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자료/바울, 새관점

새 관점주의의 바울 흔들기/김정훈 교수

에반젤(복음) 2021. 11. 14. 18:09
순서
새 관점주의의 바울 흔들기/ 김정훈 교수
김정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1/ 조석민 교수
김정훈 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2/ 이한수 교수
 
 
옛 관점과 새 관점의 충돌-주석적 평가와 제안


권연경 (안양대학교)






들어가며


최근 바울 신학 연구는 소위 “새 관점주의”를 언급하지 않고는 논의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이다. “새 관점주의”가 처음 학계에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30여 년 전 E.P. Sanders가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이라는 책을 내면서부터다. Sanders는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고, 바울사상의 요체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회론적 동등성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Sanders의 “새 관점주의”는 갑자기 한 순간에 태동된 것이 아니다. 최갑종 교수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Sanders 이전에 이미 A. Schweitzer와 K. Stendahl과 같은 학자에 의해 새 관점주의와 거의 같은 사상이 유포되고 있었다. 이들은 바울 사상의 핵심 주제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회적 하나 됨이라고 단언하였다. 이들에게 있어서 이신칭의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부딪히면서 대응 논리로 만들어 낸 논쟁적 교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큰 틀에서 보면 가장 열렬한 새 관점주의 학자들 가운데 하나인 Dunn의 주장과 거의 다를 바 없다. Dunn이 Sanders의 새 관점주의에 얼마나 매료되었는지는 자신의 진술에 의해 확증된다:


오늘날 대개 ‘바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연구에 비추어 볼 때에, 바울 신학의 전면적인 재진술을 새로이 시도할 필요성이 더울 더 질실해지고 있다. 지난 한두 세대 동안에 바울 신학에 대한 전면적인 체계적 연구가 없었던 사실은 아마도 바울 신학의 재진술 작업이 너무도 예측 가능해져 버린 탓이었을 것이다. 새로이 진술할 거리가 거의 없으니 똑같은 과거의 재료를 그대로 반복하지면, 혹은 새로운 패턴을 찾기 위해서 그저 똑같은 과거의 재료를 이리저리 뒤섞어 놓기만 하자면, 구태여 책이 더 나올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조용한 막다른 골목에 이른 것 같던 신약과 기독교 신학 연구에 에드 샌더스(Ed Sanders)의 『바울과 팔레스타인의 유대교』(Paul and Palestine Judaism)가 등장하여 신경을 건드리면서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그의 작업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의 시작 전반이나 혹은 구체적으로 바울 신학을 이해하고자 하는 진지한 열망을 불태우는 자들로서는 그가 재진술하는 팔레스타인 유대교와 기독교 신학 내에서 전통적으로 재구성해 놓은 유대교 사이의 예리한 대조(필자의 밑줄)를 절대로 물시할 수 없게 되었다. 바울 신학에 대한 우리의 현대적 이해를 위하여 뒤따라 올 수밖에 없는 갖가지 심각한 결과들은 차치하고라도, 바울의 조상 때부터 내려온 종교와 바울 자신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완전한 재평가 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Dunn의 제자인 Don Garlington은 새 관점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고 평가한다: “Yet I would submit that a genuine ‘Copernican revolution’ has transpired in our understanding of the NT message in relation to contemporary Judaism: Pauline exegesis will never be the same again.”


새 관점주의가 몰고 온 파장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며 이 새로운 바울 신학 논쟁에 뛰어들어 가장 치열하게 토론을 벌이고 있는 학자는 김세윤 교수다. 그는 “새 관점주의”에 대해 말하기를 그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래의 바울 복음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바울 신학에 있어 일대 혁명을 꾀하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또 “새 관점 학파는 Sanders가 제2성전 유대교(Second Temple Judaism)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한 것에 기초하여 바울의 복음, 특히 그의 칭의론을 근본적으로 재해석함으로써, 많은 면에서 바울 복음에 대한 종교 개혁의 해석을 사실상 뒤집어 버렸다... 그 학파의 몇몇 대표자들은 그들의 관점에 옳다는 것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획기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에 대해 너무나 자신만만한 나머지, 그들의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을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조소하며, 학계를 Sanders 이전이냐 이후냐로 양분시켜 놓았다.”


또 김세윤 교수는 J.D.G. Dunn이 E.P. Sanders의 “새 관점”을 적극 수용하고 이 관점의 견해를 치밀하게 체계화하는 것에 대해 “명백히 Dunn은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는 Sanders의 개념을 하나의 도그마로까지 끌어올렸다”고 지적한다.


김세윤 교수 외에도 새 관점주의 논의에 흥미를 가지고 통찰력 있는 아티클을 제공하는 다른 많은 한국인 학자들이 있다. 그 가운데 최갑종 교수는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는 근본적으로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라고 말하면서, “물론 이것이 1세기의 유대교가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와 정학하게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연속성과 함께 분명히 불연속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새 관점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새 관점주의에 대한 학자들의 반응에는 경탄과 찬사뿐 아니라 심각한 우려 및 비판적 옹호의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이미 새 관점주의가, 사람들이 이를 수용하든 거부하든, 바울 사상 연구에 있어 큰 폭발력을 가진 피할 수 없는 논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새 관점주의가 주장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 이론이 부득불 이신칭의의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거나 그 정도는 아니라 할지라도 이신칭의의 의미를 최대한 축소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면 그것은 바울 신학계의 지축을 뒤흔드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개혁 사상의 계보를 잇는 대부분의 교회들과 신학자들은 “그동안 우리는 바울을 완전히 오해하였다”고 고해성사를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새 관점주의의 체계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론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이론 안에 어떤 중대한 난점이 있다 할지라도, 전통적 신학이 간과하거나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 어떤 중요한 주제에 주목하도록 건설적 자극을 주고 있다면, 필자는 그것만으로도 새 관점주의는 유익한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새 관점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정당한지, 그리고 바울이 과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볼 것이다.
  
1. E.P. Sanders의 유대교 이해: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


새 관점주의의 핵심 논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E.P. Sanders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가 무엇인지 살피는 것이 합리적 절차일 것이다. Sanders는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전통적 신학이 바울 시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율법주의”(Legalism)로 규정한 것에 반기를 들고 그것을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였다. Sanders에 따르면, 1세기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과 맺은 이스라엘의 언약은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 인식과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신들의 이해의 근본 토대이다. 유대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고 당신의 통치 아래 두어 특별한 관계를 맺고 살도록 하셨다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 언약의 표시로 율법을 주셨으며, 율법의 준수를 통해 언약 안에 이미 확립된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있어 의(義)란 이 특별한 관계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 즉 율법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유대교에 있어서 율법 준수는 언약 안에 들어가기(entering)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를 성취하기(attaining) 위한 수단이다. 사실 이 특별한 관계를 성취한다는 것은 언약적 관계 유지(maintaining) 이상의 것이다.


Sanders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유대교가 행위의(行爲義)를 통해 구원을 실현하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은혜의 종교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순종 행위는 단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언약 안에서의 삶을 위한 틀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 준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 Sanders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이렇게 정의한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의 인간의 지위가 언약의 토대 위에 확립되어 있고, 언약은 그 명령들에 대한 순종을 인간의 합당한 반응으로 요구하는 한편, 범법에 대한 속죄 수단을 제공한다고 보는 견해이다... 순종은 언약 안에서 인간의 위치를 유지시키지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언약적 지위. 필자 해설]를 얻지는 못한다... 유대교에서의 의(義)는 선택된 자들의 그룹 안에서 신분 유지하는 것을 함축하는 용어이다.


율법 문제와 관련하여 Sanders는 1세기 유대교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율법은 율법을 범한 경우 회개하고 속죄 받을 수 있는 제사 규정들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율법을 어긴 자들은 속죄를 위한 희생 제사를 통해 하나님과 언약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한 Sanders의 결론적 요약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당신과 특별한 언약 관계 속에 살게 하셨다.
2) 하나님은 이 언약의 표시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1) 율법은 ① 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② 이스라엘에 대한 순종의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순종에 대해서는 보상하시나 불순종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
(2) 또한 율법은 모든 범법 행위에 대해 속죄 수단을 제공하며, 속죄의 결과는 언약 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이다.
3) 순종, 속죄 및 하나님의 자비로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 받게 될 그룹에 속한다. 선택과 궁극적 구원은 인간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상과 같은 Sanders의 주장은 1세기 유대교를 율법주의(Legalism)으로 규정해 온 전통적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다. 만일 Sanders의 주장이 옳다면 전통 신학은 종래의 주장들과 성과물들을 폐기 처분하고 근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Sanders의 주장은 마치 사도 바울이 유대교로 되돌아가서 복음적(?) 버전(version)으로 유대교를 재진술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의 선택론과 자비 구원론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가? 아무튼 그의 진술은 나름대로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느 지점을 찔러도 빠져나갈 구멍을 파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리고 논리적 연결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미리 예단해 놓은 틀 속에 자신의 주장들을 꿰맞춰 나가는 것 같다.


2. J.D.G. Dunn의 “이신칭의” 이해: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지위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회론적 변증 교리?


새 관점주의의 가장 충격적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바울의 “이신칭의”가 인간의 보편적 구원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언약적 지위로 입문할 수 있도록 변호하기 위한 교리하고 하는 것이다. Sanders에 따르면,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의 이방인 선교를 변증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필자는 이 주장이 어떤 의미를 함축하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J.D.G. Dunn이 가장 적극적인 설명을 제공한다. Dunn은 Sanders의 견해를 개선해 보려고 애쓰면서도 항상 그의 언약적 율법주의의 틀을 고수하는 학자다. Dunn은 바울이 회심 전에 헬라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심히 핍박한 것은 그가 열심 있는 바리새인으로서(빌 3:5; 갈 1:13-14) 이스라엘의 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한다. 바울이 그들을 핍박한 것은 예수를 메시야라고 전파했기 때문도 아니고 율법을 범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 회심자들을 할례도 요구하지 않은 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행위를 “이스라엘의 고결함과 순수함”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하였다.


하지만 바울은 다메섹 사건을 통해 자신의 종교적 인식에 대반전을 경험한다. Dunn은 바울의 다메섹 경험의 “일차적 특징”이 “즉각성”이며 “율법 및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에 관한 함축들은 추론에 더 가까운 것으로 그가 안디옥교회 선교사로 일하던 초기 시절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더 명료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Dunn은 이것을 그의 갈라디아서 3:13 해석에서 다음과 같이 상술(詳述)한다:


충성된 유대인이었던 바울에게 있어, 신명기 21:23에 나오는 저주는 언약의 축복(특히 신 27-28장)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 것은 언약이 폐지되는 것, 언약 밖으로 내쳐지는 것이었다(28:58-68) - 즉 이방인 죄인의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하나님이 그를 거부하셨으며, 그를 이방인 가운데 포함되게 하셨다는 것, 그를 언약 밖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셨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것은 분명 그러한 추론을 완전히 뒤집어 버린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분을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대로 받으시고 정당함을 입증하셨다는 것을 분명하게 나타냈기 때문이다. 바울의 즉각적인 결론은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주받은 자, 언약 밖에 있는 죄인, 이방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될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그런즉 이방인에게”라는 결론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보다 정교한 기독론적 도식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 현현사건에서 직접적으로 기원(基源. 한자 필자 삽입)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쉽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다.


Dunn은 이 진술을 통해 자신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개진한다:


[다메섹에서의 그리스도 현현 사건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부활을 체현하신 분으로, 따라서 태초부터 자기 영광을 자신이 창조한 인류와 함께 나누려고 계획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의 종말론적 성취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가 이렇게 영광스럽게 옳다 인정함을 받은 것을 신명기 21:23에 나오는 저주가 역전된 것으로, 따라서 외부자와 내부자, 흠 없는 자뿐 아니라 죄인,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언약적 관심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상과 같은 일련의 진술들은 바울의 이신칭의가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지위로 편입시키고자 개발해 낸 교리라는 주장을 펴기 위한 포석이다. Dunn은 이신칭의를 안디옥에서 일어난 충돌의 여파로 나중에 발전되어 나온 교리로서, 특히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교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여 이신칭의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유대인들이 누리는 언약의 특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발전시킨 교리라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란 일반적 의미의 율법 준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이스라엘과 이방 나라들을 구별해 주는 계명들 곧 할례, 음식 규정, 안식일 규정 등에 대한 순종 행위에 관한 것이다. Dunn은 부연하기를, “율법의 행위”는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 언약적 율법주의 전체”를 가리키나 이스라엘과 다른 이방나라들과의 관계가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몇몇 율법들이 다른 것들보다 더 부각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Dunn은 “율법의 행위”를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것, 언약적 율법주의 전체”라고 할 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라고 설명한다:


율법의 행위는 야훼께서 최초에 이스라엘을 그의 선민(選民)으로 택하시면서 이스라엘과 맺었던 언약에서 이스라엘의 몫, 이스라엘이 (義)를 지키기 위해서 요구되었던 것들을 가리켰다는 말이다. ‘율법의 행위’는 그러한 은혜에 대한 이스라엘의 응답이었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요구한 순종이었으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길이었다(레 18:5). ‘율법의 행위’는 ‘언약적 율법주의’를 가리키는 바울의 용어인데 언약과 율법이라는 말은 둘 다 중요하다 - 언약 내에서 언약과 관련하여 기능하는 것으로서의 율법. 언약의 표현이자 언약의 보호 장치로서의 율법, 하나님의 은혜로 맺어진 언약에서 이스라엘의 몫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으로서의 율법(필자의 밑줄).


Dunn은 이렇게 이해된 율법은 이스라엘의 특권의식을 강화시키게 되었고, 하나님께 구별된 민족이라는 표지가 되었다고 지적한다. 이것은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부정적 기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거룩을 정의하는 것으로서의 율법의 역할이 이스라엘을 이방 나라들과 구별하는 역할로 변질되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것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의(義)가 이스라엘에게만 국한 된다는 결론이 도출된 것과 같다. 이런 식으로 하여 “믿음의 순종”과 같은 의미인 “율법의 행위”의 긍정적 의미가 바울서신에 보이는 것과 같은 부정적 의미로 변질되었다. 즉 그것은 “이스라엘의 언약적 지위를 유지시킬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특권적 지위와 배타적 특권을 보호하는 것으로서의 율법”으로 기능하게 되었다. 회심 전 바울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즉 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특별한 관계에 흠집을 내는, 디아스포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할례 없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행태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할례는 아브라함 때부터 언약 백성의 정체성의 근본 표지였다. 그러므로 바울 당시에 유대인과 이방인을 “할례”와 “무할례”로 구분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아무튼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Dunn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교리가 이방인들이 왜,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동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산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선교현장에서의 필요 때문에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변증하기 위해 이신칭의 교리를 만들어냈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Dunn이 이신칭의를 구원론적 의미보다 사회론적-선교론적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Dunn에 의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율법의 행위”(곧 인간의 노력)로 의(義)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언약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표지들: 할례, 음식법, 안식일 규례 등)라고 하는 장애물을 놓아 이방인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Dunn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지니고 있었던 전제, 곧 하나님의 의는 오직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고 이방인들은 유대인이 되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계약에 기초한 독특한 의무사항들을 따를 때에만 가능하다는 전제를 맹렬히 비판하는 모습을 역력하게 볼 수 있게 된다(필자의 밑줄).


Dunn에 의하면, “율법의 행위”를 둘러싼 논란은 어떤 조건하에서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제공될 수 있느냐에 관한 기독교 내부의 논쟁에서 발단된 것이었다. 이 논쟁에서 고전적 반립명제(反立命題)가 형성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안다]”(갈 2:16a)고 하는 진술이다. 바울은 이 명제에 대해 2회 반복하여 확신을 표명한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b).


바울의 반립명제와 확신 표명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단어는 “믿음”이다. 이것은 바울 복음의 핵심적 단어들 중의 하나다. 특히 갈라디아서 3장과 로마서 3-4장이 이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그런데 Dunn은 갈라디아서 2:16에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사실 하나를 발견한다: “바울이 이신칭의를 단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답하는 형식으로가 아니라 더 나아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의존성에 대한 근본적 진술을 제시하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필자의 밑줄). Dunn은 바울의 믿음에 대한 강조는 유대교의 “율법의 행위”에 대한 강조에 함축되어 있는 “제한성”과 싸우는 그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유대인만의 하나님이라고 단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하시는 하나님은 유대인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이시기도 하다고 선언한다(갈 3:28, 30). Dunn에게 있어 믿음은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처럼 언약적 지위를 획득하는 수단, 곧 “의(義)를 얻는 수단”이다. 유대인들이 특별히 선택된 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義)에 도달하지 못한 것은 율법의 행위를 자랑만 하고 그에 합당한 순종 행위를 통해 언약적 신분 유지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참조. 롬 3:27). 유대인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려면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모든 믿는 자”(롬 1:16; 4:11; 10:4)는 유대인과 헬라인 모두를 가리키며, “모든”은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도,”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이방인도”를 의미한다. Dunn은 바울이 이점을 역설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특권적 지위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제한성을 포함하고 있다는 유대인들의 전제를 부수고자 의도한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한다.


이상과 같은 Dunn의 이신칭의 이해는 바울의 칭의론이 이방인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에게 이신칭의는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지위에 편입시키기 위한 사회론적, 교회론적 변증 교리에 불과하다. 과연 이신칭의의 주창자인 바울의 의도가 그런 것일까? 다음 장들을 할애하여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시도해 보자.
  
3.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 : 잘못된 것인가?


Dunn은 바울이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시키는 문맥에서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규정하는 뜻에서 이신칭의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즉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다룰 때마다 이신칭의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로마서 9-10장, 갈라디아 3장, 빌립보서 3장을 자기의 논거(論據)로 삼는다. 하지만 Dunn의 주장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전통적 견해를 근본에서부터 뒤집기 위한 것이다. Dunn은 바울이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갈등 문제를 다루는 본문들 - 명시적이든 암시적이든 - 을 다룰 때 거의 예외 없이 동일한 해석을 가한다. 그는 소위 “새 관점”이라고 하는 해석학적 틀에 맞추어 그 본문들을 읽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Dunn과 행보(行步)를 같이하고 있는 N.T. Wright마저 Dunn의 갈라디아 3:13 해석에 대해 “뒤틀리고 개연성이 없다”(tortuous and improbable)고 비평할까?


그런데 Dunn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로마서 4:4-5; 10:2-4; 빌립보서 3:7-9와 같은 본문이 전통적인 방식 -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하는 - 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이 말을 뒤집는다고 하는 점이다. Dunn은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유일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본문들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쟁점을 이스라엘의 율법의 행위 대(對) 이방인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가능성이라는 문제에서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이라고 하는 보다 근본적 문제로 바꾸어 놓았느냐의 여부이다(필자의 밑줄).


Dunn이 이렇게 말하는 목적은 위의 본문들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신칭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强辯)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또 에베소서 2:8-9의 경우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이 무엇인지에 대한 보다 근본적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인정한다. 즉 율법의 행위를 인간의 노력이라는 뜻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Dunn은 에베소서에서 “구원”이라는 용어가 비바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한다(특히 엡 2:8). 단적으로 에베소서는 바울의 저작이 아니라 그의 한 제자가 썼을 것이라는 것이다. Dunn의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구원이 행위(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는, 복음에 대한 바울의 최상급 진술(엡 2:8-9)을 너무 함부로 취급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Dunn이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해 “율법의 행위”로 차단막을 치는 유대인들을 맹렬히 비판하고 있다고 주장할 때 바울이 결국 유대인도 그리스도를 믿어야 진정한 언약 백성이 된다고 말한다는 뜻인데 - 사실 Dunn은 이점을 전략상 명백히 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내버려 둔다 - 이것과 율법/믿음의 대조와 함께 이신칭의를 언급하는 본문들(특히 빌 3:7-9)이 “인간”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지는 조건이라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즉 구원이 행위로냐 믿음으로냐 하는)를 논하고 있지 않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된다.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새 관점”에서 볼 것을 강요하는 듯한 Dunn의 주장들은 여기저기서 감지되는데 - 사실은 전면적이다 - 특히 하박국 2:4을 인용하고 있는 갈라디아서 3:11에 대한 그의 주해가 결정적인 한 예가 될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기 때문입니다”(필자 번역).


이 본문은 전반부에서 “율법,” “의롭다 함” 개념을 포함하고 있고, 후반부의 인용문이 “의인,” “믿음으로,” “살리라”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바울의 이신칭의론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Dunn은 하박국 2:4의 인용문에서 “의인”을 언약에 속한 자로 이해한다. 이 해석은 갈라디아서가 복음과 율법을 기본 논제로 하여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누구냐?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통찰력 있는 해석이라고 여겨진다. Dunn은 “믿음으로”에서 “믿음”은, 인용문이 언약상의 의(義) - 즉 언약 관계에서 주어진 의(義) - 의 토대가 되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으로 볼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믿음이라고 하는 이중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본다. 이 해석 역시 어느 정도 무방하다고 판단된다. 히브리어 본문의 “그의 믿음으로”(=의인 자신의 신실함으로)나 LXX의 “나의 믿음으로”(=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와 달리 바울이 그저 “믿음으로”라고 함으로써 그러한 이중적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의 판단에 “믿음”에 대한 이러한 약간 모호한 해석은 “살리라”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미리 가늠해 놓고 제시하는 해석이라고 본다. 그는 “살리라”를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인간의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할 의무를 뜻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이 해석이 “그렇게 삶으로 언약에 속한 자로서의 신분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필자의 주해적 감각으로는 “믿음으로”를 기본적으로 “그 자신(=언약에 속한 자)의 믿음으로”라고 해석하고, 더 나아가 “그래서 하나님의 의를 받음으로”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살리라”를 “구원 생명을 얻으리라”로 해석하는 것이 11절 전반부 끝부분 “아무도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라는 말과 가장 잘 부합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죽을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해석은 갈라디아서 전체의 율법/복음론과도 조화가 잘된다. 그러나 Dunn은 이러한 해석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신칭의 이론과 해석적 코드가 완전히 다르고, 만일 그렇게 한다면 자신을 무너뜨리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새 관점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전통적 견해를 완전히 전복시키거나 아니면 자신이 전복되거나 둘 중의 하나다. 양자간에 논지 관련 본문 해석에 대한 부분적 일치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또 Dunn이 갈라디아서 3:11의 하박국 2:4 인용문을 그렇게 해석하는 것은 아마도 새 관점주의의 입장에서 일관되게 로마서 해석을 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특히 로마서 전체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로마서 1:16-17에서도 바울은 하박국 2:4을 인용하고 있는데(롬 1:17) 만일 갈라디아서 3:11을 달리 해석한다면 그의 로마서 주석은 완전히 새로 써야 할지도 모른다. Dunn은 바울이 선교현장의 필요에 의해 이방인들을 두둔하기 위해 이신칭의 교리를 고안해낸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교리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일을 감행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천상의 주를 만난 처음 순간부터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는 복음을 깨닫고 이방인 선교에 진력하게 되었던 것이라면(참조. 행 13:39) 다음과 같은 최갑종 교수의 주장은 주목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이신칭의 교리와 바울의 이방선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선교를 낳았다.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Dunn의 이론은 성립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 문제 - 명시적 혹은 암시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인종적 갈등문제까지 포함하여 - 를 언급하는 수많은 바울서신 본문들이 이신칭의 개념을 인간의 자랑과 업적 또는 노력이라는 뜻의 율법(의 행위) 개념과 상반된 위치에 놓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예를 들어보자. 앞에서 Dunn의 해석을 소개한 바 있는 갈라디아서 2:16은 자연스럽게 율법의 행위 곧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행위 - Dunn도 이 정의를 인정한다 - 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뜻을 구성한다. 갈라디아서 2:21은 율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의(義)를 받는다고 진술한다. 여기서 “율법”은 율법 준수 행위라고 하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갈라디아서 3:2-5은 신자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라고 하는 진술을 두 번씩이나 반복한다. 여기서 “율법의 행위”를 “율법이 요구하는 것들을 실천하는 행위 곧 인간의 노력으로”라고 이해하고, “듣고 믿음으로”를 “복음을 듣고 그것을 믿음으로 수납함으로”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신자가 그렇게 함으로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율법의 행위”와 “믿음” 주제가 일차적으로 수직적-구원론적 전망 가운데 있는 이슈라는 점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필자는 이러한 함축들이 갈라디아서 4:1-7의 종과 아들 메타퍼가 암시하는 종말론적 구조 - 율법시대와 믿음시대로 대변되는 - 와 긴밀한 신학적 연관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율법/율법의 행위와 이신칭의 문제는 단지 수평적-교회론적 문제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수직적-구원론적 문제로 보고 그것을 종말론적 시각에서 조망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제안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갈라디아서 3:6-9에서 이신칭의의 예(例)를 아브라함에게서 찾고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아들들이 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처럼 의롭다함을 받고, 믿음으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신칭의 문제를 인간이 어떻게 영적 아브라함 후손이 되어 진정한 언약적 지위를 획득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의롭다함과 구원을 받느냐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3:11에 대해서는 이미 위에서 언급하였다. 다만 12절에서 율법과 믿음이 대조될 때 율법은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를 암시한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왜냐하면 12절 후반부의 레위기 18:5 인용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는 실제로 율법이 요구하는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는 자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3:12절은 전체적으로 율법은 본질적으로 믿음과 다르다는 것과, 만일 누가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 행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그 노력으로) 구원 생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살리라”)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이것은 완벽한 율법 준수 행위로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역설적 진술이다(참조. 갈 2:16; 5:3). 이러한 이해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바로 뒤에 나오는 갈라디아 3:13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5:2-4은 율법 안에서, 특히 할례 규정 이행으로 의롭다 함을 받으려 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져 버렸다고 진술한다. 이 진술은 율법 준수라고 하는 인간의 노력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관찰을 통해 필자는 바울의 율법 또는 율법의 행위 개념이 Dunn이 말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방어막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 또는 공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Dunn은 “율법의 행위”를 주로 할례, 음식법, 안식일 법 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보며 또한 그것이 “율법”의 대치 개념인 것처럼 사용하나, 그가 그것을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할 때 실제로 Dunn에게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아무 차이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믿음”과 대치되는 “율법의 행위”를 모든 율법 조항에 따른 모든 율법 준수 행위 곧 의(義)에 이르고자 하는 인간의 모든 노력이라는 의미로 규정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는 이 개념이 지닌 언약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할 뿐 잘못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단 이때에도 “언약적”이라는 말은 완전한 의미에서 새 관점주의가 말하는 “언약적”과 다르다는 것을 천명해 둔다. 왜냐하면 Dunn에게 있어 이 용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여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 위해 율법의 부여(賦與)와 함께 오직 그들과 맺은 언약과 관련된”(필자의 재해석)이라는 뜻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를 참조할 때 “언약적”이라고 하는 말은 최소한 믿음, 성령의 선물, 율법시대와 믿음시대, 약속 등의 개념을 함축하는 용어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사실은 Dunn이 생각하고 있는 “언약적”이라는 말의 의미를 지배하도록 해야 한다.


4. 바울의 “언약 백성” 이해: 이신칭의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관문


이제 필자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이방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도 위한 것이라는 구체적 논의를 시도해 보아야겠다. 필자는 이 논의를 “언약” 개념에 집중하며 전개해 보려고 한다. 하지만 이 작업에 앞서 먼저 새 관점주의자들이 “언약적”이라는 용어 사용을 선점함으로 얼마나 큰 설득력을 확보해 왔는지 지적해 두고 싶다. 새 관점주의의 이 용어 사용은 얼마나 많은 승부처에서 중요하고 유리한 고지들을 선점하고 수많은 전과를 올리게 될 것인지를 암시하는 신호탄이었다. 앞에서 밝힌 대로 필자는 새 관점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에서의 “언약적”은 조심스럽게 거부한다. 하지만 본고의 논제와 관련하여 이 용어 자체는 바울이 유대교를 어떻게 이해하였으며, 그가 어떤 의미로 이신칭의 교리를 그렇게 열심히 강조하고 있는지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을 확인해 둔다.


갈라디아서 3:8-9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이신칭의의 복이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 내포되었던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준다.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갖는 것이 본래부터 이스라엘만의 특권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유대인들만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울은 또 갈라디아서 3:13-14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셔서(십자가 사건)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한 우리가(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통해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진술한다. 이 진술에서 새 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이신칭의가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에 가입시키기 위한 변증 논리라는 뉘앙스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바울의 의도는 오히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통해 옛 아브라함 언약이 아니라 [새 아브라함 언약] 차원의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보다 높은 언약론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또 바울은 갈라디아서 4:21-31에서 그 유명한 하갈과 사라의 알레고리(allegory)를 통해, 그리고 5:1-6에서 율법과 믿음의 대조를 통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할례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축복을 받는 자들이 될 수 있다고 역설한다. 보다 나은 이해를 위해 갈라디아서 4:21-5:6 내용을 간략히 분석해 보자.


갈라디아서 4:21-23에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아들들을 낳은 두 여인을 상기시키면서 율법 추종자들의 모순을 책망한다. 왜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면서 율법에 기록된 내용을 주목하지 않느냐고 다그친다. 이것은 율법주의가 얼마나 복음과 거리가 먼 것인지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하갈을 “여종”으로 사라를 “자유하는 여자”로 지칭하면서, 하갈에게서 난 아들의 출생은 “육체”에 따른 것이고, 사라에게서 난 아들의 출생은 “약속”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두 쌍의 대조 개념의 제시는 두 여인의 의미에 대한 알레고리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위한 포석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4:24-31에서 바울은 두 여인의 의미를 구분하는 이유는 율법주의자들이 곡해된 도식(圖式)을 제시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의 족보에 속(屬)하는 것인데, 이 족보는 시내산 언약을 받은 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시내산 언약은 다시 예루살렘 종교(유대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고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이런 확신 위에서 율법, 특히 할례법을 지키는 자들만이 아브라함의 족보에 속하여 구원을 받게 된다고 주장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이 잘못된 주장임을 분명히 한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족보에 속하게 되는 것은 시내산 언약의 전통을 잇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새 아브라함 언약을 따라] 하늘의 예루살렘 곧 신자 공동체에 속하는 데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이 공동체가 자유자로서 신자들의 어머니(곧 교회)라고 규정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은유적으로 진술해 온 것을 보다 분명하게 진술한다. 그는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을 이삭의 계열에 속한 약속의 자녀라고 선언한다. 바울은 이스마엘이 어린 이삭을 괴롭힌 사실을 부각시킨다. 29절에서 “그때”는 이삭 시대를 가리키고, “육체를 따라 난 자”는 이스마엘을,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이삭을 가리킨다. 바울은 만일 율법주의자들이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고 있다면, 후자의 사람들이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계승자들이라고 암시한다. 바울이 율법주의자들을 아브라함과 사라가 성령의 약속을 따라 생산한 적통인 이삭의 계열에 속하지 않고 아브라함과 하갈이 육체를 따라 생산한 이스마엘의 계열에 속한다고 강조하는 것은 율법주의자들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 있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님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바울은 구약을 인용하여 핍박자 이스마엘이 비참한 운명에 떨어지게 된 사실을 지적한다. 이스마엘은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내쫓김을 당하였고 상속권을 박탈당하였다. 율법주의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도 없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 교인들에게 믿는 사람들은 여종 하갈의 후손이 아니라 자유하는 여자 사람이 후손이라고 다시 한 번 언명한다. 이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복음을 따라 살라는 뜻이다.


위 내용을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갈라디아 5:1-6에서 바울은 앞의 알레고리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을 이신칭의 교리로 마무리 짓는다. 이 본문에는 율법과 믿음의 대조가 뚜렷이 보인다. 바울은 우선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믿는 자들을 해방하신 것은 자유를 위한 것이니 견고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호소한다. 복음을 떠나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자유를 버리고 종의 신분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요구를 따라 할례를 받는다면 복음의 핵심인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무익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율법주의자들은 할례가 그들을 의롭게 하며 그들에게 구원을 줄 것이라고 가르쳤던 것 같다. 그러나 구원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부터 온다. 만일 그들이 할례에 의존한다면 그리스도의 속죄는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바울은 만일 누가 할례를 통해 의(義)에 이르고자 한다면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단 하나를 어겨도 범법자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율법을 통해 의를 얻으려 하는 자는 그리스도와 아무 상관없는 자가 되고 하나님의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선언한다. 의(義)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은 믿음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본래 강조하고자 했던 “믿음” 문제로 되돌아와, 신자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통해 의의 소망을 고대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갈 5:5). “성령을 통해”라는 말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義)의 실현이 성령의 역사에 의해 구체화 된다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신자에게 하나님의 의(義)를 선물로 준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할례냐, 무할례냐의 율법의 행위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 “믿음”의 문제이다. 오직 믿음만이 의(義)의 효력을 나타낸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해석은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개념은 단순히 사회론적-교회론적 개념이 아니라 구원론적-종말론적 개념이며, 그것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인종적 구별 없이 오직 이신칭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개념이다. 새 관점주의자들은 이러한 견해를 전면 부인하고 창세기의 아브라함 언약과 “율법(의 행위)”에만 머물러 있을 것인가? 물론 구약 역사 속의 아브라함 언약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 번 맺은 언약은 그것이 이루기까지 폐기하거나 덧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갈 3:17). 430년 후에 생긴 율법(소위 모세 언약)이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신 약속들을 무효화할 수 없다. 즉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복은 지금도 여전히 약속의 씨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상속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약속을 통해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지(갈 3:18) 결코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들이 상반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갈 3:21). 바울은, 하늘 유업 상속이 율법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미암는다고 할 때, 율법이 “약속의 씨”가 올 때까지 한시적 역할을 한다고 할 때, 이것이 결코 율법과 약속의 충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바울은 이에 대해 직접적인 이유를 제시하지는 않으나, 그는 아마도 율법이 보다 큰 개념인 “언약” 안에 내포된 것으로 보았던 것 같다. 단지 바울은 율법의 한시성을 지적한다. 그는 우리가 믿음이 오기까지 율법 아래 매이고 장차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혀 있었다고 진술한다(갈 3:23). 그는 율법이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감독자의 역할을 하였다고 말한다. 그는 이제 믿음이 왔으므로 우리가 더 이상 감독자 아래 있지 않다고 선언한다(갈 3:25). 이러한 일련의 진술들은 “아브라함 언약”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문한다. 성령 받음과 그리스도를 믿음,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와 하나님의 자녀 신분의 획득(갈 3:26; 4:5),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됨, 율법의 한시성 등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재규정하는 주요 이슈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개념들에 대한 종말론적 사색 없이 이신칭의, 율법의 행위, 언약 등을 다룬다면 바울신학계는 “새 관점주의” 혹은 “언약적 율법주의”의 철옹성 같은 성벽(城壁) 안에 갇혀 출구를 찾지 것이다. 앞에 제시한 신학적 개념들은 이신칭의가 이방인을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분에 편입시키는 문제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동등성의 기초 위에서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게 하는 문제에 관한 교리임을 밝혀 준다.
   
나가며


1세기 유대교의 실체를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보는 새 관점주의자들의 견해는 일단 외견상 아무 오류가 없어 보인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택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특별한 언약적 은혜 속에 들어와 있다(getting in)고 확신하였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상속자의 신분을 확보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행위는 언약적 지위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언약 안에 계속 머물기(staying in) 위한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따라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당연한 의무이다. 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언약 안에 머무는 것은 그 자체가 의(義)이다. 이 의는 훗날 구원과 하나님 나라 상속의 영광을 가져다 줄 것이다.


하지만 한편 “율법”은 이방인들에 대해 배타성을 갖는다. 특히 할례와 음식법, 안식일 규정 등은 그들과 구별되는 유대인의 표지이다. 이 규정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차단벽 구실을 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를 통해 이방인들도 언약적 특권 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는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를 이용하여 이방인들을 거부하는 행위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도 언약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변증한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믿음으로 아브라함 언약의 복을 공유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언약적 율법주의 이론은 언약적 구조 안에서 이신칭의를 이해하려 한 점에 큰 강점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분 이해를 수평적 차원에서만 보려고 한 점은 그 신학적 관점이 너무 협소하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아브라함 언약과 그 성취의 문제가 수평적, 사회론적, 교회론적 아이디어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


또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신칭의의 의미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이방인이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이신칭의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 언약 속으로 들어가고 따라서 의와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유대인들의 율법 준수 행위가 단지 언약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마땅한 반응이며 신분 유지를 위한 수단 정도인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 그것이 의와 구원에 이르기 위한 방편 역할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고 있다. 언약적 율법주의 자체도 순종은 보상을 가져오나 불순종은 심판을 불러온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유대교가 선민의식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고 행위를 통해 의와 구원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유대교 율법주의는 전반적으로 행위의(行爲義)를 추구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들에게 율법 준수는 단지 신분유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가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은연중에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이중의식 - 한편으로는 언약 백성이라고 하는 선민의식(選民意識)과 다른 한편으로는 저주를 면하기 위해 의(義)를 실현해야 한다고 하는 행위의(行爲義) 의식(意識) - 은 그들을 점점 위선과 형식주의 그리고 율법주의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에 대해 율법이라고 하는 높은 방어벽을 치고 있었다.


이에 바울은 인간이 아브라함의 언약적 지위를 얻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 곧 인간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고 이신칭의에 의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신칭의를 통해서만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백성이 되는 것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 연합에 달려 있지 않고 믿음과 성령을 통해 의(義)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을 획득하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한 마디로 새 관점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독(毒)이 담긴 황금상자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울복음의 진수를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그의 신학을 전면적으로 뒤집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약적”이라는 말로 바울신학의 모판에 새로운 틀을 짜주는 의미심장한 공헌을 하고 있다.










김정훈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조석민 (에스라성경대학원대학교, 신약학교수)




논평을 시작하며


귀한 논문으로 바울 신학의 새로운 지평을 넓힐 수 있도록 자극을 주신 김정훈 박사께 감사드리며 간략한 논평을 시작한다. 먼저 논평에 앞서 논문을 논평자가 이해한 대로 간단히 요약하고, 이 논문의 학문적 공헌과 평가, 그리고 제안과 질문을 할 것이다.


1. 논문의 요약


김정훈박사는 “새 관점주의”에 대하여 간략하게 일반적인 평가를 하며 논문을 시작한다. 김 박사는 “최근 바울 신학 연구는 소위 ‘새 관점주의’를 언급하지 않고는 논의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분위기”라고 평가한다. 김 박사에 의하면 “새 관점주의”는 E.P. Sanders의 1977년 책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비롯된 것과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고, 바울사상의 요체는 “이신칭의”가 아니라 이방인과 유대인의 교회론적 동등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라고 소개한다.
김 박사는 “새 관점주의”는 한 순간에 태동된 것이 아니라, 이미 A. Schweitzer와 K. Stendahl과 같은 학자에 의해 새 관점주의와 거의 같은 사상이 유포되었다고 주장한다. “새 관점주의” 학자들은 바울 사상의 핵심 주제가 “이신칭의”가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회적 하나 됨이라고 단언하였고, 이신칭의는 바울이 선교 현장에서 유대주의자들과 부딪히면서 대응 논리로 만들어 낸 논쟁적 교리일 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들로 J.D.G. Dunn 및 새 관점에 대해 “코페르니쿠스 혁명”으로 평가한 Dunn의 제자인 Don Garlington을 언급한다.
김 박사는 새 관점주의가 몰고 온 파장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내는 한국 학자로 김세윤 교수를 거론하며, 그가 “16세기 종교개혁 이래의 바울 복음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바울 신학에 있어 일대 혁명을 꾀하는 것”이라는 평가를 인용한다. 그 외 최갑종 교수가 이해한 새 관점주의를 언급하며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는 근본적으로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이며 “물론 이것이 1세기의 유대교가 구약의 이스라엘 종교와 정학하게 동일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양자 사이에는 연속성과 함께 분명히 불연속성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새 관점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는 평가를 인용하여 소개한다.
김 박사는 논문의 목적에 대하여 서론 마지막 부분에서 “새 관점주의의 핵심은 무엇이며, 과연 그것이 정당한지, 그리고 바울이 과연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볼 것”이라고 밝히고, 본론을 네 장으로 나누어서 논의를 개진한다.


(1) E.P. Sanders의 유대교 이해: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


논문의 제1장에서 E.P. Sanders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가 무엇인지 살피고 있다. 김 박사는 Sanders가 종교개혁에 뿌리를 둔 전통적 신학이 바울 시대의 팔레스타인 유대교를 “율법주의”(Legalism)로 규정한 것에 반기를 들고 그것을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아야 한다고 하는 새로운 견해를 주장했다고 소개한다. 김 박사는 Sanders가 주장하는 것이 “유대교가 행위의(行爲義)를 통해 구원을 실현하고자 하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처음부터 은혜의 종교였다는 것이다. 인간의 순종 행위는 단지 그 은혜에 대한 응답일 뿐이다. 하나님은 주도적으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셨고, 언약 안에서의 삶을 위한 틀로 율법을 주셨다. 율법 준수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언약 안에 머물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김박사는 “언약적 율법주의”에 대하여 Sanders의 결론적 요약을 인용하여 소개한다.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당신과 특별한 언약 관계 속에 살게 하셨다. 2) 하나님은 이 언약의 표시로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다. 첫째, 율법은 ① 선택을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과 ② 이스라엘에 대한 순종의 요구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순종에 대해서는 보상하시나 불순종에 대해서는 심판하신다. 둘째, 또한 율법은 모든 범법 행위에 대해 속죄 수단을 제공하며, 속죄의 결과는 언약 관계의 유지 및 재확립이다. 3) 순종, 속죄 및 하나님의 자비로 언약 안에 머무는 자들은 모두 구원 받게 될 그룹에 속한다. 선택과 궁극적 구원은 인간의 성취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이루어진다.”
김 박사는 Sanders의 주장이 1세기 유대교를 율법주의(Legalism)로 규정해 온 전통적 견해를 완전히 뒤집는 것이라고 평가한다. 또한 “Sanders의 주장은 마치 사도 바울이 유대교로 되돌아가서 복음적(?) 버전(version)으로 유대교를 재진술하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의 선택론과 자비 구원론이 그럴듯하지 않은가? 그의 율법에 대한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이지 않는가? 아무튼 그의 진술은 나름대로 완벽한 것처럼 보인다. 그는 어느 지점을 찔러도 빠져나갈 구멍을 파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의 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그리고 논리적 연결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미리 예단해 놓은 틀 속에 자신의 주장들을 꿰맞춰 나가는 것 같다.”고 평가한다.


(2) J.D.G. Dunn의 “이신칭의” 이해: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지위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 회론적 변증 교리?


김 박사는 논문의 제2장에서 “새 관점주의의 가장 충격적 주장들 가운데 하나는 바울의 “이신칭의”가 인간의 보편적 구원에 관한 교리가 아니라 이방인들이 유대인들의 언약적 지위로 입문할 수 있도록 변호하기 위한 교리”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시작한다. 이것과 관련하여 Dunn의 견해를 소개하고 평가한다. 김 박사에 의하면 “Dunn은 이신칭의를 안디옥에서 일어난 충돌의 여파로 나중에 발전되어 나온 교리로서, 특히 유대인들의 민족주의에 대항하여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교리라고 본다. 다시 말하여 이신칭의는 이방인 회심자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유대인들이 누리는 언약의 특권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변호하기 위해 발전시킨 교리”라고 소개한다.
김 박사는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Dunn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교리가 이방인들이 왜, 어떻게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동료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를 변증하는 과정에서 산출된 것으로, 선교현장에서의 필요 때문에 바울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변증하기 위해 이신칭의 교리를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Dunn에 의하면, 바울이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것은 그들이 전통적 의미에서의 “율법의 행위”(곧 인간의 노력)로 의(義)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언약 민족으로서의 유대인의 표지들: 할례, 음식법, 안식일 규례 등)라고 하는 장애물을 놓아 이방인들의 접근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Dunn은 이신칭의를 구원론적 의미보다 사회론적-선교론적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3)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 잘못된 것인가?


김 박사는 제3장에서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에 대하여 논하면서 먼저 Dunn의 견해로 시작한다. 김 박사에 의하면 “Dunn은 바울이 믿음과 율법의 행위를 대조시키는 문맥에서마다 하나님의 백성을 재규정하는 뜻에서 이신칭의를 언급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으로 “Dunn의 주장은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전통적 견해를 근본에서부터 뒤집기 위한 것”이라고 이해한다. 김 박사는 “Dunn이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로마서 4:4-5; 10:2-4; 빌립보서 3:7-9와 같은 본문이 전통적인 방식 - 엄격한 율법 준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받는다고 하는 - 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하면서도 곧바로 이 말을 뒤집는다고 하는 점”이라고 말한다.
김 박사는 하박국 2:4을 인용한 갈 3:11에 대한 Dunn의 주해를 길게 논하며 평가하기를 “Dunn은 바울이 선교현장의 필요에 의해 이방인들을 두둔하기 위해 이신칭의 교리를 고안해낸 것이라는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이 교리에 대한 전통적 해석을 완전히 전복시키는 일을 감행하고 있다.”고 한다. 김 박사는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Dunn의 이론은 성립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율법과 복음 문제 - 명시적 혹은 암시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인종적 갈등문제까지 포함하여 - 를 언급하는 수많은 바울서신 본문들이 이신칭의 개념을 인간의 자랑과 업적 또는 노력이라는 뜻의 율법(의 행위) 개념과 상반된 위치에 놓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김 박사는 “바울의 율법 또는 율법의 행위 개념이 Dunn이 말하는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방어막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 또는 공로를 함축하고 있다”고 보며, “Dunn은 ‘율법의 행위’를 주로 할례, 음식법, 안식일 법 등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보며 또한 그것이 ‘율법’의 대치 개념인 것처럼 사용하나, 그것을 율법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할 때 실제로 Dunn에게 율법과 율법의 행위는 아무 차이가 없다.”고 이해한다. 김 박사는 결론적으로 “전통적 이신칭의 이해는 이 개념이 지닌 언약적 성격에 대한 이해가 불충분할 뿐 잘못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4) 바울의 “언약 백성” 이해: 이신칭의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관문


김 박사는 제4장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가 이방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도 위한 것이라는 구체적 논의를 “언약”개념에 집중하여 시도한다. 김 박사는 “갈라디아서 3:8-9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이신칭의의 복이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 내포되었던 것이라는 암시를 강하게 준다.”고 말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갖는 것이 본래부터 이스라엘만의 특권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유대인들만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김 박사는 “바울에게 있어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개념은 단순히 사회론적-교회론적 개념이 아니라 구원론적-종말론적 개념이며, 그것은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인종적 구별 없이 오직 이신칭의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주장한다.


김 박사는 결론적으로 “언약적 율법주의 이론은 언약적 구조 안에서 이신칭의를 이해하려 한 점에 큰 강점이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언약적 신분 이해를 수평적 차원에서만 보려고 한 점은 그 신학적 관점이 너무 협소하다. 언약적 율법주의는 아브라함 언약과 그 성취의 문제가 수평적, 사회론적, 교회론적 아이디어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그리고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고 평가한다. 또한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신칭의의 의미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이방인이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도 이방인도 이신칭의라고 하는 하나의 원리를 통해 진정한 의미의 아브라함 언약 속으로 들어가고 따라서 의와 구원을 보장받는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2. 논문의 공헌


첫째, 이 논문에서 새 관점주의를 요약적으로 소개하며, 전통적인 바울 이해와의 새로운 바울 해석 사이의 갈등 요소를 지적하려고 노력한 것은 학문적 공헌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김 박사는 새 관점주의에 대하여 “새 관점주의의 체계가 충분히 설득력 있는 이론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 이론 안에 어떤 중대한 난점이 있다 할지라도, 전통적 신학이 간과하거나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 어떤 중요한 주제에 주목하도록 건설적 자극을 주고 있다면, 필자는 그것만으로도 새 관점주의는 유익한 공헌”이라고 평가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Dunn의 바울의 새 관점 이해에 대하여 소개하며 그가 이해한 바울 서신의 “이신칭의”를 요약하여 소개한 점이다. 김 박사에 의하면 Dunn은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백성에 포함시키는 문제를 다룰 때마다 이신칭의가 언급되며,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 개념은 사회론적-교회론적 개념이라고 지적하며, Dunn의 주장에 대하여 바울 서신의 이신칭의 개념은 구원론적-종말론적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이다.
셋째, 새 관점주의와 달리 바울의 언약 백성 이해를 소개하며 갈라디아서를 중심으로 이신칭의는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관문으로 주장한 점이다. 김 박사는 갈라디아서 3:8-9에서 바울은 믿는 사람들의 이신칭의의 복이 이미 아브라함 언약 안에 내포되었던 것으로 이해하며, 이것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신분을 갖는 것이 본래부터 이스라엘만의 특권이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유대인들만 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한다. 김 박사는 “새 관점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이신칭의가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에 가입시키기 위한 변증 논리라는 뉘앙스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하며, “바울의 의도가 오히려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음을 통해 옛 아브라함 언약이 아니라 [새 아브라함 언약] 차원의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보다 높은 언약론을 제시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3. 논문의 평가 및 제안


1)이 논문의 제목과 관련하여 새 관점주의는 루터 및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의 바울 해석의 결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바울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루터 흔들기라고 해야 옳은 것 아닌가? 또한 “새 관점주의”에 대한 정의가 필요해 보인다. 왜냐하면, “~주의”(~ism)라고 하면 그것은 일관된 어떤 사상 체계를 의미하는 것인데, 바울을 새로운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끼리도 주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새 관점주의(자)”라고 말했을 때 그 공통분모가 어디까지 인지 경계가 필요해 보인다.


2)이 논문에서 “바울이 과연 새 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지 살펴볼 것”이라는 말은 바울 서신의 본문들이 새 관점주의자들의 주장대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 관점주의자들의 주장은 바울 해석의 문제로 바울 서신에 기록된 본문 이해에 기초하여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할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3)이 논문의 제 1장에서 다양한 “새 관점주의”에 대하여 논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에서는 Sanders 와 Dunn의 견해만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다. E.P. Sanders 및 그 이후 J.D.G. Dunn, Tom Wright, 등 각기 다른 견해에 대한 소개와 논의가 아쉽다. 특히 Sanders의 견해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논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고 하며, “논리적 연결도 자연스럽지 못하고 미리 예단해 놓은 틀 속에 자신의 주장들을 꿰맞춰 나가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런 평가는 보다 정교한 논박이 필요하며 근거가 분명히 제시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바울 해석의 “새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는 “칭의”(Justification) 개념이 향후 바울 신학계의 중요한 논제라고 생각한다.


4)E.P. Sanders의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는 1세기 당시 다양한 유대교의 종교 상황을 분석 이해한 또 하나의 해석으로 이해할 수 없는가? 즉,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이 “전통적 율법주의”로 유대교와 율법을 이해했던 것처럼, “새 관점주의”에서 이해한 유대교 율법에 대한 해석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 수용한 후 “칭의”에 대한 논의를 바울 본문과 씨름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닌가? 이미 D.A. Carson외에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율법주의”(Variegated Nomism)를 말하고 있는 시점에서 그 동안 이해되어온 단편적이고 획일적인 바울 이해에서 벗어나야 할 시점은 아닌가? 그런 점에서 루터 및 종교개혁가들의 바울 해석은 재검토되고, 재해석 될 필요가 있지 않은가? 왜냐하면 루터 및 종교개혁가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다.


논평을 끝내며


결코 쉽지 않은 주제로 바울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하여 오늘의 주제를 가지고 논문 발표를 해주신 김정훈 박사께 감사를 드리며, 이 논문이 바울 서신 이해에 좋은 자극과 또 다른 도전이 되어 한국 신약학, 특히 바울 신학계에 새로운 연구의 열매들이 맺어지기를 기대한다.








김정훈교수의 논문에 대한 논평


이한수 교수 (총신대학교, 신약학)




1. 김정훈 교수의 논문 목적


E. P. Sanders, J. D. G. Dunn로 대변되는 새 관점주의는 이미 “바울 사상 연구에 있어 큰 폭발력을 가진 피할 수 없는 논제가 된” 상황에 처해있다. 따라서 김 교수의 논문의 목적은,
(1) 그것에 내재된 해석적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종교개혁 이래로 견지되어 온 전통적 바울 해석이 여전히 옳다는 것을 변증하는 것이며,
(2) “전통적 신학이 간과하거나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 어떤 중요한 주제에 주목하도록 건설적 자극을 주고 있다면” 그것이 어떤 면에서 “유익한 공헌”을 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이다.


2. 김정훈 교수의 논문의 기본적 주장들


(1) 1세기 유대교의 종교패턴을 ‘언약적 신율주의’(covenantal nomism)로 보는 새 관점주의자들의 이론은 언약신학의 틀 안에서 바울의 이신칭의 복음을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 “큰 강점”이 있고 일단 “외견상 아무 오류가 없어 보인다”(17쪽).
(2) 하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문제점들을 갖고 있다: ① “아브라함 언약과 그 성취의 문제가 수평적, 사회론적, 교회론적 아이디어 차원이 문제가 아니라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고 또 “후자가 전자를 지배하는 사실도 간과하고 있다”(17쪽); ② 따라서 “언약적 율법주의는 이신칭의의 의미를 최대한 축소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지 이방인이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 안으로 들어오는 문제일 뿐이다”(17쪽). ③ 또한 유대교는 율법준수 행위가 “신분 유지를 위한 수단 정도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것을) 의와 구원에 이르기 위한 방편”으로 보았다는 것을 애써 부인하고 있다. “이것은 유대교가 선민의식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고 행위를 통해 의와 구원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는 의식” 또는 “행위의를 추구하는 경향”을 나타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적 경험으로도 이스라엘은 율법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가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들은 율법의 행위로 의와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사상을 은연중에 형성하게 되었을 것이다”(17쪽).
(3) “새 관점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독(毒)이 담긴 황금상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17쪽).
   
3. 김정훈 교수 논문의 긍정적 기여


(1) 상기 논문은 새 관점주의가 바울의 칭의교훈을 “언약적 구조 안에서” 해석하려고 함으로써 “바울신학의 모판에 새로운 틀을 짜주는 의미심장한 공헌”(17쪽)을 했다고 인정한다. 또한 그것이 잘못된 방식이기는 하지만 “전통적 신학이 간과하거나 제대로 강조하지 못한 어떤 중요한 주제에 주목하도록 건설적인 자극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유익한 공헌”을 한 셈이라고 지적한다. 비록 그것의 긍정적 공헌이 결론 부분에 가서야 선언적 진술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이로써 나름대로 학문적 비평의 균형을 유지하려고 한다.
(2) 김 교수는 새 관점주의가 이신칭의를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동등성이라는 수평적, 교회론적 차원에서만 접근한 것을 잘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학문적 기여가 있다면 그것을 “수평적, 사회론적, 교회론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에서도 해석하자고 제안한 점이다. 김 교수는 바울의 칭의 교훈 속에 전자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긍정적인 관점에서 거의 해설되지 않는다. 다만 후자가 전자를 지배한다는 표현만 사용할 뿐이다. 상기 두 차원이 어떻게 언약신학의 구조 속에서 조화될 수 있는지 좀 더 발전시켰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3) 결론적으로 김 교수는 새 관점주의의 바울 해석이 결코 종교개혁 이후로 이어져온 전통적인 해석을 대체할 만한 대안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새 관점학파의 도전에도 불구하고 종교개혁의 바울 해석에 담긴 핵심적 통찰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정당성을 가진다는 그의 결론에 대해서는 논평자도 기본적으로 동의한다.


4. 불분명하거나 아쉬운 점들


(1) 김 교수는 자신의 논문 제목을 “새 관점주의의 바울 흔들기”로 잡았고, 결론 부분에 가서는 “새 관점주의의 언약적 율법주의는 독(毒)이 담긴 황금상자와 같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 교수의 이런 표현들은 자칫 새 관점주의자들이 독이 든 황금상자로 사람들을 유인하려고 바울을 의도적으로 흔들려고 한 나쁜 사람들이라는 선동적 시각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들의 어떤 주장이 지금 그릇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고 하더라도 일세기 유대교 상황에서 바울 복음의 언약적 성격을 드러내려고 나름대로 진지하게 노력한 그들의 동기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또한 모든 학문에는 장, 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학자라면 그것을 가능한 한 객관적으로 균형 있게 판단할 의무가 있다. 자칫 사람들이 선동적 시각을 갖게 되면 바울 복음에 대한 던의 다른 탁월한 통찰들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그를 매도하는 ‘마녀사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2) 김 교수는 “이신칭의 교리와 바울의 이방선교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선교를 낳았다”(11쪽)는 최갑종 교수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이신칭의 교리에 대한 던의 이론은 성립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의 이런 주장은 던 자신의 정확한 입장을 곡해할 가능성이 있다. 김정훈 교수가 인용한 것처럼(6쪽) 던은 바울의 이방선교가 다메섹 회심 사건에서 직접적으로 유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만 그는 자신의 이방인 선교사역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와 연관해서 어떤 신학적 함축을 지니는지 처음에는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다가 안디옥 사건을 겪은 뒤에야 이방인들이 율법의 행위 없이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백성 안에 포함될 권리가 있다는 신학적 ‘추론’을 보다 분명하게 끌어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런 주장은 일찍이 독일의 신약학자들 가운데 이미 주장된 바 있다(G. Strecker, “Befreiung und Rechtfertigung,” 479f). 이신칭의 교리의 후기 발전론은 새 관점학파의 간판 견해가 아니라 독일 학자들의 견해를 넘겨받아 나름대로 던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이신칭의 교리와 같은, 다메섹 회심 사건의 신학적 추론들을 보다 분명하게 끌어내면서 유대교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의 보수적 유대 기독교회로부터 갈라서게 되어 결국 독자 노선을 걷게 되었다고 주장한다(The Partings of the Ways, 139). 하지만 그는 이스라엘의 선택을 여전히 붙들었다는 점에서 결코 유대교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던의 이러한 주장은 이방인 가운데 전파하는 이신칭의 복음이 사람에게 받거나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갈 1:12) 받았다는 바울의 주장을 부정하는 것이다. 바울의 “이방선교가 이신칭의 교리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가 그의 이방선교를 낳았다”는 최갑종 교수의 주장은 이점에서 정당하다.
(3) 김 교수는 새 관점주의자들이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수평적, 교회론적’ 차원에서만 접근하면서 그것의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을 소홀히 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두 가지 면에서 불분명한 채로 남아 있다.
① 그는 이신칭의 교리의 수평적, 사회론적, 교회론적 차원을 부정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고 긍정적으로 부각시키지도 않는다. 만일 그가 이신칭의 교리의 수평적, 교회론적 차원을 조금이라도 인정한다면 그것이 어떻게 이신칭의 교리의 “수직적, 종말론적, 구원론적 차원”과 내면적으로 연결되는지 분명하게 밝힐 필요가 있다. 후자가 전자를 지배한다는 선언적 주장만 가지고 김 교수의 새로운 ‘언약신학’의 면모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안디옥 사건(갈 2:11-16)은 유대 기독교인들이 그들의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 기독교인들을 ‘이방 죄인’(2:15) 취급하면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까지 기피하려는 상황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김 교수는 16절에서 칭의의 수단으로 언급되는 ‘율법의 행위’(2:16)가 어떤 수평적, 사회론적 함축을 갖는지 좀 더 적극적으로 밝혔어야 한다. 안디옥 사건의 해설 문맥에서 등장하는 바울의 칭의 교훈에 대한 김 교수의 주석은 이점에서 전혀 만족스럽지 못하고 일방적이다. 16절에 등장하는 ‘율법의 행위’는 베드로의 모순적 행위를 비난하는 바울의 14절 진술에서 ‘유대인답게 사는’(live as a Jew)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유대인답게 사는’ 삶의 유형으로서 율법의 행위의 수평적, 사회론적 차원이 (김 교수가 강조하는) 의와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인간의 업적과 노력의 방편으로서 율법의 행위의 수직적, 구원론적 차원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는가?
② 김 교수는 “유대교가 선민의식에만 집착했던 것이 아니고 행위를 통해 의와 구원에 도달해야 한다고 하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17쪽)고 주장한다. 이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유대교를 “행위의의 요소를 지닌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로 간주한 절충주의 노선에 서 있음을 뜻한다. 만일 1세기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의 종교라는 샌더스의 전제를 기본적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행위의(行爲義)의 요소가 들어가기(getting in) 차원이 아니라 머물기(staying in) 차원에서 발생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율법의 행위 개념이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 또는 공로를” 뜻한다는 김 교수의 주장이 그것을 말해준다. 만일 유대교의 오류가 삶의 차원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바울도 그들의 칭의 개념을 삶의 차원에서 교정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하지만 절충주의자들은 이점에서 서로 혼선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실바(M. Silva)는 유대인들 자신의 관점을 기준으로 삼아 칭의 개념을 ‘머물기’ 차원에서 정의하려고 한다. 그는 일단 1세기 유대교 사회에서 “삶과 칭의 개념들 사이에 잘 정립된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시도하는” 자들이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삶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이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야고보서의 칭의 개념). 하지만 이 견해를 따르게 되면 새 관점주의자들이 범했던 동일한 오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들어가기 차원의 구원론 개념으로 보았던 종교개혁의 칭의 개념을 머물기 차원의 교회론적, 윤리적인 칭의 개념으로 뒤바꾸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김정훈 교수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라 칭의를 들어가기 차원의 구원론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고 김 교수는 이들 질문에 대해 납득할 만한 대답을 제시할 의무가 있다:
가) 김 교수가 절충주의 노선에 따라 샌더스의 전제를 받아들인다면, 유대교는 완벽한 율법준수를 통해 언약 안에 들어가려고 시도한 종교가 아닌데도 바울은 왜 칭의를 들어가기 차원의 구원론 술어로 사용했는가?
나) 바울이 왜 머물기 차원에서 발생하는 유대교의 오류를(=윤리적 차원의 자기의 의 추구) 들어가기 차원의 믿음 칭의론(=비윤리적 차원의 신적 무죄선언)으로 교정하려고 했는가?
다) 칭의 동사가 들어가기 차원의 구원론적 술어라고 한다면, 바울은 왜 그것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의미의 조건들을 함께 결합시켜 놓았는가? 칭의 동사와 함께 쓰일 때 바울 편에서 ‘믿음’은 들어가기 차원의 구원론적 조건인 반면, 유대인들 편에서 ‘율법의 행위’는 머물기 차원의 삶의 수단이지 않는가?
라) 더욱이 믿음과 연결된 바울의 칭의 개념은 비윤리적 차원의 무죄선언의 행위를 가리킨다면, 율법의 행위와 연결된 유대인들의 칭의 개념은 윤리적 차원의 행위 의의 추구와 연관되지 않는가? 왜 칭의라는 한 개념 안에서 서로 성격이 다른 칭의 개념들을 함축해야 하는가?
(4) 만일 유대교의 근본적 오류가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시도한 데 있으며, 유대인들이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다면 언제라도 진노의 심판에 떨어질 수 있음을 역사적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경험했다면, 그들은 율법을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언약백성 된 그들의 신분을 상실할 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했거나 미래 구원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가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이러한 불안 심리를 보상하기 위해서라도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서 2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유대인 대화 상대자는 전혀 다른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들도 “죄 아래”(3:9) 있기 때문에 그들도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동일한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이런 논지의 흐름을 고려할 때 로마서 2장에 등장하는 바울의 유대인 대화 상대자는 그의 당대 유대인들의 전형적인 의식을 반영한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지혜서 저자처럼 할례와 율법 등과 같은 요소들에 의지하여 이방인들에 대해서 특권의식을 나타내고 있고 (2:17-21) 이방인과 동일한 죄를 범하면서 (2:24) 자신들은 이방인처럼 하나님의 동일한 진노의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2:3). 그렇다면 바울의 이러한 유대인 묘사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에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심리 때문에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에 매달렸다는 전통주의자들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는가? 바울의 유대인 비평의 본질은 어디에 있는가? 특권의식을 나타내면서도 이방인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범함으로 도덕적 파산상태에 빠져있다는 것인가(롬 2:24), 아니면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를 통해 행위 의를 추구하려고 시도했다는 것인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는 유대교 칭의론을 비판하는 갈라디아서에서조차 바울은 유대주의 선동꾼들이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갈 6:13)이라고 비평하지 않던가?
(5) 김 교수는 유대교의 근본적 오류가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를 통해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는 인본주의적이고 공로주의적 시도에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의와 생명 또는 영생과 멸망을 경험하는 일이나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일이 순종행위에 의존한 것으로 말하는 교훈형태는 구약의 전형적 언약신학에 속할 뿐만 아니라(겔 18:5,9; 신 30:15-20) 공관복음서(마 5:20; 19:16-17)와 바울서신에서도(롬 6:19-23; 8:13; 갈 5:19-21; 6:8; 엡 5:5) 마찬가지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유대교를 비평할 때 사용했던 동일한 기준을 구약과 공관복음서, 바울서신에 적용한다면 구약의 저자들도, 예수도, 바울도 모두 행위 의를 추구하는 오류에 빠졌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신자들도 믿음만 아니라 행위로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야고보서의 칭의 교훈은 또 다른 행위 구원론을 말하는가?
(6) 사라-하갈 알레고리를 통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유대교를 행위 의의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려는 김 교수의 해석과는 좀 거리가 먼 것 같다. 갈라디아에 침투해 들어온 율법주의자들의 ‘곡해된 도식’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유일한 길은 아브라함의 족보에 속하는 것인데, 이 족보는 시내산 언약을 받은 자들에 의해 계승되고, 시내산 언약은 다시 예루살렘 종교(유대교?)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14쪽)고 믿는 것이었다. 김 교수는 자신의 이러한 관찰이 내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스스로 잘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의 족보에 속한 자들 = 시내산 언약의 구성원들 = 지상적 예루살렘의 종교(유대교)”라는 도식이 왜 성립하는가? 이들 요소가 함께 연결되는 근본이유는 당대 유대인들이 혈통주의에 근거한 국가적 언약신학을 추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해준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계집종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을 “육체를 따라 난 자”(갈 4:23)로 규정한 데서 나타난다. 하지만 바울이 이스마엘이란 개인 이름보다 “육체를 따라 난 자”란 일반화된 표현을 쓴 것은 불신 유대인들을 공격하기 위한 의도를 나타내준다. 그들은 아브라함 언약과 시내산 언약의 연관성을 오로지 혈통 연대성의 원리에서만 접근함으로써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축복을 상속할 자들은 다른 존재들이 아니라 그의 육신적 후손들이며 지금 시내산 언약 아래 있고 지상적인 예루살렘을 구심점으로 살아가는 유대인 자신들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바울의 이러한 알레고리적 해석은 행위 의를 추구하는 율법주의적 종교로서 유대교를 비판하기 위해 고안된 장치가 아니고 (율법을 순종함으로써 언약백성답게 살지도 못하면서) 단순히 시내산 언약의 구성원에 속해 있다는 사실만 내세우면서 혈통주의에 근거한 국가적 언약신학을 붙들고 있는 유대인들이 기껏해야 인간적인 존재들이며, 또한 그들이 신앙하는 유대교는 ‘육적인’(fleshly) 종교에 불과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들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자들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지 않은가? 이것은 도리어 그들이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 = 시내산 언약 구성원 = 지상적 예루살렘의 종교의 구성원”이라는 육적인 도식에 기초해서 아브라함에게 약속된 언약의 복을 상속할 권한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함축하지 않는가? 이점에서 바울 당대의 대중적 유대교의 종교패턴은 유대교를 행위 의의 종교로 간주한 전통적 해석보다 그것을 언약적 신율주의의 종교로 본 새 관점 해석에 더 가까울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일 수 있다.
(7) 김 교수는 “이신칭의가 이방인을 유대인의 언약적 신분에 가입시키기 위한 변증 논리라는 뉘앙스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13쪽)고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로마교회 내에서 자신의 이신칭의 교리를, 이스라엘에 주어진 언약의 약속을 파기하는 방식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극단적 논리를 경계한다. 이방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신약교회가 옛 이스라엘 백성을 대체했다는 대중적 이론은 위험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란 원감람나무를 뿌리 채 뽑아버리고 그 자리에 이방 기독교인들이란 새로운 감람나무를 대신 심은 것이 아니고 이방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이란 원감람나무에 접붙임을 받아 들어온 것일 뿐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이신칭의 구원론을 후에 감람나무 비유의 전망에서 해석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8) 김 교수는 유대교가 구약과 연속과 불연속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3쪽). 구약과 유대교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불연속성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는 유대교가 행위 의를 추구하는 율법주의 종교였다는 점에서 구약과 불연속선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하지만 사실 김 교수의 논의가 진행되면서 유대교에 대한 비평은 - 그 스스로 의식을 했는지 못 했는지 불명하지 않지만 - 율법 자체에 대한 비평으로 옮겨간다. 예를 들면, “율법은 인간의 업적이나 공로를 암시한다”(12쪽), “율법과 복음 문제를 언급하는 수많은 바울서신 본문들이 이신칭의 개념을 인간의 자랑과 업적 또는 노력이라는 뜻의 율법(의 행위) 개념과 상반된 위치에 놓는다”(11쪽), “여기서 ‘율법’은 율법 준수 행위라고 하는 인간의 노력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11쪽), “율법은 단 하나를 어겨도 범법자로 규정한다”(15쪽), 따라서 “이것은 완벽한 율법 준수 행위로 의와 생명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역설적 진술이다”(12쪽). “이는 율법주의자들처럼 율법에 얽매이지 말고 복음을 따라 살라는 뜻이다”(15쪽). 사실 1세기 유대교는 여전히 속죄제사 제도의 유효성을 붙들고 있던 종교였다. 그렇다면 속죄제사의 종교로서 유대교가 완벽한 율법준수 행위를 통해서만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유대교와 어떻게 조화가 되는가? 사실 뿐만 아니라 사실 구약은 율법을 행하는 자를 ‘의인’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생명’을 약속한다(레 18:5). 그렇다면 바울의 유대교 비평의 본질은 구약 율법 자체의 어떤 면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는 의와 생명이 순종행위의 여부에 의존한 것처럼 권면하는 구약 언약신학 패턴이 구약과 유대교만 아니라 공관복음서, 이신칭의를 말하는 바울서신에서조차 광범위하게 등장한다는 데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리고 바울은 율법에 대해 부정적 시각만 갖고 있는 것이 아닐진대 김 교수의 논지 속에는 율법에 대한 바울의 긍정적 진술들이 들어설 자리가 있는가?
(9) 논평자는 종교개혁의 바울 해석의 기본적 통찰들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지만, 김 교수의 바울 해석도 여전히 여러 가지 의문점과 해석학적 난점들을 지닌 것으로 생각한다. 논평자가 제기한 질문들을 설득력 있게 답변함으로써 김 교수가 약속한 보다 원숙하고 성경적인 언약신학의 틀을 수립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출처: 한국개혁신학회 제28회 정기학술심포지엄/2010년 5월 8일/ www.reformedt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