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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성결교회의 개척자 김상준과 정빈

에반젤(복음) 2021. 8. 21. 07:20
한국성결교회의 개척자 김상준과 정빈
 
 
 
이명직 목사의 「조선야소교동양선교회 성결교회 약사」에 공식적인 소개와 함께 한국성결교회의 기억에 살아있는 김상준과 정빈은 이 땅에 최초로 성결의 복음을 전파한 열정적인 전도자이다. 1907년 일본 도쿄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과 정빈은 5월 2일 조선으로 돌아와 5월 30일 한국 성결교회의 모체인 염곡(무교정) 복음 전도관을 연다.

김상준은 1881년 평남 용강군에서 경북 의성 김씨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903-4년경 평양시내에서 노방전도대를 통하여 은혜를 받은 후 상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와 대대로 내려오던 가문의 '조선의 봉사제를 폐하여' 집안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이 일로 인하여 부친(김상붕)은 매질도 하고 문중회를 열어 설득도 하였지만 듣지 않아 결국 '불효 자식'이라 인정하고 하인에게 멍석말이를 시켜 들에 내다 버리게 하였는데 그 하인은 '상준'을 문중 사람들 몰래 풀어놓아 피신케하였다.

1905년 초, 고향 용강에서 피신해 일본으로 건너가서 신학공부를 하기로 하고 도쿄 가시와끼에 있는 도쿄성서학원을 찾아가서 입학을 하였고, 4월부터 정빈과 함께 1학년으로 공부한다. 1906년에는 이장하가 입학하여 세 한국학생들이 조선에 복음전도관을 세우기로 하였고 1907년 5월 2일 귀국하여 30일 정빈과 함께 염곡에 한국 최초의 성결교회(중앙복음전도관)를 세우기에 이른다. 중앙복음전도관(현, 중앙성결교회)의 주임은 정빈이 맡고 김상준은 부임자의 직을 맡았다.

1914년 4월 22일 김상준은 이장하, 강태온, 이명직, 이명헌과 함께 한국성결교회의 첫 번 목사안수를 받기에 이른다. 이때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빈은 안수대상에서 누락된다. 김상준 목사는 1914부터 1916년까지 경성성서학원의 교수와 원감직 등을 겸하였고, 1914년 중앙복음전도과 주임, 1915년 아현복음전도관 주임, 1916년 개성복음전도관 주임으로 있다가 1917년 개성복음전도관을 사직하고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떠나 전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부흥회 목사가 되었으며, 1919년 밀양교회를 시무하는 중에 강시영 전도사와 함께 3.1만세운동을 하다 구속되기도 하였고, 1919년부터 문서전도운동과 초교파 전도운동, 출판사역 등을 전개해 오다가 1933년 10월 12일 부흥회 인도의 과로로 병을 얻고 신음하다가 별세하게 되었다. 당시 경성성서학원 부원장 이명직 목사는 "김상준 목사님은 사실상 순교이요 자기의 명이 아니다"라고 하며 슬퍼하였다 한다. 그때 김상준의 자녀 1남 6여였다.

한편 정빈의 정확한 출생 일은 알 수 없으나 황해도 해주 출생으로 전해진다. 정빈은 10세부터 고향에서 예수를 믿었고, 1905년 일본 도쿄성서학원에 입학하여 동기 김상준과 함께 학업하며 귀국후 1907년 중앙복음전도관을 세웠다. 다음해 1908년 8월에는 동양선교회 카우만 총리의 내한으로 주례를 부탁하여 결혼식을 올린다. 1911년 경성성서학원 교수직에 취임하였으나 1914년 9월 30일에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김상준과 서로간의 의견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고, 킬보른 총리의 중재와 김상준의 용서를 구함에도 불구하고 칠판에 12개 조문을 기록한 채 성결교회를 떠나 만주의 대한 기독교회(현 침례교)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17년 다시 돌아와서 '안성교회'를 창립하고, 1919년에는 '인천교회'를 창립하였으나 1921년 재차 성결교회를 사직하고 북간도로 넘어가 자유 전도자가 되었다.

아쉽게도 김상준과 정빈은 1917년과 1914년(1921년 2차사직) 각각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 교직을 사임하고 자유전도에 힘쓰며 성결교회를 떠난다. 이후 최초의 성결교회 목사인 이장하 또한 1920년에 목사직을 사임하고 해외로 유랑한다. 이들이 성결교회를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하지 않다. 다만 1914년과 1921년 이 두 해에 초기 성결교회에서 있었던 정황을 통하여 추측할 뿐이다.

1914년에는 한국성결교회 최초로 목사안수식이 있었고, 1921년은 1907년부터 사용했던 복음 전도관이라는 명칭을 버리고 기존 교단들과 같이 교단의 형태를 갖추며 명칭을 "동양 선교회 조선 예수교 성결교회"로 경화되어 가는 바로 그 해였다. 1914년과 1921년 이 두 해로부터 도출해 낼 수 있는 것은 이 두 해가 성결교회(복음 전도관)도 기존교단들과 같이 목사라는 성직 제도와 교단 조직을 가진 기존교단, 즉 제도화된 전통 교회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해였는데, 이것에 대해 김상준과 정빈, 이장하는 온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특히 목사안수를 받지 않았던 정빈은 더욱 회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이들이 성결교회를 떠나게 된 원인 중의 하나는 일본에서 공부할 때 자신에게 가르침을 준 사사오 목사의 영향에서 받은 결과라고 보기도 한다. 사사오 목사는 1911년 이후 일본의 토착교회 설립에 박차를 가했으나 1913년 4월 선교회가 교단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이것이 동양선교회 초기의 근본 취지로부터 이탈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일이 진행될 때 사사오 목사는 동양선교회 교직 및 도쿄성서학원 교수직을 사임하고 일본 각지로 순회 전도자로 떠났고, 1914년 12월 30일 과로로 인해 46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아쉽게도 김상준과 정빈 그리고 이장하는 한국성결교회의 주도적인 자생적 개척이라는 큰 공헌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성결교회에 남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적 지적을 후학들로부터 받고 있다. 하지만 성결교회 초대 개척자인 김상준, 정빈, 이장하가 한국성결교회를 떠났다는 것이 주는 의미 또한 크다. 이들은 한국성결교회를 세웠을 뿐만 아니라 한국성결교회의 정신 즉 기존의 전통과 틀에 의존하며 전통주의와 교권주의에 만족하는 것, 교회안에 목회자의 왕국을 세워 만족하는 것 아니요 진리로 말미암아 자유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을 행하는 성결교회의 정신을 후진들에게 씨 뿌렸던 것이다.

<출처/호주성산교회 홈피>
출처: 소명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새벽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