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구약 성경강해***/- 창세기 강해

창세기6장 강해설교

에반젤(복음) 2019. 7. 7. 06:01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창6:14)


고대에 전 세계적인 대홍수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 리가 없다는 속담대로 세계 어느 곳을 가도 그런 전설이 없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성경이 바벨론의 전설을 빌려 왔기에 사실이 아니라고 매도합니다.

그들의 비판은 본말을 전도한 것입니다. 모든 민족마다 동일한 설화가 전래되어 왔다는 사실에는 굳이 귀를 막습니다. 성경이 바벨론 설화를 베꼈으므로 성경 자체를 믿을 수 없다는 궤변만 늘어놓는데 그럼 홍수 자체도 함께 부인됩니다. 이는 빈대 잡으려다 집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 아예 작심하고 집을 태우려고 빈대를 핑계 삼아 집에 불붙인 꼴입니다.

동일 사건을 두고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른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이유는 각 민족 특유의 문화나 사고에 따라 해석이 달랐기 때문일 뿐입니다. 바벨론 설화와 성경 기사 간에 많은 차이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노아가 지은 배가 방주(方舟)였다는 사실입니다.

방주란 말 그대로 장방형(長方形)의 직육면체로 블록 쌓기 막대 같은 모습입니다. 도저히 배(ship)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바벨론 설화에는 전형적인 배가 등장합니다. 즉 전자는 항해가 불가능해 물에 떠다니기만 하는 반면에 후자는 스스로 방향을 잡아 운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용도가 생존(survival)과 항해(sail)로 극명하게 나눠집니다. 따라서 성경은 대홍수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 반면에 바벨론 설화는 우연히 일어난 자연재앙이었다고 본 것입니다. 동일 사건을 두고 한쪽은 신본주의 다른 쪽은 인본주의의 잣대를 갖다 댄 것입니다.

현대 지질학자들은 그때 세계적인 해저 화산폭발로 대규모의 지각변동이 수반되었고 자연히 엄청난 크기의 쓰나미가 도처에 나타났다고 분석합니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7:11) 대홍수 때에 하늘에서만 비가 내린 것이 아니라 땅 밑의 샘이 터져 엄청난 해일이 덮쳤다고 오직 성경만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인간 힘으로 항해하려는 배들은 산산조각 났을 것입니다. 또 당시 해변에 몰려있던 배들은 순식간에 덮친 파도로 다 부셔졌겠지만 평지에 지어 놓은 방주는 안전할 수 있었습니다.

나아가 노아 방주의 장(長), 폭(幅), 고(高)는 현대의 첨단 조선술로 따져도 가장 파도에 잘 견디며 전복되기 힘든 최상의 비율이라고 판명되었습니다. 그만한 대홍수를 충분히 견뎌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고대의 원시 조선술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역학적 구조였습니다. 후대의 유대인들이 임의로 수치를 지어내어 기록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꿔 말해 노아의 방주가 아니고는 당시 어떤 배라도 그 엄청난 파도를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성경 기록이 신비롭지 않습니까? 만약 유대인들이 단순히 전해져 내려오는 홍수 전설을 자기들 종교 사상에 근거해 하나님 심판으로 지어내려 했다면 배 모양을 방주로 상정(想定)했을 리는 만무합니다. 그것도 최고 역학 구조를 지닌 방주로 구체적 수치까지 동원해서 말입니다. 최대한 양보하여 수치는 비슷한 비율을 가정할 수 있다 쳐도 배 모양을 장방형이라고 표현하면, 그 자체로 당시부터 엉터리라고 비난받았을 것입니다. 아니 기록하는 당사자들조차 배가 장방형이라니 아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성경의 정미함을 나타내는 또 다른 기록들을 봅시다.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네게로 나아오리니...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6:20,7:9) 노아가 짐승을 종류별로 도무지 수집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동물을 종류별로 불러내어 방주 속으로 들어가게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7:16) 방주가 너무 커서 문을 안에서 닫기가 힘들어서 하나님이 밖에서 닫아주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 그보다는 하나님이 살리실 종류를 정하여 당신께서 다 이끌어 방주로 들어가게 했기 때문입니다. 노아로선 동물을 자기가 수집한 것이 아니기에 언제 문을 닫아야 할지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구원할 대상을 정하여서 구원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이처럼 현대 첨단 과학자들도 경탄할 정도의 세미한 기록이 과연 수천 년 전의 유대인의, 여전히 현대의 지식수준과는 엄청나게 차이나는, 상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겠습니까? 성경 외의 모든 설화에는 방주, 배의 수치, 지각변동 등의 내용은 아예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바벨론의 설화를 빌려와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이방인을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유대인들의 자존심이 아예 허락지 않은 일입니다.

혹시라도 모든 민족에게 홍수 설화가 있기에 노아 가족 외에 생존한 인간들이 많았을 것이라고 의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아 후손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져 민족을 이루었기에 자연히 선조들로부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간 것뿐입니다. 세계 모든 홍수 설화의 출처는 바로 노아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후손들이 바벨론 설화처럼 인간 위주의 내용으로 각색한 것입니다. 반면에 유대인들만은 사실을 사실 그대로 기록했던 것입니다.

물론 노아나 1-2대 후손들이 과학논문 작성하듯이 기록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후대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모세에게 성령이 영감을 주어서 인간으로선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이야기를 기록하게 한 것입니다. 노아 홍수를 이렇게 세밀하게 기록할 수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역으로 그 진실성이 입증되며 동시에 성경도 하나님의 말씀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방주라는 표현은 이곳 외에 오직 한 곳에만 더 등장합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출2:3) 모세의 생모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죽이라는 애굽 왕의 명령을 어겨가며 아들을 살리려고 갈 상자에 담아 나일 강에 떠내려 보냈습니다. 본문의 ‘상자’가 바로 노아의 ‘방주’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노아나 모세나 인간으로선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없었기에 오직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의 구원을 완전히 맡겼던 것입니다.

결국 노아의 방주나 모세의 갈 상자는 무엇을 예표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입니다. 인간이 스스로는 절대로 죄와 사단과 사망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를 붙들고 자신의 전부를 그분에게 바쳐야만 합니다. 노아, 모세, 예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 오직 십자가로 초점이 모아집니다.

전혀 다른 시대와 환경에 살았기에 단 한 번도 의논할 수 없었던 인간 저자들이 너무나도 정확하고 세밀하게 인간 역사에 드러난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을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성적 합리적 분석으로도 그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홍수로 죄인을 심판하고 그 가운데 방주를 통해 당신의 은혜로만 구원을 베푸셨다는 성경의 선언 말고는 말입니다.

지금 성경 기록의 진정성만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스스로를 죄인이라 철저히 자각해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구하는 자는 노아의 방주를 믿을 뿐 아니라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자기는 의인이라 예수의 은혜가 전혀 필요 없다고 자부하는 자는 방주를 믿지도 않을 뿐 아니라 탈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선 온갖 험난한 세파 속에서 자기가 만든 쪽배를 타고 죽을 때까지 힘겹게 노를 젓고 또 수시로 닥치는 산더미 같은 해일에도 스스로 맞서려고 아등바등 할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주님의 방주 안에 타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