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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구약개론 연구

에반젤(복음) 2021. 8. 27. 11:55

구약개론 연구

01. 구약개론

02. 오경개론

03. 예언서개론

   

 

01. 구약개론

 

 

구약은 어떤 책인가?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구약이란 성경의 첫 번째 부분이라는 점이다. 구약은 성경의 나머지 부분인 신약보다 대략 세 배 이상 길다. 성경은 언약을 의미하는 라틴어 '테스타멘툼'을 따라서 구약과 신약으로 불린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맺으신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해서 말한다. 그 백성이 바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고 신약에서는 기독교 공동체인 교회이다.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기독교인과 유대인이 모두 구약을 거룩한 말씀으로 간주한다는 사실과 그들이 서로 이 기록을 다르게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문제는 조금 복잡해진다. 기독교인들은 대체로 구약이 신약에서 성취되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신약이 없다면 구약은 불완전한 기록이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구약 자체를 완전한 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구약을 히브리어 성경이나 히브리어 성서란 말로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왜냐하면 아람어로 기록된 「다니엘」 일부와 「에스라」를 제외하고는 이 책들이 모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이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모두 수록하고 있는 까닭에, 우리는 편의상 기독교인의 명칭인 "구약"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유대적인 용법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구약의 구분

대인과 기독교인은 성경의 각 책을 배열하고 인쇄하는 순서에서 서로 다르다. 유대인은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라는 옛 히브리적인 구분을 지키고 있다. 예언서는 다시 전기 예언서(「여호수아」에서 「열왕기하」)와 후기 예언서(「이사야」에서 「말라기」)로 세분된다. 때때로 소 예언서라고 불리는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책들은 유대인 뿐 아니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히 「열두 권의 책」으로 알려져 있다(자세한 것은 "성경책 각 권의 이름과 순서"를 보라). 이런 구분은 대체로 이스라엘에서 그것들이 권위 있는 말씀이나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된 역사적 순서를 따른 것이다. 히브리어 정경은 예수 시대에 사실상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

 

기독교 성경책의 배열은 이렇지 않다. 기독교 성경책은 초기 교회가 폭넓게 받아들였던 옛 그리스어 역본과 라틴어 역본의 순서를 따르고 있다. 기독교 성경책은 역사서(「창세기」에서 「에스더」), 시문학(「욥기」에서 「아가」), 예언서(「이사야」에서 「말라기」)를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70인역본이나 불가타 같은 고대 역본의 구약에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없는 책들이 많이 들어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이런 책들을 제2 경전이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두 번째 정경에 속하는 책이라는 뜻이다.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을 히브리어 성경과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 개신교도들 가운데서도 제2 경전이란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개신교도들은 전통적으로 이 책을 "감춰진 책"이란 뜻에서 "외경"이라고 부른다. 동방정교회는 주로 그리스어 용어인 '아나기노스코메나'를 사용하고 있다. 그 뜻은 "읽혀야 되는 책"이다. 이것은 동방정교회가 이 책을 교회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으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대한성서공회는 1977년 외경을 수록한 성경책을 가톨릭 교회와 함께 출판하였다. 이 때 외경은 구약과 신약 사이에 독자적인 묶음으로 삽입되었다. 이 외경은 특별히 구약의 후반부에 묘사된 유대인의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구약의 형성

 

 

히브리어 구약을 이루는 39권의 책들은 천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형성되었다. 원래는 이야기와 전승이던 것이 구전으로 여러 세대를 거쳐서 전수되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많은 이야기와 전승이 글로 옮겨지기 시작하였고 작은 수집물 형태로 정리되었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구약에 언급된 「야살의 책」(수 10:13; 삼하 1:18), 「솔로몬의 실록」(왕상 11:41),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왕상 14:19 등)과 「유다 왕 역대지략」(왕상 14:29 등) 같은 책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이와 비슷한 형태의 수집물이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도 토대를 이루고 있다. 아브라함 이야기(창 12-24장)나, 야곱과 그 자식들 이야기(창 27-50장) 같은 것들이다. 십계명(출 20:3-17; 신 5:7-21)은 그것이 현재 자리에 배치되기 훨씬 이전에 이미 독자적으로 존재했던 본문일 가능성이 크다. 「시편」이나 「잠언」은 각각 여러 사람이 쓴 것을 수집해 놓았음을 밝히고 있다(시편과 잠언에 대한 개론을 보라). 그것은 보다 큰 수집물인 예언서와 「열두 권의 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문제

 

 

구약의 저자가 누구인지를 생각하려고 할 때에, 우리는 구약이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소요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에는 한 작가가 한 책을 쓰는 것이 하나의 관행처럼 굳어버렸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하거나 활용할 때 그 글의 출처를 밝혀야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면서 누군가가 쓴 글을 저작권으로 보호하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이같은 상황은 구약 시대에서는 판이하게 달랐다. 어떤 한 부분을 기록한 사람은 전체를 기록하신 분으로 여겨지는 하나님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졌다. 어떤 기록이 거룩한 말씀으로 간주되는 일에서 원래 그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이냐를 묻는 질문이란 그렇게 긴요하지 않았다. 이 말씀을 보존하게 된 중요한 이유는 신앙공동체가 자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에스겔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설교하고 외치는 이들이었지 결코 작가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모세 오경"으로 여겨지는 책 속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들어 있다는 것이나, 여러 다양한 사람이 썼다고 분명히 말하면서도 그것을 각각 "다윗의 시"나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부르는 것을 결코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러한 제목들은 오늘날의 의미에서 저자가 누구인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두 그렇게 불리는 책 속에 수록된 위대한 전승을 창시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약의 다른 부분에서도, 이를테면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책에서도 이같은 점은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본문

 

 

구약이 그 원본이나 번역본에서 문제를 야기하게 되기까지에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구약의 여러 부분들은 일찍부터 거룩한 말씀으로 간주되었다. 그 말씀은 아주 조심스럽게 보존되고 필사되었다. 사실상 히브리어로 기록된 여타 문서들이 사라져버리고 없기에 이스라엘은 엄격한 의미에서 "성경책의 민족"이 되고 말았다. 거룩한 말씀이 보존되는 과정 중에 의심스럽다거나 온전하지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본들은 종종 파괴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구약 사본이란 거의 없다시피 하다. 히브리어 본문의 표준판이 확립된 것은 마소라 학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해서였다. 서기관이자 학자들인 마소라 학자들이, 주후 100년 이후에는 표준판으로 삼은 히브리어 본문에 어떤 수정도 가해지지 않도록 지켰으며, 주후 1000년 이후에는 아예 더 이상의 수정이 행해지지 않도록 표준판 본문을 확보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구약의 히브리어 표준판을 마소라 본문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서기관도 사람인 이상 결코 잘못이 없지는 않았다. 오랜 세월 본문이 보존되는 동안에 많은 실수와 불분명한 것들이 소리 없이 텍스트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런 경우가 한번 생기고 나면 후대의 서기관들은 종종 선배들이 저질러놓은 일을 바로잡거나 수정하는 데 필요한 자원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 결과 서기관들이 남겨놓은 실수들은 다른 본문들과 함께 충실하게 필사되어 전수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유로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수록된 본문 해설에는 히브리어 원문이 분명하지 않다거나, 히브리어 본문보다는 70인역본 같은 옛 번역본을 따르고 있다는 설명이 자주 등장하게 된다.

 

사해 근처 쿰란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은 히브리어 본문의 초기 전달 과정과 그 본문의 실질적인 정확성을 확인하는 일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쿰란 발굴물 중에는 유대인들이 기록한 두루마리나 사본의 단편들이 남아 있었다. 그 중에는 그 때까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던 히브리어 본문의 전승을 아주 가깝게 따르고 있는 「이사야」나 구약의 다른 부분이 포함되어 있었다.

 

필사하는 과정 중에 생긴 오류 외에도 문제는 또 있다. 특히 히브리어 성경을 이해하는 과정에 그 긴 역사와 독보적인 위치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 등장한다. 어떤 언어의 낱말도 천 년이 넘는 긴 세월을 거치다 보면 그 의미가 달라지게 마련이다. 성경 히브리어의 어휘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철자법상의 수정도 있었고, 여러 자음을 연결하는 방식에서도 변화가 생겼으며, 글자를 써가는 도구들도 시대에 따라서 변천을 겪었다. 구약 시대에 히브리어로 기록된 다른 문헌들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많은 낱말들이 한 번이나 두 번만 나타나고 있고, 그 용어가 때로는 그 문맥 안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예를 들어 우리말 성경의 왕상 10:22와 대하 9:21에서 "원숭이"로 번역된 단어는 동시에 "공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한 경우에 번역자를 포함한 학자들은 두 개의 보충적인 자료를 사용하게 된다. 하나는 히브리어 낱말의 뜻을 보다 잘 알고 있던 때에 이루어졌던 옛 번역본의 자문을 받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히브리어와 연관된 여러 언어를 검토하면서 그와 유사한 용어를 추적해 보는 것이다. 이 두 작업 중 어느 것도 히브리어 말씨의 의미를 모두 확실하게 규정해 주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작업 자체는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구약에는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여전히 그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구절들이 남아 있다. 그러한 경우 학자들은 종종 히브리어 원문이 변경된 것으로 간주하기도 하고, 아니면 그것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의 시 22:15에 있는 "히브리어 원문에는 '힘'으로 쓰여 있지만 역본에 따라서는 '목구멍'으로 읽기도 한다"는 해설이 그런 예이다.

 

그렇지만 구약 학자들은 대부분 본문 수정을 최후의 수단으로 여기면서, 그런 수정을 거의 하지 않으려고 한다. 두 히브리어 자음이 그 모양이 비슷해서 서로 쉽게 혼동되는 경우에 특히 그런 경향을 보이고 있다.

 

문화의 차이

 

 

번역자에게 있는 또 다른 어려움은 히브리어 본문에서가 아니라, 구약 시대와 우리 시대 사이에 놓여 있는 문화의 차이에 있다. 어떤 격언은 그 첫 번째 독자들에게는 친숙하나 우리는 알 수 없는 일상 생활의 한 단면이나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를 넌지시 말하고 있다. 어떤 언어에서도 시에서는 은유적인 표현이 자주 사용된다. 어떤 경우에는 문자적인 의미와는 아예 상관 없는 경우도 있게 마련이다. 구약에는 많은 언어 유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청중이나 독자의 관심을 끌고 그들로 하여금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생각하게끔 유도하는 (예수의 비유 같은) 수수께끼 같은 표현도 있다.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여러 설명과 용어 해설 등에 오늘날 독자들이 그 같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려고 애쓰고 있다. 그렇지만 해결되지 않은 어려움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외에도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은 문자적 번역이 오늘날 독자들에게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해설하는 다른 번역을 싣고 있다. 사 11:1과 렘 22:7의 문자적 번역과 의미상의 번역을 비교해 보라.

 

사 11:1의 문자적 번역(개역개정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소개된 다른 번역

 

“다윗 왕가는 잘라진 나무와 같으나 새 순이 줄기에서 자라나 한 새 왕이 다윗의 후손 중에 일어나 왕이 될 것이요”

 

렘 22:7 상반의 문자적 번역(개역개정판)

 

“내가 너를 파멸할 자를 준비하리니”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소개된 다른 번역

 

“내가 그것(유다의 왕궁)을 파괴하기 위해서 사람들을 보내리니”

 

구약의 고대역들

 

 

오늘날 구약의 신실한 번역들은 모두 히브리어 원문이나 아람어 본문을 대본으로 사용한다. 그렇지만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곳에서 기독교 공동체는 고대 번역본을 의지하였다. 예컨대 동유럽에서는 70인역본을, 서유럽에서는 불가타를 사용하였다. 신약을 기록한 자들은 대부분 70인역본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신약에 인용된 구약 구절들은 그 형식에서 히브리어 성경과 다르다("신약에 사용된 구약"을 보라). 이 옛 번역본들은 또 다른 고대 언어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어 그리스어에서 슬라브어로 번역된 경우인데, 이런 경우 구약은 부정확한 구절을 더 많이 지니게 된다. 그러나 고대 역본들은 기독교인들이 여러 세대를 거쳐 계승해 간 믿음을 보존하고 있기에, 그 중 어떤 것들은 그 자체가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고대 번역본들이 오랫동안 폭넓게 존경받아 왔지만, 구약을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하는 긴 전통도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러한 일의 개척자가 위대한 기독교 학자인 성 제롬(St. Jerome, 대략 341-420년)이다. 제롬은 유대인 선생으로부터 히브리어를 배운 후 히브리어에 기초하여 당시 사용되던 라틴어 번역본을 개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그는 불가타 (또는 "통속적인") 라틴어 번역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비슷한 방법으로 개신교 종교개혁은 구약이 히브리어로부터 당시에 유럽에서 사용되던 각 나라의 방언으로 번역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러한 일에 뛰어든 사람이 바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년)이다. 마틴 루터는 1522년에 먼저 신약의 독일어 번역을, 1534년에는 전 성경의 독일어 번역을 출판하였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 일부와 그 후계자들에게는 유대 성서학자들의 작업을 충분히 활용할 능력이 있었다.

 

구약의 현대적 읽기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구약을 읽어야 할까? 거기에는 어떤 한 방법만 있지 않다. 성서공회나 교회나 성경 읽기 모임이 발간한 여러 종류의 성경 읽기 안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구약 읽기에 도움을 준다.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에게는, 그렇지만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근본적인 원칙이 있다. 말하자면 어려운 구절은 보다 넓은 맥락, 곧 성경 전체의 관점에서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는 산상수훈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도 어떤 갈등이 있다. 한편으로 예수는 구약이 여전히 성경의 권위적인 가르침이라고 말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다른 한편으로 예수는 구약에 대해서 과격할 정도로 새롭게 말한다. 예를 들면,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 5:43-44)

 

"네 원수를 미워하라"와 같은 말은 일반적으로 고대 서아시아를 비롯한 이스라엘 종교가 주창했던 사상과 실천을 비교적 잘 요약한 말이다. 그렇지만 구약은 그 어디에서도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꼬집어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구약에 있는 그 어떤 가르침보다 훨씬 더 앞서 나간 것이다. 기독교인은 구약을 읽을 때 예수께서 히브리어 성경에 대해서 지녔던 것과 똑같은 자세를 갖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예수께서 구약을 이해하셨던 방식대로 구약을 읽도록 애써야 한다.

 

 

 

02. 오경개론

 

 

 

 

"오경"이란 이름은 성경의 처음 다섯 권에 붙인 명칭이다. 이 이름은 "다섯 두루마리"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모세 오경"이라고도 불리는 이 책은 히브리어 성경 중 유대인 공동체가 가장 으뜸으로 소중히 여기는 부분이다. 히브리어로는 이 책을 "토라"라고 부른다. 토라는 전통적으로 "율법"이라고 번역된다. 이 번역어는 히브리어 성경을 최초로 그리스어로 번역한 70인역본에 사용된 그리스어를 반영한다. 그리스어 신약에서도 같은 낱말이 이 책을 가리키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마 5:17; 눅 24:44; 요 1:45를 보라). 하지만 히브리어 용어는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품고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훈"이나 "계시"로도 번역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가르침을 나타낼 때 그렇게 사용된다.

 

내 용

 

 

이 다섯 권의 책은 규칙이나 규정뿐만 아니라 설화체의 글도 담고 있다. 이 설화체의 글은 창조에서부터 모세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히브리 백성이 겪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 창조에서부터 인류가 온 세상에 흩어지기까지(창 1:1-11:9)

 

· 히브리 백성을 창시한 조상들,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창 11:10-50:26)

 

· 히브리 백성들의 출애굽(출 1-15장)

 

· 홍해에서 시내 산까지(출 16-18장)

 

· 시내 산의 이스라엘 백성(출 19:1-민 10:10)

 

· 시내 산에서 모압 평지까지(민 10:11-21:35)

 

· 모압 평지에서 진을 친 이스라엘(민 22:1-36:13)

 

·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하나님의 율법(신 1-33장)

 

· 모세의 죽음(신 34장)

 

 

오경의 형성

 

 

전통적으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모세가 이 다섯 권의 책을 썼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이런 입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대단히 어렵게 만드는 요소들이 많이 있다. 똑같은 사건이나 가르침이 두 번 혹은 그 이상 여러 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그런 예이다. 이같은 사실은 두 개의 서로 다른 자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한다. 창 6:19에서 노아는 자기와 함께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을 방주에 데리고 들어가라는 명령을 듣는다. 그러나 창 7:2-3에서 노아는 어떤 짐승은 암수 한 쌍씩을, 또 어떤 짐승은 암수 일곱씩을 데리고 들어가라는 지시를 받는다. 아브라함의 첩 하갈은 두 번씩이나 집 밖으로 쫓겨난다(창 16장; 21:9-21). 아브라함은 두 번씩이나 자기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아내 사라를 자기 누이라고 둘러댄다(창 12:10-20; 20장). 그 아들 이삭도 자기 아내 리브가에게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창 26:6-11).

 

이 두 이야기는 거의 비슷한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나 아들 모두 똑같은 그랄 왕 아비멜렉을 속이려고 하고 있다. 동일한 절기에 대한 기사가 여러 번 반복되고 있는가 하면(출 23:14-19; 34:18-26; 레 23장; 신 16:1-17), 십계명을 받는 기사도 두 번이나 중복되고 있다(출 20:2-17; 신 5:6-21). 이 외에도 많은 본문들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때보다도 수백 년 후에나 있게 될 장소나 제도를 언급하고 있다(예를 들어 창 47:11 설명을 보라. 또 다른 예로 창 36:31은 모세 시대 이후 250년 가량이 지나야 이스라엘에서 첫 번째 왕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왕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이야기들은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에 동시적으로 기록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우리는 오경이,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구전으로 전해졌던 때부터 시작하여 오경이 최종 편집되는 단계에 이르는 주전 5세기까지, 수백 년에 걸친 과정의 마지막 결과물이라고 믿게 되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보자. 창 1-2장은 창조에 대해서 두 번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기사(1:1-2:4상반)에서 창조자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보편적인 이름인 "엘로힘"이다. 두 번째 기사(2:4하반-23)에서 창조자는 보통 "주 하나님"이라고 번역되는 "여호와 (또는 야웨) 하나님"이다. 오경에 걸쳐 두루 나타나는 이와 같은 어구들은 오경을 구성하는 데 두 개의 초기 자료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만들었다.

 

첫 번째 자료는 이른바 "J"(여호와와 유다를 표기하는 영어의 머리글자)로서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 때인 주전 10세기에 예루살렘에서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두 번째 자료는, "E"("엘로힘"과 "에브라임"을 나타내는 영어의 머리글자)라고 불리는데, 주전 9세기 이래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자료가 궁극적으로 하나로 결합되면서, 거기에 제사장과 성소와 전례와 예배와 희생제사에 관심을 쏟았던 마지막 자료가 추가되었다고 본다. 이 추가된 자료를 제사장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해서 "P"라고 부른다. 마지막으로 독립 단락인 「신명기」가 주전 538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후에 첨가되었다. 모든 성서학자들이 이러한 견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질문들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지금으로서는 이 복잡한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이러한 견해가 폭넓게 수용되고 있다.

 

오경의 중요성

 

 

오경은 한 때 이스라엘 백성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그 근거라고 생각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옛 이야기를 읽거나 낭송할 때 오래 전 아주 먼 옛날에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도리어 그들은 자기들이 겪은 경험을 증언하기도 한다. 오경 이야기를 낭송하면서 그들은 위대한 사건 속에 빠져들어 가게 되고, 그러면서 이야기를 관망하는 구경꾼이 아니라 그 이야기에 동참하는 주인공이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한때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군대로부터 해방시켜서 물을 가르고 건너게 한 후 약속의 땅까지 무사히 오도록 이끄셨다(신 26:1-11). 이것은 결코 죽은 역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들이 겪은 고유한 이야기였으며 살아 있는 유산이었다.

 

이것은 기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을 먼 과거에 대한 정보로만 대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은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루셨는지를 배운다. 하나님은 자기가 한 약속을 거듭 새롭게 하시면서, 자기 백성들이 이처럼 고백하도록 부르신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 6:4-5).

 

오경의 메시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다루시는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요소는 하나님이 그 백성과 맺으신 언약이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했던지 기독교인들은 그 말에 대응하는 라틴어 '테스타멘툼'을 가지고 히브리어 성경과 기독교 성경에다가 '구약(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중심 되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는 것으로 시작된다(창 15장; 17장). 그 언약은 그 다음 단계에서 이삭(창 26:1-5)과 야곱(창 28:10-22; 출 2:24; 6:2-5를 보라)과 새롭게 체결된다.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모든 백성과 언약을 맺게 되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신다(출 24:3-8). 이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려고 하던 무렵 모압 평지에서 새롭게 다듬어진다(신 29:10-15). 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은 스스로 그 백성과 두터운 유대를 맺으신다. 그 백성과 함께 하고 그들을 축복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되풀이해서 그 언약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께 반역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신실하게 자기 백성이 자기에게 돌아오도록 이끄신다. 선지자 예레미야 때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맺으실 새 언약을 선포하신다(렘 31:31-34). 기독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언약은 예수께서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 성취되었다(막 14:22-26; 고전 11:23-25).

 

그 언약의 조항 중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들이 자기 땅을 갖게 되고 그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이 주제가 「민수기」와 「신명기」에서 줄곧 다루어진다. 그 땅은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곳에 거룩하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함께 거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땅이 없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백성이 되지 못하리라. 기독교인들에게도 이같은 가르침은 중요한 요소가 된다.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영원히 함께 계시면서 자기들의 하나님이 되시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과 새 예루살렘의 약속을 바라고 있다(계 21:1-4).

 

마지막으로, 그 언약은 하나님이 거룩하시듯 하나님의 백성도 거룩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레 20:26; 22:31-33). 이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이란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도록 특별히 헌신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런 특별한 역할은 그들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축복하실 것이다(창 12:1-3). 이 주제는 기독교인들에게도 의미가 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제사장이 되어야 하고, 거룩한 민족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께 헌신한 백성이 되어야만 한다(벧전 2:9).

 

 

 

03. 예언서개론

 

 

 

 

율법서에 뒤이어 나오는 히브리어 성경의 두 번째 큰 구분은 예언서이다. 이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라는 두 부류의 책으로 구분된다. 전기 예언서에 들어가는 책들은 「여호수아」,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이다. 「룻기」와 「역대 상하」는 "성문서"라고 불리는 세 번째 큰 구분에 속한다. 이 해설이 다루고 있는 후기 예언서는 "대" 예언서로 알려진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과 "열두 예언서," 곧 "소" 예언서라고도 하는 「호세아」에서 「말라기」에 이르는 책들로 구성되었다. "대" 예언서나 "소" 예언서라는 칭호에서 "대"와 "소"는 책의 길이를 말하는 것이지 그 중요성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70인역본에서나 대부분의 번역 성경에서는 「예레미야애가」와 「다니엘」이 예언서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예언서와는 다른 성격의 책이기에 이 자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다(이 책들에 있는 '개론'과 '성경책 각 권의 이름과 순서'에 대한 해설을 보라). 히브리어 성경에서 이 책들은 성문서에 속해 있다.

 

선지자란

 

 

고고학적 증거나 성경의 자료들(왕하 10:19)은 고대 세계에서 선지자들이 여러 방면에 걸쳐 두루 활약하였음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구약에 등장하는 선지자만을 다루려고 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곧장 미래를 예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을 머리 속에 떠올린다. 성경의 선지자들도 종종 장래 일을 예고하고는 했었다. 하지만 그런 예고가 선지자의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선지자"란 낱말은 그리스어에서 온 말로 신의 뜻을 사람에게 해석하는 신의 대변인을 가리킨다. 구약에는 선지자를 일컫는 용어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의 사람"(왕상 17:18,24)을 포함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왕하 4:9)이나, "선지자"(왕상 13:11)나, "신에 감동하는 자"(호 9:7)나, "선견자"(삼상 9:9-11) 등이 있다. "선견자"란 말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식별할 수 있는 자를 암시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선지자란 말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히브리어에서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나비')은 분명 "부르다"란 뜻의 아카드어에서 온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수동태인지(그럴 경우 뜻은 "부름 받은 사람"이 된다) 능동태인지는(그럴 경우 뜻은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이 된다) 확실하지 않다. 성경의 선지자들이 무슨 일을 하였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으면 모세로부터 시작되는 성경 본문 자체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신 34:10-12를 보라).

 

선지자의 역할

 

 

「출애굽기」는 두 구절(4:14-16; 7:1-12)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 앞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묘사한다. 이 때 모세의 형 아론이 그의 선지자로 활약하고 있다. 모세가 말을 하면 아론이 그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선지자는 하나님을 대신하여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사람이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삼상 3장; 사 6장; 렘 1:2-9; 겔 2-3장; 암 7:14-15) 선지자를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선지자는 모두 자기들이 하는 말이 자기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계시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삼상 3:19-21; 왕상 22:19; 렘 1:9,12; 암 1:3; 3:7). 초기에 선지자들은 종종 하나님의 영(민 11:24-29; 삼상 19:19-24)의 힘에 붙들리는 "황홀경"에 취하는 경험을 하였다(삼상 10:10,13). 나중에 선지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에 충만하다거나 하나님의 영의 힘에 붙잡혔다고 단호히 선언하였다(겔 2:2; 11:5; 미 3:8).

 

초기 이스라엘 예언

 

 

구약에서 선지자로 불리는 주요 인물 중에는 아브라함과 모세와 미리암과 드보라와 사무엘과 나단과 엘리야와 엘리사가 포함된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선지자로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갓과 실로 사람 아히야와 스마야와 훌다가 있다. 「신명기」는 모세를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선지자로 간주하면서 예언 운동이 시작되는 뿌리가 모세로부터라고 말한다(18:15; 34:10-12). 모세 이후 중요한 인물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던 사무엘이다(렘 15:1). 사무엘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 한두 세기 가량 지속되었던 느슨한 형태의 지파 조직(「여호수아」와 「사사기」의 개론을 보라)에서부터 사울이 다스리기 시작하던 왕조(약 주전 1030-1010년)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위치하고 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최초의 왕으로 삼는 기름을 부었던 자가 바로 사무엘이다. 그러나 동시에 사무엘은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들의 요구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경고하기도 하였다(삼상 8:11-18).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셨을 때(삼상 15:10-34) 사무엘은 다윗을 사울의 후계자로 삼아서 기름을 부었다(삼상 16:1-13).

 

그 때 이래 선지자들은 왕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었다. 때로는 왕의 조력자가 되기도 하였고, 때로는 왕조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이 되기도 하였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에게 그 왕국이 영원히 존속되리라고 약속하기도 했지만(삼하 7:11-17; 대상 17:11-15), 동시에 다윗이 밧세바와 간통하고, 그 남편 우리아를 살해한 것을 두고 통렬하게 비판하기도 하였다(삼하 12:1-15). 그런 영향력을 활용해서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삼는 일에 나서기도 하였다(왕상 1:11-40). 왕국이 분열되어야만 했을 때 실로의 선지자 아히야가 북 왕국 이스라엘의 첫 번째 통치자에게 기름을 부었다(왕상 11:26-39). 유다 출신으로 이름을 알 수 없던 한 선지자는 바로 그 왕이 벧엘에 금송아지로 만든 우상을 세웠다고 비난하였다(왕상 12:32-13:32).

 

참으로 「열왕기 상하」는 긴 부분을 할애하여 아합 왕의 통치(주전 874-853년) 때부터 시작된 주전 9세기의 북 왕국에 예언이 꽃을 피웠다고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사람이 엘리야(왕상 17-19; 21장)와 그 후계자 엘리사(왕하 2-9장; 13:14-21)로 이들은 모두 바알과 아세라 숭배와 그것을 추종하며 이방 신을 섬길 것을 주창하였던 선지자들에게 맞서 대항하였던 선지자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반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악하다고 판단된 왕조를 개혁시키고자 왕조를 무너뜨리는 일에도 직접 관여하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일상 생활 속에서는 왕이 남용하는 권력에 맞서서 힘없는 자들을 변호하는 일에 적극 나서기도 하였다. 때로는 주변 여러 나라들의 정치에 깊이 관여하기도 하였다.

 

이밖에도 이름을 알 수 없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다. 이들은 "선지자의 제자들"(왕하 2:3,5)이라고 불리는 단체나 모임에 속했던 자들이다. 초기 사무엘 시대에는 선지자들이 무리를 지어서 몰려다니기도 하였다(삼상 10:5-13). 성경의 많은 구절들이 엘리야나 엘리사가 이같은 선지자의 무리들의 동의나 지원을 받았음을 지적하고 있다(왕하 2:3-18; 4:1,38; 5:22; 6:1). 그렇지만 또 다른 경우, 이믈라의 아들 선지자 미가야 같은 사람은 자기 개인에게 닥치는 신상의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왕을 섬기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언하던 선지자의 무리들에 정면으로 맞섰다(왕상 22:1-29; 대하 18:2-27). 이 이야기에서 미가야가 진실을 선포하고 있는 것을 보면 대략 400명에 이르는 다른 선지자의 무리들은 거짓을 말했다고 보아야 한다. 곧 선지자의 무리에 속했다는 사실 자체가 예언의 진실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선지자들이 백성들에게 다른 신을 좇으라고 강요하거나 마술 행위를 주창하거나 실현되지 않은 예고를 하였다면, 그런 선지자들은 정녕 배척받아야만 하였다(신 13장; 18:9-15).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선지자들이 서로 상반된 메시지를 전할 때 누가 참된 것인지를 식별해야 되는 문제가 있었다. 예언이 현실로 이루어지는지의 여부를 가지고 참과 거짓을 구별한다는 것은 충분한 근거가 되지 못했다. 선지자의 말을 들었던 사람들이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되기까지에는 한평생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렘 28장).

 

정경적인 예언자

 

 

주전 8세기 중엽, 그리스에서 호머가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를 막 써냈던 직후, 이스라엘 예언에서는 새로운 현상이 일어났다. 이 현상은, 등장하자마자 전 지역을 지배하게 된 앗수르 제국의 부상과 동시에 나타났다. 최초로 선지자의 메시지가 책으로 보존되게 된 것이다. 이들 후대의 선지자들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았던 사람들과 구분하기 위해서 우리는 종종 "문서 예언자", "고전적인 선지자", "정경적인 예언자"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 선지자들은 더 이상 특정 왕이나 그 밖의 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만 선포하지 않았다. 대신 이스라엘과 유다 전체를 상대로 선포하였다. 이 점에서도 그들은 초기 선지자들과 구별된다. 그 선지자들이 개인을 상대로 말씀을 선포할 때에는, 그들이 왕이건, 귀족이건, 제사장이건, 다른 선지자이건, 일반 백성이건, 하나님께서 그 당시 국제적인 정세에 깊이 관여하고 계신다는 인식에서 그렇게 하였다. 초기에 등장했던 선지자들마냥 그들도 왕조를 비난하고 왕조의 멸망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왕조에 맞서는 어떤 정치적인 행동에 능동적으로 가담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때때로 왕을 세우는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고 지적하였다(호 1:4; 7:3-7). 그렇지만 일부 선지자들은 남북 왕국에서 둘 중 하나나 두 왕국 모두가 멸망할 것을 선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기도 하였다.

 

선지자들은 지도자들과 시민들에게 한 가지 중심되는 본질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셨으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보호했으며, 자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특권에는 책임이 따랐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경외해야 하였고, 자기 주변에 있는 자들을 보호해야 하였다. 선지자들이 지적한 문제는 여러 가지이다. 예배, 사회정의, 말과 행동의 진실, 우상숭배와 도덕적 타락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선지자들이 선포하였던 특별한 문제가 무엇이든지 간에, 그들에게 있던 주된 관심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시내 산에서 모세와 함께 맺었던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을 시행하라고 촉구하는 데 있었다.

 

예언서의 문학적 형태

 

 

예언서의 문학적 형태는 참으로 다양하다. 환상이 있고(예를 들어, 암 7:1),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는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있으며,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도 있다(렘 46-51장; 겔 25-32장). 재판정에서 이루어지는 다툼이나 법적인 소송 형태로 된 구절도 있으며(미 6:1-5), 장례식의 애도문(암 5:2), 찬양(사 12장), 노래(사 5:1-3)도 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부르시는 기록이나(사 6장; 렘 1장; 겔 1-3장), 상징 행동을 전하는 이야기도 있다(렘 13:1-14; 겔 5:1-4). 예언서 속에서 이런 메시지들이 어떤 원칙을 따라서 배열되었는지 항상 분명하지는 않다. 어떤 때는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 메시지에서 보듯이 공통되는 주제에 따라서 여러 구절들이 하나로 묶인다. 또 어떤 때는 동일한 역사적 상황에 관한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나올 경우 연대적인 순서에 따라서 배열되기도 한다(사 7-9장). 그렇지 않은 경우, 시간적으로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는 메시지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기도 하다. 그래서, 예를 들면, 어떤 심판 메시지 뒤에는 동일한 청중에게 선포되었던 구원의 메시지가 뒤따라 나오기도 한다(미 3-4장).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서로 다른 때에, 서로 다른 정황 중에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좇지 않을 때 선지자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해 있다고 선포하였다. 백성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올 때에 선지자는 희망과 위로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역사적 배경

 

 

예언서의 내용은 그 역사적인 맥락을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수록된 각 예언서에 대한 개론은 가능하면 각 예언서가 등장하게 되었던 상황을 개괄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각 책의 첫머리에 실린 구절은 바로 그런 상황을 알게 해 주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이 서두 구절은 각 책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누구에게 선포되었고, 언제 선포되었는지를 밝히고 있다(사 1:1; 호 1:1). 소 예언서 중 「요엘」, 「오바댜」, 「요나」, 「나훔」, 「하박국」, 「말라기」 여섯 책은 선지자의 이름 외에는 특별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책의 역사적 배경은 정확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파악해야만 한다. 예언서의 머리말이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언급하는 경우라도, 선지자가 언제, 무엇 때문에 예언하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설정하기 위해서는 책의 특정한 구절들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이 굿뉴스 스터디바이블에 수록된 각 책의 주요 단락에 대한 요약은 이런 특정한 주제까지도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선지자들의 메시지는 주전 8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동안 고대 서아시아 지역을 차례로 지배하였던 앗수르, 바벨론, 바사라는 세 제국의 맥락에서 검토될 수 있다.

 

앗수르 시대

 

 

네 명의 선지자들이 8세기 앗수르 시대에 살았다. 초기에는 아모스와 호세아 두 명이 북 왕국 이스라엘에서 예언을 선포하였다. 나머지 두 사람인 예루살렘의 이사야와 모레셋의 미가는, 남 왕국 유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는 소명을 받았다.

 

바벨론 시대

 

 

나훔과 하박국과 스바냐는 주전 7세기에 속한다. 「나훔」은 주전 612년에 파괴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가 앗수르 시대의 종말을 나타낸다고 말하면서 공박하고 있다. 하박국은 하나님께서 바벨론 사람들이 잔악하게 전쟁하는 것을 심판하시지 않고 내버려두셨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에 관련된 수수께끼에 대해서 묻고 있다. 그러면서 바벨론 제국의 시작을 표시하고 있다. 스바냐는 아마도 주전 621년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 이전에 벌어졌던 유다 사회 내부의 불의를 심각하게 비난하고 있는 듯하다. 예레미야도 7세기 말부터 6세기 초까지 예언하였기에 바벨론 시대에 속한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는 주전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과 유다의 패망을 증언하고 있다. 같은 시기에 속하는 오바댜는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바벨론 사람들 편을 들었던 에돔 민족을 비난하고 있다.

 

6세기에 속하기는 선지자 에스겔도 마찬가지이다. 에스겔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있는 자들을 향해서 자기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사야」 40-55장도 주전 538년 고레스 대왕이 바벨론의 포로였던 유다 사람들을 고향으로 귀환하게 하는 조서를 내리기 직전에 바벨론의 포로들을 대상으로 선포되었다. 사 56-66장은 주전 515년 제2의 성전을 다시 건축하려던 시기에 귀환한 포로들에게 선포되었다(이 부분의 저자에 대해서는 이사야서의 개론을 보라).

 

바사 시대

 

 

「학개」와 「스가랴」는 바사 시대의 것이다. 주전 520년 그들은 유다 백성들에게 성전을 다시 세울 것을 고무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시작하였다. 「말라기」는 대체로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개혁이 있기 바로 얼마 전인 5세기 중반에 비롯된 것으로 여겨진다. 슥 9-14장의 배경에 대해서는 확실한 것을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시대를 5세기로 짐작하고 있다. 「요나」와 「요엘」의 연대를 결정하는 문제를 놓고서도 해석자들 사이에는 큰 견해 차이가 있다(각 책의 개론을 보라). 예언이 막을 내리게 된 때는 그리스 문명의 "황금기"(주전 500-400년)와 같은 시대이다. 이 때 이후, 예수가 탄생하기 전 대략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서는 더 이상 예언이 들리지 않았다. 신약의 예언에 대해서는 선지자를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