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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요 20:27-29)

에반젤(복음) 2021. 10. 11. 10:59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 (요 20:27-29)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 시간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는 약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봐도 믿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구제불능의 사람입니다. 다음은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 가장 좋은 사람입니다. 혹은 봐야만 믿겠다는 사람, 도마와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 가장 지혜롭고 복된 편을 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 도마는 내가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고 또 예수님의 옆구리의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솔직해서 좋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토록 예수님을 체험하고도 이 딴소리 하는 제자라는 점에서 한심스런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 모습이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입니다. 답답할 때 말씀을 믿기보다 체험을 더 요구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도마에게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보여주시며 손을 넣어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셨습니다.

 

왜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더 복될까요?

 

1. 보고 믿는 것은 불신앙이기 때문입니다.

 

25절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도마의 말은 부활을 단순히 믿지 못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에는 불신을 넘어서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일종의 악의적인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변했을까요? 우리도 세상소리 많이 들으면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성경에서 도마를 소개하면서 “디두모라는 도마”라고 소개합니다. 이 소개는 우리에게 뭔가 그의 배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두모란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한 사람은 제자지만 한 사람은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도마는 누구보다 세상의 소리를 가깝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 팔 일 전이면 20:19에 나오듯 안식 후 첫 날 저녁 다시 말하면 주일입니다. 그 날 도마는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그 날 제자들이 모였다는 것을 예배를 암시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도마가 예배시간에 예배 안 드리고 무엇을 했을까요? 주일날 예배 안 드리면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도마는 그 시간에 세상을 보고 듣고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도마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를 실망시키고도 남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이며 제자들이 시체를 도적질해 가서 거짓말로 꾸민 것이다.' 라는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도마가 보더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고 온통 악인이 득세합니다. 거기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람들은 숨어 숨조차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왕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과연 메시아이시고 살아나셨다면 이런 일이 난무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에 대해 속은 것도 같고 그는 밖에서 돌아가는 세상 소리만 듣고 그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습니다.

 

우리 속담에 콩으로 메주를 쑨다 해도 믿지 못하겠다는 불신앙으로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서야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그런 어처구니없고 악의적인 말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 것 보고 들으면 그런 소리가 나와요.

 

요즘 세상이 비방하는 것을 보면 흰 것도 검다하고 검은 것도 희다 하는 세상입니다. 이것이 진실인 양 함께 맞장구치고 춤춥니다. 네로가 자기가 로마시를 불질러놓고 기독교인들이 했다고 강제자백을 받고 선포하니 로마시민들은 그 말만 믿고 기독교인들을 증오해 원형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을 죽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소리 들으면 우리의 믿음도 그렇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홍해 앞에서 닥친 현실만 보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가데스에서도 그랬습니다. 가데스에서 부정적인 보고한 열 명의 정탐들의 말만 듣고 모세를 대적했습니다. 광야에서도 모세가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고 금송아지를 만들고 물 없다 원망했습니다. 이렇게 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 때문에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잘못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12:39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 하셨고, 고전1:22에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그러나 표적을 봐야 믿겠다는 것은 불신앙입니다. 초신자이거나 완악한 자일수록 표적을 많이 보여주시는데 그동안 충분히 표적을 보여주셨으면 이제는 표적이 있든지 없든지 믿어야 할 것이 아닙니까?

 

2. 보는 것으로는 너무 제한적이기 때문입니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의심 많은 도마에게 주님은 못 자국 창 자국을 다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가 보고 만진 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촉각과 시각으로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체험해서 알았으니 그것도 복은 되지만 성경을 읽고 그 안에 기록된 수만 가지의 약속을 그대로 믿어 누리는 그 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제한적입니다.

 

롬5:2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듯 이 모든 은혜를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누린 결과입니다. 표적이 없어도 주님의 약속과 공로를 믿고 감사함으로 서서 바라고 즐거워하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믿고 감사할 때 실재를 누립니다.

 

뇌성마비 송명희 시인은 일곱 살까지 일어날 수 없었고 열 살이 되어서야 겨우 숟가락을 혼자 쥘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죽으려고 했지만 모태신앙으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마침내 열일곱 살 때 그녀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필사적 금식기도를 드립니다.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많은 것을 깨닫고 시를 지었습니다.

 

그 중에 ‘나’란 시가 있습니다.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남이 갖고 있는 것 갖지 않았으나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으며 남이 받지 못한 사랑 받았고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남이 가진 것 나 없지만 남이 없는 것을 갖게 하셨네.” 송명희 씨가 도마처럼 자기 몸의 상태만 보았다면 이런 은혜를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3. 보고 믿는 것은 심히 가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9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보고라도 믿는다면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안 보고 믿는 것보다 못합니다. 덜 복될 정도가 아니라 가혹하고 혹독하기까지 합니다. 천국을 확실히 봐야 믿겠다고 하다가 병으로 사고로 천국과 지옥을 보여주신다면 얼마나 가혹한 일입니까?

 

어느 목사님이 날마다 천국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다 알코올 중독된 기사가 몬 버스에 부딪혀서 지옥과 천국을 보게 되었고 만신창이로 응급실에서 살아났습니다. 그 분이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런 일을 당하게 해서 저를 부르셨나요? 그랬더니 네가 날마다 그렇게 기도했지 않느냐 하더랍니다.

 

그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그런데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목소리가 좋지 않아요. 천국 다녀왔다면서 왜 목소리가 저럴까? 최근에 또 전화가 왔는데 이번에는 아주 밝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 교통사고 후유증 때문에 몸이 좋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좋은 방법 주셔서 건강해졌다고, 아 그래서 목소리가 밝지 못했었구나. 얼마나 컨디션이 안 좋았으면 목소리가 그러겠습니까? 이처럼 체험 다하고야 믿겠다면 우리 몸은 열 개라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십일조의 진리를 믿지 못해 십일조의 기적을 체험하고 믿겠다고 버티다가 하지 않다가 부도라도 나면 얼마나 고통스럽습니까? 현대종교 탁명환목사님의 강의가 기억납니다. 탁목사님께서 귀신의 존재를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얼마나 하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만나게 해주시는지 한 동안은 날마다 귀신 쫓아내려 다니다가 할 일을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씀대로 믿는 것이 더 복됩니다. 최고의 신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말씀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17:11에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의 사람들도 신사적이었는데 베뢰아 사람들은 더 신시적이었습니다.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체험 따라가다가는 실족하기 때문입니다.

 

마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세상의 넓고 편한 길 따라가다가는 멸망으로 가는 길입니다.

 

보고 듣는 것으로 행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체험에 의존하다가는 사탄의 시험에 빠지기도 합니다. 하와도 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고 말았습니다. 체험에 의지하면 육체의 장막집이 무너질 때 실망할 날이 옵니다. 우리의 환경이 칠흑 같이 어둘지라도 하나님의 불변의 말씀에 서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말씀에 의지하여 보이는 것처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우리 주님은 그 무엇보다 기록된 말씀으로 사심으로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마와 같이 보고 믿겠다는 어리석은 불신앙 다 내어버리고 하나님과 그 말씀에 서서 그 약속을 모두 믿고 순종함으로 평안한 중에 모든 것을 누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영국에서 하나님은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회의가 있었다. 먼저 천문학 박사가 강연을 시작했다. "얼마 전에 저는 최신형 망원경을 갖게 되었는데 이 망원경은 현재 우리가 발견한 가장 멀리 있는 별도 볼 수 있는 고성능 망원경입니다. 그런데 이 망원경으로 아무리 천체를 살펴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하나님의 옷깃이라도 보여야 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래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 그러자 많은 청중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맞아! 하나님 없는 게 틀림없어!'

 

두번째 강연자는 의학박사였다. 말하기를 나는 평생을 의학을 연구하며 살았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을 수술했으며 시신을 부검해 본적도 한 두 번이 아닌데 한 번도 영혼을 본적이 없습니다. 도대체 영혼이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살 속에 있습니까? 뼛속에 있습니까? 아니면 핏속에 있습니까? "역시 그렇군," 기독교인 들이나 성경은 다 거짓이야! 도대체 영혼이 어디에 있단 말이야?" 수많은 청중이 큰소리로 환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연이 끝나고 사회자는 "그러면 이것으로 하나님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회의를 마칩니다". 라고 말했다.

 

그때 맨 앞에 앉아있던 할머니가 "제가 할 말이 있습니다"라고 하더니 연단위로 올라갔다. 할머니는 먼저 천문학박사께 질문했다. “박사님. 박사님이 갖고 계신 그 망원경은 아주 고성능 망원경이죠? 그렇다면 바람도 보입니까?” '바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바람이 없습니까?" ''있습니다.'' "어떻게 있습니까? 보이지도 않는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다고 하는 것은 옳은 말입니까?" "또 바람도 볼 수없는 망원경을 갖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까?''천문학 박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할머니는 의학박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박사님은 아내와 자녀가 있습니까?‘ ’예 있습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십니까?'' "예, 제 아내와 자식 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칼을 가져오세요. 내가 박사님을 해부해서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어디에 들었는지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그 사랑이 어디에 들었는지 뼈에 들었는지 살에 들었는지 봅시다'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모였던 이 회의는 한 할머니의 급소를 찌르는 송곳 같은 질문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증명하는 회의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