홍해 사건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왕이심을 확인하였고, 마라에서는 여호와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고 돌보시는 분이심을 체험했으며, 신 광야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임을 알게 되었고, 므리바 사건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은 그들 중에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임을 재차 확인했으며, 아말렉 사건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진정한 보호자가 되심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진행되는 과정을 통해 애굽의 노예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던 이스라엘이 점차 조금씩 장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쌓게 되고 여호와를 정당하게 섬기는 훈련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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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광야 생활이 주는 의미

사건이 있을 때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구원에 대해 의심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하는 악을 행했으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상대로 화를 내거나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불러내어 약속의 땅에 인도함으로써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겠다는 의지가 얼마나 단호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일이기도 한다. 그처럼 하나님에 대해 거부하고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인도하시며 그들이 점차 장성하여 하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갖고 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열심은 그 어느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이었다. 이러한 데에서 구원의 사역은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임을 확인할 수 있다.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이 바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혹독한 광야 생활을 경험하게 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연단시키셨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을 연단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특히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례와 법도를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하나님은 고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혹독한 삶의 환경 가운데서 고통을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생사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고 하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삶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보장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생존이 보장되지 않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벗어나고자 시도한다면 그것은 곧 죽음에 이르는 길이었다. 따라서 광야 생활은 생과 사의 긴장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인 율례와 법도를 순종할 것인가 아니면 불순종할 것인가를 시험하는 과정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의지할 것인가를 판가름해야 하는 기로에서 어느 길을 택할 것인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시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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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의 체제 정비

애굽을 나올 때의 이스라엘은 군대나 혹은 국가 체계로서 아무 것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시내 산에 도착할 때가지만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단지 거대한 민족 공동체일 뿐이지 아무런 체제도 갖추지 못한 집단에 불과했다. 거기다가 애굽에 있는 동안 바로 밑에서 함께 부역하던 많은 이방인 집단까지 있어서 이것은 순수한 이스라엘 단일 민족이라고 할 수조차 없을 정도였다. 단지 아말렉이 침략해 올 때 일시적으로 군사를 소집하여 명목상 군대라는 집단을 형성하기는 하였으나 이 군대는 군사적 경험이나 훈련이 전혀 안되었고 무장도 갖추지 않은 그야말로 사람들의 무리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처 시내 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조직체로서의 면모를 아직 갖추지 않은 상태였다. 이때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동반하여 찾아왔다. 이드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어떻게 구원해 내시고 광야 길을 인도해 오셨는가를 상세히 듣고 여호와는 모든 신보다 크시다고 감탄하며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마침 이드로는 모세가 하루종일 이스라엘 백성의 송사를 일일이 판단하는 것을 보고 모세와 백성이 필경 지쳐 기력을 쇠하게 될 것을 경고하며 율례와 법도를 백성에게 가르쳐 백성으로 하여금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알게 하는 일에 전심하라고 충고해 주었다. 아울러 백성 가운데 재덕을 겸비한 자들을 선택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워 그들로 하여금 백성의 송사를 담당하도록 조언해 주었다. 모세는 이드로의 충고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백성 가운데 자격을 갖춘 사람들을 선택하여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들을 세워 백성의 일을 돌보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스라엘은 일종의 국가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지금까지 아무런 체제도 없이 집단 공동체로 살아 온 이스라엘이 아직 완벽한 국가 체제를 갖춘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실용적인 형태의 체제를 정비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백성의 지도자들이 갖추어야 할 자격이 거론되는데 그 첫째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fear God) 자여야 하며, 그 다음에는 진실하여 불의한 이(, dishonest gain)를 미워하는 자들로 백성의 지도자를 삼았다.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하나님을 우선으로 하는 신본주의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세속 국가와는 차원이 다른 양상의 체제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원칙은 단순히 이스라엘 공동체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라 역사 이래로 모든 통치 체제에서 필요한 지도자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등장한다. 즉 모세는 하나님의 통치를 이행하는 중보자로 이스라엘 백성 앞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하나님 앞에서 가지게 되는 정통적인 가치관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스라엘 통치자의 자격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고 뇌물을 받지 않는 자로 규정되었다(18:21). 그리고 그들이 백성을 통치하는 기준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곧 하나님께서 주신 율례와 법도를 따라 다스리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 말씀의 사역자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율례와 법도는 시내 산에서 언약 형태로 재정립되어 나타난다.

여기에서 중시할 것은 이 율법이 광야 생활과 연관되어 주어졌다는 점이다. 광야 생활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순종의 단련 기간이다. 따라서 광야 여행 초두에 율법을 주셨다는 것은 장차 발생할 광야 여행의 본질과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율법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의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실제로 신 광야에서 만나를 주시고 므리바에서 생수를 주신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제시한 사건이었다. 즉 인생의 주체는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에서 이스라엘의 진정한 존재 의미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율례와 법도를 가르치는 일은 이스라엘 지도자가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할 직무인 것이다(18:20).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을 고백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하나님의 통치를 받도록 인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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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9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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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우신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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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3개월이 지나 시내 산에 도착했다. 이 기간동안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훈련하기에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광야 생활에서 경험한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유이며 따라서 하나님에 의해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되 자신들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민족 공동체로서 역사적인 사명을 수행한다는 의식과 함께 하나님을 신앙하는 길만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자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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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약으로서 주어진 율법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4-6)는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이 담겨 있다.

첫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이다.

이미 이 세상은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 그럼에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굳이 이스라엘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실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스라엘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특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는 절대 소유격은 단순히 그 소유주와 소유물과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소유주가 누구인가를 밝힘으로서 그것은 최상의 가치를 담고 있을 밝히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를 의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보배(보물)가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스라엘을 소중한 위치에 두심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언약의 당사자로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전제로 하였다.

둘째,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나라이다.

제사장의 나라’(םינהכ תכלממ)라는 단어는 제사장들의 나라’(the kingdom of priests)라는 뜻으로 이는 이스라엘이 제사장들로 구성되어 있는 왕국이라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제사장들로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는 뜻이다. 하나님 앞에서 제사장직은 당연히 왕직과 선지자직 등 삼중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노아와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예수님에게서도 동시에 발견된다.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본문을 인용하면서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고 함으로써 제사장 나라왕 같은 제사장()’(royal priesthood)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제사장임과 동시에 왕권을 소유하며 또한 선지자로서의 특별한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셋째,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다.

거룩한 백성에 대한 개념은 모세의 강설 가운데 몇 가지의 의미가 포함되어 사용되고 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다”(7:6)는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기업을 받을 구별된 백성임을,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라 무릇 스스로 죽은 것은 먹지 말 것이니 그것을 성중에 우거하는 객에게 주어 먹게 하거나 이방인에게 팔아도 가하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에 삶지 말지니라”(14:21)는 말씀에서는 하나님을 위해 특별하게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하나님의 심정과 같은 윤리적, 도덕적인 인격을 소유한 백성임을,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 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26:18-19)는 말씀에서는 모든 민족들 위에 최고의 명예와 영광을 누리는 특권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더욱 발전되어 사람들이 너를 일컬어 거룩한 백성이라 여호와의 구속하신 자라 하겠고 또 너를 일컬어 찾은바 된 자요 버리지 아니한 성읍이라 하리라”(62:12)는 이사야의 선언과 같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의 대상자로서의 특별한 존재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차원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시며 구원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의 장로들과 모든 백성이 일제히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19:8)고 응답했다. 이에 하나님은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옷을 빨고 몸을 성결케 하게 한 후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 산에 임하시어 백성과 언약을 체결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9:9-15). 제 삼일에 여호와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보는 앞에서 시내 산에 임재하셨다(19:16). 하나님은 친히 백성이 보는 앞에서 모세와 말씀을 나누신 후 모세를 시내 산으로 불러 올라오게 하셨다.

모세는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섰고 하나님은 백성과 맺을 언약을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 사이에 영원한 언약이 세워지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십계명과 율례에 나타나 있다(20-23). 이처럼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과 규례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로 대우를 받고 있음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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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율법의 역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여 세상과 별도의 나라를 건설하게 하고 그들에게 삶의 준칙으로서 율법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민족을 역사상 특별한 사명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부르신 목적은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5-6)는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 이 말씀 속에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특별한 경륜 가운데 통치를 받고 하나님의 경영(οικονομια) 안에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에 쓰임 받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특별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택하였음을 분명하게 밝히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언약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한 소유로 삼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하여는 제사장의 나라가 되며 세상 모든 민족들보다 특권을 누리는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일에 쓰임을 받기 위하였다.

이 일을 완수하기 위해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가 인류 역사 앞에 독특한 존재 의미가 있음을 인식하고 그 일에 참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것인가를 명확하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율법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과 제사장 나라로 세워진 것과 거룩한 백성이 된다는 것에 자신들의 민족적 존재 의식을 두어야 한다. 여기에 민족의 사활을 걸고 모든 이스라엘 족속이 각기 그 안에서 자신들의 인생을 충실히 경영해 나가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민족적 성격을 띠게 되는 것이고 이것은 나아가 세계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이정표로 후세대의 후손들에게 영원한 빛으로 남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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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0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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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 언약으로서의 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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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12:1-3)을 유업으로 받은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애굽에서 불러내시어 아브라함의 언약에 근거한 새나라를 약속의 땅 가나안에 건설하고자 하셨다. 그 일을 위해 선택된 이스라엘은 세속 국가에 속한 백성과 구별되어야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건설하고자 하신 나라를 현저하게 나타낼 수 있는 성격을 담은 계명과 규례(20-23)를 율법으로 그의 백성에게 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새로운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제정하시고 그들에게 율법이 요구하는바 의무를 강제로 요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세우신 율법은 장차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새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인데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누릴 복의 성격을 제시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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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내 산 언약의 구속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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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언하기를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4-6)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19:8)고 응답한 후에 비로소 이스라엘을 상대로 새로운 언약을 체결하기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새롭게 언약을 체결한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더욱 확대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을 상대로 직접 언약을 체결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아브라함을 언약의 대상자로 인정하고 그의 신앙을 이어받은 후손들을 상대하셨으나, 이제는 하나님 자신이 아브라함 안에서 이스라엘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대상으로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아브라함의 언약에 속한 언약의 후손으로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왔으나 이제부터는 이스라엘 백성이 직접 언약의 당사자로 하나님 앞에 서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건설할 새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실 하나님의 나라로서 그 나라에 속한 백성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통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선을 그어 보여주시기 위해 이스라엘과 직접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19:5)이라는 단서를 단 것이다. 즉 여기에서의 내 언약은 이미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맺어진 언약을 의미하기보다는 이제 하나님께서 선포할 새로운 언약(20-23)을 의미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정하여 주신 율법과 규례는 하나님의 직접 통치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헌법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상대로 직접 언약을 체결하심으로서 언약의 대상자로 특정한 집단의 대표를 상대하지 않고 언약에 참여할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직접 언약을 체결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새롭게 언약을 체결하고자 한 것은 이전의 언약과 같이 언약의 당사자들이 대표를 통해 하나님과 간접적으로 언약 관계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직접 언약 당사자로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이 사상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나타날 거대한 변혁을 예고하는 것으로 창조주이신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인 그의 백성과 직접 긴밀한 교통을 이루게 되는 성령 충만의 상태로 발전하게 된다. 이러한 신과 인간과의 동질의 관계성은 인류 역사상 어떤 종교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사상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직접 언약을 체결하시는 시내 산 사건은 언약의 대상자들을 상대로 직접 하나님께서 언약을 체결한다는 의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이스라엘 백성이 신격(神格)을 갖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고상한 수준에 이르게 됨으로서 하나님과 직접 교통을 나누기 위한 배려이며, 이것은 나아가 하나님과 우리가 동격으로 상호 교통을 나누게 될 것을 예표하는 은혜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의 당사자로 대우하시고 그들과 긴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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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내 산 언약의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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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새롭게 그의 백성과 맺은 시내 산 언약(우리는 이것을 통틀어 율법이라고 한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첫째, 좁은 의미에서의 율법이라고 하는 십계명이다(20:1-17).

이 십계명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의무와 인간 상호간에 지켜야 할 도리들을 규정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성품을 표시하며(11:44- 45, 7:12) 그들이 행해야 할 의무를 알려주며(2:10-11) 그들이 지키는데 있어 무능함과 그들의 본성과 마음과 생활이 죄악으로 오염되어 있음으로 확신케 하고(19:11-12, 3:20, 7:7)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와 비참함을 깨달아 겸손케 함으로써(3:9, 23)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의 순종의 완전함(3:21-22, 10:4)을 더욱 명백하게 깨닫게 한다(웨스트민스터 요리문답). 이런 점에서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선포한 법의 강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십계명의 정신은 후에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강림한 그리스도에 의해 산상수훈의 전문(7가지의 복된 상태, 5:1-12)에서 새롭게 제정되어 나타나게 된다.

둘째, 사람과 사람 사이에 관계되는 사회상의 법률을 담은 시민법으로서의 규례이다(21:1-23:9).

여기에서는 주로 사회 도덕을 주축으로 한 민법 및 형법상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한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고도한 정신이 어떤 것인가를 잘 규명하여 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제정한 규례(율례)는 일반 국가가 제정한 민법이나 형법과는 달리 인간의 본성에서부터 전혀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적용되지 않는 윤리와 도덕을 담고 있기 때문에 외형적인 구속력을 행사하거나 강제로 사람들에게 법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내형적인 인격의 순화를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율법은 외형적으로 드러난 죄를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인간의 내면을 개조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인간의 도리를 따라 살도록 하기 위하였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규례들을 제정한 것은 인간성 자체가 신적 감화를 받아 새롭게 형성됨으로서 새나라의 국민성을 드러내게 하는데 근본적인 취지가 있다.

하나님이 제정한 규례는 지금까지 애굽의 종으로 살아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새나라의 백성으로 자유인이 되었다는 신분의 변화와 함께 그에 알맞는 새로운 삶이 어떤 것인가를 제시하고 세속 국가들과는 다른 양태의 생활을 바탕으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건설하는데 효력을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상은 후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시되는 신약에 나타난 영적 교회의 궁극적 완성을 이루는데 있어서 기초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때, 하나님께서 제정한 규례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목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졌다는 점에서 그 나라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셋째, 종교 의식(儀式)에 관계되는 의식법이다(23:10-33).

이 부분은 주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건설하게 될 나라에서 하나님을 중심으로 진행될 백성의 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규명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 각자 자신들의 인생을 경영해 나갈 때에는 하나님 중심적인 인생을 경영해 나가야 하는데 그러한 삶의 구체적인 형태가 바로 절기를 지키는 일과 우상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계속 유지한다. 그들이 언제나 하나님 중심적인 삶을 경영해 나간다는 신앙으로 표하기 위해 지켜야 할 절기는 안식일과 안식년 및 3대 절기라고 하는 무교절, 맥추절, 수장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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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1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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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 언약에 나타난 안식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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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 언약의 핵심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안식이라고 할 수 있다.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를 완성하시고 모든 사역을 마치심으로 얻으신 결과였다. 이런 점에서 안식은 창조의 완성을 상징하고,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목적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안식이라는 말로 대신 할 수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백성들이 모든 사역을 중단하고 하루를 안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안식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안식을 누린다는 것은 장차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을 누리고 있다는 것을 예표한다는 점에서, 안식은 영원한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안식은 엿새동안 힘써 일한 대가로 찾아오게 된다. 또한 안식을 얻기까지에는 시간의 과정이 필요하다. 엿새동안 힘써 일하는 과정과 진행이 있어야 이레 날 안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엿새동안 일하는 것은 각자의 역사적 사명에 따라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있어서 자신의 역할에 힘써 참여하고 그 결과로서 완성될 영원한 나라에 참여함을 상징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식은 하나님 나라의 진행과 그 과정을 매우 중시하게 된다. 역사의 흐름이 있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며, 그 날에 누릴 안식을 바라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안식에 참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진행시키고 완성시키기 위하여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곧 역사의 주관자로서 안식의 주인이심을 깨닫게 한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전지(全知)하심을 믿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마침내 영원한 안식을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지금 안식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안식의 정신이 시내 산 언약에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바로 안식년에서 표현되고 있다. 여기에서 안식년이 노예 제도와 연관지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남종이나 여종이나 노예는 일반적으로 주인의 소유물에 불고하며 주인의 재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히브리인 노예는 결코 주인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점을 안식년에서 명확하게 제시해 놓고 있다. 비록 사회 제도나 자신의 불합리한 문제로 인하여 히브리인이 팔려 종이 되었다 할지라도 7년 후에는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그의 인격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서 혹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적인 면을 회복시켜 긍정적으로 질서를 되돌려 놓기 위하였다.

또한 이 제도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소유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규정함으로써 결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지배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에 속한 모든 백성은 평등하며 모두가 하나리다는 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삶의 권리가 이처럼 그 사회의 최하층을 형성하는 노예에게까지 보장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사람이 누리는 삶의 권리가 얼마나 철저하게 보장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인 것이다. 이것은 나아가 히브리인은 누구라도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타인의 규제와 결속에 의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거부하신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주어진 율례와 법도를 따라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사람의 생존을 보장해 주신다는 사실이 여기에 잘 나타나 있다.

만일 히브리인 종이 주인을 떠나지 않고 독립을 원치 않을 경우에는 귀를 뚫어 영원히 주인의 종으로 남고자 할 때라 할지라도 주인은 그를 노예로 대접하지 않고 가족의 한 사람으로 대하게 한 점 역시 이러한 안식의 정신에 따른 것이다. 또한 여종의 경우라 할지라도 딸과 같이 대하게 한 것 역시 궁극적으로 모든 백성이 최종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사상에 기초해 있다. 따라서 모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약속의 땅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권리를 가지는 것이며 이것은 장차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의 정형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처럼 안식이 보장되어 있다. 따라서 안식을 해치는 행위는 어떤 경우든지 그 나라의 정체성을 해치는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철저하게 구제하고 있다(21: 12-36). 사람을 살인하는 행위 역시 그 사람이 누려야 할 안식을 빼앗는 행위이다. 그리고 사람을 유괴하는 행위 역시 마찬가지이다. 임신한 여인을 때려 낙태케 한 행위나 타인의 신체를 상해한 행위 역시 같은 맥락에서 다루고 있는데 이 역시 당사자로부터 안식을 빼앗는 행위로 규정된다. 이러한 행위들은 당사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가 속한 가족과 사회가 정당하게 누릴 안식을 제한하거나 삶의 질서를 깨뜨리는 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안식이 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떤 이유에서든 정당하게 누릴 안식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선 그에 따른 규제와 형벌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공동체의 질서와 평안과 안식을 유지하도록 하신 것이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서의 안식은 의와 공평에 의해 유지되어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누구든지 똑같은 삶의 권리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과 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공평의 원리이다. 이 공평의 원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24)라는 말씀에 담겨 있다. 모든 사람이 공평한 삶의 권리를 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정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도 당연한 법칙이다. 이것은 세상 법률에서 규정하고 있는 형벌과 다른 원칙 위에 서 있는 하나님 나라의 인 것이다.

세상 법정에서는 죄형법정주의에 근거해 처벌을 하도록 하고 있다. 즉 죄의 성질과 질량에 따라 처벌한다. 아무리 심리적으로는 죄가 인정된다 할지라도 법적으로 증명해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것으로 처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죄형법정주의에 앞서 하나님 나라의 에 입각해 공정하게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고의적인 살인이 아닌 우발적인 살인일 경우 도피성을 제공하도록 하고 있다. 이런 정신은 세상 법정에서 결코 용납하거나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살인한 자 일지라도 그것이 고의가 아닐 경우 일정한 장소인 도피성에서 그에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동안 안식을 누릴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도 이러한 안식의 원칙에 근거하고 있다.

또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판결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개인의 판단에 맡기지 않고 재판장의 판결을 좇아 하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22)은 개인의 복수심에 따라 판결하거나 부당하게 처벌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였다.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있어 개인적인 복수를 허용할 경우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의에 따라 형벌이 주어져야 한다. 따라서 어떤 범법자라 할지라도 당사자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재판관의 판결에 따라 처벌의 범위를 규정해야 한다.

이처럼 공정한 판결과 하나님의 의에 근거한 처벌은 안식의 본질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안식은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안식의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형벌은 이미 때어진 안식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안식을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구속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게 관찰되어야 한다(30).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르게 된 죄인을 영원한 안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바로 구속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안식을 회복한다는 것은 구속의 원리에 근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시내 산 언약은 시사해 주고 있다.

출애굽기 22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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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 언약에서의 안식과 긍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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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 이어 계속된 본 장에서도 시내 산 언약의 특성인 안식의 정신이 그대로 배여 있다. 남의 소유를 훔치거나 재산에 해를 입히는 경우, 처녀를 욕보인 일에 대한 배상이나 처벌 역시 이 점을 간과해서 해석할 수 없다. 무당이나 짐승과 관계한 자나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일에 대한 단호한 처벌은 하나님이 내신 인간성을 모독하는 행위로 안식이 보장되어 있는, 즉 인간성의 가치를 존중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방 나그네나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는 행위나 고리대금을 일삼는 행위를 금하고 있는 것 역시 하나님 나라의 특성인 공평과 의의 차원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본 장에서는 앞장에서 말하고 있는 공평과 의로 대변하고 있는 안식의 정신에 하나의 정신을 첨가하는데 그것은 긍휼이다. 공평과 의가 소극적인 것이라 한다면 긍휼은 가진자가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푼다는 점에서 적극적인 요소를 첨가하고 있다.

특히 무당은 신을 접한 자로서 귀신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짐승과 관계를 갖는다는 것은 스스로 인간 됨을 포기했다는 점에서,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린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부정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엄중하게 다루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해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인간성의 소중함을 중시하는 나라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격의 고도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나라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은 안식을 중시하고 인간의 가치를 최고로 평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소극적으로 그 가치만을 보존하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적극적으로 고유한 인격을 발휘하도록 보장되어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것이 바로 긍휼의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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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긍휼의 정신

본문은 이방 나그네나 과부 또는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22:21-22)고 말씀하면서 만일 그렇게 할 경우에는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함으로 말미암아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를 죽이고 과부와 고아를 해롭게 하는 자의 아내와 자녀들이 과부와 고아가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고 있다(22:23-24). 출애굽기 2225절 이하에서는 만일 돈을 빌려 줬으면 채권자처럼 채무자를 괴롭히지 말고 이자를 받지 말며 혹시 그 사람이 옷을 저당 잡혔다면 해가 지기 전에 그 옷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옷은 살과 같은 것이고 그 의복을 입어야만 정상적인 생활을 유지하기 때문에 의복을 돌려주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명령을 내리신 분을 가리켜 나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시라’(22:27)고 말씀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휼을 베푸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긍휼이나 자비를 베푼다는 것에는 항상 인간의 본분을 정상적으로 발휘할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이 긍휼을 베풀 자격이 있고 또 그러한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긍휼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정신이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과부를 압제하지 말고 돈을 빌린 자에게 채주처럼 하지말고 옷을 저당 잡혔으면 돌려주라는 등의 이야기들은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법률이라는 점에서 일반 세상 나라에 대해 하신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지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은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자리에서 벗어나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충분하게 인격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은 새롭게 태어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률을 선포하시면서 그들이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자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출애굽기 239절에서도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 너희가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은즉 나그네의 정경을 아느니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이 종된 애굽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출애굽기 2221절에서도 마찬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전에는 너희가 노예와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세상의 법도나 형편에 따라 옳지 않은 일을 했을지라도 이제는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에 정상인답게 살아가야 될 것이 아니냐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해야 될 일들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차원에서 이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이 차원에서 옷을 저당 잡았으면 해가 지기 전에 돌려보내라는 말씀에 담겨 있는 근본적인 정신을 읽을 수 있다. 그 말씀 내면에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생존을 보장해 주신다는 긍휼의 정신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권을 보장해 주신다는 사실은 과부와 고아들에게 행할 도리 속에서도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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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쌍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

어떤 사람이 게으르거나 혹은 크게 실수를 해서 빚을 많이 질 경우가 있다. 사람이라는 것은 마땅히 자기의 의지에 따라서 이성을 발동시킴으로 어떤 판단을 하기 마련인데 그 판단이 잘못되어서 실수할 수도 있는 것이고 사업을 망하게 할 수도 있다. 또는 게을렀다거나 자신의 판단이 잘못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사람들의 삶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생존권을 보장해 주시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전제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땅에서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야 할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푼다고 할 때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의 본분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음을 전제하고 그러한 자리에 있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자리에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이 말은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라는 말씀과도 연관시켜서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이방 나그네는 이 땅에 태어났다 할지라도 선천적으로 이스라엘의 혈통에서 제외되어 있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기업에 소속될 수 있는 복을 얻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러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최소한 생존의 기본권을 보장해 주신다는 점에서 그들은 긍휼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기업에서는 제외되어 있으나 전 세계를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어서 전역사를 이루어 가는 일에 쓰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방인들은 비록 하나님의 기업에 소속되어 있지는 않지만 이 세상을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그 나름대로 하나님의 소용에 따라 쓰임을 받기도 한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이방 나그네에까지도 긍휼을 베푸시고 심지어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들에게까지도 긍휼을 베푸신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빚을 진다든지 옷을 저당 잡혔을 때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서로를 도와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데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혹시 자신의 잘못 때문에 재산을 잃은 사람일지라도 서로 도와서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건설해 나갈 수 있도록 피차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는 정신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소홀히 경영함으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인 무력감에 빠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심판에 해당되는 일일지라도 그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나라를 함께 건설하기 이해 존재하여야 한다는 점에서 긍휼을 베풀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제도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생존을 책임져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히브리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이다. 그러한 자리에 참여하고 있음을 실제로 체험하고 증험되는 모습이 바로 나그네를 압제하지 않고 과부와 고아를 함부로 하지 않고 빚진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일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객관적인 검증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나가는 실체를 경험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체험이고 하나님 나라가 점차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는 증표인 것이다.

출애굽기 23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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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통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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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34-5절에는 원수의 길 잃은 소나 나귀를 보면 반드시 그 주인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였고 원수의 나귀가 짐을 싣고 가다가 무거워서 넘어지면 그것을 도와 그 짐을 풀어주라고 함을 볼 수 있다. 소나 나귀라는 것은 사람의 소유물이지만 여기에서는 재산권을 인정하거나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인간의 법도를 상징하는 말이기보다는 짐승에 대해서라도 긍휼을 베풀어야 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 비록 길 잃은 원수의 짐승일지라도 다시 그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은 주인의 재산권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그 짐승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긍휼이다.

짐승이 주인의 손에서 떠났다는 것은 안정이 없고 생명에 대한 보장이 없다는 의미이다. 길을 잃은 짐승이 어디에서 마음껏 음식을 먹거나 생명의 보장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의 길에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언제든지 들짐승이나 뱀이나 혹은 독초 등의 위험에 빠져 있으며 심지어 굶어 죽을 수 있는 처지에 있다. 그러한 처지에 있는 짐승을 보거든 그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한다는 것은 짐승의 생존권까지라도 보장해 준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그 주인에게 있어서는 재산권의 가치로만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 짐승에 대해서 긍휼이라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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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나라 통치의 기본 원칙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 각각은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고 존재적인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이점을 생각하라고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나귀가 짐을 너무 많이 실어서 넘어지게 되면 그 짐을 부리어 주라는 말씀 역시 그 나귀가 짐을 질 수 있을 만큼의 무게를 지워 주는 것이 그 나귀에 대한 긍휼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것들을 놓고 볼 때에 그저 짐승 하나가 길을 잃었으니까 그 주인에게 돌려 줘야겠다는 마음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특별히 원수의 짐승에게까지라도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원수의 짐승이 길을 잃어서 헤매고 있는데 못 본체하고 지나가 버린다면 죽든지 아니면 그 주인이 찾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저 원수가 자기의 짐승을 잃어 버렸으니 속이 다 후련하다는 마음이 쉽게 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원수의 짐승을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에는 단순히 짐승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뿐 아니라 그 원수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하는 마땅한 도리가 그 안에 숨겨져 있다. 잃어버린 짐승을 못 본체 하는 식으로 원수를 갚는 치사한 마음을 갖지 않는 것이다. 원수가 나쁜 처지에 빠져 있는데 속으로 고소하게 생각하고 쾌재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돌려 줄 것은 돌려주고 긍휼을 베풀 것은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는 사람을 악용해서 마음을 즐기는 저급한 일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긍휼이라는 것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행사하실 만한 위치에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격을 내 안에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 각박한 사회에서 원수의 짐승을 그 주인에게 돌려준다면 그 사회가 얼마든지 변화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부드러움이 내 안에서 발동하여 원수의 마음 안에 가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또한 출애굽기 2310절 이하에 보면 안식년에는 땅을 갈지 말고 그 땅에서 나는 소산은 가난한 자가 먹고 그 나머지는 들짐승이 먹게 하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들짐승에게까지도 먹을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다. 안식일에는 너뿐만 아니라 종과 짐승도 같이 쉴 것이라고 하신 말씀 역시 짐승들까지도 사람과 같이 동등하게 취급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생존권에 대한 보장과 진정한 안식에 대한 의미를 찾아 볼 수 있다.

안식일에는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도 쉬게 하고 안식년에는 들짐승들이 밭에서 양식을 얻도록 하고 추수할 경우에는 밭의 네 모퉁이는 그대로 두어서 지나가는 나그네나 과부나 고아의 양식이 되게 한 것 등 모두가 하나님께로부터 생명의 근원이 왔고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주시고 보장해 주신다는 신뢰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네 모퉁이를 추수하지 않고 흘린 곡식을 다시 줍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누려야 할 참된 안식은 하나님 품안에서 누려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 곡식이나 많이 추수해서 많은 재물을 모아야 편히 살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비록 추수를 다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정한 풍요는 하나님 품안에서 누려야 할 것을 여기에서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이 땅에서 나에게 진정한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거룩한 안식에 참여한 자로서 이 땅에서 긍휼과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여유를 갖는 것이다. 나에게 원수 된 자에게 또 내가 알지 못하는 불쌍한 자에게 심지어는 들짐승에게까지 긍휼을 베푸는 것은 내가 이 땅에서 천 년 만 년 살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안식처가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가야 될 사람으로서 충분한 여유를 갖고 살아야 될 이유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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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피조 세계

긍휼의 정신에 대하여 또 다른 가르침은 출애굽기 2319절에서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삼지 말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젖이라는 것은 어미가 새끼를 양육하기 위해 생산되는 것으로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는데 새끼를 삶아 죽이는데 사용된다는 것은 자연 질서가 무너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악질적인 것으로 저주스러운 상태이다. 이와 비슷한 용례를 신명기 225-7절을 보면 길을 가다가 어미 새와 새끼나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동시에 취하지 말고 그 어미는 놓아주고 새끼나 알만을 취하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어미 새는 다시 알을 낳고 새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놓아주되 새끼나 알을 양식으로 취하도록 하였다. 레위기 2228절에 보면 어미와 새를 동시에 한 날에 잡지 말라는 말씀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미젖으로 새끼를 삼지 말고 새와 알을 동시에 취하지 말고 어미와 새끼를 한꺼번에 잡지 말라는 말들은 가볍게 넘길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각각의 짐승들을 내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는 온 우주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할 위치에 두셨는데 이것은 짐승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 하나 하나까지도 다스려야 할 것을 의미한다. 다스린다는 것은 그저 통치하는 것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보호해야 할 의무도 그 안에 있다. 피조물들을 인간이 다스려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고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땅을 정복하고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되어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짐승들에게 온정을 베풀고 어미젖으로 새끼를 삼지 않고 어미와 함께 새끼를 취하지 않는 것도 온정을 베푸는 것이다. 이런 작은 일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상징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법을 따라가는 것이며 이런 일을 수행함으로써 하나님의 통치를 대행할 수 있는 자신의 위치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다는 것이 은혜라고 한다면 그 은혜는 사람을 통해 짐승들에게도 임하여야 할 것이며 그러한 위치에 우리가 서 있을 때 책임을 다한다. 이러한 위치에 바로 서 있지 못하고 사람이 범죄한 결과 자연 질서가 깨져서 짐승들이 포악해지고 서로 해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므로 젖으로 짐승을 삶아 먹는다든지 어미와 새끼를 동시에 취한다든지 한 날에 어미와 새끼를 잡는다는 것은 사람이 포악하고 흉악해져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이러한 악행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경영이 무시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가 있는 곳에서는 긍휼이 있을 뿐이지 그처럼 포악과 잔인(殘忍)은 없어야 한다.

이처럼 진정한 긍휼이라는 것은 신()의지의 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점에서 긍휼은 신적 의지의 표현이다. 긍휼을 베푼다는 것은 긍휼을 입은 자유인으로서 인격을 발현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긍휼의 행위를 통해 인간의 본분을 완성하는 것이고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한다. 그리고 마침내 그와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자연을 다스리고 피조 세계를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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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4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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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 산 언약의 체결이 가지는 구속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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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사건을 경험한 이스라엘은 홍해를 통과하여 시내 산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길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율례를 주셨다. 그리고 이 율법에 모든 이스라엘이 참여한다는 체결식을 시내 산 아래에서 행하였다. 이 체결식에서 유월절에 행하여진 피뿌림이 다시 나타난다(24). 유월절의 피뿌림이 여기에서 새로운 의미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건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출애굽기 20-23장에서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규범, 곧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보여준 규범(이것을 Civil Law라고 함)을 보여준 후, 이 율법을 기록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기둥을 세우고 단을 쌓게 한 후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게 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세는 피를 취하여 반절은 여러 양푼에 나누어 담고 반절은 그 단에 뿌렸다(24:6). 그리고 언약서(20-23장까지의 내용)를 낭독하여 백성들이 듣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그 내용을 다 들은 후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24:7)고 하면서 그 율법을 승인합니다. 모세는 나머지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리며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24:8)고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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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약 체결식으로서의 피뿌림

여기에서의 피뿌림을 언약의 피라고 한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당시 고대 근동 지방에서는, 언약을 체결한 당사자들은 짐승을 반으로 쪼개고 그 사이를 함께 지나갔다. 그렇게 함으로써 언약을 지킬 것이라는 맹세를 하였다. 만일 언약을 위반할 경우에는 그 짐승이 쪼개어지고 피를 흘려 죽은 것처럼 언약 위반자 역시 그와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표로서 그와 같은 예식을 행하였다. 그러한 언약 체결식을 통하여 죽음으로써 언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서로 굳게 세웠다. 마찬가지로 피를 취하여 반절은 하나님의 단에 뿌리고 반절은 백성들에게 뿌린 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언약이 체결되었음을 상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피를 가리켜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

따라서 유월절에서의 피뿌림과 시내 산에서의 피뿌림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월절에는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다. 이 피는 죽음의 사자가 그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건너 넘어가게(pass over) 하였다. 그렇게 하여 이스라엘은 생명을 얻었다. 그리고 애굽에서 해방되어 자유의 몸으로서 생명의 가치를 발현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유월절의 피뿌림은 이스라엘이 그동안 억압하고 있던 바로의 세력에서 벗어나 자유인으로서의 신분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새 생명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로 옮겨짐을 상징한다. 반면에 시내 산에서의 피뿌림은, 자유인으로서의 자기의 위치를 각성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문화를 세워 새로운 나라를 구현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는 언약의 표였다. 그러므로 유월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기 위한 피뿌림이었고, 시내 산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겠다는 신앙 고백으로서의 피뿌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유월절 양에 대하여 성경이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월절에서 행한 일 중의 하나는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피뿌림이 있은 후 그들은 함께 모여 음식을 먹었는데 이 일은 피뿌림과 함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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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동 운명체로서의 이스라엘

당시 사회에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원수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임을 표시하고 있었다. 더 나아가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함께 유업을 받을 사람들임을 상징(κοινωνια)하는 까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유월절 음식은 이점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유월절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사람들과 먹을 수 없는 사람들이 구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나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임을 고백한 사람만이 그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장차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사람이었다(κοινωνια).

반면에 시내 산에서 언약 체결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을 대표한 모세와 제사장들 그리고 70명의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음식을 먹은 것은 이런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인이 올라가서 이스라엘 하나님을 보니 그 발 아래에는 청옥을 편듯하고 하늘 같이 청명하더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존귀한 자들에게 손을 대지 아니하셨고 그들은 하나님을 보고 먹고 마셨더라(24:9-11).

이처럼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유월절 음식에 참여한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참여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유월절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어 장차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한 음식을 나누어 먹고 그 날을 소망하였다. 그러나 이제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겠다는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만나 뵙고 그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된 것은 유월절에서 소망한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유월절이 완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 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만 베풀어주신 잔치였다. 그리고 그들이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코이노니아만이 가지는 고유한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펼쳐주신 자리에서 음식을 먹은 그들은 이미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을 받은 사람들임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시내 산에서 완성된 유월절을 체험한 그들은, 장차 하나님 앞에 음식을 먹겠다는 것을 소망하고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한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 앞에서 음식을 나누어 먹었고 기업을 받았음을 기억하고 가나안에 들어가야 한다. 즉 이미 받은 기업을 실제로 들어가 누리고 살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업 위에 하나님의 나라와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이미 그들은 헌신하였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공동 운명체로서 하나의 사명을 가지고 있는 민족 공동체였다.

이스라엘이 공동 운명체이라는 것은 유월절 양을 잡는 일에서 이미 잘 나타나 있다. 유월절 양으로는 생후 1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을 취했다. 그리고 가족의 수 에 따라 양을 잡되 가족의 수가 많거나 모자라면 이웃 집 사람들과 연합하여 양을 잡도록 되어 있었다(12:3-4). 양 한 마리로 몇 명이 먹을 수 있는가를 계산하여 이웃 사람들과 합하여 양을 잡아야 했다. 이것은 가족 단위로 양을 잡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합하여 하나의 공동체로 양 한 마리를 잡아야 함을 지시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의 단위임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양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속으로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을 자임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연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권속이라는 점에서 한 단위의 식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나누이지 않는 하나의 공동 운명체임을 시사하고 있다.

출애굽기 25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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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보여주는 성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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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한 나라를 건설하기 전에 하나님은 가나안에 들어갈 이스라엘을 앞에 두고, 먼저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신 것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19:4-6)임을 선포하시고 그 증표로 주신 것이 율법과 성막이었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말씀으로 통치하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율법의 내용을 근본으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친히 언약 체결식을 마치신 후 성막 건설에 대하여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따라서 성막은 시내 산 언약의 결정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막 역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심과 통치자임을 표현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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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은 먼저 성소 안에 들어갈 언약궤와 속죄소, 진설병 상, 등대를 만들도록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성막의 모양은 마치 하늘의 보좌를 연상케 한다는 점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사들이 둘러서 옹위하고 있는 성소에는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언약궤(또는 증거궤)가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그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하나님이 왕으로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표이다. 즉 성막은 하나님의 보좌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임재하신다는 증표로 세우게 하신 것이다. 그 증거로 항상 성막에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표인 쉐키나(구름기둥과 불기둥)가 성막 위에 있었다. 이 쉐키나가 떠오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일상의 일을 중지하고 자기의 짐을 꾸린 후 쉐키나를 따라 나섰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곳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려고 길을 떠나시기 때문이다.

쉐키나가 길을 떠나면 제일 먼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상징하는 언약궤가 그 뒤를 따르고, 이스라엘은 행군의 전열을 가다듬고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쉐키나는 항상 사흘 길을 앞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다. 그러다가 쉐키나가 어느 곳에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 성막을 세우고, 성막 주위 사방에 각 지파별로 진을 쳤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 있는 군대와 같이 성막을 호위하며 그곳에서 쉐키나가 떠오를 때가지 진을 치고 거주하였다. 이런 방법으로 하나님은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려 나가셨다.

특히 언약궤는 시내 산에서 친히 강림하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언약의 증거판이 보관되었다는 점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지시하는 가장 중요한 상징이다. 또한 언약궤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구속하는 법전을 그 안에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보좌를 암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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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과의 만남

성막을 회막(metting tent)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시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성막에서 교제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나서 서로 교통을 나누는 것은 제사 제도 안에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속죄소는 언약궤 위에 자리하고 있는데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는 말씀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성막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는 먼저 제물을 제사장 앞에 가져다가 사람이 지은 죄를 대신해서 죽인 후 절차에 따라 하나님께 속죄제로 드리게 되어 있다. 속죄제는 번제로 드리는데 제물을 모두 태워 향기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사이다. 마땅히 범죄한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임을 당해야 하는데 대신 제물이 죽음으로서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죽음을 상징한다. 그 후 속건제를 드리는데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드리는 제사이다. 속죄제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의당히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하여 드리는 것이고, 속건제는 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죄책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한 상징으로 드리는 것이다. 또한 죄인 된 자가 죄로부터 깨끗해짐으로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것을 상징하는 제사인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께 모든 삶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운데서 살겠다는 결심을 담아 헌신하겠다는 정신이 그 안에 담겨 있다.

그런 후 화목제를 드리게 되는데 화목제는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죄와 죄책으로부터 깨끗함을 입은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과 서로 교통을 나누고 화목을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화목제는 번제로 드리지 않고 거제나 요제로 드리는데, 제사 의식이 끝나면 제사장과 함께 그 제물을 여호와 앞에서 나누어 먹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음을 상징하기 위함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화목 되었음을 표시하고 거룩한 교통을 나눈다는 의미로서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신약에서의 코이노니아는 성도들의 교통을 의미하는데 그 말은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서 구약의 화목제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

속죄소가 언약궤 위에 하나의 몸체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통치와 더불어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과 만나시고 말씀하시며 교제하신다는 사실을 별개로 구별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속죄소에 있는 그룹들은 여호와께서 언약궤 위에 임재하신다는 일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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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나님의 치유(care)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지으면 의당히 죽음으로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인생의 존재의 의미도 드러내지 못하고 죽어버린다면 그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충분하게 드러내기 전에 죽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한 제도가 바로 성막을 중심으로 하는 성결한 삶이었고, 혹 죄로 인해 더럽혀질 경우에는 제사를 통해 성결을 유지하도록 하셨다. 누구나 죄로 인해 죽음 앞에 서게 될 때 제사를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치유하시어 성결하게 하셨는데, 그 일을 위해 성막을 지으셨고 그의 백성들이 죄로부터 깨끗해 질 수 있게 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이 항시 성결을 유지하여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셨다. 그러한 보호 가운데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삶의 가치를 다 발휘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가장 자기의 삶을 온전하게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이처럼 속죄소를 마련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그 백성이 늘 화목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진설병을 놓아두는 상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상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빵과 포도주를 하나님께서 친히 그 백성에게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진설병 상에 음식을 진열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종교적 관점과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섬기는 신을 위해 음식을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신 앞에 음식을 진열해 놓는 것이다. 그러나 진설병 상에 음식을 진열해 놓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 백성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등대가 발하는 빛과 불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빛과 불은 여호와의 현현과 직접 관련되기 때문이다. 빛과 불은 하나님의 현현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시내 산에서 모세가 떨기나무에 타오르고 있는 불을 보고 하나님을 만난 사건을 연상케 한다(3:3-4). 따라서 등대의 불이 꺼지지 않는 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늘 함께 하신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반면에 등대의 불이 꺼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떠나셨다는 진노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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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26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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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예표하는 성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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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애굽이라는 세상의 큰 세력 앞에서 멸망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빈약하게 보였던 이스라엘을 부르시어 새로운 조직을 하고 가나안을 향해 진군하게 될 때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군대로 부르셨다. 그래서 이스라엘 군대는 가나안에 있는 반신국적인 세상 나라의 문화를 제거하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와 찬연하게 빛내는 문화를 건설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세울 나라의 성격에 대해서 출애굽기 20장에서 구체적으로 계시해 주셨는데 그것이 율법과 성막이었다. 이 율법은 가나안에 세울 이스라엘 나라의 헌법이었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헌법이 반포되었다는 것은 한 나라가 세워졌음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적인 특성을 잘 표명해 주는 제도가 바로 성막 제도였다.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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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속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나라

율법과 성막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역사상에 구체적으로 한 형태를 이루고 등장하게 하는 표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이스라엘이 한 나라를 세웠거나 세상에 독립된 한 국가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의 민족으로서 한 단위의 공동체는 이루었을지라도 그들이 한 나라로서 세속 국가들과 같이 동등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율법이 반포되고 성막이 세워짐으로서 이스라엘은 명실상부한 독립 국가로서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출애굽의 과정을 지나면서 즉, 유월절과 홍해 사건 이후에 율법이 주어지고 성막이 건설됨으로서 외형적으로 국가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따라서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율법을 통해 인생의 길을 걸어나가고,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제도를 통해 세상 나라와 구별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살아가게 되었다. 이처럼 세상 속에 독립된 한 나라를 세우고 독특한 교회 공동체로서 세상과 구별되는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그들을 외형적으로 세상과 구별하는 요소를 출애굽 이후부터 가지게 되는데 첫째는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을 가지며 둘째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상징하는 성막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율법과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성품이 무엇이고 그 나라의 문화가 무엇인가를 세상에 드러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하여 이스라엘은 가나안 문화를 무너뜨리고 그곳에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우기 위하여 그들과 전투를 수행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존재하는 것과 하나님의 통치가 구현되고 있음을 외형적으로 온 세상에 드러내어야 하는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친히 율법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통치가 가져다 주는 문화의 성질에 대하여는 성막을 통하여 계시해주셨다. 성막은 이스라엘의 삶의 모형으로서, 그리고 전형적인 천국 백성의 삶의 모형으로 하나님께서 예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완벽한 한 나라를 건설한다는 것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하며, 그 통치에 따라 민족적인 특성(또는 품성)이 형성될 것인데, 그러한 삶의 모형이 성막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성막의 특성은 그 구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성소 안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궁전(Royal City)을 연상케 한다. 욥기나 이사야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궁전에서는 온 세상의 역사를 결정하는 곳이다. 즉 구속사와 세계사가 이 하나님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되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중심에 성막이 세워졌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모든 역사가 이곳에서 결정되고 경영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성막의 구조에서 특이한 것은 성소와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를 휘장으로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위장은 아무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다는 장애물로 설치되었다. 마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가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룹들로 하여금 에덴 동산을 지키게 하신 것과 같다(3:24). 이 휘장에 그룹들이 수놓아져 있다는 것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성막에서는 제사 즉 예배의 형식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개방되었다. 비록 제사장이라는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과 백성이 만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백성은 왕이신 하나님을 찾아가 경배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또한 제사장은 백성의 중보자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 백성을 위해 간구할 수 있었다. 이 경우 백성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데, 제사장이 제물의 피로서 자신을 성결케 하고 난 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 이것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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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원받은 사람의 위치

이러한 성막의 제도는 곧 이스라엘 백성만이 갖는 문화적 특성이다. 세상 어떤 나라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러한 문화적 특성은 하나님 나라를 대표한다는 점에서 그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제도를 세우신 것은 인생의 본연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주신 것이다. 그 제도 자체가 인생의 궁극적인 완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경륜의 진행에 알맞게 하기 위하여 필요에 따라 제도나 규례를 제정하시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러한 제도나 규례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드러내는 일에 그 목적이 있다.

율법과 성막의 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율법이나 성막 중심의 삶을 통하여 구원에 이르게 함이 아니라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 백성답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자신을 감찰하고 항상 성막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감으로서 이 땅에서 인생의 본분을 현저하게 드러내라고 주신 은혜의 방도로서 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을 지향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통치를 이 땅에 드러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연하게 빛내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있을 때에는 국가를 세운다든지 혹은 민족적 의식을 바탕으로 자기 존재의 의식을 세우는 일이 없었다. 단지 자연인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미 규격화되고 제도화된 상태로서 애굽에 속한 하나의 민족으로 살아갈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율법과 성막을 소유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신분상 현저한 변화가 발생했다. 이것이 구원이 가져다 주는 커다란 은혜인데, 종 되었던 위치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생명의 가치를 완전하게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 안에서 구원의 참 뜻을 찾을 수 있다.

지금까지 애굽의 종이었던 이스라엘은 이미 짜여있는 프로그램 속에서 살아왔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은 각 개인이 자기의 이성을 발휘하고 자기의 능력을 사용하여 가장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하여야 한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이었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적 제도 안에서 규격화된 생활을 해야 하는 제약을 받았음을 의미한다. 그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애굽 사회의 규격화된 하나의 부속품에 지나지 않았다. 인격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이 말살된 상태에서 사회 구성에 필요한 하나의 사회적 부속품으로 한 평생을 살다가 죽을 뿐이었다. 그들은 바로가 설계한 프로그램을 순서에 따라 수행하는 정도일 뿐이다. 그 일을 수행한다고 해서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거나 부각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한 인간을 이 세상에 보내실 때에는 자기의 본연의 가치를 온전히 발휘하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성막 제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우주적인 나라에서 자신의 인생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를 찾을 수 있어야 한다.

출애굽기 27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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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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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시내 산 언약을 체결하고 성막을 짖도록 모세에게 계시하신 것은 시내 산 언약으로서의 율법과 성막이 상징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잘 보여주고 있다. 율법이 그 나라의 헌법인 것과 마찬가지로 성막은 그 나라의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성막의 양식이나 도구들이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 때문이다. 번제단과 성막 뜰의 장막에 대한 본문의 말씀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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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라엘 공동체의 특성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지만, 단순히 상징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성막은 백성이 직접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처소라는 점에서 실질적인 의미와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 기능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통치에 부응하지 못함으로써 결핍을 갖게된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제사를 시행하는 놋제단은 이런 점에서 백성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언약 관계를 깨뜨린 백성으로 하여금 제사를 통하여 다시 언약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길목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은 피의 제사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아마 이것은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17:11)는 말씀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언약을 파기함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대속을 필요로 할 때에는 피흘리는 제물을 가져와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다. 즉 생명을 위하여 생명으로 대속해야 한다는 원칙에 따른 요구인 것이다.

제사 제도에서 피흘리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 그리고 번제 및 화목제가 있다. 그 중에서도 번제에서 희생물을 태우는 행위는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제물 전체를 남김없이 제단 위에서 태워야 하기 대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의미에 대하여 성경은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제단에서 제물 전체가 불태워지는 제물을 바라보면서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연기를 바라볼 때 하나님을 향한 자신들의 완전한 헌신을 발견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고 한 바울 사도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성소에 번제단이 존재한다는 것은 비록 언약을 파기한 결핍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언제든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더불어 그 앞에서 제물을 태움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대속한다는 사실을 확인함과 동시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이 들여졌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된 자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삶의 정신이기도 하다. 아무리 잘 다듬어지고 화려하게 만들어진 언약궤가 있다 할지라도 번제단이 없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야 한다는 의무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번제단이 있음으로 해서 죄인 된 백성이라 할지라도 다시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나아가 공동체 구성원의 한 사람의 결핍은 그만큼 공동체 전체의 결핍을 초래한다. 때문에 그 한 사람의 결핍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공동체 전체의 완전함을 기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어느 한 사람이 다시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깨뜨렸다가 회복한다는 것은 전체 공동체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회복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총 시내 산 언약의 근간이기도 하다. 특히 안식의 정신이 하나님의 긍휼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님의 긍휼은 안식년 제도에서 그 핵심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며 자유로워야 한다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비록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가 대속의 과정을 통하여 다시 하나님 앞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또한 깨어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번제단은 제사의 외적인 규율을 넘어 그 자신이 죄에 대하여 변화되었음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증거를 보여줌으로서 그 사회의 구성원들과 화목하는 길을 열어주기도 한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다시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그 사회의 구성원인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성막에 나아와 제사 제도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그리고 그 문화를 세워나가는 독특한 공동체이다. 이처럼 공동의 목적과 존재 의식과 사명을 가진 구성원들이 하나님 앞에서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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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공동체와 중보자

성막은 성소와 지성소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성막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둘러싼 마당이 있는데 이곳에 번제단과 물두멍이 놓여 있다. 그리고 그 마당은 포장으로 둘러 싸 외부와 구별하였다. 이곳은 제사장의 몸을 성결케 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는데 성결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요소인 것이다. 제사장은 거룩하신 하나님과 부정한 백성의 만남을 중보하는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사장은 부정한 백성을 대신해 자신을 성결케 한 후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제사를 드려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 뜰은 제사장이 외부의 부정으로부터 성결을 유지시켜 주는 거룩한 장소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부정한 백성이 직접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의 거룩을 훼손하는 일을 방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부정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 중보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놋제단의 제물이 자신의 생명을 대속하기 위해 피를 흘리는 것처럼 부정한 사람은 자신의 속죄를 위해 성결한 제사장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중보자의 사상은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53:11)고 말한 중보자로서의 메시야 사상으로 발전되었다. 따라서 부정한 백성은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사상은 기독교 신앙의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따라서 성막 뜰은 거룩하게 구별되어야 하고 성막 뜰을 감사고 있는 포장이 그 역할을 하도록 성막은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중보의 개념은 놋제단과 성막 뜰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범죄와 허물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범죄는 형벌을 가져오게 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형벌 이전에 그들이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신 것이다. 처벌만으로는 죄인을 온전케 만들 수 없는 것이다. 비록 형벌을 통해 범죄의 대가를 치렀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그가 온전케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에게는 죄에 대한 책무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죄책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가 완성되는 최후 심판의 날에 그 사람을 여전히 고소할 것이며 하나님은 거룩한 나라에 결코 그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이다. 따라서 죄책으로부터 영원히 그 사람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긍휼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출애굽기 28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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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우주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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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성막의 구조 및 그 안에 들어 있는 기물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모세에게 계시하신 고유한 형태와 양식을 가지며 아울러 고유한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앞장에 이어 계속되어진 제사장 의복에 대한 계시에서도 그 사실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제사장 의복은 하나님을 예배함에 있어 다른 기구들에 대한 가르침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성막과 그 기구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 의복 역시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응답과 인도하심을 받아야 하며 그것이 실제 생활 속에서 그리고 예배 속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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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

제사장 의복은 단순히 제사장들이 입어야 하는 예복이라는 옷의 수준을 초월한다. 제사장의 의복은 제사장에 대한 권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행할 직무를 위해 기름부음을 받고 백성들의 중보자로 위임받았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로 하여금 고백하게 하기 때문이다.

제사장은 누구보다도 여호와 앞에 가장 가까이 나아갈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항상 여호와 앞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에봇에 부착되어 있는 판결의 흉배는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여호와 앞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거기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열두 개의 새긴 보석들이 달려 있다. 흉패 속에 들어 있는 우림과 둠밈은 여호와의 심판과 그의 백성에게 내려 주시는 특별한 지시를 암시해 주고 있다는 것에서도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제사장의 관 위에 새겨진 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다. 즉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과거에 부르셨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여호와에 의해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을 상징해 주고 있다. 특히 우림과 둠밈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의지가 어떤 것인가를 밝혀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것은 여호와의 주권(Lordship)을 상징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자의적인 결정에 있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결정 과정에 언제나 참여하실 뿐만 아니라 그 결정의 가부를 친히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그만큼 하나님의 의지는 이스라엘의 의사 결정에 있어 언제나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막의 기본 개념, 즉 여호와께서 친히 임재하신다는 개념과 일치하며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소유라는 사실을 한결같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들과 늘 함께 계시는 여호와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경영해 나가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기본적인 삶의 자태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존재를 배제하고서는 어떤 형태의 삶에도 존재 가치를 부여할 수 없다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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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중보자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 의식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과 더불어 중시된 것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제사장이 입어야 할 의복이었다. 특별히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 그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충돌되어 죽을 수 있다는 경고(35)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과정에서 제사장이 여전히 살아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보여준다. 제사장의 겉옷의 가장자리에는 금방울과 석류가 돌아가며 달려 있는데 제사장이 성소에서 그의 직무를 행하는 동안 이 방울들이 서로 부딪쳐 소리가 들리게 되어 있다. 따라서 예배에 참여하는 백성은 성소에 들어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 움직일 때마다 내는 방울 소리를 들음으로서 순조로이 제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오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백성의 예배를 받으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제의에 합당하지 않는 요소가 있을 경우 성소에서 제의를 행하던 제사장은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그 때에는 더 이상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됨으로서 하나님께서의 이스라엘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성소 밖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비록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행하는 것으로 대신되었다 할지라도 그 예배의 시종일관 백성과 제사장이 여전히 함께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소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가 계속 들리고 있는 동안 이스라엘은 여전히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따라서 모든 제의 순서가 끝나고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까지 이스라엘은 방울 소리를 통해 하나님 앞에 그들이 서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였다.

이처럼 제사장이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나간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또 다른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세긴 정금의 패이다. 여호와 앞에서 성결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제사장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여호와를 위해 성별된 자들은 바로 이스라엘 자신이었으며 제사장은 이스라엘의 대표로 성별되었기 때문이다. 이 패는 관 위에 매어 언제나 아론의 이마에 있게 만들었는데(37) 이것은 제사장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언제나 불결한 죄악에서 떠나 여호와 앞에서 성결해야 할 것을 상기시켜 주었다.

따라서 제사장과 이스라엘은 별개의 존재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제의와 의식이 끝날 때까지 이스라엘과 제사장은 혼연일체가 되어 여호와 앞에 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을 성막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언제나 여호와 앞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해준다. 또한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직무를 수행하는 제사장은 곧 이스라엘 백성과 한 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이 제사장과 한 몸이라는 사실은 그들 역시 중보자의 위치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중보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은 이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부터 주어진 것이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5-6). 이 말씀처럼 이스라엘은 세상 모든 민족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다. 즉 이스라엘은 모든 세상 족속의 중보자로 서 있어야 하며 이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사명임과 동시에 이스라엘만이 가지는 독특한 존재에 대한 정체성(identity)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이방의 구원을 염두에 두셨음을 밝히신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부르실 때 이방의 구원을 결코 배제하시지 않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율법과 성막으로 대표되는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운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이방인들이 포함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러한 사상은 가나안 정복의 역사에서도 결코 간과되지 않았다. 특히 라합과 같은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여호와의 총회에 가입될 수 있도록 허락된 것도 이러한 맥락과 같이 한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한다는 사상은 이사야서에서 신학적으로 증명되는데, 이 역시 제사장 나라로서 사명 의식을 회복한 이스라엘이 세상 나라에 대해 중보자로 서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성막의 제도는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출애굽기 29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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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통치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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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은 첫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예표하며 둘째, 그리스도의 몸이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예표하며 셋째,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단계를 예표하는 요소이다(Chester K. Lehman). 실제로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과 동일시 하셨는데(2:19) 이 성전은 성막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막을 초월하신 분이시다.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8:2)는 히브리서 기자의 말과 같이 예수께서 대제사장으로 섬기신 참 장막은 옛날의 성막보다 월등하였다. 이런 점에서 지상의 성소였던 성막은 천국 성소의 그림자이며 모방에 불과하다. 그러나 성막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이 돌이 되어 함께 지어져 가는 교회(2:19-22 참고)를 예표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인 천국의 성소를 예표한다는 점(21:3, 22)에서 고유한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본문의 대제사장 위임식과 더불어 그 회막에서 친히 그의 백성을 만나시리라고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약속(42-46)은 성막의 고유한 가치와 의미를 충분히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제사장 위임식은 하나님께서 친히 명하신 것이며 이것은 제사장직의 신적 권위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성막은 구약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여호와의 임재를 표상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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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임식의 주인공이신 하나님

제사장 위임식의 특징은 기름부음을 받는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그 목적은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권리와 의무의 영속성을 확립하는데 있다(9). 이렇게 함으로써 아론의 계열만이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소견에 따라 사사로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부작용을 미연에 방지할 뿐만 아니라, 제사장의 고유한 업무를 규정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제사의 거룩성을 유지하게 해 준다.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을 자들이 희생 제물이 될 수송아지의 머리에 안수하는 의식은 그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예비적인 절차였다(10). 이 의식은 성막 문에서 거행되었는데 그 때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그들을 만나 주시고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신다. 이 역시 제사장직의 신적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회막 문에서 의복을 입고 기름부음을 받고 속죄를 위한 안식과 제물을 온전하게 태우고 그 피를 아론과 의복 그리고 그 아들들에게 뿌리는 위임식의 절차는 철저하게 여호와 앞에서 행하여졌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여호와께서 그 자리에 임재해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여호와는 제물을 받으시는 주인공이시다. 따라서 제사장의 위임식은 살아계신 여호와께서 친히 그 자리에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모든 백성에게 선포하는 의식이기도 하다. 이 의식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한다.

속죄제나 위임식에 드려지는 제물과 마찬가지로 하루에 두 차례씩 제단 위에 드리는 제물 역시 여호와의 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38-39). 이 제물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는 아침과 밤이 시작되기 직전인 저녁에 드려졌는데 이것은 하루 일과가 여호와께 드리는 것에서 시작되며 여호와와 더불어 끝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들과 친히 함께 일상 생활에 참여하심을 보여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제물을 드린다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여기에서 종교적 제의가 갖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종교적 제의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신의 임재를 증거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제의는 여호와의 임재를 증거하는 행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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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46)고 하신 말씀에서 성막 예배의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모든 예배의 절차와 성막의 집기들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며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만나신다는 외형적 증거인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눈으로 보거나 손으로 만짐으로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막에서 진행되는 모든 절차와 양식은 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고 있다. 따라서 성막 예배에 참여하는 백성은 누구나 그들과 함께 계시는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성막 예배의 중요성을 찾을 수 있다.

성막은 처음부터 끝가지 여호와의 임재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될 것”(45)이라는 약속은 이 성막을 가리켜 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막 예배에 참여하는 이스라엘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이스라엘은 성막 예배를 통하여 애굽에서 불러내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성막 건설의 목적은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성막을 건설하게 하신 하나님의 목적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외형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내가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들 중에 거하려고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줄을 알리라 나는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니라”(46).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성막은 시내산 언약의 외형적 증표(seal)가 된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여호와께서 그 백성 이스라엘과 함께 계실 목적으로 지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성막의 존재를 통해 여호와의 임재를 늘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늘 함께 하신다는 약속은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신다’(21:3)고 기록한 요한 사도의 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성막은 하나님의 왕궁과 다름없었다. 하나님은 이 궁정에서 그 백성과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때문에 다른 나라 백성들과 달리 그들에게는 통치자인 왕의 존재가 필요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바로 그들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보여준다. 곧 말씀으로 그 나라와 백성을 통치하신다. 하나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앞세워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의 통치는 전적으로 그 말씀에 따라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것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 말씀 통치의 구체적인 구현이 바로 시내산 언약이었다. 이른바 율례와 법도를 하나님께서 시내산 언약에 담아 놓으셨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힘의 통치가 아닌 말씀의 통치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의 정체(政體)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나라는 유형적인 형태의 법률이나 정치 체제를 갖지 않는다. 하나님의 나라는 율례와 법도라고 하는 무형의 법으로 통치되는데 그것은 바로 여호와의 말씀인 것이다. 또한 여호와는 창조주로서 모든 유형의 체제를 초월하신 분이시다. 영원하시고 자존(自尊)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여호와는 일정한 형태의 왕권을 초월하신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는 영적인 통치를 펼치시며 그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성막이라고 하는 유형의 형태를 그 백성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적 통치를 현상 세계의 백성에게 보여주는 최소의 방편이었다. 하나님은 성막이라고 하는 통치의 방식이나 체제조차도 필요하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그 백성을 위해 성막을 주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막의 구조와 역할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는 계시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방법을 통해 그 백성을 다스리시기로 하신 것이다. 반면에 현상 세계에 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성막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구조물보다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궁정이었다.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스라엘은 성막의 권위를 인정해야 했고 여호와의 말씀에 근거한 삶을 추구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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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0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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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한 하나님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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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는 크게 이스라엘의 출애굽에 대한 기사와 성막 건설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25장부터 31장까지는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를 그리고 35장 이하는 성막 건설에 대한 기사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20-24장의 율법에 대한 계시와 32-34장의 금송아지 사건 역시 성막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출애굽기는 사실상 성막 건설에 대한 기사를 그만큼 중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출애굽과 성막이 그만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외형적 증거이다.

실제로 출애굽의 목적은 야곱의 후손들로 하여금 하나의 나라를 세우는 것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아브라함의 언약에 참여한다는 민족 공동체로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백성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들이 세울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치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점에서, 나아가 성막이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세울 나라와 성막은 하나의 연결선상에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 건설할 나라의 전형(全形)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와 말씀의 통치를 받는 이스라엘 나라의 특수성을 성막에서 그대로 찾을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때문에 성막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구조물일 뿐만 아니라 성막 중심의 삶은 이스라엘이 세울 나라의 문화적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성막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상징성을 넘어 그 실체(實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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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화 중심으로서의 성막

성막의 다른 집기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향단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데 있어서 가장 현저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특별히 구별해 제조한 값비싼 향(34-38)을 아침저녁으로 향단에서 태울 때 그 향기는 이스라엘에게 몇 가지 의미를 가진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향의 향기를 흠향하신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외형적인 표지이다. 나아가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신다는 것은 제사장으로 대신하는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이 여호와 앞에 열납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다른 의미는 여전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통치 아래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향을 사르는 행위는 여호와에 대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향단에서 제사장이 아침, 저녁으로 향을 사르는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인 행위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하는 하나의 문화적 형태로 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성막에서 행해지는 다른 모든 의식(儀式)과 절차가 그렇겠지만 아침, 저녁으로 향을 사르는 행위는 하나님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문화적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이방 나라들에서 찾을 수 없는 고유한 이스라엘만의 독특하였다. 물론 다른 이방 종교에서도 그들의 신을 향해 향을 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향을 피우는 것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여호와의 임재와 통치라는 성막의 기본적인 의미를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이방 종교에서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의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이방 백성들과 구별되는 특별한 위치에 서 있음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점에서만 독특한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의 제사장적 사역을 위해 불리움 받았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것이다. 때문에 성막에서 향을 사르는 일은 이스라엘의 평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의 평화는 곧 이방의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은 모든 이방 나라의 평화를 대변해 주는 위치에 서 있다.

이스라엘의 독특한 위치는 이스라엘의 자손은 누구나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려야 한다는 규례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12). 20세 이상 성년이 되면 부자나 가난한 자나 반 세겔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고 그 속전을 회막의 봉사를 위해 사용하게 하였다. 이미 여호와의 구속을 받아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 이상의 속전이라도 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누구나 반 세겔을 속전으로 드리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15). 특히 속전을 거론함에 있어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와 더불어 말씀하셨다는 점에서 속전은 성막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의미는 앞서 말한 것처럼 이방 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독특한 신분을 이해함으로써 더 분명해진다. 성막은 이스라엘만이 가지는 고유한 문화이다. 성막과 유사한 종교적 행위나 제의가 있다 할지라도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현격한 차이를 가진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성막의 제의를 통해 이방 나라와 확연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만큼 성막은 이스라엘의 사상적, 문화적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신분은 성막 중심의 삶을 사는가 그렇지 않은가로 구별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 성막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속전을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막이야말로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는 유일한 문화 중심체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스라엘이 속전을 드리는 것은 단순히 성막을 유지, 보수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여전히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들이 이방 나라에 대하여 제사장 나라로서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음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통해 구현됨으로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드리는 속전은 성막이 건실하게 서게되는 원동력인 동시에 성막을 중심으로 형성되는 문화의 정체성(identity)과 더불어 이방 나라의 평화를 보장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의 존재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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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된 성결의 의미

반면에 이스라엘이 항상 기억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특별히 구별되었다는 성결 의식이다. 성결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외형적인 신앙 고백과 동시에 신앙의 내용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사장들에게 있어서 특별히 성결을 요구하시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회막에 들어갈 때마다 물로 씻어 죽음을 면하도록 물두멍을 성막에 두는 것(20)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진다. 특히 하나님은 제사장의 성결과 성막의 성결을 위해 특수하게 제조되는 몰약을 만들도록 요구하셨는데(23-25)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성결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사장과 성막의 기물들을 성결하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지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이유에서든 죄의 오염과 결핍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 이러한 반신국적인 죄의 요소들은 결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 역시 성결된 삶으로 그 백성을 통해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외형적인 군사력이나 경제력을 바탕으로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것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그 나라의 백성이 드러내는 성결된 삶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로서 그 자태를 드러내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구별할 수 있는 외형적인 척도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성결이 무너지고 무시되는 사회는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낼 수 없다. 즉 성막을 섬기는 일이나 성막의 제의에서 성결을 찾을 수 없다면, 혹은 이미 오염되어 더 이상 성결을 찾을 수 없다면 거기에서 더 이상 성막으로서의 기능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이스라엘에게서 성결을 찾을 수 없다면 역시 거기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특별하게 제조된 관유나 향을 어떤 목적으로든 사적인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드는 자를 살려두지 말라고 하신 것 역시 이런 의미에서 이해될 수 있다(33, 38). 그만큼 하나님의 나라는 성결한 나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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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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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나라의 완성과 안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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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막을 통해 보여지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

성막과 그 안에 있는 집기 그리고 제사장과 제사장의 의복 및 성막에 필요로 하는 모든 부속물들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성막의 기원이나 제사장직의 기원이 하나님의 권위로부터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앞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성결하게 구별되어야 했다. 이와 더불어 이스라엘 백성 역시 세속과 구별된 생활, 즉 성결한 삶을 통해 그 나라의 특성을 드러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 지혜와 총명과 지식을 갖춘 숙련된 일군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 모든 조건을 갖춘 브살렐(2)과 오홀리압(6)을 지명하셨는데, 사실 이들의 이름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성막을 건설함에 있어 하나님은 그 양식만 아니라 건축가까지 이미 마음에 두고 계셨다. 그만큼 성막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철저하게 성막 건설에 대하여 그 양식을 계시하시고 주어진 식양대로 성막을 건축할 수 있도록 적합한 인물까지 정하신 것에서 하나님 나라의 또 다른 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의 우발적이고 인위적인 방법으로 세워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부터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어지고 실현되는 것이며 완성되는 것이다. 그 역사적 과정에 따라 하나님은 적합한 인물을 불러 사용하셨고 때로는 하나님께서 친히 계시하거나 혹은 계획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백성은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아울러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역사적 구현이라는 중요한 위치에서 부름을 받았다. 그들은 애굽의 노예라는 신분에서 벗어나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분의 변화와 더불어 그들에게 유사 이래로 찾을 수 없는 복을 주셨는데, 비록 이 복이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것이었다 할지라도 아브라함조차도 이 복을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약속이 출애굽을 통해 성취되었고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사실은 이스라엘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새롭게 관찰하게 해 준다. 이스라엘은 자의적인 결정에 의해 독립된 국가를 형성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을 불러내신 분은 바로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따라서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국가를 세워나간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곧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라는 사실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며,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정당성을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400여 년 전 주어진 아브라함 언약이 이제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의해 성취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 모든 것을 증거해 주는 증표인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적 증거는 성막이라고 하는 성별된 구조물 속에 집대성되었다.

따라서 성막은 아브라함의 언약 성취와 더불어 언약을 성취하시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를 역사상에 증거하는 독특한 실체(實體)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성막을 통해 아브라함의 언약을 기억할 것이며, 새롭게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의 정당성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이 성막 중심의 문화를 세워나간다는 것은 다름 아닌 시내산 언약의 성취로 이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구할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는 외형적인 정치, 군사, 경제 등의 형태를 빌어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바로 언약의 완성으로 구현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비록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에 따라 출애굽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이제 그들에게 주어진 시내산 언약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실질적으로 하나님의 통치에서 떠나 있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아브라함의 언약 안에서 출애굽을 경험한 그들이라면 이제 누구나 시내산 언약에 참여하여야 하는데, 이 시내산 언약의 구현은 그들에게 주어진 성막 중심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성막 중심의 삶에 대해서는 레위기에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삶의 규범은 시내산 언약에서 이미 제시된 것이기도 하다. 그 중에 본문에서는 안식일 규례를 재차 언급하고 있는데(13절 이하) 이것은 시내산 언약의 중심 사상임과 동시에 하나님 나라의 성별된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하나의 예증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제 그들에게 요구되는 안식일 규례는 이방 나라들과 그들의 구별된 삶의 전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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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영원한 언약으로 주어진 안식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안식일 규례와 하나님 나라의 고유한 특성을 일치시키신다는 점에서 성막 건설을 계시하시는 과정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킬 것을 요구하시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31:13). 이 말씀에서 두드러진 사상은 안식일이 여호와께 속한 특별한 날이라는 점이다. 안식일은 천지 창조의 완성과 함께 기억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창조주 하나님만이 가지시는 특별한 날로서의 안식일이 이제 그 백성을 통해 지켜진다는 것은 이런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이 안식일에 참여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사역을 기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고백을 표시한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중시하시고 그 백성에게 안식일 규례를 정하신 것이다. 나아가 이 규례는 이스라엘의 정체성(identity)을 규정하는 중요한 표징이다. 이방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이 이스라엘과 같은 한 민족이 되었다는 할례 의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안식일 규례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만큼 안식일은 이방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를 구별하는 외형적인 표징이기도 하다.

따라서 안식일 규례를 범한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서 자격이 없음을 의미한다. 이런 경우 하나님은 단호하게 죽이라고 명령하신다(14). 왜냐하면 안식일을 범한다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거부한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친히 통치하시는 나라이다. 이 사실을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자에게서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자격을 찾을 수 없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안식일 규례를 영원한 언약으로 삼으셨다(16). 안식은 창조의 완성, 즉 구속사의 완성을 예표한다는 점에서 언약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모든 언약은 구속사의 핵심을 이룬다. 그 중에서 안식일 언약은 모든 언약을 포괄적으로 품고 있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이다. 안식에 참여하는 자만이 구속의 완성을 바라볼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다.

이 안식일 언약의 성취가 성막의 완성과 긴밀한 관련을 가진다는 사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 질 일을 통해 명확하게 부각된다. 이사야는 이 점을 놓치지 않고 새 하늘의 완성이 곧 안식의 완성임을 제시하고 있다(65:17, 22). 요한 계시록 역시 이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21:1). 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히브리서 기자에 의해 더 분명하게 제시된다(8-9).

출애굽기 32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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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성 안에 담긴 반신국적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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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산에서 모세가 율례와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를 받고 있던 동안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회중 가운데서는 적지 않은 동요가 발생하고 있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간 지 40여 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다는 것이 그 원인이었다. 그들의 대책은 여호와를 대신할 신()을 만드는 것이었다(1). 그들은 각기 금고리를 빼어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것을 여호와 하나님으로 섬기기로 하였다.

본 장의 분위기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계시를 받고 있는 분위기와 전면 대치된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통치하신다는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율례와 성막이 모세에게 주어지는 것과는 달리 산 아래에서는 자기들이 만든 신상을 경배하며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의 신상과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막은 묘하게도 대칭을 이루며 극적인 긴장감을 가져다 준다는 데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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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상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기들의 정체성(identity)을 확인하고 그 신분을 각성한다는 것은 출애굽 사건이 가지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나님은 오랜 세월동안 애굽에서 이스라엘의 영적 각성을 기다리셨고 마침내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언약을 기억하고 돌아오고자 할 때 그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셨다(출애굽기 2장 구속사 강해 참조). 이스라엘이 신국 백성으로 자의식(自意識)을 갖는 순간 이미 출애굽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국 백성의 속성을 하루아침에 요구할 상황은 아니었다. 때문에 하나님은 애굽에 내린 10가지의 재앙을 통해 그들에게 오염되어 있었던 신관(神觀)을 정화시키셨다. 그리고 유월절 사건을 통해 애굽과 철저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의식을 가지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과정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극적인 사건은 홍해 사건이었다. 홍해 사건은 단순히 죽기 직전에 기적과 같이 살아났다는 경험만을 이스라엘에게 가져다 준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해석과 같이 그들은 모세와 더불어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이런 점에서 홍해 사건은 이스라엘의 신분이 세속 국가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증한 사건이었다(출애굽기 14장 구속사 강해 참조). 홍해 사건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신국 백성으로 성숙한 위치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라 사건과 므리바 사건은 여전히 성화의 과정을 겪어야 할 이스라엘의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은 신 광야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여호와이신 것과 철저하게 그들의 삶을 보장해주신다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만나를 통해 보여주셨다. 하나님에 의해 인생이 보장되는 삶이야말로 인생의 가장 복된 상태라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시내산에서 언약을 체결하셨다.

그만큼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여호와는 절대적인 분이셨다. 때문에 여호와의 말씀을 전달해주는 모세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위치에 있던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40여일 동안 아무런 소식이 없을 때 광야에서 모세만을 기다리고 이스라엘은 적지 않은 동요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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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백성이 보인 반신국적 행위

이스라엘이 당면한 문제는 모세를 대신할 인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모세의 생사를 떠나 당장 이스라엘을 지도할 지도자로서 모세와 같은 인물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들의 지도자를 찾는 대신에 직접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모세의 실종으로 발생한 문제이기 때문에 모세와 같은 지도자를 찾는 것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직접 하나님의 지도를 받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는 것에서 이스라엘이 처한 심각한 영적 상태를 본문은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들었던 여호와를 상징하는 금송아지는 실상 여호와께서 가장 강력하게 금하신 우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범하였다. 1계명은 여호와의 본체론(ontology)에 대한 계명이다. 이미 여호와라는 성호(聖號)가 말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본체를 밝히시는 분이시다(3:14). 이것은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나 상태로 정지됨 없이 역사를 주관하시며 진행해 나가시는 분이심을 계시한다는 점에서 여호와라는 성호에 합당하신 이름이다. 이미 어떤 형태나 상태로 정체되어버린 신관은 더 이상 여호와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굽에서 자기들을 불러내신 여호와만을 생각했다. 지금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 그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으로 진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관에서 부패가 발생하였다.

그들의 신관에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그들은 자기들의 신을 하나의 형상으로 상징화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 금으로 조각하여 송아지를 만들었다. 어떤 형상으로 신을 대신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다. 비록 그들이 여호와를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의 형상을 만든 것이 곧 우상 숭배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하나님은 인간 본위의 제의나 예배를 원하시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을 명하신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법도는 어떤 이유에서든 인간들이 상상하거나 만들어 낸 것을 거부한다. 성막 건설과 각 구조물과 집기 등을 자세히 계시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상태를 가리켜 모세에게 그들이 부패했다고 지적하신다(7). 이 말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파기했다는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찾을 수 있다(본문 주석 참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아래에서 이 세상과 구별된 독특한 존재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더 이상 이스라엘의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기꺼이 그들을 버리시겠다는 의지를 모세에게 밝히셨다. 그러나 모세는 아브라함의 언약을 상기시키며 진노를 거두어 주실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11-13). 모세의 청원은 충분히 하나님의 의도를 읽은 것이었다. 곧 언약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서 그의 청원이 나왔기 때문에 하나님은 모세의 청을 받아주시기로 하신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증거의 두 판을 가지고 이스라엘 진영에 돌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금으로 조각한 송아지를 진 중앙에 두고 한창 무르익은 축제의 분위기에 빠져 있었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행위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하다고 결정했다. 그리고 모세의 뜻을 받들어 레위 족속이 나와 칼로 심판을 행했다(27). 그리고 그 날에 삼천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자신들을 심판한 것으로 여호와께 인정되었다(28-29).

이 사건은 지금까지 전개된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와 극적인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더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성막은 언약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반면 금송아지는 언약의 파기와 하나님의 심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성막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표상하기 때문이다. 아직 성막이 건설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판단에 따라 금송아지를 만드는 죄를 범하고 말았다. 그러한 그들에게 성막이 주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바르게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출애굽기 33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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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중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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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두 개의 돌판을 깨뜨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상징한다(32:19).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는 반신국적인 불순한 사상으로 인하여 시내산에서 맺은 언약이 파기되었다. 모세는 일련의 정화의 과정을 통해 금송아지를 만든 불순한 사상을 이스라엘에서 제거한다. 그런데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와 35장 이하의 성막 건설 사이에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성막의 중요성을 깨닫게 한다. 왜냐하면 일련의 정화 사건 이후 하나님은 다시 모세에게 두 개의 돌판을 준비하라고 하신 것(34:1)과 더불어 성막이 건설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언약 파괴에 따른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막의 기능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시사해 준다. 두 돌판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언약의 회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막의 주요 기능이 가지고 있는 회복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27장 구속사 강해 참고). 이런 점에서 파기된 언약이 성막 안에서 치유된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따라서 본 장은 언약 회복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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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과 단절된 이스라엘

하나님은 잠시 진노를 거두시고 사자를 보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의 거민들을 몰아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을 그곳으로 들이시되 하나님께서는 함께 가시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1-3).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셨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더 이상 부정한 백성과 함께 하시지 않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부정한 백성을 죽이시는 것으로도 나타나지만 이제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시내산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떠나게 하신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서운 징계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떠나게 된 이스라엘의 심적 고통과 상황은 마치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한 아담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징계의 말씀 중에서도 아브라함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이 성취 될 것에 대한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곧 여호와의 사자를 가나안에 보내 이방족속을 몰아내고 그곳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해 들이실 것을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3:20-33절에서 이미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의 확인이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의 정신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가나안 땅 정복에 있어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를 앞서 보낼 것이라고 약속하신 바 있다.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하신다(23:21). 이름은 인격을 의미한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진 분이시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리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3:14)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름을 여호와의 사자가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앞으로 이미 계시하신 언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여호와의 사자를 통해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을 순종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기도 하다.

하나님은 이 여호와의 사자를 소개하시면서 참된 신앙으로 성결하게 살 것을 요구하셨다(23:24-33).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성결하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사실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인도하는 것은 모세가 아니라 바로 여호와의 사자였다. 그리고 그 여호와의 사자는 하나님과 동등한 권위를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성결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스라엘 백성이 단장품을 제거한 일(6)은 성결한 삶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 밖으로 회막을 옮기시고 그곳에서만 모세를 만나시고 말씀을 나누셨다(7-11). 아직 성막이 건설되지 않은 상태에서 회막을 진 밖으로 옮기신 것은 성결하지 않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하실 수 없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이 회막에 구름 기둥이 머물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있는데 그곳에서 하나님은 모세와 대면하시고 말씀을 나누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 제약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이제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의지를 알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구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모세와 얼마나 친하게 지내셨는지를 보여준다. 그만큼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특별하게 구별된 인물이었다. 나아가 이 사실은 모세가 얼마나 하나님을 깊이 있게 알고 있었는가를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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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성의 중보자로 하나님 앞에 선 모세

모세는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사자를 앞서 보내시겠다는 약속(23:20, 33:2)을 상기시키며 그의 사역에 대해 알고자 한다(12).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중보자인 모세가 취해야 할 당면한 문제였다. 모세가 처음 시내산에서 바로의 학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실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모세와 함께 가실 것(3:12)이라는 약속을 받은 바 있다. 모세는 이제 시내산에서 추방당하는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그렇다면 과연 누가 함께 갈 것인가에 대하여 하나님께 여쭈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하나님은 (ינפ)가 친히 가리라”(14)고 응답해 주신다. 여기에서 를 상징하는 단어는 나의 얼굴이라는 말로 하나님은 여호와의 사자와 하나님의 얼굴을 동일한 인물로 묘사하신다. 즉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를 가리켜 하나님의 얼굴(ינפ)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대답 속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동안 어떻게 성취되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출애굽의 과정과 광야 생활을 통해 시내산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서 이 약속은 성취되었다. 그러나 시내산 언약이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도 여호와께서 이루셔야 할 사역이 남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긴장 가운데 여호와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가지신 분이시다.

모세는 하나님 자신의 위격(person)과 여호와의 사자로 묘사되는 분의 위격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시는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명확한 인식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33:19)는 말씀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반석 틈에 두시고 하나님의 손으로 모세를 가리우신 후에 모든 영광을 친히 보여주셨다(22-23). 그러나 모세는 결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모세가 과연 여기에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모든 의문을 다 풀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더 이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모세에게 있어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위격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곧 여호와 자신이라는 점에 대해선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가지신 분이시며 여호와의 얼굴로 묘사되는 그 사자는 바로 여호와 자신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하나님의 극진하신 긍휼 가운데 그를 덮고 지나가시는 여호와의 등을 보았다(23)는 점에서 모세는 나름대로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신비를 이해하였을 것이다.

이와 함께 모세는 더 이상 여호와의 사자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데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두 번째 돌판을 만들어 시내산으로 올라갔다(34:1)는 사실에서 모세의 의문이 풀어졌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언약의 증거판이 다시 만들어진다는 것은 깨어진 언약의 회복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제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에 다시 속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의 중보자로서 하나님과 재차 언약을 체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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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4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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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언약의 회복과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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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의 회중이 참여한 가운데 성대한 언약 체결식을 행하신 바 있다(24). 그리고 언약 체결의 증표로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두 개의 돌판을 주셨다. 그러나 산 아래에 있던 이스라엘 회중 안에서 발생한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시내산 언약이 파기되고 말았다. 이에 하나님은 심히 진노하셨고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회막을 옮기셨다. 그 결과 오직 모세만이 이 회막에서 여호와를 알현할 수 있었고 이스라엘은 모세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모세는 자신의 중보 사역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음을 중시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백성(33:16)이라고 호칭하면서 관계 회복의 길을 부단히 모색한 결과 마침내 언약의 회복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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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의 성품 안에 담겨 있는 긍휼

두 번째 언약 체결식은 첫 번째와 달리 이스라엘의 중보자인 모세만이 참여했다. 하나님은 그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 가운데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신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3:14) 말씀에서 이미 계시된 바 있다. 이 이름은 여호와의 성호에 대한 본체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본문은 여기에다 여호와의 성호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계시해 주고 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여손 삼사대까지 보응하리라”(34:6-7).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은 여호와의 성호가 가지고 있는 본성을 계시해 주신다. 이것은 시내산 언약을 파기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해 준다. 아울러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32:14)고 말하는 긍휼의 근거를 보여주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의 위엄 앞에 엎드렸다. 그는 이 순간 여호와를 대면하는 유일한 사람임과 동시에 죄악을 행한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는 중보자로 그 앞에 서 있다. 목이 굳은 이스라엘이 언약을 파기한 죄에 대해 중보자로서 여호와의 긍휼에 호소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9).

주여 내가 주께 은총을 입었거든 원컨대 주는 우리 중에서 행하옵소서 이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이다 우리의 악과 죄를 사하시고 우리로 주의 기업을 삼으소서”(34:9)라고 한 모세의 청원은 하나님이신 여호와하나님의 택한 백성이스라엘과의 관계(19:4-6)를 재확인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시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열국 중에서 택한 내 소유’(הלגס:이 말의 뜻은 특별한 보물이다)라고 하신 바 있다(19:5). 따라서 지금 모세는 여호와의 특별한 보물로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기업(להנ)으로 삼아달라고 청원하고 있다. 즉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출애굽기 194-6절을 상기시키는 발언이기도 하다.

모세의 청원은 받아들여졌다. 하나님은 재차 언약을 세우시고 성결한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도리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신다(10-26). 여기에 언급된 내용은 이미 시내산 언약의 내용에 상세히 기록된 것이었다(20-23). 모세는 처음과 같이 40일을 시내산에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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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내산 언약의 갱신

본문의 10-28절은 출애굽기 32-34장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송아지 사건 이후 재차 언급함에 있어 여호와에 대한 순결한 충성의 요구와 우상 숭배에 대한 경고 그리고 결코 우상 숭배의 불순종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하나님의 의지가 본문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된 본문에서는 가나안 7족속과 어떤 형태의 언약도 맺지 못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11-12) 그들의 신들을 제거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13). 이 명령을 수행함에 있어 그들과의 혼인과 그들의 우상 숭배의 축제에 참여하는 행위들을 금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순수성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믿음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의 요구였다. 특별히 신상을 부어만들지 말라(17)는 명령은 금송아지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 신상(הכסמ)이란 단단한 나무로 형상을 만들고 그 위에 도금한 것으로 금송아지를 만든 일을 의도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불순종 사건을 되돌아보며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견고히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유월절과 초태생을 여호와께 드릴 것과 안식일을 지킬 것에 대한 규례(18-21)와 더불어 3대 절기마다 여호와를 찾아 경배하도록 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나타내는 이스라엘의 독특한 문화라는 점에서 충분히 언급할 가치가 있다(20-23장 구속사 강해를 참고하라). 특히 너의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34:26)는 말씀은 이스라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나타나는 긍휼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긍휼은 하나님 나라의 특성, 곧 하나님의 통치가 보여주는 특성을 표시하는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이다.

모세가 다시 새긴 언약의 돌판을 들고 시내산을 내려와 이스라엘 회중으로 돌아왔을 때 모세에게는 현저한 변화가 발생했다. 그것은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이스라엘 백성은 감히 모세에게 가까이 다가 갈 수 없었다. 이것은 처음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 올 때와 현저히 다른 모습이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축제를 벌이고 있었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파기한 행위였다. 그리고 그 행위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배척한 것이지만 동시에 모세를 배척한 것과도 같다. 이미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배척을 받은 바 있던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중보자로 세움을 입었다는 점에서 모세와 회중과는 구별되어야 했다. 그 얼굴의 광채만으로도 회중은 모세에게 가까이 갈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회중과 각별하게 구별하셨음을 보여준다.

또한 회중으로부터 배척을 당했던 모세의 권위는 이제 하나님에 의해 재확립되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회중으로 돌아올 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하나님의 대변자였다. 모세는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시내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율례와 법도를 다시 온 회중에게 선포하였다. 그리고 모세의 중보 사역을 통해 이스라엘의 신분은 예전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었다. 언약의 중보자였던 모세는 하나님의 대리인이기도 하다. 이스라엘은 그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과 맺은 언약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출애굽기 35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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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과 하나님 나라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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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산 언약의 선포와 성막 계시는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정체성(identity)을 밝히는 중요한 요소였다. 이로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확고한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아울러 금송아지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에 존재함에 있어 무엇보다도 여호와에 대한 순결한 믿음과 성결한 삶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였던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을 중재하는 중보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갖게 되었고 이스라엘 회중 역시 모세의 특별한 위치를 구별하게 되었다. 모세에 대한 일련의 배척 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금송아지 사건 이후 모세는 이스라엘 회중과는 구별된 존재로 각인이 되었다.

이와 같이 이스라엘이 신앙을 회복하고 언약 안에 다시 서게 되자 하나님은 드디어 성막 건설을 허락하셨다. 이스라엘 회중은 각기 무릇 마음에 감동되어 성막 건설에 필요한 재료들을 가지고 나와 여호와 앞에 드렸다(21-25). 그리고 모든 백성이 각자 솜씨를 동원해 정교하고 아름다운 성막 건설에 참여하게 되었다. 애굽을 떠나 온 이후로 이처럼 모든 회중이 한 마음으로 성막 건설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만큼 공동체 의식이 깊어졌음을 확인해 준다. 나아가 서로의 지혜와 솜씨를 가지고 더욱 공교하고 정교한 기술을 계발하기 위해 서로 마음을 합쳤다는 것은(35) 그들이 일사불란하게 성막 건설의 일에 참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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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막 건설의 당위성

이스라엘 회중이 한 마음이 되어 성막 건설에 참여했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이 성막 건설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성막은 무엇보다도 여호와의 임재를 표상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미 여호와의 임재를 확인할 수 있는 쉐키나(הנכשׁ ; 구름기둥과 불기둥)를 늘 대면하고 있었다. 즉 출애굽의 특별한 구원을 체험하는 과정에서, 광야 길을 여행하는 노정에서, 시내산에서 그리고 회막 문 위에 항상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는 쉐키나는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상징으로 그들 곁에 있었다.

그러나 쉐키나는 단순히 물질적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쉐키나는 이미 약속한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가 그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증표였다(23:21; 33:14). 하나님의 얼굴(33:14)로 상징된 이 여호와의 사자는 분명히 여호와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독립적인 인격체이시다. 따라서 쉐키나는 여호와의 사자의 인격적 임재를 상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설하게 하셨다는 것은 성막이 여호와의 임재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사실 여호와의 임재만을 목적으로 했다 한다면 그 기능은 쉐키나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쉐키나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도구에 불과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정당하게 그들의 창조주이시자 언약의 성취자이신 여호와를 경배할 수 있는 방도를 성막을 통해 제정해 주신 것이다. 비록 쉐키나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기는 해도 어떤 이유에서든 그 앞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행위는 만일의 경우 쉐키나를 경배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잘못된 결과를 가져오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쉐키나는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끝나야 한다. 예배의 수단이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우상 숭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임재하시는 분이시며 성막과 쉐키나는 그 사실을 상징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영적, 인격적으로 임재해 계시는 영이시며 초월자이시며 영원하신 분이시다. 결코 물질에 갇히거나 가시화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이 정당한 신관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원하셨다. 성막의 모형이나 그 안에 있는 집기나 심지어 제사장의 의복에서조차도 여호와의 임재와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그 모든 요소들은 비로소 여호와께 경배함으로써 참 가치를 드러낼 수 있다. 따라서 성막과 성막의 제도 그리고 예배의 의식은 한결같이 경배의 대상이 곧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웅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설하게 하신 것이 단순히 경배의 처소로서의 성막이 아님을 알게 된다.

성막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 양식이나 구조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도 아니다.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은 성막이 아닌 쉐키나로서도 충분히 가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을 건설하도록 하신 것은 그 양식과 구조 그리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집기 등이 한결같이 경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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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문화 중심지로서의 성막

모세는 이 사실에 입각하여 성막 건설에 모든 이스라엘이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았다. 그들이 참여하는 성막 건설은 곧 그들이 경배해야 할 대상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스라엘 회중 역시 바른 신관을 근거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바로 앞서 금송아지 사건을 통해 이미 그 사실을 확인한 이스라엘은 더 이상 이 부분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신관을 바탕으로 그들이 여호와를 경배하기 위한 처소로서 성막을 건설하는 일에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아가 성막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모든 회중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왕궁을 세움으로서 그들 가운데 친히 강림하시는 여호와를 맞이할 준비를 하였다. 물론 쉐키나에서 모세와 말씀하시는 여호와로부터 그들이 통치를 받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쉐키나가 아닌 궁정에 좌정하신다는 것은 언제나 그들과 함께 거주하신다(dwell)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제 친히 성막에서 그 백성을 만나 주실 것이며 그들의 죄악과 불의를 치유하는 분이신 것이다.

이 일에 하나님은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이 주관하여 성막을 건설토록 하시고 하나님의 신을 충만케 하심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성막을 건설할 수 있도록 하셨다(30, 36:1 참고). 한 마디로 성막 건설은 하나님과 모든 백성이 동역함으로써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회중이 성막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성막은 이스라엘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성막이 이스라엘의 정신적 지주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이루고 있는 문화의 중심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이 성막 문화를 바탕으로 그들의 삶을 영위해야 했고 모든 사람의 정형은 성막을 통해 재해석되어야 했다. 그리고 성막 중심의 삶은 이제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하나님 나라의 문화를 세워나가야 할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성막 중심의 문화를 세워나간다는 것은 그들의 삶이 세속 이방인과 구별됨을 의미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단순히 종교적인 차원에서 이방과 구별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은 종교적인 의미는 여타의 타종교간에서도 상이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종교는 세속의 종교관을 초월한다. 이방의 종교는 일종의 종교적 제의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실존과 계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족 공동체인 것이다.

출애굽기 36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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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좌소(座所)로서의 성막에 담긴 영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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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장에서는 성막 건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자원하여 참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백성이 가져 온 물품이 너무 많아 모세는 부득이 더 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주문할 정도가 되었다(6-7). 본 장에서는 이렇게 백성이 헌물한 재료를 가지고 특별히 성막 건설을 위해 선택된 브살렐과 오홀리압의 지도 아래 구체적인 성막의 모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먼저 성막의 공간을 확보하고 외부와의 구별을 위한 휘장과 앙장 및 널판들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장막과 장막 문이 완성됨으로서 외형적인 성막의 모형이 드러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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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막을 초월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회중과 일정한 간격을 두신 것은 구약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독특한 임재 방식이었다. 특히 금송아지 사건 이후 하나님은 회막을 진 밖으로 옮기시는데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더불어 살만큼 완전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비록 이스라엘이 언약을 회복하고 성막을 건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거리를 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임재 방식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한 제한성은 성막에서도 적용되는데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구별하는 것에서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임재의 제한성이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 하심을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임재의 제한성은 어디까지나 구속사의 과정에서 적용되는 것뿐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휘장이 갈라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자신의 임재를 보이신 하나의 방편이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이러한 공간적 제한성까지도 초월하여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임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제한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막이 비록 제한된 공간이라 할지라도 그 공간이 우주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상징한다는 점에서도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성막의 성소와 지성소는 하늘 궁전을 옮겨다 놓은 것처럼 하나님은 우주적인 통치권자이시다(25장 구속사 강해 참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나와 경배할 대상이 누구이신가를 바르게 알려주기 위함인 것이다.

하나님은 이 지상의 어떤 것으로도 형식화하거나 가시화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피조 세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처럼 가시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은 매우 고도한 신관을 필요로 한다. 지성소 안에 있는 속죄소와 그룹들은 그곳이 하나님의 궁정임을 상징하지만 바로 거기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신다는 사실은 고도한 신관을 갖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사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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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막이 가지는 영적 예배의 상징성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는 쉐키나를 통해 훨씬 쉽게 이해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쉐키나를 향하여 경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보이는 형상으로 제한하는 죄를 범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는 성막 안에 임재하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영적 존재인 하나님을 가장 정당하게 예배한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나타낼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영이신 하나님의 거처로 구별되어야 한다. 비록 아무리 정교하게 수놓고 아름답게 장식한다고 해서 그것으로 하나님의 궁정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친히 그 자리에 좌정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궁정을 설계하고 건축하는 모든 것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궁정으로 구별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이 성막을 건설함에 있어 이 점은 이스라엘이 기억해야 할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다.

또 하나 영이신 하나님께서 성막을 건설하도록 하신 것은 인간의 한계를 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에 대한 예배 역시 영적이어야 한다. 즉 가시적인 형태를 초월한 경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현상 세계에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의 경배를 하나님께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제나 가시적인 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이 영이신 하나님께 경배해야 하는 인간의 한계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영적인 경배를 드려야 할 인간이 가시적인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는 형편을 감안하시어 성막을 주셨다. 여기에서 인간은 비록 제의에 따라 가시적인 경배를 드릴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영적인 예배로 인정하시고 받아 주시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막에서 행하여지는 모든 제의(cult)는 비록 그것이 물질적이고 가시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적인 교감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상징한다. 또한 성막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역시 이 사실을 근거로 가시적인 형태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 점을 무시하고 형식과 절차에 따른 제의를 아무리 정성스럽게 수행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예배로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영이신 하나님은 그러한 물질적인 제의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첫 곡식을 드리고 가축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과 영적인 교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영적 교감이라는 것은 인간이 현상계에 살고 있는 한 항상 가시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인 것이다. 하나님과 영적 교감을 가지는 사람이 취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이 율례와 법도에서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는 성막의 규례에 따른 제의를 행하기 이전에 먼저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가시적인 형태의 제의를 통해 하나님께 경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당히 갖추어야 할 삶의 전형이 되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 예배는 하나의 상징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곧 영적 예배의 외형적인 상징인 성막 예배는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외형적 상징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사실을 기억하고 성막 건설에 참여하여야 한다. 지금 그들이 각종 재료를 가지고 만들고 있는 성막의 외형적 모형은 바로 하나님의 궁정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이신 하나님을 제한하거나 그 장막 안에 가두어 두기 위해 성막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막을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임재하신다는 약속 안에서 그들은 영적인 교제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결한 삶을 바쳐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드릴 경배의 대상은 영이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독특한 존재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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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7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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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통치와 성소의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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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 건설은 그 안에 진열할 집기를 만들면서 점차 구체화되었다. 본 장에서는 지성소와 성소 안의 집기들인 언약궤와 속죄소, 떡상, 등대, 향단과 향단에 사용할 향, 관유를 제조한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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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통치

지성소는 비록 그 화려함에 있어서는 천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 못 미친다 할지라도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여기에는 언약궤와 속죄소가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옥좌(玉坐)를 상징한다. 그런데 언약궤와 속죄소는 하나의 모형을 이루고 있는데 속죄소는 언약궤의 덮개처럼 언약궤 위에 놓여 있었다.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정금으로 안팎을 싸고 윗가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른 언약궤와 달리 속죄소는 정금으로 만들되 양 편 끝에 각각 하나씩의 그룹을 만들어 서로 마주보게 했으며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도록 하였다. 그 결과 속죄소와 그룹 사이에 하나의 공간이 만들어졌는데 이 공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그룹들의 옹위(擁衛) 가운데 임재하시며 이 때 언약궤는 하나님의 발등상과 같은 역할을 한다.

앞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영이신 하나님은 그분이 임재하심에 있어 특별한 공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더욱이 하나님이 좌정하실 의자나 여타의 집기조차 필요치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을 만들고 그 안에 지성소를 구별하고 언약궤와 속죄소를 설치하게 하신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미 밝혀진 것처럼 법궤는 하나님의 말씀 통치를, 속죄소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만나시는 장소이다. 특히 속죄소를 가리켜 시은소(施恩所: Mercy seat)라고 할 때에 그곳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렇다면 언약궤와 속죄소가 한 몸을 이루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베푸실 은혜의 통치에 대한 성격을 묘사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하나님은 휘장으로 성소와 성별된 공간으로서의 지성소를 설치하시도록 하신 것이다.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신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바야흐로 은혜의 통치를 펼치실 것을 보이신 것이다.

무엇보다도 대제사장은 1년에 한차례씩 속죄의 피를 가지고 이곳에서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행하여야 했는데(16:14-17 참고) 이렇게 함으로써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백성은 계속해서 화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것은 백성의 편에서 볼 때 피동적인 것이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능동적으로 그 백성과 화목을 유지하시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하나님과의 화목은 왕이신 하나님 편에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은혜를 베푸심으로서 가능했다. 속죄소를 가리켜 시은소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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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백성의 정당한 태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향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은혜로 통치해 나가신다는 사실을 좀더 구체적인 실체로 보여주는 것이 성소에 있는 집기들이다. 성소에는 진설병을 올려놓는 떡상과 불을 밝히는 등대와 향을 피우는 향단이 자리하고 있다(각각의 집기들에 대한 이해는 본문 강해를 참고하라). 그런데 이것들이 상징하는 의미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를 교감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법궤와 속죄소가 있는 지성소가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를 베푸시는 곳이라고 한다면 성소는 그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의당히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곳이다.

떡상에 진설병을 날마다 올려놓은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들의 삶을 주장하심을 상징한다. 등대의 불 역시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밝히 보여주심을 상징한다. 향단의 향 역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회복되고 있음을 상징한다. 그렇다면 성소의 역할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으로서 당연히 하나님께 드릴 최상의 경배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사장은 성소의 진설병과 등불과 향을 위하여 날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는 필요에 따라 진설병과 기름과 향을 가지고 들어가야만 했다.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운 통치에 대한 불신이 발생한다면 더 이상 떡이나 기름이나 향을 가지고 들어갈 이유가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제사장이 날마다 떡과 기름과 향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간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순종을 상징하는 것이며 나아가 그 통치에 대한 감사와 감격의 표시를 하나님께 고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그리고 제사장의 이러한 순종과 고백의 행위는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을 대변하는 것이어야 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은 날마다 떡과 기름과 향을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는 제사장의 성별된 삶으로 표상 된다. 오직 그 일만을 전담하기 위해 선택된 제사장만의 몫이 아니었다. 제사장은 비록 자기의 직무상 그와 같은 일을 반복한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성별된 삶과 그 삶을 하나님께 헌상한다는 정신을 가지고 직무를 수행한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제사장의 직무를 통해 자기들이 날마다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차원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성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성소에서 발생하는 일련의 제의적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인 속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었다. 성소는 지성소를 근거로 운영되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성소 그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앙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신앙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전제하고 그 말씀의 통치에 대한 순종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감의 표시로서 자신을 하나님께 헌상하는 고백이 뒤따라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는 진정한 모습인 것이다. 성소의 집기는 이러한 신앙의 요소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아울러 이스라엘의 성별된 삶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을 규명해 준다. 이스라엘 백성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에 기반을 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적인 삶의 문화를 세워나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그 백성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지성소와 성소가 여전히 정상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여전히 구현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여전히 성소에서 떡상과 등대와 향단에 진설병이 놓이고 들불이 밝혀지고 향이 피어나고 있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상징한다. 아울러 이 사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실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나라와 다른 독특하고 고유한 삶의 방식을 지켜나갈 수 있는 것이고 이것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건실함을 세상에 증거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존재 의식은 제사장 국가로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인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서 견고하게 서있는 동안 여전히 말씀과 은혜로 그 백성을 통치하시며 그들이 날마다 떡과 기름과 향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제사장 국가로서 직무를 등한시하거나 그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면 그들이 애써 공교하고 아름답게 만든 그 모든 집기들은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이며, 이스라엘에게 주었던 은혜의 방도로서 아무런 기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성소와 성소 안에 있는 집기들이 가지는 상징성 이전에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우선적으로 점검해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이것이 영적인 하나님을 신앙하는 이스라엘이 늘 주의해야 할 요소인 것이다.

출애굽기 38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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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그 백성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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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갈 집기들이 만들어지면서 성막 건설은 절정을 향해 진척되었다. 본 장에서는 성막 뜰에 자리할 번제단, 물두멍과 성막의 외형을 결정할 성막 말뚝과 포장이 만들어지면서 마침내 성막의 구조가 완성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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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의 주권과 백성의 자의식

하나님의 거처로서의 성소와 그 안의 집기들에 이어 성막 뜰의 집기들 역시 고유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지성소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통치를 보여준다면 성소는 그 통치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표시할 신앙의 상태를 표현한다. 반면에 성막 뜰은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이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의 표시를 상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번제단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백성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과의 화목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드리는 장소이다. 특히 번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서 이스라엘은 대속에 대한 신앙을 고백해야 했다. 대속의 신학적 의미는 제사에 대한 규례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특히 율례와 법도를 선포한 시내산 언약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명확하게 확인하고 있었다. 대속에서 가장 중요시해야 할 것은 중보자에 대한 인식이다. 중보자 사상이 결여된 대속은 아무런 가치를 가지지 않는다. 따라서 대속의 신앙은 자연스럽게 중보자 신앙으로 진전되는 것이다(27장 구속사 강해 참고). 나아가 이스라엘의 중보자 사상은 제사장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사명과도 일치한다.

번제단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치유하신다는 사실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죄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번제단은 인간의 편에서 가장 능동적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제단은 하나님의 긍휼을 대변해 준다. 죄 있는 인간이 아무리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제사장이라고 하는 중보자를 통해서만 번제단에서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일 조차도 그 전권(全權)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 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번제단과 함께 물두멍이 있다는 것은 필수 조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위해 그 앞에 나가는 일에 있어서 성결은 선결 조건이기 때문이다. 성결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백성이 항시 유지해야 할 조건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순결한 신앙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제사 제도 역시 이스라엘의 성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죄로 인해 더렵혀진 백성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로 하여금 성결한 이스라엘 공동체를 더 이상 오염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성결은 제사장적 사명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기도 하다(19:5-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19:6)는 말씀은 제사장 사역과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은 별개의 것이 아님을 시사해 준다. 이 말씀 이전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로 삼으신다고 하셨는데 이 역시 성별된 삶을 요구하는 단서이기도 하다. 성결은 윤리적, 도덕적인 차원에서 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었다. 성결은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 영역에서 요구되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이방 나라 백성들의 구원 사역에 참여하는 구별된 백성으로서의 당연한 의무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19장 구속사 강해 참고).

성막 뜰은 이스라엘의 성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성소를 보호하기 위한 기능과 하나님을 수종드는 제사장을 보호하기 위한 기능을 갖추기 위한 것이지만 그것은 곧 이스라엘의 성결한 삶을 전제로 한다. 이스라엘의 성결이 상실되었을 때에는 성막 뜰의 의미조차도 같이 상실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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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하시는 원칙

성소의 기물들이 값비싼 금으로 만들어지고 화려하게 장식된 반면, 성막 뜰의 집기인 놋제단과 물두멍이 값싼 놋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그 기능이나 가치 면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소의 기물들은 나름대로 각기 그 기능에 적합하게 설계되었고 합당한 재료를 사용했다. 마찬가지로 번제단과 물두멍 역시 고유한 기능을 위해 놋을 재료로 선택하였다. 당시에는 금과 은 그리고 놋이 주로 사용되는 금속재료였음을 감안할 때, 구태여 값비싼 금만으로 모든 기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럴만한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면 언약궤 역시 전부 금으로 만들라고 지시하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언약궤를 만듦에 있어 먼저 조각목으로 구조를 만들고 금으로 둘러싸도록 하셨는데, 그것은 값비싼 금만으로 모든 기물을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각기 기물들은 그 용도에 따라 설계되고 재료가 선택된 것뿐이지 금으로 장식되었기 때문에 놋을 재료로 하는 기물보다 더 중요한 의미나 가치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성소의 앙장이나 휘장 역시 그 기능을 무시하고 값비싼 금으로 만들도록 하셨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막과 그 기물들을 통해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긍휼을 베푸시는 것은 그것들이 금으로 만들어진 값비싼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그러한 물질은 아무런 가치나 의미가 없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여러 물질 중 하나일 뿐이다. 단지 좀더 세밀한 가공을 필요로 하는 것은 전성(展性)과 연성(延性)이 풍부한 재료인 금을 사용하셨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물질이 가지고 있는 가치보다는 그 재료의 특성을 고려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물질의 가치를 중시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은 모든 이스라엘의 성년들로 하여금 똑같이 은 반 세겔을 생명의 속전으로 요구하신 것에서도 확실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성전세를 요구하심에 있어 부자나 가난한 자라 해서 더 내거나 덜 내지 못하도록 하셨다(30:15). 사람의 생명을 속하는 가치가 겨우 은 반 세겔밖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사람의 가치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은 반 세겔은 속전을 위한 하나의 상징일 뿐이며 사람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성전 건설에 참여함에 있어 육십만 삼천 오백 오십 명의 성년된 자를 계수하고 일괄적으로 은 반 세겔씩 바친 것 역이 이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26). 성전을 건축함에 있어 누구는 많고 누구는 적게 바쳤다는 비교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모두 동등하게 참여했다는 사실만이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자기의 형편이나 처지에 따라 각기 다르게 성전 건축에 필요한 것을 공급하였다 할지라도(36:3-7) 그것이 다른 사람과 얼마만큼 가치의 차이를 지녔는지에 대하여 비교할 근거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성전 건설에 참여했느냐 하지 않았느냐에 달려 있다. 따라서 성년으로 계수된 모든 사람이 은 반 세겔씩 바쳤다는 것은 그들 모두가 성전 건설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어떻게 대하시는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 물질의 부를 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알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나 동등하게 대우하시며 그들의 가치를 인정하신다. 심지어 과부나 고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동등한 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의미와 존재 가치를 가진다. 때문에 과부나 고아를 불쌍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심성이 부패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대하시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출애굽기 39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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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이스라엘 공동체의 제의(祭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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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소와 성소 그리고 성막 뜰 안에 들어갈 집기들이 만들어지면서 성막 건설의 외형적인 요소들이 완공되었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제사장이 입을 예복뿐이었다. 본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예복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마침내 성막의 모든 구조가 완성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일에 대해 모세가 그 필한 모든 것을 본즉 여호와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축복하였더라”(39:43)고 평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성막 건설이 완공되었음을 선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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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증표

성막과 그 안의 집기들이 모두 갖추어졌다 할지라도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표시하고 하나님 나라의 한 단면을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여전히 하나의 물질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영이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하는 백성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마치 에덴 동산이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거기에 사람이 살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모든 제의를 행사할 제사장은 성막의 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은 백성을 대표하는 제사장의 예배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고 그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실 것이며 백성은 중보자인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는 은혜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제사장의 의복 역시 성막의 다른 집기들처럼 공교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져야 했다. 하나님은 대제사장 아론과 제사장들이 입을 옷에 대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셨다. 왜냐하면 어떤 이유로든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용납해 주셔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제사장들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적어도 그들의 불순에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성이 충돌을 일으켜 그들이 죽어야 하는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실 목적으로 제사장 의복을 만들도록 하신 것이다.

따라서 제사장 의복은 단순히 제의를 행하는 자의 신분을 표시하거나 제의를 행하는 직무를 위하기 이전에 하나님과 제사장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제사장의 접근을 허용하신다는 표식이었다. 제사장은 본인이 아무리 성결하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 나갈 때에는 규정된 예복을 입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허용하신 예복을 입은 자만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위해 제의를 수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제사장 또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이스라엘 회중으로부터 구별하여 세웠다. 아론과 그의 자손만이 이 제사장 반열에 참여하도록 허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규정된 예복을 입어야만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었다.

특별히 예복의 제작 과정과 관련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1, 5, 7, 21, 26, 29) 하였다는 반복적인 표현은 그 예복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만들어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제사장 의복의 각 부속물에 대하여 그처럼 세심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모세가 예복의 제작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별히 이 일을 위해 선택된 브살렐과 그를 도와 일하는 전문 기술자들에 의해 공교하게 만들어진 이 예복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제사장의 신분과 직무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허용하신다는 표식으로서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름답게 만들어진 예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볼 때 무가치한 물질에 불과하다. 그것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도록 계시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영이신 하나님께서 이 예복을 입은 제사장만을 만나시겠다고 의미를 부여한다고 선언하셨다는 점에서 이 예복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옷이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이 세상의 어떤 것이라도 하나님에 의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지니게 됨을 의미한다. 아무리 인간의 생각으로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들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면 그것에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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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스라엘 공동체 제의의 중심인 성막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 같이 성막 곧 회막의 모든 역사를 준공하여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다 행하였다”(39:32)는 기록은 성막의 대 역사가 완공되었으며 그것이 여호와의 계시에 합당하게 건설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사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성막을 만든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의 전환점이었다. 성막은 하나님의 처소로서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구조물로서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성막은 하나님 나라의 모든 특성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구속사에서 성막이 차지하는 의미는 그만큼 지대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아브라함 언약의 성취와 더불어 시내산 언약의 실체라는 점에서 성막은 당시 구속사의 핵심이기도 하다. 성막이 세워졌다는 것은 노아의 방주와 같은 의미를 이스라엘에게 부여할 뿐 아니라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전개된 족장사를 통해서도 밝혀진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형의 경배 의식이 이제 성막을 통해 정착되었을 뿐 아니라 유형의 경배 의식으로 모든 체제가 전환되었다. 이런 점에서 성막은 지금까지 진행된 예배 의식의 최종 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성막은 새로운 예배 의식의 시작을 의미한다. 공식적인 제사장의 집례 아래 예배 목적에 따라 선택된 제의 방식으로 제물을 드리고 그 제의에 대한 여호와의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이스라엘 모든 회중이 직접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은 것과 같다. 비록 제사장이라는 중보자를 통해 하나님께 예배를 한다 할지라도 공식적인 절기 예배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언제든지 개인이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경배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성막 제의나 예배 의식은 노아나 아브라함의 예배 의식을 그 전형으로 하되 하나님께서 새롭게 제정하신 예식 절차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공식적인 예식 절차를 갖춘다는 것에는 새로운 의미가 있다. 그것은 이스라엘 공동체성과 관련해 이해되어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 개인이 예배하는 방식은 외형적인 의식 절차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개선하는 차원에서 유동적 형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 예배에서는 일정한 방식을 채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성막은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공동체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확인하고 개선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하겠다. 개개인이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로서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갖기 위해 성막 중심의 제의가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이 사실을 중요시 여기신다는 것은 이미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불러내실 때부터 밝히신 바 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3:12)는 말씀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영적 교제를 갖기를 바라셨다. 아울러 하나님은 이스라엘 공동체와 시내산 언약을 체결하신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 이전 족장사에서는 족장과의 개인적인 차원에서 영적 교제를 가지신 하나님께서 출애굽 이후부터는 이스라엘 공동체와의 영적 교제를 가지신 것이다.

때문에 성막 건설에 있어 소수 몇 사람만으로도 충분한 일을 전 이스라엘 공동체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고, 마침내 그 역사가 이제 이루어진 것이다. 32절과 마찬가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모든 역사를 필하매”(39:42)라는 기록 역시 성막 건설의 주체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로서 성막은 이스라엘 공동체 제의의 중심이 되었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의 통치가 구현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출애굽기 40장 구속사 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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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공동체 예배와 성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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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정월 초일일에 마침내 성막을 세우라고 하심으로서(1) 그동안 모든 과정을 마치고 여호와께서 계시하신 대로 성막을 세우게 되었다. 모세는 이 과정을 기술하면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되니라”(19, 21, 23, 25, 27, 29, 32)는 후렴 구절을 거듭 반복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막 건설의 처음부터 마치는 때가지 전적으로 여호와의 계시에 따라 진행되었음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40:34) 하였다는 묘사는 하나님께서 성막을 접수하셨음을 보여준다. 이제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만들어진 성막에 친히 좌소(座所)를 정하신 것이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인 성막을 자신의 거처로 삼으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겠다는 단호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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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성막에 임재하신 방식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성막을 접수하시고 그 안에 임재하신다는 증거는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는 현상으로 충분하게 드러났다.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40:38)는 묘사 역시 여호와의 임재를 모든 백성이 인지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데 성막 건설과 완공에 대한 출애굽기 34장부터 40장에 이르기까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상은 성막 중심의 제의와 더불어 여호와의 임재 방식에 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성막 제의 역시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한다는 속성을 가진다는 점에서 이 부분에서 실제로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여호와의 임재 방식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출애굽기에서 여호와의 임재 방식과 관련하여 특이하게 나타난 것 중 하나는 여호와의 사자(הוהי ךאלמ)에 대한 것이었다. 출애굽기 32절의 여호와의 사자는 4절에서 여호와와 동일시된다. 특히 구약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여호와의 사자가 말씀하신다는 말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따라서 여호와의 사자는 특별한 신분을 가지신 분으로 하나님 자신이거나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널 때에 등장한 하는 하나님의 사자(םיהולא ךאלמ)가 방향을 취하실 때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따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다(14:19-20). 그런데 이 구름 기둥은 여호와의 현현(Theophany)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16:10). 무엇보다도 밤에는 구름 기둥에서 신비한 불빛이 나타났는데 그 불빛은 마치 시내산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불꽃 형상(3:2)을 연상시킨다. 그리고 여호와의 사자를 가리켜 하나님은 이스라엘 앞서 행시는 분’(הלשׁ)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하신다(23:20). 이분은 이스라엘 보다 앞서 행하시면서 이스라엘을 지키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성막 건설에 대한 계시가 주어지고 금송아지 사건을 치른 후 하나님은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가나안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을 쫓아내고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33:2-3) 하시겠다고 하신 말씀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바로 샬라(הלשׁ) 이스라엘 앞서 행시는 분과 동일시된다. 그리고 이 여호와의 사자의 임재는 회막 문의 쉐키나로 상징되었다(33:10). 그렇다면 쉐키나는 바로 그 사자 곧 말락 아도나이’(הוהי ךאלמ)의 현현임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런데 이 쉐키나에서 여호와는 모세와 대면해 말씀을 나누신다(33:11). 그리고 성막이 완공된 후 회막은 성막에 흡수되었고 쉐키나가 성막을 뒤덮고 성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하게 된다.

앞서 성막의 구조와 기물들의 상징성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것들은 한결같이 여호와의 임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볼 때, 구름이 성막을 덮었다는 것은 곧 여호와께서 거기에 임재하신다는 하나님의 현현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때로는 여호와의 사자를 상징하는 쉐키나가 여호와의 임재와 동일시되기도 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곧 여호와 자신과 동일시된다는 점을 볼 때 쉐키나는 곧 여호와의 현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호와는 영이시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성막에 임재하신다는 것은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특히 이 점을 중시하셨기 때문에 쉐키나가 회막 문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33:10) 별도의 처소로서 성막을 세우도록 하셨다(35장 구속사 강해 참고). 그렇다면 쉐키나가 성막 위에 임했다는 것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호와의 사자가 거기에 함께 하신다는 논리적 결론을 얻게 된다.

모세가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였다”(40:34)고 묘사하고 있는 것 역시 여호와의 사자가 현현하신 형상으로서의 쉐키나와 영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성막에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구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호와는 여호와의 사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사자가 여호와와 동일한 신분을 가지신다는 증거들은 쉐키나와 여호와의 영광이 동일시 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 사실에서 여호와와 여호와의 사자는 동일한 분이심과 동시에 다른 인격을 가지신 분들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증거하는 하나의 자료가 될 수 있다.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40:36-37)라는 기사는 여호와의 사자가 친히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심을 묘사하고 있다. 반면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40:38)라는 기사는 여호와 임재를 증거함과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가 동일시되고 있음을 시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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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막 제의와 이스라엘 공동체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막의 주인이시자 그곳에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임재는 구별되어야 한다. 여호와는 이 성막 제의를 주관하시는 분이시며 거기에서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쉐키나와 달리 성막이 존재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성막은 곧 하나님 나라의 전형으로서 그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유일하게 허용된 장소이다. 거기에서 백성은 여호와의 통치를 받으며 여호와를 경배하게 된다. 쉐키나는 어떤 이유에서든 경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에서 성막과 쉐키나는 구별되어야 했다.

또한 이 점은 여호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준다 하겠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시고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을 치유해 주시는 곳으로서의 성막의 기능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비록 구속사의 점진성이라는 계시의 틀 안에서 구약의 성막이 계시의 한계를 가진다 할지라도 성막이 존재하는 동안 성막은 하나님의 나라를 표상하는 지상의 유일한 구조물임과 동시에 영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임재하시고 그 백성을 통치하시는 유일한 장소였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성막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도록 규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말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어느 곳에서든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제한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그들이 거하는 어느 곳이든지 언제나 여호와 하나님을 경배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예배는 어디까지나 영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영적 예배여야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공동체의 공적인 예배는 성막에서만 행해져야 한다. 이것은 그만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공동체로 상대하시고 공동체의 예배 의식을 중시하신다는 사실을 지시한다(39장 구속사 강해 참고). 성막이 완성됨으로서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정당하게 경배하는 유일한 공동체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출애굽기 이후에 등장하는 레위기와 민수기 역시 이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레위기는 공동체 제의에 대한 규례를, 민수기는 공동체로서 살아가야 하는 이스라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