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국 교회사

[스크랩] 한국교회사 중요인물, 사건, 단어

에반젤(복음) 2021. 8. 21. 07:18

한국교회사 중요인물, 사건, 단어

1)권철신              
유학자, 천주교 순교자, 교명 암브로스.  이승훈에 의해 천주교에 입교.  1777년
천진암 등지에서  강학회를 열면서 사학 교리  연구. 1801년 신유박해때 정약용,
이가환, 이승훈등과 함께 피체 사형됨.

2)길선주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읽고  개종.  김익두와 함께 재림주와 저나라의 소망을 강
조하여 3.1운동이후 그리스도인들을 불안과 좌절에서 종교적으로 해소 시키려함.  
1927년 "말세론" 저술.

3)김  린  
옥중에서 이승만에 의해 교회 최초의 지식인 계급, 상류층의 교인이 됨.
유신회 일원으로 YMCA를 총독부의 사주로 늑탈하려던 1913년의 음모 붕괴.            

4)김대건              
조선인 최초로 신부 서품을 받음.  1846년 9월15일 새남터에서 순교.  그의 순교
로 근대조선과 서양제국과의 접촉 표면화, 그 결과에 의해 쇄국배외.

5)김범우              
초기 천주교인, 세례명 도마.   이벽의 권면으로 입교, 가족과 친지 전도.  1785
년 명례방 자택에서 종교 집회중 체포, 홀로 단양으로 유배, 순교.

6)김익두              
27세인 1900년 교인됨.  1901년 재령읍 교회 전도사로 시무.
10년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   신유 이적 집회, 신사참배 솔선.  공산당에 의
해 기독교연맹에 억지로 가입.  6.25동란때 순교.

7)김인서              
1932년 1월 신앙생활.  [신학지남]에 "무교회주의자 무찌무라"를 기고.  [신앙생
활] 발간. (3.1운동후 신자들의  신앙적 인격과 지식을 향상시키는 목적)   신앙
의 3대 강령은 복음, 역화, 인화를 체험 증거하기 위해 발간.  조선의 부활과 새
생명을 부르짖는 [신생명]의  필자(특징:한국인의 손으로 만들어지고 운영되었으
며 교파를 초월)

15)박희도              
3.1운동 거사 계획과  별도로 기독 학생 중심의  전민족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중
역시 기독 청년 운동의  지도자였던 YMCA간사 박희도는 학생 지도자들과 민족 대
표들이 합작하여 공동 행동 할 수 있는 역할을 했다.

16)변성옥              
1925년-26년 감리교 협성 신학교 "종교교육" 교수 역임.  1924년 조선 예수교 연
합공의회의 선정 찬송가 위원회 위원.  1931년 새찬송가 개정, 7인별위원으로 뽑
힘.  1930년 발행된 "종교교육"지의 필진으로 수고.  (기독교교육의 토착화를 목
적)

17)변홍규              
1932년 4월 남녀협성신학교가 합동하여 실립된 "감리교 신학교"의 교장.  1940년
4월 신사참배 및 창씨 개명.  일본 학정등을 성토하는 격문이  살포 되었다는 이
유로 학생들과 함께 연행되었고 국가봉공의 한 기관이 될 목적으로 설립된 "기독
신문"에 "기독교사"를 연재했다.

18)서경조
평양신학교 1회 졸업생 7인중  한명으로 1907년 9월 17일 평양의 장대현교회에서
대한민국 예수교 장로회(독노회)가 조직되었고, 독노회에서 목사장립을 할 때 목
사가 되었다.   새문안교회 초대목사로 시무하였다.(1910 언더우드와 동시목사로
서)              

19)서상윤              
서상윤은 만주에 있던 선교사  존 로스와 함께 누가복음을 1882년에 한국말로 번
역하였고, 만주와 국내에서  권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고향 황해도 솔내에
1884년 한국인 손으로 지은  최초의 교회당을 설립했다.  1887년 한국 최초의 장
로가 되었다.

20)서재필          
독립협회 창설자 중 한  사람.  1896년 11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를 설립함으로
서 한국에서의 청년운동을 시작하기도 했다.    

21)소현세자            
병자호란으로 청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1644년 당시 북경 주교이던 예수회
신부 아담 샬  선교사와 접촉을 갖게 되어,  최초로 서양과학과 천주교에 접하게
되었다.

28)유길준              
갑신정변으로 미국유학을 중단. 1885년 12월에 귀국. 반대파에 연금 되었다가 서
양문물 소개하는 서유견문이란 책을 냄.  1895년 김홍집 내각의 개화정책 입안자
로 음력폐지.  종두법시행 등 내정 개혁을 주도.  일제의 한국침략을 극구 반대.  
말년에 기독교에 귀의함.  

30)유억겸  
1927년 감리교의  신흥우, 정춘수, 장로교의  함태영, 전필순 등과 적극신앙단을
창설, 기독교 청년회  회장을 역임.  국제 선교협의회  회원.  중앙 YMCA 회계로
활약하는 등 기독교 사회단체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함.            

31)유형기        
미 유학후 귀국  조선 감리교 교육국 간사로  취임.  다양한 종교교육사업 전개.  
1934년 어빙돈 단권 성서주석 출판.   흥사단 회원으로 활동.  해방후 조선 인쇄
주식회사 관리.   감신대 9대 교장 역임.   피난민 구제 사업과 교회 복구사업에
전력투구 4백여교회 재건.            

32)윤지충  
김범우 집에서  <천주실의> 교리서를 읽고 감명받음.   3년후 정약전의 가르침에
따라 세례받음.  1789 북경에서  견진성사 받고 귀국.  천주교 박해시 고발 33세
로 전주에서 참수당함.  천주교 사상 최초의 순교자중 한사람.            

33)윤치호              
상해 유학시 미남 감리교회에서  경영하는 중서서원에 입학.  한인으로서는 최초
로 남 감리교인이 됨.  미국 유학후 남부지역 순회 강연을 통하여 한국 소개하는
한편,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데 기폭제 역활을 감당.  캔들러 및 알렌에게 한
국 선교 착수토록 간청.  을미사변후 선교기지 개성에 마련.  

35)이승훈              
1783년 북경에서  세례받음.   한국 최초의 세례교인으로서  1784년 3월에 귀국.  
선교는 서울근교에서 5년동안에 신도수를  4천정도로 불림.  그러나 이벽과 마찬
가지로 기독교 역사의 효시를 이루었지만 배교를 하고 세상을 떠남.          

36)이승훈:1864-1930. 장로교 장로. 독립운동가.  33인중에 1인.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자수성가하여  갑부가 되었고 1899년 정주 용동에서 사
숙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을  하였고,  1907년에 안창호에 감화받아 교육,민족운동
에 헌신하기로 결심하였으며,   강명의숙, 오산을 설립하였으며,  1910년에 기독
교에 입문하여 기독교적 이념에 입각하여 교육을 시도하였다.   평양신학교에 수
학은 했으나 졸업은 하지 못하였다.

37)이가환: 1742-1801.천주교인.순교자.실학자.
1784년 3월 이승훈이 수십종의 교리서 십자가상 성화 묵주 들을 가져와 이벽에세
엄겨주니 이벽이  교리서 들을 읽고  감탄하여 중인계급에 전도를 시작하였는데,  
이가환은 이벽을 차차아가 3일간 격렬한 논쟁을 벌인 끝에 굴복하였으나, 자신은
정식교인이 되는 것을 꺼렸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권유하였다.      
1792년 신해사옥이후에는  박해자로 변하기도 하였으나  그는 관직에서 밀려나자
입교하였으며,  그는 1801년(순조 1년) 2월 24일 향년 60세로 순교하였다.

38)이기선: 장로교 목사.신사참배 반대.27세에 입교.33세인 1911년에 평양신학교
에 입학하여 1915년에 졸업하였으며,  1937년 상단교회에서 매일 성경 한장씩 강
해하였으며,  그때 목회자가 되기로 17명이 작저하였는데  그 중에 한 분이 김창
인목사이다.     1949년 5월에 독노회를 조직하였으며,  혁신복구파(고려파와 일
맥상통함)로서 활동하였다.

45)이수정:1842-1886.초기 기독교인.성서번역가
1882년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으로 1882년 9월 도일하여 그해 성탄절,츠다벤
의 안내로 예배에 참석하였고,   1883년 재일 장로교 선교사 녹스의 입해하에 토
오쿄오 노월정교회에서 야스가와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는 5월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하여 한국어로 특별기도순서를 맡았다.
이어 이수정은 요14장으로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발표하였고,  1884년에 순한글성
서인 [신약마가젼복음셔언히]를 번역하였다.   그밖에도 한국 개신교의 선교실시
를앞당기도록 한 노력이다.  1883년에 외국선교잡지에 한국선교를 호소하는 글을
실었고,  개화당의  주요인물들에게 복음을 전햇으며, 언더우드에게 한국어를 가
르쳤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를 들려 보냈다.   그는 1886년 귀국 즉시 애국
충정이 오해된 가운데 처형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6)이용도:1901-1933.감리교 목사.독립운동가.부흥사. 시변리 교회 전도부인으로
있던 모친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 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924년 한영서원 재
학중에 3  1운동에 가담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는 등 4차례에 걸쳐 3년여
의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런 당시 송도고등보텅학교 교장 왓슨선교사는 그를
협성신학교에 추천하여  입학하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28년에
기도 중 환상을 본  이후로 부흥사로 활동을 하였으며,  1930년 연합연회에서 목
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1931년  순회부흥사로 활동하였다.  그의 부흥회는 회개,
기도,사랑이었다. 그는 지병으로 33세가 되던 1933년 10월 2일 원산에서 숨을 거
두었다.

47)이응찬:장로교의 초기신자.  성서번역인.로스역 성서번역에 참가하였다. 매킨
타이어의 조선어 교사.   1875년 백홍준,이성하,김진기등과 우장에서 매킨다이어
에게 세례받음.

48)임기반              
초기 안식교인.  일찍이  하와이로 건너가 이민동포들을 계명하며 감리교회 전도
인으로 활동하는 한편,  신민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1904년 귀국선상에서 송홍조
를 만나 안식교인으로 개심하여 전도사업에 헌신.

49)전덕기  1875.12.8-1914.3.23
감리교 목사.  독립운동가.  1892년 미 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톤과의 인연으로 기
독교에 입교, 세례를 받고 1907년 신학과정을 마치고 목사안수를 받음. 상동교회
에 부임, 본격적인 목회활동을 시작.  그의 목회는 남대문 시장의 천민과 상인들
을 위한 희생적 목회로  널리 알려졌다.  상동청년 학원을 설립하고 항일 민족운
동을 추진했으며 일제의 조작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3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57)주기철  
장로교 목사. 순교자. 호는 소양.  김익두목사의 설교에 감명받아 21년 평양신학
교에 입학.  25년  목사안수를 받은 후 부산 초량교회, 마산 문창교회에서 시무.  
35년 이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최고에 이르던 시기에 평양 장대현 교회에 부
임. 신사참배 반대로 검속.  38년 총회직전에 두번째 검속.  39년 농우회 사건으
로 옥고.  40.7월 옥중 순교.                

58)주문모  (야고보)
중국인 신부.  순교자.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외국인 신부로 중국 소주에서 태
어나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설립한 신학교에 입학 중국인으로는 첫 졸업생.  이
후 북경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후 조선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1794년 입국하여 조
선에서 최초로 성사를  집전하였다.  정약종, 강완숙,  황사영 등과 함께 교회를
세웠으며, 명도회를 창설 천주교리서  집필 및 번역활동에 힘썼다.  그러다 신부
의 체포령이 내리자 6년동안 숨어 전교 하다가 신유박해가 일어나 중국으로 피신
가던 중 마음을 돌이켜 다시 서울로 와서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59)주시경              
  한글학자. 민족운동가. 호는 한힌샘.  배재학당에서 수학했으며 독립협회 조직
에 참여 하였다.   뒤에 [협성회]를 만들고 [독립신문] 편집에 동참했으며 [국문
동식회]를 창설하여 한글보급에 힘썼다.  1907년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었고, 상동
청년 학원에 국어 강습소를  열어 우리말을 통한 애국계몽에 진력했다.  그의 종
교는 상동교회와의 밀접한  관계로 기독교로 추측되나 민족종교에 심취한 대종교
운동을 전개했다.  1914년 급병으로 별세했다.

  60)채정민    1872-1953. 장로교 목사.
     최초의 개신교 세례교인중 한사람인 이성하, 최일형의전도로 믿기시작 그후
마을에 열심히  전도하였는데 이것이 설매동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1900년부터
조사가되었고 1907년 대  부흥운동때 회개에 앞장섰으며 스스로 부흥집회를 인도
하여 부흥운동의  확산의 계기를 가져 왔다.  3.1운동에 가담하였으며 신사 참배
문제가 일어 났을때 분명히 반대입장을 표명함으로 두차례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국기에대한 경례를 반대하여 철회하게  하였다. 김관근 목사와 함께 구식 철자법
으로 된 성서의 문체를 현대식으로 고칠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오늘의성서 문체를
확립하게 하였다.  

  61)채필근(1885-1973) 평남 출생. 장로교 목사. 신학자. 교육가
  길선주 목사의 사경회 참석후 적극적으로 신앙 생활하였다.
7년간 용산리 교회에 설교를  맡아 봉직 하였으며, 10년동안 함북 만주지역을 맡
아 교회를 순회하며 돌 보았고 20여곳에 교회를 세웠다. 1918년 11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일본 유학에 올랐으며  유학시절 한국 YMCA 이사장을 역임 하기도 하였
다.  귀국후 숭실전문학교, 장대현교회 등에서 봉직 하였다. 평양 신학교가 폐교
되자 <조선신학원>  설립 운동을 벌여 1939년  승동교회에서 최초의 한국인 설립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1940년 평양신학교의 재건으로  초청을받아 그곳에 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1943년 종래의 장로교 총회가  일제의 종교 정책에 순응 <일본기독교조선 장로교
단>으로 재조직될때 그는 초대 통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6.25후 부산신학교 교
장으로 6년간 봉직하였다. 그는  종교 , 철학, 역사, 심리학등의 많은 저술을 남
겼다. 그의입장은 중도적 입장이었다.

  62)최관흘 1877-? 장로교 목사, 시베리아선교사, 평북 정주 출생.
  그는 정주 염방교회의 설립자가 되었다. 1909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받
음. 노회로부터 시베리아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어려움속에서 선교하던중 소환명
령을 거절하고 1913년 러시아  정교회로 전향하고 말았다. 그는 면출되었으나 후
에 다시장로교 목사로 복직되었다.

  63)최봉석 1869-1944. 장로교 목사. 전도인. 순교자. 별명 최권능. 평양출생
  1913년 6회로 신학교를 졸업하였고 평북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평북노회에서
만주지방 전도목사로  파송받아 28처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3년 남만 노회장을
역임하였다.  귀국하여 산정현교회 전도목사가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전도하였다.
신사참배가 가결되자 공개적으로 반대하였으며 이로인하여 경찰로부터 피신해 있
다 1939년에 체포되었다.   그는 감방에서 취조를 당할때도 " 예수 천당"을 외첬
고 죄수들에게 전도하였다.  40일금식을 감옥에서 행하였으며 그로인하여 쓰러져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결국 회복하지못하고 별세하였다. 그가 세운 교회는 70여
곳에 이른다.

70)Adam Schall. 1591-1666예수회 중국선교사. 한자명 탕약망 (탕약망)
  병자호란으로 잡혀간 소현세자와  친분을 맺게되었다. 순치제의 배려로 소현세
자가 귀국할때 샬은 그에게  천문, 산학, 성교에 관한 서적과, 여지구, 천주상등
서양물품들을 선물로주었다.

72)C.C.Dallet          
저명한 예수회  사학자로서 <조선성교회사>를 저술했다.   이것을 류홍렬 교수나
백낙준 박사는 <한국천주교회사>로 불렀다.   우리나라 천주교 역사의 초기를 쓴
그는 불란서 천주교 사학자이다.   그는 한국의 종교는 조상숭배라는 형태밖에는
없었다고 말한다.

73)J.McIntyre          
존 로스목사의 동료로서 그와 함께 누가복음을 번역하는 일을 도왔다.  이응찬이
그에게 세례를 받고 최초의 한국 개신교 사람이 되었다.  존 로스목사와 처남 매
부 지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만주 선교사.  1882년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와 영국성서공회의 도움으로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 <예수셩교 요안다 복음젼
셔>를 3천부 발행

76)F.A.McKenzie        
한국인은 예배처소가 하나도 없다고 보고.(The Tragede of Korea 서술) - 구한국
과 기울어가는  역사 서술."한국의 비극"    "런던  데일리 메일"지의 종군기자.  
특파원.  두차례 한국방문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을 취재.  그의 활동은 두절된 외
국과 한국민과 한국교회의 협력에 주요 역할.

78)Feron
청에 가있던 프랑스 선교사로서 75번 참조.  파리외방전교회 신부.  강원도 만산
과 경상도 서북부 지역에서 활동.

80)G.J.Machen          
프린스턴 신학교 교수로서 보수신학의  영수.  박형룡 박사가 많은 영향을 받음.  
미국 장로교 목사.   신학자.  프린스턴이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세력하에 들어가
자 사임하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설립.  나중에 북장로회에서도 파면.

82)H.G.Appenzeller      
미감리회 목사.   한국개신교 최초의 선교사.   1886 감리교 교리서 한글로 번역
출간.  배재학당 설립.  언더우드와 함께 지방 전도여행도 하게 되었다.

85)H.N.Allen            
구한말 주한 외교관.  선교사.  의료인.  처음엔 북장로회 의료 선교사로 상해에
서 활동했으나 1884.9월에 한국에 옴.  선교사의 신분을 감추고 공사관에 소속된
의사로 활동.  고종의 신임을 얻고 시의가 됨. 1885년 광혜원 설립.

86)J.G.Goucher          
미국 감리교 목사.   교육자.  1883년  민영익을 비롯 한국 최초의 방문사절단을
가차안에서 만남.  한국 선교의 필요성 인식.  그의 활동으로 아펜젤러 내외, 스
크렌톤 내외, 그의  모친 등 5명을 한국의 선교사로  보내게 됨.  1907년 한국방
문.  감리교 협성 신학의 설립의 기초를 닦기도 함.

87)J.Gale              
캐나다에서 출생한 선교사.  교육가.  YMCA로 부터 선교사 임명.  1890년 성서공
회 전임번역 위원으로서 성경번역.   북장로교에 소속되면서 마펫과 함께 순회전
도.  황성기독교 청소년 창립위원.

88)J.R.Mott          
미국 감리교  평신도 지도자.   YMCA운동의 지도자 에큐메니칼  운동.  그로인해
W.C.C도 탄생.  1907년을  비롯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여 기독학생 운동을 비롯한
실질적인 기독교 운동을 고무.

89)K.A.F.Gutzlaff      
독일인 선교사. 중국학 학자.   중국개척선교사 모리스에게 감화를 받고 중국 선
교 결심.  1832년 7월  린제이와 함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선박인 로오드 앙허
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한국에 도착.  성경과 전도문서와 의약품을 나누어
주고, 감자종자를 주며 심는법과 저장법을 가르쳐 줌.  서생 양이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한글로 번역.   한반도를 방문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최
초의 한글성서번역자라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

90)M.C.Fenwick          
그는 침례교 목사로서 터론토 대학의 Y.M.C.A 의 파송을 받아 1889년 12월 8일에
인천을 통하여 입국하였다.펜위크 목사는 여러지역에서 열렬하게 전도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선교는 본토인이 하는 것이 훨씬 수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
견하고 토착화를 부르짖은 선교사다.

93)O.R.Avison          
애비슨은 의사로서 제중원에  개설된 의학부가 1899년에 정식으로 의학교가 되자
초대교장이 되었다.그는 민비의 시해  이후에 고종의 신변 주위를 왕래하면서 식
사를 검색하여 함독의 유무를  살폈고,언더우드등과 함께 고종의 벗이 되어 고종
으로 하여금 고독과 공포에서 안정을 하도록 도와 주었다.

96)P.P.Maubant          
나 신부(P.P. Maubant)는  1836년1월 10일에 정하상,조신철등 5명의 교인을 만나
서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인 선교사다.그는 1836년 1월 25일에 서울에 도착
하여 유방제 신부의 집에 짐을 풀었다.그는 3년 6개월동안 선교하였고,또한 외방
전교회의 기본  방침에 따라 토착인 성직자  양성에 착안하여 소년들을 몰색하고
이들를 교육하였다.

97)R.A.Hardie          
하디는 캐나다인으로서 남 감리교 선교부에서 일하였다.그는 강원도 북쪽에서 몇
해 동안 애써도 결실을  얻지 못하다가,1903년 원산에서 있었던 선교사들의 기도
와 성서연구에 참석하여  뜨거운 성령의 체험을 하였다.그는 대 부흥운동에 시발
점에 있었던 사람이다.그는 사경회에 임하면서 정치적 교회적 상황을 부흥운동을
통하여 벗어나려 하였다.

98)R.J.Thomas          
토마스 선교사는 런던 선교회  파송으로 받고 중국에 선교사로 왔다.그 후 이 선
교사는 북경에서 조선내에서의 카톨릭 수난을 알게 되고 조선에 들어오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그는 셔먼호를 타고   조선에와  1866년 병인 교난이 충천하던 때
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칼을  들고 달려드는 한국 병사에게 성서를 주면서 아깝게
세상을 떠난 우리나라의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순교자였다.

99)R.W.Schufeldt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변에서 소실되자,  주청 미국 대리 공사 월리엄스는 청국
정부에 조사를 의뢰하였고,회답을 들은  후 1866년 12월에 군함 워츄세트호를 황
해 연안에 파송하였는데 이  군함의 함장이 슈펠트다.또한 그는 1822년 5월 22일
에 제물포 산양의 천막에서 조선의 김 홍집,신 헌사이에 한미수호조약을 맺었다.

101)W.H.Taft            
태프트는 한국 교회의 반일 애국의 용단과 행동이 을사 보호 조약 체결을 전후해
서 구체화되어,보호조약의 음모가  진행되던 1905년 6월에 하와이 동포들이 목사
윤병구를 대표로 선출해서 보내었을  때,미국 육군 장관으로 소개장을 써준 인물
이다.

000)H.J.Davis

103)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안명근의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일대에 교
계인사와 지식층이  160명이 검속 되었는데,이 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과
병사한 사람을 제하고 123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이 105명이
였다.이들은 1915년  까지 다 풀려나왔으나,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그
정신적인 면에서 대결한 싸움이였다.103)105인 사건          
105인 사건은 안명근의 데라우찌 총독 암살미수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일대에 교
계인사와 지식층이  160명이 검속 되었는데,이 중  고문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과
병사한 사람을 제하고 123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이때에 기독교인이 105명이
였다.이들은 1915년  까지 다 풀려나왔으나,이 사건은  일본과 한국이 최초로 그
정신적인 면에서 대결한 싸움이였다.

106)경교                
네스토리우스가 파문을  당하고,그와 그 일파는  페르샤에서 선교사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여,동방선교의 꿈을 심었고,여기서 훈련을 받은 학생들이 인도난
중국으로  복음의  소식을 전하였다.이때  기독교가  중국에서는  경교로 불리었
다.(635년)이 경교가  신라와 접촉했을 가능성을 몇  가지사건으로 살펴볼 수 있
다.

107)광혜원              
1884년 12월 4일에 있었던 갑신정변,즉 우정국 사건으로 민 영익이 칼에 맞았다.
민 영익의 부상을  알렌이 치료하여고,알렌은  이  일에 기초가 되어 1885년 4월
10일에  광혜원의  설립허가를  받았고,  4월  23일에는  제중원으로 개칭하였으
며,1894년에는 왕립 병원체제에서 그 경영권이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 되었다.

108)교회 재건안        
출옥성도들이 해방 직후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 모여서 한국 교회 재건에 관해 합
심기도 후 1945.9.20에 발표한 원칙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권징은 자책이
나 자숙의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 통회자복할 것.    목사와 장
로의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
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복
구 재건할 것 등이다.

109)그리스도신문      
건양 2년(1897) 4.1 언더우드가 편집하여 창간하였으나 그의 개인 경영이라 해서
선교부의 인정이 없어 1901년에 폐간 되었다.  종합적인 편집과 편집기술이 특징
이며, 다채로운 기사를 실었다.  1905년에 장로교와 감리교의 연합신문으로 발전
하였다.  길선주가 이  신문을 통하여 믿음을 얻었고 한국 정부의 구독으로 상당
히 발전하였다.  

111)기독교도 연맹      
46.11.28에 조직된 북한 노동당 어용 외곽기구로써 왕년의 부흥사 김익두 목사와
산동성 선교사로 갔던 박상순 목사를 감언, 공갈로 가맹시킨 다음 교회를 공산주
의 선전에 악이용하며,  교회의 이름으로 남한을 공격하고, 김일성을 절대지지하
며, 선거에 솔선수범한다는 결의문을 발표케 함.  상부구조만 있고 하부조직이나
성원교회가 하나도 없는 괴뢰 조직으로 정치적 목적의 단체.

113)대한 그리스도인 회보
1896년 2월에 주간신문 "조선그리스도회보"로 창간되었다.  1897.12.8에 "대한그
리스도인회보"로 재개 되었다.  편집자는 아펜젤러.  신문의 내용에는 새로운 지
식의 계몽, 교회소식, 농사개량  등 과학소개, 주일학교 공과, 해외소식, 국내소
식 등이 기재되어 있어  기독교 전도는 물론 서양의 새지식, 새소식을 전하여 주
는 기관이 됨.

114)독노회              
1907.9.17 평양의 장대현 교회에서  "대한국 예수교 장로회노회"가 조직.  네 장
로교(미남,북, 호주, 캐나다) 선교회와 그곳 총회의 인준으로 설립되어 평양신학
교 제1회 졸업생 7명을  목사로 장립.  세계교회와의 유대를 실현하기 위하여 만
국 장로교 연합공의회에 대하여 조직을 통지하고 그 명부에 기입해 줄 것을 요청
하기로 결정.

118)백만인 구령운동    
1909.9 남감리회 연회에서 시작.  20만 교인으로 대강 산술되는 교회로서는 대담
한 표어였다.   선교사들은 1907년대의  국체의 위난이 교회성장의 동인이었다는
점에 너무 오래  기대고 합병전후의 "절망감, 그  실패의 비굴감, 자치국 상실의
좌절감"이 다시한번 이 비율 높은 교회 성장의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고 쉽게 믿
었다.  그래서 월버 챠프만, 찰스 알렉산더 같은 당대의 부훙사들이 원정 출장하
기도 했다.  그러나  동기가 "너무나 인간적"이었기 때문에 사상 최초의 잘 계획
된 복음화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본래 목표를 이루지 못하고 실패.  선교의 동기
는 꼭같은 요인으로 두번, 세번 성공하기 어렵다는 교훈을 남겨줌.

119)복음교회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최태용이 한국적 기독교와 영
적 기독교를 주창하여 35.12.22에 서울에서 교단 창립을 선언함.  신앙고백과 표
어를 채택하고 "복음교회"라 했다.   그리스도의 순육과 영의 기독교를 표방하며
일종의 초교파적인 공동체를 목표했다.  

123)성교촬요            

124)성서조선
1927년 7월 창간된  기독교 계간잡지.  조선성서연구회 중심인물(김교신, 함석헌
등)의 노력으로 발행되던 무교회주의 계열의 신앙잡지이다.  후에는 김교신 개인
잡지 형태로 발행되다가 일제의 압력에 의해 1942년 3월 폐간 되었다.(158호로)            

125)솔내
1873년 존 로스는  매킨타이어와 함께 사상륜등과 함께 만주에서 성서번역작업을
한다.  이 서상륜은 이들에게서 복음을 전해듣고 권서인이 되어서 열정적인 전도
에 들어간다.  그는  고향인 황해도 장연의 솔내(송천-구미포)에 가서 가족과 함
께 복음을 전파해서 한국  최초로 한국인의 손으로 교회당을 세웠다.  솔내는 우
리 교회 역사상 발상지이다.   이 교회는 그 지방 사람들에 의해서 설립 운영 되
었으며, 거의 몇해 안되어 마을의 거의 모든 성인이 교인이 되었다.

126) 시파/벽파
  신유교난(1801)시 조선조의 붕당이 사도세자 문제로 시파와 벽파로 나뉨.시파-
대부분 남인의 시서파로 사도세자에 동정한 파벌.정순왕후는 서교를 탄압하였다.

130) 안악사건
  신민회와 교회세력을 망라한  민족운동의 거점이던 이 지역의 교세를 발본색원
하고자 꾸민 일대  참극.조선총독부는 황해도 지방의 민족주의사상과 신문화운동
을 말살하려는 음모가 성공하자 평안도 중심으로 기독교 탄압.

131) 예수교신보
  1897.4.1.언더우드간행.그리스도신문 -  1905장감연합신문 - 1907예수교신보 -
1915기독신보.편집목표-만물이치인식,책번역,학당설립,연설,신문반포.

132) 육영학원
  1888.언더우드가 학당설립을 정부에 청원 "귀국의 유망청년들을 가르침으로 커
다란 이득을 이 나라에 끼치고자 한다"그러나 정부는 설립을 불허.

133) 이북 5도 연합회
  1945.11.14.평양에서 평안도,함경도,황해도  지방의 노회대표들이 회집.잠정적
총회대행기관을 설립. 1.잠정적 총회대행 2.교단규칙 존속 3.전국교회의 과거 죄
를 자복 교역자는 2달간 근신 4.신학교경영 5.독립기년전도
137) 자강회
  기독교 청년회와 연합하여 친일 일진회 신문사파괴. 애국독립운동기관.

138) 장감연합협의회
  장,감의 에큐메니칼  운동.1918.5조직. 목적-1.기독교내의  양교회 일치정신과
친목도모 2.양교회의 협력 그러나 두교회의 신경,예배모범,치리권은 불간섭.장로
교-만주,감리교-시베리아 3.양교회 교역협력,상호지식교환,사업조직확장.

139) 장로교 신학교육원칙
  1896.남장로교의 W.D.Reynolds가 규정. 대의-1.목사는 영적경험을 소유한 영적
인간 이어야 한다 2.성서말씀을 핵심적으로 가르쳐서 기독교회 중심의 역사와 진
리를 철저히  교수 3.목사의 교육정도는 한국교인의  지적 수준에 상응하는 정도
결국 한국교회 신학의 빈곤성을 초래.

140)재건파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교파.   해방후 이들은 한국교회와 일제의 강요에
굴복했던 교회지도자들에게 철저한 회개와  숙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의 지
나친 독선적 자세와 교권을 쥐고 있던 제도권 교회지도자들의 반발로 숙정작업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들간의 노선갈등으로 합치된 재건운동의 전개는 그
리 활발하게 이루어 지지 않았다.              

141)적극 신앙단        
1932년 당시  YMCA 총무였던 신흥우를 중심으로  하여 조직된 초교파 신앙운동단
체.  이들은 자연과 역사에 나타난 계시, 하나님 주심주의, 평등, 자유, 봉사 등
의 적극적인 신앙고백을 하고 YMCA 조직을 이용하여 신앙운동을 전개했으나 한국
교계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민족주의적 색체로 인해 일본의 심한 견제 속
에서 와해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적극적 갱신과 선구적인 방향성등이 평가 될
만 하다.

147)조선기독교 연합회  
145)조선 신궁          
149)조선물산장려회      
151)조선전시보국회      
152)조선책략            
153)창문사              
157)춘생문 사건        
158)출옥성도  -- 재건파          

159)토사교문          
토사주문(토사주문)과 토사교문(토사교문).   신유교난(1801)을  거친 후 중국에
보낸 천주교 박해에 대한 설득과 이해를 청하는 주문 및 우리나라 백성들에게 반
포한 교문.  당시 대제학 이만수가 지은 것으로 주문은 혹시 중국인 신부 주문모
가 희생자들 중에 있을 것을 두려해서 청의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변명하는 내용
이고,  교문은 천주교 박해의 경위와 이유를 설명하고 처벌내용과 앞으로의 전교
를 금할것을 엄명하고 있다.

160)파리외방전교회      
1658년 7월에 파리에  창설된 천주교 선교단체.   이들은 수도 서원을 하지 않은
재속 사제들을 포교지에서 3년간의  수사기간을 거친 후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하
여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한국에는
1825년 한국천주교회가 신부파송을  교황께 요청하자 교황청은 파리외방전교회에
이를 의뢰, 지금까지 170여명을 한국에 파견하였으며, 김대건 신부를 사제서품케
했으며, 기해교난때는 순교자들도  있었다.  현재는 서대문구 충정로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165)혁신교단            
감리교에서 일어난 일종의 군소교단 운동으로 신약성서를 기초로 하여 교의를 선
포하고 구약성서에 나타난 유대사상을 일체 없애기 위해 구약성서를 새로운 해석
교본에 의해 해석,  가르쳐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감리교 내부의 반발로 결국
해체됨.

166)협성신학교          
1907년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조선인 교역자를 양성하기 위하여 세운 감리교
신학교이다.

167)협성회
이승만과 서재필을 중심으로 1896년 11월 배재학당에서 세워진 한국 최초의 청년
운동단체이다.              

168)황국협회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에 반대하기 위하여 수구, 보수세력이 조직한 단체로서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에  저항하여 사회 불안을 조성하였다.   결국 두 단체
모두 1898년에 해체됨으로 독립협회 주도의 개혁운동은 중단되었다.            

170)황민 공동회

172)Commity Arrangement
장로회 정치를 쓰는 미션 공의회에서 남긴 업적으로 선교 지역의 분할 정책을 뜻
한다.  이것은 선교단체가  여럿이기 때문에 노력을 중복하거나 필요없는 경쟁을
하지 않도록 연합적으로 분할한 프로그램이다.

175)Korea Mission Field
1905년 언더우드 부인이  주간으로 발간한 것인데 여기에 한국선교와 교회성장에
관해 자세한 보고와 자료가 풍부하게 들어있는 광범위한 편집체계로서 교회사 연
구에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1942년 폐간 되었다.

176)Korea Review        
1901년 창간된 잡지로서 한국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선교사들의 논단이었다.


8)김인준                
1926년 구약 번역 작업의  개역위원.  공인역(개역)성서 번역 위원.  1936년 1월
21일 부터  1938년 7월  19일까지 계속된  장로교 계통의  "기독교보"의 집필인.  
1923년 "조선 야소교", "장로교 신학교우회보" 편집인.
평양신학교 교장 역임.  1947년 소련군에 잡혀 순교.

9)김창식
1901년 북감리교회 집사 목사로  장립.  입교 예식과 결혼식 거행권을 부여받음.  
1894년 청일전쟁 직전에 평양교회  박해로 수난, 선교사들의 힘으로 어명으로 석
방.

10)남국억              
상동감리교회 청년회의  "성동 청년학원"에서  영문학 가르침.   독립협회 주도.  
교회의 지향은 겨레와의 운명적 공감이라 생각.

11)남궁혁              
1926년 발족한 신약 개혁자 회의 개역위원으로 1930년 남장로교의 크레인과 함께
참여.  공인역(개역)성서 위원.  1911년 "주일학교위원회"의 13인 실행위원중 한
명.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신학발전에 기여.  "종교교육"의 필진.  "반도지
광"의 편집인.  1934년  장로회 23회 총회에서 신약전서를 신철자화 할것을 청원
가결.  6.25전란때 납치 됨.

12)민영익
미주에 파견된 "특명전권공사".   감리교의 한국 상륙에 공헌함.  가우처목사 만
나 선교동기 부여.  1882년  8월 김옥균과 함께 일본 국정 사찰.  갑신정변시 알
렌의 의술로 회복.  기독교와 왕실을 가깝게 함.  1884년 9월 육영공원(근대교육
실시기관)을 고종께 건의하여 발족.

13)박관준              
장로.  독립운동가. 의료인. 순교자. 방탕한 젊은 시적을 보낸후, 1905년 기독교
에 입신하여 의학을 공부, 개천군에 십자의원이라는 병원과 군우리교회를 설립해
의료선교를 폈다.  일제의  신사참배등 탄압이 가중되자, 그 정책적 부당성을 국
내외 관계자들에게 지적, 굳건한 소신과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일운동과 반침운동
을 벌였다.  1939년  일본 제국국회의 의사당에 밀입하여 의회 진정서를 뿌린 사
건으로 41년에 투옥 금식기도로 병을 얻어 평양 기독병원에서 별세했다.

14)박인덕              
여성 독립운동가.  교육가.  이화학당을 졸업후 모교에서 강의,3.1운동에 가담해
옥고 치른  후 대한애국부인회, 적십자회 총지부  임원으로 지하 운동 계속했다.  
그후 콜롬비아대학원을 졸업하여  미국내에서 200여회의 강연을 가지면서 한국을
알렸다.  "인덕 실업학교" 창설.

22)송창근              
서울의 피어선 성경학교를 졸업.  1931년 덴버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받고, 평양
산정현교회 시무.  37년 10월 [수양동우회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름.  특히
보다 진보적인 신학사조의 소개에 있어 큰 역할을 감당했다.  해방후 조선신학교
장에 취임 바울교회  개척 시무.  납북되어  사변중인 51년 7월 별세하신 것으로
전해짐.

23)신석구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1인.  순교자.  1908년 기독교에 입교.  민족운동과 전
도활동에 나섰다.   1917년 목사안수를 받고 서울  수표교회 담임목사로 재임 중
3.1운동을 맞아 2년반동안 옥고를  치름.  또한 일제 말기 신사참배 반대 입장으
로 곤경에 처했고, 1946년 3.1절 기념방송사건으로 구금.  48년 9월 [기독교민주
당비밀결사사건]으로 다시 검속.  6.25때 총살됨.

24)신흥우              
1901년 부터 독일어 학교에서 어학공부를 하면서 토요일 오후마다 토론회를 열어
개화사상과 독립의식의 선양에 참여하다  1903년까지 옥고를 치렀다.  1911년 배
재학당 학감에 취임, 이듬해  최초의 한국인 학당장이 되었다.  18년 [배재학보]
를 창간, YMCA에서 농촌운동에  힘씀.  27년 장.감 양교파의 주요 교계 지도자를
규합하여 기독교회의  적극적인 대 사회개혁을  강조하는 적극신앙단을 조직하여
활약하였다.  48년 영자신문 창간.

25)양전백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 일인.  최초의 장로교목사 7인중 일인.  1892년 김관근
의 전도로 서울 도사경회에  참석하고 기독교에 귀의했다.  구성신시교회를 창설
하고 1894년 마펫 선교사에게  세례받음.  96년 휘트 모어 의료사가 되었고 선천
선교부의 개설과 함께 서천읍교회를 시작했다.  1907년 최초의 7인목사로 안수를
받았고, 1909년 선천읍교회 담임목사로 부임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 모진 고
문과 옥고를 치뤘다.  또한 3.1운동 당시 시위를 주도 3년동안 옥고를 치루고 선
천에서의 목회와 학교 사업, 저술활동에 전념하던 중 별세.
26)양주삼              
감리교 목사.  한학을 수학한 수 1898년경 기독교에 접하고 그 이듬해 입교를 결
심.  파커에게  세례를 받음.  1930년  한국에 각기 선교하던 미국,남북감리회가
합동하여 [기독교  조선감리회]를 조직하는데 주역이  되었고, 그 초대 총리사가
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만주지방선교 관리자로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해방후
초대 대한 적십자사 총재에 취임 6.25 사변중 납북됨.
27)오기선              
1908년 노블선교사에 의해 함종교회  전도사로 정식 파송됨.  1911 협성신학교 1
회 졸업 안수.  YMCA운동에  적극 가담.  일본에서 유학생을 위한 교회개혁.  귀
국후 3.1운동 만세 준비에 참여.  특히 천도교와 연합운동이 영향력을 발휘.

29)유명화              
1927년경 원산의 감리교회 소속으로 자기에게 예수가 친림했다고 말함.

34)이  벽              
조선교회 창설의 공로자.   이승훈을 북경에 가서  수세케 함.  중인계급 상대로
전교에 힘씀.  권일신, 정약용, 정약전, 정약종 등에게 전교.  1785년 김범우 집
에서 안수 받지  아니한 채 신부의 소임 이행.   그러나 후에 모진박해로 배교를
하고 죽음.

   39)이기풍:1865-1942.장로교 목사.순교자.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제 1회
신학생이 되었다.   청일전쟁으로 원산에  갔다가 이곳에서 신도들을 박해하다가
전군보에게  전도를 받고  회개하여 1894년  스왈른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1903년 마펫의 권고를 받고 신학교에 들어가서 한국의 최초의 목사안수를 받게되
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외지선교사로 제주도로 가도록 임명되었으며, 1908년에 상
륙하게되었으며, 성내교회를  비롯하여 여러곳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그는
1920년 전라노회장 및 총회 부회장, 1921년 제 10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1936년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고문으로 건강이 약화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
으나 건강이 회복되지 못하고 1942년 6월 20일 우학리 사택에서 별세하였다.

   40)이능화:1869-1943.구한말 초기의 국학자로 한국문화와 사상을 연구함.  구
한말 관료이자 장로교 장로가 된 이원긍의 장남(독립협회에 활동을 하다가 투옥,  
방거의 입옥,  전도로 기독교도가 됨).  
그러나 이능화는 불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불교도였으나 선친의 종사한 기독
교역사를 정리하여 부군을 추모하는 정성으로 삼았다.  1928년 저술된 [조선기독
교급외교사]는 한국근대화에 있어 정신적의미로 기독교문제를 논의하였다.
그는 1912년 사립 능인보통학교  교장이 되고,  1914년 불교진흥회 간사에 피선,
불교진흥회 월보 불교계 조선불교총보 등을 발간,  불교포교 내지 민족문화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41)이동휘:1873-1935.기독교인 독립운동가.교육자,민족지도자.
1907년 7월 한일 협약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 강화진
위대를 이끌었으며, 1909년 3월 군대 동지들과 의병조직을 모의하다 실패하여 백
령도에 유배되었다가 선교사 벙커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고,  그즈음 기독교인이
되었다.
신민회  창립맴버로,   평양에대성학교,  정주에  오산학교를  설립도 하였으며,  
1911년에는 기독교 105인 사건에  연류되기도 하였다.   그는 1912년 3월 캐나다
선교사들의 후원으로 간도국민회가  조직됨과 때를 같이하여 장로교 교역자 중심
의 구국전도회를 조직, 민족복음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운동이후  브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였으며,  1934년 12월 하바로브
스크에서 강연을 마치고 돌아온 날 밤 기숙사에서 공산당의 흉탄에 맞아 가료 중
사망했다.

   42)이만집:1875-1944. 1900년경 아담스 선교사가 경주에서 전도할 때 그의 전
도로 입교했고,  그후  대교 계성학교의 한문교사로 초빙되면서 남성정교회의 교
인으로 출석하였고,  1909년 7월 15일 장로로 장립되었다.   1912년 부터 브루엘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인근지역을 순회 전도하였고,  이해에 평양 신학교에 입학
하였다.  1917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고,  1918년 남성정교회로 부임하였으며,
어드만 선교사와 함께 교회를 이끌어 갔으며,  1919년3  1운동때는 대구만세시위
의 주동자로 활약하였다.
그후 이만집 목사는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빚어 1923년 이른바 [자치선언]을 단행
하여 경북노회와 남성정교회는 자치파와 노회파로 분열되었다.  그후 조선예수교
봉산교회를 설립하였으며,   몸이 쇠약해지자 금강산에 입산하였고,  목회자들을
위해 수양관을 지어 생활하다가 1944년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43)이상재:1850-1927.기독교인.독립운동가.육영사업가.정치인.
1896년 독립협회를  조직,1897년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의를 진행하였
다.그는 1902년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여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
갔다가 1903년 옥중에서 선교사들이  차입해 준 기독교 서적과 성서를 읽다가 심
경의 변화를 입어 54세에 결신, 입교하였다.   1904년 러일전쟁의 여파로 석방되
어 연동교회에 입적하였고  황성기독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1905년부터 YMCA운동
에 많은 시간을 할애,청년운동에 몰입하였다.
1910년 제 1회 기독학생회  하령회를 조직하여 새로운 학생운동의 기틀을 마련하
였고 이승만을 미국에서 불러들여  학생부 간사로 임명하였다.  그해에 기독교회
의 백만명 구령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를 구국 운동으로 발전시켰다.
1914년 10개의  Y를 규합하여 자주 운영에  성공하였고,  1921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고 1922년 세계학생기독청년연맹의 세계 대회가 중국 북경에서 열릴 때 한
국 대표단을 인솔하고 그 대회에 참여하였다.   그는 1927년 신간회의 회장에 추
대 되었으나 그 때 와병중이었는데 회복되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44)이수광:1563-1628.조선조 문신.실학자.  병조판서 이희집의 아들로서 여러
국가 봉직을 하였으며,  그와 천주교와의 건계는 임진왜란 전후무렵 수차례 사신
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당시 명나라에 오 있던 이탈리아 신부 마테오 릿치의 [천
주실의][중우론]및 중국인 유변 심인기의 속이담 6권을 들여옴으로써 우리나라에
최초로 서학을 도입하였으며,  1614년 지봉유설을간행,  우리나라에 최초로 천주
교와 서양문물을 소개하여 실학발전의 선구자가 되었다. 사후 영의정으로 추증되
었고 순천의 충추서원에 제향되었다.

50)정경옥              
감리교 목사.  외국 유학후  최초 감리대 교수.  미국 유학중 자기신앙고백을 발
표.  "The Korean Creed"(후에 감리교 장경)  이것이 미국감리교회에 만장일치로
채택 되어 예배시간에 고백됨.  소위 한국 최초 자유주의 신학자.  [신학세계]에
서 주간을 맡으며 50여편의  논문을 발표.  32년에는 한국최초로 바르트의 <위기
의 신학>을 소개.  34년에 한국인 최초의 조직신학서인 <기독교의 원리>를 저술.  
이후 만주에서 사평가신학교교장을  역임후 41년 귀국 요양중 친미파로 지목되어
구속.  전남 광주에서 목회하다가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함.

51)정약용              
23세때 이벽을 만나 천주교를 접함.  형과 함께 입교.  그는 정조의 총애를 받아
주요관직을 두루 거쳤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라는 것으로 수난도 많았다.  <황
사영 백서사건>으로 18년간 <전라도 강진> 유배생활때 그의 실학사상이 집대성되
고 귀양에서 풀린 후  배교를 뉘우치고 향리로 낙향 임종시까지 신앙생활과 연구
활동에 몰입.  

52)정약종              
이승훈의 전교로 형과 함께 입교.   교리연구와 전교에 힘써 황사영을 입교.  조
선의 가성직제도 창안, 시행.   천주교 교리를 연구해 전교하는 비밀단체인 명도
회를 조직.   1795년 주문모신부를 도와 전도에  힘쓰다가 신유박해때 사형.  저
서:주교요리.선교전서.

53)정인과              
장로교 목사.  민족주의  운동가.  흥사단의 회원으로서 교회안의 교권정치에 깊
이 관련을 맺고 장로교회의 거대한 교권을 행사하여, 그 대세의 서북장로교 교세
를 배경으로 보수주의 친선교사의  신학을 믿고 에큐메니칼 장,감의 교회와 대결
그 결과 남북의  장로교 분열위기와 한국교회에큐메니칼 운동전체의 향후 성격형
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54)정춘수  1874.2.11-1951
감리교 목사.  1903년  원산 남산 동교회에서 남감리회 선교사 하디의 감화를 받
고 결신했다.  39년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을 형성했으며 어용 기독교회로의
타락을 도모했다.  해방이후  천주교회로 개종해 [나는 왜 천주교인이 되었나]라
는 주제로 대외적 기고를 했으나 변명에 불과했다.
            
55)정하상  1795-1839.9.22.
초기 천주교인. 세례명 <바오로>.  정약종의 차남. 신유교난때 부친과 형이 순교
한 후 대박해로  피폐해진 교회를 재건하기에 힘썼다.   유길준과 함께 신부영입
운동을 전개하여 앵베르 주교  등을 맞아 들였으나 기해박해때 가족과 함께 처형
됨.            

56)조만식  1883.2.1-1950.10.15.
고당 조만식은 장로교 장로였다.   민족운동가. 교육자. 수난자.  한학을 수학한
후 동료 한정교의  권면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영향을 받아
일본 유학 중 간디의 무저항주의 사상을 배움.  19년 3월 독립을 위해 상해로 망
명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름.  1922년에는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여 3.1운
동이후 민족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1946년 김일성일파에 감금(고려
호텔)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피살됨.            

64)최태용 1897-1950. 복음교회 목사. 순교자. 함남 영흥군출생
    동경유학시절 우찌무라를 만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관동대지진으로 일본의
한국인 대학살을 보고  <일본에게보낸다>라는 소책자를 통해 일본을 비판한뒤 귀
국하였다. 그는 <신 생명>등의  잡지에 기고하여 기성교회와 사회개혁 의도를 크
게피력하였다. 1925년에는 <천래지성>이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문필활동을 본격적
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YMCA에서 신앙혁명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그는 점차 무
교회주의라는 용어보다 반교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메이지 신학부에 다
시 유학을 하였다. 1932년에 졸업을하고 근본주의와 신비주의를 배격, 조선의 신
학, 조선의 신학교 설립을 주장하면서 전국 순회 집회를 열었다. 이때 대표적 동
지들과 복음교회 창립 멤버가 된다. 1935년 기독교 조선 복음교회를 창립하였다.
그는 민족운동에도 헌신하여  일제의 요주의 인물이되었다. 국민계몽운동에도 나
섰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도 벌였다. 1950년 공산주의자에 의해 순교 당했다.
  
65)한석진 1868-1939
     김관근으로부터 전도를받아 서상륜 백홍준 등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마펫
에게 세례받았다. 그는 마펫과 함께다니며 선교지를 물색하였으며 평양을 서북지
방의 선교의 전초기지로 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깊이
관여하며 민족운동에  깊이 참여하였다.  그는 신의 , 구동, 명의, 신애 등 학교
를설립하여 민족교육에도 앞장섰다.
     또한 그는 1907년  한국 장로교회의 최초 7인  목사중 1인이 되었다. 제1회
독노회 서기로 선출되었고, 장로교회  신경 제정위원이 되어 한국 장로교회의 정
치의 기초를 세우는데 기여하였다.  예수교회보의 사장을 맡아 언론을 통해 기독
교계를 지도해 나갔으며 그의 주장은 <합일론>이었다.
   그에게는 <한국 기독교의 개척자>란  칭호가 주어 졌으며, 그는  한국인에 의
한 한국교회를 창설하기위해 노력한 인물이었다. 그가지은 5곳의 예배처(장대현,
장천, 안동, 문창, 신의주)  를 비롯하여 금강산 기독교 수양관을 한국인의 손에
의해 지은 것이라든지, 마펫이  월급을 주려 할때 받지 않은것, 선교사들이 한국
땅에 더 이상있는 것은  유익하지 못하다고 주장한 것등은 강한 주체의식을 드러
내준다. 그는 선교사  중심의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문제로 폐쇄되고 조선신학교
가 한국인의 손에의해 설립된다했을때 병상에서 기뻐했다고한다.
    그는 개화된 인물로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을 안동교회에서 철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1923년 총회에서 여집사제도  채택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를 통과 시키기
도하였다.

  66)홍택기 ?-1950, 장로교 목사, 총회장, 수난자.신사참배 가결 총회장
      규칙의 권위자란  칭호를 받을 만큼  교회헌법 해석에 능통했다. 그관계로
노회서기로부터 1938년 제 27회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 되었다. 그 이튿날 그
는 일본의 강요에 굴복하여 신사참배를 가결한 총회장이되었다.

  67)황국주 1930년대신비주의자, 황해도 출신,
    그는 용정중앙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점차 열광적인 신비주의에
사로잡혀 왜곡된 일원적 신비주의자로 전락하였다. 외모를 예수의 풍채와 방불케
하여 예수의 목이 자신의 목위에 붙었다는 황당한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황국주의 신비주의는 도덕적 완전주의가 그 특색이어서 그 자신은 죄를 범할
수없다 라는 교만에까지이르렀다. 서울 도착후 삼각산에 일종의 기도원을 세우고
목가름이나 피가름을 교리나  실제로 가르 쳤으며 이가름의 과정을 영체교환이라
고 주장했는데 일종의 혼음이었다.  1933년 평안도의 안주 노회가 이단으로 정죄
하였고, 가을 총회도 그를 정죄했다. 그는 1930년대 한국교회에있던 신비주의 맥
락의 하나를 이루어 열광적이고 광적인 유형의 극단성을 나타내었다.

  68)황사영  1775-1801. 경상도 창녕출생.   천주교인, 순교자,
    그의 백서는 1801년(순조1년)에 발생한 신유사옥 때 천주교도 황사영이 북경
주교 탕사선에게 보내려했던 밀서이다. 주문모에게 사사 영세받음.
     정약용의 배교로  황사영을 의금부에 고발하게됨으로  체포령이 내림. 그는
배론으로 들어가 토굴속에 피신함. 그곳에서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 이
러한사실을 청국에 알릴것을 결심함. 그는 황사영 백서를 작성하였다. 백서의 내
용은 작성동기, 순교자들의 간단한 약력, 주문모신부의 순교경위, 끝으로 조선교
회의 재건을 위한 방안과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위한 계책을 논하고있다.

  69)A.J.Brown 미국 북장로교 목사, 선교사, 신학박사.
   1903-29년에 외국선교 위원회 총무로 봉직하였다.  1901년과 1909년에 두차례
에 걸처 한국을 방문하였으며 선교의 진행상황을 실제로 답사하면서 현지에 적합
한 선교 정책을 수립하여 한국교회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 비록 일부에서 친일적
인 선교정책을 편 인물로  평가는 받고있지만 그는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업에 지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선교의 현주소를 정확히파악하고 일을 추진하여 한국 선교의
성과를 거두게한 총수로서의 공적을 높이 평가 받을 만하다.  

  71)C.A. Clark    1878-1961.  미북장로회 한국선교사, 신학자 교육가. 한국명
곽안련. 미. 미네소타 출생.
    1902년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내한하였다. 승동교회에서 20여
년간 시무하며 다방면에 걸처  선교활동을 펼쳤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인 관습이
던 계급관념과 남녀 차별의 부당함을 인식, 그 형평운동에 크게공헌하였다.
    1908년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로 취임하였다. 실천신학과 기독교 교육분야를
가르쳤다. 그는 <신학지남>의  편집책임도 맡았으며,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
서 발행키로한 <표준성경주석>의  발행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41년에는 세계평
화 기도문사건에 연루되어 일제에의해 수난을 당했고 본국으로 강제 추방되었다.

74)E.A.Kilbourne (킬보른)      
미국의 감리교 신자로서  카우만(C.E.Cowman)목사와 함께  성서적인 순복음을 동
양 여러 나라에 전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1901년 일본에서 동양 선교회 복음 전
도관이라는 간판을 달고 선교를 시작했다.  캐나다 출신의 선교사 카우만의 초청
으로 일본에 온 것.  토마스 감독 후에 한국 선교 책임자로 내한하여 동양선교회
를 성결교회로 바꾸어 조직.  조선 감독으로 취임.

75)E.Oppert            
프랑스 선교사 페롱(Feron)이 신교  자유 획득과 조선의 개방을 목적으로 대원군
을 위협하기 위해서 협조를  구했던 유대계 독일인 상인으로서 대원군의 생부 묘
소를 도굴한 사람.   중도 포기하고 퇴거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천주교
박해 시작.

77)F.Xavier            
예수회의 중심인물로서 포르투칼 왕의  요청으로 인도와 극동에 파견되었다.  그
의 업적은 역시 일본에  대한 최초의 기독교 전교의 체계적 수행.(1547.7)  1543
년에 예수회 조직하여 가톨릭 쇄신운동을 일으킴.(이그나티오 로욜라와 함께)
              
79)G.Cespedes          
예수회 신부로서 포루투칼 사람.  1577년 42번째 신부로 일본에 입국.  임진왜란
때 군종신부로서 웅천성에 이르러  짐을 풀고 전쟁고아 및 포로들도 돌보아 주었
다.

81)H.B.Hulbert          
미 감리교회 선교사.   목사.  한국정부에서 국립으로 육영공원을 설립하고 미국
에 교사를 요청할 때  1886년에 그가 왔다.  간이 지리서 형식의 <싸민필지>발간
(1891)  코리안리뷰 창간(1901)   고종을 호위하려는 춘생문 사건에 관련.  YMCA
한국에 설치.

83)H.G.Underwood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교육가.  한국교회  선교사가 없다는 소식에 선교사 결
심.  1885.4에 인천상륙.   광혜원에서 강의.  고아원과 고아학교 창설.  연희전
문의 시발이었다.  1889년에는 <한국어문법>과 <한영자전>편찬 간행.
84)H.Hamel              
네덜란드 선원.   1653년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류.   구걸을 하면서 살다가
1666년데 탈출.  14년 동안의 체험을 바탕으로 란선제주도난파기 저술.

91)M.C.Harris          
감리교 선교사로서 우리나라에 북 감리교 연회(연회)가 1904년에 조직되었을 때,
초대 감독에 취임하였다. 반일 저항의 거점이 교회가 되었을 때, 이런 일에 대하
여 해리스는 반대하였고,1906년 6월에 엡워드 청년회를 "교회의 목적을 왜곡한고
정치 목적으로 이용한다 해서 이를 해체시켰다.

92)Matteo Ricci        
이 신부는 이탈리아  출신이며, 명나라의 전교에 성공한 장본인이다.1583년에 광
동에 상륙한 이래 1610년 별세할 때까지 2천 5백여명의 신자를 얻었다.그는 중국
풍속을 존중하고,서양의 학술,종교  서적을 한문으로 번역 출판하였고,그가 쓴천
주실의는 수백년 동안 중국전교에 큰 영향을 끼쳤다.

94)P.Carpini            
몽고가 세계 제국의 건설을 향하여 나아갈 때,징기스칸은 기독교인들의 성지순례
를 자유스럽게 해주었다. 그는  모든 종교가 다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천
명하고 이일을  준행하자,교황 인노센트 4세는   몽고에 사절을 파송하였다.이때
파송된 신부가 카르피니(Fr. Plano Carpini) 신부다.(1246)

95)P.G. von Moellendorf
묄렌도르프는 독일인으로서 1884년에는 세간 고문관격으로 있었다.그는 1884년에
로스목사가 중국에서 선편으로 보낸 6천권의 성서를 인수하는데 예외적인 호의를
보낸 사람이다.그는  호레이스 알렌이 입국할때는  이에 대한 방해공작을 심하게
하기도 하였다.

100)W.H.Heron          
헤론은 선교사로서 1884년  6월 28일에 스크랜톤,알렌 내외와 함께 우리나라에서
처음 예배를  드렸다.그는 비롯 불허가  내려졌지만,원두우와 함께 1889년 9월에
영어와 기하등 서양 과학을 가르쳐 이 나라에 유익을 주기위해 서울에 학교를 설
립할 의사를 정부에 밝혓다.
4444

102)W.J.Hall            
홀 선교사는 감리교 선교사다.1894년 4월 6일에 평안도 관찰사 민 병석이 엄령을
내려 한 석진,송 인서, 최 치량,김 창식등이 잡혀가서 많은 매를 맞고 반 죽음이
되는 수난을 겪을  때,홀 선교사는  마페트 목사와  함께 이 사실을 서울에 있는
영국과 미국 공사에 알려 애쓰도록 하여 평양의 교인들이 석방되었다.

104)12신조              
인도 자유장로회에서 채용한 것을  차용한 것이다.이 신조의 특색은 강직한 칼빈
주의적 경향이다.성찬의  기념적 요소와 하나님의  절대성,그리스도의 대속적 화
해,성령의 이중적 기능과 교회론의 핵심성,그리고 동정녀 탄생,부활,재림의 엄격
한 신앙과 예정과 심판의 생생한 확신이다.

105)Nevius 방법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내의 수난과 선교방법의 설정을 서두르며,경
쟁하는 잘못을 피히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며,선교사들의 선교정책 설정을 위하여
존 네비우스 목사  부처를  총하여 두 주일동안 선교방법 원칙을 제공 받은 것이
다.이것은 강력한 자립성과 광법위한 순회선교,성서에 대한 강조가 그 기조다.

110)기독교 황국 선양연맹
괴산의 남기종 목사와  박규호 장로가 "황국신민으로서의 핵심을 관철"할 구실로
결성한 일제의 어용단체(1938).   국민의식의 부식과 그 와해에 비인도적으로 이
용되어짐.

112)대성학교            
한국 근대화의 작업이 한국 교회 자신의 손에 의해 진행되며 많은 사학이 설립될
때, 평양에 도산 안창호가 설립하여 기독교와 민주주의 정신, 그리고 민족의식을
더불어 배양하고자 함.

115)면려 청년회        
금주 운동, 절제 운동을  민족 구원의 차원에서 추진하려던 운동.  "멸망에 처한
민족을 구출하려는 기독교인의 역할 운운"(이양섭)한 통문.  금주금연 운동과 불
온문서 인쇄 등으로 수난.   안창호계의 수양동우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에 37.6 수양동우회 사건과 함께 타진되어 수난에 쫓김.

116)미이미교회(미이미교회)        
미국 북감리회의  처음이름.  1847년  중국에 포교하면서 한문으로 미이미회라고
표기함.  이후 1876년에  일본에 전래되면서 미이교회로 표기.  한국에서는 1885
년 4월에 아펜젤러가 상륙하면서 "미이미교회"로 부르다가 1906.6월에 "미감리회
"로 개칭.

117)배제학당            
아펜젤러가 설립.  1886.6.8 개교.  1887년에 정부인가되며 고종이 "인재를 배양
하는" 배재학당이라고 이름을 주었다.  교육 목적은 "박학한 교양인의 배양"이었
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많은 학생이 입학했으나 영어 교육 폐지 후 감소하기도
함.  학생 자조정책이 엄격하게 운영됨.

120)사립학교 령        
1908.8에 공포되어 기독교계의 사학들을 통솔 감독하게 되고, 언필칭 "정치와 교
육과의 혼효"를 마음대로 취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인해 예배의 경건 못지않
게 그 발전을 전심으로 바라던 교회 학교의 타격은 결정적이었다.

121)상제상서                  
1839년 정하상(정하상)이 지은 호교론서.  순한문(3644자)내려쓰기.  이 책은 정
하상이 기해교난 때 박해받는  교인 입장에서 박해 주도자 등에게 천주교의 교리
해설 및 변증을 곁들여 호소한 글로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가치가 높다.
122)선교 공의회        

127) 신학세계
  감리교 신학지(1916.2)  목적-1.조선교역자의 지식을  증진케할 책임 2.재정에
관심 3.교회일치에 관한 열정과 자세 4.토착화