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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접근과 개혁신학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에반젤(복음) 2021. 11. 14. 18:01

바울에 대한 “새 관점”의 접근과 개혁신학

“새 관점”, 무엇이 문제인가?

최갑종(백석대학교)

 

 

I. “새 관점”(the New Perspective on Paul)의 등장

1982년 11월 14일, 영국 Durham대학교 교수 던(James D.G. Dunn)은 Manchester대학교의 ‘맨선기념강연’(the Manson Memorial Lecture)에서, 캐나다 MacMaster대학교 교수 샌더스(E.P. Sanders)가 1977년에 출판한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와 더불어 태동한 “새로운 유대교이해에 따른 새로운 바울연구운동”을 가리켜 “The New Perspective on Paul”(우리말로 줄여 보통 “새 관점”이라 부른다) 명명(命名)하였다. “새 관점”의 기초를 닦은 샌더스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율법을 지켜 의/구원을 얻으려는 “율법주의”(Legalism)였다는 전통적인 주장은 유대교에 대한 서구사회의 편견인 “반 유대인운동”(the anti-Semitism)에서 기인한 잘못된 것임을 주장하였다. 그는 제 2성전 시대(BC 536-AD 70), 특별히 BC 200-AD 200년 사이에 쓰여 진 초기 랍비문헌(Tannaitic Literature), 사해문서(the Dead Sea Scrolls) 가경(Apocrypha)과 위경(Pseudepigrapha)의 문헌들(Ben Sirach, I Enoch, Jubilees, The Psalms of Solomon, IV Ezra) 등의 자료 연구에 의존하여, 1세기의 유대교는 기독교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을 강조하는 은혜의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샌더스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의와 구원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닌(“Not Getting in”),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택과 언약에 의해 주어진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But Staying in”) 수단이다. 그리고 율법은 그 자체 언약백성의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한 자들에게 속죄의 제사를 통해 언약백성의 신분을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을 갖고 있다. 따라서 유대교에 있어서 의와 구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 샌더스는 이와 같은 유대교의 종교시스템을 가리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 하였다. 그는 자신의 책,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언약적 율법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런 다음 (2)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다. 율법은 (3) 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4) 순종의 요구 사항을 함께 갖고 있다. (5) 하나님은 순종에 대해서는 보상하시고, 불순종에 대 해서는 심판하신다. (6) 율법은 속죄의 수단과, 속죄의 결과로 인한 (7) 언약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을 제공한다. (8) 순종, 속죄 및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 받게 될 그룹에 속하게 된다. 첫 번째와 마지막 요점에 관한 중요한 해석은 선택과 궁극적인 구원은 인간의 성취가 아닌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샌더스가 주장한 것처럼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한다면, 이것은 기존의 신약해석, 특별히 바울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를 요구한다. 왜냐하면 샌더스 이전의 바울서신에 대한 해석들은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순종을 의와 구원을 얻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삼은 “율법주의”였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진 부분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샌더스는 물론 새 관점의 대표적인 주창자인 던, 라이트(N.T. Wright)는 개신교신학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루터(M. Luther)와 캘빈(J. Calvin) 등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1세기 유대교에 대한 잘못된 이해 때문에 바울을 잘못 이해하였다고 본다. 이들은 종교개혁자들이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의 자리를 인정하였던 16세기 로마 캐톨릭교회의 상황을 1세기의 유대교 상황과 동일시함으로써, 그리고 로마 캐톨릭교회를 비판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유대교를 비판하는 1세기의 바울의 입장과 동일시함으로써, 1세기의 유대교와 바울을 다 같이 왜곡(歪曲)시켰다고 본다. 그래서 새 관점의 주된 아젠다를 16세기 이후의 잘못된 바울을 1세기의 바울로 되돌려 놓는 것에 두고 있다.

 

“새 관점”이 태동한지 4반세기 안에 “신학의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불리어질 만큼 기독교 전반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운동으로 확산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새 관점”의 주장이 나름대로 적지 않은 역사적 근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다음 세 가지가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 같다. 첫째,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유대인 대학살 사건(the Holocaust)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한 깊은 반성과, 그리고 이와 더불어 서구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반 유대인운동”(the anti-Semitism)에 대한 서구사회의 자성(自省)이 유대교 및 유대인들을 우호적으로 볼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둘째, 20세기에 들어와 팔레스틴과 인근 주변에서 발굴된 수많은 고대 이스라엘나라의 유물 및 문헌들, 이를 테면 사해문헌의 발굴로 말미암아 촉진 된 유대교문헌을 통한 유대교 보기운동이 샌더스의 연구 결과에 깊은 관심을 갖도록 하였다. 셋째, 20세기 후반에 일어난 헬레니즘문화 패러다임에서 동양 및 히브리즘문화 패러다임에로의 전환운동과 함께 기독교신앙의 강조점의 이동, 즉 전통적인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 관계의 강조에서 인간상호간 혹은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수평적 관계를 강조하는 패러다임 전환 및 강조점의 이동이 새 관점 주창자들이 시도하는 바울과 그의 서신들에 대한 공동체 및 사회학적 접근에 호감을 갖도록 하였다.

 

“새 관점”을 주도하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은 샌더스, 던, 라이트이다. 샌더스는 1970년대에 “새 관점”의 터를 닦고 씨를 뿌렸으며, 던은 1980년대에 “새 관점”에 물을 주고 성장을 시켰으며, 라이트는 1990년대 이후 “새 관점”을 수확하여 그 열매를 널리 보급하는데 앞장을 서고 있다. 그렇다면 “새 관점” 운동을 대변하고 있는 샌더스, 던, 라이트의 핵심적인 아젠더는 무엇인가? 새 관점의 핵심적인 아젠더를 한마디로 소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새 관점”의 대표적인 주창자들인 샌더스, 던, 라이트가 모든 면에서 서로 일치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새 관점이 고정되어 있기보다 여전히 진행형이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정착하게 될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출판된 저서나 논문들을 통해 그들의 공통분모와 핵심적인 아젠더를 언급하는 것은 가능하다. 필자가 볼 때 “새 관점”의 토대를 마련하고 씨를 뿌린 샌더스의 핵심 아젠더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재구성문제, 곧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임을 명백하게 밝힌 일일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 일을 위해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을 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새 관점”에 물을 주고 성장시킨 던의 아젠더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의 핵심적인 심벌인 율법 및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을 통해 바울과 유대교와의 바른 관계를 정립함은 물론, 바울신학을 바울 자신의 문맥에서 바르게 보려는 일일 것이다. 던이 쓴 두 권의 『로마서주석』, 『바울신학』 그리고 최근에 쓴 New Perspective on Paul가 이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새 관점”의 전도사 역할을 자임한 라이트의 아젠더는 바울의 “의”와 “믿음” 곧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왜곡된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본래 의미를 바울 자신의 역사적 문맥에서 되살리는 일일 것이다. 이 점은 그가 쓴 What St. Paul Really Said, The Letter to the Romans, Paul: Fresh Perspective, Justification. God's Plan & Paul's Vision에 잘 나타나 있다. 그래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새 관점”이 제기한 모든 문제를 다 다루지 않고, 샌더스, 던, 그리고 라이트의 핵심적인 아젠더의 정당성여부만을 취급하도록 하겠다. 사실상 “새 관점”은 샌더스, 던, 라이트의 핵심 아젠더인 이 세 수레바퀴에 의해 움직여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2. 새 관점의 아젠더 1, 샌더스의 “언약적 율법주의”

 

“새 관점” 주창자들이 서 있는 공통분모와 출발점은 샌더스가 제안한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이라는 주장이다. 던과 라이트는 여러 부분에 걸쳐 샌더스와 의견을 달리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전폭적으로 그와 의견을 같이하고, 이것을 사실상 샌더스의 최대의 업적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새 관점”의 정당성 여부는 샌더스가 제안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정당성 문제와 불가분리의 관계를 갖고 있다. 1세기 유대교가 “옛 관점”이 주장하는 “율법주의”인가, 아니면 “새 관점”이 주장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인가? 샌더스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을 통해 제시한 1세기 유대교의 재구성은 정당한가? 그가 제안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바울 당대는 물론 제 2성전시대의 유대교를 정확하게 대변하고 있는가? 우선 샌더스가 제 2성전 시대의 방대한 유대교 자료 연구를 통하여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 지평을 넓혀 주었다는 점, 이를테면 1세기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강조하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갖고 있음을 밝혀준 점은 높게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사실 제 2성전 시대의 유대교문헌을 정직하게 읽는 자는 문헌 안에 샌더스가 밝힌 언약적 율법주의 요소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쿰란공동체 규칙서인 1QS 11.11-15은 하나님의 자비와 의가 나의 구원과 의의 근거임을 고백한다.

 

만일 내가 죄를 범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비가 나의 영원한 구원이 될 것입니다. 만일 내가 육의 죄로 비틀거릴지라도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의가 나의 의가 될 것입니다....하나님은 그의 은혜에 의에 나를 이끄시고, 그의 자비로 나의 의를 가져올 것입니다. 그는 그의 진리의 의로 나를 판단하시고, 그의 위대한 선하심으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그의 의를 통하여 나를 사람의 불결로부터, 모든 사람들의 죄로부터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역시 솔로몬의 시편(The Psalm of Solomon) 9:8-11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주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입니다.

오 이스라엘의 하나님, 우리에게 긍휼하심을 보여 주소서, 우리는 주의 것입니다;

악한 자들이 우리를 도살하지 않도록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서 거두지 마소서.

오 주여, 주께서 모든 민족들 위에 아브라함의 후손들을 선택하셨으며,

주의 이름을 우리에게 두셨으며, 그 이름은 영원히 소멸되지 않을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선조들과 더불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우리의 영혼이 주께 방향을 틀 때 우리는 주에 대한 소망을 가집니다.

주의 자비가 이스라엘 집에 영원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시락서(Sirach)도 동일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를 강조한다.

 

주는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비참가운데서 구원을 베푸십니다(2:11).

주의 긍휼하심이 얼마나 위대하시고, 그에게 돌아오는 자에 대한 용서하심이 얼마나 크신지요(17:29).

우리의 존재는 연약하고 우리의 생명은 짧지요.

그래서 주는 우리에게 참으시고, 주의 자비를 우리에게 부으십니다.

그는 우리의 마지막이 불행하다는 것을 내다보시고,

우리에게 더 풍성한 용서를 베푸십니다(18:11-12).

 

더구나 히브리어성경(구약) 자체가 출애굽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선(先) 이스라엘 민족의 선택과 구원, 후(後) 광야에서의 율법수여와 이스라엘 백성의 순종 요구를 보여줌으로써 율법주의보다 오히려 “언약적 율법주의”에 가까운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그리고 1세기 유대교가 여전히 히브리어성경을 그들의 성경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세기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율법주의로 규정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종교개혁자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이 충분한 역사적인 연구나 문헌의 검토 없이 1세기의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율법주의”로 단정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면, 샌더스 역시 제 2성전 시대의 다양한 유대종파와 유대문헌과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다양한 유대 공동체의 신앙과 삶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제 2성전 시대의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로 환원시켜버렸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는 점도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제 2성전시대의 유대교 문헌들을 자세하게 다시 검토해 보면, 적어도 필자가 직접 확인해 본 바에 따르면, 제 2성전시대에 유대교 안에 “언약적 율법주의”뿐만 아니라 “율법주의적 경향”도 함께 공존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바룩서 54:14-16은 "토라는 하나님의 계명의 책이며, 영원히 서 있는 율법이다. 토라를 지키는 모든 자는 살 것이요, 토라를 버리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율법준수가 한 사람의 생명과 삶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다. 샌더스가 언약적 율법주의를 입증하기 위해 인용한 솔로몬의 시편 9:8-11의 바로 앞에 있는 4-5절은 “우리의 행위는 우리 영혼이 선택할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능력 아래 있다. 우리의 손으로 옳고 그른 일을 할 수 있다. 주는 주의 의로우심으로 우리의 존재를 통찰하신다. 옳은 일을 행하는 자는 주님과 함께 자신을 위하여 영생을 저축하는 자이며, 옳지 않은 일을 행하는 자는 자신의 생명을 파멸로 치닫게 하는 자이다. 왜냐하면, 주의 의로우신 판단은 개인과 가정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한 사람에게 있어서 영생과 영벌의 최종적인 결정이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역시 사해문서 Damascus Document(CD)7:5.9은 “이 계명들을 하나님의 모든 가르침에 따라 완전한 거룩함으로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그들이 수 천대까지 살게 될 것을 보증해 줄 것이다. 반면에 계명들을 멸시하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방문할 때 사악한 자에게 내릴 징벌로 보답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언약이 아닌 율법준수가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의 결과를 좌우한다고 말하고 있다. 솔로몬의 시편과 쿰란공동체 문헌에 나타나 있는 최종적인 심판이 율법준수의 행함에 좌우된다는 사상은 아브라함의 계약서(Testament of Abraham)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면 천사장이 아브라함에게 한 말,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의 무게가 그 사람의 범한 죄의 무게보다 더 클 경우 그는 구원 받는 자의 자리에 들어가게 될 것이요“(14:4-5)은 구원이 그 사람의 선행에 좌우됨을 보여준다. 필자가 단지 몇몇 경우만을 실례로 들었지만 최종적인 심판이 한 사람의 선행 여부에 좌우된다는 사상은 초기 유대문헌에 널리 퍼져있었다. 그 밖에 우리는 시락서 15:14-17, 희년서 30:21-22, 제 4에스라 7:77, 바룩 4:1, 쿰란 문헌 1QS 11:3, 4QMMT C30-31, m. Aboth 3.16 등을 통해서도 제 2성전시대에 율법주의 경향이 한 지역이나 한 특수한 계층이 아닌 여러 지역과 계층에 퍼져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샌더스는 유대교문헌 가운데서 언약적 율법주의를 지지하는 본문들은 확대 강조한 반면에, 율법주의를 암시하는 본문은 가능한 한 축소 또는 간과하고 있다.

 

둘째, 샌더스는 신약성경이 역사적 상황을 반영하는 믿을 수 있는 1세기 자료임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이 말하고 있는 1세기의 유대인 및 유대교에 대한 언급을 무시하거나 혹은 1세기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 아래 유대교와 관련된 신약의 언급들을 성급하게 재해석하고 있다. 사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행위에 대한 예수의 날카로운 비판(마 23), 영생을 한 사람의 행위와 관련시키는 율법사의 질문(마 19:16-30; 막 10:17-31; 눅 10:25; 18:18-30), 자신의 공로적 의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하나님의 자비만을 바라는 세리의 비유(눅 18:9-10), 공로주의 사상을 비판하고 있는 포도원 품꾼들의 비유(마 20:1-16), 사도행전 15:1에 언급된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유대주의자들의 주장,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주장들(갈 2:16; 롬 3:28) 등은 당시 유대교 안에 율법주의가 상존하고 있다고 볼 때만이 정당한 이해가 가능하다.

 

셋째, 샌더스는 제 2성전 시대의 여러 문헌들이 보여주고 있는 획일적인 종교패턴을 찾는데 치중한 나머지 이들 문헌들 배후에 있는 다양한 공동체의 실제적인 삶의 자리에 대한 고려를 놓치고 있다. 사실상 보이는 텍스트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고, 그 텍스트를 만들어내고 듣게 되는 공동체의 산물이다. 그런데 텍스트에 나타난 언약적 율법주의는 공동체가 실제로 믿고 행동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공동체의 삶의 현장에서 나타나고 있는 율법주의적 경향을 반대하거나 예방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말하자면 문헌이 공동체가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답변이나 이상(理想)을 말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문헌의 가르침을 받는 공동체의 현실은 이상과는 매우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1세기의 유대교가 샌더스의 제안과는 달리 상당한 율법주의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을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넷째, 샌더스는 1세기의 유대교를 재구성하면서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에스라와 느혜미야의 성전(BC 517)과 토라 중심의 민족의 건설에서 시작하였다는 것과, 주전 5세기부터 주후 1세기까지 바벨론, 페르사, 헬라, 로마 등의 강대국들이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동안 할례, 율법, 성전 등을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신앙을 유지하는 표지로 삼고, 그것을 이스라엘민족의 회복과 메시아왕국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삼는 강한 종말론이 대두되었다는 것과, 이 종말론이 당대 유대인들의 종교의식과 삶의 패턴을 지배하였다는 사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있다. 사실 샌더스가 주장한 언약적 율법주의도 강한 종말론적 배경에서 그 안에 일종의 율법주의가 자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율법준수가 본래 언약백성에 들어가는 수단이 아닌 이미 주어진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는 수단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신분유지의 수단인 율법준수가 종말론적인 문맥 안에서는 오는 세대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요구사항이 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율법이 오는 세대의 영생과 의에 도달하는 구원의 수단이 되어 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언약적 율법주의가 갖고 있는 구원관의 패턴이, 샌더스가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언약백성의 신분가입(“Getting in”)과 그 신분의 유지(“Staying in”)의 문제라고 한다면, 이것은 종말론적인 문맥 안에서는 “선행이 구원의 유지를 위해서 필요불가결한 조건이다”는 말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결과적으로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역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 편에서의 협력을 불가피하게 요구하는 일종의 신인협력의 율법주의가 된다. 샌더스 이후 주전 2세기로부터 주후 2세기까지의 유대문헌(특별히 제 4에스라, 제 에녹서, 희년서, 제 2 바룩서 등)에 대한 새로운 검토를 한 최근의 몇몇 학자들이 1세기의 유대교 안에 “언약적 율법주의”뿐만 아니라, 약속된 종말론적인 의와 구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들을 지켜야한다는 “율법주의”도 상존하고 있었다고 주장은 타당성이 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샌더스의 제한된 유대교 재구성에 근거하여 우리는 쉽게 바울의 본문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려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3. “새 관점”의 아젠더 2, 던의 언약백성의 표지로서 “율법”/“율법의 행위”

 

바울은 로마서(역시 갈라디아서)의 여러 곳에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믿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혹은 “그리스도”와 “성령” 등과 대조시키면서,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의”의 수단이 아니며,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만이 의를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롬 3:20-4:6; 9:30-10:4; 빌 3:6-9; 갈 2:16-3:25). 옛 관점은 이와 같은 바울의 주장을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 "자기-의"를 추구하는 바울 당대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반대하는 주장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새 관점”은 다르게 해석한다.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의 율법/율법의 행위 및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바울 당대 유대교가 율법주의나, 율법/율법의 행위가 자기-의나 자기공로나 자랑을 가져오기 때문이 아니다. 바울의 유대교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역사적 판단이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산물이다. 즉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적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온 세상의 구원자이며,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말하자면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결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이 나타났다는 문제의 해결을 발견하고 유대교를 보았기 때문이다.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의 논리는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셨다; 그럼으로 세상은 구원의 필요성에 놓여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율법을 주셨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구원을 위해 주신 분이라면, 율법이 구원을 줄 수 없다는 결론이 뒤따라 나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샌더스에게 있어서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단순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점을 1983년에 출판한 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바울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성취될 수 없었고, 그래서 율법은 의의 수단으로 부적절하다거나,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 있어서 자기-의를 가져온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확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무능력, 자기-의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진술과는 전혀 맞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이 유대교를 비판 할 때 포괄적인 관점에서 그렇게 하는데 두 가지 점에 초점이 주어져 있다. 하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결여이며, 또 하나는 이방인들에 대한 동등성의 결여이다. 이 두 가지 요점이 로마서 9:30-10:13에 나타나 있으며, 이 두 가지는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실과 관련되어 있다.

 

던은 율법/율법의 행위에 대한 샌더스의 기독론적, 구원-선교론적 설명을 부적절한 것으로 보고, 그 대신 사회-선교론적 설명을 제시한다. 던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대칭관계에 둘 때, 유대교나 율법자체를 비판한 것이 아니다. 다만 유대민족의 정체성(Identity)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 할례, 유대 음식법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방해하고, 구원은 유대인들에만 있다는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사상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 점을 비판한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16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않는다고 말할 때도, 바울 당대 유대인들이 율법을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에 있었던 두터운 율법의 장벽을 무너졌으며, 모든 민족에게 동등한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이 유대인들의 자기 정체성과 자랑의 보루가 되어, 이방인과 유대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반대한 것이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샌더스가 재구성한 바울의 율법관에 대한 중요한 해석학적 험은 ‘율법의 행위’를 언급하고 있는 작은 구절의 의미를 간과한 점이다. 그는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관하여 부정적인 언급을 한다고 해서 그가 일반적으로 선행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아니며, 더구나 선행을 공로를 쌓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바르게 지적한다. 그러나 샌더스는 ‘율법의 행위’를 일반적으로 ‘율법을 행하는 것’과 동일시함으로써 마치 바울이 ‘율법의 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언급을 통해 율법 그 자체에 대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결국 유대교 자체와 단절하였다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도록 하였다.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잘못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교가 그 자체 이들 특수한 행위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여 결국 할례, 음식법, 안식일 규정들의 준수를 언약과 율법에 대한 충성도의 시금석이 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울이 율법의 행위와 관련하여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특수한 행위들이다. 그가 할례, 음식법, 안식일 규정들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은 이들이 바로 너무 협소한 민족적 인종적 언약개념의 표현이 되었으며, 이들이 아브라함의 믿음이 아닌 이스라엘의 자랑의 표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라이트도 던이 제기한 율법 및 율법의 행위에 대한 사회학적인 해석에 근본적으로 의견을 같이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 및 율법의 행위를 지키려는 것은 구원을 위한 공로를 쌓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참된 언약백성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즉 “행위-의”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적 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2:16, 로마서 2:17-29; 9:30-10:13 등에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자세를 비판한 것도 그들이 율법을 구원에 도달하는 사닥다리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참된 언약백성의 신분을 보증하는 특권의 수단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바울이 사람이 ‘율법의 행위들’로 의롭게 될 수 없다고 말할 때 ‘율법의 행위들’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그 말이 사용되고 있는 문맥(갈 2:11-15)에서 볼 때 그들은 갈라디아서 2:14에서 언급되고 있는 ‘유대인처럼 사는 것’, 곧 2:15이 말하는 ‘이방 죄인들’로부터의 분리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다른 말로 다시 말한다면, 그것은 종교개혁전통이 혐오했던 도덕적 ‘선행들’이 아니다. 그들은 유대인을 이방인으로부터 구분하는 것들이다. 특별히 이 구절이 사용되고 있는 문맥에서 볼 때 (우리는 갈라디아서 2:16을 2:11-15의 문맥을 떠나 다른 문맥에서 볼 권리가 없다), ‘율법의 행위들’은 특별히 ‘유대인이 이방인과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이 이와 같은 ‘율법의 행위들’을 통해 무엇을 얻는다하더라도 그것은 도덕적 공로의 보물이 아니고, 인류의 다른 나머지 사람들과는 분리되는, 하나님의 백성에 확실히 소속되었음을 말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종종 의의 수단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대립되고 있는 “율법의 행위”는, 던이나 라이트의 주장처럼 단순히 언약백성인 유대인의 정체성의 표지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율법의 행위”를 모세의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규정들과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우선 바울이 “율법의 행위”와 “율법”을 상호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 3:19-21의 문맥에서 율법은 의와 구원을 가져오기보다는 온 세상을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고,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 다음, 3:28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동일시하고 있다. 동일한 용법을 갈라디아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16에서 “율법의 행위”가 의의 수단이 아님을 강조한 다음 2:21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이라고 하면서 사실상 “율법의 행위”와 “율법”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리고 3:2-10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을 서로 대조시키다가 3:11-25에서는 율법과 믿음을 대조시킨다. 그렇게 함으로써 율법의 행위와 율법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율법의 행위와 율법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쿰란문헌에서도 나타난다. 사해문서 4QFlor 1:7에 언급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나 4QMMT 3:29에 언급되어 있는 “율법의 어떤 행위들”은 단순히 언약백성의 표지를 가리키기보다도 오히려 모세의 율법에 요구되어진 일반적인 어떤 행위를 지칭하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유대인들에게만 한정하여 사용하지 않고, 유대인은 물론 이방인 모두를 포함하는 일반 사람 혹은 모든 육체와 관련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롬 3:20,28; 갈 2:16; 3:23-24)과, 로마서 3:28의 “율법의 행위”를 4:2-6에서는 “일” 혹은 “행함”으로 표현하여 유대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다 해당시키고 있는 사실과, 그리고 갈라디아서 3:10에서 “율법의 행위”를 설명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의 총체적인 범죄를 말하고 있는 신명기 27의 본문을 인용하여 일반화시키고 있는 점도 바울이 사용하는 율법, 율법의 행위를 유대인의 민족적 특성, 혹은 이방인들로부터 자신들을 구분하는 정체성의 표현으로만 제한시킬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볼 때,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율법/율법의 행위가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고 부정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근본 이유는, 단순히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자이라는 배타적인 기독론의 표현이나, 할례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그의 이방선교의 합법성의 표현이나,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언약적 특권의식이나 혹은 이방인들을 유대인화려는 시도에 대한 반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근본적으로 바울은 다메섹사건을 통하여, 그가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있었을 때 의식하지 못했던 죄, 율법 및 율법의 행위, 인간의 무능력, 그리고 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다메섹도상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율법의 저주를 친히 담당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갈 3:13), 우리의 의를 위하여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롬 4:25)와의 만남을 통하여, 비로소 죄와 죽음의 세력이 얼마나 크다는 것과, 율법 및 율법의 행위들이 아무리 선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의와 구원으로 인도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율법 및 율법의 행위들이 율법의 저주문제를 해결하고 인간을 죄의 세력에서 구원하여 의의 세력으로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라는 저주의 죽음을 당할 리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다메섹도상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통하여 율법 및 율법의 행위들이 죄의 포로가 되어 있는 인간의 육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과,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의 모양으로 보내어 율법의 요구를 친히 담당하도록 하셨다(롬 8:3-4; 갈 3:13)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율법 및 율법의 행위가 선하고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결코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점은 그가 빌립보서 3:9에서 자신이 바리세파 유대인으로 있을 때 추구하였던 의를 “율법으로부터 오는 나의 의”(ejmh;n dikaiosuvnhn th;n ejknovmou)로, 그리고 예수를 만난 이후 가졌던 의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의”(th;n dia; pivstew" cristou', th;n ejk qeou' dikaiosuvnhn)로 서로 날카롭게 구분하고, 전자가 아무리 율법으로부터 험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 때문에 배설물처럼 폐기처분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사실과, 그리고 로마서 9:30-10:3에서 이방인들이 얻게 된 의를 “믿음을 통한 의”(dikaiosuvnhn th;n ejk pivstew")로, 이스라엘이 율법 혹은 행위를 통하여 열심히 추구하였지만 하나님의 의가 아닌 오직 “자신의 의”(th;n ijdivan dikaiosuvnhn)만 추구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빌립보서의 바울의 경우 이미 율법의 의에서 하나님의 의에로 전환이 일어났지만, 로마서의 이스라엘의 경우 율법 및 행위를 통한 자기의 의 추구 때문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믿음에 의한 의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율법에 의한 자기의 의를 추구하고 있으니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문제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10-11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될 수 없고, 오히려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사실에서 오는 저주 아래 있으며, 의는 율법 및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부터 온다고 선언한다. 여기서도 바울은 율법 및 율법의 행위를 유대인들의 민족적 배타성 혹은 표지라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말하기보다도 하나님 앞에서 의와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구원론적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바울이 볼 때,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에 의와 구원의 기능과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율법 그 자체의 목적과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포함하여 전 인류를 위해 세우신 유일의 의와 구원의 기능과 역할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의의 사건을 상대화시키는 것이다(갈 2:21; 3:21). 바울이 율법을 통하여 율법을 비판하고 있는 이유도, 그리고 성령 안에서 새로운 언약백성의 삶을 통해 율법의 성취를 말하고 있는 것도 율법과 그리스도 및 성령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이 아닌 그리스도와 성령만이,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은총만이, 인간을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하시고 거룩하게 하기 때문이다.

 

4. “새 관점”의 아젠더 3, 라이트의 “이신칭의” 재해석

루터와 캘빈 등 종교개혁자들은 “이신칭의”를 바울복음의 중심으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주석서론에서 “만일 (이신)칭의 교리가 상실되면, 모든 참된 기독교교리가 상실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개신교에서는 이신칭의를 바울 복음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해왔다. 그런데 새 관점 주창자들은 종교개혁자들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잘못된 유대교이해에 근거한 것으로 간주하고, 새로운 유대교 이해의 문맥에 근거하여 이신칭의를 새롭게 해석하려고 한다. 라이트는 바울의 이신칭의 구원론의 중요한 요소인 전가(imputation)의 가르침은 성경적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칭의를 현재적인 칭의와 최종적인 심판에서 주어지는 칭의로 나누고, 전자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해 결정되어지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신자의 전 삶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제 칭의교리와 관련하여 새 관점이 제기한 몇 가지 문제를 살펴보자.

 

첫째, 새 관점은 이신칭의가 바울복음의 본질적 요소임을 반대한다. 새 관점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는 바울의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바울복음의 핵심이 아닌 부산물이라고 주장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이미 슈바이처(A. Schweitzer)와 스탕달(K. Stendhal)에 의해 제기된 것이다. 슈바이처는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에서 “이신칭의”의 교리가 실제로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니고, 다만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선교현장에서 만든 일종의 “논쟁교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본다. 스탕달은 1963년 그의 논문,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에서 사도 바울의 주된 질문은, 어거스틴(St. Augustine)과 루터가 제기한 개인의 반성적 양심에서 나오는 실존적 질문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아니었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한 교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공동체적이며, 사회론적이며, 선교-역사적 질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슈바이처가 그랬던 것처럼, 스탕달도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본 “이신칭의” 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 것보다, 오히려 바울의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위해 만들어진 2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샌더스에 따르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중심주제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 말하자면 샌더스에게 있어서 “칭의”는 “이전 용어”(transfer terminology)이며, 의롭게 된다는 것은 언약백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과 “율법”의 논쟁은 무엇이 구원의 조건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 언약백성에 들어가는 요구사항인가였다. 그가 율법에 대하여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있다는 것보다, 그것이 그리스도가 무너뜨린 유대인과 이방인들 사이의 장벽을 다시 세우는 것, 곧 이방인들이 언약백성에 들어가는 걸림돌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샌더스는 이신칭의를 사회적, 선교적 문맥에서 이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신칭의를 바울 복음의 핵심이 아닌 부산물로 간주한다.

 

던도 이점에서 기본적으로 샌더스와 같은 입장에 섰다. 그는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발전된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의 선교문맥에서 가지고 있었던 본래의 사회적인 혹은 수평적인 의미를 등한시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이신칭의”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이라기보다, 오히려 바울의 이방인 선교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 스탕달을 옹호한다. 동시에 그 자신은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을 반대하기보다 부족한 점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항변한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요점은 하나님의 의에 대한 성경적 교리에 다른 차원이 있다는 것, 바울의 이신칭의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서 간과해 왔거나 등한시해 온 부분이 있다는 것, 이러한 양상을 재발견하는 것과 그들을 오늘의 변하는 상황에서 새롭게 재조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나는 결단코 칭의 교리를 배척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이 가진 더 풍성한 의미를 들어내고자 한다.”

 

라이트도 이신칭의의 교리가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랑을 비판하기 위한 논쟁교리라는 스탕달과 샌더스의 입장에 동조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이신칭의 교리는 근본적으로 죄인인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세력은 물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구원론적 주제가 아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언약적이며, 교회론적이며, 그리고 에큐메니칼 주제이다. 말하자면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당신이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는가를 말하는 개인의 구원교리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당신이 언약백성인가를 말해주는 교회론이다.” 라이트는 의는 본래 하나님께 속한 것이며, 칭의는 하나님께서 법정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임을 선언하는 것이지 인간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재판관이 자신의 의를 피고나 원고에게 전과하거나 나누거나 불어넣거나 건네주거나 이전한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는 법정을 넘어 넘겨줄 수 있는 대상이나 실체나 가스가 아니다.” 사실 라이트에게 있어서 바울의 복음은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에 관한 메시지가 아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며, 주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며, 칭의는 복음을 듣고 응답한 자에게 그가 하나님의 백성에 속하여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는 바울 복음의 중심이 아니며, 복음의 외연 혹은 복음의 적용이다.

 

이신칭의의 메시지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로 나타나고 있으며, 그런 점에서 바울의 이신칭의의 메시지가 바울 자신과 그의 독자들의 특수한 역사적 정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신칭의 교리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만 한정되어 있는 특수한 메시지이거나, 특수한 역사적 정황의 산물인 것처럼 속단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신칭의의 가르침과 그의 복음을 서로 분리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로마서 1:1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사도로 부름을 받았음을 천명한 다음, 주제 구절로 알려지는 16절에서 자신이 전파하는 복음은 믿는 모든 자들,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 17절에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능력이 되는 이유는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 다음 1:18-3:20에서 모든 불경건과 불의에 빠진 이방인뿐만 아니라(1:18-32), 율법과 할례를 가지고 있으며, 아브라함의 언약백성이라 자처하는 유대인들에게도 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가 필요한가를 설명한다(2:1-3:9). 바울의 결론(3:19-20)은 이방인뿐만 아니라 유대인도 하나님의 법에 불순종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하는 동일한 죄인이라는 것과, 그 어떤 인간의 노력도, 심지어 할례와 율법마저도 인간이 처한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다음 바울은 3:21-31에서 1:16-17에서 언급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 이 의에 도달하는 방법, 이 의의 근거, 그리고 이 의의 결과에 관하여 말한다. 곧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이며, 의에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그의 속죄 및 화목을 위한 희생적 죽음이며, 이 의의 결과는 죄용서, 의롭게 됨,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하게 하나님의 자녀 됨을 말한다. 이처럼 바울은 그의 구원하는 복음과 이신칭의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는다. 더구나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나에 의해 전파되는 그 복음은 사람을 따라 온 것도 아니고, 사람으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 의해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주어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러한 선언은 바울의 복음은 그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그때 이미 받은 것이요(갈 1:16), 그리고 그때부터 이신칭의는 이미 그가 전파하는 복음의 중심내용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다메섹 직후부터 다메섹과 아라비아와 그리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서 10여년 동안 개인 선교활동을 하였던 것이다(갈 1:17-21). 사실상 사도행전 2,3장에 나타나 있는 베드로의 설교가 항상 기독론과 구원론의 메시지를 함께 가지고 있는 점(행 2:14-40; 3:13-21),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다메섹사건이 항상 이방인 선교와 연결되어 있는 점(행 9:15; 22:21; 26:17-18), 바울 자신도 그의 다메섹사건에서의 소명을 이방인 선교와 연결시키고 있는 점(갈 1:16), 그리고 빌립보서 3장에서 그의 다메섹사건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을 율법을 통한 의의 추구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하나님의 의로 표현하고 있는 등등의 사실에 비추어 볼 때, 10여 동안의 바울의 초기 이방인선교가 기독론과 함께 이신칭의의 구원론의 메시지 없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제임스 던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이 갈라디아서 2:11-21에 있는 안디옥 사건(AD 50년경)을 통해서 비로소 구체적으로 들어났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도행전 13장에 따르면 바울은 안디옥사건 이전인 그의 제 1차 선교 여행시(AD 46-48)에 이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13:38-39에 있는 “그러므로 형제들아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을 힘입어 죄 사함을 너희에게 전하는 이것이며, 또 모세의 율법으로 너희가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모든 일에도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는 말씀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부터 이미 이신칭의의 복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사실 갈라디아서 2:16의 서두에 있는 과거분사절인 “우리(베드로와 바울)가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부터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알았음으로”(eijdovte" o ,ti ouj dikaiou'tai a[nqrwpo" ejx e[rgwn novmou, eja;n mh; dia; pivstew" jIhsou' cristou')는 안디옥 사건 이전에 이미 베드로가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알고 그것에 동의하였음을 보여준다(2:14 참조). 안디옥 사건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갈등은 복음에 대한 다른 해석에 연유한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베드로와 바울이 서로 합의하였던 그 복음의 진리(2:7-9, 16)를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에서 온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사실에 연유하였다. 그 밖에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문제를 주된 이슈로 삼고 있지 않는 고린도전후서, 빌립보서 및 에베소서에서도(고후 5:11-21; 빌 3:2-11; 엡 2:8-9) 칭의의 복음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는 점도 바울의 복음과 이신칭의는 서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 교리는 그의 선교현장에서 유대주의자들과의 갈등에서 자신의 이방인 신자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지위의 합법성을 마련하기 위해서, 혹은 유대주의자들을 대적하기 위해서 고안(考案)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오히려 율법/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 교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부터 그가 메시아이며,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이며, 그 예수로부터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전 인류를 구원에로 인도할 복음의 계시를 받게 됨으로써 갖게 된 것임을 보여준다. 사실상 바울은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모든 이방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와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는 처음부터 이 복음을 가지고 이방선교에 매진하게 되었다(참조 행 13:39). 그 결과 이신칭의 교리가 바울 복음의 핵심으로 잡게 되었음은 물론, 유대인을 포함하여 이방인들에게 대한 그의 복음전파의 근거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와 바울의 이방선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선교를 낳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둘째, 새 관점은 이신칭의가 구원론의 주제임을 반대한다. 샌더스, 던, 라이트 등 새 관점 주창자들은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이 구원론적 주제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말하는 교회론적 혹은 선교론적 주제로 본다. 샌더스는 의가 이전 용어라는 근거에서, 던은 믿음 및 의와 대치관계에 있는 율법 및 율법의 행위가 의와 구원의 수단이 아닌 유대인들의 신분적 표지라는 점에 근거하여, 그리고 라이트는 의가 하나님 편에서는 이스라엘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언약백성의 신분적 표지라는 점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가르침이 구원론적 주제임을 반대하고, 오히려 선교적, 교회론적 주제임을 강조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의 칭의 교리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알려진 로마서 4장과 갈라디아서 3장은 사람이 어떻게 의롭게 되는가를 말하는 구원론의 장이 아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말하는 교회론의 장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로마서 4장 전체의 요점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거나,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브라함을 통해 세상을 자기의 것으로 삼으시는 그 약속에 관한 것이다.” 로마서 3:21-4:25의 전체적인 가르침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God's covenant faithfulness), “곧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 아브라함을 통한 전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이 메시야이신 예수의 신실한 죽음에 의해 성취되어 아브라함의 믿음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효하게 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언약적 신실성”(covenant faithfulness)인 동시에 “언약적 멤버쉽”(covenant membership)이다.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적 약속이 성취되어 아브라함의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아버지임을 보여주는 것이 4장의 주된 목적이다.

 

새 관점의 주장대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교회론적, 선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가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가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다”(갈 3:28)에서 선언함으로써 이 점을 분명히 한다. 역시 로마서 1:16에서 복음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누구든지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온다고 함으로써, 로마서 3:28 이하에서 할례자든 무 할례자든 사람이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다고 함으로써, 그리고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4장에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모두 아브라함의 같은 자손이라고 함으로써, 이신칭의의 복음이 인종과 신분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고, 한 가족이 되게 하는 교회론적이고 사회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의” 혹은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선교적, 교회론적 의미와 적용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그것이 중심주제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연히 서로 다르다. 더구나 하나님의 의, 이신칭의로부터 구원론적 의미를 배제하는 것은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 혹은 이신칭의의 가르침을 곡해하는 것이다. 로마서의 경우를 살펴보자. 라이트는 로마서 1-11장을 모두 구원론적 관점이 아닌 교회론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그는 자신의 해석의 근거를 로마서에서 핵심적인 용어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의가 구원론적 용어가 아닌 교회론적인 용어, 곧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나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을 말하는 용어라는 사실에 두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 본문 자체를 살펴보면 로마서 본문은 라이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로마서 주제 구절인 1:16-17의 중심주제는 이미 앞에서 잠간 언급한 것처럼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인 의의 복음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의 복음의 주 기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만드는 것보다 언약의 여부와 관계없이 우선적으로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구원은, 이방인과 유대인, 곧 인류 전체의 범죄와 비참을 말하고 있는 1:18-3:20의 문단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일차적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장벽제거를 통한 구원이 아니고, 죄와 죽음과 율법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과 하나 됨은 이 구원의 결과이요, 적용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구원은 일차적으로 인간과 인간의 화해가 아니라, 하나님과 죄인의 화해이다(롬 5:10; 고후 5:18-20).

 

3:21-31의 문단도 1:16-17의 경우처럼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이나 언약백성의 신분 자체를 우선적으로 말하기보다도 오히려 구원론에 관하여, 곧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오직 믿음의 길, 이것을 가능하게 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 그리고 이 의의 결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4장도 예외가 아니다. 라이트는 로마서 4장의 아브라함의 경우를 교회론적 관점인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모델로 보려고 하지만, 진작 본문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게 되었는가, 곧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으며, 따라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진 자는 아브라함처럼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4장에서 아브라함은 우선적으로 교회론의 모델이라기보다도 구원론의 모델로 제시된다. 바울 사도가 4장을 열면서 아브라함을 “우리의 조상”으로 말하고, 11-12절에서 아브라함을 “믿는 모든 자의 조상”으로 말하고, 4장의 결론부분인 23-24절에서, “저(아브라함)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이 믿음을 통해 의롭게 되는 사람, 곧 구원의 모델임을 말하고 있다. 4장의 중심 주제가 교회론적이라기 보다도 구원론적이라는 사실은 5:1이 4장의 전체 내용과 관련된 접속사 “그럼으로”(oun)와 함께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음으로[과거시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Dikaiwqevnte" ou n ejk pivstew", eijrhvnhn e[comen pro;" to;n qeo;n dia; tou' kurivou hJmw'n jIhsou' cristou)라는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5-6장도 마찬가지이다. 5-6장의 중심 내용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교회론이 아니다. 오히려 옛 인류의 대변자 아담과 새 인류의 대변자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 아담으로부터 오는 불순종, 죄, 죽음, 정죄,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순종, 의, 생명, 은혜, 영생의 대조를 통한 구원론이 중심 내용이다. 말하자면 5-6장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말하기보다도 오히려 옛 그리스도를 통한 전 인류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말하고 있다. 이미 살펴본 대로 5장이 구원론적인 의미를 지닌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었다”(5:1)으로 시작하여, 6장이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2-23)의 구원론적인 말씀으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점을 뒷받침해준다. 7-8장도 교회론적 이슈보다도 오히려 구원론 이슈를 우선적으로 언급한다. 왜냐하면 7장의 죄와 율법과 사망과 이들 세력 아래 있는 무능력한 나와 8장의 의와 생명과 성령의 세력 아래 있는 영광스러운 나가 서로 대조적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7-8장의 우선적인 주제는 구원론이지 새 관점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교회론이 아니다.

 

라이트는 이스라엘문제를 다루는 9-11장이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 곧 교회론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9-11장도 교회론보다 구원론을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0:1이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9-11장을 통한 바울의 관심사는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구원문제이다. 이스라엘의 문제는 이방인에 대한 그들의 배타성에 있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하신 하나님의 의, 곧 믿음에 의한 의를 추구하기보다도 율법을 통한 행위의 의를 추구하는데 있었다(9:30-10:3). 10:5-13에서 거듭 믿음을 통한 의와 구원을 말하고 있는 점과, 11:25-32에서 시온에서 오는 구원자를 통한 온 이스라엘의 구원문제를 말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처럼 9-11장도 교회론을 말하기보다도 오히려 구원론을 우선적으로 말하고 있다. 교회론은 이신칭의 구원론의 적용이요, 그 결과이다. 그럼으로 로마서 1-11장을 교회론적으로 해석하는 라이트를 위시한 새 관점의 시도가 성경 본문 자체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따라서 바울의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교회론적, 선교론적 주제라는 전제 아래 이신칭의의 구원론적 의미를 부인하는 것은 이신칭의의 본질적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새 관점은 전가(imputation)의 교리를 반대한다. 종교개혁자들은 전가(imputation)의 교리를 바울의 이신칭의의 핵심적인 사항으로 보았다. 루터는 로마서 4장을 주석하면서 나의 죄가 그리스도의 죄로 전가되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의 의로 전가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그리스도) 그의 의를 나의 의로, 나의 죄를 그의 죄로 간주(전가)하였다. 만일 그가 나의 죄를 그의 죄로 돌렸다고 한다면, 나는 죄를 가지지 않고 자유롭게 된다. 만일 그가 그의 의를 나의 의로 돌리면 나는 그가 가진 똑같은 의로서 의로운 자가 된다. 나의 죄는 그의 의를 잠식시킬 수 없다. 오히려 나의 죄는 측량할 수 없는 그의 의의 깊이에 삼켜진다. 그는 실로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캘빈 역시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죄인이며, 자신의 노력으로는 결코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에, 의와 구원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의를 필요하다고 본다. 캘빈에 따르면 칭의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죄인)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함으로 그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를 의인으로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법적 행위다.

 

사람이 믿음에 의해 의롭게 된다는 것은 행위의 의를 배제하고,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이요, 하나님의 면전에서 죄인으로서가 아닌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칭의를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의 받으심, 곧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의로운 사람으로 영접하시는 것으로 설명하려고 한다. 이 칭의는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imputation)로 이루어진다.

 

캘빈은 물론 이 전가의 의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며, 우리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이 의에 참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에게 있어서 전가의 의는 우리의 죄에 대한 사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온전하게 죄 값을 지불하셨다는 것과, 우리의 의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온전하게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전가는 우리의 죄와 죄책이 그리스도에게 전가되는 것과 꼭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속죄와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죄와 의의 전가는 라이트가 추론하는 것처럼 죄와 의의 주입이 아니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 주입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에게 돌려지는 것처럼, 믿는 자에게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가 실제로는 여전히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선언하는 법정적인(forensic) 것을 가리킨다(롬 4:4-6). 이를 가리켜 성경은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로(롬 5:17), 그리스도를 옷 입는 것(롬 13:14)으로 표현하지만, 전가는 어떤 경우도 마치 주유소에서 기름을 자동차 기름 탱크에 넣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의 몸속에 집어넣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려 우리의 의로 삼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의로운 자로 선언하시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현재도, 미래에도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불리게 되는 것은, 어떤 경우에서든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 안에 주입이 되기 때문이거나, 우리가 이룬 선행, 비록 그것이 근본적으로 내 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이루신 성령의 사역이라 할지라도, 때문이 아니다. 전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이루신 그리스도의 완전하고 충만한 의 때문이다.

 

라이트는 전가의 의가 비성경적인 것이라 단정하지만,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분명하게 전가의 의를 말하고 있다. 로마서 4:3에서 바울은 창세기 15:6을 인용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에게 로 간주(전가)하셨다”( jEpivsteusen de; jAbraa;m tw'/ qew'/, kai; ejlogivsqh aujtw'/ eij" dikaiosuvnhn..)고 말한다. 그리고 바울은 이 구절에서 핵심적인 단어로 나타나고 있는 “믿음”, “하나님”, “간주(전가)하다”, “의”가 함께 결합된 유사한 문장을 4장에서 적어도 5번(4:5,6,9,11,22)나 반복하여 강조한다. 여기서 “여겨졌다”, “간주되었다” 혹은 “전가되었다”로 번역될 수 있는 동사 ejlogivsqh는 일종의 신적 수동태로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말이다. 즉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믿은 약속에 근거하여 그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셨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믿는 약속에 근거해서 그 약속에 내표되어 있는 의를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아브라함에게 전가시켜 아브라함을 의로운 자로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성취한 의를 우리에게 돌려 우리를 의로운 자로 선언하신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전가의 내용이 아브라함이 믿은 그 약속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경우에는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믿음은 아브라함의 경우이든 우리의 경우이든 우리가 믿는 대상이 가진 의를 우리의 것이 되게 하는 수단일 뿐, 의의 근거나 의를 의가 되게 하는 주체가 아니다. 의의 근거는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이고, 의를 의가 되게 하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통하여 믿음의 대상을 우리의 것으로 돌리신다. 이것이 전가의 의미이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5:21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고린도후서 5:21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to;n ga;r mh; gnovnta aJmartivan uJpe;r hJmw'n aJmartivan ejpoivhsen, i|na hJmei'" ginwvmeqa dikaiosuvnh qeou' ejn aujtw)고 말한다. 캘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이 구절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속죄 제물이 되심으로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게 됨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본문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고린도후서 5:21을 로마서 5:19에 언급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을 통해 많은 사람(우리)이 의롭게 되었다는 사실과, 로마서 8:3-4에 언급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죄 있는 육신으로 오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의 의를 이루셨다는 사실과 관련시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의 중재”, 곧 “그리스도의 의가 전가에 의해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인정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면,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죄인이 된 것과 같은 방식에서 확실히 가능하다. 그는 우리의 자리를 대신해서 범죄자가 됨으로써 죄인으로 취급을 받으셨다. 자기 자신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잘못 때문인 것이다. 그가 모든 잘못과 무관하며 깨끗하고 형벌을 대신 받으심으로 우리가 그의 안에서 이제 의롭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공로로 하나님의 공의를 충족시키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믿음으로 덧입는 그리스도의 의와 연관되어 심판을 받는다. 그럼으로 그의 의가 우리의 것이 된다.

 

하지만 라이트는 고린도후서 5:21을 전혀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이 구절에 대한 캘빈과 그의 후계자들의 해석을 거부한다. 그는 5:21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되는 의를 뜻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는 5:21에 나오는 “하나님의 의”가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그의 “언약적 신실성”을 뜻하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5:21의 본문은 바울의 새 언약의 사도직을 옹호하는 2:14-6:13의 큰 구조 안에 있다는 점을 들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었다”는 것은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증거하는 대사가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한다. 물론 우리가 고린도전서 2:14-6:13이 메크로 구조면에서 바울자신의 새 언약의 일꾼 됨을 변증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5:11-21의 마이크로 구조 안에서 5:21이 가지는 특수한 전가의 의 교훈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사도 바울이 14-15절을 통해 한 사람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기 때문에 이제 모든 사람은 마땅히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점, 그리고 19절에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화목케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고 말하고 있는 점을 감안해 볼 때, 21절이 전가의 가르침, 곧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에게 전가하시고,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함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다. 더구나 고린도후서 5:12-21의 주요 내용이 암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는 로마서 5:12-19에서 바울이 너무나 명백하게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인한 죄와 죽음이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전가되었으며, 이와 대조적으로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인한 의와 생명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되었음을 말하고 있다고 하는 점도 고린도후서 5:21이 전가의 교훈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넷째, 새 관점은 “믿음”(pivsti")을 믿는 대상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 이해하기보다도 대상에 대한 신실성의 표현(선행)으로 이해한다. 라이트는 로마서 4장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믿음”(pivstew" jAbraavm)을 아브라함의 신실성으로 이해하고, 그리고 로마서 3:22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믿음”(Pivsti" Cristou')도 그리스도 자신의 신실성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전자의 문제를 살펴보고, 그 다음 후자의 문제를 살펴보자. 로마서 4장에서 바울이 아브라함의 pivsti"을 말할 때 그것이 유대교문헌의 아브라함 해석처럼 아브라함의 순종을 동반하는 그의 신실성을 뜻하는가, 아니면 그가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태도를 뜻하는가? 바울은 로마서 4:1에서 먼저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 질문은 그 앞 문단인 3:27-31에서 주장된 내용, 곧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으로 의롭게 되기 때문에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입증될 수 있다는 답변을 이끌어내려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그런 다음 2절에서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하심을 얻을 만큼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행위가 없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그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행위가 아무리 좋고 많았다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결코 그것이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는 근거가 아니었고, 그 이후에도 그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는 근거가 되지도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운 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바울은 3절에서 창세기 15:6을 인용,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것을 그에게 로 간주하셨다”고 말한다. 여기서 부각되는 결정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믿는 것”이 “의”의 근거”로 사용되고 있는가, 아니면 “의”를 얻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는가? 여기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의(義)의 근거로 사용되었다고 본다면 그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그의 신실한 순종으로 보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럴 경우 이것은 당장 그 앞에 있는 2절의 내용은 물론 3절 뒤에 나오는 내용과 배치가 된다. 왜냐하면 2절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고, 그리고 4절 이하에서 바울은 “일(e[rgwn)과 “믿음”(pivsti")을 철저하게 구분하여, 아브라함의 경우 일이 아닌 그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5절에서 바울은 “일하는 자”와 “믿는 자”을 분리시키고, 하나님은 “일”과 분리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로마서 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의 순종을 포함하는 신실성을 뜻하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과 그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리키고 있다.

 

다음으로 로마서 3:22의 “그리스도의 믿음”의 경우를 살펴보자. 과연 바울은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밀하고 있는가? 3:22에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pivstew" Cristou)구문 해석은 이미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왔던 것이다. 쟁점은 목적속격 구문인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주격속격구문인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이다. 목적속격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 곧 구원론을 강조하고 있고, 반면에 주격속격 번역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 행위인 기독론을 강조하고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이 하나님의 의를 얻는 수단이 될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방법이 될 것이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 근거하여 3:22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믿음” 구문을 주격속격(기독론)보다 목적속격(구원론)으로 보는 것이 문맥적으로 더 타당하다고 본다.

 

(1) 3:22의 근접한 문맥에서 바울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어디서, 무엇을 통하여, 어떻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느냐가 아니라, 이미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길, 곧 방법이 무엇이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1:18-3:20의 결론적인 구절인 3:19-20에서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로는 유대인이든 이방이든 그 누구도 의에 이를 수 없다는 부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3:21-22에서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3:19-20의 부정적인 율법의 길과 대조되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의에 이를 수 있는 새로운 긍정적인 믿음의 길이어야 한다. 부정적인 길의 주체가 사람인 이상 긍정적인 길의 주체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 점은 3:22의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pivstew" jIhsou' cristou)구문이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전치사 “통하여”(dia)와 함께 시작하고 있다는 점과, 그리고 의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분사절 “믿는 모든 사람들”(ejpi; pavnta" tou;" pisteuvonta")을 통해 확인된다. 뿐만 아니라 22절의 믿음의 길의 필수성을 말하는 23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pavnte" ga;r h|marton)구문을 통해서 재확인된다. 이처럼 문맥의 흐름면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구문에 나오는 믿음은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신실성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의 믿음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더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는 물론 그 밖의 다른 서신에서 “믿는다”라는 동사를 42회 이상 사용하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는 행위를 언급한 적이 없다. 즉 예수가 믿는다는 동사의 주어가 된 선례가 없다. 오히려 동사 “믿는다”의 주어는 항상 사람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나 독자에게 있어서 “믿음”, “믿는 것”은 그리스도보다 그를 믿는 신자와 관련된 것으로, 반면에 그리스도는 신자의 믿음의 대상으로 이해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바울은 로마서와 그 밖의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 행위, 곧 그의 성육, 고난, 십자가의 죽음을 “믿음”이란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오히려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 혹은 순종과 관련하여 “구속”(ajpolutrwvsew"), “화목제물”(iJlasthvrion)이란 말로(24,25), 그리고 5장에서는 “의의 행동”(5:18), “순종”(5:19)으로 표현한다. 사실상 3:22의 pivstew" jIhsou' cristou''를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 곧 그의 순종행위로 본다면 24와 25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한 순종행위를 가리키는 구속과 화목제물은 불필요한 언급이 된다.

 

(2) 3:21-31의 전후 문맥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에 관한 바울의 용법들도 이 문단에 나타나고 있는 믿음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을 지칭하고 있다기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자의 믿음을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지지해준다. 로마서 1:16-17의 경우 “믿음”이란 어휘가 하박국 2:4절의 인용을 포함하여 모두 4번 나타나고 있는데, 어떤 경우에도 이 “믿음”이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을 지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3) 어떤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대칭 어구로 나타나고 있는 pivstew" jIhsou` Cristou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인의 믿음으로 볼 경우, 바울이 1:18-3:20 까지 강조해 왔던 핵심적인 내용, 곧 의인이 하나도 없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사실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노력이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또 다른 율법행위와 같은 인간적 대안(代案)을 만들게 된다고 우려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을 오해한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믿음은 “율법” 및 “율법의 행위”와 동등한 인간의 행위/신실성이 아니다.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인간 자신의 자구적인 노력을 요구하고 있지만, 믿음은 오히려 인간 자신에 대한 포기와 함께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뜻한다. 전자는 인간의 행동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믿음은 인간 자신의 산물이라기보다도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요, 성령의 역사이다.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므로 그것을 주시는 하나님과 분리되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간을 강조하거나 인간 중심의 구원을 뜻하지는 않는다.

 

(4) 로마서의 “믿음”/“의” 병행구절을 살펴보면 많은 경우에 “믿음”은 “의”를 얻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기보다도 오히려 “의”를 얻는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점은 “믿음”이 단독명사로 사용될 경우 수단을 뜻하는 여격으로 사용되고 있으며(3:28), 전치사와 함께 사용될 경우 수단과 방법을 뜻하는 ejk dia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1:17; 3:22,24,26,30x2; 5:1; 9:31,32; 10:5)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믿음”/“의” 구문 안에 나타나는 Pivsti" Cristou' 구문이 “그리스도의 순종”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극히 어렵다.

 

 

(5) 3:22의 pivstew" jIhsou' cristou' 구문에 이어 23절에서 바울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의 필요성, 다시 말하자면 23절에서 1:18-3:20의 전 내용을 요약하여 범죄한 인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성”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점은 바울이 22절에서 믿음과 관련해서 사용한 동일한 pavnte""을 23절에서도 사용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점에서 확인된다.

 

(6) 바울이 “칭의”의 방편으로 인간의 믿음을 강조한다고 해서 그가 믿음을 “칭의”의 근거로 두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장의 아브라함의 믿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칭의”의 근거는 인간이 믿는 행위가 아니고 24절과 25절에서 각각 설명되고 있는 믿음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다. 마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 곧 아브라함의 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만민이 복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의 내용에 근거해서 그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신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믿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에 근거해서 우리를 의로운 자로 간주하시는 것이다. 이처럼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방편일 뿐 의의 근거는 아니다. 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은 그것에 근거해서 믿는 자를 의롭게 하신다.

(7)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그리고 사도행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초대 기독교공동체안의 중요한 이슈는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기독론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며, 구원자라는 기독론에 관하여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 사이에 이의가 없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동등한 하나님의 구원받는 백성이 될 수 있는가, 유대주의자들이 말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인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인가라는 구원론적인 문제는 심각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점은 갈라디아서 2:16, 3-4장, 사도행전 15장, 로마서 4장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사실상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나타나는 Pivsti" Cristou' 구문의 문맥에 보면 구원자, 혹은 구원의 근거가 무엇이냐를 함축하는 “그리스도”와 “율법”의 직접적인 대조보다 의/구원의 방법과 관련하여 주로 “믿음”과 “율법”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3:21-23에 나오는 “믿음”을 의의 근거가 아닌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설득력이 있다. 이어 나오는 3:24-25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을 의의 근거나 의가 제시되는 방도로, 믿음의 내용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도 그 앞부분이 믿음을 의의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근거가 된다. 따라서 22절에 나타나 있는 Pivsti" Cristou' 구문은 주격 속격으로 보는 “그리스도의 믿음이나 그의 신실성”이 아닌 전통적으로 해석되어 온 목적 속격, 곧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새 관점은 최후심판에서의 칭의를 전통적인 믿음(신뢰)의 영역이 아닌 신실성의 표현인 선행의 영역에 둔다. 전통적으로 개신교회는, 로마 캐토릭교회의 현재와 미래의 이중적인 칭의교리와 구분하여, 칭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에 근거한 단회적인 과거사건으로 보았다. 최후 심판의 칭의문제와 관련하여서는 그것을 과거 칭의와 구분되는 제 2의 칭의로 보지 않고, 과거 칭의의 공개적인 확인으로 이해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이 칭의를 주로 과거시제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롬 5:1,9; 8:30)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라이트는 칭의를 단회적인 과거사건으로만 보지 않고, 현재와 미래적 차원을 가진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본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종말론적인 사건에 근거하여 신자가 현재 여기서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선언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이루어질 최종적인 심판에서의 칭의를 배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라이트에 따르면 현재적 칭의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여 믿음으로 주어지지만, 미래에 주어질 최종적인 칭의는 우리 안에서 이루신 성령의 사역, 곧 우리의 전 삶을 근거로 하여 주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라이트는 신자의 삶, 선행을 최종적인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부각시킨다. 라이트뿐만 아니라, 던도 최근의 그의 저서에서 “바울의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의 신학이 최종적인 칭의가 믿음과 그리고 신자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룬 행위의 양면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신자의 행위를 최종적인 칭의의 필수적인 요소로 본다. 칭의의 두 단계를 말하고, 미래의 칭의를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최종심판과 연결시키고 있는 라이트와 던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미 알려진 대로 루터는 종교개혁의 선구자로서 로마 캐토릭교회의 신인협력의 구원관, 이를테면 선(先) 하나님의 은혜의 주입, 후(後) 사랑의 선행을 통한 의의 확립을 비판하기 위하여 율법과 복음을 철저하게 구별하고, 선행을 동반하는 성화와 믿음에 의한 칭의를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그리고 성화를 복음의 영역이 아닌 율법의 영역으로 돌려 어떠한 경우도 성화가 칭의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캘빈은 율법과 복음을 서로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오히려 율법 안에서 복음을, 복음 안에서 율법을 찾았다. 마찬가지로 그가 비록 로마캐토릭의 행위구원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칭의와 성화를 통합시키지는 않았지만, 어느 순간에서도 양자를 서로 분리하지는 않았다. 그는 선행이 없는 믿음이나 선행이 없이 성립되는 칭의를 생각하지 않았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반드시 선행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캘빈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칭의와 성화의 은혜를 동시에 받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이 의롭다 하신 사람을 반드시 동시에 거룩하게 하신다. 칭의와 성화는, 캘빈에게 있어서, 구별해야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분리할 수는 없는 이중의 은혜(a double grace)였다.

 

신자의 칭의와 선행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칭의와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최종 심판이 서로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그래서 라이트나 던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을 따른 우리의 삶에 의와 구원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아니면 신자의 삶은 아무리 그것이 성령에 의한 삶이라 할지라도, 어떤 경우에도 최종적인 칭의와 구원과는 무관하고, 다만 최종적인 심판에서 받게 될 상급과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하는가? 우리는 칭의와 선행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에 부분적으로 동의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구약과 바울 당대의 유대교문헌은 행위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점에서 바울을 위시한 신약의 저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은 아무리 그가 믿음에 의한 의와 구원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 사상을 배제하거나 축소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행위에 따른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의 교훈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예를 들면 로마서 2:6-11에서 그는 하나님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방인)이나 차별 없이 선이든 악이든 그들의 행위에 따라 각각 공평하게 보응하신다는 사실, 곧 선을 행하는 자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영생을, 악과 불의를 행하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와 환난과 곤고로 보응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동일한 교훈을 고린도후서 5:10의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와, 로마서 14:10의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에서 발견할 수 있다(역시 고전 3:13-15; 갈 6:7-9). 이처럼 사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제 2성전 시대의 유대문헌의 경우에서처럼 신자도 행위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라이트나 던처럼 이 본문들을 통해 사도 바울이 신자의 행위가 결국 그의 최종적인 의 및 구원을 결정한다는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볼 경우, 당장 이것은 바울이 다른 곳에서 신자의 의는 현재나 마래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본문들과의 마찰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로마서 1:16-17에서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종말론적인 의와 구원의 축복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어진다고 천명하고 있으며, 그리고 3:21 이하에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한 의를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주제를 자세하게 설명한다. 5:1에서는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이미 받았다”(과거분사)고 말한다.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에 의한 의와 구원은 갈라디아서 2:16, 에베소서 2:8-10 등 여러 곳에서 강조되고 있다. 과연 바울은 로마서 2:6-11을 포함하여 어떤 곳에서는 행위에 따른 심판과 의와 구원을 말하고, 에베소서 2:8-10 등 다른 곳에서는 믿음에 따른 의와 구원의 축복을 말함으로써 스스로 모순을 범하고 있는가? 사실 바울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의 다른 저자도 신자를 포함하여 각 사람의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과 보상이 주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태복음서 25:31-46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인자의 심판 비유”는 불신자와 신자가 다 같이 그들의 행위에 따라 인자의 심판을 받아 영벌과 영생에 처하게 된다(46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를 보라)고 말하고 있다. 계시록 20:11-15도 각 사람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고 있다(역시 마 5:20).

 

우리는 바울서신에서 서로 상충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우선 우리는 이들 본문들이 나타나고 있는 문맥의 차이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바울이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삶(선행)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몇 몇 본문을 살펴보면 이들 본문들이 주로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하는 삶의 문맥에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바울은 빌립보서 2:12에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현재명령형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 명령법으로 주어졌다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완성될 우리의 구원과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 않다면 명령법은 실제 힘을 지니지 못하는 수사학적 기교나 허풍에 불과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21의 본문도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5:19 이하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육(肉)이 가져오는 여러 가지 죄악상을 열거한 다음, 21절 하반 절에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우리가 이 구절을 사실성이 없는 일종의 수사학적 표현으로만 볼 이유는 없다. 이 구절은 분명히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과 분리되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역시 고전 6:9). 이와 같은 바울의 교훈은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나타나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6:21)는 말씀과도 상통한다. 반면에 앞에서 언급한 신자의 행위와 의/구원을 분리시키는 본문들(롬 1:16-17; 3:21-31; 5:1; 엡 2:8-10)은 주로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을 수 있는가를 강조하는 문맥가운데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교훈을 우리는 바울의 율법에 관한 접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신자의 삶을 강조하는 문맥에서는 율법에 대한 긍정적인 접근을, 반면에 이신칭의에 의한 신자의 신분을 강조하는 문맥에서는 부정적인 접근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본문과 문맥의 차이를 외면하고, 양자를 서로 모순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아니면 획일적으로 조화시키려하면, 저자가 본문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강조와 의도를 놓칠 수 있다. 따라서 성경의 해석자는 양자를 모순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조화시키기 전에, 오직 그 본문과 문맥에서 저자의 의도와 강조점을 찾는데 주력하여야 한다. 바울의 서신들은 무시간적인 신학적 논문이 아니고, 특수한 역사적 정황에 처해 있는 교회 공동체에 그들의 정황과 관련되어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서신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울은 의와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문맥에서는 율법의 행위를 포함하여 그 어떤 인간의 공로나 선행을 배제하고 인종과 신분과 성별의 차이나, 한 사람의 자질이나 덕의 차이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요, 인간의 공로가 아닌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강조한다. 인간이 구원 문제에 있어서 결코 자랑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바울은 신자의 삶을 말하는 문맥에서는 순종의 믿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없이는 의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와 구원이 결코 값싼 것이 아니며, 신자가 이 세상에서 마음대로 살아도 구원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경계한다. 어떻게 보면 서로 모순처럼 보이는 이 양자를 인위적으로 쉽게 조화시킬 수도 없고, 조화시켜서도 안 된다는 사실이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위적으로 양자를 조화시키려할 경우 두 가지를 다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무리 후자를 강조한다하더라도 바울의 가르침을 행위구원론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순종,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 사랑의 삶은 근본적으로 우리의 공로를 내세울 수 있는 우리 자신의 사역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아무리 전자를 강조한다고하더라도 바울의 가르침을 값싼 복음으로 간주할 수 없는 것은 복음은 값비싼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에 근거하고 있으며, 이 복음을 통하여 주어진 신자의 새로운 신분은 필연적으로 이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면 롬 12:1-2; 엡 4:20-5:2).

 

따라서 우리는 바울서신에 나타나고 있는 이 양면의 교훈과 그리고 서로 간에 있는 어느 정도의 긴장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라이트나 던처럼 그것을 도식화시켜, 현재의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심판을 거쳐 주어지는 미래의 칭의는 선행에 따라 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도식화시킬 경우 어느 한쪽의 강조점은 불가피하게 약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의 삶을 강조하는 명령법 형태의 교훈, 곧 우리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성령의 사역은 직설법 형태의 교훈, 곧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 성령의 사역은 이미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우리 안에 적용시켜 나갈 뿐이다. 이처럼 양자는 그리스도와 성령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칭의를 라이트나 던처럼 현재와 미래의 두 단계로 분리시킬 수 없다. 오히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가 현재의 칭의가 미래에 주어질 칭의를 부분적으로 앞당긴 것으로 말하기보다도, 오히려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가 미래에 완성된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이다. 장차 오실 주님은 이미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분과 다른 분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의 재림 때 최종적인 심판을 통해 신자에게 주어질 미래의 칭의는 이미 주어진 칭의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일한 그것의 완성이며, 재확인 인 것이다. 현재의 칭의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주어지는 것처럼, 미래의 칭의도 그러하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은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현재와 미래의 칭의도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을 강조한다하도라도, 그것이 믿음에 의한 칭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며, 그 반대로 아무리 믿음에 의한 칭의를 강조한다하더라도 그것이 선행에 따른 최종적인 심판과 구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다.

 

5. 나가는 말

 

우리는 이 논문에서 현금의 신약학계에서 가장 이슈가 되고 있는 새 관점의 정당성 문제를 취급하였다. 우리는 새 관점으로부터 몇 가지 배울 점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자 한다. 하나는 새 관점이 1세기의 유대교에 대한 우리의 이해지평을 넓혀주고 있다는 점이다. 새 관점 이전에 우리는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획일적으로 “율법주의”였다고만 생각하였다. 그러나 새 관점을 통해 우리는, 새 관점의 주창자들이 1세기의 유대교를 획일적인 “언약적 율법주의”로 단정한 것에 관해서는 비판을 가할 수 있지만, 1세기의 유대교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새롭게 알게 되었다. 사실 구약성경의 출애굽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출애굽사건을 통해 구속하시고, 그리고 거룩한 삶을 위해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는 근본적으로 “율법주의”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에 근거하는 은혜의 종교이다. 또 하나는 새 관점이 바울 서신의 콘텍스트와 메시지에 대한 수평적이고 사회학적인 지평을 넓혀 주고 있다는 점이다. 새 관점 이전에 우리는 바울과 초창기 기독교의 주요 관심사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혹은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수직적이고 실존적인 문제로만 생각하였고,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사람이 ‘율법’/‘율법의 행위’/‘행위’를 통해 의롭게/구원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의롭게/구원받게 된다”고 주장할 때, 그는 사실상 유대교의 율법주의적 구원관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만 이해하였다. 그러나 새 관점을 통해 바울과 초기 기독교의 주요 관심사는 “어떤 조건에서 이방인을 하나님의 언약백성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어떻게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수평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는 것과, 바울의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에 대한 반대주장은, 유대교 전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 유대인들의 삶의 원리에 불과한 모세의 율법, 할례, 안식일과 유대교의 절기, 음식법 등을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예수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필수적인 것으로 강요한 일부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반대임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새 관점이 역사적 면이나 해석학적 면에서 적지 않는 문제점도 지니고 있다는 점도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옛 관점의 학자들이 충분한 역사적인 연구나 문헌의 검토 없이 바울당대의 유대교를 획일적으로 “율법주의”로 단정한 것과 같이, 새 관점에서는 1세기의 유대교가 획일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로 단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샌더스가 활용한 자료는 물론 그 밖의 유대교 자료에 대한 최근의 보다 자세한 분석은 1세기의 유대교가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과, 유대교 자료에는 언약적 율법주의는 물론, 율법주의를 지지하는 자료들도 적지 않다는 점을 밝혔다. 1세기 유대교 안에 율법에 관해 상이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 바리세파와 사두개파가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고, 그리고 유대역사가 요셉푸스의 문헌과 20세기에 발굴된 쿰란문헌들은 바리세파와 사두개파는 물론, 열심파와 에센파 등 다양한 종파들이 1세기 유대교 안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새 관점의 주창자들은 1세기 유대교의 다양성을 외면하고 획일적인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단정 아래 바울이 “율법”, “율법의 행위”, 혹은 “자기의 의”와 “행위”를 비판할 때, 유대주의자들의 구원관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폐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방인들을 분리시키고 차별하게 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특권과 정체성의 표지들인 모세의 율법, 할례, 안식일, 절기, 음식법 등과 이들에 근거를 둔 민족적 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는 점이다. 이러한 결론은 성경본문은 물론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는 유대교문헌 자체의 가르침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바울보다 자신들이 1세기의 유대교를 더 잘 알고 있다는 오만하고 외람된 주장이 될 수 있다. 동시에 새 관점은 예수의 죽음을 1차적으로 이방인들을 차별하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정체성과 특권들의 폐지와 관련시킴으로서 예수의 죽음이 가져온 인류(유대인과 이방인의 범죄)의 범죄에 대한 속죄, 죄와 사망의 권세에 대한 심판, 하나님과의 화해, 전 피조세계의 회복 등의 의미를 제한 혹은 약화시키고 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셋째, 새 관점은 바울의 “이신칭의”(以信稱義) 가르침을 지나치게 이방인과 유대인의 동등성을 강조하는 수평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함으로써 어거스틴, 루터, 칼빈 등이 강조한 개인적인 속죄와 구원의 수직적 의미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의와 구원 문제는 개인의 믿음과 죄에 대한 회개와 용서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것은 수평적인 것과 수직적인 것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신다는 이신칭의 복음과 소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방선교에 헌신한 것이지, 이방선교 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신칭의의 복음을 수립한 것은 아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새 관점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왕 되심과 그의 주권의 선언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신 약속, 곧 유대인과 전 인류를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하는 하나님의 복음 및 구원의 계시이다. 이 의(義)는 현재나 미래에 있어서 단순한 법적인 선언에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에게 성령을 통해 은혜로 의와 구원을 가져오고, 신자의 전 삶의 영역을 변화시키는 종말론적이고 통전적인 의를 동반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이신칭의”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종교적, 사회적 장벽의 제거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와 그의 의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하시는 종말론적인 선언인 동시에,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은혜로 받음으로써 하나님의 의와 축복과 교제를 누릴 수 있는 아들이 된 것을 뜻한다. 따라서 우리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획일적으로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이라는 전제 아래서, 바울의 서신들을 새롭게 재해석하려고 하는 새 관점의 시도에 대하여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자 한다. 우리가 1세기의 유대교를 전폭적으로 율법주의로 보고 그러한 관점에서 바울서신을 해석하는 것도 경계하여야 하겠지만, 1세기의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 아래 바울서신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는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바울의 서신을 접근할 때 율법주의든 언약적 율법주의든 어떤 고정적인 전제아래 바울의 본문을 성급하게 해석하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주후 1세기의 비기독교적 유대문헌들이 복음서를 위시하여 바울서신의 연구에 매우 중요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복음서나 바울서신 해석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 바울서신은 어디까지나 먼저 바울 서신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