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종교개혁 이래, 어떤 학파도, 심지어 Bultmann 학파조차도, 새 관점 학파보다 바울 학계에 더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새 관점 학파는 Sanders가 제2성전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한 것에 기초하여 바울의 복음, 특히 그의 칭의론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많은 면에서 바울 복음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석을 사실상 뒤집어 버렸다. 1. 바울의 회심/ 소명, James D. G. Dunn, 그리고 바울에 대한 새 관점 1. Dunn의 해석 Dunn에 따르면 바울이 회심하기 전에는 마카베(마카베1서2장), 비느하스(민25:6-13) 등을 본받아, 헬레니즘의 혼합주의적 타락에 대항하여 유대종교를 흠 없이 유지하고 이방인들의 압력으로부터 이스라엘의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는 일에 몸 바친 “열심당”이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바울은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열심으로부터, 그리고 이러한 열심을 야기시킨 ‘유대교’로부터, “이방인들을 위한” 선교로, “이스라엘의 토라가 규정한 한계들을 수호하려는 열심당적인 결단으로부터...열방에 대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 선교를 수행하는 것으로” 회심하게 된 것이다. Dunn은, 필자처럼 다메섹 사건의 의의를 바울이 기독론과 구원론에 대한 새로운 확신 및 율법에 대한 새로운 통찰들을 얻게 된 것이라는 견지에서도 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되풀이해서 비판해왔다. Dunn은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안디옥에서 일어난 일의 여파로 뒤늦게 발전된 것이라고 보게 되었으며,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된 권리를 변호한 것이라는 견지에서 이해하게 되었다. Dunn에게 있어서, 율법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시키는 역할을 하며, 이신칭의는 이방인들이 왜,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며, 또한 동료 유대인 신자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가를 설명하려는 시도로서 바울 신학에 등장했다. 2. 필자의 논지에 대한 Dunn의 비판 Dunn은 필자가 바울이 다메섹에서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만난 경험에서 그의 형상-기독론과 이신칭의 교리가 직접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을 비판하는데, 필자는 바울의 형상-기독론에서 또한 그의 아담-기독론과 지혜-기독론도 발전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때로 언어를 다소 부주의하게 사용하여 독자들에게 바울이 이 모든 기독론적, 구원론적 교리들을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만난 그 순간 얻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질상 이러한 과정은 다메섹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순간 그 자리에서 완성 될 수는 없었으며, 따라서 시간을 요하는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필자는 여전히 이 과정이 그다지 오래 걸리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훈련된 신학자였다는 사실과 그가 회심한 상황, 다메섹 계시의 본질, 그의 성령 체험, 그리고 그가 이방인 선교로 소명을 받았다는 점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추측은 분명히 가능하다. 바울의 칭의 교리는 Dunn이 주장하듯이 이방인 선교에서 발전된 것이든, 아니면 필자가 주장하듯이 이방인 선교와 함께 시작된 것이든 간에 그의 이방인 선교와 관련되어 있다. 3. 이방인 선교를 위한 사도가 되라는 소명뿐이었는가? 어떻게 Dunn은 자신이 말하는 바울의 아담-기독론과 그의 이방인 선교간의 상호 관계 면에서, 이방인 선교가 “심지어 김세윤이 허용하는 것보다 더 즉각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현현 사건에서 추론되었음”을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는가?(Dunn이 늘 주장하던 것은, 바울이 다메섹 사건에서 선교 소명만 받았고 기독론적 깨달음은 후에 안디옥 논쟁 때 깨달은 것이라고 했는데, 다메섹 사건에서 선교 소명과 함께 기독론적인 계시까지 받았다고 언급하는 것에 대한 김세윤 교수의 공격) 그의 설명은 기껏해야 필자의 제안을 펼쳐놓은 것에 불과하다. Dunn은, 바울의 이방인 선교 소명과 그의 기독론/구원론 양자 모두 다메섹에서의 그리스도 현현 사건에서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선교 소명과 그의 기독론/구원론 사이의 연대기적인 연관성보다는 필자처럼 논리적인 연관성이라는 관점에서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할 때만이 혼란과 자가당착이라는 비난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갈1:11-17) 4. 기독론적 구성요소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기독론적 회심이 다메섹 경험의 중심 의미임을 부인하기 위한 Dunn의 3가지 주장은 첫째 스데반의 핍박의 여파는 주로 헬라파 유대인들에게 미쳤으므로 메시아 예수를 믿던 유대인 신자들은 “아무런 괴롭힘도 받지 않고” 예루살렘에 있었다. 둘째 바울의 서신들에서 메시아 예수에 관한 주장이 대체로 논쟁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셋째 “바울은 자신의 회심에 대한 가장 명백한 회상들에서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믿음이 그같이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다.(-그러나 갈1:11-17에서 언급한다.) -Dunn은 다메섹 사건에서 기독론적/구원론적 복음이 계시된 것은 소흘히 하고 바울이 이방인 선교에로 소명 받은 것만이 그 즉시 일어난 일이라고 보려고 시도하지만 자기모순에 빠지고 있다. 기이하게도 Dunn은 바울의 사고가 기독론적 계시에서 이방인 선교로 진전하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실은 기독론적 계시와 선교명령은 동시에 나타난다.(갈1:16; 2:8) 5. 이방인들만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리스도? 갈3:13에 대한 해석에서 Dunn이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전혀 함구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롬1:16-17)과 큰 차이가 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6. 율법의 문제 a. Dunn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견해를 거부한다. 누가는 실제로 스데반이 율법에 충실했었다고 말하며, 심지어 그가 동료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판했다고 말한다.(행6,7장) -예수님과 스데반과 바울은 할례, 음식, 절기 등에 관한 율법들은 폐하면서도 율법을 성취할 것을 요구하며(롬8:3-4) 유대인들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의식, 곧 자신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유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참으로 지키는 백성들이었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b. 바울이 헬라파 유대인들을 핍박하게 된 데는 율법 문제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힘주어 부인하기 위해 Dunn은, 바울이 오로지 이방인 선교 때문에 그들을 핍박했다는 논증을 편다. -분명 “율법에 열심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사귄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율법을 침해한 것으로 인식된 유대인들도 핍박했다. 필자가 보기에는 바울이 그들을 핍박한 것은 그들이 거짓 메시아 예수를 전파함으로써, 그리고 이방인들을 다루면서 “할례와 언약의 독특한 관행”을 무시함으로써 율법을 파괴하고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훨씬 사리에 맞는다. c. Dunn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할 때 의를 획득하는 수단으로서의 율법에 문제가 있음을 보기 시작했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바울이 롬3:20; 8:3; 갈3:21,24 등에서처럼 율법의 한계를 지적하는 차원을 넘어, 롬5:20; 7:5 고후3:4-18; 갈4:21-31 등에서처럼 율법에 대해(적어도 암시적으로)비판을 퍼붓는 참으로 놀랄 만한 사실을 보면 율법에 대한 부정적 견해는 바울이 회심 시에 율법 문제에 대해 새로운 통찰을 얻었다는 관점에서 설명할 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다. d. Dunn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회심을 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의 계시를 받은 후 그가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반대한다. 그 근거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도들의 회의(갈2:1-10)와(-할례문제), 안디옥 논쟁(갈2:11-14)이(-이방인들과 식사교제 문제) 그토록 늦게 제기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회심 후 17년 지난 시점) -필자가 보기에는 그 회심이 바울로 하여금 할례법에 대해 의식적으로 재평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헬라파 유대인들이 이방인 선교를 하면서 할례를 무시한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헬라파 유대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고 있던 바울이, 할례 문제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서 그들의 선교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바울이 안디옥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식탁 교제에 참여한 것으로 보아, 의식법들 및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식탁 교제라는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보고 신학적으로 해결했다고 추론하는 것이 훨씬 더 사리에 맞다. e.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Dunn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논증, 곧 율법의 행위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후에 발전된 것이라는 그의 논증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 자체”가 “바울에게 율법의 행위와 그리스도의 대조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려는 시도를 반대하는 형태를 취한다. -바울이 그의 다메섹 경험을 말할 때, 종교사적으로 다소 새로운 개념인 “은혜”라는 개념이 거의 폭발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잘 인식된 사실이다.(롬1:5; 12:3; 15:5) 바울이 그의 칭의 교리와 관련해서 은혜와 율법을 대비시키는 것은 그 자신의 다메섹 체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이라면 감히 하지 않았을 만한 율법에 대한 대단히 부정적인 진술도 이것을 뒷받침한다.(갈3:21; 고후3:6,7,9) 7. 바울은 안디옥과 갈라디아 논쟁 이전에는 어떤 복음을 전파했는가? Dunn이 다메섹 사건에 대한 바울의 증거에 나타난 하나님의 기독론적/구원론적 복음의 계시와는 별도로, 하나님이 이방인 선교를 위해 바울을 부르신 것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들은 빼고 이방인들에게만 적절한 것이었다는 인상을 줄 뿐 아니라, 또한 복음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한다. 8. 이방인 선교를 위해서만 개발된 칭의의 교리? Dunn을 비롯한 새 관점 학파는 바울이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이방인 회심자들이 율법의 행위들 없이 하나님 나라 일원이 되는 일을 변호하기 위해 그의 칭의 교리를 발전시켰다고 되풀이해서 주장한다. -로마서 전체에서 바울의 주된 관심사는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었기 때문에 이제 율법의 행위들 없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칭의를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9. 율법의 행위들 율법의 행위들에 대한 Dunn의 해석은 신약 시대의 유대교가 E.P. Sanders가 규정한 “언약적 신율주의”였으며, 선행을 통해 의를 얻는 종교가 아니었다는 공리에서 출발한다. 율법의 행위는 여호와와 맺은 언약에서 그들의 역할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그들의 의를 이루는 요소가 된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따로 성별되었고, 열방과 구별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유대인들이 도덕적 계명을 지키는 일에 전념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데는 실패한다는 사실 역시 분명히 말하고 있다. 즉 행위-의적 요소가 유대인들에게 있었다는 것이다.(롬3:9-18; 롬2:17-24) 10.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간의 대조 믿음과 율법의 행위들이 대조를 이룬다는 해석만이 바울이 칭의 교리에서 통상적으로 “율법의 행위들”을 믿음, 은혜와 대조시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롬3:20-26....) 바울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율법의 행위들과 대조시키는 것은 율법의 행위들이 이스라엘의 언약적 독특성(할례 음식법 등 언약의 표시)보다는 선행을 말한다고 이해할 때에만 이해할 수 있다. 11. 칭의의 법정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 “율법의 행위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의 독특성이라는 제한된 의미로 보는 Dunn과 일부 다른 새 관점주의자들의 해석은, 그들이 바울의 칭의 교리를 주로 하나님의 언약 백성 혹은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의미에서 이해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하지만 바울의 칭의 교리는 또한 법정적 측면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것은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는 것, 혹은 거기에서 건짐을 받는 것을 말한다.(롬8:30-34...) 12. 율법과 율법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의 문제 필자의 생각으로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율법의 행위들”(Dunn이 규정한바 언약적 독특성인 할례, 음식법 등)을 큰 어려움 없이 성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언약적 독특성을 보여주는 율법 분야에서는 율법은 육신에 의해 약해지지도 않았으며, 유대인들 역시 육신에 의해 약해지지 않았다! 바울의 이 모든 논증들은 그가 말하는 “율법의 행위들”을 그저 이스라엘의 언약적 독특성들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율법 전체를 선행으로 준수하는 것을 의미할 때에만 뜻이 통한다.(롬8:3-4) 따라서 바울의 칭의 복음으로부터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느낀 자유는 언약적 독특성으로부터 해방이 아니고 오히려 유대교의 율법과 기능적으로 유사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율법이 속해 있던 “이 세상 초등 학문(4:3,9)으로부터의 자유이다. 그들은 뭔가 재앙이 그들에게 닥칠까봐 ”그 금기들과 한계들을 어기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 종이 되어 있었다. 결론 본 연구는 James Dunn의 명제, 곧 다메섹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사건에서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대한 하나님의 소명만을 인식했으며, 또한 바울이 안디옥 사건(갈2:11-14)의 여파로 이방인 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만 그의 칭의 교리를 발전시켰다는 명제가 지지할 수 없는 것임을 드러냈다. 제2성전 유대교에서 행위-의의 모든 요소를 부인하는 쪽으로 너무 많이 치우쳤던 추가 이제 반대 방향으로 움직여가고 있다. 그것이 마침내 평형 상태를 발견할 때, 우리는 유대교를 순전한 행위-의의 요소를 부인하는 새 관점주의자들도 옳지 않으며, 유대교는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신율주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 참고로 Dunn의 주장의 바탕에 깔려 있는 E. P 샌더스의 입장을 살펴보자 샌더스의 새관점: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언약적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이 언약적 관계를 통해 구원받는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선택함으로 구원받는다고 한다. 율법은 언약관계 안에 머무르는 수단일 뿐이다. 그런데 바울은 유대교를 행위-의적 요소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바울신학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는 유대인들은 언약적 신율주의로 이방인은 이신칭의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
출처: 개혁주의 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gr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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