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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주석적 평가와 제안

에반젤(복음) 2021. 11. 14. 18:04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주석적 평가와 제안

 

권연경 (안양대학교)

 

 

들어가는 말

 

“바울에 관한 새 관점”(New Perspective on Paul)이 바울신학계의 화두로 등장한 지도 수십 년이 지났다. 각자의 입장이 무엇이든, 새 관점은 바울에 관한 진지한 논의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흐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개혁주의 전통이 강한 한국 신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논의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새 관점이 종교개혁의 핵심적 가르침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때 종교개혁의 유산은 여러 “전통” 중 하나를 넘어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한 “진리”로 전제된다. 그러기에 종교개혁 전통으로부터의 이탈은 성경적 복음으로부터의 이탈과 다르지 않다. 그런 마당에, 이런 “성경적 전통”에 물음을 다는 새 관점을 긍정적으로 보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물론 새 관점이 종교개혁 이후 복음의 요체로 간주되어 온 칭의론에 물음을 제기하는 것은 사실이다. 종종 복음의 핵심 진리를 부정하는 듯 한 인상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게는 새 관점 자체가 복음에 대한 이탈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도전이든 이유 없이 제기되는 경우는 드물다. 그 관점이 싫든 좋든, 우리는 새 관점이 바울의 글들과 그 역사적, 신학적 배경에 대한 치열한 탐색의 결과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또한 그처럼 다양한 전통의 학자들이 “새 관점”이라는 하나의 큰 공감을 형성했다는 사실은 그 속에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주석적 설득력이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물론 진지한 연구도, 넓은 공감을 획득한 관점도 잘못될 수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우리의 대처방식은 우선 그들의 주장을 경청하면서, 본문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 주장들을 냉정하게 검증하는 것이라야지, 그저 우리 “종교개혁”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무시하거나 비난하는 것이어서는 곤란하다.

 

 

I. 새 관점의 발흥

 

1. E. P. Sanders와 초기 유대교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 칭의론은 시종일관 모세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간의 대립 속에서 제시된다(갈 2:16-21; 롬 3:21-26). 따라서 칭의에 관한 논의는 불가불 율법 및 유대교에 관한 논의를 포함할 수밖에 없다. 종교개혁을 뿌리로 삼는 “전통적” 관점에 의하면, 바울 당시 유대교는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했던 율법주의적 종교였다. 그 순종이 구원을 위한 공로가 된다는 점에서 공로주의로도 규정된다. 이에 대해 바울은 은혜와 믿음을 무기 삼아 유대교의 이러한 한계를 폭로하였다. 구원의 궁극적 근거는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우리는 율법을 행함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간간이 이에 대한 반대가 있었지만, 이런 관점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것은 1977년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였다. 이 책에서 샌더스는 광범위한 초기 유대교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초기 유대교가 결코 율법주의적(legalistic)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유대교는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이 은혜로운 선택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율법 준수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획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노력이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열성(nomism)은 근본적으로 은혜로운 언약(covenant)의 태반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샌더스는 이런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라 불렀다.

샌더스의 주장은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물론 이 반향 내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혼재한다. 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로 규정된 전통적 유대교 상을 포기하고 언약적 신율주의의 관점을 적극 수용하였다. 하지만 그에 대한 반대 의견도 다양하게 피력된다. 대부분의 경우 그 반대 목소리는 샌더스가 일 세기 유대교의 다양성을 과소평가하고, 그 다양성 속의 주요 흐름이었던 율법주의적 경향을 너무 무시했다는 쪽으로 모아졌다.

 

2. 달라진 유대교, 달라진 바울 - Sanders와 Dunn, 그리고 새 관점의 시작

 

하지만 샌더스로부터 출발한 충격의 파장은 유대교보다는 바울신학 쪽에서 더 심각하게 감지되었다. 전통적으로 개신교는 유대교를 율법주의라 보았다. 이와는 달리 샌더스는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일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면, 바울이 비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유대교 내에서 문제점을 찾지 못한 샌더스는 배타적 사고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다메섹에서 바울은 예수가 구원의 해답임을 알았다. 그렇다면 다른 어떤 것도 해답일 수 없다. 물론 여기에는 율법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의 생래적 문제가 아니라 그저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물론 바울은 율법을 다각도로 비판하지만, 이는 율법의 본질에 대한 일관된 숙고의 산물이 아니라, 상황적 필요에 따라 고안된, 따라서 신학적 일관성을 찾기 어려운, 임기응변식 논증들이다. 이후 저서들에서 샌더스는 바울이 유대적 배타성을 비판한다고 말하지만, 이 역시 율법 자체에 관한 논증이라기보다는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열린 것이라면, 일체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는 바울 특유의 “극단적” 사고의 산물이라고 말한다.

“새 관점”(New Perspective)라는 용어를 고안한 던 (J. D. G. Dunn)은 샌더스의 유대교 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하지만 그의 바울 해석에는 낙제점을 매긴다.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는 잘 설명했지만, 이를 바울과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던은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와 바울 사이에 근본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바울이 율법을 부정적인 것으로 보았을 가능성은 없다.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던은 바울의 비판이 율법 자체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유대인의 “오해”(misunderstanding)를 겨냥한다고 보았다. 곧 율법 속에 보편성의 기조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이를 배타적 정체성의 표지, 곧 유대인과 이방인 구별의 수단으로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란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겠다는 율법주의가 아니라, 유대인/이방인을 구별하던 신분표지로서의 율법을 가리킨다. 당시 이런 사회적 기능이 두드러졌던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이 핵심 쟁점이 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총을 이런 언약의 표지들을 소유한 자들에게만 국한하려는 배타적 태도 혹은 정체성의 표지로서 율법이 수행했던 사회적 기능을 비판했던 것이다. 이런 사회학적 관점에서 바울의 율법 비판과 칭의론을 이해하려는 흐름을 “바울에 관한 새 관점”이라 부른다.

잘 알려진 대로, “새 관점”은 어떤 특정 학파가 아니라 바울신학계에 나타나는 공통된 흐름을 포착하는 표현이다. 바울의 칭의론 및 율법 비판을 유대인-이방인 관계의 문맥에서 파악하려 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새 관점으로 분류되는 학자들의 입장 자체를 하나로 엮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 나름의 독특한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새 관점”에 입각한 바울 해석을 내어 놓았다가, 이제는 보다 전통적인 해석으로 회귀한 왓슨(Francis Watson)은 “새 관점”의 특징을 다음의 다섯 가지로 정리한다.

 

1. 믿음과 행위의 이항대립에 근거한 개신교적 바울해석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 칭의나 구원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주어진다고 보는 기독교 대(對) 구원을 행위의 산물로 간주하는 유대교라는 대립은 바울의 의도를 오해한 것이다.

2. 70년 이전의 유대교는 율법에 대한 순종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의 선택은 은혜에 의한 것이었고, 율법의 순종은 바로 이 은혜 언약의 틀 속에서 이해되었다. 율법은 “getting in”을 위한 것이 아니라, “staying in”을 위한 것이었다.

3. 헬라 문화 속의 소수 그룹으로서 유대 공동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독특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특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을 상징하는 특정 요소들(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이 자연스레 두드러지게 되었다.

4.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자비에 관한 이런 유대적 신념을 긍정하면서 또한 반대한다.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불변한 것으로 긍정하면서도, 그는 구원의 가능성을 유대인들에게만 국한하는 데는 반대했다.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진술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만이 참된 의인이라는 신념을 반박하는 것이고, 칭의가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신념을 주장하는 것이다.

5. 바울신학에 대한 잘못된 해석은 시대착오적인 신학적 전제를 바울의 텍스트에 주입한 탓이다. 바울의 의도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전제 없이 역사비평적 방법을 충실히 적용할 필요가 있다.

 

 

II. 새 관점과 옛 관점의 충돌

 

1. 새 관점과 칭의론의 사회학적 문맥

 

새 관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울의 칭의론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개진되고 있음을 중시하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샌더스의 주장에 기댄 것이지만, 스텐달이나 라이트의 경우에서 보듯, 이런 통찰 자체는 초기 유대교보다는 바울의 텍스트 자체를 관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얽혀있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가령 칭의에 관한 갈라디아서의 주제적 진술(2:15-16)은 유대인/이방인의 관계에 관한 안디옥 사건과 이어져 있다(2:11-14). 특히 “우리는 원래 유대인이지 이방 죄인이 아니지만”이라는 15절의 수사적 양보 구문은 이 점을 더욱 분명히 보여준다. 또 아브라함을 성경적 논거로 삼는 이신칭의의 원리는 “모든 이방인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라는 성경적 약속(cf. 창 12:3)과 이어지고 이는 바울에 의해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 복음을 전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3:7-8). 또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속량을 의미하는데(3:13), 이는 이신칭의라는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는 것 및 믿음을 통해 약속하신 성령을 받는 것이라는 이중적 목적을 가진 사건이었다(3:14).

로마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칭의론이 개진되는 1-4장에서 바울은 구원과 진노가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1:18; 2:2, 5-6, 11-12; 3:10, 12, 19, 22). 물론 로마서의 문맥에서 “모든”은 보다 구체적으로 “유대인 뿐 아니라 헬라인도”라는 의미를 갖는다. 복음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헬라인에게도” 믿는 자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며(1:16), 이는 행위심판의 원리에서도 마찬가지다(2:9-10). 할례자라도 율법을 어기면 무할례자로 취급되고, 무할례자라도 율법을 지키면 할례자 취급을 받는다(2:25-29). 칭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할례자나 무할례자 모두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실 것이다(3:30). 그래서 하나님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3:29). 무할례자일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었던 아브라함에게서 보듯, 이신칭의의 복은 할례자 뿐 아니라 무할례자에게도 공히 적용된다(4:9-12).

믿음의 의와 미래 구원의 관계를 설명하는 5-8장에서는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9-11장에서는 이것이 아예 핵심 주제가 된다. 이방인들처럼 유대인들 역시 하나님의 긍휼을 경험할 것이다(11:30-31).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함이다”(11:32).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주이시며,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10:12). 따라서 그 앞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10:12). 빌립보서 3장에서도 율법에서 난 의는 유대인으로서의 자긍심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3:5).

이처럼 바울의 칭의론이 대부분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울의 칭의론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 관점에서는 칭의론의 배경 역할을 하는 이 사회적 정황이 아예 무시되거나, 기껏해야 칭의론에 부가된 별개의 논리 정도로 치부되었다. 하지만 칭의론과 그 실질적 문맥인 사회적 정황을 연결하지 못하고서는 그 교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전체적으로는 전통적 관점에 기울면서도 새 관점이 사회적 차원을 강조한 것에 높은 점수를 매기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부분에서 새 관점이 지금까지 제대로 해명되지 못한 차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면서 보다 균형 있는 바울 이해를 도모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2. 새 관점의 모호함과 칭의론의 구원론적 성격

 

그렇다면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약점을 극복하고, 바울 칭의론의 전모를 제대로 규명해 낸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판단은 부정적이다. 바울의 논증이 자리한 사회적 정황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새 관점의 공헌은 분명하지만, 바울의 칭의론이 드러내는 신학적 혹은 구원론적 차원을 해명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그저 편향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학적 차원과 구원론적 차원이 함께 어우러지는 상황에서, 신학적 차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애초에 사회학적 설명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새 관점 학자들이 제안하는 개념의 틀들이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가령 새 관점 학자들은 종종 바울의 칭의론을 보편성-배타성이라는 사회학적 개념으로 파악한다. 하지만 유대교는 배타적이었고 바울은 수용적이었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일세기 유대교는 배타적이기도 했지만, 또한 수용적이기도 했다. 할례를 비롯한 까다로운 조건을 달았지만, 개종은 언제나 가능했다. 역으로, 바울의 복음 역시 믿음이라는 절대적 조건을 단다는 점에서 마냥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할례의 요구가 배타적이라면, 믿음의 요구 또한 마찬가지다. 또 이방인의 환영이 보편적이라면, 이방인의 개종을 반겼던 유대교도 다를 바 없다. 결국 유대교와 바울의 차이는 보편성/배타성의 차이가 아니라 수용을 위한 실제적 조건(할례냐 믿음이냐)의 차이다.

새 관점의 전략적 개념인 “정체성” 또한 마찬가지다. 던은 바울이 반대한 것은 율법 자체(the law per se)나 선행 자체(good works per se)가 아니라 “유대인의 특권과 민족적 독점의 수단으로서의 행위들”(works as a Jewish prerogative and national monopoly)을 반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구분도 바울의 관점을 정확하게 관찰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유대적 특권이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새롭게 정의한다(롬 9:6-8, 11). “할례”가 마음의 할례로, 정체성의 기준이 “외면”에서 “내면”으로 새롭게 규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새로운 원리 앞에서 외적, 인종적 구별은 무의미하다(롬 9:24). 하지만 이 존재는 여전히 “아브라함의 씨”요 “하나님의 이스라엘”로 불린다(갈 3:7, 25; 6:16). 기존의 특권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새로운 정체의 기준이 적용되기 때문이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이 원천적으로 부정되기 때문이 아니다. 그러니까 인종을 초월하는 공동체의 재편이라는 사회학적, 혹은 교회론적 논리 이면에는 그런 재편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원리, 곧 보다 근본적인 신학적 논리가 작용한다는 것이다.

보다 주목을 끄는 것으로는 칭의 개념 자체에 대한 비구원론적 이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샌더스는 언약 안으로 “들어감”(getting in)과 언약 안에 “머무름”(staying in)을 구분하고, 유대교의 율법적 열성을 후자와 연결함으로써 율법주의라는 누명을 벗기고자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던에 의하면, 바울의 관점 역시 유대교의 언약적 신율주의를 반영하고 있으며, 그에게 있어서도 칭의란 최초의 받아들임이 아니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시점과 관계없이 누군가가 언약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가리킨다고 본다. 보다 최근 새 관점의 대표 주자 중 하나인 라이트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하면서, 바울의 칭의 개념은 결코 구원론적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포로와 회복”이라는 언약적 흐름에 바탕을 두고 “누가 새로운 언약의 백성이냐?”를 다루는 교회론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들 역시 피상적이라는 판단을 피하기 어렵다. 샌더스의 경우, “들어감”과 “머무름”의 구분이 실질적인 것이 되려면 이 들어감이 최종적인 판결이어야 하고, 이후의 순종이 그 판결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엄연히 심판이 기다리고 있으며, 이 심판은 언약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니까 순종은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또한 심판을 통과하기 위한 절대적 조건이기도 한 것이다. 그래서 샌더스 자신도 이 들어감이 “구원받을 공동체 안으로의 들어감”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사실상 정체성 문제가 구원의 문제와 구분될 수 없음을 인정한 셈이다.

그렇다면 이런 구분을 바울에게 확장하여 그의 칭의론을 교회론적 개념으로 제한하려 한 던과 라이트의 시도 역시 동일한 한계에 직면한다. 칭의 개념이 법정적 선언인 것은 맞지만, “따라서 구원론은 아니다”라는 주장은 미리 준비된 언약적 신율주의라는 틀을 바울에게 덧씌운 것이다. 웨스터홈(Westerholm)이 잘 논증한 것처럼, 실제로 율법과 칭의에 관한 바울의 진술들은 칭의가 그저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 뿐 아니라 인간을 지배하는 죄와 그 죄의 지배로부터의 구원이라는 보다 깊은 차원과 맞닿아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 점에서는 전통적 관점이 분명 옳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칭의론에 대한 새 관점 학자들의 주석이 종종 전통적 관점의 입장에 접근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던은 바울의 칭의론이 언약 백성의 신분에 관한 논증이라고 역설한다. 하지만 막상 로마서의 칭의론을 다루는 부분에서 그는 바울이 이방인의 수용이라는 (사회학적) 관심을 넘어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존이라는 근본적인” 문제 차원에서 칭의론에 접근하고 있다고 말한다. 곧 민족적 정체성에 의존하여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려는 태도가 결국에는 행위로 구원을 확보하려는 보다 근본적인 태도와 유사한 것 혹은 그 한 부류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역시 새 관점 학자들이라 할 수 있는 바클레이(J. M. G. Barclay)와 롱기네커(Bruce Longenecker) 역시 (갈라디아서에서) 민족적 정체성 문제에서 출발한 바울의 신학적 사유가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의 앞에서의 인간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지평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III. 옛 관점과 새 관점의 만남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자.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 관점이 칭의론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및 죄와 구원의 문제로 간주하는 옛 관점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에는 근본적인 신학적 관심과 보다 실질적인 사회학적/교회론적 관심사가 동시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 두 관심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따로 취급할 수 있는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게 한다는 신학적 메시지가 칭의론의 요체라면, 바울은 왜 이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이라는 사회학적 논점과 연결하는 것일까?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평등이 그의 주 논점이라면, 그는 왜 이를 신학적 개념과 논리로 확장하는 것일까? 이 둘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칭의론 해석은 가능한 것일까?

 

1. 전통적 관점 내의 긴장

 

이런 물음과 함께, 새 관점이 바울신학계에 끼친 긍정적 효과의 또 다른 측면을 고찰해 보기로 하자. 자주 언급되는 것처럼, 새 관점은 “율법과 복음”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에 의해 제대로 조명되지 못하던 계시적 연속성, 곧 구약/유대교와 기독교,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관통하는 “연속성”(continuity)에 보다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했다. 사실 종교개혁 이후 구원론 논의를 주도해 온 “행위언약 vs. 은혜언약”의 이분법으로 인해, 두 언약 사이의 차이는 실제보다는 과장되거나 잘못 표현되기 쉬웠다. 복음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첫 언약에 담긴 은혜의 무게가 과소평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바울의 복음 속에 담긴 윤리적 책임의 중요성 또한 상대화되었다. 참된 믿음은 행위로 나타난다는 식의 사후적 변호가 덧붙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믿음 자체는 행위와 무관한, 심지어는 행위와 상반된 개념으로 상정되기 쉬웠다.

하지만 새 관점 학자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칭의가 이처럼 개인 구원의 문제로 국한되면, 바울의 칭의 논증이 나타나는 실제 문맥, 곧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라는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니까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신학적 주장이 왜 굳이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도”라는 사회학적 진술과 결합되는지를 해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분명하다. 전통적 관점은 사회학적 진술들을 포함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확대되거나 혹은 그 논점을 수정해야 한다.

바울서신 내에 전통적 관점과 어긋나 보이는 진술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러한 의구심을 더욱 강화시킨다. 우선 믿음 자체가 그렇다.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 말하지만, 정작 바울은 “믿음의 행위”(to. e;rgon th/j pi,stewj, 개역에는 “믿음의 역사”로 번역)를 이야기하며(살전 1:3; 살후 1:11), 이를 “사랑의 수고”나 “소망의 인내”와 같이 취급한다.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역설하는 갈라디아서에서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믿음은 “사랑을 통해 효력을 발휘하는” 것(5:6), 혹은 성령을 통해 맺는 열매의 하나로 제시된다(5:22, 개역에는 “충성”으로 번역되었다).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자기 사역의 목표를 “믿음의 순종” (u`pakoh. pi,stewj)으로 제시한다(1:5; 16:26). 그렇다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말의 의도는 무엇일까? (행위가 없으면 참 믿음이 아니므로) 행위는 하되, 그 행위가 칭의/구원의 원인인 양 착각하지는 말라는 교리적 교정인가? 그렇다고 해도, 애초에 믿음이 행위와 나뉠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바울은 이 둘을 대비할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가령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했다면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열매로 간주하지 않았을까?(롬 8:4)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조차 믿음과 행위가 공존하는 것이라면, 믿음과 대조되는 “율법의 행위”가 믿음과 공존하는 “행위”와 동일한 것일 수 있을까?

바울은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지만, 또한 순종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수용하지 말아야 할 “율법의 행위” 혹은 “모세의 율법”(4:21; 5:1, 4)과 복종해야 할 “그리스도의 법”(6:2) 사이의 실질적 차이는 무엇일까? 할례나 절기규정이나 안식일 규정과 같은 의식적 요소를 빼고 말한다면, 율법을 행하는 삶과 성령을 따르는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일까? 물론 학자들은 많은 제안을 내어놓는다. “양적” 순종과 “질적” 순종 혹은 “외적” 순종과 “내적” 순종을 구분하기도 하고, “자기 의”로서의 순종과 “믿음”의 순종을 구분하기도 한다. 혹은 “율법 행함”과 “새로운 순종”이라는 구분도 제시된다. 하지만 이런 설명들은 모두 추상적이며, 실질적 행동 차원에서 그 둘의 차이는 설명해 주지 못한다. 성령을 따라 율법의 요구를 이루는 것이지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는 설명도 있지만, 그렇다면 “유대인들처럼”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구체적 행동을 관찰할 때, 하나님의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르는 삶과 다를 수 없다(롬 8:4; 고전 7:19; cf. 겔 36:26-28). 그래서 어떤 이들은 “(율법) 행함이 아니라 오직 믿음”을 역설한 후 다시 순종을 요구하는 바울의 행보가 윤리를 팽개칠 위험과 새로운 율법주의의 위험 사이에서 “칼날을 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이 정말로 “행하지 말라”와 “행하라” 사이에서 위험한 칼날을 타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함이 아니라 믿음”이라고 들어왔던 갈라디아인들이 “행함이 없으면 영생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했겠는가??(5:21; 6:8) 이는 그저 방종을 막기 위한 경고를 넘어, “행위 아닌 믿음으로”라는 이전의 논점 자체를 뒤집는 진술이 아닌가? 구원과 무관한 “율법의 행위”와 구원과 관계있는 행위 사이에는 중요한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바울의 논증은 심각한 자기모순에 빠지는 셈이 아닌가?

행위 심판의 논리를 고려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진다. 전통적 관점은 “믿음에 의한” 칭의를 “행위 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런데 정작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자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라고 말한다(2:13). 물론 이런 진술은 바울 자신의 사상이 아니라는 주장도 제기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를 통한” 이 심판이 자기 복음의 일부임을 분명히 선언한다(2:16, kata. to. euvagge,lio,n mou dia. Cristou/ VIhsou/). 루터와 칼빈 같은 개혁자들도 분명히 인식했던 것처럼, 바울은 종말론적 구원 혹은 영생에는 순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롬 2:6-11; 갈 5:21; 6:7-9; 고전 6:9-10; 롬 6:19-23; 8:13). 불순종에 대한 멸망의 경고도 적지 않다(고전 10:1-13; 갈 5;21; 고전 6:9-10; 엡 5:5 등). 그렇다면 바울의 이런 “야고보적” 신념은 그의 “믿음-은혜”의 논리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이미 주어진 칭의가 결정적이므로 미래의 심판은 이미 결론이 난 “요식행위”에 불과한가? 삶에 근거한 심판이 남은 한 현재의 칭의는 잠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 둘을 함께 보듬을 다른 논리가 있는 것인가?

우리가 바울서신을 취사선택할 수 없다면, 종말론적 구원이 신자들의 행위를 요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도리는 없다. 그 점에 관한 한 바울의 진술은 너무도 명확하다. 적어도 결과적으로 볼 때, 바울이 역설하는 믿음과 은혜는 행위와 대조되거나 행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음을 바꾸어 볼 수 있다. 바울이 폐기처분한 “율법의 행위”가 과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또 믿음과 은혜가 “행위 없이”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면, 바울이 믿음과 은혜를 통해 강조하려고 하는 본래의 취지는 무엇일까? 첫 번째 물음은 바울이 신학적 싸움을 벌이고 있는 구체적 상황 자체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고, 두 번째 물음은 바울이 제시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 자체에 대한 보다 세밀한 검증을 요구하는 것이다.

 

2. 새 관점의 가능성

 

전통적 관점과는 달리,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행함”을 강조했던 율법주의와의 싸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유대교 역시 언약적 은혜를 몰랐던바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일단 율법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난 새 관점의 학자들은 은혜와 순종을 다함께 강조하는 바울의 관점 역시 은혜로운 언약의 틀 속에서 율법에 순종하고자 했던 유대교와 유사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물론 언약과 순종의 매개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성령이라는 점에서 복음은 구약/유대교와 다르다. 하지만 구원의 과정에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순종이 함께 얽히는 구조 자체는 별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바울 복음을 언약적 신율주의라 부를 사람은 많지 않겠지만, 대부분의 바울연구자들은 행위심판 사상이 바울신학의 한 요소이며, 종말론적 구원에는 순종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특히 율법과 복음의 단선적 이분법을 벗어나, 특히 구속사적 관점 하에 율법과 복음 사이의 근본적 연속성을 존중하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이런 합의를 더욱 반갑게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이 점을 강조하는 새 관점 학자들에 대한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비판은 성경의 본문에 기초한 차분한 논증보다는 거의 “반대를 위한 반대”의 수준에 근접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칭의론에 대한 올바른 해석의 첫 단추는 바울서신을 포함하여 신구약을 관통하며 흐르고 있는 행위심판의 원리 및 (공로는 아니지만) 종말론적 구원을 위한 행위의 필요성을 선명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이는 믿음과 은혜의 복음을 부정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바울이 분명히 선포하고 있는 전체 메시지에 비추어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시도다. 그런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해석에 내재된 긴장 혹은 모순의 요소를 한층 선명하게 만들어 줌으로써 보다 균형 있는 바울 이해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IV. 바울의 칭의론과 일 세기 유대교

 

1. 바울과 일 세기 유대교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바울의 칭의론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전통적 해석은 칭의론의 문맥으로 제시된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바울의 구원론 내에 잘 해소되지 않는 긴장 혹은 모순의 위험이 엿보인다. 반면 그런 약점을 보완하면서 나타난 새 관점은 오히려 바울 칭의론의 신학적 차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한 실질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에 대한 새 관점의 강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전통적 관점과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이에 대해서는 선명한 해법을 발견하기 어렵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바울의 칭의론에 드러나는 두 가지 상이한 현상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울 칭의론의 비판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그 배후에 분명한 신학적 대화상대자를 상정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실제로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적 선동자들일 것이고, 로마서의 경우는 2장에서 비판되는 자칭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이 대화상대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울이 개진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도 달리 이해된다.

바울 칭의론의 대화상대자를 일 세기 유대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따라서 새 관점의 대두 이후 초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논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인상을 풍긴다. 새 관점 학자들은 초기 유대교 내의 율법주의적 논조를 축소하고 “언약적 신율주의”를 그리려 하는 반면,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거기에 담긴 율법주의적 흐름을 강조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방법론적 비약이 존재한다. 최근의 연구들은 초기 유대교 내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일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대교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특정한 경향이 바울이 비판한 바로 그 입장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유대교를 넘어, 바울 자신의 논증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성격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는 마당에, 바울 이해를 위한 노력은 결국 바울의 텍스트에 대한 천착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개별 서신의 “미시적” 상황과 일세기 유대교라는 “거시적” 배경의 관계도 보다 신중하게 검증되어야 한다. 가령 갈라디아서에는 “선동자들”이 나타난다. 관점에 따라 이들은 율법주의자들일 수도 있고 언약적 신율주의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이 반드시 당시의 주된 흐름과 일치하는 이들일까? 당시 유대교의 주류와는 다른 독특한 입장을 가진 이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역시 갈라디아에서 발생한 목회적 위기 자체에 관한 보다 세밀한 탐구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2. 바울서신과 “율법의 행위”

 

위 논점을 구체화시켜 보자. 바울 칭의론의 가장 결정적 개념의 하나가 바로 “율법의 행위”(e;rga no,mou, works of the law)이다. 양 진영 모두에서 이 “율법의 행위”는 일세기 유대교의 성격을 집약하는 핵심 코드로 활용된다. 일견, 이 개념에 대한 두 관점의 해석은 매우 상이해 보인다. 전통적 관점은 그 속에 담긴 공로주의 혹은 율법주의에 초점을 맞춘 반면, 후자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경향에 방점을 찍는다. 그래서 전자는 율법을 “행하는” 것 혹은 행하려는 것을 문제시하고, 후자는 이 율법이 “유대적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사실에 신경을 쓴다. 하지만 두 입장 사이에 놓인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두 관점에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있다. 곧 두 관점 모두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도덕적) 준수를 포함하는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어차피 그 순종이 완전할 수 없어서 문제가 되거나(전통적 관점) 혹은 사회적으로 배타적이어서 문제가 될 수는 있지만(새 관점), 비판되는 이 “율법의 행위”가 율법의 전반적 실천을 포함한다는 사실은 의문시되지 않는다. 사실 율법의 사회학적 기능을 부각시킨 던의 초기 진술들은 전통적 입장과는 달리 “율법의 행위”를 할례, 음식규정, 절기규정 등의 요소로 국한하는 것으로 비쳐질 소지가 있었다. 당연히 그는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에 대해 그는 자신이 한 번도 “율법의 행위”에서 율법의 도덕적 요소를 배제한 적이 없다고 항변한다. 물론 이런 항변의 배경에는, 초기 유대교가 율법을 하나의 전체로 보았다는 생각, 곧 할례 등의 특정적 요소들과 도덕적 계명들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는 비판이 깔려 있다.

하지만 이런 “공통의 합의”가 바울이 다루는 상황과 일치하는 것일까? 필자는 여러 번, 율법주의자건 언약적 신율주의자건, “율법 준수에 열심인 유대인들”이란 그림은 바울 자신의 명시적 진술들에서는 도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바울이 그려내는 갈라디아의 위기는 전통적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바울은 선동자들이 할례를 강요하면서도 정작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하고(6:13), 갈라디아인들 역시 그럴 의사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한다(5:3). 이런 진술들로부터 강성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를 읽어내기는 어렵다. 바울의 말을 그대로 읽자면, 갈라디아서의 칭의론은 율법준수에 열심인 이들이 아니라 할례에는 열심을 내면서도 율법 준수에는 무관심한 이들을 전제로 해석하는 것이 마땅하다. 물론 이는 통상적 유대교의 그림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옛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통상적 유대교 상을 배경으로 놓고 바울의 논증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불가불 바울 자신의 진술을 반대로 해석하거나 혹은 모순된 해석을 내어놓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다.

로마서에서의 유대인 비판 역시 마찬가지다. 로마서 2-3장의 신랄한 비판은 분명 율법의 “소유”나 할례를 근거로 유대인의 정체성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율법을 지키지는 않는, 혹은 아예 지킬 의사도 없어 보이는 상황을 겨냥한 것이지, 율법을 지키려고 나름 애를 쓰지만 완벽함이라는 기준에 못 미치는 안타까운 모습(전통적 “율법주의”)이나, 율법을 잘 준수하지만 그것을 배타적 국수주의로 채색해 버린 서글픈 상황(“새 관점”)을 겨냥한 것이 아니다. 바울의 비판이 시종일관 문제 삼는 것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이지 순종의 “수준”이나 순종의 “의도”가 아니다. 물론 바울의 칭의론은 로마서 2-3장의 비판을 발판으로 삼아 개진된다. 그렇다면 바울의 칭의론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는 2-3장에서 묘사된 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율법을 지키지도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안 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러한 관찰은 할례나 절기 준수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움직임과 잘 어울린다. 물론 이는 초기 유대교에서 율법이 하나의 전체로 이해되었으며, 할례가 결코 다른 도덕적 계명들과 분리될 수 없었다는 통상적 신념과 어긋난다. 하지만 그런 막연한 판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할례를 “새 창조적 삶”(갈 6:15-16)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고전 7:19)과 구별하는 바울 자신의 어법에 주의하는 것이다. 바울의 비판은 할례를 강요했던 갈라디아의 선동자들이 율법의 “다른” 계명들은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할례는 강요하면서 율법은 지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6:13). 할례 역시 율법의 일부지만, 바울은 이 둘을 선명히 구분한다. 무할례자들의 율법 실천에 관한 논의에서 분명해지듯, 로마서에서도 할례는 “율법의 요구들”(ta. dikaiw,mata tou/ no,mou)을 실천하는 것과 선명하게 구분된다(롬 2장; 8:4). 여기서도 우리의 출발점은 할례와 율법 실천을 구분하는 바울의 논법이라야지, 할례가 율법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학자들의 전제여서는 곤란하다. 따라서 적어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문맥에 관한 한, 바울의 논증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할례, 음식규정, 절기 규정 등으로 예증되는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 준수와 구분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전통적 의미의 율법주의자들이든 언약적 신율주의자들이든,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 등장한 유대인들은 그런 “모범생” 부류는 아니다. 우리가 바울의 편지들에서 실제로 만나는 사람들은 할례나 율법의 소유나 절기준수와 같은 “외면적” 근거로 선민적 정체성을 내세웠던 사람들, 그러면서도 정작 율법 실천을 바탕으로 한 “내면적” 정체성은 결여했던 위선자들이다. 바울의 율법 비판이 실질적인 위협에 대한 대응이라고 전제할 수 있다면, 우리의 결론은 분명하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율법 실천에 열성적인 율법주의나 언약적 신율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당시의 “언약적 은혜론자들,” 곧 할례 받은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구원의 필수적 조건이라 믿었던 유대인들의 “값싼 은총 교리”를 배경으로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을 향해 은혜와 믿음을 역설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일까?

 

 

IV.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믿음과 행위의 구분에서 시작하는 전통적 칭의론에서는 순종의 구원론적 가치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 대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구도를 포기하고 보다 사회학적 논리로 무장했던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과 윤리에 관한 보다 실질적인 해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주의자들의 바울 해석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긴장의 원인이 되는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새 관점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율법주의에서 언약적 신율주의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를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 실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우리는 바울이 실제 율법을 잘 지키려는 사람이나 그런 태도를 비판하는 것이 아님을 관찰하였다. 바울의 비판이 “율법 준수”와는 사뭇 다른 과녁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1. 바울은 왜 “율법의 행위”를 비판하는가?

 

바울 칭의론의 한 축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에 율법에 대한 도덕적 실천에 포함시킨다. 그렇다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바울의 명시적 진술은 율법 비판에 대한 실질적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은 저마다의 제안을 내어 놓는다. 물론 대부분의 설명들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이를 근거로 학자들이 추론한 것이다. 하지만 의구심이 생긴다. 자신의 핵심적 논지를 숨긴 채 에둘러 말하는 것이 바울의 논증 방법이었을까? 가장 중요한 논점은 입 안에 감추고서, 자기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대화상대자들로 하여금 그 논지를 추측하도록 하는 것은 분명 정상적인 논쟁의 방식은 아니지 않는가?

가령, 전통적인 관점의 대답은 율법의 행위는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문제가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울은 구약의 인용문 한 군데를 제외하면(갈 3:10; 신 27:26) 그런 생각을 직접 표현한 적이 없다. 율법에 관한 로마서의 긴 논증에서는 이런 인용문조차 발견되지 않는다. 정말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라면, 바울의 입에서 그런 진술이 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율법의 행위”의 문제점이 사실은 율법 행함 자체 때문이 아니라 실은 “충족되지 못한” 율법의 행위/요구”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왜 바울은 그 핵심적인 대목에 대해 말을 아끼는 것일까? 반대로, 새 관점의 주장처럼 바울이 율법의 사회적 기능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비판한 것이라면, 바울은 왜 한 번도 그 사실을 명시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것일까? 또 많은 학자들은 율법 자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가 참 해답으로 오셨고 이로 인해 율법은 종말론적으로 유효기간이 지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회심 이전의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율법 언약이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가는 마당에, 그리스도의 존재가 무슨 해답으로 인식되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cf. 히 8:7) 어쩌면 우리가 바울의 명시적인 진술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율법의 행위 속에 어떤 교리적인 독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관찰은 중요하다.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론자의 주장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이 “율법의 행위” 자체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할례, 곧 율법의 행위들은 무의미한 것(갈 6:15) 아니면 무력한 것이다(갈 5:6). 로마서에서도 하나님의 율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것으로 인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다”는 실질적 한계에 직면한다(롬 8:3). 그래서 율법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갈 4:4) 아니면 성령의 역사와 무관한 “의문/글자에 불과한 것”으로 규정된다(롬 2:29; 7:6; 고후 3:6). 그러니까 율법에 대한 바울의 불만은 율법 자체에 내재한 교리적 혹은 사상적 독소 때문이 아니라 율법이 지니고 있는 태생적 무능력, 곧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연약함을 해결할 수 없는 무능력 때문이다(롬 8:3). 말하자면 율법은, 혹은 “율법의 행위들”은, 나쁘다기보다는 소용이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이를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말로 표현한다(3:2-5). 율법은 “생명을 주는 능력”을 결여하고 있으므로 칭의의 열쇠가 아니라는 말과 같다(3:21). “율법의 행위”에 속하는 할례나 무할례는 신자들을 의의 소망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다(ivscu,ei, 5:6). 로마서는 육신을 무대로 활동하는 죄를 해결하지 못하는 율법의 연약함은 매우 극적인 방식으로 그려 보인다(3:20; 5:20; 7:1-15; 8:3).

 

2. “오직 믿음으로”

 

믿음이 참된 해답이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무할례 역시 실질적 해답은 아니다. 할례를 받는 아니든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 바울이 믿음에 관해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갈 3:2-5, 14, 5:5). 예수의 대속적 죽음이 우리로 하여금 성령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놀라운 주장 역시 같은 의미다(3:13-14; 4:5-7). 물론 이 때 성령은 종말론적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에 이르는 열쇠로 묘사된다. 우리는 성령으로 의의 소망을 기다리고(5:5), 육체의 일들 대신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며(5:19-25), 육체가 아니라 성령 안으로 씨를 뿌림으로써 이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수확한다(6:7-9). 그래서 성도들은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5:16-18, 25), 그리고 목표에 도달할 때까지 이 믿음의 달음질을 중도에 포기하지 말라는 권고를 받는다(6:10; cf. 5:7).

로마서에서도 바울은 유대적 정체성이 나쁘다고 말하는 대신, 그것이 무익하다고 말한다. 바울이 생각하는 대안은 유대적 정체성의 말살이 아니라 성경적 의미의 정체성 확보, 곧 외적 조건들이 아닌 참된 순종에 기초한 내면적 백성됨이다. 그래서 참된 대안은 무할례가 아니라 불순종의 존재를 순종하는 존재로 바꾸는 “마음의 할례”다(2:29; 렘 4:4; 9:25-26; 신 10:16; 30:6). 이는 불순종으로 왜곡된 첫 언약과는 달리, 순종을 가능케 하는 새 언약의 표지다(렘 31:31-34). 물론 이 마음의 할례는 사람의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몫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음의 할례가 “영으로 되는 것이지 의문/글자로 되는 것이 아니라”라 말한다(2:29). 돌판에 율법을 기록했던 옛 언약과는 달리, 성령을 통해 마음 판에 율법을 새기는 새 언약은 에스겔에게 주어진 언약회복 약속의 성취이기도 하다(고후 3장; 겔 36:25-28; 시 37:31; 40:8; 사 51:7). 생명의 성령을 통해 죄와 사망의 길에서 해방되고, 또 성령을 따름으로써 율법의 요구를 이룬다는 진술은 바로 이 약속의 성취에 대한 선언이다(8:2-4). 바로 이 새 창조와 갱신의 문맥에서 사죄의 선포가 이루어진다 (렘 31:34 ; 겔 36:25). 바로 여기서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 “더 이상 정죄가 없다”는 선언이 가능해진다(8:1).

이러한 변화는 믿음의 작용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이 성령과 연결되는 것처럼, 로마서에서 의롭게 하는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을 향한 부활의 믿음이었다(4:17-22; cf. 히 11:11, 17-19). 바로 이런 부활신앙 차원에서 예수의 부활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믿음이 연결되고, 이로써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린다(4:23-25; cf. 갈 3:6-7).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이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 부활신앙으로 집약된다(롬 10:9-10). 예수는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신 것처럼, 그는 또한 우리의 칭의를 위해 살아나셨다(4:25).

물론 생명의 성령이 하나님의 성령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 부활, 곧 새 창조의 역사가 하나님의 전권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은혜로 받을 수밖에 없다. 바울서신에서 하나님의 은혜 개념이 능력 개념과 가까운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러기에 할례나 무할례 같은 “외적,” “육신적,” 혹은 “인간적” 조건들은 생명을 창조할 수 없는 무력한 수단들이라는 점에서 칭의나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4:1-12).

문제는 이런 인간적인 혹은 “육신”에 속한 “가짜 해답들”을 진짜 해답으로 착각할 경우다. 유대인들의 경우 이는 육신적 할례와 외면적 정체성이 구원을 담보한다는 착각으로 나타났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이라는 논지와 결합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갈라디아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문제의 핵심은 무익한 것을 첨가했다는 것이 아니라 정작 중요한 믿음을 포기하고 성령을 버렸다는 것이다. 곧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과 “성령을 좇아 행하는” 삶을 상실하는 것(갈 5:15, 26), 믿음과 성령으로 유지되었어야 할 그리스도의 형상이 사라지는 것(4:19), 이것이 바로 위기의 본질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잘 살고 있다면 할례를 받든 말든 문제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지금 갈라디아는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끝마치려 하는” 배교의 위험에 처했고(1:6; 3:3), 이런 위기의 실제적 원인은 다름 아닌 할례 문제였다. 칭의를 신학적으로 다루는 로마서에서는 할례가 긍정적으로(칭의의 확증) 해석되는 것과는 달리(3:1-2; 4:11), 갈라디아서에서는 할례 자체가 믿음의 부정인 것처럼 제시되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의 이런 특수한 정황 때문이다(5:2-4). 그래서 바울의 궁극적 해답은 “할례 받지 말라”는 상황적 조치를 넘어,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본질적인 요구로 집약된다(5:16-25). 그것만이 의의 소망, 하나님 나라, 혹은 영생이라 불리는 최종적 목표에 도달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3장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율법에 대해 가진 복음의 차별성은 생명의 성령의 역사다(3:1-18). 바울은 이 차별성을 “능력”이라 불렀고(롬 1:16; 고전 1:18, 24; 2:1-5), 이는 “하나님의 능력 있는 임재”를 나타내는 “성령”에 대한 신념으로 집약된다. 바울의 이런 신념이 율법과 관련해서는 “성령과 의문”의 이항대립으로, 보다 윤리적 문맥에서는 “성령과 육체”의 이항대립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핵심은 동일하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하나님의 복음과 생명을 주지 못하는 온갖 인간적인 가치들과의 대결이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과 은혜의 언어는 바로 이런 초월적인 창조의 역사, 첫 창조에서 만물을 새롭게 하실 마지막까지 이르는 생명의 역사를 향한 초대다.

 

 

 

 

                                        권연경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오성종 교수 (칼빈대학교)

 

 

1. 권연경 교수(= 이하에서 ‘저자’)는 발표논문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 - 주석적 평가와 제안”에서 최근 국내외 신학계에서 활발한 토론이 되고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고, 찬반양론에 대한 간단명료한 소개와 함께 사려 깊은 문제제기와 나름대로의 신중한 대안제시를 하고 있다. 저자는 ‘바울의 칭의론에 관한 새 관점’(= 이하에서 ‘새 관점’)에 관하여 논의하려할 때, 특히 종교개혁자들의 해석과 전통적 교리에 대하여 비판과 수정을 제안하려는 입장을 보이면, 대화도 해보기 전에 처음부터 경계하며 전통수호를 위한, 경직된 (수구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우리나라의 신학계와 교계의 분위기를 염려하며 극히 조심스러워하고 있는 듯하다.

저자는 “어떤 해석이 (자신의) 전통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직 성경’을 외쳤던 개혁주의자들보다 ‘전통’에 집착했던 예전 카톨릭의 논법에 가깝다”고 우려하면서 “교회의 건강을 위해서는 개혁주의에 대한 정서적 호소보다는 sola scriptura 원리에 대한 실천적 고백이 더 필요해 보인다”고 호소하고 있는데, 적어도 ‘한국개혁신학회’에서는 환영받을 수 있는 외침이 되어야 할 것이다. 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 est!

 

2. 저자의 논문에서 전개하고 있는 내용을 요약 정리하는 것은 생략하기로 한다.

 

3. 저자는 논문에서 새 관점을 간략하게 소개하면서 동시에 새 관점의 비구원론적 칭의론 해석의 약점을 지적하고, 또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적 칭의관의 정당성을 기본적으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신자의 윤리적 삶과 행위의 종말론적 의미를 소홀히 하였던 약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치우치지 않으려는 세심한 성경신학적 사색과 함께 치열한 학문적 논쟁을 전개하면서 나름대로의 독창적인 대안적 해석의 길을 가기를 시도한다.

저자는 은혜의 선택사상에 근거한 구원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님과의 언약관계에 머물러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태도로 율법을 준행해야 최후심판 때 구원을 받는다는 초기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마찬가지로, 바울과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은 신자가 성령을 통하여 순종의 표시로 율법준수와 선행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신약의 구절들에 유의하기를 제안한다. 교회사 안에서 흔히 등한시되어왔던 이 구절들에 근거하여 진지한 신학적 사색을 할 때에 율법과 복음, 믿음과 행함, 칭의와 심판의 이분법적 곤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저자는 바울이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서 할례와 의식적 율법행위만 강요했던 갈라디아와 로마교회의 유대인 선동자들을 비판한 것은 선민적 정체성에 근거하여 “값싼 은총 교리”와 외식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던 자들에게 향한 것이었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나 무할례가 소용이 없고 다만 “믿음으로 역사하는 사랑”이 중요하므로, 성령을 따라 의와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고 강조하게 되었다고 본다.

사실 오늘날 한국과 서양의 기독교회는, 종교개혁 당시와 다른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행함과 순종의 삶이 없으면서도 믿음만으로 칭의를 얻었으니 열매없는, 형식적인 믿음을 가지고서도 최후 심판 때 구원과 영생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허망한 확신을 가지고 신앙생활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저자와 함께 우리는 행함이 없는 신앙생활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하며 심판 날을 대비하여 종말론적 소망의 삶을 살기 위해 순종과 선행의 삶을 힘써야 한다고 촉구하는 바울과 신약의 여러 저자들의 교훈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할 때라고 본다.

 

4.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저자에게 질문할 것을 적어본다:

 

(1) 새 관점은 루터나 칼빈이 초기유대교를, 바울이 가르친 이신칭의의 은혜의 복음에 대조되는, 율법의 행위로 의인이 되려고 노력한 공로주의적 율법주의 종교라고 이해하였다고 비판하는데, 저자도 이러한 비판에 대체로 동의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은 루터나 칼빈이 이신칭의론을 말할 때 초기유대교를 비판한 것도 아니며 다만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에 적대적이었던 유대주의자들 내지는 유대교적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가끔 가다가 부정적인 평가를 언급했을 뿐이다.

 

(2) 또 저자는 전통적 관점이 “‘율법과 복음’이라는 경직된 이분법”에 매여 있어서 “옛 언약과 새 언약을 관통하는 ‘연속성’(continuity)”을 바로 보지 못하던 것을 새 관점을 통해 교정받을 수 있게 되었으며, “복음의 은혜를 강조하기 위해 첫 언약에 담긴 은혜의 무게가 과소평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바울의 복음 속에 담긴 윤리적 책임의 중요성 또한 상대화되었다”고 평가하였다. 이러한 비판적 평가는 신구약성경과 율법과 복음의 연속성을 강조하였던 칼빈과 개혁주의 전통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다. 한편 루터에게 있어서 ‘율법과 복음’은, ‘율법과 은혜’나 ‘율법과 그리스도’와 같은 표현들과 함께, 실제로 자주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것으로 강조되어 나란히 나타난다. 그러나 이 때 루터는 단지 칭의론과 관련시켜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율법의 교훈이나 신자의 윤리적 책임을 등한히 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즉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는 데는 어떤 율법의 행위나 선행도 소용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만이 효능이 있으며 그리스도를 붙잡는 것이 믿음이라고 강조하여 sola fide와 sola gratia를 말한 것이다. (루터의 롬 3:28의 번역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에 대한 변증서인 ‘번역자가 보내는 회신 편지’[1530년]와 ‘1531년 갈라디아서 강의’ 참조!) 한편 루터는 갈라디아서 5:6의 주석에서 “믿음에 사랑의 행위가 따르지 않는다면 참되게 믿는 것일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3) 바울의 칭의론 진술에서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의 칭의 교훈을 읽었던 전통적 관점은 유대인/이방인의 사회학적 갈등 문제 취급의 문맥에서의 (사회학적 의미가 있는) “율법의 행위” 즉 할례와 음식법과 절기법의 준수 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칭의론을 가르친 바울의 본래적 의도를 새 관점에서부터 배워 논점을 수정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그러나 그러한 제언은 적어도 칼빈의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칼빈은 바울의 칭의론 진술의 사회학적 배경을 정확하게 고려하였고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도 제한적인 그러한 의미로 바로 이해하였음을 그의 주석에서 증거해준다. 루터에 대해서 변증한다면,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은 거의 강해설교 성격이어서(예를 들면, 2:16과 2:20은 각기 10쪽을 훨씬 넘는 분량임!) 당시 치열했었던 투쟁적인 상황 속에서 교황파의 오류를 지적하며 예언자적 정신으로 주석을 쓴 것이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반면에 시대적 교회적 상황이 많이 달라졌는데도 종교개혁자들이 당시 교회에게 외쳤던 예언자적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문제가 될 것이다.

 

(4) 저자는 “종교개혁 이후 구원론 논의를 주도해 온 ‘행위언약 vs. 은혜언약’의 이분법”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행위언약’을 모세의 율법언약으로, ‘은혜언약’을 복음으로 이해하여 말하고 있는데, 용어들의 개념이해에 혼동이 있는 것 같다. 언약신약에서 고유하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행위언약’으로는 타락 전의 아담과의 언약을 가리켰고, ‘은혜언약’으로는 창 3:15를 비롯하여 일체성과 연속성을 가진, 이후의 모든 언약들(노아언약, 아브라함언약, 시내산언약, 새 언약 등)을 포괄적으로 지칭하였던 것이다.

 

(5) 저자는 “칭의는 본래 미래적 개념이며, 바울서신에서도 이런 미래적 칭의 개념의 존재를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말하면서 해당 성구로 (본문비평상의 문제가 있는 빌 3:12을 제외하고) 다음 구절들을 예로 들었다: 갈 2:17; 5:5; 롬 2:13; 4:24; 5:19. 이 중 ① 갈 2:17의 경우δικαιωθῆναι는 부정과거 수동태 부정사로서 문법상으로나 문맥상으로 확실하게 미래의 의미로 쓰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문맥상 오히려 지상에서 현재적으로 ‘의롭게 됨’ 내지는 ‘의인으로 인정받음’(passivum divinum!)을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도 믿음으로 현재 의인이 되었으므로 유대인 신자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할 수 있다는 뜻임). ② 롬 2:13의 경우 δικαιωθήσονται는 미래 수동태 직설법이므로 미래에 일어날 칭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내세의 종말에 율법준수 여부에 따라 칭의가 주어질 것이라는 유대교적 관점을 따라 논하고 있는 문맥 가운데 있는 것이므로(Fitzmyer 등과 함께)), 바울 고유의 기독교 칭의론에 대한 진술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③ 롬 4:24의 경우 μέλλει λογίζεσθαι는 표면상으로는 명백하게 미래에 칭의가 이뤄질 것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맥상 시간적인 미래의 사건을 나타낼 수도 있고 논리적 미래의 사건을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문맥에 속하는 5:1에서 신자의 현재적 칭의(δικαιωθέντες, 부정과거 수동태 분사!)의 축복된 현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논리적 미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Moo 등). ④ 롬 5:19의 경우 δίκαιοι κατασθήσονται에 대해서도 4:24과 똑같은 판단을 내리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Moo 등과 함께)). ⑤ 갈 5:5의 경우 “우리는 ἐλπὶς δικαιοσύνης를 간절히 기다린다”는 종말론적 소망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나 여기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1) (윤리적인) 의로운 정도/상태에 따라 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 2) 현재의 칭의 사실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공개적으로 선언받게 될 것에 대한 소망; 3) 롬 5:9에서와 같은, 칭의받은 자가 내세에 받게 될 ‘구원’에 대한 소망; δικαιοσύνης를 주격적 소유격으로 보아 4) ‘의롭게 된 자’(abstract for concrete!)가 장차 누리게 될 것을 소망함, 또는 5) ‘(이미 이루어진) 칭의’의 축복이 바라는 소망(genetivus epexegeticus!) 등. 이들 중 1)과 2)는 문법적으로는 가능성이 있겠으나 바울에게서 그와 같은 미래적 의미로 사용된 예가 없으므로, 그리고 3)은 ‘칭의’와 ‘구원’의 두 개념이 바울에게서 일반적으로 상호교환적으로 쓰이지 않았으므로 고려의 대상에서 배제된다. 4) 또는 5)의 해석이 바울의 전체의 칭의론 진술들과 가장 잘 조화될 수 있다고 본다(Fung 등과 함께)). 그러므로 해석의 여러 가능성을 두고 논란이 있는 갈 5:5을 예외적으로 미래적 칭의를 말하는 구절로 인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다.

 

(6) 저자는 Wright와 Barrett 등과 같이 신자에게 현재적 칭의가 개시의 의미로 있고 최종적 칭의가 심판 때에 확인의 의미로 있게 될 것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신자의 칭의가 믿음과 동시에 (중생과 하나님의 자녀 됨, 성령의 내주 등의 은혜가 일어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하여 성령의 역사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로서 지상에서 현재적으로 경험되는 사건으로 바울서신에서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여러 구절들이 있다: 고전 6:11; 고후 5:21; 빌 3:9; 롬 3:21-26; 5:1,9; 8:30. 특히 갈 2:15-4:31까지의 바울의 칭의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 율법의 행위와 관계없이 은혜로 그리고 현재적으로 다 같이 칭의를 얻어 아브라함의 자손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성령을 받으며 칭의를 얻게 됨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롬 4장에서도 신약시대에 믿음으로 의롭게 될 그리스도인들의 모형인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써 현재적으로 칭의를 얻게 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 저자는 이러한 바울의 칭의론 진술들에 기초하여 신학적 사고를 발전시키면 좋겠다고 권하고 싶다.

 

(7) 저자는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르는 삶과 다른 수 없다”고 말하면서 롬 8:4을 참조시키고 있는데, 바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따르고 있는 신학적 사고는 아닌 것 같다. 바울은 분명히 “육신을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서 율법의 요구가 이뤄진다”(롬 8:4),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갈 5:18), ”사랑은 (이웃사랑의) 계명들/율법의 완성이다“(롬 13:8-10; 갈 5:13-14) 등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이 말들이 ”율법을 행하는 삶이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라거나 계명/율법의 실천이 사랑의 실천이라는 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못된다. 오히려 성령으로 사는 삶과 사랑의 실천이 율법을 행함보다 더 높은 차원에 있고 더 포괄적인 성격을 가진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 22:40에서 예수께서 사랑의 계명 위에 모든 계명들이 매달려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와 바울의 교훈이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동물은 사람이 아니다“는 진술의 비유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8) 저자는 바울이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키지 않고 믿음과 대조시켜 ‘율법의 행위(ἔργα νόμου)’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을 뿐임을 지적하면서, “우리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 말하지만, 정작 바울은 ‘믿음의 행위’(ἔργον πίστεως)”(살전 1:3; 살후 1:11)를 말하고 있다고 문제제기를 한다. 그러나 바울이 율법준수의 '행위들' 또는 윤리적/선한 행위들(예: 엡 2:10)을 말할 때는 흔히 복수 ἔργα(‘works,’ 독어: ‘Werke’)를 쓴다(롬 2:6; 3:20; 4:2; 갈 2:16; 엡 2:10; 딤전 2:10; 딤후 4:14). 반면에 추상명사로 ‘활동/사역’을 말할 때는 (의도적으로 구별하여) 단수 ἔργον(‘action,’ 독어: ‘Betätigung’)을 쓴 예가 많다(예: 롬 2:7,15; 14:20; 고전 3:13-15; 갈 6:4; 엡 4:12; 살전 1:1; 살후 1:11)(W. Bauer 사전 및 L. Mattern, Das Verständnis des Gerichtes bei Paulus 참조!). 살전 1:3과 살후 1:11의 경우는 후자의 용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롬 14:22-23에서처럼 믿음에서 나온 활동/행동을 가리킨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9) 저자는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로 열거되고 있는 πίστις를 ‘믿음’의 의미로 이해하면서 “성령을 통해 맺는 열매의 하나로 제시된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갈라디아인들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려 했다면 오히려 그것을 믿음의 열매로 간주”했을 것이라고 부연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주관성이 강한 해석과 적용이라는 느낌이 든다. 우리의 구절에서 성령의 열매로 열거하고 있는 단어들은 모두 성령에 의하여 오랜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는 성품을 나타내는 말들이므로, 이 구절에서 헬라어 πίστις는 (‘믿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영어번역성경과 주석가들을 따라 ‘faithfulness/fidelity’/‘신실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것이기 때문이다.

 

(10) 저자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서로의 짐을 짐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고 권면하는 말에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율법을 행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리스도의 법”을 “모세의 율법”과 실제로 같은 의미로 이해한다. 그러나 그렇게 이해할 때 매우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바울이 같은 서신에서 앞에서는 계속하여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의미로 말하여왔기 때문이다. 즉 율법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으며(3:10), 율법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이제 더 이상, 감독하며 규제하는 ‘몽학선생’인,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3:23-25),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율법에서부터 속량함을 받아 자유케 되게 하려 하심이며(4:4-5; 5:1), 율법 아래 있으려 하는 자들은 종과 같은 신분으로 있는 자나 마찬가지이다(4:21-31)는 등으로 거듭 거듭 강조하였었기 때문이다. 왜 갑자기 모세의 율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불렀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표현으로써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강조하신 바 있고 초대교회 신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을 ‘사랑의 계명’을 가리킨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참조: 갈 5:13-14; 롬 13:8-10; 마 22:36-40; 요 13:34; 14:21; 15:12; 요일 3:23; 약 2:8)(Fung 등과 함께). “짐을 서로 지는 것”은 바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의 율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11) 성경에는 인간이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의지 및 책임의 문제이다. 이 문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양자를 조화시키기 어려운 없는 면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바로 그러한 성격의 대상들 중 칭의와 내세심판의 관계도 포함시켜야 된다고 보고 싶다. 그런 대상들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논리적 사색의 한계를 인정하고 적당한 단계에서 멈추는 겸비가 필요한 것 같다. 그래서 신자의 칭의와 행위심판과의 관계에 대하여 바울의 가르침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겠다고 제안한다:

① 신자는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를 따라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예정된 자이며(엡 1:3-6)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칭의를 받은 자이다(롬 8:29-30, 10:9-10).

② 한편 신자는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이 살아가도록 거룩한 소명을 받았다: 1) 선한 일을 하며 거룩한 삶을 살도록(엡 1:4-5; 2:10); 2) 세상에서 빛이 되고 열매를 맺도록(엡 5:8-9); 3) 은사를 주시어 봉사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엡 4:7-16); 4)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성령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도록(갈 4:5-6, 롬 8:14-16, 살전 4:7-8); 5)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본받도록”(롬 8:29).

③ 신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의 은혜로 칭의를 받았기 때문에 장차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확신과 소망을 가질 수 있다(롬 5:1-11). 그리고 동시에 신자는 세상의 모든 고난과 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보호해주실 것을 보장받았다(롬 8:12-39).

④ 다른 한편 신자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도 말씀 한다: 1)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롬 8:13); 2)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성령을 받은 자라고 지칭을 받은 자인데도(갈 3:26; 4:5-6) “(지속적으로 육신의 일들을) 행하는 자들(οἱ τὰ τοιαῦτα πράσσοντες, 현재분사!)”과 “(지속적으로) 육신을 위해 심는 자(ὁ σείρων, 현재분사!)”는 내세에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며 영생을 누리게 되지 못할 것이며(갈 5:21, 6:8),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가 우상제물을 먹고 멸망에 떨어질 수도 있다(고전 8:11).

⑤ 그러나 참 신자는 내세의 심판과 관련하여 가질 바람직한 태도는, 육신을 따라 살았다가 내세 심판 때 버림받을까 봐 걱정하며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한 대로 갚으시는 의로우신 재판장 되신 주님 앞에서 인정받고 상급 받기 위해 절제하며 (달려갈 길을 달리는 자세로) 사명에 충실하고 성화를 이루기 힘쓰면서 종말론적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고전 3:8-15; 4:4-5; 9:18-27; 15:58; 고후 5:10; 갈 6:7-10; 살전 3:13; 5:23-24; 빌 2:12-13; 딤후 4:7-8).

한편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already, but not yet)’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다음과 같은 진술은 바울의 구원론적 용어 사용과 모순될 때가 있다: “이미 구원받았으나, 완전한 구원은 내세에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항상 교의학의 구원론에서 말하는 대로의 포괄적인 ‘구원’ 개념을 사용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바울은 ‘구원받다’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문맥을 따라 구체적인, 그러나 제한적인 의미를 가진 다양한 개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과거시제를 사용하여) 죄의 용서와 중생을 가리키면서(엡 2:5,8; 딤후 1:9; 딛 3:5), (명령형을 사용하여) 성화를 통한 구원을 가리키면서(빌 2:12; 딤전 4:16), (미래시제를 사용하여) 내세에 있게 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서의 구원 내지는 최종적 구원을 가리키면서(롬 5:9-10; 13:11; 고전 5:5; 딤후 4:18) 사용하였던 것이다. 바울은 또한 (무시간적으로 적용되는 또는 영원한 구원을 의미하는) 근본적인 구원 내지는 궁극적인 구원을 가리키면서 ‘구원/구원하다’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였다(롬 1:16; 8:24; 9:27; 10:1,9,10,13; 11:11,14,26; 고전 1:18,21; 7:16; 9:22; 10:33; 15:2; 고후 2:15; 살전 2:16; 살후 2:10; 딤전 1:15; 2:4,15; 딤후 ).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이미 구원받았으나, 완전한 구원은 내세에 있게 될 것이다”는 구호를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마지막의 용례의 부류의 경우에서다. 그러나 신자의 칭의에 관하여는 바울의 용어 사용관습에 따라 ‘이미, 그러나 아직 아니다’의 구호를 적용할 수 없다고 본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마지막 때에 있게 될, 언행에 대한 “의롭다 칭함 받음” 여부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마 12:36-37; 약 2:21-24), 바울의 경우와는, ‘칭의’를 가리키는 단어는 같으나 개념은 전혀 다르다.

 

(마지막으로 사족 하나:) 지나치게 잦은 연속된 의문문은 논리적 사고를 도와주기보다는 오히려 산만하게 하고 논리의 주관성을 의심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 같다. 저자는 특히 9-10쪽에서 의문부호로 끝나는 문장이 연속하여 15개가 나온다(처음에 연속하여 8개, 몇 문장 후에 다시 4개, 또다시 몇 문장 다음에 3개).

 

   

 

 

  

권연경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소기천(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신학 교수/예수말씀연구소 소장)

 

1. 요약

 

1) 저자의 새 관점에 대한 논지

1977년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 유대교?(Paul and Palestinian Judaism)는 광범위한 초기 유대교 문헌들을 검토하면서 초기 유대교가 결코 율법주의적(legalistic) 종교가 아니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논증하였다. 유대교는 언약 백성이라는 신분이 은혜로운 선택의 산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율법 준수는 필요하지만 이는 언약 백성의 신분을 획득하려는(“getting in”) 공로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staying in”) 노력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에 의하면, 율법에 대한 열성(nomism)은 근본적으로 은혜로운 언약(covenant)의 태반에 뿌리내린 것이었다. 샌더스는 이런 유대 종교의 패턴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 불렀다. 이러한 샌더스의 주장은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왔다. 많은 학자들은 율법주의로 규정된 전통적 유대교 상을 포기하고 언약적 율법주의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하지만 샌더스로부터 출발한 충격의 파장은 유대교보다는 바울신학 쪽에서 더 심각하게 감지되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는 유대교를 율법주의라 보았다. 이와는 달리 샌더스는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라고 규정했다. 여기서 물음이 생긴다.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니라면, 바울이 비판한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새 관점”(New Perspective)라는 용어를 고안한 던 (J. D. G. Dunn)은 샌더스의 유대교 평가에는 후한 점수를, 하지만 그의 바울 해석에는 낙제점을 매긴다.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잘 설명했지만, 이를 바울과 연결하는 데는 실패했다는 것이다. 던은 유대교의 언약적 율법주의와 바울 사이에 근본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새 관점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울의 칭의론이 이방인과 유대인의 관계라는 구체적 정황 속에서 개진되고 있음을 중시하는 것이다. 바울의 칭의론이 대부분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함께 나타난다는 사실은 바울의 칭의론이 어떤 식으로든 이런 사회적 이슈와 관련된 것임을 시사한다.

 

2) 저자의 옛 관점과 새 관점에 대한 논지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약점을 극복하고, 바울 칭의론의 전모를 제대로 규명해 낸 것일까? 이에 대한 판단은 부정적이다. 바울의 논증이 자리한 사회적 정황을 더욱 분명히 밝혀주었다는 점에서 새 관점의 공헌은 분명하지만, 바울의 칭의론이 드러내는 신학적 혹은 구원론적 차원을 해명하는 데는 서툰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그저 편향성의 문제를 넘어선다. 사회학적 차원과 구원론적 차원이 함께 어우러지는 상황에서, 신학적 차원을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다는 말은 애초에 사회학적 설명 자체도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새 관점 학자들이 제안하는 개념의 틀들이 피상적인 경우가 많다.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 문제와 긴밀하게 얽혀있음을 잘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새 관점이 칭의론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및 죄와 구원의 문제로 간주하는 옛 관점을 무너뜨린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에는 근본적인 신학적 관심과 보다 실질적인 사회학적/교회론적 관심사가 동시에 나타난다. 바울이 이 두 관심사를 오락가락한다는 사실은 이들이 따로 취급할 수 있는 별개의 주제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3) 저자의 옛 관점과 새 관점에 대한 비판

바울의 칭의론을 개인 구원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전통적 해석은 칭의론의 문맥으로 제시된 유대인/이방인의 관계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그와 더불어 바울의 구원론 내에 잘 해소되지 않는 긴장 혹은 모순의 위험이 엿보인다. 반면 그런 약점을 보완하면서 나타난 새 관점은 오히려 바울 칭의론의 신학적 차원을 소홀히 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바울의 칭의론을 이해하기 위한 실질적 과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공평함에 대한 새 관점의 강조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전통적 관점과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 관점이든 새 관점이든 이에 대해서는 선명한 해법을 발견하기 어렵다.

 

4) 저자의 대안제시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바울의 칭의론에 드러나는 두 가지 상이한 현상을 하나로 연결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울 칭의론의 비판 대상을 잘못 설정한 것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것처럼, 바울의 칭의론은 그 배후에 분명한 신학적 대화상대자를 상정한다. 갈라디아서의 경우 실제로 교회로 침투한 유대주의적 선동자들일 것이고, 로마서의 경우는 2장에서 비판되는 자칭 유대인들이다. 따라서 이 대화상대자들의 입장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바울이 개진하는 믿음과 은혜의 논리도 달리 이해된다. 바울 칭의론의 대화상대자를 1세기 유대교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새 관점은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그대로 공유한다. 따라서 새 관점의 대두 이후 초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은 사실상 바울에 관한 논쟁의 대리전 양상으로 전개되는 인상을 풍긴다. 새 관점 학자들은 초기 유대교 내의 율법주의적 논조를 축소하고 “언약적 율법주의”를 그리려 하는 반면, 전통적 입장의 학자들은 율법의 사회적 기능보다는 거기에 담긴 율법주의적 흐름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방법론적 비약이 존재한다. 최근의 연구들은 초기 유대교 내에 다양한 흐름이 공존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1세기에 존재했던 다양한 “유대교들” 중에서 내가 선택한 특정한 경향이 바울이 비판한 바로 그 입장이라는 보장은 없다. 이는 유대교를 넘어, 바울 자신의 논증을 통해 확인되어야 한다. 유대교의 성격 자체가 논란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찰은 할례나 절기 준수 등과 같은 “율법의 행위들”과 율법에 대한 순종을 구분하는 바울의 움직임과 잘 어울린다. 적어도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문맥에 관한 한, 바울의 논증을 이해하는 가장 자연스런 방법은 할례, 음식규정, 절기 규정 등으로 예증되는 “율법의 행위들”을 율법 준수와 구분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다.

믿음과 행위의 구분에서 시작하는 전통적 칭의론에서는 순종의 구원론적 가치를 해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점에서 (행위에 의존하는) 율법주의 대 (자신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구도를 포기하고 보다 사회학적 논리로 무장했던 새 관점은 바울의 칭의론과 윤리에 관한 보다 실질적인 해명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새 관점주의자들의 바울 해석에서도 이러한 긴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긴장의 원인이 되는 전통적 관점의 전제를 새 관점 역시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율법주의에서 언약적 신율주의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여전히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를 포괄적 의미에서 율법 실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바울의 비판이 “율법 준수”와는 사뭇 다른 과녁을 향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이 율법의 행위 속에 어떤 교리적인 독이 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바울의 생각 속에서 전통적 관점이나 새 관점의 주장과는 달리, 문제의 핵심이 “율법의 행위” 자체가 아님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믿음이 참된 해답이 되는 이유 또한 마찬가지다. 율법의 행위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던 것처럼, 무할례 역시 실질적 해답은 아니다. 할례를 받는 아니든 중요한 것은 믿음이다. 그렇다면 왜 믿음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가?

 

2.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제기

1977년에 출간된 샌더스(E. P. Sanders)의 책으로 시작된 1세기 유대교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 없었더라면 “새 관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샌더스의 주장은 한마디로 “1세기 유대교는 율법주의 종교(legalist religion)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샌더스는 그의 책에서 전통적으로 교회가 1세기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이해해 왔으나 이러한 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다양한 고대 유대교 문헌들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하여 소개한다. 바울을 포함한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율법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오히려 그들의 율법준수는 언약에 대한 그들의 신실함과 충성심의 표현이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당시 유대인들이“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로 구원을 얻으려 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유대교를 율법주의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바울신학과 샌더스의 주장은 양립불가능하다. 따라서 만약 누구라도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를 옳다고 여긴다면 그는 아래의 두 가지 중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 바울이 당시 유대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 유대교가 율법주의 종교가 아닌데도 바울은 율법주의 종교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 지금까지 교회가 바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법은 잘못되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했다는 바울의 주장에 대한 종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

사실 바울신학의“새 관점”을 둘러싼 논쟁은 바울에 대한 논쟁에서 시작된 것이라기

보다는 1세기 유대교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질문들

1) 레이제넨(Heikki Räisänen)이 Paul and the Law에서 주장한 것처럼, 바울은 당시 유대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을 뿐 아니라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매우 일관성이 없고(inconsistent) 자기모순적(self-contradictory)인가?

2) 제임스 던은 Paul and the Mosaic Law이란 책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바울을 변호한다. 바울이 비판하고 반대한 것은 유대인들의 “정체성 표지”(identity marker)였던 할례, 음식물에 관한 규정, 안식일 법과 같은 것을 강조하여 자신들을 다른 민족으로 분리한 배타주의적 태도였다는 것이다. 즉 바울이 비판하는 “율법의 행위”(the works of the law)는 이와 같은 유대인의 표지를 열심히 지키고 강조하는 것이지, 모든 율법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대인들은 그런“유대교의 테두리를 보여 주는 율법”(boundary makers)을 열심히 지킴으로써 유대교 안에“머물러 있으려고”(stay within)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로 이점, 즉 유대인들의“민족적 자만”(national pride)을 비판하였을 뿐,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비판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은 과연 설득력이 있는가?

3) 과연 바울이 말하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비판이 단지 할례, 음식법, 안식일법을 지키려는 유대인들의 편협한 국수주의를 비판한 것인가? 새 관점의 문제점은 과연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유대인들(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이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과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것이다. 새 언약이 주어짐으로써 옛 언약은 끝나고 새 언약이 옛 언약을 대체(replace)하였는가? 아니면 두 언약이 다 유효한 것인가? 과연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졌는가?

4) 바울이 믿음에 관해 명시적으로 선포하는 내용은 우리가 믿음을 통해서만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따라 잘 살고 있다면 할례를 받든 안 받든 문제될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칭의와 성령의 사역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