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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선지서 연구

에반젤(복음) 2020. 12. 27. 16:16

선지서 연구


전선지서(역사서) / 후선지서
김성수 교수(합신 신대원)

일반적으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록한 선지서들은 후선지서라고 부른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비롯한, 왜 역사서인데 성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선지서로 부르는가? 선지자들이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에서 선지서라고 부르는 후선지서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단순히 선지자들의 예언을 기록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후선지서를 다른 명칭으로 부르기도 한다. writing prophets 받은 예언을 기록하여 남겨놓은 선지자들이라는 말이다. 그들이 기록하여 놓은 예언이 정경에 포함되었다해서 정경선지자라고 한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예언을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여놓은 선지자들을 보면 특징이 있다.

그것은 특정시기와 관련이 있다.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다. 모세는 선지자의 모델이었다. 나와 같은 선지자를 일으킨다고 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선지자의 역사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모세의 경우는 하나님의 계시의 분량이 제일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글을 선지서에 넣는 사람이 없다.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좁은 의미에서 선지서라 부르는 사람은 나타난 시기가 독특하다.

주전 8세기이다.
여기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다가 간헐적으로 나타나며 이후에 포로시기, 유다멸망 전후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포로 전후의 시기에 나타난 사람들이 예레미야와 에스겔이 대표적이다. 이후에 포로후 시대의 선지자는 스가랴, 학개, 스바냐 등이다. 시대와 관련되어 있다. B.C8세기부터 이다.

왜 이런 특징이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스라엘 역사를 살펴보면 어느 시대나 선지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특정시대에 세우신 선지자들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여 남기게 하였는가? 나중에 확인되겠지만 특정시대에 출현한 선지자들은 공통메시지의 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을 가지게 된다.
특정시대에 특정 메시지를 가지고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는가? 이유,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를 묻게 된다. 일반적으로 많이 떠드는 사람, 유명한 신학자들의 견해는 8세기가 되면 이스라엘 주변에 큰 정책 변화가 있게 된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사사시대는 주변나라의 침략을 당하고 있다가 다윗의 등장과 함께 중동의 강국으로 등장한다. 에돔, 모압, 암몬, 다메섹 등까지 다윗, 솔로몬 시대에 가장 큰 영토를 차지한다.
그 시기는 이상하게도 본래 중동지역의 최강자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이다. 역사적으로 두 세력이 교차되어 나타난다. 바벨론과 앗시리아이다. 제일 먼저 등장한 제국이 바벨론 제국이다. (함무라비) 그 다음에 등장한 것이 앗시리아이다. 이것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것이 바벨론 제국이다. 이것을 구별하기 위해 옛날에 나타난 것을 구바벨론이라하고 새롭게 등장한 것을 신바벨론제국이라 한다. 이것은 동북쪽에 위치한 가장 큰 강대세력이고, 남쪽에 애굽이다. 주로보면 중동의 역사는 이 큰 세력간의 충돌이 잦았다. 이 두 세력사이에 놓여있었고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 팔레스타인 지방이다. 어느 쪽이 강하든지 시달림을 받게 되었다.

다윗솔로몬 시대는 마치 두 세력이 약했다.
솔로몬 말기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다윗의 세력하에 굴복했던 주변 나라가 반란을 일으키고 떨어져 나간다. 그리고 이스라엘 남북분열시대를 잘 아는데, 서로 싸우는 동안에 어떤 일이 생겨나는가 하면 북쪽에서 새로운 정치적 움직임이 감지되기 시작한다. 이것이 나중에 그 모습이 드러냈을 때는 앗시리아 제국이라는 나라가 등장한다.
앗시리아 제국이 점점 강성해져서 팔레스타인쪽으로 밀고 내려왔다. 이런 역사적 변화, 세력판도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들이 과연 이런 세계사의 변화의 의미를 숙고하는 중에 이는 이스라엘의 심판의 도구라 생각했다. 이런 의식이 만들어낸 것이 8세기 이후의 선지서, 예언들이라 한다.
선지자들의 출현과 그들의 예언 근원을 이런 식으로 이해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성경이 성경으로 구실을 하게 되겠는가?
여하튼 이런 의문제기가 된다. 왜 특정시대의 이런 선지자들이 특정 메시지를 가지고 등장하였고 왜 하나님은 그런 예언을 글로 남기게 하였는가? 이것을 성경에서 찾아보려고 한다.
눅9:28이후에 변화산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이후에 예수님은 아주 명백한 사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제사장과 장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하리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드러내놓고 가르쳤다. 변화산에서 일도 그 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그가 어떠한 분이신가, 그의 신적인 영광, 메시야의 영광을 드러내신, 이 땅에 속한 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런데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변형되시는 것과 함께 스쳐지나가기 쉬운 일이 같이 일어났다. 그때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 예수님과 무언가 말씀, 의논을 했다. 그런데 무엇을 의논했는가, 의논의 내용에 대해서 31절에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라고 했다. 여기에 "별세"는 "엑소도스"이다. (번역상의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이런 표현의 특별한 의미는 출애굽을 가리킨다. 여하튼 여기에서 모세, 엘리야, 예수님이 예수님의 엑소도스에 대해서 의논했는데, 예수님의 엑소도스에 대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단순히 죽으실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수식하고 있는 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성취하실 그의 별세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별세는 단순한 죽음이 아니고 무언가 성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거기다가 왜 단순하게 그냥 '싸나토스'라는 말을 쓰지않고 '엑소도스'라는 말을 썼는가? 혹시 이것은 누가가 예수님의 죽음에 출애굽의 의미를 부여, 관련짓기 위해서 특별히 이런 단어를 선택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것과 같다는 차원에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장차 출애굽의 재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 11장에 '쉐니트'라는 말을 쓴다. (for the second time) 두 번째로 구하여 내실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구약의 배경에 따라서 누가복음의 내용을 이해하게 되면, 그의 엑소도스에 대해 의논했다는 말이 대단한 내용과 말을 담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구원역사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죽으심의 의미에 걸맞게 여기에 의논한 인물들을 보니까 그럴 듯 하다. 모세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그의 역할을 보면 충분히 그러하다. 그런데 왜 엘리야가 등장했는가? 엘리야하면 갈멜산을 생각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엘리야만큼 극적인 형태로 나타난 경우가 드물다. 그를 가리켜 불의 사자라고도 한다. 이런 드라마틱한 요소는 있으나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가? 이해가 잘 안된다.
이스라엘이 바알 숭배로 부패했을 때 나타나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하고 이적과 능력을 나타낸 것은 사실이나 거대한 구원역사때에 핵심적인 위치와 역할을 감당했는가 하는 질문에는 얼른 긍정적인 대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여하튼 누가복음 본문 자체는 엘리야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전 구속역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의논함에 있어서 모세와 함께 그 일을 의논할 사람으로 보고 있다. 중요성에 있어서 모세에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중요한 인물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너무 피상적으로 읽어왔기에 엘리야의 중요성을 간과해오지 않았는가? 성경은 혹시 엘리야의 중요성에 대해 충분한 암시와 무엇을 주고 있지 않은가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엘리야는 아합시대에 등장해서 사역을 한 사람이다. 엘리야에 관한 처음 기록은 왕상 17장이다. 기근을 선포한다. (17:1) 옛날에는 가물면 하늘이 노했다고 해서 제사를 드리고 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기근은 어떤 의미를 주는가? 이스라엘의 땅의 특성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필요하다. 약속의 땅이라고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생각을 가진다. 그런데 약속의 땅에 대한 성격을 달리 말한 곳이 있다. 애굽땅은 관개가 가능한 곳이다. 사람의 노력여하에 따라 가능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땅은 인력으로 할수 없는 땅이다. 이스라엘의 땅은 급한 경사지(山地)다. 이런 곳은 관개가 불가능하다. 비가 쏟아지면 잠깐 물이 흐르나 비가 그치면 끝이다. 여기에서 생명수는 샘이다. 마른 웅덩이를 크게 파서 비가 오면 받아서 먹고한다. 이런 형태를 천수답이라고 한다.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주셔야 농사가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곳은 이런 곳이다.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다. 항상 사시사철 푸르고 열매가 풍족하고 곡식소출이 많은, 약속되고 보장된 곳이 아니다.
달리 말하면 또 여기서는 하나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곳이다. 하나님의 눈밖에 나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곳이다. 달리보면 인간의 힘이 별로 힘을 쓸 수 없는 생존이 하나님께 달린 곳이다.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이곳으로 인도하셨는가는 광야로 인도하신 것과 같다. 평생 그를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게 하시기 위함이다.
이곳에서 기근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레위기에 나타난대로 이스라엘이 언약을 지키느냐 안지키느냐의 보응이다. 징계하시는 한 방법이다. 엘리야가 나타나서 내 말이 있기전에는 비한방울도 없으리라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었다. 왜 엘리야는 이렇게 갑자기 등장해서 이스라엘의 기근이라는 심판을 선언했는가?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
16장 33절 아합이 아세라 상을 만들어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하나님을 격노케 했다고 되어있다. 이 말의 구체적인 뜻이 무엇인가? 아합시대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진 뒤에는 본래 타락한 왕들에 대한 경고로 타락에 물들지 않도록 10지파를 떼어서 북쪽으로 세우고 여로보암에게 맡겼다. 여로보암 자신이 하나님 뜻에 부응하지 못하고 단, 벧엘에 불법적인 성소 만들고, 금송아지 만들어 이스라엘로 패배게 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와같이 하나님의 계명을 결코 형상화 하지 말라고 한 계명을 어기고 금송아지의 형상으로 표현하기는 했으나 애굽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다. 신앙이 변질되었다. 그후에 남북이 계속 싸우면서 특히 불이스라엘은 계속적인 반란이 일어난다. 왕위찬탈이다. 어떤 사람은 왕의 반란을 모반해서 일주일 다스리고 죽는 경우도 있다. 한번은 군사령관이었던 오므리(아합의 아버지)가 왕이 되었다.
오므리는 세속적인 의미에서는 상당히 수완가였다. 앗시리아 주변 강국은 이스라엘을 오므리의 왕국으로 기억할 만큼 정치적 명성이 상당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오므리는 황태자 아합의 배필을 이세벨로 정했다. 아마 정치적인 정략이었을 것이다. 이세벨이 대단한 여자였다. 원래부터 이방나라에서 세자빈을 데려올 때는 그들이 본국에서 섬기던 신을 섬기도록 허용하는 것이 외교상의 관례였다. 솔로몬은 이것이 올무가 되었다. 그가 성적으로 방탕했다기 보다는 정치적 외교적 의미에서 많은 아내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그를 사랑해서 산당을 지어주고 했다.
이세벨이 대단한 여자여서 이스라엘은 틀속에서 조용히 자기 신만 섬기는 것을 만족하지 않고 종교를 뒤바꾼다. 여호와의 단을 헐고 여호와 신앙을 말살하고 바알숭배로 대치하려고 했다.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많이 변질되고 왜곡되었다해도 명목상으로는 여호와 신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대치하려고 하는 상황이다. 아합의 행위를 가리켜 이전의 모든 왕들보다 더 악을 행하여 여호와의 노를 격발케 했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두고 한 말이다. 결정적인 신앙의 위기가 도달했다.
여리고에 성을 재건한 일이다. 여호수아는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선언을 한다. 여리고성을 다시 건축한자는 어떤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한다. 파괴된 여리고의 유적, 현장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악이 관영한 땅을 이와같이 심판하시고 발아래 굴복케하시고 가장 타락한 곳에 하나님의 통치, 그의 나라가 세워졌다는 증거로 삼고자 하신 것이다. 그래서 다시는 건축하지 말라고 했는데 건축한 것은 하나님의 복된 역사가 무의미해졌다는 것이다. 거꾸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무로 돌아갔다. 사실 이세벨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단을 헐고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나만 남았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 신앙이 끊어지고 완전히 이방땅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복된 땅의 의미가 완전히 상실된 것이다.
아합은 그 전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보다 여호와의 노를 격발했다는 말은 북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의 역사가 유래없는 극한에 이르렀고 이제는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조치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암시한다. 이런 결정적 위기 상황에 엘리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등장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내말이 있기까지는 다시 비가 없을 것이다. 기근을 선포한다.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 가서 몸을 숨긴다. 아합이 두려워서라기 보다는 하나님이 다시 나가라 하기까지는 나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기근이 심해지니까 아합이 엘리야를 간절히 애타게 찾았다. 물론 신앙으로 찾은 것은 아니다. 기근이 심하여지자 엘리야는 시돈 사렙다로 간다. 시돈 땅은 어떤 땅인가? 이스라엘의 영적 패괴의 원흉인 이스라엘의 원수의 나라이다. 과부를 찾아가 그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연명케 했다. 예수님께서 이 사실을 어떻게 이해하고 말씀하셨는가? 나라의 본 백성이 타락하매 하나님의 은혜가 이방에 임한 것으로 말한다.
이스라엘의 혹심한 기근으로 피페케된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이방땅 사렙다의 과부에게 임한다. 단순히 우연하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의 흐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3년이 지난후에 엘리야가 다시 아합을 찾는다. 한가지 제안을 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갈멜산에서의 대결의 의미가 무엇인가? 누가 참신이며, 하나님인가를 밝히자는 것이다.
이 대결을 하여 아합의 명에 의해 바알선지자와 이스라엘의 온 백성이 갈멜산에 모인다. 엘리야가 문제의식을 일깨운다. 너희가 언제까지 양 사이에서 머뭇거리려냐? (원래는 절름발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영적상태를 지적하는 말이다. 어느 쪽인지 결정하라는 요구앞에 이스라엘의 반응은 묵묵부답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바알숭배 자체에 이끌린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이세벨의 잔혹한 보복 때문에 간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처음에는 믿음을 지켰으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악독한 이세벨을 처형하지 않으니 하나님 믿어도 소용이 없구나 좌절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의 신을 불렀다. 나중에는 자기 몸을 칼로 해치면서 극렬하게 불렀다. 바알 선지자들의 행동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이들의 행동을 보아 바알에게 부르짖으면 불이 내려올 것이라고 믿었던 것같다. 어떻게 믿었는가? 바알 숭배 종교의식으로 귀신들의 이득을 많이 경험한 것 같다. (무당이나 점쟁이 처럼)
그러니까 불내려 달라고 진지하게 칼로 자기 몸을 그어면서까지 했다. 바알(마귀)는 불내릴 능력이 없는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간섭하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방숭배 기적에 잘 현혹되는 사람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적만 나타나면 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해서는 안된다. 엘리야는 저들이 하지못하자 백성들로 가까이 나오게 하고 단을 쌓게 했다. 열두돌을 취해 도랑을 쌓고 장작에 물을 부었다. 하나님께 구하되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오늘 주께서 이스라엘 가운데 하나님이심과 내가 주의 종인 것과 주의 말씀을 따라 이 일행하는 것을 알려지게 하옵소서 기도하였다. 여호와여 대답하소서 나의 기도에 응답하소서 이 백성으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고 주께서 저들의 마음을 돌이키심을 알게 하소서. 이 말에 의하여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 대결한 목적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친히 엘리야를 보내어 이런 일을 행하심으로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키려함이다. 회개케 함이다. 즉시 불이 떨어져 나무, 돌, 티끌, 물까지 말려버렸다. 온 백성이 엎드려 고백하기를 여호와 그가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했다.
엘리야는 당장 바알 선지자를 한명도 놓치지 말고 기손 시냇가로 끌어가서 죽이라고 한다. 그리고 간절히 갈멜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기도하며 비가 내리기를 기다렸다. 여러번 바닷가로 나아가 비의 조짐을 살펴본 끝에 비가 내리니 자기 궁으로 돌아가는 아합의 전차앞에서 엘리야가 달려갔다. 첫 시작은 아합에 의한 이스라엘의 배도,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 갈멜산의 대결로 하나님의 참 신임을 드러내셨다. 바알 선지 400을 죽이셨다는 것은 바알 선지자는 바알종교의 핵심세력이다. 이들을 죽인 것은 핵심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이것을 듣고 이세벨이 대노한 것은 핵심세력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속의 땅에서 비가 내렸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배교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가 무너지고 은혜의 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세벨로 인한 이스라엘의 영적 위기, 부패, 타락이 다 해결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마음을 돌이키고 핵심세력은 제거되고 하나님의 은혜의 비가 내렸다. 심판의 구름이 사라졌다. 아합의 전차로 엘리야가 허리를 동이고 달렸다는 것은 영적 회복에 대한 느낌, 어떤 의미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새힘으로 달려지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힘있게 진전하려는 기대를 보이는 행동이다.
그런데 사실 승리는 일일 천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이세벨이 대노한다.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기를 내일까지 네 목숨이 저 죽은 자들의 하나와 같이 될 것이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한다. 400바알 선지자가 제거되면 엘리야는 이제 잠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반대였다. 독사를 건드린 것이다. 당장 죽이겠다고 하니 엘리야가 겁이나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그래서 브엘세바까지 갔다. 갈멜산은 북쪽에 있는데 저 남쪽 광야 입구까지 내려갔다. 여기에 앉아 한탄을 한다. 이제까지 실패를 거듭해온 이스라엘의 역사에 대하여 자신이 무언가 역사를 돌이켜 놓았다고 했는데 다 무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한다. 내 생명을 취하소서, 개혁이고 무어고 다 싫다는 것이다. 어제까지만해도 회개운동이 성공했다고 생각했는데 하루만에 뒤집어지니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생명을 거두어 달라는 것이다. 그때 그에게 물과 음식을 주었다. 이 힘으로 40주야를 광야여행을 했다.
엘리야의 광야여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무슨 식물의 힘으로 간 것인가? 하늘에서 천사가 가져다 준 식물의 힘으로 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광야 여행을 암시한다. 호렙산까지 간 것은 단순히 목숨을 구하러 피신한 것이 아니고 엘리야의 여행은 옛 이스라엘의 여행을 상기케하는 것이다. 여기에 도착해서 한 고백을 보게된다. 하나님이 네가 왜 여기왔느냐고 하신다. 엘리야가 대답하기를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한 열심히 특심하온데 저들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단을 헐며 주의 선지자들을 칼날로 죽인결과 이제는 나 홀로 남았사온대 이제는 저들이 내 생명을 취하려 하나이다"고 했다. 이스라엘의 신앙의 명맥이 완전이 끊어질 상황이다.
호렙산은 어떤 산인가? 출애굽해서 이곳으로 인도해서 율법을 주시고 이스라엘과 더불어 언약을 맺은 곳이다. (언약체결장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수백년 전에 언약맺은 장소로 부르셔서 왜 왔느냐는 질문을 통해서 왜 왔는지를 간접적으로 가리킨다. 언약체결 장소로 부르셔서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겼다는 것을 고소, 송사하게 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서라 하시고 지나가시는데 여호와의 지나심이 어떤 신현현상으로 나타났는가? 강한 바람 현상으로 나타났다. 얼만큼 강했느냐? 산을 가르고 바위를 깨뜨리는 강력한 바람이 지나갔다. 그런데 신비로운 것은 그 바람속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가는데 불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그 다음에 세미한 음성이 있을 때에 엘리야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엘리야가 그 음성을 듣고 얼굴을 가리고 굴밖에 나가 입구에 섰다. 얼굴을 가린 것은 세미한 음성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한 것이다. 이런 상징적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일까? 언약체결장소인 호렙산에 와서 어떻게 송사하는가? 언약을 져버렸다는 것이다. 이렇게 송사한 의도가 무엇인가? 그 물으심에 엘리야가 대답한 것은 마음에 어떤 기대를 가지고 했겠는가? 배도한, 언약을 져버린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물음을 가지고 대답했을 것이다.
이에대한 대답으로 주어진 것이 산을 가르는 강력한 바람이 지나고 불이 지나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조금전에 불과 관련해서 생각하자. 조금전에 갈멜산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과 나무를 태워버리니 조금전에 하나님이냐 바알이냐 선택하라 할 때 묵묵부답이던 사람들이 하나님이 참 살아계신 신이라고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바람과 불을 지나가게 하신 것은 엘리야의 의도를 읽으신 것이기에 그렇게 하셨다고 짐작이 된다. 엘리야는 더 강력한 능력이 나타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실 것을 기대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을 아시고 간접적으로 드러내신 것이다.
문제는 그런 것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으로 갈멜산의 식으로는 역사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세미한 음성이 있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감지했다. 세미한 음성속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이 항상 자신을 세미한 음성으로만 계시하는 것이라해서 기도중에 세미한 음성을 들으려고만 한다. 그러나 이후에 밝혀지나 이것은 세미한 음성(꺼져가는 음성)은 앞으로 하나니의 역사는 없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강력한 불이나 바람과 같은 역사가 아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것과 같은 시대가 올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세미한 음성에 하나님이 계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시고 아무 일도 행하지 않는 것 같으나 그 속에도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다음에 너는 길을 돌이켜 가서 아람 사람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을 삼고 엘리사에게 기름부어 제자로 삼고,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라고 한다. 이 세인물을 세우라고 하신 의미가 무엇인가? 하사엘의 칼을 피한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한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삼중심판이다.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불의 역사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같은 시대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역사는 심판의 역사다. 삼중으로 아람, 예후, 엘리사를 통해서 삼중으로 심판하신다. 아무도 심판을 면하지못한다. 철저히 심판하실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바알에게 무릎꿇지않은 칠천인을 남겨두셨다. 배도한 이스라엘의 문제를 가지고 시내산 언약체결 장소에 온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앞으로 이스라엘 역사를 이끌어가실 계획을 밝히시되 앞으로 이스라엘은 죄악을 인해 철저히 심판하시되 동시에 믿음의 순결한 칠천인을 남길 것을 말한다. 심판과 남은 자의 역사를 말씀하신다. 모든 선지서를 보면 선지서의 대강은 한 마디로 철저한 심판과 남은 자를 남기시리라는 것이다.
엘리야와 관련해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호렙산에 이르러 엘리야가 들어간 굴은 어떤 굴인가? 왜 '그 굴' 이라고 했을까?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모세가 자기의 생명을 내놓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할 때 내 등을 보이실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바위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것은 일종의 구멍이다. 횡으로 뚤린 구멍이면 이것이 굴이다. 모세가 있던 곳이 혹 엘리야가 있던 굴이 아닐까 추측한다.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하나님 영광으로 지나게 하신 것은 모세와 굉장히 연관성이 있다. 모세가 거기에 올라가게 된 이유가 이스라엘의 금송아지 숭배 때문이다. 모세가 돌판을 들어 깨뜨려 버렸다. 이것은 언약의 파기다.
모세가 따라서 이스라엘의 문제를 안고 하나님께 올라간 것은 이스라엘의 배도의 문제를 가지고 올라갔다. 엘리야가 호렙산으로 오게 된 것이나 모세가 올라간 것이나 같은 상황이다. 문제는 여기에 대한 대답이 다르다. 모세의 경우는 탄원을 들으시고 용서하시고 약속의 땅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엘리야의 경우는 그들의 죄를 사하지 않고 벌하시겠다. 철저히 심판하겠다. 그러나 남은 자를 남기겠다는 것이다. 모세는 언약의 중보자였다. 그 후로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언약의 역사다. 언약의 토대를 놓는 역사였다. 이것이 엘리야에게 와서 역사의 의미가 달라진다.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인정하게 하시고 이것에 대해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고 했기에 (비록 남은 자가 잇지만) 역사의 의미가 달라진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모세와 엘리야와 의논하신 것은 이스라엘 역사의 큰 흐름을 의식하고 모세를 통해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셨으나 파기하신 후에 예수님이 다시 회복시키는 큰 역사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특정선지자가 특정 메시지를 갖고 왜 8세기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는가? 이것은 엘리야와 관련이 있다. 엘리야에게 나타난 계시는 모든 선지자의 원형이다. 기본적인 메시지의 구체화되고 풍부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엘리야의 역사적 위치와 중요성은 매우 컸고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의논하는 일에 동등하게 상대자로 세우셨는지 이해가 될 수 있다.


2001. 3. 13 (화)
그들의 예언한 내용을 기록하여 남겨놓았다는 뜻에서 정경선지자라한다. 이들이 등장하게된 배경에 대해서 말씀을 했다. 일반역사가들은 그들에 동조하는 많은 신학자들은 그런 특정시기에 특정메시지를 가지고 나타난 이유, 배경을 외부적 정치상황에서 찾는다.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앗시리아제국이 강력한 힘을 , 암울한 분위기 미리 예측하고 이러한 역사적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하는 질문앞에서 나름대로 신앙인으로서 파악하고 찾아낸 해답이 선지서의 내용이다.
신앙인에게는 구체적으로 그와같은 메시지가 주어지게 된 역사적 배경을 상세히 설명하는 것외에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설명이다. 그런 것은 제껴놓고 성경은 주전 8세기에서부터 집중적으로 등장하게 된 선지자, 그들의 메시지의 진정한 배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대해서 지난 번에 살펴보았다.
그 첫 시작으로서 신약의 증거에서부터 출발했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사랑하는 세 제자를 데리고 올라가서 저희 앞에서 예수님의 신적신분을 드러내 보이셨다. 하나님이 내 아들이라 직접 확인하시고 그에게 순종할 것을 드러내셨으나 그의 신적 영광을 나타내 보이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예수님이 변형되셨을 때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나서 특별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해서 의논하였다는 대목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역사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위치와 의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것이다.
이렇게 중대한 일을 예수님이 의논할 상대자로 그곳에 나타난 사람이 모세였다는 것은 이스라엘 역사에 서 모세의 위치를 생각하면 그럴만하다고 하지만 엘리야가 나타나는 것은 설명이 쉽지않음을 느끼게 된다. 쉽게 설명해버리는 어떤 한가지 시도로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로, 엘리야는 선지자를 대표하는 자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이 말이 맞기는 한데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가 선지자를 대표한다는 말인가? 아브라함도 모세도 선지자의 모델이다. 그런 선지자와 비교할 때 엘리야가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가? 비록 그를 통해서 대단한 이적과 기적이 나타난 것은 사실이나 이것으로 모든 선지자들의 대표로 내세울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여하튼 실제로 모세와 함께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 의논을 했다는 것은 모세와 비등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거한다.
어떤 의미에서 엘리야가 중요한 인물인가? 엘리야의 사적, 행적을 살펴보았다. 엘리야라는 인물이 등장하게된 시기가 매우 공교롭다. 아합이 온 이스라엘의 바알숭배로 망하게 한 결과 이스라엘의 열왕들 중에 하나님의 노를 가장 심하게 격발한 인물로 평가된 직후에 그리고 패역하고 부패한 가나안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표징이라할 수 있는 여리고의 폐허를 다시 건축함으로써 다시 가나안땅이 정복되기 이전의 상태로 환원되었다는 암시를 주고 있다. 가나안 정복의 의미는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사 애매한 백성을 도륙하고 거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심으신 것인가? 하나님께서 무조건 사랑하시고 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것은 사실이나 동시에 가나안의 아모리 족속은 나름대로 망해야 할 이유가 있다.
창 15장에 아직 죄악이 관영치 않았다 함으로 이들이 망하는 것은 그들의 관영한 죄악 때문이다. 가나안 정복은 사랑하는 백성에게 삶의 터전을 베푸시는 은혜역사인 동시에 죄악이 관영한 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 달리보면 하나님은 이땅에서 가장 부패하고 타락한 가나안 땅에 죄악을 멸하시고 그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신다는 것이 가나안 정복의 의미다. 처음에 들어가서 길르앗에 진을 치고 최초로 여리고를 함락한 다음에 아이성을 무너뜨리고 다음에 팔레스타인 핵심인 여리고와 아이를 멸한 다음에 한 일이 무엇인가? 그리심산과 에발산에서 율법을 낭독하고 축복과 저주를 선포하는 일이다.
그런데 상상을 해보라.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주시리라한 땅에 들어가서 그곳의 거민, 성들을 멸한다음에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율법을 선포했다는 사실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땅은 하나님의 법에 의해 다스리는 땅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통치영역이다. 그런데 그리심산과 에발산의 위치가 어디인가? 세겜이다. 세겜이라는 곳이 역사적으로 어떤 특징을 갖는가? 창12장에서 출발하여 세겜땅에 이른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이 땅을 약속으로 주셨다. 이곳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겠다고 최초로 계시하신 곳이다. 이런 곳에서 율법을 선포했다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죄악이 관영한 땅에 죄를 멸하시고 그의 거룩한 나라를 세우시기 시작했다는 선언이었다. 가나안 정복이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를 갖는가하면 바로 이 사건에 있어서 죄악의 세력이 멸한바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신호가 여리고성의 함락이다. 여리고를 영영 폐허로 남겨두어 이 사실을 알리게 했다. 그런데 아합시대에 이 곳을 재건했다. 이 말은 이전 상태가 무로 돌아간 것이다. 아합 시절은 이런 의미를 가진다. 바알숭배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무너지고 나중에 엘리야가 고백하듯이 주의 언약을 범하며 주의 선지자를 죽이고 나만 남았다고 고백하듯이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히 붕괴된 것이다. 이스라엘은 여리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바로 이러한 때에 엘리야가 등장한 것이다. 기근을 선포한다. 내가 다시 말할 때까지 비가 내리지 않으리라. 삼년 기근후에 엘리야가 나타나 이스라엘로 배도케한 원흉이라할 수 있는 바알선지자들과 대결을 벌인다. 그 목적은 무엇인가? 누가 참 하나님이냐는 것을 가리기 위함이다. 이것외에 또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마음을 돌이켜 회개케 함을 깨닫게 하려함이다.
불이 내리자 조금 전까지 묵묵부답이던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참 하나님임을 고백했다, 무너진 여호와 신앙이 회복되고 비가 내림으로 하나님의 노가 풀렸다. 그리고 바알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로 데리고가 목을 쳤다. 그러므로 핵심세력을 척결했다. 그러나 이것은 잠깐 동안의 일이었다. 이스라엘의 타락과 부패는 이 정도로는 치유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이후의 사건에서 나타난다. 이세벨이 조금도 마음이 꺽이지 않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나섰다.
엘리야는 크게 실망해서 영적회복을 이루리라고 계획했지만 무참하게 실패로 돌아가자 주여 내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한다. 나는 내 열조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고 한다. 지금까지 이스라엘 역사를 이 지경으로 몰고간 자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나 역시 이스라엘의 배도를 돌이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 엘리야를 호렙으로 부르신다. 언약을 맺고 그의 백성으로 선포했던 장소로 부른다. 엘리야에게 스스로 고백하게 한다. 왜 왔느냐? 엘리야가 호렙산에 이르게 된 의미가 무엇인지 밝히신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을 송사하고 그들의 죄를 논하되 저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고 하나님의 제단을 헐며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이고 나만 남았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붕괴도었음을 고백한다. 그로 하여금 굴밖에 서라 하신 다음에 하나님께서 큰 바람과 지진과 불을 지나가게 하신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고 마지막에 꺼져가는 들릭락 말락한 음성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직감하고 얼굴을 가리우고 하나님이 배도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방침을 밝히셨다. 아람과 하사엘을 왕으로 세우고 님시의 아들 예후를 왕으로 삼고 엘리사를 네 후계자로 삼으라고 한다.
이 뜻을 밝히시기를 하사엘의 손을 피한자를 예후가, 예후의 손에서 피한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고 한다. 삼중 그물의 심판을 통해 철저하게 한 사람의 악인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게 심판하시겠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이스라엘 미래의 전부는 아니다. 바알에게 무릎꿇지않은 칠천을 남기시겠다고 했다. 이스라엘을 철저히 심판하는 가운데도 남은 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명맥을 남길 것을 말한다. 모든 정경 선지자들의 핵심이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이다.
그렇게 보면 변화산에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논할 상대자로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것이 단순히 사역의 비중에 있어서 엘리야가 모세에 필적하였다, 대등하였다는 점에서가 아니라 모세와 엘리야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흐름을 관통하는 것을 대변하는 점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출애굽에서 시작되어 시내산 언약체결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것이 엘리야때에는 언약이 파기되고 심판이 선언된다. 동시에 남은 자의 구원이 선언된다. 굴곡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시내산 언약으로 인해 지탱된 것이었다. 그런데 엘리야의 때에 파기되었다. 이것을 보면 출애굽이후 엘리야의 때까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보여준다. 이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단순히 모세와 엘리야라는 극히 두 중요한 인물과 그의 죽으심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떠나서 역사적인 흐름에서 의논했다는 것이다. 변화산에서 일이라는 것은 그 사건의 의미를 면밀하게 파악할 경우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한번에 조망할 수 있게 하는 사건이다.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를 극히 간략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후에 역사를 보면 엘리야를 통하여 선언된 계시가 그대로 이루어진 역사이다. 아합왕조는 어떻게 붕괴하는가? 아합 자신이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한다. 그것과 더불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예후가 반란을 일으킨다. 그 반란의 시작이 어떻게 되는가? 엘리사가 보낸 사환이 예후에게 왕으로 세웠다 그러니까 달려가서 쑥밭을 만들어 버린다.
엘리사 이전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진척될 것인가 알려지는 사건이 있다.
갈멜산은 어디에 있는가? 이스라엘의 북쪽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브엘세바에 이러러 천사의 음식을 먹고 광야 40일을 여행한 것은 출애굽과 연관이 있다. 그가 돌아가 엘리사를 후계자로 삼는다. 다음에 여리고, 길르앗 다음에 요단강을 건너간다. 이스라엘의 정복할 때 들어온 순서와 역순이다. 여기서 엘리야는 승천한다. 엘리사가 엘리야를 이은 후계자로 선언된다. 이러 엘리야의 행로는 언약파기, 심판이 선언되고 다시 돌아오는데 정복순서를 역으로 올라가 승천하였다는 것은 앞으로의 이스라엘 역사가 은혜로 세우신 것을 뒤로 물리는 원점으로 돌려버리는 역사일 것을 암시한다. 이런 내용까지도 나중 선지서에 그대로 드러난다. 아모스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를 옛 근원으로 되돌려 버리는, 환원시키는 하나님 역사를 무로 돌려버리는 것을 얘기하고 있다.
예후가 정권을 잡고난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엘리야는 예후를 왕으로 세운 뒤에 다메섹으로 간다. 하사엘을 만나서 그의 얼굴을 쳐다보니까 하사엘이 묻는다. 앞으로 네가 이스라엘에 행할 일이 어떠할 것임을 알기 때문에 통곡한다고 한다. 하사엘은 나같은 자가 어떻게 왕이 되겠는가 한다. 왕위찬탈이 이루어진다. 이때부터 이스라엘의 침략이 심해진다. t사마리아 병력이 병거십승의 의미는 이전부터 앗시리아가 강력해져서 팔레스타인으로 내려오는데 소국들이 힘을 모아 이것을 저지한다. 카르카르 전쟁이 유명한 전쟁이다. 북이스라엘 아합이 제공한 병력의 설명이 나오는데 병거 천이백승이다. 연합국의 병력은 전부를 내놓지는 않는다. 그 병력이 천이백승이라면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얼마인지를 보게된다. 계속되는 침입에서 사마리아에서 병거 십승이 남았다면 어느정도 군사력이 약해졌는지를 보게된다.
왜 예후 정권이 들어서고 난 뒤에 이 모양이 되었는가? 하나님은 긍정적으로 말씀, 아합에 대해 행한 것은 긍정적으로 말하고 그에게 4대동안에 왕권을 약속하신다. 자손 사대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는 예후 정권 전후에 살펴보면 안다. 거의 2대를 넘어가는 정권이 없다. 거의 당대다. 왕권을 잡으면 다음 아들대에 혁명이 일어나 계속해서 바뀌는 반역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4대 왕권을 보장받은 것은 엄청나다.
그런데 왜 4대 왕권을 보장하시면서도 아람에 의해 철저히 짓밟히고 유린당하게 하셨는가? 어떤 사람은 예후가 아합을 숙청할 때 굉장히 잔인하게, 아합과 조금만 관련되어 있어도 다 죽여버렸다. 이것은 이전의 정권잡은 자, 나라의 통치력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숙청을 해도 단계적으로 해야 하는데 무지막지하게 한꺼번에 없애버렸다. 그러기에 통치기반, 지도층이 괴멸되었기에 이로인해 국력이 쇠퇴하고 약해져서 아람의 침입을 물리치지 못했다는 것이 세속사의 관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은 아람의 침입은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에 비추어보면 바알신을 숭배한 이스라엘의 심판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그 아들 여호아하스 시대에 와서는 상황이 반전된다. 엘리사가 죽으면서 어떻게 하는가? 왕을 불러서 창문을 열고 활을 쏘라고 한다. 활로 땅을 치라고 하니까 세 번만 친다. 앞으로 이스라엘이 세 번은 크게 이길 것이라는 약속이다. 아모스에 나오는 지역들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아람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곳이었다.
예후왕조에 있어서 아들과 손자에 이스라엘 역사의 단절이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오히려 아람을 이기게 하시고 특별히 몇몇 전술을 통해 아람고 이스라엘이 뒤바뀌게 된다. 여로보암Ⅱ에 와서 이스라엘은 다시한번 부흥기를 맞는다. 솔로몬 시대의 영토를 다 회복한다. 8세기 선지자들의 외적인 상황은 굉장히 풍요롭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때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이런 이스라엘 상황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의 심판의 역사는 그렇게 진행된다. 이런 심판의 역사와 아울러 다른 측면도 함께 부각이 되고 있다.
엘리야에게 주신 계시가 철저한 심판과 함께 남은 자의 보존이 있다. 남은 자의 보존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엘리야, 엘리사를 중심한 선지생도들이다. 선지자를 중심으로 새로운 영적 세력이 등장한다. "나의 제자들 가운데 증거를 인봉하라"는 말이 있다. 타락한 가운데 구별된 무리에게 인봉(국한)시키는 말이 나온다. 이런 선지자의 생도들이 상당한 세력이였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의 역사의 중심축은 이스라엘의 왕들에게서부터 남은 자의 무리쪽으로 또 지도자라 할 수 있는 엘리야, 엘리사쪽으로 옮겨온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엘리야가 승천할 때 "이스라엘의 마병과 병거여" 라고 했다. 이것은 실제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힘이 엘리야, 엘리사에게 나온다는 것이다. 엘리사가 죽을 때 왕을 부르자 그도 이스라엘의 병거라고 했다. 나라의 중대한 일들이 누구에게 좌우되는가? 엘리사에게 결정이 된다. 아람이 엘리사에게 찾아온다. 비록 소수의 무리지만 이스라엘 역사의 중심축이 옮아간다. 남은 자의 무리를 통해 이스라엘 역사의 본류가 명맥을 유지했다.
이것이 예후 아들 증손자에 이르게 되면 이스라엘 역사가 외적으로 다시 부흥기를 맞이한다. 다윗 솔로몬 시대에 버금가는 융성기를 맞는다. 남북유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축복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영적 비천한 상황을 인용한 것이 목자없는 양떼와 같다는 것이다. 모세가 자기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울 때 구한 것이 여호수아를 세워 목자없는 양떼가 되지않도록 구했다. 예후가 죽으면서 말한 것이 아합왕조가 무너지면서 이스라엘은 목자없는 양떼와 같을 것을 말한다. 예수님이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말했다. 지도층이 붕괴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괴멸되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이 어떤 심정을 표했는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셨다. 예수님이 12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돌아오자 쉬게 하셨다. 저들이 목자없는 양같음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가르치셨다. 이어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말씀에 귀기울이는 5천명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오병이어를 행하셨다. 이런 이스라엘 상황에 대한 심정은 긍휼이었다. 왕상 14장 에 보면 하맛어구에서 남쪽으로는 브엘세바까지가 이스라엘 전역을 표현하는 어구이다. 다 회복해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고난, 비참함을 불쌍히 여기심이다. 8세기 선지자들이 심판을 선언하면서 그 당시의 외적인 번영, 풍요로움이 배경이다. 여기서 한가지 관심을 끄는 것이 이스라엘의 회복은 누구의 예언을 따르는가? 아밋대의 아들 요나이다.
요나라고 하면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거부했다가 어려움을 겪은 선지자로만 기억하는데 실제 성경은 먼저 요나선지자의 역할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겨 지경을 회복하시라는 은혜로운 예언을 선포했던 선지자로 소개한다. 이것은 요나서의 배경이 된다. 왜 요나가 도망쳤는가와 관련이 있다. 그런데 요나가 이런 예언 사역을 했을 때는 어떠했는가? 동시에 이스라엘의 회복이 진행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예언이라고 하면 이것이 있기전에 예언했을 것이다. 북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하기 전에, 또 과정에서 예언사역을 했으리라고 본다. 8세기 선지자라고 하면 제일 먼저 꼽는 사람이 아모스다. 아모스의 예언을 보면 이미 그때는 이스라엘의 상황이 어떠하다는 것을 내비치는가? 이미 결정적 승리가 있고 상당히 안정적이고 번영한 상태이다. 그러면 요나와 아모스 가운데 누가 빠른가? 요나가 빠르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왜 요나의 이야기를 드는가 하면 요나의 위치가 매우 독특하고 그에게 주어진 특별한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요나서와 다른 선지서의 차이점이 없는가? 내용상의 차이보다 글 자체의 차이점이 무엇인가? 히브리어 성경을보면 크게 두가지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narrative style (오경, 수, 삿, 룻, 사무엘서, 열왕기, 역대기 등)이 있고 또 하나는 poetic style이 있다. 히브리 성경에서 시적인 표현의 특징은 병행적인 표현이다. 시적 스타일을 사용하는 책은 시가서, 욥기, 제일 중요한 것은 선지서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여기에 문체론적으로 예외에 속하는 것이 요나서이다. 이는 네러티브 형식으로 되어있다. 열왕기 뒤에는 요나서가 와야 문체론적으로 스무스하게 연결이 되지않는가 생각한다. 2장에 요나의 기도를 제외하면 전체가 다 역사서나 오경의 기록스타일과 같은 네러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또 다른 면에서도 요나서는 별난 선지서다. 우선 요나가 겪은, 요즘 사람들이 보기에 황당한 사건이 있다. 왜 하나님이 이런 것을 행하셨는가 하면 난감해지기도 한다. 이 사건이 실제로는 대단한 사건이라고 누가 증거했는가? 예수님이 증거했다. 예수님께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메시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보여준 표적이 수없이 많다. 가나 혼인잔치에서부터 오병이어, 칠병이어 등 죽은 자 살리고 귀신을 쫓아내시면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믿지않는다. 이때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원하나 요나의 표적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다고 한다. 이것은 요나의 표적이 표적중에 표적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공유하는 표적이 요나의 물고기 사건이다. 요나가 배속에 삼일간 있었던 것이 정말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인가 아니면 형식적으로 비슷하니까 그렇게 말한 것인가?
만일 예수님께서 요나가 경험한 것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깊은 의미를 공유하고 있기에 표적이라고 했다면 요나의 경험한 것을 단순하게 볼 수 없다. 깊은 의미가 있다. 우선 요나의 경험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사용하셨다. 요나의 표적(semeion)을 어떤 의미에서 사용했는가? 예수님이 자기의 죽음을 상징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요나의 사건을 비유적으로 들어서 말했다. 또 하나는 요나 사건 자체가 당시의 표적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후자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눅 11장에 요나의 표적이 당시에 있어서도 표적으로 기능하였는가 아닌가를 보여준다. 눅 11:30에 요나가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고 말한다. 요나 사건 자체가 심오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표적이었다. 이런 예비적인 이해를 가지고 요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살펴보자.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의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 악이 하나님께 상달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표현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나타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어진다. 40일 만에 이 성을 멸하리라는 심판선언으로 나타난다. 그렇다고 하면 요나는 기뻐해야 하는데 반대쪽으로 도망쳤다. 왜 그랬는가? 나중에 요나가 말한다. 40일 만에 망하리라 하자 왕으로부터 짐승까지 회개했다. 하나님께서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니 요나가 내가 이럴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죄를 지적할 때 알아봤다는 것이다. 망하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기 위해서 그렇게 나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을 살리시는게 두려워서 가지 않은 것이다. 나중의 말씀에서 왜 도망쳤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니느웨는 앗수르 권역에 속한다. 앗시리아는 이전부터 크게 강성했다. 마침 여로보암 2세때 만큼은 앗시리아의 북쪽의 침입으로 잠깐 이쪽을 내버려둔 것인데 이틈에 이스라엘이 부흥했다. 앗시리아에 대한 이스라엘의 느낌은 두려운 존재였다. 요나는 특히 아람의 지배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여 지경을 회복하실 것을 선포하던 선지자다. 그러기에 이들이 망해버리면 좋은 것이다. 이렇다면 요나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요나는 배밑창에서 잠만 쿨쿨 잔다. 풍랑이 일자 이방 선원들은 자기의 신께 기도한다. 그러자 안되니까 요나를 깨운다. 그로 하여금 어떻게 해야 할 것을 말한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이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요나가 도망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의미에서인가? 하나님이 이방에 은헤를 베푸는 것이 싫어서였다.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 그런데 묵시적 섹션이라고 하는 종말과 관련된 다니엘이 받은 계시, 계시록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바다의 폭풍이 어떤 상징을 뜻하는가? 바다에서 짐승이 올라왔다는 다니엘서의 계시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세속역사의 강력한 등장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하면 바다가 뒤집어 요동한다는 것은 세계정치적 상황이 뒤집어 진다는 것을 말한다. 그 속에서 이방에게 은혜가 미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요나가 죽음을 당한다. 요나의 기도를 보면 물고기 배속에서 경험을 스올, 죽음의 영역 경험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보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한 축복관 관련해서 이스라엘이 이방과 맺는 관계가 어떠한가? 아브라함의 후손이 이방과의 관계를 이중적으로 설명한다. 한편으로는 이방과 엄격하게 구별된 무리임을 강조하는 동시에 이방을 위해 기도하는 자이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적이 너를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이다. 선택, 구별된 자체가 이방에게 자기가 받은 독특한 것을 전하는 사명이 있다.
어떤 면에서 모든 민족을 감싸안는 기능을 내포하고 있다. 이방을 향한 축복의 전달자, 은헤의 전달자로 이스라엘의 사명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순간에서부터 밝혀져 있다. 요나의 이러한 태도는 본질적 사명을 망각하고 그것을 거스려 도망치고회피하고 거부하는 것이다. 이방의 빛이 되어야 근원이 되어야 하는 이스라엘이 회피하고 거부하는 이스라엘이 결국 바다에 폭풍가운데, 근동에는 거대한 힘의 변화, 세력판도의 변화, 정치적 격동기가 닥쳐올 것인데 거기서 이스라엘이 죽을 것이다. 침몰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담은 표적이 요나였다. 그런데 요나는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께 자기의 처한 상황을 고백하면서 거기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니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육지에 뱉어내게 하셔서 다시 살게하신다. 이스라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게 아니고 다시 사는 것, 부활로 이어진다.
이 죽음과 삶을 경험한 요나가 이방인에 대한 축복의 전달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게 된다. 니느웨에 가서 죄를 지적하니 또 심판을 경고하니 그들이 회개했다. 물론 요나 자신은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지 못해 여전히 지속되나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행하시는 것을 설명하는 계기가 된다. 이 성이 어찌 되는가 보려고 박넝쿨을 준비한다. 그런데 벌레가 와서 먹으니 죽겠노라고 한다. 그때 하나님이 네가 화를 내는게 옳으냐 묻는다. 그래도 죽어도 옳다고 한다. 하루 아침에 생겨났던 박넝쿨이 없다고 화를 내는데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십사만과 많은 가축들을 아끼지 않는게 어떻게 당연하냐고 물으신다.
이방에 대한 이스라엘의 역할이다. 이것이 요나서의 독특한 메시지다. 이스라엘이 회복된 뒤에 이방을 위해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말한다. 엘리야와 요나를 합해야 8세기 이후에 등장한 선지서들의 메시지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 드러난다.

2001년 3월 20일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호렙산으로 부르셔서 배도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처리하실 것인지 방침과 계획을 알리신 후에 그 계시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로 진행된다. 다메섹으로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왕으로 삼고 님시의아들 예후를 제사장으로 삼고 엘리사를 후계자로 세우라. 하사엘에게 피한자를 예후가, 예후에게 피한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하셨다. 그 말씀대로 엘리사가 다메섹에 찾아가 하사엘을 왕으로 세운다. 그때부터 아람이 강성하여 이스라엘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이던 그때 아합왕 자신이 길르앗 라못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렇게 시작되는 하나님의 심판은 예후에 의해서 아합집이 완전히 숙청됨으로 본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후에 아람의 침략은 더욱 심각해서 사마리아에 남은 병력이 병거 십승 뿐이다. 나라의 치안유지에도 모자랄만큼 무력하게 된다. 심판의 역사가 진행됨과 함께 이스라엘의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이다. 하나님께서 삼중심판을 말씀하시면서 덧붙이시길 내가 바알에게 무릎꿇지않은 칠천을 남기리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따라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역사는 선지자 엘리야와 후계자 엘리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선지자의 무리가운데서 명맥을 이어간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이스라엘의 마병과 병거시여 라고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능력이 이들을 통해 역사한다. 이스라엘을 지탱하고 보호하는 힘이 엘리야, 엘리사에게 있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예후가 아합집을 숙청한 후에 아람이 강성해서 이스라엘이 오히려 쇠퇴하게 된다. 거의 괴멸된다. 그러나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아서 숙청은 받지만 4대까지 이르리라는 약속을 한다. 여로보암 2세로 이어지는데 아들과 손자대에 이르러 이스라엘 역사가 반전되기 시작한다. 철저하게 유린하던 아람과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한다. 엘리사의 예언에 따라 세 번 승리한다. 특별히 증손자인 여로보암 2세때 와서는 하맛어구에서 아라바까지 모든 것을 회복했다고 했는데 이것은 다윗의 전성기때의 지역을 말한다. 이스라엘이 범죄로 상실한 것을 모두 회복하게 하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회복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이스라엘이 진정 회개하고 돌이켰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너무 짓밟히므로 비참한 처지를 긍휼히 여기신 하나님의 은혜였다. 이 일을 예언하고 활동했던 선지자가 요나다.
말하자면 요나는 엘리야에게 계시되고 엘리사에 이어져온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숨겨진 것이 본격적으로 계시되고 기록으로 남은 최초의 정경선지자이다. 흔히 아모스를 주전 8세기 이후에 등장한 첫선지자로 보나 아모스를 살펴보면 여로보암에 의해 이스라엘 지경이 회복되고 상당한 번영을 누리는 시기임을 전제한다. 그렇다면 회복하는 과정에서 활약한 요나보다는 사역의 시기가 뒤가 아닌가 추측한다. 요나가 가장 먼저 등장한 존재였다고 본다. 물론 동시대 사람일 가능성도 충분하다. 그러나 일의 성격으로는 요나가 먼저 사역하였고 뒤이어 아모스가 선지자로 활동하지 않았는가 짐작된다.
요나서는 매우 특이한 선지자이다. 내용에 있어서뿐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 다른 모든 선지자와 구별이 된다. 모든 선지자들이 운문, 시문형태로 된 반면에 물론 중간 중간에 네러티브 스타일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로 보면 운문 형태이다. 그러나 요나서는 2장에 나오는 그의 기도를 빼고는 완전히 오경이나 역사서의 문체인 네러티브 문체이다.
문체적 특성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네러티브 스타일은 사건을 서술하는 문체다. 그리고 일반 선지서들은 대개 운문형태를 띠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가? 일어난 역사를 서술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미래의 역사를 예언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예언의 말씀을 옮기는 것이다. 이 차이가 문체의 차이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운문체로 기록된 선지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그대로 기록한 반면 네러티브는 일어난 사건,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서는 12소선지서에 포함되어있고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 사역한 사람이라고 하면 전체의 흐름으로 봤을 때 그들과 같은 내용을 말하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고, 내용을 떠나서 선지서의 일반적 성격을 떠나서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책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요나서가 자기가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하고자하는 뜻을 담아 전했다면 요나가 경험한 역사를 어떤 시각에서 볼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히 일어난 일을 기록함이 아니고 오히려 역사를 통해 무언가를 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방편이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요나의 경험을 하나님의 메시지를 담고있는 의미깊은 역사로, 달리말하면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게 만든다. 상징적인 사건이란 말은 일어나지 않은 일을 역사로 말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일어난 일이데 그 안에 상징이 담겨있다는 말이다. 단순히 오경이나 역사서가 담고 있는 것과 또다른 상징적인 차원의 의미를 갖는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예수님이 하신 말씀, 요나의 사건을 표적으로 보고 있다. 표적이란 말이 원래 sign이다. sign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아닌 다른 것을 가리키는 표시이다. 표지판에 서울이라고 써있는 것은 표지판이 서울이 아니다. 서울이라는 곳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나의 사건은 이런 기능을 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요나 사건을 삼일 삼야 물고기 배속에 있는 것을 표적이라고 하셨을 때 어떤 의미에서 표적이라고 하셨나? 단순히 요나가 경험한 일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비유로 말하기에 적절하였기에 그런 의미로서 표적이라고 했는가 아니면 요나의 경험한 일이 본래부터 표적이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누가복음 11장에 나오는 말이다. 요나가 그 당시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러면 요나가 경험한 것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표적적인 의미를 가지는 사건인가? 누가복음에 보면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적이었다고 하니 그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이방을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요나의 사건이 이런 의미에서만, 니느웨 사람들에게서만 하나의 표적인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요나의 표적적 사건이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질문을 가지고 요나서를 살펴보자.
1:1 -2하나님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일어나 …
죄악이 상달했다는 것은 소돔 고모라의 경우가 상기된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처리가 있을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요나가 도망해버린다. 요나가 왜 도주했는가? 그 이유는 4장에 보면 니느웨에 가서 외쳐도 온 백성이 회개하고, 요나가 내가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왜 도망했는가 동기를 설명해주는 내용이 된다. 배후에 숨겨진 진정한 의도는 긍휼을 베풀기 위한 것임을 짐작했다. 죽이시고 망하도록 내버려 두실 것이라면 수고롭게 외칠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그런데 가서 죄악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렀다는 것을 전할 이유가 무엇인지 요나는 알고 있었다. 요나는 이 긍휼의 뜻을 확인하고 왜 도망하였는가? 아람이나 앗시리아에의해 여러번 짓밟히는 시대를 산 선지자로서 어려운 일 끝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긍휼을 베풀어 옛지경을 회복하고 이 정도로 사는 일에 기여했던 요나가 다시 그들이 회복된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 니느웨는 어떤 곳인가? 산헤렙때는 니느웨가 왕도가 된다. 니느웨는 앗시리아의 가장 중요한 성이다.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은 앗수르에 가서 전하는 것이다. 요나가 도망한 때가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만일 아모스와 사역시기가 겹쳐서 아모스가 앞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앗수르를 통해서 있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있고 난 뒤에 요나가 도망했다면 그의 도망한 동기가 보다 더 분명해진다. 그러나 여기서 동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문제는 요나가 도망한 사실을 요나가 하나님 앞을 피하여 도망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요나가 도주한 동기가 무엇인가? 앗시리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것이 싫었든지 아니면 다른 것이든 근본적인 것은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간 것이다.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거부, 배척이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 사명을 외면하고 거부하는 행위였다. 다시스로 도망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바다에 큰 폭풍을 일으키셨다. 바로 요나 때문에 바다 전체에 큰 폭풍이 일어나고 배가 깨어질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는 요나만 탄 것이 아니고 애매한 이방인들도 탔다. 모두가 위기에 처했다. 그들은 자기의 신을 부르고 요나는 배밑에 자고 있었다.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인데다가 하나님이 위기를 일으킨 것이라면 애매한 이방인을 위해서라도 부르짖어야 할 형편에 있다. 정상적으로 말하면 요나는 아브라함이 악이 하나님께 상달하여 멸망당할 위기에 처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은혜를 갈구하였던 것처럼 해야 한다. 자기 허물 때문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방인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기대되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이방인 선장이 그를 깨워서 너는 어째서 기도하지 않느냐 책망한다. 어떤 조치를 취해도 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고 판단되자 제비를 뽑아 원인을 찾자고 한다. 이것을 통해 드러난 것은 결국 요나 때문에 위기가 초래된 것이라는 것이 드러난다. 이 위기를 해소할 방법을 묻자 나를 바다에 던지라고 한다. 폭풍을 일으켰다고 하는데 폭풍을 던지셨다고 한다. 그리고 요나는 거기에 자기를 던져달라고 부탁을 한다. 이방인들이 이 이야기를 듣고 두려워한다. 요나를 바다에 던지는 일로 하나님이 책임묻지 않기를 바라면서 바다에 던지니 바다가 일시에 조용해졌다. 이것을 보고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이런 위기를 통해 이방인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참하나님임을 믿게 된다. 하나님께서 물고기 준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고 삼일 삼야를 배속에 있게 했다.
2장에 보면 물고기 배속에서 요나가 기도한 내용을 적고 있다. 기도라고 되어 있으나 성격은 찬송에 가까운 것이다. 그는 환난 때에 부르짖으니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을 찬송하고 있다. 그리고 물고기 배속에서 삼일간 겪은 자기 경험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물고기 배속에 있는 상태를 무엇이라고 하고 있나? 도망쳤다가 바다에 던져짐으로 물고기 뱃속에 있는 것을 스올(무덤 등 죽음의 영역을 가리킴)이라고 표현한다. 죽음의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 그 죽음의 영역에서 경험을 다른 말로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지라도"라고 표현한다.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만을 생각하나 그는 죽음의 본질을 다르게 말한다.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한다. 절망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부르짖는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한마디로 요나는 이 삼일간의 경험을 그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나 죽었다가 그리고 다시 하나님이 내 생명을 살리심으로 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요나의 경험이 당시 사람들에게도 표적이었다고 말했다. 니느웨 사람들에게는 어떤 표적적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서는 잠깐 말했다. 요나가 겪은 일을 보니까 하나님의 일 외면하고 동망치다가 죽었다가 다시 산 것을 말한다. 이것이 니느웨 사람에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아니면 이스라엘에게 더 절실한 의미를 가지는가?
요나가 경험한 것은 선지서이면서 그가 경험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이기에 요나의 사건 자체가 메시지를 갖는다. 표적적 사건이다. 이런 점을 기억하고 요나의 경험을 상징적으로 이해해보자. 하나님이 요나를 통해서 사건만을 일으킨게 아니고 경험을 통해 무슨 메시지를 준다면, 바다는 성경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강력한 나라와 세력들이 나오는 곳으로 나오고 있다, 다니엘서에 보면 짐승들이 바다에서 올라온다. 이 짐승들은 앞으로 나올 강력한 국가들이다. 계시록에도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하면 여기에 요나가 경험한 것이 개인적인 경험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자격으로, 대표해서 경험을 했고 앞으로 이스라엘이 경험할 것을 예시한 무엇이라고 한다면 폭풍의 바다에서 요나가 경험한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부르심, 사명을 거부하고 도망하는 이스라엘로 인해 하나님이 바다의 큰 폭풍을 일으킨다는 말이다. 바다의 폭풍은 당시 세계, 정치 판도의 소용돌이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전쟁 등으로 야기되는 그런 폭풍과 같은 상태를 상징한다. 그런데 바로 요나로 인해 초래된 위기에서 요나 때문에 누가 위기에 휩쓸리는가? 이방인이 함께 겪게 된다. 이런 위기속에서 무엇이 드러나는가 하면 위기가 초래한 원인이 누구때문인지가 드러난다. 요나의 죄, 달리말하면 이스라엘의 죄다. 이 죄로 인해 바다에 던지우게 된다. 그런 정치소용돌이 속에서 망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의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그 가운데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다. 이것이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간의 요나 경험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이다. 그렇다고 하면 요나의 삼일동안의 경험은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경험인데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이 앞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인해 초래하실 것에서 다시 살 것을 보인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경험하게 된 내적 변화를 나타낸다는 것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부름심을 거부하고 도망하던 요나가 이 경험을 하고 나서 돌이켜 니느웨로가서 사명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것이 나온다. 잠깐 불평하는 것이 나오나 이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하신 동기를 분명히 밝히는 것으로 드러나지 큰그림에는 변함이 없다.
폭풍의 바다에 빠져 죽었다가 산 경험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부르심 외면하고 도망하다가 그로 인해 중동전체를 휩쓸었던 전쟁에서 망하였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이 후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뜻을 충실하게 이루어드리는 자가 될 것이라는 내용을 가리킨다.
요나서 전체의 흐름을 감안할 때 요나가 외면한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 사명이 어떤 것일까 짐작되는가? 니느웨로 가서 악이 상달했음을 외치라고 한다. 이면에는 하나님이 은혜베푸실 것을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이스라엘이 외면한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면 이스라엘의 사명은 무엇인가? 이방에게 하나님의 은헤를 증거해야 할 사명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본질에 속한 것인가 부수적인 이차적인 것인가? 창12장에 이스라엘을 세우실 때 이미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너를 복의 기관으로 삼아 너를 인해 모든 족속이 복을 받으리라. 세워질 때부터 복을 전달할 자로 세워졌다. 이방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항상 이중적이다. 구별하신 백성인 동시에 구별자체가 이방을 위해, 이방이 구별된 축복을 받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개방적인 틀을 다 가지고 있다. 세상을 향한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다. 구별된 존재이지만 동시에 세상을 향해 들어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 복음을 전해 동일한 복을 누리게 하는, 세상을 향해 닫히기도하고 열리기도하는 독특한 위치다.
그렇게 보면 여기서 언급된 이방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명,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사명에 속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이 폭풍의 바다에서 죽었다가 다시 사는데 이 요나가 경험한 삼일간의 죽음과 부활은 이방을 위한 선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기는 어렵다. 오히려 그후에 된 것으로 보아 삼일간의 경험후에 주신 독특한 사명을 감당한 것으로 보면 삼일간의 요나의 경험은 이런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전제되어야 할 것, 먼저 이루어져야 할 무엇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만큼 생각하고 또 다른 한가지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표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라고 보여도 불신하고 하늘의 표적을 구하자 다른 표적을 거부하고 오직 요나의 표적만을 주시겠다고 했다. 가장 결정적인 표적, 최후의 표적으로 주실 것이 요나의 표적이다. 이것은 자신의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요나가 사흘동안 예수님 배속에 있었던 사건을 자신의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으로 말하는가? 이 둘 사이에는 깊은 차원에서 의미를 공유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요나가 단순히 사흘동안 죽음경험하고 사흘만에 살았났다는 피상적인 사건으로 표적삼으신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자체가 표적임을 알고 계셨다면 이 두 사건사이에는 깊은 차원에서 의미의 공유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관련하여 요나의 사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요나에게 있어서 물고기 배속의 삼일간의 경험은 하나님의 부르심 외면하고 도망하던 요나가 그 부르심에 응하여 순종하던 요나로 바뀌게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런 것이 다른 선지서에는 어떤 내용으로 나타나는가하면 하나님이 죄악을 인해 심판하신 심판이 이스라엘을 없애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복시키는 구원으로 연결되는데 이경우에서 심판은 정화의 의미를 가진다. 변질된 이스라엘을 본래의 순전한 모습으로 회복하는 역할을 한다. 요나의 죽음과 부활은 그런 의미를 갖는다. 이스라엘이 심판을 통해 근본적으로 변화될 것을 말한다. 신약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와 함께 죽으므로 우리의 부패한 옛사람이 죽고 그와 함께 살므로 새사람으로 살게된다. 신자의 근본적인 영적변화를 뜻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안에서 이루어진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때문에는 아니지만 그의 죽으심은 바로 이스라엘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합하여 죽었다는 것이다. 신자로 하여금 죽었다가 다시 살게하시는 근거로 말한다.
예수님께서 요나의 표적을 주시겠다고 한 것은 대개 이러한 뜻을 염두에 두시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요나서에서 얘기되는 이스라엘의 회복, 변화가 이방에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는 모습으로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나 그 전제가 되는 요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말하기에 겉으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사명, 거룩한 백성으로의 사명이 포함되어 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은 출19장에 나타난대로 너는 내게 제사장 나라가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그런 모습을 통해 열국에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사명, 이것이 이스라엘의 본질적인 사명이다. 요나서는 범죄하여 심판당하는 이스라엘이 다시 부활함으로 그런 본질적인 사명을 잘 감당케하리라는 것을 몸으로, 경험한 사건 자체를 가지고 전하고 있다. 이것이 다른 선지서와 달리 운문형태로 한 것이 아니라 역사를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선지서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가의 설명이다.
이렇게 보면 엘리야 이후에 이스라엘의 역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의 큰 청사진이 그려졌다. 엘리야를 통해서는 언약이 파기되었음을 선포하시고 철저히 심판하겠으나 남은 자를 두시겠다고 했고, 요나서를 통해서는 더 깊은 차원의 것이 드러났다. 변질되었던 이스라엘이 새로운 이스라엘로 거듭나는, 이스라엘이 오래동안 잊고 살았으며, 거부했던 전달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 둘로 나누어 요나서는 이방과 관련해서만 설명하기 쉬운데 실제에 있어서는 요나서도 엘리야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엘리야의 사역을 통해서도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드러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기근을 당하고 나서 원수의 나라 시돈, 사렙다 과부에게 간다. 아람이 철저하게 짓밟는 가운데 이스라엘의 수많은 문둥병자들이 나음을 입지 못했으나 나아만이 은혜를 입게 된다. 이것은 이방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시대나 있음을 보여준다. 나라의 본백성 이스라엘이 배역하였을 때 하나니의 은혜가 이방으로 간다. 로마서는 하나님이 이렇게 행하시는 것이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구약 전체는 맥락이 땋아져 있다.
8세기 이후에 등장하여 집중적으로 선포한 선지자들이 갖는 공통구조, 근본구조가 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

질문) 예수님이 오셔서 제자들을 보내실 때 이방인에게 가지 말라고 했다. 또 수로보니게 여인에게 대해 거절하는 것같이 보인다.
이것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은혜가 개방되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일이었다. 로마서에서도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면서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에서 유대인의 우선성이 먼저 나오는데 이는 복잡한 문제이다. 약속이 우선 이스라엘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항상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하인을 낫게 해달라는 백부장을 보고 이만한 믿음을 보지못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잔치 자리에 앉으려니와 본 좌석에서 쫓겨나리라고 한다. 여기서도 유대인들의 우선권을 말한다. 또 바울도 누가 원가지인가를 말한다. 이런한 우선성을 이해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잘못하면 이중교회성을 말할 수 있다. 또 그러면서 차별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을 함께 취급해야 한다.

질문)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은 그리스도에게서부터이다. 남유다, 북이스라엘 어느 한쪽에 대해서만 말하는게 아니라 실상은 전체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예언이다. 모세언약이 파기되었느냐 존속하느냐? 답은 yes & no이다.

2001년 3월 27일
이사야서
선지자들의 모범으로서 표본으로서 이사야서를 취급하고자 한다. 1:1을 보면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하여 본 이상이라 Uberschrift (superscript) → 정경 선지서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누구 누구의 계시라, 이 계시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밝히고 있다. 다음에는 이 계시가 무엇에 관한 것인가, 계시의 대상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계시가 주어진 시기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이사야서는 이 3가지를 다 밝히고 있다. 어떤 경우는 1-2가지가 빠진 것이 있다.
왜 선지서들은 이것과는 달리 역사서라고 부르는 책들을 보면 일체 서두같은 것이 없다. 그런데 왜 선지서에서는 꼭 서두에 이런 형식을 갖고 있는가? 이 3가지 요소가 함축하는 의미를 종합하면 이 글(계시)은 특정인을 통하여, 특정시대에 특정대상을 향하여 주어진 말씀이라. 이 글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 그의 계시로 받아들여야 하고 결코 인간적인 차원의 글, 사색, 연구, 상상에 근거한 인간의 창작으로 생각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가 유다에 대해서 본 환상이라고 해서 마치 이사야가 깊은 묵상이나 사색 끝에 파악한 어떤 내용인 것으로 오해할 소지가 있으나 약간 표현을 달리해서 다른 선지서의 내용을 보면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다는 표현과 비교해보면 결코 사람이 생각하거나 파악한 것을 기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가 누구에게 주어졌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물론 이 말은 선지자가 전혀 사색, 연구, 묵상하지않고 그들의 감정과 무관하게 기계적으로 기록되었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성경을 살펴보면 계시가 주어지는 방편은 매우 다양하다. 선지자의 사색, 감정, 묵상 정신적인 것과 지적 활동을 통해 주어지는 것도 많다. 다니엘서와 같이 천사가 직접와서 이야기하는 계시도 있지만 누가복음에서 보듯 모든 일을 차례대로 살피고 따져서 본 통상적 계시방식도 제외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록 인간의 일반적 정신적, 지적인 것이 개입했다 할지라도 인간의 창작을 초월한다. 이 모든 과정을 지배하시는 성령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시를 받은 선지자의 이름을 명시하므로 선지자의 위치를 말하고 있다. 계시받은 선지자의 이름은 항상 기록함으로 전달한 자가 누구냐라는 하나님이 누구를 통해 계시한 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전달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괄호속에 넣을 수 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해도 차이가 없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동시 이 계시는 특정시대를 산 특정대상을 향해 주어진 말씀이므로 계시를 이해할 때는 특정시대의 특정인들이 처하였던 역사적 상황, 창출되었던 역사와 관련되어서 이해를 해야 한다. 선지서마다 계시가 주어진 시기가 있다는 것은 계시 이해함에서 시대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암시를 준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이상(계시)라고 되어있다. 여기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것이 어떤 역할을 하는가? 우선 이것이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계시인가 아니면 동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계시인가 라는 질문이 가능하다.
만약 이것이 그들에게도 주어진 계시라는 것이라면 조금 문제가 생긴다. 유다나 예루살렘에 관한 이야기만 있는게 아니다. 열방들, 후일에 나타날 민족과 나라들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러면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계시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말씀이 선포된 주된 대상은 이스라엘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의 교회에 준 말씀이다. 그러면 왜 내용중에 이방에 관한 심판이나 구원이 나오는 내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방에 관한 여러 가지 일들은 항상 누구를 통해서 연결되는가? 이스라엘을 통하게 되어있다.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은 이스라엘을 부르신 목적 자체가 이방에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중보자적 역할을 포함하고 있기에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 이것(계시의 대상)을 자꾸 따지느냐하면, 10여년전에 아모스와 같은 것은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라고 보기보다는 이 시대, 사회에 주어진 말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아모스를 자세히 읽어보면 이것은 일반 사회를 향한 말씀이 아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다. 이 계시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를 분별하지 않으면 적용에 오류와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계시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자꾸 말한다.
원칙적으로 계시의 말씀은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주신 말씀이다. 그러나 내용중에 나오는 이방에 관한 내용은 항상 그 말씀이 이방에게 의미가 있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을 통해서 그렇게 된다. 미래의 이방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확장될 것인데 그런데 이방의 구원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구원을 전제한다. 그것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사19장 애굽에 관한 예언을 보면 나중에 애굽과 앗시리아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무리에 들것인데 이때 이스라엘의 역할이 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에게 확장될 개방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두가지 면을 잘 고려해야 한다.
교회가 반정부 활동을 나서야 하느냐? 실제적으로 참여해야 하느냐는 예민한 문제가 대두될 때 상당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할 요소가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교회밖 세상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느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대두된다. 그러면 이런 말씀이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시기에 관해서 밝히고 있는데, 그 시대의 상황과 관련하여 이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사야가 선지자로 활동하였던 시기를 달리표현하면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서 그의 말씀을 계시하였던 시기를 요담과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당시는 남북 분열시대기에 두가지 왕통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왕하에는 두가지를 다 언급한다. 그런데 남북으로 분열이 되었지만 그 이후에 역사를 보면 북이스라엘 역사나 남유다의 역사나 큰 흐름에 있어서는 같이 간다. 물론 북이스라엘이 망한 후에는 유다가 남은 자처럼 여겨졌으나 그러나 큰 흐름에는 같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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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