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舊約)의 오역(誤譯)/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생령인가 산 목숨인가?창 2:7에서 번역한 ‘생령’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살아 있는 영’이라는 뜻이 되는 데 그렇다면 영(靈)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하는 존재인가? 라는 의문을 낳게 한다.생령(生靈)은 히브리어 네페쉬 하야 (??? ???)를 번역한 말인데 네페쉬 하야라는 말은 ‘살아 있는 영’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목숨’이라는 뜻으로 우리말로는 ‘산 목숨’ 또는 ‘산 존재’라고 번역해야만 했을 것이다.(참고로 히브리어는 한문처럼 우측에서 좌측으로 쓰고 읽는다는 것을 알아두자). 한편 고전 15:45에서 ‘산 영(靈)’으로 번역한 프쉬케 조산(ψυχ? ζ?σαν) 역시 같은 뜻의 헬라어로서 ‘산 목숨’의 오역인 것이다.우리의 번역과 달리 KJV 등의 영어 성경은 창 2:7의 네페쉬 하야와 고전 15:45의 프쉬케 조산을 Living Spirit(산 영)이 아닌 Living Soul(산 목숨)로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 네페쉬(???)와 프쉬케(ψυx?)를 영어로는 항상 Soul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목숨’ 또는 ‘생명이 있는 존재’라는 뜻이며 ‘영’이라는 뜻을 가진 Spirit이나 Ghost와는 전혀 다르다.네페쉬(프쉬케)는 ‘목숨’과 ‘생명’이라는 뜻과 함께 ‘생명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생물’로 번역될 때도 있고 ‘사람이라는 존재’ 특히 ‘사람 자신’을 표현할 때도 많이 사용되어진다.그러나 우리의 개역 성경은 이러한 구분 없이 네페쉬(프쉬케)를 ‘목숨’과 ‘생명’이라는 원 뜻에 맞게 번역하기도 하다가 때로는 영(靈), 혼(魂) 또는 영혼(靈魂) 등으로 혼용하여 번역하기도 함으로써 종잡을 수 없게 하고 있다. 개역 성경이 이처럼 네페쉬(프쉬케)를 일관된 뜻으로 번역하지 않고 다양하게 번역한 것은 단어의 개념의 발전과는 무관하며, 단지 용어의 혼용의 대표적 사례일 뿐이다. 게다가 개역 성경에 ‘혼’이나 ‘영혼’이라는 용어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중국어 성경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다.동양권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의 혼백(魂魄)이 몸을 떠나서 귀신이 된다고 하는 속설이 지배적이며 이 혼백을 줄여서 혼(魂)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혼에 대한 이러한 개념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영(靈)과는 완전히 다른 것인데도 개역 성경은 도처에서 ‘영’과 ‘혼’ 그리고 ‘영혼’이라는 용어를 혼용함으로써 올바른 성경 지식을 가질 수 없게 하고 있다.영혼의 정확한 뜻은?개역 성경은 특히 영혼(靈魂)이라는 말에 대하여 심하게 혼용을 하고 있다. 즉 영혼이라는 말이 어느 경우에는 ‘목숨(Life)’이나 ‘사람(Soul)’의 뜻으로 사용되다가 또 어느 경우에는 ‘영(Spirit)’이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등 매우 혼란스럽게 번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시편에서 이러한 예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시 22:20에서“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라고 할 때의 ‘영혼’은 네페쉬를 번역한 것으로 사실은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라고 해야 정확한 번역이 되었을 것이다. 네페쉬(Soul)는 ‘목숨’, ‘생명’ 또는 ‘사람 자신(自己)’이라는 뜻인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번역된 곳이 드물고 시편에서처럼 대부분 ‘영혼’이라는 말로 많이 번역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영혼’을 ‘목숨’과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 된다. 한편 시 143:7에서“여호와여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내 영혼이 피곤하니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을까 두려워하나이다”라고 할 때의 ‘영혼’은 루아흐를 번역한 말이므로 원 뜻은 ‘내 영이 소멸되려 합니다(육체를 떠나려 합니다 곧, 죽을까 합니다)’가 된다. 사실 영혼이란 표현은 위와 같이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어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 동안의 언어 관습으로 굳이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면 ‘목숨’이나 ‘사람’의 뜻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영(靈)’을 뜻하는 말로도 사용함으로써 계속 이중적 의미를 가지는 혼란스러운 용어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왜냐하면 영혼이 목숨의 뜻을 가지는 성경의 번역 용례가 매우 많은 데다가 찬송가에도 그렇게 사용된 것이 많기 때문이다. 아울러 영혼(靈魂)에서 혼(魂)이라 하는 말의 뉘앙스(Nuance)가 타락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하고 있는데 영(靈)은 ‘사람의 영’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도 적용되는 말이므로 이를 영혼으로 대치하기에는 부적합하기 때문이다.‘목숨’과 ‘영’이란 용어의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존재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 시작해야 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존재에 관한 논의는 ‘영’과 ‘몸’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이분설(二分說)과 ‘영’과 ‘혼’과 ‘몸’의 세 종류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삼분설(三分說)로 대립되어 있는데 정통적으로는 이분설이 지배적이었다.그러나 비교적 근래에 지방 교회주의자인 ‘위트니스 리’와 같은 신학자들과 일부 천 년 왕국론자들이 주장하는 삼분설이 대두되기 시작하면서 용어에 대한 혼란이 가중되었는데 이는 살전 5:23에 나타나는 혼(프쉬케)이라고 표현한 어휘에 대한 오해로 인하여 발생된 것이었다. 원어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결여될 때 새로운 추론에 의한 학설은 계속 생성되어지게 마련이며, 성경 전체를 체계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어느 특정한 말씀에 집착할 때 이상한 교리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사람의 구조인간의 구조에 대하여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창 2:7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즉“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라고 하는 말씀을 보면 사람의 구조는 흙으로 이루어진 몸과 더불어 생기(生氣)라는 두 가지의 구성요소로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생기란 히브리어로 니쉬마트 하임(???? ????)인데 직역하면 ‘생명들의 호흡’이다.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말씀은 사람의 몸 안에 영(靈)을 넣으심으로 산 존재를 만드셨다 뜻이다. 즉 다른 모든 동물은 생기를 받지 않고 말씀으로만 창조되었지만 사람만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을 받았기 때문에 영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영은 히브리어로 루아흐(???)이며 헬라어로는 프뉴마(πνε?μα)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영이라는 존재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을 사람에게 부어주신 것으로서 피조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불멸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된다. 따라서 물질로 이루어진 몸은 언젠가 죽어 없어지더라도(전 3:20) 비물질적인 존재인 영은 몸과 함께 소멸되지 않고 몸에서 분리되어 위로 간다(전 3:21)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전 3:21에서 인생의 ‘혼’으로 번역한 루아흐는 물론 ‘영’의 오역이다.다시 창 2:7의 구절을 살펴보면 사람의 몸에 영이 합쳐져서 산 목숨이 되었다고 하였다. 즉 사람은 몸이 영과 결합되었을 때 살아있는 존재이며, 몸에서 영이 분리된다면 죽은 상태가 된다. 그러므로 설령 죽은 자라고 하더라도 그 죽은 자의 영이 다시 돌아와서 그의 몸과 재결합할 때는 죽은 자가 부활하여 다시 산 자가 된다는 것은 성경의 예(겔 36:5, 눅 8:55)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한편 몸은 히브리어로 게쉠(???)이라고 하고 헬라어로 소마(σ?μα)라고 하는데 엄밀히 말해서 몸(Body)은 다시 육체(Flesh)와 구분되어지는 말이다. 우리말에서는 몸과 육신 또는 육체를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는 경우가 흔하나 히브리어와 헬라어에서는 두 용어를 반드시 구분해서 사용한다.육체는 히브리어로 바싸르(???)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사르크스(καρδ?α)라고 하여서 몸과 반드시 구별을 한다. 몸은 육체에 무엇인가가 더하여진 상태인데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이다. 즉 육체는 글자 그대로 고깃덩어리의 상태로서 그곳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본능과 정욕의 산실일 뿐이며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기에는 부적합한 장소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지은 육체의 어딘가에 사람의 영을 담아둘 장소를 마련해 주셨는데 그곳이 바로 마음인 것이다.마음은 히브리어로 레브(??)이며 헬라어로는 카르디아(καρδ?α)라고 하는데 육체 속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물질적인 공간이 아닌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존재이므로 특정한 위치를 구별해 낼 수는 없으나 사람의 영이 담겨져 있는 장소이며 구원받은 자에게는 성령도 함께 계시는 곳(고후 1:22, 갈 4:6)도 된다.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사람은 몸(게쉠, 소마)과 영(루아흐, 프뉴마)으로 이루어지는데 몸과 영이 결합됨으로써 목숨이 있는 상태 즉 생명의 존재(네페쉬, 프쉬케)가 되며 몸에서 영이 떠나는 상태가 죽음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몸은 다시 육체(바싸르, 사르크스)와 마음(레브, 카르디아)으로 구분되며 사람의 영이 거하는 곳은 마음이다. 이를 간단한 표로 나타내 보면 다음과 같다.삼분설의 오류살전 5:23에서 ‘혼’으로 번역한 프쉬케(ψυχ?)는 ‘목숨’의 오역이다. 즉 삼분설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과 몸 이외에 혼이라고 하는 별도로 구별되는 어떤 제3의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영과 몸이 결합하여 이룬 상태를 ‘목숨’ 또는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그와 같이 표현한 까닭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아야 한다.데살로니가 전서는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가지고 있던 잘못된 종말관과 주님의 재림에 대한 오해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보낸 편지인데 특히 4장과 5장에서는 집중적으로 이러한 주제에 대하여 교훈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다 읽어보면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 중에는 주님이 갑작스럽게 오시리라는 말씀을 오해하여 이 땅에 이미 임하여 완성으로 향해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신실한 삶보다는 다가올 종말을 고대하며 들떠있는 자들이 많았었던 것 같다(살후 2:2).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기다리는 종말과 주의 재림은 이 세상 끝에 있을 최후 정점의 종말을 기대하는 것이었으나, 바울의 교훈은 최후 정점의 종말이 아닌 구약의 모든 예언서와 신약(마 24:2-3)에서도 예언되어졌던 ‘주의 날’에 대한 것이었다.그 날은 ‘여호와의 두려운 날’이요 ‘야곱의 환란의 날’인 예루살렘 멸망(AD 70년)의 날인데, 당시로 볼 때 그 날까지 대부분 생존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십 수 년 이내에 실제적으로 겪게될 상황이므로 매우 긴장되고 실감 있게 묘사한 것이다.그러므로 바울은 종말을 맞게될 자들로서 ‘우리 살아 남은 자’라는 표현을 계속해서 사용하고 있으며, 살전 5:23에서는 당시의 데살로니가 교인들인 ‘너희들’을 향하여 주께서 예루살렘 심판의 심판주로서 오실 때에 ‘영과 몸’ 곧 ‘목숨(프쉬케)’을 보존하고 있기를 원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이는 주님이 문자적으로 지상에 강림하시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집행하시는 심판주로서의 엄위를 가지고 영적으로 오시는 상태(마 26:64, 살후 1:7-8)를 말하며, 그 날이야말로 육적 이스라엘에게는 심판 받는 경악의 날(사 13:9-16)이 되겠지만 영적 이스라엘인 너희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세워지는 환희의 날(마 24:31, 욜 3:16-17)이 될 것이므로 그 때까지 너희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있으면 좋겠다는 바울의 소원을 말한 것이다.종말에 대해서는 예언과 묵시기록의 두드러진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상징(Symbol)과 메타포(Metaphor)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다른 오역(誤譯)인 눅 21:35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좀더 구체적으로 강론하기로 하고, 다만 여기서는 심판(크리시스, κρ?σι?)과 재림(파루시아, παρουσ?α)에 다중적(多重的)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해둔다.이상에서 살펴본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성경은 불변의 진리이며 모든 세대의 신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으로서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영적 교훈을 담고 있지만, 서신서들은 특별히 수신자들이 속한 교회와 공동체에 대하여 당시의 정황에 부합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사람의 죽음의 원인이제까지 사람의 구조를 살펴본 바로는 사람의 몸에 영이 결합되어 사람이 사는 것이며 사람의 몸이 더 이상 영을 담아둘 그릇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면 영은 그 몸을 떠나게 되고 남은 육체는 소멸되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사람의 몸은 원래 일정 기간이 지나면 기능을 더 이상 못하도록 창조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생겼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반드시 죽을 존재로 창조하셨는가 하는 문제이다.“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라는 말씀을 보면 사망(따나토스,θ?νατο? )과 영생(조에 아이오니아,ζω? α?ων?α)을 대비시키고 있으며 또한 사망의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이 저지른 죄(하마르티아,?μαρτ?α)의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죽음이 오지 않았다는 말도 되는 것이다. 하마르티아라는 말은 부정 접두어 아(?)가 과녁이라는 뜻의 마르티아(μαρτ?α)에 붙어서 된 말로 원 뜻은 ‘과녁을 맞추지 못함’이다. 이로 볼 때 하나님 뜻에서 빗나간 것이 죄인 셈이다.한편 성경은 롬 3:23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죄인(하마르톨로스,?μαρτω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왜 모든 인간들은 죄인이 되었는가?그것은 롬 5:17-18의 말씀에서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 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라고 함으로써 인간들이 제각기 저지른 개별적인 죄가 아니라 최초 인간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그의 후손된 모든 자가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그렇다면 사망의 결과를 낳은 그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롬 5:19에서“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라는 말씀에는 불순종(아페이떼이아,?πε?θεια)이 바로 죄라고 하고 있다. 사람이 만일 불순종의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영생할 수 있었다는 가정은 쉽게 할 수 있다.창 2:16-17의 말씀을 보면“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선악과(정확하게는 知善惡果)만 먹지 않는다면 죽지 않을 수 있는 길이 분명히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죽는다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뜻인데 혹자는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영이 죽는 것을 뜻한다고 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영이라는 것은 죽지 않는 존재이므로 영이 죽는 것이 아니고 다만 ‘영적으로 죽는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그것은 ‘영의 타락’을 의미하는 것이다.창 3:17-19에서도“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 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라고 함으로써 불순종에 대한 대가로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영생의 기회 상실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흙이라는 물질로 몸을 만드시고 그 안에 영원히 소멸치 않을 존재인 영을 넣어주셨다. 인간이 그 상태로 영생하기에는 불완전하였지만 그렇다고 필연적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도 아니었다. 첫 인간 아담에게는 영생과 죽음 중에서 택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는 불순종의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미리 경고하신 대로 죽을 몸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결국 몸은 다시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며 영은 몸을 떠나 음부(쉐올,????또는 하데스,?δη?)에서 심판 때까지 대기하고 있다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할 존재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불순종의 대가는 그것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후손들에게 죽을 몸을 물려줌으로써 전 인류에게 사망의 선물을 안겨주고 만 것이다.인간의 타락 후 하나님께서 그들을 에덴 동산에서 내어쫓고 다시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어 생명 나무로 가는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은 창 3:22의 말씀처럼 타락한 인간이 영생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음이다. 그러므로 만일 인간이 선악과 대신에 생명과를 먹었다면 고전 15:44에서와 같은 죽지 않는 신령한 몸(소마 프뉴마티코스,σ?μα πνευματικ??)이 되어 영과 결합함으로써 영생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다시 말해서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아니하고 생명과를 먹은 후 영생의 존재가 되어서 창 1:28에서 최초에 주신 명령에 따라 에덴 동산에서 많은 자손을 낳고 번창하였더라면 하나님께서 그 일정한 수의 경건한 자손(말 2:15)을 얻으신 후에 그들로 영원한 하늘 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살아가게 하셨을 것이다.그러나 첫 인간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죽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충만한 수의 인간(롬 11:25)을 얻으시기 위해서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뤼트로시스,λ?τρωσι?, Atonement)의 죽음을 통한 희생 제사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요일 5:20에서 말씀하듯 영생 그 자체이신 분(요 11:25, 요 1:4, 롬 6:23)이므로 죽으실 수가 없는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이신 주님은 일시적으로 피조물인 인간의 몸을 가지셔야 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이 모든 일들을 다 알고 계셨지만 인간의 타락을 비롯한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작정하심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작정하셨다는 것은 쉬운 말로 각본을 만들었다는 것인데 만일 그렇다면 인간은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로 각본에 따라 타락한 것이며 현존하는 모든 악도 하나님께서 조성하신 것이고 인간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드리기 위하여 죄를 짓는 것일 따름이므로 인간의 행위에 따라 심판하신다고 하는 하나님의 공의의 근거가 없어지고 말게될 것이다. 또한 각본에 따라 불순종한 인간들에 대하여 그 대가로 불못 형벌에 처하신다고 하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하나님께서 ‘미리 다 알고 계시다’는 것과 ‘작정하셨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말인 것이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시므로 인간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불변하는 영원한 현재에 오직 동시적 현재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는 시간상의 순서라는 것이 없고 모든 것이 동시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형질과 각 인생마다의 최종적인 결과를 미리 다 알고 계시므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미리 알고 계신 그대로 모든 것이 같은 결과를 이루도록 역사에 개입하시는 것이다.따라서 ‘작정’이나 ‘예정’이란 용어는 인간의 이해를 돕기 위한 특정한 언명일 뿐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시간의 흐름 안에서 논리적 순서에 따라 섭리하시는 분으로 제한시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런 생각이 되고 만다.이제 우리가 이러한 충분히 가능한 추론으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지식은 인간의 타락을 비롯하여 믿고 순종함으로써 영생을 얻는 일과 불신의 결과로 멸망 받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함으로써 아무리 교묘하게 말을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과적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있는 운명론적 신학적 사고의 오류를 재고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과 예정에 관해서는 신약편 요 17:2의 오역을 다루면서 더 자세히 논의하기로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